■ 나의 한마디

 ≫ 그들(7인)은 역사에서 실패로 기록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일제강점기 해방 후 우리는 남북으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민족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 뒤에는 이념적인 갈등과 오래된 피해의식으로 인한 혁명의 꿈이 있었고, 사람이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욕구들 그 중 하나인 권력 욕망이 있었다. 우리는 과거 사람들이 꿈꾸던 이상적인 사회와 지금 꿈꾸는 사회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에서야 사회주의국가와 공산주의국가의 실패가 보이고 있어, 그것에 반대하는 세력이 다수지만, 과거의 삶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거대 자본가들에게서 우리의 삶을 되찾을 수 있는 평등함을 꿈꾼 이상적 사회로 비쳐졌을지 모른다. 나는 지금도 경제적 평등을 꿈꾼다. 분배를 꿈꾸고 증세를 통한 복지국가를 꿈꾸고 있다. 적당한 분배가 결국 경제적 풍요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단순하게만 설명해보자면 '한 사람이 100억을 갖고 있는 것보다, 천 명이 100억을 갖고 있는 것이 돈을 더 잘 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생각 역시 우리 한국사회가 제대로 겪어보지 못했고, 필자가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편향된 생각일지 모른다. 현재의 서구 성공사례를 보며 꿈을 키웠고, 아직 지식이 얕고 경험도 적다. 그리고 실패한다면 먼 미래엔 비웃음을 살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 그들이 추구했던 것과 내가 추구하는 것은 같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행복한 삶일 것이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갈등으로 인해 생긴 이러한 초기 남북분단 갈등엔 경제적 배경을 배제할 수가 없다. 2016년 기준으로 한국의 경제체제는 '신자유주의'다. 1970년대 석유 파동을 기점으로 경제가 침체되고 있는 이유를 국가의 규제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는 그것을 동의했다. 미래를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복지는 축소되었고 노동자는 점차 힘이 약해졌다. 기업의 수익성이 높아지면 국부를 창출하고 결국 개인의 삶이 윤택해질 것이라고 했지만 자본가들은 더욱 자본을 축적하기만 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가난해져가고 있다. 다시금 경제와 돈이라는 힘으로 과거 권력 중심의 사회로 역행하고 있다고 본다. 필자의 경제 방향에 대한 생각은 '사회민주주의'다. 하지만 너무나도 과제가 많고 어려운 길이 많다. 인구수 문제, 고령화 외 수만가지의 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사회 문제에 서고 있다. 저자는 '해방 3년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결정론적 시각'이라고 짚었다. 필자는 초기 한국의 통일에 힘 쓴 민족주의 여운형에 대한 복기를 위해 정리할 예정이다. 궁금한 다른 사람은 책을 직접 읽어보는 것을 권한다.


■ 목차

 1.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 프로젝트|여운형과 조선인민당

 2. 혁명으로 인민정부를 건립하라|박헌영과 조선공산당 

 3. 임정법통이냐, 단정이냐|송진우와 한국민주당

 4. 혁명을 위해 분단의 벽을 쌓다|김일성과 북조선공산당

 5. 단정으로 권력을 꿈꾸다|이승만과 독촉국민회

 6. 임정법통론으로 신민주국가를 건립하라|김구와 한국독립당

 7. 좌우가 공존하는 민족통일국가를 꿈꾸다|김규식과 좌우합작위원회

 8.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


■ 왜 읽었는가?

 ≫ 김구, 김규식, 여운형, 박헌영, 송진우, 김일성, 이승만 7인의 행적이 궁금하여

 ≫ 우리는 왜 민족통일을 하지 못하였는가? 그 이유는 무엇이며 현대사에 반영할 수 있는 참고 지식은 없는지

 ≫ 당시 소련과 미국간의 갈등은 무엇이고, 분단국가가 된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여

 

■ 7인의 정치

 ≫ 해방 후 3년은 7인의 정치가를 대상으로 일제강점 하 3년 동안의 갈등과 행적, 각자가 추구하던 미래를 풀어나간다. 민족주의, 공산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 모두 정치 성향이 달랐고 각자가 꿈꾸던 미래는 달랐다. 아래는 그들을 한 줄로 잘 표현했다.

 ≫ 김구가 꿈꾸던 국가 : 임시정부통론으로 세우는 신민주국가

 

 ≫ 김규식이 꿈꾸던 국가 : 좌우가 공존하는 민족통일국가

 

 ≫ 김일성이 꿈꾸던 국가 :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한 국가, 필요하다면 분단도 해야한다

 

 ≫ 박헌영이 꿈꾸던 국가 : 사회주의혁명을 통해 만든 인민정부

 

 ≫ 송진우가 꿈꾸던 국가 :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만들어져야 한다

 

 ≫ 여운형이 꿈꾸던 국가 :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한 민족 국가

 

 ≫ 이승만 : 권력을 위해서라면 단독정부라도 만들어져야 한다.


■ 당시 한국의 배경과 상황

 ≫ 한국은 38선을 중심으로 미국과 소련의 미,소 양국의 분할 점령이 시작되면서 급격히 변화했다. 특히 남한이 심했는데,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미군들의 주둔이 있었다.

 ≫ 해방 후, 한반도에는 소련군이 진주[각주:1]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소련군 진주가 더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그 이유는 소련군이 8월 8일 대일본 선전포고를 한 이후 빠른 속도로 진격해왔기 때문이다. 일제 당국도 8월 17일까지 서울을 점령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런데 소련군의 진군이 38선 부근에서 멈췄고, 남쪽엔 미군의 진주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국의 정세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좌우익의 시작이었다.

 ≫ 1945년 9월 8일, 미군 제24군이 인천항에 상륙했다. 일본군의 경계 속에 상륙한 미군은 해방군이라기보다는 점령군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이 날 미군을 환영하러 나왔던 한국인 두 명이 사망했다. 미군으로부터 호위경계를 요청받은 일본군이 발포한 것이다. 일본군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는 향후 미군과 한국인들의 관계를 암시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 미군의 진주 초기부터 미군이 한국인보다 일본인의 말을 더 신뢰하고, 일제에 복무했던 관료들과 경찰들, 한국민주당과 극우적 인사들의 말을 더 신뢰했다. 이러한 미군의 태도는 한국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방해가 되었으며 민족 단결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 1945년 12월 7일,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의안에 관한 보도가 나오면서 미국, 영국, 소련, 중국 정부와 협의한 신탁통치안과 임시정부수립이 나왔다. 한국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미국의 입장, 혁명 분위기의 한국에서 임시정부의 수립이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탄생시키기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소련의 입장이 절충된 결과였다. 신탁통치는 신생국가의 기능을 일부 제한하겠지만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 진행되므로 한국인들이 우려하듯 독립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남한의 주요 언론 <동아일보> 언론들은 실제와 달리 미국이 즉시 독립을 주장하고 소련이 신탁통치안을 주장했다고 보도함으로써 마치 신탁통치안이 모스크바 결의안의 전부인 것처럼 보도하며 결의안의 가장 중요한 '임시정부 수립' 결정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이는 반소련, 반공산주의에 입각한 악의적인 왜곡 보도였다.

 

▲ 1946년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

 ≫  1946년 3월 20일, 미, 소 양국이 남북에 각각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면서, 남북 간 대결이 본격화된 것이다. 2월 8일 북한에서 수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2월 14일 남한에서 조직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 미, 소 대결의 실체였다.  미소공동위원회는 모스크바 결의안에 입각해 미, 소 양국이 남북의 주요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해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임시정부 참여하에 4개국 신탁통치협약을 작성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  미소공위는 극심한 대립을 벌였다. 소련 측이 미국 사령관 하지의 성명과 임시정부 수립 후 반탁운동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한 우익들의 태도를 문제 삼고 나섰던 것이다. 미국 측이 제출한 협의 대상 명부도 문제를 일으켰다. 미국 측이 제출한 20개의 정당과 사회단체 가운데 우익은 17개나 된 반면, 좌익은 3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미 · 소 양측의 의견 대립으로 미소공위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결국 5월 9일 미소공위는 무기한 휴회를 선언하고 말았다

 ≫ 국제적 협정의 이행은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두 갈래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하나는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좌우합작운동이었다. 이승만의 주장은 민족통일국가의 수립을 포기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민족이 위기에 처하자 오직 정권의 탈취만을 노리는 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미 · 소가 남북으로 분할 점령하고 있는 현실에서 분단 세력의 등장은 그만큼 조국의 분단이 현실화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만약 이대로 민족의 분열이 극복되지 못한다면 단정 세력은 점점 더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좌우합작운동은 이러한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탄생했다. 그 시작은 중도좌파를 대변하는 여운형이었고, 파트너는 중도우파를 대변하는 김규식이었다. 그러나 합작운동을 방해하는 이는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이 있었다.

 ≫ 미국정부는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을 통해 입법기구 수립이 통과되자, 여운형과의 약속을 어기고 1946년 10월 14일 ~ 10월 31일까지 입법기구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를 강행했다. 선거법에 의하면 보통선거여야 했지만 사실상 세대주가 투표하는 제한선거였고, 일정한 납세액 이상을 납부하는 자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차별선거였다. 게다가 동, 면, 군, 도에 걸친 4단계의 간접선거여서 민주성을 보장받기도 힘들었다. 이를 통해 선거 결과는 이승만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이 각 지방의 선거를 관리하고 각종 탈법과 부정선거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 여운형 : 자주적 민족국가 프로젝트

 ≫ 한국이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었다. 한국의 해방은 연합군의 공로임은 분명하지만, 한국인의 공로도 들어있었다. 우리 민족이 스스로 독립할 자격과 능력이 충분함을 보여줘야 했다. 여운형은 국내 세력이 총 집중해 일제의 식민지 권력을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에 위치한 관저[각주:2]에서 엔도를 만났다. 엔도는 일본의 항복 소식을 알리면서 여운형에게 한국의 치안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여운형은 자신이 치안을 맡는 조건으로 다섯 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1. 조선의 정치범과 경제범을 석방할 것

 2. 서울의 3개월분 식량을 확보할 것

 3. 치안 유지와 건설 사업에 아무런 구속과 간섭을 하지 말 것

 4. 학생의 훈련과 청년의 조직화에 간섭하지 말 것

 5. 조선 내 각 사업장에 있는 일본 노무자들을 우리의 건설 사업에 협력하게 할 것

 

 ≫ 이 5가지의 내용은 자신의 활동이 단순히 치안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란 선언이었다. 여운형은 치안과 함께 한국의 신국가 건설 사업에 착수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다. 엔도는 단순히 치안유지만 원했지만, 여운형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한국인들에게 명망이 높은 여운형이 치안을 맡아주겠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상황이었다.

 ≫ 여운형은 즉시 한국의 치안과 건국 사업을 주도할 조직,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맨 처음 한 일은 한국인 정치범과 경제범의 석방이었다. 그리고 건국치안대와 식량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한국의 치안과 식량 문제에 적극 대처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해방 후 2~3주라는 짧은 시간 동안 치안과 식량 문제 해결에 큰 성과를 냈을 뿐만 아니라, 민족국가 수립이라는 전 민족적 열망을 거대한 흐름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연합국 중에 어느 누구도 우리 민족의 자치 능력을 믿지 않았지만, 한국인들은 건국 준비위원회를 통해 자신의 자치 능력을 세계에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 여운형은 일찍 공산주의를 받아들였지만 그것은 민족해방 운동의 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경제적 평등에 깊이 공감했지만, 계급투쟁이나 전체주의적 운동 방식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진보적 민주주의나 인민적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였다. 하지만 의미까지 같지는 않았다. 여운형은 현재 한국에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혁명의 방식은 공산주의의 계급혁명이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혁명이며,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민의 경제적 해방과 자유, 평등의 이념을 확대하고자 했다는 측면에서 여운형의 민주주의는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와 유사했다.

 ≫ 여운형은 겅제적 측면에서 주요 산업 시설의 국유화와 토지 문제의 수평적 해결을 통해 봉건 잔재의 청산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는 주요 산업 시설 이외에는 사적 소유를 인정해 개인적 창의와 이윤 추구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발전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토지개혁으로 토지를 잃은 지주에 대해서도 충분한 생계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 한국은 두 가지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상당한 기간 동안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유지해야 했다. 낙후된 농업국에서 고도의 공업국으로 빠른 발전을 도모하려면 신국가의 독립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연합국의 경제적 원조가 필요하며, 계획경제를 수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 여운형은 민족해방을 완수하고 신국가를 건설하는 데 좌우익의 구별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민족통일전선에서 제외되는 것은 반민족 세력이면 족하다고 믿었다.

 ≫ 건국준비위원회에 들어오려던 우익들이 갑자기 불참을 시작했다. 이유는 미군의 진주 소식 때문이었다. 굳이 좌익들이 자리잡고 있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정치 세력화가 가능했다고 판단했다. 9월 1일 조선국민당 16일 한국민주당 등 우익 정당이 결성되었다. 미군의 진주 소식과 함께 여운형은 계획했던 인민대표회의를 현실화 해 전국인민대표자대회의를 열었다. 미군 진주 이전에 과도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수립을 서둘렀다. 정부 수립을 서두르려고 건국준비위원회 관계자와 재건파 공산당, 일부 연락이 가능한 지방 대표들로 채워지는 데 그쳤다. 이로 인해 조선인민공화국은 심각한 대표성 논란에 휩싸였다. 조선인민공화국은 전체가 아니라 일부만을 대표하는 정부가 되었다.

 ≫ 미군은 조선총독부를 대신해 미군정청을 설립하고 이것이 남한의 유일한 정부임을 천명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남한에서 가장 잘 조직되고 영향력있었으나 미군정부는 조선인민공화국을 '정부를 사칭하는 일개 괴뢰정당'으로 취급했다. 여운형의 취급도 마찬가지였다. 미군 사령관 하지는 여운형을 일제의 돈을 받아 정권을 가로챈 친일 사기꾼인 양 취급했다. 그 이유는 미군정 주변 통역사와 고문으로 활약하던 극우 인사들과 한국민주당의 악선전이 작용한 결과였다. 미군이 조선인민공화국을 탄압할수록 그 안에는 탄압에 잘 훈련된 공산주의자들만이 남게 되었다. 결국 박헌영의 공산당파는 이를 중심으로 인민공화국의 중앙과 지방을 모두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박헌영은 정치적으로 최고의 수혜자가 되었다.

 ≫ 여운형이 민족의 역량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사이, 경쟁자들은 이미 조선공산당, 한국민주당 등 하며 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세력의 결집보다 민족의 단결을 우선시했던 여운형은 이 사태에 절망했다.

 ≫ 1945년 10월 5일, 주요 정당들이 만났고, 좌익과 우익 세력들은 각각 인민공화국과 중경의 임시정부를 내세우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논의를 전개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여운형은 달랐다. 그는 민족의 통합을 위해서라면 당장이라도 인민공화국을 해산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여운형의 발언으로 분위기는 급반전했다. 그 결과 10월 10일 '각정당통일위원회'라는 상설회의체가 탄생했다. 이곳의 정당과 단체는 43개에 달했는데 38선 문제와 일본인 재산 문제 등의 긴급 문제를 논의하며 민족의 대동단결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대변했다. 그러나 10월 16일 이 위원회는 힘을 잃었다. 이승만이 귀국한 것이다. 이후 이 임무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로 전환되었고, 이승만에게 모두 넘겼다. 이후 이승만은 독선적이고 편파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결국 여운형과 박헌영은 독립촉정중앙협의회를 탈퇴했다.

 ≫ 1946년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한 휴회되자, 이승만은 단독정부를 주장, 여운형은 좌우합작운동을 벌였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하며 좌우 남북을 묶는 전달자 역할을 자임했다. 특히 그는 주요 정세의 변화 때마다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해 김일성(1912~1994)을 비롯한 북한 지도자들과 협의해왔기 때문에 북한과의 협상에 자신이 있었다.

 ≫ 미군정부는 좌우합작위원회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는데, 그 까닭은, 미군정부가 만든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 남한 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했고 우편향적 성격으로 협상 자리에서도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것도 있었으며 중도 세력까지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통해 1946년 7월 여운형과 김규식의 노력으로 좌우합작운동은 정당 · 사회단체 간 연석협의체로 발전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좌우익은 각각 5명씩 좌우합작위원 10인을 선출되었다. 그러나 박헌영은 우익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들을 제시해 좌우합작을 방해했다. 이는 사실상 민족통일전선을 부정하고 좌우합작을 깨뜨리겠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8월 3일, 이를 타파하기 위해 조선공산당, 인민당, 조선신민당을 하나의 대중정당으로 통합하는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은 인민당과 조선신민당에 침투해 있던 공산당 프락치를 동원해 양당을 흔들었다. 공산당 프락치들은 무조건적 합당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이는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여운형은 크게 분노했다. 그는 박헌영의 민족 분열적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좌우합작의 주요 축 하나인 세력이 반대하는 한, 여운형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 여운형은 다시 좌우합작 좌익의 5원칙과 우익의 8원칙을 절충한 7원칙을 발표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한 삼상회의 결정에 의해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2. 미국,소련 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 것.

 3. 토지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 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며 시가지의 기지 및 대건물을 적정 처리하며 주요 산업을 국유화해 사회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현하며 통화 및 민생문제 등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4.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에서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입법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해 실시케 할 것.

 5. 남북을 통해 현 정권하에서 검거된 정치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의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6. 입법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 방법, 운영 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해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7. 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결사, 출판, 교통, 투표 등의 자유가 절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 그러나 좌우합작 7원칙은 좌우익 양측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좌익에게 문제가 된 것은 입법기구 설치 조항이었고, 우익에게 문제가 된 것은 토지개혁 조항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입법기구 설치 조항이 단정으로 가는 도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운형 측을 극도로 비난했다.

 

 ≫ 김규식과 여운형은 7원칙에 서명하면서 과도입법기구 수립의 조건으로 세 가지 전제 조건을 내세웠다. 이와 함께 그들은 미군정으로부터 몇 가지 조건을 보장받았다.

 1. 좌우합작위원회가 입법기구 의원 2분의 1을 추천할 권한

 2. 간접선거로 치러질 의원선거에서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는 대의원이 될 수 없다.

 3. 간접선거 방식에서 민주주의 보장 약속이나 선거 감시원의 파견, 빠른 시일 내에 직접선거에 의한 입법기구로 대체할 것.

 

 ≫ 여운형과 김규식은 입법기구가 미군정의 자문기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한국인의 자치기구가 되기를 원했다. 과도입법기구가 좌우를 대변하는 한국인의 진정한 자치기구가 되면 이를 기반으로 미소공위를 재개해 임시정부 수립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군정부는 7원칙이 통과되는 순간 좌우합작위원회를 배신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입법기구 수립 조항이었을 뿐, 좌우합작위원회가 내세운 전제 조건이나 요구 조건이 아니었다.

 ≫ 미군정부는 1946년 10월 14일 ~ 10월 31일까지 입법기구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를 강행했다. 선거법에 의하면 보통선거여야 했지만 사실상 세대주가 투표하는 제한선거였고, 일정한 납세액 이상을 납부하는 자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차별선거였다. 게다가 동, 면, 군, 도에 걸친 4단계의 간접선거여서 민주성을 보장받기도 힘들었다. 이를 통해 선거 결과는 이승만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이 각 지방의 선거를 관리하고 각종 탈법과 부정선거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 여운형은 입법기구 설립을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미군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여운형은 12월 12일 개원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참가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배신자의 딱지를 가지게 되었고 그의 정치적 위상은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을 만큼 추락했고 우파와 좌파 모두에게 배척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결국 여운형은 12월 4일 전격적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 여운형 암살

 

 ≫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혜화동 로터리에 들어설 무렵, 파출소 앞에 있던 경찰 차 한 대가 갑자기 차를 막아섰다. 충돌을 피하려고 차가 속도를 줄이는 순간 한 사내가 뒤쪽 범퍼로 뛰어올라 세 발의 총을 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경호원 박성복이 도망가는 사내를 뒤쫓았지만, 모퉁이에서 제지당하고 말았다. 그를 막은 사람은 동대문경찰서 소속의 한 경찰이었다. 범인은 사라졌다.

 ≫ 사건의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미국 소련 공동위원회를 통해 확대된 여운형의 정치적 영향력을 두려워했던 세력이 암살한 범인의 배후라고 추측할 뿐이다. 사건이 발생하자 미군정부는 여운형의 집을 수색했다. 그런데 수색 목적은 암살범을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북한과 연락해본 자료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한의 대정객 여운형에 대한 미군정부의 마지막 대접은 겨우 그 정도였다.

 ≫ 여운형의 죽음과 함께 민족통일국가의 꿈도 종말을 맞았다.

 

 

 

■ 여운형 요약

 ≫ 일본은 여운형에게 치안을 요구했으나, 한국을 위해 일본에게서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 정치범, 경제범을 석방하고 식량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치안과 식량문제에 대처했다.

 ≫ 여운형은 공산주의적 발언을 했었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공산주의자의 경제적 평등은 공감했으나, 그가 꿈꾸던 사회는 선거가 있는 민주주의 사회였다.

 ≫ 여운형은 주요 산업 시설만을 대상으로 봉건 잔재 청산을 제시했다. 다른 산업시설은 자본주의적 발전을 원했다. 그리고 토지를 잃은 지주에겐 생계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 미군 진주 소식이 일자, 여운형은 정부가 미리 존재하는 것이 정치에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정부 수립을 다급히했다. 그렇게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급히 만든 정부는 전체가 아닌 일부만을 대표하는 정부였다. 남한에 도착한 미군은 미군정청만이 유일한 정부라고 주장했다.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은 미군 진주로 해체되었다. 여운형이 만든 조선인민공화국은 괴뢰정당 취급받았다. 조선인민공화국은 이로 인해 여운형에서 박헌영쪽으로 세력이 기울었고 공산주의로 변질되었다. 여운형은 박헌영에게 잠식당한 인민공화국에 거리를 두면서 독자적인 세력화를 꿈꿨다.

 ≫ 1946년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한 휴회되자, 이승만은 단독정부를 주장, 여운형은 통일을 위한 좌우합작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박헌영이 이를 방해했다.

 ≫ 8월 3일, 이를 타파하기 위해 조선공산당, 인민당, 조선신민당을 하나의 대중정당으로 통합하는 것을 제안했다.

 ≫ 여운형과 김규식은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고, 미국으로부터 입법기구 2분의 1을 약속받았고, 반대파를 무릅쓰고 승인하였으나 미군정부는 이를 어겼다. 그로 인해 여운형은 배신자 딱지를 가지게 되었고, 1946년 12월 4일 정계를 은퇴했다.

 ≫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혜화동 로터리,  파출소 앞에서 여운형은 암살당했다.

 


  1. 진주 : 군대가 처들어가거나 파견되어 주둔함. [본문으로]
  2. 관저 : 정부에서 장관급 이상의 고관들이 살도록 마련한 집. [본문으로]

  파시즘과 나치즘

(좌) 이탈리아 베니토 무솔리니, (우)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관련글 : [인물, 아돌프히틀러] 2차 세계대전은 왜 일어난 것인가?


■ 파시즘의 정의

 ≫ 1919년 이탈리아의 B.무솔리니가 주장한 국수주의적·권위주의적·반공적인 정치적 주의 및 운동을 말한다. 원래는 '묶음'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파쇼(fascio)에서 나온 말이었으나, 결속·단결의 뜻으로 전용(轉用)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20년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45년까지 세계 여러 국가들 사이에서 나타났던 독재적 정치․경제․사회사상․정치체제의 총칭이기도 하며, '결속주의'라고도 불린다.

 ≫ 본래 파시즘의 초기 등장 배경 이전엔 생디칼리즘(syndicalisme)부터 시작되었다. 생디칼리즘의 '생디카(syndicat)'는 '조합'을 의미하는데, 이 조합은 노동자 조직을 뜻했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경제 분야에서 '직접 행동'을 주장하며 정부를 쓰러뜨리고 노동조합이 생산의 관리권을 장악해야 착취 없는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당시 나라의 경제 독점을 이룬 것은 유대인들이었다. 특히나 독일인들은 이러한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노동을 착취하는 인종주의 갈등이 있었는데, 그들이 유대인이었다. 이 이야기는 아래의 독일 파시즘의 배경에서 자세히 다룬다. 이와 같은 반제국주의적 사상과 반자본주의 사상이 혼합된 것이 초기 파시즘이었으나, 점점 반공주의 가치가 심화되면서 극우적 사상으로 변질되었다.


■ 어떤 것을 파시즘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 정치적으로 급진주의[각주:1]를 일으키는 나라에서 흔히들 발생하는데, 국수주의[각주:2] 즉, 민족주의에서도 흔히 발생할 수 있으며, 그 외에도 역사속에서 반공주의나 전체주의[각주:3] 등에서도 발생했다. 파시즘은 한 마디로 하나의 이념 또는 사상으로 시민들을 묶어 하나로 통치하는 것을 일컫는다. 독일의 파시즘연구가 E.놀테는 파시즘을 유럽적인 현상이라고 이해하여, 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 즉 1919∼1939년이라는 기간의 특유한 현상이라고 지적하였다.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 선 파시즘론에서는 현대사회의 모든 반동적 독재정치운동을 파시즘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파시즘을 지칭한다.


■ 우리에게 주는 파시즘에 대한 시사점

 ≫ 파시즘은 본래 국가와 세계적인 대공황에서 비롯되었다. 즉, 국가의 경제적 위험과 시민들이 살아가기 위한 기본 의식주를 다른 나라에서 뺏어와야 한다는 국가자본주의의 경제사상이다. 이러한 파시즘은 한국에도 주는 시사점이 있다. 위의 정의에서도 앞서 언급했듯, 국가이기주의와 북한과의 대립과 갈등으로 인한 국가이기주의 현상이 발생하고 있으며, 남한과 북한이라는 민족주의로 인한 국수주의 및 북한 핵 위협에 의한 비슷한 현상들이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한국은 파시즘에 이르는 경제적인 이념이 발생하지는 않아 파시즘으로 정의하기는 어려우나 몇몇 국민들에게서 김정일, 김정은에게 선동당하는 북한국민들은 모두 죄악이며, 세계에서 받아들이면 아니하고, 이를 감싸는 행위는 죄악이며 물리쳐야 하는 악의 존재, 그리고 스스로 붕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동일국가에 정치체제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각기 한 나라의 시민이지만 사회적으로 구제할 방법이 없다는 국가이기주의 사상이 발현되고 있다. 북한과의 분단갈등이 70년도 안되었지만, 천년역사가 된 것 마냥 '현실적인 타협'이라며 선동하는 것이다. 필자는 물론 북한은 독재체제이며, 남한이 유화정책을 펴는 것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 시대적 사상을 통해 느끼는 바가 달라질 수 있으며 우리도 현대적인 파시즘을 선동당할 수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본인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위대한 사람이라고 무조건적으로 칭찬일색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본다. 박정희가 자행한 부정부패와 기만성을 보기 보다는 그 정권 때 있었던 경제 성장만을 기억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주제로 선동한다. 나쁜 것은 일체 말하지 않고, 반대파 의견은 좌파, 빨갱이라고 치부하는 것이다. 이는 심리적으로 공감력부재, 물질주의, 이기주의 성향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 또 다른 것은 서구인들에게서 나온 '자연도태설'이다. 이는 특수한 환경 하에서 생존에 적합한 형질을 지닌 종이, 그 환경 하에서 생존에 부적합한 형질을 지닌 종에 비해 생존과 번식에서 이익을 본다는 이론이다. 불쌍한 인민들은 죽어야만이 너무 많아진 인구로 인해 나타날 치명적인 영향을 걱정하며 자연이 스스로 과잉 생물을 주기적으로 제거한다는 것이다. 이는 유럽적, 백인 우월주의적 '정당화'일 가능성이 높다는 시사가 있다.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유리하며 자연도태설을 통해 자신들은 절대로 피해보지 않는다. 그렇지만 수 많은 지식인이나 정치가, 국제기구 책임자들이 이를 옹호했던 일이 있으며 현대 사회에서도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 이를 지지하는 국가이기주의적 성향이 나타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비판하는 노예제도도 이러한 이론을 일부분 근거로 가져와 정당화 했던 과거가 있었다.

 ≫ 독일의 파시즘 또한 처음엔 경제적 이념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그것이 변질되어 갔다는 점을 시사하여야 한다. 보통 우리가 일컫는 파시즘은 파시즘 후기에 변질되어 버린 '후기 파시즘' 즉 독일의 나치즘을 일컫는 말이므로 함부로 파시즘이란 이야기를 꺼내 누군가를 선언 또는 정의하다간 큰 논쟁이 벌어질 수 있다.


■ 독일 파시즘의 발생 배경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암살과 1차 세계대전 발발

 ≫ 파시즘은 18세기 말부터 누적되어 온 사회적 불안과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만성적 공황 및 전승국과 패전국을 막론한 정치·사회적 불안에서 초래된 각종 혁명적 기운에서 대두되었다. 먼저 독일의 파시즘부터 살펴본다.

 ≫ 1차 세계대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의 옆 나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다수 민족이 살고있었는데, 헝가리 왕국안에서 조차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루마니아인 등 다수의 민족집단이 흘러념쳤다. 그 중 세르비아 민족주의자가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암살것이다. 이로 인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는 도화선 역할을 한다. 암살 4주 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당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이미 여러 인종들이 섞인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몹시 싫어했는데, 전쟁 발발 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에서 독일의 뮌헨으로 도피한다. 당시 히틀러는 25살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옆 나라, 당시 독일은 나폴레옹, 즉 외국 군대가 독일땅을 침범한 적이 없어 전쟁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독일에선 자동차가 생겨났고 현대화가 진행중이었고 20세기 초반 유럽은 평화와 번영이 오는 시대였다. 독일은 제2의 산업국으로 부상하고 있었으며 군대는 강력했다. 뮌헨은 극우적 국가주의 정서가 강하게 들끓었고 히틀러 또한 독일 전쟁에 참여했다.

 ≫ 오스트리아vs세르비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세르비아의 동맹국인 러시아가 움직이려고 하자, 독일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러시아의 동맹국인 프랑스에도 선전포고를 한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vs 독일, 터키, 오스트리아 의 전쟁이었다.


■ 독일 파시즘의 발생 배경 -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

 ≫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 6월 28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베르사유조약이 체결되었다. 파시즘의 원인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 중 가장 큰 원인은 2가지로 해석된다. 첫번째는 해외식민지를 잃은 것이였다. 독일은 아프리카 탄자니아와 토고, 카메룬, 나미비아 등을 식민지로 삼고 있었는데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이러한 식민지를 모두 뺏겨버렸다. 두번째는 전쟁도발의 책임을 물어 연합국 손해에 대한 배상지불이 부과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식민지가 뺏겨 경제는 점차 침체된 상황에서 1921년 5월 1일 배상위원회가 독일에 1320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금으로 갚을 것을 결정했을 때 이 문제가 절정에 다다랐다. 당연히 독일은 이 돈을 갚을 능력이 없었다. 경제적 위기에 봉착하자, 독일 국민은 베르사유 조약과 배상금에 분노했다. 독일은 반-유대주의, 베르사유 조약을 협상하는 정부는 독일시민이 아닌 국가 반역자라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생겨난 이념이 파시즘이며, 선동가로 맥주아돌프 히틀러가 나타났다.


■ 독일 파시즘의 발생 배경 -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 1차 세계대전 패전 이전부터 유대인은 독일사람 중 3%에 불과하였으나, 경제의 40~50%를 독점하고 있었다. 독일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경제적 패배의식에 물들어 있었다.  현대에 시사해보면 우리나라도 경제를 잡고있는 것이 다른 민족은 아니지만, 대기업들을 대상으로 대항하는 세력은 보기 힘든 구조를 생각해보았을 때 그 시기가 유대인들에게 반하는 세력을 꽃피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실감캐해주는 예일 수 있다. 오히려 독일은 1차 세계대전 직후까지 유대인에게 관대했고 유럽국가들이 반유대주의 사상이 더 강했다. 독일계 유대인 금융재벌인 막스바르부르크는 히틀러에게 정치자금까지 제공한 걸로 유명하다. 또한 독일은 유대인들에 대해 차별을 하지 않았으며 유대인의 독립국가 형성에 신경을 썼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유대인 과학자들의 정보망 교란이 있었고, 독일이 친 영국 성향의 유대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려하자 당시 독일의 경제를 잡고 있던 유대인들이 독일을 굴복시키기 위해 독일의 수출을 분쇄시키거나 독일상품 불매운동을 벌인다. 또한 공산당활동에 유대인들의 간접협조 혐의와 1936년 프랑스주체 독일 외교관을 암살하자 반유대감정으로 독일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독일엔 국수주의, 즉 인종주의가 발현된다.


■ 반 유대주의는 전체 유럽국가의 짓이며,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학살까지 내몰려고 하지는 않았다(?)

 ≫ 유대인 600만 학살은 조작 확대 되었다는 설이 감돈다. 실제로는 60만정도이며, 그것도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과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대다수라는 것이다. 25(7.6평)평방미터 되는 곳에 7~800명을 집어넣고 독가스로 죽였다는데, 실제론 그런 계산이 나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광객들에게 전시되는 아우슈비츠 가스실과 소각로는 194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스탈린의 소련군 또한 폴란드 유대인을 많이 죽였으며 나중에 이것마저 독일의 만행으로 뒤집어 쓰게 된다.

 ≫ 1933~1941년 까지 독일은 유태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독일의 밀텐슈타인이 유대인이주를, 하인리히 히믈러 SS사령관은 시온주의자의 대아랍 지하군사 조직인 '하가나'의 활동을 도왔다. 1942년 요제프 괴밸스의 본격적인 유태인박해 주장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유대인 학살보다는 그들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섬으로 보내 그들만의 국가를 형성시키고 나중에 독일의 우방으로 삶으려 했다.


■ 이탈리아 파시즘의 발생 배경 - 18세기 부터 1차 세계대전의 흐름

 ≫ 통일 전까지 이탈리아는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서로 성격이 다른 여러 나라들이 모인 지역의 이름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에서 시작한 자유와 평등사상이 전파되면서 이탈리아에도 외세의 지배를 물리치고 자유 민주 국가를 건설하자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다. 1870년, 이탈리아는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었지만 다른 방식과 문화 속에서 살아온 각 지방의 이탈리아인들은 하나로 통합되지 못했다. 게다가 경제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소외된 남부 지역의 농민과 빈민들의 반란이 이어졌고,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되었음에도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하자 이에 따른 경제 침체와 정치 불안이 심해지면서 이탈리아는 혼란에 휩싸이고 만다.


■ 이탈리아 파시즘의 발생 배경 - 베니토 무솔리니의 탄생

 ≫ 1883년 7월 29일 베니토 무솔리니가 태어났다. 무솔리니 일가의 아버지는 사회주의자로 당의 화합에 자주 데려갔다. 무솔리니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했다고 한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폭력을 써서 길을 터간다고 하는 수단, 후의 이탈리아 파시즘의 씨앗이 보였다. 무솔리니는 10살 무렵부터 식사 문제로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켰으며, 11살 때엔 학급의 친구를 칼로 찔렀다. 26살 때 무솔리니는 사회당계의 신문 라 로타 디 크랏세의 편집장으로 취임하여 선동적인 기사를 써 나갔다. 대중들이 어떤 일이든지 믿을 수 있게 하는 법을 배웠으며, 거짓말 기사를 써도 시민들이 믿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만큼 대중은 잊는 것도 빠르니까. 눈치채기 전에 정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무솔리니는 미디어를 통해 대중을 컨트롤하는 방법을 택한 파시스트다.


■ 이탈리아 파시즘의 발생 배경 - 1차 세계대전과 무솔리니의 정치

 ≫ 1915년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하자, 평화주의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는 소집에 응하여 1년 반동안 알프스 산 중에서 전쟁에 참가한다. 1917년 2월 수류탄의 폭발로 무솔리니는 전신에 40곳에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입으나, 후에 선동 정치에서 그는 폭발의 순간을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며 포장 정치를 하게 된다. 종전 후 1919년 이탈리아는 대혼란에 빠졌고 내전의 고비를 겪었다. 노동자들의 폭동과 파업이 연이었고 이탈리아 중산층들은 국기를 대신해 공산주의 깃발이 걸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우려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그는 이 공포를 이용하여 공산주의자를 제거하기 시작했고, 법과 질서의 회복과 실업률의 저하를 막는 것을 약속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무솔리니는 퇴역군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 39살의 무솔리니는 인민을 다스리는 멍청한 정치가들의 목을 조르겠다고 선언하고 의회의 해산과 무솔리니의 수상 임명을 국왕에게 요구할 것을 선동했다. 이렇게 무솔리니는 이탈리아는 내셔널리즘의 호소를 통해 대중적 지지를 획득하였고, 정치와 경제의 긴밀한 협동체계를 꾀함으로써 파시즘을 창출하였다. 무솔리니는 로마진군을 행하여 계급 개념 위에 민족 개념을 두고 ‘아래로부터 형성, 조직된 국가’임을 주장하였다. 1933년 1월에는 독일 나치스정권과 손잡고 에티오피아 침략, 국제연맹 탈퇴, 40년에는 독․이․일 3국 동맹체결을 거쳐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도국이 되었다.


■ 독일의 파시즘(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 나치즘과 파시즘은 모두 사회주의 세력 성장에 반대했고, 중산층의 지지를 얻었으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침략전쟁을 시도하여 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었으며, 나치즘은 여기에 인종차별까지 했다. 둘의 공통점은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경제적 공황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둘 다 초기에 퇴역군인을 통한 무력을 이용했다. 



독일 파시즘 출처 및 참고 : http://tip.daum.net/question/2993734

https://www.youtube.com/watch?v=wp9FnJhLZs0
https://ko.wikipedia.org/wiki/%ED%8C%8C%EC%8B%9C%EC%A6%98
https://www.youtube.com/watch?v=b2h20vxX2m4
http://utopiand-reamers.tistory.com/58


이탈리아 파시즘 출처 및 참고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57179&cid=47315&categoryId=47315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07750&cid=43041&categoryId=43041

https://www.youtube.com/watch?v=v56IHdQ67Sc

http://bobeathaja.tk/%ED%8C%8C%EC%8B%9C%EC%A6%98%EA%B3%BC-%EB%82%98%EC%B9%98%EC%A6%98%EC%9D%98-%EB%9C%BB%EA%B3%BC-%EC%B0%A8%EC%9D%B4%EC%A0%90-%EB%B9%84%EA%B5%90/


  1. 급진주의 : 사회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현재의 사회 제도나 정치 체제 관행 따위를 급격하게 변혁하려는 주의. [본문으로]
  2. 국수주의 : 편협된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극단적인 국가주의, 타 민족, 타 국가에 배타적이거나 초월적 성격을 지닌다. [본문으로]
  3. 전체주의 : 개인은 전체 속에서 비로소 존재가치를 갖는다는 주장을 근거로 강력한 국가권력이 국민생활을 간섭·통제하는 사상 및 그 체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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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한마디

 ≫ 아인슈타인, 그는 암기식, 주입식 교육을 싫어했다. 아인슈타인에 대한 책은 창의적 교육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예가 아닐까 싶다. 그의 이러한 창의적 재능은 스위스 교육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한국도 함께 본 받았으면 좋겠다. 암기식/주입식 교육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단기적인 효과가 클 뿐 나이가 들어서는 다시 외워야한다는 점일 것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를 회상해보면, 어릴 때 주입식/암기식 교육에 지쳐 공부를 안 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릴 때 그렇게 싫어했던 사회와 역사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 그 때의 교육이 시험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고, 내가 나이가 먹어서도 수학과 영어 정도가 필요할 뿐 사회에서는 필요없다는 어린 지식을 바탕으로 공부했던 듯 싶다. 그 이후로 나이가 점차 들면서 실제 사회에 나와 사회와 정치, 역사에 관련 없는 일을 하고 있지만서도 이렇게 블로그로 포스팅하고 그에 대한 책을 읽고 문학을 감상하는 내 자신을 돌이켜보면, 어릴 때 좀 더 재밌게 공부했다면 나라는 사람이 좀 더 바뀌었을까 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 목차

 1. 지진아 혹은 천재

 2.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우등생이 될 자질이 없다.

 3. 특허국

 4. 기적의 해

 5. 빛은 휘어진다

 6. 망명

 7. 제2차 세계대전


■ 왜 읽었는가?

 ≫ 위대한 과학자로 알려진 아인슈타인, 하지만 정작 스스로 알고 있는 부분이 없기에

 ≫ 핵 개발 및 원자폭탄을 만든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자. 인물에 대한 지식 습득.

 ≫ 1, 2차 세계대전에 대한 필자의 관심으로 인해


■ 내 마음대로 책 내용 3줄 요약

 ≫ 아인슈타인은 철학자가 되고 싶었했고, 어린 나이부터 똑똑했지만 주입식 암기식 공부를 싫어했고 관심있는 분야만 공부했다.

 ≫ 아인슈타인은 혼자서 만들어진 사람이 아니였다. 처음부터 환경이 좋진 않았지만 그의 환경은 토론할 수 있는,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지인이 함께였다.

 ≫ 1905년 아인슈타인에 의해 원자와 분자의 존재가 밝혀지고, 광전기를 발견하여 레이저와 TV의 기초가 되며 상대성 이론을 통해 핵 분열 기술이 개발된다.


■ 아인슈타인의 생애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879년 3월 14일, 독일 남부의 소도시 울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헤르만 아인슈타인과 어머니 파울리네 코흐는 유대인이었지만, 두세 세대를 거치는 동안 독일에 동화되어 유대계적 문화나 관습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 헤르만은 수학에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이었고, 당시 독일의 반유대주의적 정서로 인해 대학 입학 허가를 받지 못하여 상공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유년 시절 학교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놀림을 받았는데, 그때 처음 자신이 이질적 존재임을 느꼈다고 한다. 이런 일에 외톨이적 기질이 더해져 아인슈타인은 평생 이방인으로 살아간다. 

 ≫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 매우 조용한 아이였다. 시끌벅적한 사촌들 틈에서 늘 조용한 자리를 찾아가 혼자 노는 외톨이였다. 또한 두 살이 지나서야 간신히 말을 시작했고, 다섯 살이 되어서야 말을 깨쳤을 만큼 늦된 아이였다. 부모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지진아’로 여겼는데, 하녀들도 마찬가지여서 그를 ‘멍청한 아이’라는 의미의 ‘데페르테(depperte)’라고 부르곤 했다. 어린 아인슈타인은 크게 주눅이 들어서 무슨 말인가를 하기 전에 꼭 여러 번 모든 할 말을 연습하고 입 밖에 내곤 했다. 훗날 위대한 과학자가 된 이후에도 그는 입 속으로 여러 번 말을 반복해보고 말하거나, 중요하거나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는 반드시 두세 번씩 반복해 말했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쉽게 성을 내고 잘 토라지곤 했는데, 화가 날 때면 얼굴이 하얗게 질려 손에 잡히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던졌다. 다섯 살 때는 가정교사에게 의자를 던져서 가정교사가 놀라 달아난 적도 있었다

 ≫ 그가 과학자로서 성장하는 데 첫 번째 토대가 되는 중요한 경험, 처음으로 느낀 자연의 경이로움은 너댓 살 무렵에 찾아왔다. 잔병치레 때문에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아버지가 가지고 놀 ‘특별한 장난감’ 하나를 쥐여 준 것이다. 그 물건은 나침반이었다. 그때까지 아인슈타인은 물건을 만지거나 접촉해야 물건이 움직인다고 믿었는데, 나침반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움직여도 결국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늘 한 방향으로 돌아오는 나침반 바늘은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안겨주었다.

 ≫ 어린 시절 늦되었다는 일화들 때문인지, 아인슈타인에 대해서는 낙제생에서 천재 과학자가 되었다는 신화가 흔하게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여섯 살 때 가톨릭계 학교인 페테르슐레에 입학했다. 학업 성적이 특출하지는 않았지만 과학과 수학만은 매우 우수했다. 성적이 나쁜 과목은 그가 전혀 관심 없는 분야인 데다, 주입식, 암기식 교육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하나하나 문제를 차분히 생각하고, 그에 대해 답을 하기 전에 곱씹는 버릇이 있던 어린 아인슈타인에게 주입식 교육은 곤혹스러웠을 뿐이었다. 반면 수학이나 과학 교과서의 내용을 탐색하고 증명하는 데는 크게 흥미를 느꼈다. 초등교육 시절부터 그는 단순히 교과서적 증명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증명법을 찾으려고 늘 생각했다. 친구들과 놀러 나가지도 않고 온종일 방 안에서 답이 나올 때까지 자신이 만든 증명을 입증하는 데 몰두했다.

 ≫ 독일 남부 지방에서는 목요일에 가난한 유대인 이웃을 초대하여 저녁을 대접하는 전통이 있었다. 탈무트는 그 전통에 따라 목요일마다 아인슈타인의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과학 책을 가져다주고, 당시로서는 현대적인 책에 수록된 여러 과학적 증명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탈무트가 가져다준 책 중 특히 아인슈타인을 사로잡은 책은 기하학 책이었다. 고작 열두 살의 어린 아인슈타인은 유클리드의 평면기하가 소개된 작은 책자를 밤낮으로 읽고 또 읽으며 성경처럼 소중히 여겼다. 탈무트는 아인슈타인이 수학과 과학 문제들을 하나씩 통달해 나가자, 다음으로는 칸트, 흄, 에른스트 마흐 등의 철학 책들을 가져다주었다. 아인슈타인은 그중에서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좋아했는데, 그의 철학적 사고의 기반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아인슈타인은 학업을 마치기 위해 뮌헨에 혼자 남아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권위적인 교사, 구속받는 생활을 싫어하는 그에게 기숙사 생활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무렵에는 주입식 교육에 완전히 진저리를 내서, 학업에 대한 흥미조차 잃었다. 거기에다 열일곱 살이 되면 군대에 가야 했다. 군대라면 끔찍하게 여겼던 그로서는 한 달 한 달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공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들은 하사관 같고 고등학교 교사들은 하급 장교들 같다.”며 싫어했다. 결국 그는 그해 여름에 의사에게 신경쇠약 직전이라는 진단서를 받아내고 가족이 있는 밀라노로 도망쳤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퇴학당했다고 말했지만, 가족은 그가 스스로 학교를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 곳에도 적을 두지 않고 1년여를 빈둥대며 지냈다. 아버지는 고교 중퇴자인 아들의 미래를 걱정했다. 실용적인 직업을 얻으라고 설득했지만 아인슈타인은 철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 아라우 주립학교에서 청년시절 아인슈타인

 ≫ 아인슈타인은 아버지와의 타협 끝에 1년간 아라우 주립학교에서 고교 과정을 마쳤다. 스위스 학교의 수업은 독일 학교와 여러 모로 달랐다. 그는 아라우 주립학교의 자유로운 정신, 권위에 기대지 않는 교사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잃어버린 학문에 대한 호기심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느긋한 스위스식 방식을 사랑하게 되었다. 과학자로서 그에게 큰 업적을 달성하게 할 사고실험도 이 시기에 체득했다. 최초의 논문 <자기장에서 에테르의 상태에 관한 연구에 대하여>도 이 무렵에 썼다. 그러나 여전히 관심 없던 화학, 프랑스어, 생물학 등의 성적은 매우 나빴다. 그럼에도 그는 2등으로 아라우 주립학교를 졸업하고, 1896년 10월 취리히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또한 1896년 1월, 독일 국적을 포기했고, 5년간 무국적자로 지낸 후에 스위스 국적을 취득한다. 취리히 공과대학에서 아인슈타인은 수학과 물리학 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했다. 취리히 공과대학은 당시 세계적으로 명망 높은 기술대학이었다. 학교와 교사의 권위에 대항하는 아인슈타인의 성격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나타났다. 그는 정규 교육 과정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수업에도 자주 불참했다. 이론적인 수업을 중심으로 하는 수학은 입학 초기에 거의 포기했다.
 ≫ 아인슈타인이 처음 얻은 자리는 말단 사무직인 기술심사원이었다. 특허국은 오히려 그가 연구하기에 충분한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일단 초봉이 3,500프랑이었는데, 이것은 당시 취리히 공과대학에 조교로 취직했을 때의 연봉보다 많았다. 또한 이 자리는 각종 기계 장치의 특허들을 심사하는 자리였다. 당시 기술 발전의 흐름을 가장 빨리 대면하기에 적합한 자리였던 것이다. 그는 각종 기계장치들을 사고실험을 통해 구동해보면서 사고실험 능력을 발달시켰다. 상사인 할러로부터 ‘지극히 신중한 태도’로 연구자들이 제출한 서류 하나하나를 꼼꼼히, 회의적인 태도로 바라보는 태도를 배우기도 했다. 업무가 과중하지 않아서 정시에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물리학과 자신의 논문에 대해 숙고할 시간도 충분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시절에 자신의 자리에 만족했으며, 후일 이 자리를 “내가 가장 아름다운 아이디어를 깨치게 된 세계적인 수도원”이라고 일컬었다. 특허국 직원이던 베소와의 우정 역시 그의 사고를 풍부하게 해주었다. 아인슈타인은 당시 그가 쓰던 논문에 대해 공학도 출신인 베소와 수많은 토론을 했다. 베소는 아인슈타인의 논리적 오류를 되짚어주기도 하고 다른 관점을 제시해주기도 했다. 그는 훌륭한 과학 토론 상대이기도 했으며, 음악을 좋아하던 아인슈타인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 아인슈타인의 논문, 뉴턴 논리를 깨다.

 ≫ 1905년은 과학사에서 ‘기적의 해’라고 일컬어진다. 이 해에 아인슈타인은 과학계를 뒤흔들 세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17세기 중반 이후 과학은 뉴턴의 세계관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19세기 들어 과학자들은 뉴턴의 운동 이론만으로 설명하기 힘든 현상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의 세 논문은 기존 고전 물리학의 토대, 즉 뉴턴의 세계관을 부정하고 새로운 물리학적 토대를 세움으로써 이런 의문점들을 해소했다. 아인슈타인의 이 논문들은 고전 물리학의 시대를 벗어나 현대 물리학의 시대를 여는 토대가 된다.


 ≫ 첫 번째 논문 <정지 액체 속에 떠 있는 소립자의 운동에 대하여>는 브라운 운동의 원인에 관한 것이다. 브라운 운동이란 물 위에 떠 있는 꽃가루나 공기 속의 연기 티끌 같은 작은 입자들이 끊임없이 진동하고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일컫는다. 지금이야 원자와 분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일반인들도 알고 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원자의 존재는 논란거리였다. 아인슈타인은 액체나 기체 주위에 있는 보이지 않는 분자들에 의해 이런 소립자들이 움직인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또한 입자들의 움직임을 측정하여 분자의 질량과 수를 계산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 논문을 발표하고 몇 달 후, 독일의 실험물리학자 헨리 자이덴토프가 현미경을 통해 원자와 분자의 존재를 증명했다.


 ≫ 두 번째 논문 <빛의 발생과 변화에 관련된 발견에 도움이 되는 견해에 대하여>는 당대 또 다른 난제인 광전기에 관한 것이다. 뉴턴은 빛이 미립자라는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으며, 이를 통해 빛의 굴절 현상, 광선의 반사 법칙 등을 설명했다. 하지만 뉴턴 역시 이 이론만으로 빛과 관계된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것은 19세기의 과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빛이 파동이냐, 입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과학자들은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빛이 파동의 성질을 지닌 동시에 작은 알갱이, 즉 양자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이 개별 양자(광양자) 이론을 통해 물질이 빛을 흡수했을 때 광전자(光電子)가 생기는 현상, 즉 빛을 비추었을 때 몇몇 고체가 전자를 방출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졌다. 이 이론은 오늘날 TV와 레이저, 태양전지 등 다양한 전기 장치가 개발되는 토대가 된다. 또한 이 논문은 1921년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다.


 ≫ 세 번째 논문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 역학에 대하여>가 바로 그 유명한 상대성 이론이 담긴 논문이다. 이때의 논문은 상대성 이론의 초안 격으로, 그해 발표된 질량과 에너지에 관한 짧은 논문과 함께 ‘특수 상대성 이론’이라고 불린다. 그 전까지 물리학 세계는 뉴턴의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의 법칙으로 설명되었다. 즉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고 본래적이며, 외부의 어떤 것에도 영향 받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이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을 부정했다. 그는 시간과 물체의 운동은 관찰자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가정했다. 즉, 관측하는 사람이 움직이는 속도에 따라 빛이 전달되는 시간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질량과 에너지에 관한 논문 <물체의 관성은 에너지 함량에 따라 달라지는가>는 3쪽짜리 논문이다. 뉴턴의 세계관에서 에너지와 질량은 서로 무관한 것이었다. 즉, 에너지 보존 법칙과 질량 보존의 법칙은 별개의 것이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질량과 에너지가 등가이며, 서로 교환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물체의 질량이 에너지로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논문에서 특수상대성 이론을 바탕으로 변환인자(C²)를 사용하여 에너지와 질량이라는 서로 다른 단위의 물리량이 등가임을 보여주었다. 즉 에너지의 양은 물체의 질량에 빛의 속도를 곱한 값(이것이 그 유명한 공식 E=MC²다)이라는 것이다. 이 개념은 물질 자체에서 큰 힘을 얻어내는 원자폭탄 개발의 기초가 된다. 26살의 청년이 쓴 논문들, 특히 상대성 이론에 관한 논문들은 이때까지의 세계관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았다. 때문에 이 논문들은 처음에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취리히 공과대학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논문을 반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막스 플랑크 등의 몇몇 저명 물리학자들이 그의 이론을 알아보고 지지했다. 그리고 실험 물리학자들에 의해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점차 입증되기 시작하면서, 몇 년 후 아인슈타인은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과학자가 된다.

■ 특수상대성 이론을 넘어선 일반상대성 이론. 빛은 휘어진다

 ≫ 1916년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다. 1905년의 상대성 이론은 우주 공간에서의 현상 및 등속운동에 대한 것으로, 제한적인 설명이라 ‘특수’상대성 이론이라고 불렸다. 1916년의 논문은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이라는 이전의 개념을 보강하고 확장시킨 것으로, 시공간과 물질 간의 관계 및 이 둘을 연결하는 중력의 상호작용에 관한 것이다. 블랙홀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독창적인 다우주론을 제기한 물리학자 존 휠러는 상대성 이론에 대해 “물질은 시공간이 어떻게 휠지를 말해주고, 시공간은 물질이 어떻게 움직일지 말해준다.”고 한마디로 요약했다. 일반상대성 이론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중력에 의해 시공간이 휘어진다는 것이다. 즉 물질의 존재가 주변 공간을 변형시켜 중력장을 만든다는 이론으로, 아인슈타인은 태양을 지나는 별빛이 일정한 각도로 휘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때까지는 뉴턴식 설명에 따라 빛이 직선으로만 나아간다고 여겨졌다. 이 논문은 아인슈타인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이 논문을 구상하고 나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중력 이론을 설명할 수학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친구 그로스만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로스만은 자기보다 기하학에 전문적 지식을 갖춘 수학자 리만을 소개해주었다. 리만의 곡률 방정식을 토대로 아인슈타인은 집요할 정도로 상세하게 자신의 이론을 구축했다. 


■ 특수상대성 이론을 넘어선 일반상대성 이론. 현대 우주 이론의 시발점

 ≫ 일반상대성 이론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세계가 전쟁의 포화 속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 전역에서 군국주의적 가치가 솟아올랐고, 과학자들 역시 불타는 애국심으로 전쟁 무기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는 동료 과학자들이 국수주의자가 되어 전쟁에 뛰어드는 상황에 크게 놀라고 실망했다. 독일 내 지식인들은 심지어 독일이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하고, 평범한 시민을 공격한 사실 관계를 부정하고, 독일의 군국주의가 독일 민족 문화를 유지하게 했다는 선언을 하기까지에 이른다. 이 선언은 독일 정치 지도부의 주도 아래 93명의 독일 지식인들이 서명했다고 하여 ‘93 선언문’이라고 불린다. 아인슈타인은 여기에 반대하여, 과학자들은 세계주의자가 되어야 하며 유럽 학자들은 빨리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호소문을 작성했다. 또한 괴테 연맹을 통해 ‘전쟁에 대한 의견’을 발표했다. 그는 애국주의란 “야만적인 증오와 대량 학살”을 정당화하는 도덕적 요소이며, 이런 야만성은 남성들이 지닌 성적 본성에 따른 것이라고 썼다. 그리고 이런 공격성을 통제하기 위해 세계기구를 창설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당대 수많은 유럽 지식인들이 그랬듯 전쟁은 아인슈타인에게 인간성에 대한 회의를 품게 했다.

 ≫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다. 1919년 5월 29일에는 영국의 아서 에딩턴이 개기일식 관찰을 통해 빛이 휘어지는 현상을 입증했다. 일반상대성 이론이 입증된 것이었다. 영국과 독일은 전쟁 중이었지만, 영국 과학자들 및 언론들은 이 일을 “인간 사고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과”로 인정했다. 이런 극적인 상황은 평소 아인슈타인이 주장하던 세계주의와도 부합했다. 물리학자 레오폴트 인펠트는 “서로 싸우던 나라의 과학자들이 협력하다.”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높아졌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과학의 혁명: 새로운 우주 이론. 뉴턴 이론이 뒤집어지다”라는 기사를 내보냈고, <뉴욕 타임스>는 “하늘에서 빛이 휘어지다: 아인슈타인 이론의 승리”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후 일반상대성 이론에 기초하여 현대 우주 이론이 발전하게 된다.
 ≫ 1920년대에 상대성 이론의 혁명성으로 인해 아인슈타인은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아인슈타인은 영국, 미국 등지에서 수많은 초청 강연을 치르면서 인기를 실감했다. 어느 나라에서나 그를 국빈 대우했으며, 그가 저버렸던 독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독일 시민권을 포기했음에도 독일은 그를 자국민으로 여겼고, 베를린 아카데미 활동을 그의 가장 중심적인 활동이 되게 하려고 했다.

■ 아인슈타인의 강의 일화

 ≫ 1908년에야 아인슈타인은 베른 대학의 객원 강사 자리를 얻었으며, 이듬해에는 취리히 공과대학 부교수 자리를 얻었다. 취리히 공과대학의 부교수 자리는 당초 친구인 프리드리히 아들러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논문이 지닌 가치를 알아본 아들러는 자신 대신 그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그럼에도 아인슈타인이 교수가 되는 데는 두 가지 장애물이 있었다. 그 자신도 인정했듯 그가 강의를 썩 잘하는 편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상사인 정교수 클라이너는 그를 교수로 채용하기 전에 베른 대학 강의를 청강했다. 아인슈타인은 강의 내용을 미리 준비하는 유형이 아니었다. 그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대로, 논리적 흐름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기 머릿속 사고에 따라서 강의했다. 여기에다 웅얼거리는 말투까지 더해진 아인슈타인의 강의는 마치 독백 연극 같았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자치고는 수학을 잘하지 못했다. 수학적 설명을 하다가 증명을 잘못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복잡한 문제를 풀다가 잠시 멍하니 다른 이야기를 주절거리면서 생각을 마친 끝에 다시 원래의 문제로 돌아오기도 했다. 학생들은 아인슈타인의 강의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재미있게도, 훗날 그가 명성을 얻게 되자 이런 강의 태도까지 매력적 요소로 탈바꿈했다. 학생들은 아인슈타인의 말을 따라잡기 위해 더욱 열심히 귀를 기울였고, 그전까지 비난 요소가 되었던 수학적 실수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 유대인 혐오로 인한 아인슈타인, 미국으로의 망명

 ≫ 아인슈타인의 이름은 과학 분야에서 하나의 권위가 되었다. 하지만 1920년대만 해도 이런 명성에 비례하여 상대성 이론이 허무맹랑하고 공허한 이론이라는 반격들도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특히 독일의 경우 아인슈타인을 전적으로 환영하는 것만도 아니었다. 전쟁 패배와 그 이후에 이어진 정치적, 경제적 혼란들로 인해 독일에서는 국수주의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반유대주의가 다시 기승을 부렸고, 아인슈타인은 매우 좋은 표적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전쟁 기간 동안 독일의 군국주의를 비판한 데다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상대성 이론이 적국인 영국에서 먼저 입증되었다는 것 때문에 배타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과학자들 중에서도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유대인 물리학이라면서 수용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반 아인슈타인 운동에 대해 비이성적이라고 하는 과학자들도 물론 존재했다. 1920년 8월 25일에는 베를린 홀에서 상대성이론과 아인슈타인에 대해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가 일어나기도 했다.

 ≫ 그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베를린의 분위기와 자신을 환영하는 미국의 분위기에 크게 이질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세계주의 및 시오니즘을 더욱 지지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아인슈타인이 대면한 유대인들은 대개 유럽의 중산층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그는 가난한 유대인들을 처음 목격했다. 이 일로 그는 전 세계에 퍼진 가난하고 고통받는 유대인들에 대해 인지하게 되었다.

 ≫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반유대주의는 아인슈타인의 목숨을 위협할 수준으로 발전한다. 독일에서는 나치당이 급격히 세력을 확장해나갔고, 세계는 2차 세계대전으로 치달았다. 독일 내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민족주의,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1933년에는 아인슈타인이 50세 생일을 기념하여 지었던 카푸스의 여름 별장이 무장 폭도들의 습격을 받았다.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 앞에서는 상대성 이론에 관한 책을 불태워버린 일도 있었다. 나치가 의회 다수당이 되고, 히틀러가 총통으로 등극하면서 상황은 더욱 좋지 않게 흘러갔다. 나치는 아인슈타인의 재산을 압류하고 은행계좌를 폐쇄했으며, 아인슈타인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베를린 아카데미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반정부 선전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그를 제명했다. 아인슈타인이 망명지로 선택한 곳은 그를 받아준 프린스턴 대학원이 있는 곳, 미국이었다. 당시만 해도 과학의 변방이었던 미국으로, 아인슈타인처럼 많은 망명 과학자들이 몰려들었다. 미국 과학계와 정부, 언론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물론 그중에서 언론 노출이 가장 많은 인물은 아인슈타인이었다


■ 제 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핵 전쟁 우려

 ≫ 1930년 말, 세계는 제 2차 세계대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군국주의와 군대를 극히 싫어했으며,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자였다. 그런 그 역시도 전쟁으로 인한 참상들을 목격하면서 군대의 필요성을 수긍하게 되었다. 그는 전쟁 시에 자국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막강한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무렵, 자신의 이론이 소량의 라듐에서 많은 양의 에너지가 방출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이것은 원자핵에 갇힌 에너지를 인위적으로 방출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겠다는 생각, 즉 원자폭탄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는 당초 화력 발전을 대체할 원자력 발전 시대를 그리면서 이 아이디어를 떠올렸는데, 그러면서도 이것이 원자폭탄이라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또한 원자폭탄이 엄청난 살상 무기를 넘어서서 핵전쟁을 유발할 가능성도 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그는 원자폭탄이 자기 생애 동안 개발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이런 아인슈타인의 태도와 상관없이 세계는 원폭 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다. 1938년 독일이 우라늄 연쇄반응에 성공하면서 원자폭탄 개발 가능성은 유럽 각국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었다. 그럼에도 아인슈타인은 1939년까지 “지금까지의 결과가 원자력 에너지의 실용적인 이용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뉴욕 타임스>에 기고했을 정도로 이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핵에너지 이용과 관련된 연구는 착착 성공을 거두었고, 유럽 각국은 원자폭탄 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다. 영국은 아인슈타인이 구상한 핵에너지 개발안을 실제로 세부사항까지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고 관망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전쟁터가 아닌 미국에서조차 과학자들은 독일이 원자폭탄을 최초로 개발하여 침공할 것을 우려했다 .
 ≫ 미국 정부는 처음에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다가,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원폭 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다. 미 정부는 영국이 독일의 침공 위협 속에 포기했던 원자폭탄 개발 구상과 관련된 정보를 모두 받아냈다. 그리고 1942년 9월 오펜하이머를 필두로 하여 3천여 명의 과학자들을 규합해 맨해튼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원자폭탄 개발 계획을 비밀리에 착수했다. 그 결과 1945년 8월 두 개의 원자폭탄이 일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종전을 맞았다. 아인슈타인이 경고했던 원자폭탄의 무시무시한 기능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뉴욕 사라낙 호수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비서 헬렌 두카스는 라디오를 통해 이 소식을 듣고 아인슈타인에게 알렸다. 일본은 노벨상 수상 당시 아인슈타인을 매우 따뜻하게 환영함으로써 그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긴 나라였다. 그는 매우 비통해했다. 그는 원자폭탄 제조 계획에 실질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으며, 그 계획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계속 회의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원자폭탄 구상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론에서 탄생한 것이었기에, 그는 큰 책임감을 느꼈다. “그날은 내게도 슬픈 날이었다. 내게도 책임이 있다.” 아인슈타인은 원자폭탄의 위력을 목도하고, 핵전쟁 가능성을 다시 떠올렸다. 그는 핵이 전 세계를 파괴하리라고 여겼다.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전쟁이 어떤 모습이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제4차 세계대전에서 인류는 막대기와 돌을 들고 싸우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 평화주의 아인슈타인 그리고 그 죽음까지..

 ≫ 1946년 아인슈타인은 원자 위기관리 과학위원회(Emergency committee of Atomic Scientists)의 의장을 맡았다. 이후로도 그는 다양한 반핵 단체에 이름을 올리고 핵무기 생산 및 유포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쳐나갔다. 또한 전후에 독일이 베를린 아카데미와 플랑크 연구소 명예연구원으로 위촉하는 제안을 보냈을 때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독일인이 저지른 범죄는 문명이 시작된 이래 가장 끔찍한 것이며, 후회나 반성할 줄 모르는 독일 사회를 위해 공헌하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1951년 서독 정부가 수여한 평화 훈장도 거절했다. 말년에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로서의 책임을 촉구하는 평화 운동에 헌신하는 것 외에 외부 활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 1950년경부터 아인슈타인은 동맥류를 앓았는데, 의사의 수술 권유에 인공적으로 수명을 연장하고 싶지 않다면서 거절했다. 결국 1955년 4월 18일, 아인슈타인은 동맥류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날까지도 통일장 이론과 관련된 계산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가족과 지인들 몇 사람만 참석한 자리에서 화장되어 델라웨어 강에 뿌려졌다. 그러나 그의 ‘뇌’만은 조각조각 잘라져 오늘날까지 6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프린스턴 병원의 병리학자 토머스 하비가 부검을 하면서 뇌를 꺼내어 따로 보관한 것이다. 그는 20세기 최고의 천재인 아인슈타인의 뇌를 연구하는 것이 과학적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그 생각에 따라 아인슈타인의 뇌는 그 이후 수많은 연구자들에게 나누어졌다. 이 뇌를 통해 천재와 평범한 사람의 뇌의 차이를 밝히는 연구들이 이루어졌지만, 아직까지 그 어느 연구도 명확하게 입증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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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한마디

 ≫ 히틀러는 화가 지망생이였다. 그의 환경이 황제를 꿈꾸는 자리에 이르렀다. 어느 누가 태어날 때부터 점령하고 누군가를 지배하고 싶어하겠는가? 내 생각엔 그것은 환경이 만들어준다고 생각하고 있다. 국가가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가? 편파적인 사회가 만들어지진 않았는가? 반대의 목소리를 내면 그 의견은 매몰당하는가? 국가가 가난한가? 국가가 이기적인 이념을 갖고있지 않은가? 우리도 물론 비슷한 이기주의적인 욕망을 갖고 있다. 아직 그 지식은 얕지만 필리핀전쟁 때의 한국군인들이 했던 짓이라던지, 북한인들 같이 사상이 꽉 막혀있고 사회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시민들은 구제할 방법이 없다며 같은 사람과 시민으로써 보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로 그 이념을 나누는 것 또한 국가적 이기주의라고도 생각된다. 옹호는 하지만 어쩌면 그들이 맞는 말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은 당시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우리 한국도 언뜻 아닌 듯 보이지만 외국인들에 대한 차별대우는 극심하다. 인종과 색상에 극심한 차별적 대우를 한다. 예를 들면 백인은 좋은데 흑인은 싫거나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차별적 대우이다. 극단적인 예지만 이런 사례를 생각한다면 한국 또한 인종주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겉으로 심하게 드러나거나 극단적으로 나아갈 일이 아니기 때문에 방관하는 일도 있다. 아돌프 히틀러라는 책을 읽고 이러한 사회/국가가 개인 한 명, 한 명에게 미치는 영향을 곰곰히 생각해본다. 극단주의 성향 한 사람이 토론도 잘하고 논리적 사고회로도 뛰어나고 출중하며 사회적 이념이 편파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히틀러의 예는 편파적인 정치인이나 엘리트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주는데에도 좋다고 생각한다. 대파를 수용할 줄 알아야 하고 그것의 옳고 그름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참고로 히틀러에 대해 알아가기엔 책의 분량은 매우 짧아 다른 책을 찾아 더 알아볼 예정이다. 독일에서 그가 어떻게 총통이 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있는 책이다.


■ 목차

 1. 화가를 꿈꾸던 소년 히틀러

 2. 1차 세계대전 발발과 참전

 3. 1차 대전 패전과 유대인

 4. 1차 세계대전 패전과 베르사유 조약

 5. 히틀러의 정치 입문

 6. 히틀러의 실패한 쿠데타

 7. 수감 생활과 <나의 투쟁>

 8. 다시 정치에 복귀하다.

 9. 나치의 집권

 10. 구세주 히틀러에 대한 독일의 열망

 11. 2차 세계대전 발발

 12. 두 개의 전선, 히틀러의 패작

 13. 독일 패전과 히틀러의 자결


■ 왜 읽었는가?

 ≫ 2차 세계대전 발발 배경 이전 당시의 독일의 생각과 가치관에 대한 궁금증 (당시 나치 정권의 주장과 독일인들이 지지했던 이유 그리고 유대인을 싫어하는 인종주의는 왜 생겨났는가에 대한 의문)

 ≫ 독일 주변국(영국과 프랑스)이 어떠한 유화정책을 펼쳤고 그 유화정책이 어떻게 세계대전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궁금증, 현대사와 이어본다면 남한이 펼치는 북한에 대한 유화정책이 과거와 비슷한 점이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

 ≫ 2차 세계대전을 만든 히틀러, 과연 히틀러만 없었다면 이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무엇이 히틀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 내 마음대로 책 내용 3줄 요약

 ≫ 그는 7,000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내며 전 세계를 피바다로 만든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 유대인 600여만 명을 학살한 홀로코스트[각주:1]를 저지른 극단적인 인종주의자다.

 ≫ 2차 세계대전 발발엔 주변국들의 유화정책이 있었다. 준비되지 않은 주변국들은 초기 전시상황에서 질 수 밖에 없었지만, 히틀러는 주변국을 넘어 소련 등 다른 나라까지 건드리며 패배하게 된다.


■ 히틀러의 생애

 ≫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던 작은 국경마을 브라우나우암인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알로이스 히틀러는 세관 공무원이였는데 직장을 따라 자주 이사를 다녔고 이사를 자주 다닌 탓에 아돌프 히틀러는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 알로이스는 술을 자주 마셨고 엄격했다고 한다. 히틀러 연구가인 로버트 와이트가 말하길 '알로이스는 아내인 클라라 히틀러에게도 굉장히 거칠게 대했고, 집에서 항상 폭언을 일삼았다'고 한다. 알로이스는 클라라뿐만 아니라 아돌프와 그의 여동생 파울라 히틀러에게도 폭언과 폭력을 행사했다는 주장들이 많다.

 ≫ 알로이스는 아돌프가 15세 때 세상을 떠났고 클라라는 19세 때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클라라가 죽은 뒤 1908년 아돌프는 미술학도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오스티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으로 떠났다. 아돌프는 제국의 수도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충격을 받는다. 빈 거리에는 체코인, 폴란드인, 이탈리아인,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유대인들이 뒤섞여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아돌프는 이 기억을 떠올리며 "인종적인 신성모독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 1차 세계대전 발발

 ≫ 1914년 8월 2일, 아돌프 히틀러가 25살이 되던 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청년들을 징집한다. 빈에 기거하던 히틀러는 징집을 피해 독일의 뮌헨으로 도피했다. 당시 뮌헨은 극우적 국가주의 정서가 강하게 들끓고 있었다.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히틀러는 결국 참전을 결정하고 4년간을 전쟁터에서 보낸다. 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소모적인 전투를 했다. 자기 영역에 참호를 파고 철조망을 친 뒤 기관총 등으로 무장하여 자기 진지만을 지키는 싸움이였다. 맨몸으로 돌격하고 방어사력과 육탄적으로만 참호를 지키는 것이 임무였다. 이런 양상이 4년간 '무한 반복' 됐다. 전사자들의 시신은 쌓였지만 적과 대치하고 있어 제대로 된 처리를 못하였다. 온갖 질병이 퍼졌고 이와 벼룩은 온몸에 득실거렸으며 비라도 쏟아지면 참호는 물 웅덩이가 되었다. 당시 히틀러는 바이에른 제 16보병연대 연락병으로 4년간 복무했다. 연락병은 참호와 참호 사이를 오가며 명령을 전달하는 위험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히틀러는 그 임무를 해냈고, 그 임무로 히틀러는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훗날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을 '잊을 수 없는 가장 숭고한 경험'이라고 회고했다. 그만큼 그 전쟁이 히틀러의 인생을 뒤바꾼 계기가 되었다.


■ 1차 세계대전 패인과 유대인과의 관계

 ≫ 1차 세계대전 패전에 대한 독일 사람들의 생각은 대체로 '억울하게 전쟁에서 졌다'는 것이다. 극우 선동가들은 하나같이 연합국 측과 협상에 나섰던 사람들을 비애국자로 몰아붙였다.

 ≫ 또 하나의 패인은 유대인이라고 여겼다. 당시 독일 신무기 프로젝트에 유대인 과학자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는데 연합군의 중심이었던 영국이 유대인 핵심 세력과 손을 잡고 독일군의 기밀 정보를 빼내 정보망을 교란시켰고 독일의 지하 정보 네트워크 요소요소에도 유대인들 상당수가 가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적국이었던 영국의 외무 장관 발포어가 여왕의 지시를 받고 영국 내 유대인 지도자 중 하나인 금융가 로스차일드를 만나서 중요한 제안을 하나 한다. 만약에 유대인들이 영국을 위해 싸워준다면, 전쟁이 끝난 후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국가를 창설해줄 용의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1917년 11월 2일에 비밀문서로 작성된 ‘발포어 선언’이 그것이다. 그로부터 1주일도 안 돼 독일 정부가 개발하고 있던 비밀 무기 프로젝트 원본이 영국 사령부로 넘어간다. 동시에 독일의 전쟁 네트워크가 군데군데 마비되면서 영국군이 밀고 들어갈 틈이 벌어진다. 전세가 역전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다. 당시 독일군은 유대인에게 증오를 품었다.


▲ 마녀사냥

 ≫ 물론 유대인에 대한 혐오 내지 증오는 독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대인 혐오는 적어도 유럽에서 2,000년 가까이 내려오던 뿌리 깊은 정서였다. 증오와 멸시가 집단적으로 표출된 사건 중에 하나가, 14세기 페스트가 온 유럽을 덮쳤을 때 일어났다. 사람들은 그 탓을 유대인에게 돌려 닥치는 대로 잡아다가 학살했다. 바로 이어진 마녀사냥에서도 유대인 여성이 주요 타깃이었다. 상황은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직전인 19세기 말이 돼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881년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로스 2세의 암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러시아 당국은 유대 극단주의자들의 조직적인 범죄라고 단정 짓고 이듬해 비밀리에 인종분류법인 ‘5월법’을 제정해 유대인 청산에 나섰다. 유대인 성분에 따라 ‘살해’, ‘추방’, ‘동화’ 정책을 펼쳤는데, 이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폴란드, 체코, 헝가리 같은 동유럽으로 이주하게 된다. 1894년에는 프랑스에서 드레퓌스 대위 사건이 벌어진다.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프랑스의 기밀 문건이 하나가 발견됐는데, 그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수사당국이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드레퓌스 대위를 지목한 것이었다. 이때 에밀 졸라와 같은 프랑스 지성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재조사를 요구했고, 덕분에 진범이 잡히고 드레퓌스 대위는 석방이 된다. 하지만 러시아에 이어 프랑스에서도 유대인 혐오사건이 벌어지자 유대인들은 큰 충격에 휩싸인다. 그들은 일종의 자구책으로 1897년 8월 스위스 바젤에서 세계에 흩어진 유대 지도자들이 다 모이는 제1차 시온주의자회의를 개최한다. 이때 유대인 공동체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의 조국을 건설한다는 ‘바젤 계획’을 채택한다. 1차 세계대전에서 수세에 몰리던 영국은 유대인들의 이런 계획을 알아내고 독일 내 유대인들을 회유했던 것이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물리치기 어려운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더 이상 당국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자기 나라’를 가질 수만 있다면 큰 도박에 나설 만도 했다. 그러나 패전국 독일 입장에서는 패전의 핑계로 지목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의 베르사유 조약

 ≫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선언으로 끝났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자 전범국이 되었다. 1914년에 시작돼 1918년에 끝난 이 전쟁에서 930여만 명이 죽고 2,250여만 명이 부상당했다. 1919년 6월 28일 프랑스 파리에서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으로 1차 세계대전은 공식 종결됐다. 이 조약은 연합국으로 참전한 31개국이 독일과 맺은 것이었다. 물론 이 협상에 독일은 초대받지 못했고 결과만 통보 받았다. 이 조약의 핵심은 전범국인 독일을 처벌하고 그 세력을 약화시켜 평화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약은 독일 입장에서는 너무 가혹했다. 전쟁의 모든 책임이 독일에게만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점령지 대부분을 빼앗겼다. 독일인 입장에서는 영토의 13퍼센트와 인구의 10퍼센트가 잘려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중 독일인들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했던 것은 동프로이센을 분할해 18세기에 사라졌던 폴란드를 재건해주고 바다로 가는 통로를 열어준 일이었다. 이 통로는 이후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도화선[각주:2] 역할을 한다

 ≫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의 군인은 10만 명을 넘지 못하게 제한됐고, 탱크와 잠수함 같은 현대식 무기 보유도 금지됐으며, 공군은 창설 자체가 금지됐다. 남아 있던 무기들은 독일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파괴됐다. 독일 라인 강 연변의 라인란트 지역은 연합국 관할로 비무장 지역으로 규정됐다. 거액의 배상금도 책정됐다. 전쟁 피해 복구를 이유로 1,320억 독일 제국 마르크가 책정됐는데, 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에서 빌린 부채를 상환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이 징벌적 배상금이 전후 독일 경제에 직격탄을 날렸음은 물론이다. 이 조약은 평화유지를 목적으로 했으나 강대국 중심으로 치우친 경향이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영토 분할 과정에서 연합국 지도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강하게 반발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은 이 같은 배신감을 바탕으로 자기 정치 세력을 키웠고, 이것이 훗날 베니토 무솔리니를 중심으로 파시즘[각주:3]이 발호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 히틀러의 정치 입문

 ≫ 1차 세계대전 동안 4년간의 복무를 마친 히틀러는 극우주의가 들끓던 뮌헨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 살이었다. 그는 사실 군대에 남아 있고 싶어 했다. 당시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바뀌어 사회민주주의자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대통령으로 집권하고 있었다. 특별한 변수가 없었다면 히틀러는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군인으로 평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으로 무너진 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유럽 전역에서 혁명의 꿈을 뜨겁게 키우고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각주:4](독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정부는 뜨겁게 타오르는 마르크스주의 혁명을 잠재워야 할 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세력이 바로 퇴역 군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극우 어용단체 ‘자유군단’이었다. 정부는 이들의 폭력을 활용해 마르크스주의 혁명운동에 철퇴를 가하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자유군단은 세력을 크게 불릴 수 있었고, 훗날 나치당의 모태가 된다. 히틀러는 자유군단에서 상관들의 눈에 띄어 병사들과 포로들을 정치적으로 재교육하는 임무를 받게 된다." 이 임무를 수행하며 히틀러는 자기가 연설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연설의 핵심은 1919년 6월에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국가적인 수치이고 거기에 동조한 독일 당국은 국가적 배신자라는 비난이었다.


 ≫ 군인으로서 더 이상 전망이 없을 때 히틀러는 당원으로 남아 전업 정치인의 길을 가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의 정치적 데뷔는 뮌헨의 어느 큰 맥주홀이었다. 뮌헨의 극우세력의 중추는 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들이었는데 그들은 주로 큰 맥주홀에서 회합을 가졌고, 히틀러의 정치 데뷔도 그곳에서 이뤄졌다. 1920년 8월 13일 뮌헨의 맥주홀 브루거브라우켈러(Bürgerbräukeller)가 바로 그 무대였다. 히틀러는 거기서 “우리는 왜 반유대주의자인가?”를 제목으로 연설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자유군단이라는 이름의 국가주의 민병대를 모집하는 최상의 전략으로 반유대주의를 제시한 것이었다. 히틀러의 연설은 독일노동자당의 당원들을 고무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히틀러에 크게 고무된 노동당원들은 1921년 7월 히틀러를 당 지도자로 삼았다. 히틀러는 당명을 '독일노동자당'에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으로 바꿨고 그 약칭이 나치다.

 ≫ 나치당의 모태가 극우적 폭력 단체, 자유군단이었던 만큼 히틀러는 그 특성을 살려 자신의 호위대인 돌격대부터 창설한다. 나치깃발과 눈에 띄는 제복으로 홍보에 성공했고, 시각적 차별화를 둔 탓에 당원 숫자가 기존 2,000명에서 2만 명으로 급증한다. 히틀러가 당권을 잡은 이듬해 이탈리아에선 베니토 무솔리니의 극우 파시스트당이 정권을 잡았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베르사유 조약이 이탈리아에게 불평등하게 맺어졌다고 정치 캠페인을 벌였고 그 캠페인이 국왕 눈에 들어 집권하는데 성공했다. 이 소식을 히틀러가 알게됬고 극우주의자 무솔리니의 성공은 히틀러를 고무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 히틀러의 쿠데타 실패와 수감생활 그리고 정치복귀

 ≫ 1923년 1월 프랑스군과 벨이게군이 전후 배상금을 제때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루루 지역의 탄광을 점령하는 일이 벌어졌다. 3월에는 프랑스 장교가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프랑스군과 독일 국민들 사이에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때 촬영된 영상이 있었는데 이 동영상은 히틀러의 나치당에게 더할 나위 없는 홍보 도구였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총장을 보좌했던 루덴도르프 장군이 나치의 세력으로 들어왔고 우익 참전 군인들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군 내부자들의 협력을 받아 총기를 확보해 루덴도르프를 지도자로 세워 쿠데타를 일으킨다. 뮌헨에서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베를린으로 진격한다는 것이다.

 ≫ 히틀러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루덴도르프는 1차 세계대전 참전 영웅으로써 사면되었다. 하지만 히틀러에게는 녹록치 않은 재판이었다. 그러나 재판에 섰을 때 히틀러는 생각보다 분위기가 자신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프랑스와 벨기에군에 굴욕을 당한 독일 국민들 마음이 그와 같았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자기 웅변 실력을 총동원했고 그 결과 형량이 가벼워졌다. 수감 생활은 호텔처럼 편안했고 언제든지 나치 지지자를 만날 수 있었다. 책과 잡지도 무엇이든 읽을 수 있었고, 인생관과 정치사상을 정리했다. 히틀러가 원고를 쓰고 나치당의 기자가 손보는 형식이었으며, 이 과정으로 <나의 투쟁>이 출간된다.

 ≫ 나의 투쟁에선 <지배종족>이라는 언급이 있는데, 이 지배종족은 영토를 되찾고, 공산주의를 박멸하며 프랑스와 영국은 물론이고 유대인까지 분쇄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 히틀러는 모범수라는 이유로 1924년 11월 20일에 석방된다. 1925년 2월 27일 쿠데타를 도모했던 뮌헨의 맥주집에 다시 돌아와 나치당 지도자로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 독일(당시 바이마르 공화국) 2대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

 ≫ 바이마르 공화국 2대 대통령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총장을 지낸 힌덴부르크가 당선됐다. 군대와 독일 보수파는 힌덴부르크를 중심으로 결집되었다. 독일 좌파들은 군인 출신이 대통령이 되는 상황이 반가울리 없었다. 정치적 라이벌인 루덴도르프는 제거되었고 보수파가 결집되어 나치당원은 17만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돌격대의 규모도 커져 사설 군대와 다름없는 수준이 됐다.

 ≫ 히틀러는 "대중은 여성적이고 우둔하며 오직 감정과 증오로만 그들을 장악할 수 있다"고 여겼다. 히틀러 친위대는 베를린의 유대인 구역에서 시작해 독일 전역에 '증오'를 심기 시작했다.


■ 나치의 집권

 ≫ 나치당은 1930년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18.3 퍼센트를 득표해 제 2당이 됐다. 히틀러는 1932년 그 힘으로 대통령 선거에 나섰지만 힌덴부르크에 밀려났다. 그러나 36.8 퍼센트라는 지지율을 받았다. 1932년 7월엔 나치당은 제 1당에 올라선다. 1당이 되면서 나치당은 총리직을 요구했지만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두 차례에 걸쳐 거부했다. 그러나 1933년 1월 30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안팎의 압박을 견뎌내지 못하고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했다.

 ≫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잡자, <나의 투쟁>은 날개 돋친 듯 팔렸고, 국민의 필수 교양서가 되었다. 나의 투쟁이 책장에 없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견뎌내야 했다. 덕분에 히틀러는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 히틀러는 총리직에 오르자마자 좌파 공산주의 세력과 반대파를 감금, 납치, 암살, 고문하는 등 온갖 불법적인 재판과 처벌을 동원해 탄압했다. 히틀러는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을 비난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들이 포진해 있는 의회가 늘 발목을 잡아서 국가 발전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이를 극복할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선동했다. 3월 24일 전권위임법[각주:5]을 통과시켰다. 전권위임법의 정식 명칭은 '민족과 국가의 위난을 제거하기 위한 법률'이다. 이를 통해 지방의회는 해산됬고 사회민주당은 불법화가 되었다. 이를 통해 나치의 일당독재체제를 완성한다. 이가 가능했던 이유는 바이마르 공화국(독일) 체제의 불안과 불신, 세계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국가경제의 붕괴 때문이었다.

 ≫ 1934년 8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드디어 히틀러 1인 독재체제가 완성된다. 히틀러는 국민투표를 실시해 총리가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게 했고, 그 지위를 총통이라 칭했다. 반대세력은 죽거나 도망쳤고, 유대인은 비국민이 되어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했다.


■ 독일의 구세주 히틀러

 ≫ 독일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실업이었다. 그런데 히틀러가 총통에 취임한 뒤 실업률은 크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독재 체제를 활용해 징중 정책을 밀어붙인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베르사유 조약이 파기된 이후 독일군이 재무장에 나선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사람들은 히틀러만 바라보았다. 행복에 젖어 히틀러 얘기만 했다. 변화에 대한 희망이 워낙 컸고, 패전국민으로 짓눌려왔던 독일인들은 히틀러에게서 자긍심을 찾았다.


■ 주변국가의 무장해제

 ≫ 히틀러는 1936년 8월 1일 베를린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했다. 올림픽 기간 중 독일 전역에서는 선동적인 표어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신문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호전적인 기사들이 자취를 감췄다. 독일 정부는 올림픽에 참여하러 온 세계인들에게 독일은 평화롭다는 믿음을 심어주고 싶어 했다. 이러한 가증스런 노력은 일정한 결실을 맺었다. 올림픽이 끝난 뒤 3주 후 영국의 로이드 조지 전 총리가 히틀러의 초대를 받고 독일을 전격 방문했다. 히틀러는 고무됐다. 세계적으로 유력한 정치인이 히틀러를 방문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그 자리에서 1차 세계대전 참전담을 늘어놓았다. 그는 전장에서 종종 영국 군인들과 조우했다고 회상했다. 히틀러의 호의는 로이드 조지를 무장해제시켰다. 로이드 전 총리는 히틀러와 만남을 가진 후, 데일리 익스프레스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고문을 보낸다. “독일이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히틀러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그는 우리와 싸울 의사가 전혀 없다.” 러나 로이드 전 총리는 순진했다. 영국 신문에 독일이 안전하다는 기사가 실릴 때 히틀러는 장관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밀지시를 내렸다. “독일군을 세계 최강으로 재건하지 못한다면 독일은 사라질 것이다. 독일군은 4년 안에 전쟁 준비를 마쳐야 한다."

 ≫ 1937년 9월 28일 이탈리아의 극우주의자 무솔리니가 베를린을 방문했다. 새로운 동맹을 구축하자는 것이었는데 “침략을 위한 군사적 조치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방어적 수단”이라고 강변했다.  

 ≫ 1938년 3월 13일에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합병을 선포한다. 독일군은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오스트리아에 진입했고, “신께서 오스트리아를 구원했다.”고 소리쳤다. 오스트리아 거리에 나치 깃발이 나부꼈지만 병합에 반대하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 된 때가 이 때다.

 ≫ 그 다음은 체코슬로바키아였다.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이 내세웠던 민족자결주의를 역이용한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에 거주하는 독일민족의 자결권을 요구하며 독일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주데텐란트를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1938년 9월 30일 뮌헨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참석해 히틀러의 요구를 승인해준다. 당시 강대국들은 당사자인 체코슬로바키아를 협정에서 배제할 정도로 나치 독일에 유화정책을 폈다.


■ 2차 세계대전 발발

 ≫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기 전 소련의 스탈린에게 히틀러는 미리 전보를 보냈다. 스탈린은 독일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답신을 보낸다. 그리고 전선에는 200만 명의 병사가 히틀러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1939년 9월 1일 새벽 5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나치 독일에 관용적이던 영국과 프랑스도 이틀 뒤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준비해온 독일군은 이미 폴란드 깊숙이 파고들어갔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비밀 협정에 따라 소련도 폴란드 동부를 침공했다. 폴란드는 항복을 거부했고 바르샤바는 초토화됐다.

 ≫ 이듬해인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은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된 지 2주 만에 프랑스군 중심의 연합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국경 해안 도시 됭케르크에서는 연합군 40만 명이 진지를 포기하고 후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해변은 연합군이 버리고 간 무기들로 넘쳐났고, 벨기에와 프랑스의 해안이 독일군 손에 들어갔다. 영국군이 철수하자 홀로 남게 된 프랑스는 1940년 6월 22일 독일에 항복을 선언한다. 히틀러는 나흘 뒤인 28일 새벽 6시 파리에 입성하며 “6주에 걸친 영웅적인 투쟁 끝에 우리 병사들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대들의 위업은 영광스러운 승리로 기록될 것이다. 1주일 동안 깃발을 게양하고 종을 울리도록 명하는 바이다.”라고 말했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과 에펠탑에는 독일군인들이 무리지어 다니며 기념 촬영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 프랑스를 점령해 기세가 등등해진 히틀러는 영국에 평화협정을 제안하지만 처칠은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리고 영국과 독일 간의 공중전이 시작된다. 독일은 영국을 9개월간 공습해 4만 여 명의 사망자를 내지만 영국은 끝끝내 항복을 거부했다. 당시 영국 전투기의 성능이 우수했기 때문에 독일군도 공습 과정에 적지 않은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1941년 5월 독일군은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맛본다. 그때까지 너무 쉽게 이겼던 탓인지 히틀러도 적지 않은 충격에 빠졌다. 히틀러는 갑자기 영국 정복을 포기하고 소련을 침공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소련을 제압하면 영국의 희망도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천하의 독일군이라 해도 위험한 도박이었다. 당시 참모들은 히틀러를 막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무도 나서지를 못했다. 1941년 6월 22일 새벽 3시, 300만 명의 독일군이 소련 국경을 넘었다. 히틀러에게 러시아는 영국에게 인도와 같은 존재였다. 영국이 인도를 점령해 자원을 빼먹듯이 독일도 러시아를 점령해 이용해먹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전투도 연전연승이었다. 모스크바 턱밑까지 독일군이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과거 나폴레옹 때처럼 러시아에게는 겨울이 있었다. 그리고 12월에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습격하면서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시작했다. 독일 장군들은 소련 전선에서 후퇴하자고 히틀러에게 조언했지만, 히틀러는 격노로 답했다. 1차 세계대전을 전장에서 보낸 히틀러는 후퇴 운운하는 장군들에게 오히려 정신 무장을 주문했다

 ≫ 소년부터 노인까지 남자라면 모조리 차출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미국까지 가세한 연합군의 공격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1943년 7월 27일, 700여 대의 폭격기가 함부르크를 공습했고, 도시는 불바다가 됐다. 이 공습으로 함부르크 시민 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즈음 전세는 확실히 역전되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건강도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심장 질환을 앓기 시작했고 파킨슨병 증세도 보였다. 등은 휘었고 손은 떨렸다. 1944년 6월 6일 이른바 디데이 새벽 노르망디 해안. 연합군이 마침내 독일이 점령 중인 프랑스 수복에 나섰다.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매우 기뻐했다. 영국이란 섬에 숨어 있다가 대륙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에 쉽게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히틀러의 착각이었고 망상이었다. 파죽지세는 이제 연합군을 수식하는 말이 됐다. 그 시기 독일군 사령부에서 폭탄이 터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독일 내부의 움직임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전세가 역전된 이유를 참모들의 타락에서 찾았다. 반역자들 때문에 원대한 계획이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의 배후를 캐기 위해 히틀러는 5,000명을 체포했고 200명을 처형했다. 이처럼 전세가 기울면서 독일 내부의 히틀러 지지기반도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 히틀러의 패배, 그리고 자결

 ≫ 1945년 1월 소련군이 베를린 외곽 80킬로미터까지 접근했고, 4월 21일에는 마침내 베를린에 입성했다. 이 전쟁으로 소련에서는 무려 2,000여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희생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군 지휘부는 병사들에게 베를린에서 승리를 자축할 것을 허락했다. 소련군들은 베를린에 남아 있던 여자들을 빈집으로 끌어모았고, 밤새도록 욕을 보였다. 이때 소련군에게 강간당한 독일 여성의 숫자만 200만 명을 헤아렸다. 그때 히틀러는 폐허로 변한 총통 관저의 지하 벙커에서 그의 연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은신하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 클라라 히틀러의 사진 앞에서 에바와 결혼식을 올린 뒤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다. 히틀러는 일기를 통해 자기가 일으킨 전쟁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생각을 남겼는데, 자기중심적인 망상과 집착은 전세가 기울어졌을 때에도 결코 약해지지 않았다. “우리가 졌다는 것을 안다. 적들의 힘이 너무 강하다. 배신까지 당했으니 내 머리에 총알을 박아야 한다. 하지만 절대로 항복하지는 않으리라. 우리는 쓰러지겠지만 세상이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독일이 전쟁을 원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이 전쟁은 서구 정치인들이 도발한 것이다. 그들 모두 유대인을 위해 일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죽는다. 우리 군대, 여성과 노동자들이 내 이름을 걸고 이룩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위업을 알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에서만 5,000만 명에 가까운 인명이 세상을 떠나야 했다. 아시아까지 그 범위를 넓히면 7,00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망상과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국가주의와 인종주의 같은 극단적인 이념에 탐닉할 때 그 끝이 어떤 모습일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인류는 그 대가를 치르면서 평등과 조화, 그리고 다양성과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있다.


  1. 홀로코스트 : 일반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을 대량으로 태워 죽이거나 대학살하는 행위를 총칭하지만, 고유명사로 쓸 때는 제2차세계대전 중 나치스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뜻한다. [본문으로]
  2. 도화선 : 사건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 [본문으로]
  3. 파시즘 : 1919년 이탈리아의 B.무솔리니가 주장한 국수주의적·권위주의적·반공적인 정치적 주의 및 운동을 말한다. 원래 묶음[束]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파쇼(fascio)에서 나온 말이었으나, 결속·단결의 뜻으로 전용(轉用)되었다. [본문으로]
  4. 바이마르 공화국 : 과거 독일의 국가명 [본문으로]
  5. 전권위임법 : 비상사태에 입법부가 행정부에 입법권을 위임하는 법률, 나치 정권은 나치에서 제정한 법률은 의회나 참의원 및 대통령의 권한과 관련된 것을 제외하면 헌법에 위반되어도 유효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 골자였다. [본문으로]

■ 나의 한마디

 ≫ 통합 영어 학습법은 16년 10월 5일 기준으로 3권까지 있습니다. 1권은 총론, 2권은 문법, 3권은 연습방법입니다. 저자는 순서대로 읽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합니다. 영어 외에도 일본어 등 제 3 외국어까지도 이 방법이 통용되었다고 합니다. 읽을수록 납득이 되는 이론을 설명하니, 천천히 읽어보면서 내가 하고 있는 공부방법이 옳은지, 노력은 부족하지 않았는지를 다시 한번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필자 또한 내가 쓴 리뷰를 보면서 마음을 되새길 생각입니다.



■ 목차

1. 한국 영어 교육의 실패

2. 우리에게는 어떤 수준의 영어가 필요한가

3. 한국 영어 교육의 현실

4. 영어로 생각하기는 가능한가

5. 직독직해, 영어를 죽이는 가장 나쁜 방법

6. 문장구조에 대한 왜곡된 인식

7. 영어는 평생 공부해야 할까

8. 새로운 영어 학습법이 필요하다

9. 제 4세대 통합 영어 학습법(1)

10. 디코딩

11. 언어 구조에 대한 새로운 이해

12. 의미 단락에 대한 올바른 이해

13. 문장구조 습득을 판단하는 방법

14. 도대체 얼마나 공부해야 하는가

15. 시간 내 암기

16. 제 4세대 통합 영어 학습법(2)

17. 영어를 죽이는 나쁜 습관들 (외 6개)

18. 부록


■ 왜 읽었는가?

 ≫ 영어 단어장 만들고 외우기, 수동태/능동태, 분사, 동사, 형용사, 명사 등 난 언어를 배우는 것인데 왜 암기를 하고 있지? 에 대한 회의감.

 ≫ 영어 공부도 하고 회화모임도 열심히 나가는데 늘어나지 않는 듯한 영어실력에 답답함.

 ≫ 배우고는 있는데 "잘못" 배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요즘 잘 나간다는 제4세대 통합 영어 학습법 지식 습득


■ 내 마음대로 책 내용 3줄 요약

 ≫ 통합 학습법은, 한 시간의 투자로 읽기, 말하기, 듣기, 쓰기에 각각 한 시간 연습 효과를 낼 수 있어 한 시간을 투자해 4시간의 학습 효과를 내는 연습을 지향한다. 이 방법으로 1년으로 4년의 효과를 볼 수 있다.

 ≫ 우리는 듣기를 통해서 말을 배운다. 달리 표현하면 듣기를 통해서 문장구조를 습득한다.

 ≫ 영어 학습의 성과가 부진할 때 학습자의 불성실로 원인을 돌릴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배우고 가르치는 기존 내용과 인식에 오류가 없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 책에서 말하는 주의할 점

 ≫ 통합 학습법을 '비법'으로 간주하면 안된다. 기존의 영어 공부 방식으로 실패한 사람들이 이 함정에 빠지기 쉽다. 이들은 결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으면 실망하는 경향을 보인다.

 ≫ '영어를 잘하게 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에 대한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다. 가장 알고 싶어하는 사항이지만 대답은 쉽지 않다. 학습자의 이해력, 투자할 수 있는 시간, 요구되는 집중력, 영어 파트너의 존재여부, 자발적 동기부여, 교습자의 역량 등 정말 많은 변수가 있다. 그래서 기계적으로 1년, 2년이라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도 '평균치를 말해달라'는 질문을 받으면 1년 걸린다면 도전해보겠다는 학생이 100 퍼센트다. 2년은 70, 3년은 30, 4년이라고 하면 도전자가 10 퍼센트도 안된다. 이것은 현실이다. 영어 공부에 도전했다 실패한 경험이 새로운 도전에 대한 의욕마저도 삼켜버리는 것 같다. 새로운 방법으로 도전했을 때 그 실효성을 의심하면서 공부한다면 그 스트레스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군복무 기간이 좀 길더라도 언제 끝날지 알면 고된 군생활을 견딜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장기 학습 계획을 방해하고 한국의 영어 교육을 망치는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이 조급증이다.

 ≫ 기존 직독직해 방식에 의구심을 품었던 학생이나, 새로운 것을 빨리 받아들이고 배우는 학생, 영어를 잘하고 싶은 열망이 강한 학생들은 좀 더 빠른 향상을 보인 데 반해, 당장 시험 점수를 올려야 하는 학생들은 개념은 이해하지만 습득이 느린 경우가 많다. 이처럼 천차만별이라 새로운 의미 단락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다. 그래도 직독직해를 벗어나는 데 걸리는 기간을 집요하게 묻는다. 딱 떨어지는 숫자를 제공하지 않으면 답답해하고, 보수적으로 기간을 길게 잡아 1년이 걸린다고 하면 가치판단을 떠나서 일단 부담스러워한다. 결국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빨리 되느냐 아니냐를 판단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급한 태도가 영어 실패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하루에 1~2시간 공부해서 3개월 정도는 걸린다고 기준을 정해버리면 성과가 늦게 나타나는 학생들은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는다. ‘나는 역시 안 돼’, ‘나는 역시 머리가 나쁜가 봐’, ‘나는 언어 감각이 없는 것 같아’ 등의 자기비하로까지 이어진다. 그런가 하면, 하루에 1~2시간 공부해서 넉넉하게 1년 정도는 해야 된다고 말하면, 아예 시작하기조차 부담스러워한다. 기본과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서 뭔가 급하게 이루려고만 하는 성향이 영어 학습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소들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한국인들은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교육제도를 비난하고 선진국의 교육제도를 부러워한다. 하지만 대학에서 소위 선진국의 수업 방식과 비슷하게 토론을 시키거나 팀별 프로젝트 과제를 내주거나 의견을 논술형으로 서술하라고 하면 상당히 귀찮아하는 경향을 보인다. 비난의 대상이었던 교육제도에 어느새 적응이 되어 새로운 것을 찾거나 시도하거나 받아들이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 '일상 대화 수준'이 목표?

 ≫ 저자는 영어 공부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목표 설정이 왜 중요한지를 학생들에게 이야기 해왔다고 한다. 모두들 충분히 공감하며 동의한다고 했다. 하지만 3~4개월쯤 지나 첫 고비에 직면하면 "나는 그 정도 수준까지 공부하고 싶지는 않아요"라며 발뺌을 하는 학생들이 나온다. '10년을 공부했는데도 영어가 이 지경인데 체계적으로 공부한다 해도 그런 수준에 도달하려면 평생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포기를 해버린다. 그러면서 '그냥 일상 대화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으면 된다'고 자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학생의 '일상 대화'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이성에 대한 고민도 있고, 취업 고민, 다양한 활동에 대해 주고받는 대화, 친구들과의 대화도 포함될 것이다. 연애할 때 애인과 주고받는 사랑의 밀어도 일상 대화의 일부분이다. 영어로 일상 대화를 할 수 있는 정도만 되어도 좋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광범위한 내용을 염두에 두는것인가? '일상 대화 수준의 영어'는 가장 완벽한 구사력을 갖추었음을 의미할 수 있다.


■ '영어를 잘한다'는 의미

 ≫ 영어권 나라에서 태어난 고등학생의 예다. 영어가 아주 유창한 학생은 졸업 후 우리나라의 대기업에 취업하려 한다. 이 기업은 영어가 유창하다고 그를 선발할까? 아니다, 영어 구사력과 업무 처리 능력은 별개다. 완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미국의 고등학생보다는 상대적으로 영어는 서툴지만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한국 사람이 채용될 확률이 훨씬 높다.

 ≫ 어느 중소기업 과장이 있다. 이 사람은 영어를 잘한다는 주변의 평가를 받아왔다. 해외 출장을 가면 일행들을 대표해 영어로 모든 것을 다 해주었다. 회사 측에서는 이 과장에게 업무를 맡기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과장은 한국의 다른 업체들과 계약할 때 협상 능력이 떨어져 회사에서는 과장에게 협상을 맡기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말 협상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영어를 구상할 줄 안다고 해서 영어 협상을 잘 해낼 수 있을까?

 ≫ 위 두 가지 사례는 우리가 영어로 말을 할 줄 아는 것에 대해 얼마나 과대평가를 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 어느정도까지 영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할까?

 ≫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자신이 구사하는 한국어를 영어로도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이다. 당연히 문화 차이는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협상을 할 경우도 마찬가지다. 협상에 필요한 '생각하는 힘'을 바탕으로 우리말을 사용할 때만큼 내용을 잘 전달할 수 있도록 영어를 배운다면 완벽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 정도 수준에 도달하기는 결콘 쉽지 않다.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올바른 목표치 설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목표 달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를 판단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 영어로 생각하기는 가능한가?

 ≫ 영어로 생각하기(Thinking in English)란 한국인에게는 허구다. 회화 수업에서 강사가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의 하나가 '영어로 생각하라'일 것이다. 우리말을 떠올려서 번역하는 방식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말이다. 미국이나 영국, 캐나다 등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국가에서 어학연수를 경험한 학생들이 특히 많이 들었던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들으면 상당히 그럴싸하다. 영어를 배우는 입장에서 '영어로 생각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최종 목표일 수 있다. 뇌의 언어 영역에 한국어와 영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같아진다면 영어권 국가에서 공부하거나 일하면서 매일 영어를 쓰는 상황이라면 영어로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막 영어를 공부하는 한국 사람이 '영어로 생각한다'면 거짓말이다.

 ≫ 영어로 생각하기는 어떻게 나왔을까? 회하나 어학연수 프로그램은 유창성을 강조한다. 간단한 말이라도 자연스럽게 빠른 속도로 구사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실제로 유창성은 언어 구사에서 중요한 요소이며, 영어권 국가로 이민을 간 사람들이나 유학생들에게는 특히 중요할 수 있다. 따라서 설사 조금 틀리더라도 원어민의 속도로 말하는 것을 권장하는 경향이 있다. 어린이들이 언어를 습득해가는 과정에서 그러하듯 처음에 부정확해도 자꾸 말하다 보면 정확성도 좋아진다고 보는 것이다. 회화가 초보인 학생들에게 '유창하게 말하려면 영어로 생각하라'고 강조하는 것은 아직 걷지도 못하는 어린아이에게 마라톤을 시키는 일과 같다.

 ≫ 뇌의 언어 영역에 우리말이 99퍼센트, 영어가 1퍼센트를 차지한 상황이라면 이 1퍼센트의 영어 영역을 점점 확장해가는 것이 영어 공부의 과정이다. 우리 뇌에서 영어가 스스로 작동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의 습득량이 늘어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입되어야 한다. 따라서 영어 습득률을 높이려면 한국어를 억제할 것이 아니라 한국어와 효과적인 상호관계를 맺어야 한다.


■ 직독직해는 영어를 죽이는 가장 나쁜 방법이다.

 ≫ I love you를 직독직해 하면 '나는/사랑한다/당신을'이 된다. 하지만 영어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I love you의 의미를 설명한다면 뭐라고 할까? 당신을 사랑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영어로 말할 때, 'I/you/love'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영어로 말할 땐 영어 어순을, 우리말로 말할 때는 우리말 어순을 지켜야 문장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 문장구조에 대한 왜곡된 인식

 ≫ 사람이 한국어의 언어 구조를 습득했다는 것은 한국어를 할 때 문법을 의식하거나 문법 개념들을 떠올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각을 적절한 문장으로 만들어 표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어떤 경우라도 '주어를 무엇으로 설정해야 할까 혹은 다음에는 목적어가 나와야겠지...' 등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 말을 하지는 않는다. 말하는 순간에 자연스러운 우리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한국인에게 이는 매우 당연한 듯하지만, 실은 한국어의 언어 구조를 습득하지 않은 상태라면 불가능한 언어능력이다.

 ≫ '나는 밥 먹었어요'와 '나도 밥 먹었어요'가 있다. 조사 '는'과 '도' 가 내포하는 의미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외국 사람이 위의 예문을 듣는다면 어떨까? 조사 '는'과 '도'의 기능과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보다는 '나' '밥' '먹어' 등 내용이 중심으로 듣고 이해할 확률이 크다.

 ≫ 모국어 습득 과정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해당 언어의 구조나 규칙을 따로 분리해서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모국어로 된 책을 읽을 때 문법이 틀린 문장이나 앞뒤가 안 맞는 내용, 잘못 사용된 단어들을 쉽게 파악하고, 상대방이 실수로 잘못 말한 부분도 문맥에 맞게 알아서 고쳐 듣는 능력 등은 모국어의 언어 구조를 체득했기에 가능한 것들이다.


■ 용어로 문장구조를 이해하면 표현들을 연상하기 어렵다

 ≫ 가령 명사 하나를 연상해보라고 할 때 '내가 사랑하는 그 남자(The man who I really love)' 같은 표현을 연상할 수 없고, 형용사 하나를 연상해보라고 할 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most beautiful in the world)' 같은 표현을 생각해내지 않는다. 문장구조에서 '동사'에 해당되는 부분 역시 동사인 단어 하나만 떠올릴 가능성이 높다. 예로 'do', 'give', 'have', 'eat', 'make' 등이다. 기껏 해야 조동사를 붙여 쓰거나 조동사에 준하는 표현들을 구사하는 데 그치기 쉽다. 예로, '~를 해야한다'라는 표현을 의미에 맞게 '동사'를 연상하면 'have to do', 'should do', 'must do' 등에 국한되기 십상이다. 경우에 따라 'be supposed to do', 'be asked to do', 'be told to do', 'be required to do' 등 다양한 표현들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하는데, '동사' 라는 용어로 문장구조를 이해하면 이런 표현들을 연상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문장성분을 말할 때는 '동사'가 아니라 '서술어'라고 하는 것이 맞다.


■ 시간은 얼마나 투자해야 할까?

 ≫ 실제로 투입하는 영어 말하기 연습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기초 단계에서 학생들은 1분 정도는 말할 수 있다고 하고, 중급 단계는 5분은 말하는 것 같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느낌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회화 수준을 10단계로 나누고 6~7단계의 학생들이 1분 정도 하는 말을 녹음한 다음, 받아 적어서 다시 원어민이 말하는 속도로 읽어보았다. 개인차는 있었지만 15초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 원어민이 평균 속도로 3분 정도 말하는 분량은 보통 A4 용지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양이다. 이를 기준으로 중급 회화 수준의 학습자도 한 시간 회화 수업을 하는 동안 3분 이상, 즉 A4 한 페이지 분량을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외 어학연수를 기준으로 수준이나 성향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1시간 30분 수업에서 3분 정도 말한다고 보면 된다. 이 것이 네 번 있다고 했을 때 12분 분량이고, 수업 이외의 상황에서 영어를 말하는 시간을 합친다 해도 20분이 채 안 된다. 이를 토대로 한국에서 하루 1시간씩 회화 수업을 듣는 학생이 실제로 말하기를 연습하는 시간을 계산한다. 하루 평균 5분 정도를 영어로 말한다고 해보자. 한달 20일, 1년이면 240일 수업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는다면 1,200분 분량이다. 1,200분이면 20시간이다. 3년 동안 회화 수업을 하루도 안 빠지고 들어도 평균 60시간 정도이다. 어학 연수도 하루 중 영어로 말하는 시간을 대략 20분이라고 가정해도 1년에 120시간이다. 항상 반복하는 말들을 빼면 실제로 연습분량은 100시간 남짓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듯, 우리나라 영어 학습자들의 실질적인 말하기 연습 시간/분량은 원어민에 비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다. 이런 정도의 투입량으로 영어가 완성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다.


■ 디코딩(영.번역)은 해야 한다

 ≫ 영어 공부 방법 중에 '번역하지 마라' 라는 말이 있는데, 잘못된 조언이다. 영어를 읽을 때 우리말로 번역하지 말고 영어 그대로 받아들이고, 영어로 말해야 할 때도 우리말로 의미를 떠올리지 말고 영어로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번역을 하게 되면 정해진 시간 내에 문제를 순발력 있게 풀거나 말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물론 실전에서 읽기 지문을 하나하나 번역하는 것도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이것은 통합 학습법에 입각한 연습 1 단계에서 번역은 반드시 필요하다. 한편, 완벽한 번역을 하기 어렵다는 점 또한 이해해야 한다. 일대일로 완벽하게 대응될 리 없기 때문이다. 언어는 문화를 반영한다. 예로 '용'을 영어로 'dragon'으로 번역할 수 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 용은 성스로운 동물이지만 서구에서 dragon은 악의 상징이기 때문에 단어를 번역한다고 뉘앙스를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또 아이가 엄마에게 Where are you going? 이라고 물을 때, you를 '당신'이라고 옮긴다면 한국 문화에서는 올바르지 않은 번역이다. 여기서 영.번역인 디코딩은 단순히 의미 파악이 아니다. 단어의 올바른 이해, 문법 기능에 대한 이해 등을 포함해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정확하게 의미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다.


■ 너무나 빠른 우리의 뇌, 인지만 못할 뿐

 ≫ 한국 사람이 영어를 습득하려고 할 때는 2개 국어 사용자의 입장에서 디코딩(영.번역)을 통해 의미를 파악해야 하고, 파악된 의미를 바탕으로 반복 훈련을 통해 문장구조를 습득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앞에서 밝혔다. 그런데 우리 영어 교육에는 디코딩(영.번역) 단계에서부터 직독직해라는 방식이 만연해 있다. 직독직해는 문장이 전개되는 어순에 따라 들으면서 동시에 의미를 이해한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문장의 의미는 문장이 전개되는 어순대로 단어를 듣는 동시에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문장성분 하나하나가 연이어 임시 저장되었다가 문장이 끝나면서 한꺼번에 이해가 되는 것이다. ‘나는 매일 버스로 학교에 간다’라는 말을 아주 천천히 말한다고 해보자. ‘나는’까지만 말했을 때 아직 문장의 메시지는 전달되지 않는다. ‘나는 매일’까지 말해도 마찬가지다. 조금 더 나아가 ‘나는 매일 버스로’까지 말하거나 ‘학교에’를 추가해도 문장의 의미가 완전히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문장을 끝까지 말하지 않아도 듣는 사람은 정황을 통해 문장의 의미를 추론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100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다. ‘나는 매일 버스로 학교에 가……는 것은 아니야’라는 문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말에서 한 문장의 의미가 완전하게 전달되는 시점은 마지막 단어의 끝 글자까지 들려준 후이다. 의미가 전달되는 이런 과정을 모국어로 의사소통을 할 때는 의식하기 힘들다. 너무나 익숙하고 순식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상대방이 말하는 문장에서 단어가 들리는 순서대로 주욱 입력되고 바로바로 이해되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사실은 ‘나는/매일/버스로/학교에/간다’라는 문장을 이해하는 과정은 ‘임시 저장/임시 저장/임시 저장/임시 저장/의미 이해’라는 과정을 거친다. 만약 네 문장을 듣는다면, 이해 과정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낼 수 있다. "(임시 저장), (임시 저장), (임시 저장), (의미 이해) // (임시 저장), (임시 저장), (임시 저장), (의미 이해) // (임시 저장), (임시 저장), (임시 저장), (임시 저장), (의미 이해) // (임시 저장), (임시 저장), (의미 이해) 이러한 의미 전달 과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기 때문에 의식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분명히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게 된다. 모국어에서는 이 과정이 매우 빠르게 일어날 뿐만 아니라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 이야기의 앞뒤가 논리에 어긋나거나 어법상 오류가 있으면 금세 찾아내는 것이다. 뇌의 언어 정보 처리 속도는 상상 이상이다.

종종 한국어는 끝까지 들어야 의미가 파악되고, 영어는 서술어까지만 들어도 의미가 파악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영어도 우리말도 의미 단락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의미 파악이 가능하다. 또 영어에서는 동사가 제일 중요하다는 말도 자주 하는데, 일리가 없진 않으나 정확한 주장은 아니다. 왜냐하면, 가령 I go to school by bus every day라는 문장의 의미를 전달할 때 중요하지 않은 부분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주어 I가 he로 바뀌거나 서술어 go가 went로 변하면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기존 문법에서는 부사구로 취급해 경시했던 서술보충어는 어떤가? by bus가 아니라 on foot이 되거나, every day가 아니라 every Tuesday가 된다면, 주어와 서술어가 바뀌는 것만큼이나 큰 차이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I go to school by bus every day라는 문장을 이해할 때 ‘나는/간다/학교에/버스로/매일’ 형태로 디코딩할 것이 아니라 ‘나는 매일 버스로 학교에 간다’라고 의미 단락 전체를 디코딩해야 한다. 즉 영어 문장을 보면서 동시에 어구의 어순대로 번역할 게 아니라, 의미 단락인 영어 문장이 종결된 후에 의미 파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문장 하나가 아니라 대여섯 문장으로 구성된 하나의 문단을 듣는다면, 앞에서 제시한 패턴대로 임시 저장된 내용들이 이어지다가 한 문장의 의미가 파악되고, 또 임시 저장이 무수히 이루어지다가 또 다른 문장의 의미가 이해된다. 전체 문단이 마무리될 때까지 계속 이런 과정이 일어난다. 물론 처음에는 우리말로 디코딩하는 속도가 매우 더딜 것이다. 왜냐하면 영어 문장을 다 읽은 후에야 의미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나 영어 문장이 종결됨과 동시에 우리말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이는 통합 학습법의 연습 방법을 통해서 가능하다


■ 정보처리 용량의 한계, 신비의 암기법

 ≫ 마법의 수 7±2: 정보처리 용량의 한계(The Magical Number Seven, Plus or Minus Two: Some Limits on Our Capacity for Processing Information)」라는 단기기억장치에 관한 논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논문은 인지심리학자인 조지 밀러(George A. Miller) 박사가 1956년에 발표했는데, 내용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 인간의 단기기억장치가 저장할 수 있는 정보 단위(chunk)의 개수는 5개 이상, 많아도 9개를 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 우편번호나 전화번호가 6~8자리임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단어를 불러주고 몇 개를 암기할 수 있는지 살펴보면, 적어도 5개, 아무리 많아도 9개를 넘지 않는다. 따라서 단기기억 용량을 늘리는 방법은, 기억 단위의 개수를 늘리는 게 아니라 한 기억 단위(chunk)의 크기를 크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창문’, ‘겨울’, ‘남자’, 교회’, ‘전화’ 등 단어를 하나씩 암기하면 단어 하나가 하나의 단위(chunk)가 되어 많아도 아홉 개를 넘지 못한다. 하지만 이 단어들을 결합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어느 겨울에 교회 창문으로 보이는 한 남자는 전화를 하고 있었다”라고 기억한다면 이 5개의 단어가 묶여서 하나의 기억 단위로 뇌의 단기기억장치에 저장된다. 이런 방식으로 단기기억장치에 저장할 경우 25개 이상의 단어도 암기할 수 있다. 즉 이야기를 잘 만들어 하나의 단위에 더 많은 단어를 포함할 수 있다면 훨씬 많은 단어를 기억할 수 있다. 이렇듯, 하나의 단위를 크게 할 수는 있지만 단기기억장치에 저장되는 기본 단위의 개수는 5~9개 정도이다. 흔히 말하는 신비의 암기법은 이 기본 기억 단위의 크기를 효율적으로 크게 만든 방법들이다. 

 ≫ 실제로 수업 시간에 숫자를 가지고 실험을 해봤다. 칠판에 숫자를 적기 전에, 다 쓰고 나면 바로 지울 것이므로 집중해서 외워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칠판에 숫자를 30여 개를 적고 바로 지웠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숫자를 두 개씩 묶어 외웠고, 숫자에 강한 학생들은 세 개씩을 한 단위로 외웠다. 역시 대부분 5~6개 단위를 기억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두 개씩 외운 학생들은 10~12개의 숫자를, 세 개씩 외운 학생들은 15~18개까지 기억해냈다. 암기 대상을 단어가 아니라 숫자로 선택한 이유는 단기기억이 가능한 단위의 개수를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단어를 이용하면 익숙한 단어들일 경우 이야기를 만들어서 외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7 7 8 5 7 2 4 6 2 4 5 5 4 0 0 5 0 6 0 8 4 3 1 8…… 같은 식으로 나열했다. 그런데 이 숫자들은 전화번호들을 나열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778 5724’, ‘554 0050’ 같은 식이다. 만약 학생들이 이러한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다면 숫자를 2~3개씩 묶어서 기억하는 게 아니라, 7개의 숫자를 한 단위로 기억할 것이며, 총 기억할 수 있는 숫자의 개수는 (5단위를 기억한다면) 35개일 것이다. 이 단기기억장치의 기능을 이해함으로써 영어의 문장구조 습득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나온다. 보통 ‘나는 배가 고프다’라고 하면 이를 하나의 단위로 이해하지, ‘나는’, ‘배가’, ‘고프다’를 각각 이해하지는 않는다. 즉 하나의 의미단위인 문장은 하나의 단기기억 단위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에 5~6문장 정도 기억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 토익 점수 600점 수준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한 문장은 대략 10개 전후의 단어로 구성되었으며, 이야기의 흐름이 있는 4~5개의 문장을 암기하도록 했다. 집중력이 유지되도록 약간의 연습을 한 후 실시했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한 문장 정도를 기억해냈다. 간혹 두 문장까지 기억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10퍼센트 미만으로 나타났다. 이유가 무엇일까? 만약 암기력에 관한 문제였다면 우리말 문장 역시 5~6개를 기억해내기 불가능했을 것이다. 즉 이것은 단순히 암기력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영어 문장들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영어 문장을 들을 때, 하나의 의미로 듣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단어로 듣기 때문이다.


■ 얼마나 긴 문장을 외워야 하나?

 ≫ 하루 다섯 문장씩 외운다. 단, I love you 같은 짧은 문장은 안되고, 최소한 I am going to meet the man who you mentioned before 또는 Janet, one of my best friends, was fired due to repeated absences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문장들이 하나의 이야기 흐름이 되어 한국어로도 기억할 수 있으면 더 좋다. 그렇게 5개의 문장이 계속 이어져서 하나의 책 한권의 분량이 되었을 때,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이 반복되어야 한다.



■ 이 글을 보는 분들에게 말씀

 ≫ 노무현 대통령께서 뇌물을 받았다는 증거 기사가 있다면, 댓글로 출처를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증거는 없었고 모두 거짓이라는 기사와 증언이 쏟아졌습니다. 2015년 이인규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에 의해 밝혀졌지만, 대검찰청에 억대의 피아제 시계 뇌물 논란 또한 국정원의 대국민 망신주기 언론 플레이였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는 적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는 시민만을, 약자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故 노무현 대통령 묘소


■ 노무현 대통령의 퇴임

 ≫ 노무현 대통령은 검찰의 뇌물수수혐의 수사 도중 국정원의 모욕주기 언론플레이에 고통받았다. 사망 이후에도 인터넷 여론공작으로 고인 모독을 당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말로 뇌물을 받았을까? 노무현 대통령은 진짜로 차명계좌를 통해 비리를 저질렀을까? 그 진실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보았다. 


■ 노무현 대통령의 차명계좌

 ≫ 조현오 전 청장은 서울경찰청장으로 재직하던 2010년 3월 일선 기동대장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2009년 노 전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날 10만 원권 수표가 입금된 거액의 차명계좌가 발견돼 자살에 이르렀고, 권양숙 여사가 특검을 막기 위해 민주당에 부탁했다"는 허위 발언을 했다. 조현오 경찰청장 내정자의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과 관련, 검찰이 차명계좌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고 문화일보가 2010년 8월 19일 보도했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이날 “(차명계좌 존재 여부 확인에 대해) 하나하나 들여다보겠다”며 “아직 사건이 접수만 됐고 2010년 8월 19일, 검토해서 배당할 것”이라고 신문에 말했다.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2012년 9월 대법원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 유족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조현오 전 경찰청장에 대해 징역 8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차명계좌 설은 결국 "찌라시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현오 전 경찰청장은 수감 8일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조현오 전 청장은 이후 재판과정에서 발언의 출처나 근거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거나 오락가락하는 발언을 했다.


2010년 3월 31일 당시 조현오 서울지방경찰청장은 기동부대 지휘요원 398명을 대상으로 열린 특별교양 강연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기를 앞둔 시점에 나온 그의 발언에 여론의 시선이 집중됐다. 서울경찰청장은 고급정보를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뭐 때문에 사망했습니까? 뭐 때문에 뛰어내렸습니까? 뛰어버린 바로 전날 계좌가 발견됐지 않습니까, 차명계좌가? 10만 원짜리 수표가 타인으로, 거액의 차명계좌가 발표돼, 발견이 됐는데, 그거 가지고 아무리 변명해도 변명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거 때문에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린 겁니다."


관련기사 : 검찰 "노무현 차명계좌 존재하는지 들여다보겠다 2010년 8월 19일 기사

관련기사 : 대법원 '노무현 명예훼손' 조현오, 실형 확정... 왜? 2014년 3월 13일 기사


■ 동아일보의 노무현 죽이기 결국엔 가설.

 ≫ 검찰이 조 전 청장을 사자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기소하기 직전인 2012년 5월 <동아일보>는 "조현오 前 경찰청장 '어느 은행, 누구 명의인지 다 까겠다'"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 신문은 기사에서 "조현오 전 경찰청장 3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차명계좌가 어느 은행에 누구 명의로 돼 있는지 검찰에 출석해 모두 까겠다'고 말했다"며 "이에 따라 노 전 대통령의 차명계좌를 둘러싸고 커다란 정치적 파장이 일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동아일보>는 또 다음 날인 5일에도 "'조현오 파일 실체' 존재한다면 대선판 전체 흔들 '뇌관'"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12월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 '조현오 파일'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조 전 청장이 검찰에서 '노무현 차명계좌'의 객관적 근거를 제시한다면 야권의 대선 후보 구도는 물론이고 대선판 전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근거로 작성됐다.


관련기사 : 조현오 前 경찰청장 '어느 은행, 누구 명의인지 다 까겠다 2012년 5월 4일 기사


■ 노무현 대통령의 퇴임 후, 그리고 뇌물 수수

 ≫ 노무현 대통령은 2008년 퇴임 후 전임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고향 김해시 봉하마을로 귀향하였다. 이후 사람사는세상 사이트를 운영하며, 봉하마을 촌장으로 재임하는 등, 민중들과 교류를 추구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역차별 논란에도 불구하고 재임시절 친인척 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할 정도로 친인척 비리를 경계했으나 2009년 '박연차 게이트'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되었다. 박연차 게이트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 세종캐피탈 사장 사이의 세종증권 매각 사건을 조사하던 중 박연차가 수 많은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제공해온 것이 밝혀진 비리 사건이다. 검찰은 박연차가 노 전 대통령에게 15억 원에 대한 수사를 벌였으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차용증을 제시하였고, 사저신축비 용도로 빌린 개인 간의 금전 거래로 판단하여 무혐의 종결 되는 등 비리를 매우 경계했다. 이후 박연차가 권양숙 여사에게 건낸 100만 달러(약 10억-13억원 정도), 정상문에게 건낸 3억 원, 연철호에게 건낸 500만 달러에 대해 수사가 이루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은 임기중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에게 100만 달러와 3억 원을 요구하여 돈을 받은 것을 시인하였는데, 이 돈은 권양숙 여사가 개인 빚 청산과 자녀 유학비로 사용하였다고 밝혔다. 박연차-권양숙 간 돈이 오간 것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 본인은 인지하지 못했다고 주장하였으며, 차용증 등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검찰은 이 또한 개인 간의 금전 거래임을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입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처음 1기 검찰 수사진은 당시에 검찰 내부에서 명망있는 검찰들이었다. 몇 개월에 걸쳐 장기간 수사가 진행되었으나, 1기 검찰 수사진은 퇴임 이후 박연차와의 거래는 사적 거래라 수사할 내용이 없다고 보고 종결지었다.


노무현 재단, 사람사는 세상 사이트 : (클릭)

※ 노무현 재단의 슬로건은 "노무현은 지키지 못했지만, 노무현 정신만은 지키고 싶습니다"의 슬로건으로 기념관이나 교육,연구사업 나눔사업 및 회원참여 프로그램으로 봉사, 참여정부 정책총서 등을 발간하고 있다.



■ 대국민 망신 주기 언론플레이

 ≫ 1기 검찰 수사진의 수사가 종료되고, 수개월 후 2기 검찰 수사진이 꾸려졌다. 이인규, 홍만표 등이 합류하였고 이인규는 이전 수사진의 수사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주변 인물들이 차례차례 소환당했고 일가족 역시 소환당했다. 소환은 한 번이 아니라 수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면서 노무현 대통령을 조여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상황이 방송과 언론을 통해서 매일 매일 브리핑되는 가운데, 어쩐 일인지 검찰은 어떠한 액션도 하지 못한 채 3주 이상이나 지속되었다. 국내 모든 매체는 카메라를 봉하마을에 경쟁적으로 설치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심지어 방송사는 헬리콥터까지 동원하여 봉하마을을 촬영하기까지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홈페이지에 "저의 집은 감옥입니다."는 글을 남겼다. 모든 언론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공격하였고 흡사 온 세상이 압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여론은 노 전 대통령에게 매우 불리하게 형성되었다. 2015년, 이인규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은 “국정원이 노무현 대통령 수사 내용을 과장해 흘렸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인규 전 중앙수사부장은 <경향신문>에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받은 명품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언론보도 등은 국정원 주도로 이뤄진 것”이라며 “검찰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수사내용으로 언론플레이를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당시 원세훈 국정원장이 보낸 국가정보원은 대검찰청에 억대의 피아제 시계 뇌물 논란을 활용한 대국민 망신주기 언론 플레이를 제안하였고, 국정원 측이 자신들의 뜻을 일방적으로 관철하려 하자 검찰은 "수사권 침해"라고 반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검찰은 국정원 직원의 멱살을 잡으며 몸싸움까지 벌였다고 2015년에 2009년에 있던 일이 알려졌다. 이명박 정부가 ‘촛불집회’ 등으로 궁지에 몰리자 검찰이 이를 돌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는 게 정치권과 법조계의 분석이다. 결국 검찰도 국정원과 똑같은 충성 경쟁을 벌였다는 지적이다.


관련기사 : 盧 대통령 수사 두고 검찰과 국정원, ‘멱살잡이’까지 2015년 2월 27일 기사

관련기사 : [SNS] 이인규, 盧수사 폭로.. “공작정치의 끝” 2015년 2월 25일 기사 



■ 국정원의 여론 공작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한 직후, 국민장을 치루며 온 국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국정원은 노무현 대통령을 비하하는 인터넷 게시물 수천 개를 유포시키며 추모 분위기를 방해했다. 이후에도 국정원은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 노무현 대통령을 모욕하는 게시물을 지속적으로 생산, 유포했다. 국정원 직원이며 디씨인사이드에서 활동했던 닉네임 좌익효수(아이디 : chiwoo9300)는 인터넷에 지역감정 조장, 여성혐오, 차별주의적 정치관을 디시인사이드 정치사회 갤러리 위주로 피력[각주:1]했다. 그 중 하나를 가져오면, "홍어 종자 절라디언들은 죽여버려야 한다" 등이다. 닉네임의 뜻은 좌파를 효수(능치처참)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부적격자가 국정원 직원이었단 점에서 국격은 물론 국가기관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다.


관련기사 : 국정원 “놈현 큰 죄가 많았군요~”...서거 후 비하 댓글 수천개 추가 공개 2013년 6월 26일 기사



■ 노무현이 이명박 대통령께 보낸 편지

 ≫ 2008년 7, 8월 이명박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기밀을 빼돌렸다며 봉하마을을 압수수색하라고 지시했다. 압수수색을 지시했던 추측되는 이유는 당시 한/미 FTA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를 중점으로 진행중인 촛불시위 때문으로 추측된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 당시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대응 때 한마디로 "미국산은 위험하니 안된다" 였으나 이명박 대통령은 바로 통과시켰던 문제다. 당시 노무현 지지자들이 이명박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비교하였고 이명박 대통령이 그로 인해 노무현 대통령을 압수수색한 것으로 전해진다. (여론돌리기 및 노무현 잠재우기 등으로 추정)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통치기록을 봉하마을로 가지고 내려갔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와 청와대에서 합의를 본 사항이었다. 그러나,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이 일을 국가 기밀을 빼돌렸다로 지시했다. 노무현은 왜 통치기록을 가져갔을까? 그것은 "민주주의 2.0" 이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개설한 토론 웹사이트였다. 이 사이트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들어와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모든 토론의 형식이나 진행, 시스템 등은 회원 참여에 의해 결정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정책 등을 실시간으로 국민들과 토론하길 원했다. "민주주의 2.0" 을 만들기 위한 서버 컴퓨터 5대를 봉하마을에 가져간 것이다. 이 서버 5대를 이명박 정부는 국가 기밀이라며 일침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썼다고 한다.


(노무현이 정권 퇴임 후, 시민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하기 위해 만든 민주주의 2.0, 노대통령께서 서거하신 현재는 없다)


관련기사 : '민주주의 2.0' 문 열었다 2008년 9월 18일 기사




■ 그 외 노무현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부치지 않은 편지

 ≫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전에 이명박 대통령에게 썼지만 부치지 않았던 편지 1통과 검찰 수사 때 추가진술을 위해 준비했던 글 1편을 비롯한 미공개 글 2편이 공개됐다. 편지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관련기사 : 노무현이 MB에게 '부치지 않은 편지' 공개 2009년 10월 7일 기사

노 대통령의 서거, 편지에 대한 기록은 아래의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내 마음속 대통령
10점


출처 : 분노에 찬 기사 검색 / 구글 검색 및 나무위키 조사, 노무현 관련 책, 팟빵 라디오 등 여러가지


 

관련글 : [날짜확보] 노무현이 서거하신 이유 중 하나, 친일파와 전쟁한 노무현, 친일파 나라를 속이다

[시사 및 리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해외반응

  1. 피력하다 : 생각하는 것을 털어놓고 말함. [본문으로]

■ 시사점

 ≫ 한국 원전이 안전하다. 사고가 난 적이 없다는 것은 믿기 어려움, 과거 역사에서 박정희대통령은 핵 개발을 위해 가압중수로를 들인 적이 있었음. 한국의 구리 원전의 경우 방파제가 취약하여 해일에 대비책이 필요함. 한국 한울 원자력 발전소는 2007년 한국에서 최다 고장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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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자력안전위원회 의원, 동국대학교 교수 김익중

 ≫ "1979년 미국의 스리마일 원전사고, 1986년 구소련 체르노빌 원전사고, 2013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들에서 공통점을 찾다가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확률입니다. 원전 개수가 많은 나라 순으로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김익중 교수가 방송에서 한 발언이다. 미국은 104개, 사고 당시 소련은 66개, 일본은 54개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순서대로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원전 23개를 운영하고 있지만 현재 건설 중인 원전이 5개, 2022년까지 총 42개를 완공할 예정이라고 한다. 미국에 이어 소련, 그리고 일본에서 원전사고가 났다고 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고는 원전대국들에서 발생한 것이다. 원전개수가 많은 순서대로라는 것인데, 이 시점에서 저자 김익중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원전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확률을 계산해 봤다고 한다. 저자의 추정치는 27%, 참고로 저자는 서울대에서 의학과 미생물학을 졸업했다. 일본 보험회사의 계산법대로라면 30~40년 내로 한국에서 핵사고가 날 수 있다고 한다.

 ≫ 김익중 교수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일단, 원전의 개수를 늘리는 것에 문제를 제기한다. 후쿠시마사고 이후 중국도 일년간은 원전공사를 하지 않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독일,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등은 탈핵의 과정을 밟고 있고, 유럽의 최대 원전대국인 프랑스마저도 원전 개수를 줄이는 것이 대통령 공약사항이라고 한다. 정부가 원전을 없애고 지금부터라도 태양열 등의 재생가능에너지 개발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촉구한다.



■ 현재 한국 원전은 몇 대이며, 생산 용량은 얼마일까?
 ≫ 대한민국은 2015년도 기준으로 4곳의 원자력 발전소와 24기의 원자로를 가동중이다. 발전량 기준으로는 세계 6위이며, 회사 단위로는 세계 2위의 원자력발전회사인 한국수력원자력이 있다. 원전은 한국 내 전체 전기 생산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 대한민국 원자력 발전소는 2001년 4월 2일 설립된 한국전력공사 계열 발전회사인 한국수력원자력에서 독점 운영하고 있으며, 2011년 10월 26일 설립된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원자력안전위원회 산하 위탁집행형 준정부기관인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의 감시감독을 받고 있다.
 ≫ 현재 원전은 4곳이 있다. 한울, 월성, 고리, 한빛이다.


■ 상업운전 개시 순서로 보기

구분

상업운전 개시

원자로형

설비용량 (kW)

고리 1호기

1978년 04월 29일

가압경수로 (PWR)

58만 7천

월성 1호기

1983년 04월 22일

가압중수로 (CANDU)

67만 9천

고리 2호기

1983년 07월 25일

가압경수로 (PWR)

65만

고리 3호기

1985년 09월 30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고리 4호기

1986년 04월 29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빛 1호기

1986년 08월 25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빛 2호기

1987년 06월 10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울 1호기

1988년 09월 10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울 2호기

1989년 09월 30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빛 3호기

1995년 03월 31일

가압경수로 (System 80)

100만

한빛 4호기

1996년 01월 01일

가압경수로 (System 80)

100만

월성 2호기

1997년 07월 01일

가압중수로 (CANDU)

70만

월성 3호기

1998년 07월 01일

가압중수로 (CANDU)

70만

한울 3호기

1998년 08월 11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월성 4호기

1999년 10월 01일

가압중수로 (CANDU)

70만

한울 4호기

1999년 12월 31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빛 5호기

2002년 05월 21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빛 6호기

2002년 12월 24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울 5호기

2004년 07월 29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울 6호기

2005년 04월 22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신고리 1호기

2011년 02월 28일

가압경수로 (OPR-1000)

100만

신고리 2호기

2012년 07월 20일

가압경수로 (OPR-1000)

100만

신월성 1호기

2012년 07월 31일

가압경수로 (OPR-1000)

100만

신월성 2호기

2015년 07월 24일

가압경수로 (OPR-1000)

100만

신고리 3호기 (건설중)

2014년 8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고리 4호기 (건설중)

2014년 9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한울 1호기 (건설중)

2017년 4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고리 5호기 (건설중)

2018년 12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한울 2호기 (건설중)

2018년 4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고리 6호기 (건설중)

2019년 12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한울 3호기 (건설예정)

2020년 6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한울 4호기 (건설예정)

2021년 6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 설비용량 순차로 보기

구분

상업운전 개시

원자로형

설비용량 (kW)

고리 1호기

1978년 04월 29일

가압경수로 (PWR)

58만 7천

고리 2호기

1983년 07월 25일

가압경수로 (PWR)

65만

월성 1호기

1983년 04월 22일

가압중수로 (CANDU)

67만 9천

월성 2호기

1997년 07월 01일

가압중수로 (CANDU)

70만

월성 3호기

1998년 07월 01일

가압중수로 (CANDU)

70만

월성 4호기

1999년 10월 01일

가압중수로 (CANDU)

70만

고리 3호기

1985년 09월 30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고리 4호기

1986년 04월 29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빛 1호기

1986년 08월 25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빛 2호기

1987년 06월 10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울 1호기

1988년 09월 10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울 2호기

1989년 09월 30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신고리 1호기

2011년 02월 28일

가압경수로 (OPR-1000)

100만

신고리 2호기

2012년 07월 20일

가압경수로 (OPR-1000)

100만

신월성 1호기

2012년 07월 31일

가압경수로 (OPR-1000)

100만

신월성 2호기[5]

2015년 07월 24일

가압경수로 (OPR-1000)

100만

한빛 3호기

1995년 03월 31일

가압경수로 (System 80)

100만

한빛 4호기

1996년 01월 01일

가압경수로 (System 80)

100만

한빛 5호기

2002년 05월 21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빛 6호기

2002년 12월 24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울 3호기

1998년 08월 11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울 4호기

1999년 12월 31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울 5호기

2004년 07월 29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울 6호기

2005년 04월 22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신고리 3호기 (건설중)

2014년 8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고리 4호기 (건설중)

2014년 9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고리 5호기 (건설중)

2018년 12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고리 6호기 (건설중)

2019년 12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한울 1호기 (건설중)

2017년 4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한울 2호기 (건설중)

2018년 4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한울 3호기 (건설예정)

2020년 6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한울 4호기 (건설예정)

2021년 6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 현재 한국 원전은 몇 대이며, 생산 용량은 얼마일까?

 1. 한국의 고리 원자력 발전소

 ≫ 고리 1호기는 국내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입니다..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지어주었고, 1978년 4월 29일 처음 가동되었으며 원전 4기 주위로 방파제가 있는데요. 사진에서 보듯이 방파제가 매우 허술합니다고리 1호기의 탄생으로 우리나라는 21번째로 원자력 발전을 하는 국가가 되었으며, 2015년 6월 12일 기준, 그동안 고리 1호기는 124건의 크고 작은 사고를 일으켜왔습니다. 이후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이 국제기준에 따라 안전성을 심사한 결과 계속운전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2007년 12월에는 결국 주민들과의 합의도 이뤄집니다. 고리 1호기는 이듬해 1월 정부로부터 2017년 6월까지 10년간 운전을 허가받아 다시 가동에 들어가게 됩니다. 2007년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주기적 안전성 평가’ 기준과 미국의 ‘운영 허가 갱신’ 기준 등을 적용한 결과 고리 원전 1호기의 원자로 용기와 배관, 각종 구조물 등 주요 기기가 10년간 충분히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 이후 고리 1호기는 노후 원전의 대명사로 여론의 불신을 받기 시작했는데요.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전 세계의 이슈였던 2011년 4월, 전기제어장치(인입차단기) 고장으로 원자로 가동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맙니다. 원자력 안전에 특히 민감하던 시기여서 부산지방변호사회가 가동중지 가처분 신청을 내고 지방의회까지 결의안을 내는 등 지역 사회의 반발과 우려가 거셌는데요. 결국 정부는 정밀 점검 결과 문제가 없다고 결론 내리고, 5월 재가동을 허가했습니다.

 ≫ 참고로 후쿠시마 원전 1호기는 1971년 2월에 가동을 시작했고, 일본 정부가 수명을 10년 연장했습니다. 우리나라 또한 2008년에 설계수명 30년이 지나자 수명을 10년 연장한것과 닮은 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후쿠시마 원전보다 고리 원전이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고리 원전이 좀 더 안전합니다. 후쿠시마의 경우 전원이 차단되면 수소가 농축되어 폭발할 수 있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폭발했습니다. 하지만 고리 원전은 전원이 차단되어도 수소를 제어할 수 있는 안전 장치가 추가로 설치되어있습니다.


[구글 지도에서 보기]


관련기사 : <고리원전 1호기 10년 더 가동한다>, 동아사이언스 2007년 12월 07일자

관련기사 : 고리원전 1호기 고장… 재가동 논란

관련기사 : [르포]고리 원전 1호기 가보니…



 2. 한국의 월성 원자력 발전소

 ≫ 고리 1호기가 1978년 가동 시작 후, 1983년 월성 1호기가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2,3,4호기는 97년~99년 사이에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고리에 비해 방파제도 길게 잘 만들어진 편(붉은색 다각형), 월성 1,2,3,4호기는 가압 경수로인 고리 원전과 달리 캐내다의 CANDU형 가압중수로로 만들어졌습니다. 가압중수로로 개발된 이유는 발전소 건설이 진행되던 박정희 정권 때 핵개발을 진행했고 70년대 중반에 이미 핵무기 설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경수로에서는 핵물질을 추출할 때 사용할 연료봉 생산이 힘들기 때문에, 캐나다에서 중수로를 사오게 됩니다. 번외로 인도 역시 CANDU형 중수로로 핵개발에 성공했고 캐나다가 이후 한국에 CANDU를 팔지 않게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외부로 기술을 유출했다는 설)

 ≫ 핵무기 개발을 염두하고 중수로를 사들여왔으나, 중간에 미국 포드 행정부의 방해로 인해 한국은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1979년에 핵연료 재처리 시설의 설계가 끝났고 계획대로라면 1985년쯤에는 플루토늄 핵폭탄을 만들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 만약 인도나 파키스탄처럼 주변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발을 했다면, 아마 경제 제제로 인해 현재 경제만큼 부상하지 못했을 것 입니다. 박정희 암살 이후 전두환 정권에서는 한반도 비핵화 선언과 함께 연구 자료와 프로젝트를 전량 폐기했다고 합니다. 한국에 가압중수로 발전소가 있는 이유는 박정희 정권의 70년대 핵개발 열망때문이라는 것.

 ≫ 만들어진지 1년도 안된 1984년에 23톤의 중수가 유출되었고, 1988년에도 누출 사고로 인해 3일간 원자로를 멈춤, 2014년엔 월성 원전이 해킹당했고, 2015년 5월 15일 월성 4호기 사용 후 핵연료봉 낙하사고, 2016년 5월 12일 월성원전 1호기 고장으로 발전이 정지되었습니다.


관련기사 : 원전 해킹..불안감은 여전

관련기사 : 월성 4호기 사용후 핵연료봉 낙하 사고

관련기사 : 월성원전 1호기 고장으로 발전 정지


[구글 지도에서 보기]



3. 한국의 영광 원자력 발전소

 ≫ 다른 발전소들은 다들 동해안에 건설되었는데, 영광만 서해안에 건설된게 이색적입니다. 영광 1호기는 1986년 8월 25일에 운전을 시작했고, 형태는 고리 원전에 사용된 원자로와 유사한 가압 경수로입니다. 1995년에 운전을 시작한 영광 3호기부터는 OPR1000(Optimized Power Reactor 1000=KNSP)이라는 한국형 원자로를 사용하기 시작, 참고로 OPR1000은 북한 영변에 지어주던 경수로와 동일한 형태입니다. 95년부터는 국내 기술 95%의 OPR1000 설계의 원자로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설계 수명은 40년. 기존 고리 1호기의 30년과 비교하여 10년이 더 늘어났습니다.

 ≫ 그림의 왼쪽부터 1호기 마지막 오른쪽이 6호기입니다. 2002년 12월 24일 영광 6호기를 끝으로 이 지역 원전 건설을 끝이난 듯 합니다.

 ≫ 2005년, 김봉열 영광군수는 '영광원전이 가동된 이후 20여 년 동안 124건의 크고 작은 고장이 발생했고 2003년 5·6호기 열전달 완충판 이탈, 동년 12월 5호기 방사성 오염폐수 3500t 바다 유출, 3·4호기 증기발생기 세관 결함이 발생'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관련기사 : 우리나라에 원전 사고가 단 한건도 없었다고?


[구글 지도에서 보기]



4. 한국의 한울(울진) 원자력 발전소

 ≫ 한울(울진) 1호기는 1988년에 프랑스 프라마톰사가 가압 경수로 형태로 지어주었고, 1998년부터 가동을 시작한 한울 3호기부터는 우리나라 독자 규격인 OPR1000 형태로 지어졌습니다. 앞에 길게 늘어선 방파제가 있습니다. 2001년에 뜨끈한 배출수에 유혹되어 밀려들어온 새우떼와 해파리떼 때문에 냉각용 해수 흡입구가 막혀서 원자로를 잠시 멈추는 사고가 발생했고, 그 외에도 몇번 냉각수 유출 사고가 있었습니다. 2003년에는 5년동안 증기 발생기와 안전 시설을 보강하는 작업을 한 바 있습니다. 2016년 기준 6기의 상업용 원자로가 가동중이며, 발전소 인접 부지에 신한울 1,2호기의 공사가 진행중입니다. 2013년 5월에 울진원자력발전소에서 한울원자력발전소로 이름을 변경했습니다. 

 ≫ 2004년 이후 고장 사고로 인한 가동 중지건수가 21건으로, 전체 원자력 발전소 41건의 절반을 차지하여 2007년에 대한민국에서 최다 가동 중지 원자력 발전소로 기록되었으며, 직원의 조작 실수로 인한 고장, 정지건도 총 8건 가운데 이곳이 5건을 차지하였습니다.


관련기사 : 왜 울진原電만 이런일이?…가동중단 사고 최다


원전사고 문자알림 신청하기



출처 및 참고 : 오마이뉴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3yMF&articleno=15601245

http://www.dongascience.com/news/view/7283 그 외 글마다의 아래 관련기사들 참조.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 원자력발전소 이해전에 숙지하기

(제어봉)

 ≫ 원자로는 연쇄핵분열 반응을 통해 열을 생산하는데, 제어봉은 연쇄핵분열의 매개체인 중성자를 흡수해 연쇄핵분열 속도를 조절하는 도구이다. 제어봉을 만드는데 이용되는 물질들은 중성자의 에너지 변화에 따라 중성자 포획 능력이 달라지므로, 제어봉 집합체는 원자로의 다양한 중성자 에너지 영역에 맞추어 설계해야 하며, 보통 은, 카드뮴, 붕소, 인듐이 재료가 된다.

(노심)

 ≫ 원자로의 핵연료를 담고 있는 원자로의 부품으로, 핵반응이 일어나는 곳이다. 노심 안에는 핵연료와 제어봉 있고, 냉각재가 상실되면 중대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체르노빌 사고와 관련 있음), 노심에 핵분열로 생긴 열이 쌓이면 노심의 구조물이 녹거나 파손되는데 그 자체가 파손되어 방사성 물질이 주위에 확산될 수 있다.


■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의 구조와 개략도로 설명하는 원전사고

 ≫ 원자력 발전에서는 핵연료(일반적으로 우라늄)를 핵분열 반응을 통해 태워 물을 끓이고 그 증기로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만들어낸다. 핵분열 반응은 우라늄에 외부 중성자가 흡수되면 우라늄이 더 안정한 다른 원소로 분열되면서 큰 에너지를 방출하고 그 과정에서 여분의 중성자가 생성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중성자들은 다시 근처의 우라늄에 흡수되면서 연쇄적으로 핵분열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큰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다. 원자력 발전에서 핵분열 반응을 조절하기 위해 감속재와 제어봉이 주로 사용되는데, 감속재는 핵분열 반응에서 생성된 중성자의 속도를 느리게 하여 핵분열 반응을 증가시키고(중성자가 너무 빠르면 우라늄에 흡수되지 않고 그냥 통과해 버려 핵분열 반응이 연쇄적으로 발생하지 않게 된다), 제어봉은 중성자를 흡수하여 핵분열 반응을 멈추게 한다. 스리마일 섬 원전인 가압경수로는 일반 물을 감속재로 사용한다. 여기서 ‘가압’이라는 말은 원자로 내부의 냉각수를 고압으로 유지해 물이 끓지 않도록 한다는 뜻이다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의 가압경수로 개략적 구조)


(확대를 위한 원전 구조 -1)

(확대를 위한 원전 구조 -2)

 ≫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 당시 가압기의 증기 배출 밸브(PORV, 7)가 열려 있어 사고 발생 2시간이 지나서야 블록 밸브(Block valve, 9)를 이용하여 증기 배출이 차단되었다. 또한 증기발생기(3)에 연결된 비상 냉각수 공급관의 블록 밸브(24)가 닫혀 있었으며, 방사능에 오염된 1차 계통 냉각수가 보조건물(Auxiliary Building)로 유출되어 냉각수에 녹아 있던 방사능 물질이 환기구(22)를 통해 대기로 방출되었다.

 ≫ 증기발생기에서 냉각된 1차 계통의 냉각수는 냉각수 펌프(Reactor Coolant Pump, 5)에 의해 원자로 노심으로 다시 순환된다. 터빈을 돌리는 데 사용된 2차 계통의 증기는 냉각탑(Cooling Tower, 13)에서 공급되는 외부 냉각수에 의해 응축기(Condenser, 12)에서 다시 물로 변환되고 이온변환기(Demineralizer, 14)에서 불순물이 제거된 뒤에 펌프(Main Feedwater Pump, 23)에 의해 다시 증기발생기로 순환된다. 원자로와 1차 냉각 계통은 격납건물(Reactor Building, Containment)에 설치되고, 증기발생기를 제외한 2차 계통은 터빈 빌딩에 설치된다. 따라서 방사선에 노출되는 1차 계통 냉각수와 발전기를 돌리는 데 사용되는 2차 계통 냉각수가 서로 분리된다.

 ≫ 원자로 내부를 순환하는 1차 계통 냉각수가 증기로 변환되면 냉각수 흐름을 방해하고 원자로가 가열되거나, 중성자 흡수가 낮아져 핵분열 반응이 가속될 수 있다. 따라서 높은 온도에서도 물을 액체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가압기(Pressurizer, 6)가 사용된다. 물의 압력이 높아지면 압력 밥솥에서 그런 것처럼, 끓는 점이 올라가기 때문에 높은 온도에서도 물을 액체 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 가압기의 구조도 압력 밥솥과 비슷한데, 내부에는 물과 증기가 함께 섞여 있고 하단에는 가열기, 상단에는 살수 노즐이 있다. 압력을 높힐 때는 가열기를 이용하여 증기를 더 만들어 압력을 높히고, 압력을 낮출 때는 살수 노즐에서 냉각수를 뿌려 증기 일부를 물로 변환(응축)해 압력을 낮춘다.

 ≫ 압력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상단의 배출 밸브(Pilot Operated Relief Valve, 7)가 열리면서 증기가 배출되고 압력이 낮아진다. 가압기에서 배출된 증기는 격납건물 내의 증기 배출 탱크(Drain Tank)에 저장된다. 원자로 격납 건물 바닥에는 배수조(sump)가 있으며, 이 배수조가 일정 수위 이상으로 차게 되면 보조건물에 마련된 방사능폐기물 저장탱크(Radiation waste storage tank)로 옮겨진다. 보조건물에는 1차 계통 냉각수 양을 조절하기 위한 냉각수 보충 탱크(Makeup tank, 18)가 있고, 비상시에 고압 주입 펌프(High Pressure Injection Pump, 15)에 의해 냉각수가 원자로에 직접 주입될  있다. 냉각수가 너무 많을 경우에는 배출 라인(Let-down)을 통해 붕산염 물 저장 탱크(Borated Water Storage Tank, 붕산염은 중성자를 흡수하여 핵분열 반응을 느리게 함)에 저장된다. 1차 냉각수에 녹아 있는 방사성 물질(주로 제논[Xe]과 같은 비활성 기체)은 배출가스 압축기(Waste Gas Compressor)에 의해 배출가스 감쇠탱크(Waste gas decay tank, 20)에 저장된다.

 ≫ 원자로가 급격히 과열되는 경우 크게 두 가지 긴급 조치가 취해지는데, 첫번째는 원자로 비상정지(SCRAM)라 불리는 방법으로 모든 제어봉을 원자로에 긴급히 삽입하는 것이다. 제어봉은 중성자를 흡수하기 때문에 핵분열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차단한다. 두번째 방법은 노심긴급냉각장치(ECCS; Emergency Core Cooling System)라 불리는데, 여러 장치가 복합적으로 사용되지만 스리마일 섬 원전에서 사용된 방법은 저장되어 있는 냉각수를 고압 펌프(위 그림 2에서 15)를 이용하여 원자로 내부에 직접 주입하는 것이다. 스리마일 사고에서는 이 두가지 방법이 모두 사용되었지만 (ECCS는 부분적으로 사용됨) 핵연료봉이 녹으면서 방사능 물질이 누출되는 노심 용융이 발생했다. 출처/IEEE Spectrum 1979


■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 사고 원인과 당시 상황

(부주시사 윌리엄 스크랜튼(좌) 비상 관리국 국장 오란 핸더슨(우))

 ≫ 1979년 3월 2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미들타운에서 일어난 멜트다운 사고[각주:1]. 국제 원자력 사고 척도로는 시설외까지 위험을 수반한 사고(레벨 5)다. 한국에서도 같은 종류가 가동 중인 가압수형 원자로가 일으킨 역대 최악의 사고당시 스리마일 섬에는 총 2개의 원자로가 건설되어 있었고 원자로의 유형은 가압수형 원자로였다. 가압수형 원자로의 경우 압력을 가한 물을 원자로 냉각재 및 중성자 감속재로 사용하기 때문에 이 물이 끊임없이 순환되도록 유지하여 끓지 않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스리마일 섬 사고의 경우 가장 중요한 급수 시스템에서 문제가 생겼던 것이 원인이다.

 ≫ 사고를 발생시킨 최초원인은 뚜렷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자정 무렵 발전소 1호기의 핵연료 재충전을 위해 차단조치를 내렸고 여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조치로 발전소는 2호기만 가동 중이었고 가동 내내 큰 문제가 없었는데 새벽 4시 무렵 주 급수 펌프가 뻗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조치로 발전소는 2호기만 가동 중이었고 가동 내내 큰 문제가 없었는데 새벽 4시 무렵 주 급수 펌프가 뻗는 사고가 발생했다. 가압수형 원자로는 물 공급이 중요하기 때문에 주 급수 시스템이 뻗으면 보조장치가 바로 작동하여 위험한 사태를 피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는데, 최초 보조급수 계통 밸브가 닫혀있었다. 정상시 보조급수 계통이 개방된 채로 가동되어야 하지만 당시 운전원이 개방이 되었는지 닫혀있었는지 알지 못했었다. MCR 내부 보조급수기가 닫혀있는지 열려있는지를 표시해주는 표시등이 표지판 같은 Tag에 가려져 운전원이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열려야 할 보조급수계통 밸브가 몇 개는 닫혀있었고, 열리지 말아야할 가압기 압력 방출 밸브가 개방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미세한 누출이 있었는데 통제실 콘솔 표시등에는 수치가 정상수치 범위내로 표시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비상 노심 냉각 시스템이 가동되어 원자로를 식히고 있었는데 이걸 정상이라고 판단한 운전원은 비상 노심 냉각 시스템을 꺼버리게 된다.

 ≫ 당시 원자로 내 냉각수는 실제로는 줄어들고 있었지만, 계측기에는 냉각수 수위가 올라가는 것으로 표기되고 있었다. 정상상태에서 고압인 원자로 내 압력이 가압기 압력방출밸브의 미세한 누설로 압력이 빠지고 있었고, 압력이 떨어진 액체 상태의 물은 기체상태로 변하는 현상이 발생하므로 냉각수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당시에 설치되어 있던 노심 수위 계측기는 이 끓어오르는 거품을 판단할 방법이 없었다. 그 결과 압력이 떨어지는데도 수위는 올라간 것으로 계측되었고, 운전원의 관점에서는 냉각수의 수위가 상승하고 있는 상황에서 비상 냉각수를 공급하면 안되므로 당연히 비상노심냉각시스템을 끌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운전원 교육에서는 가압내 내의 냉각수 수위는 절반을 유지하도록 메뉴얼에 지정되어있으며 해당 수위가 가득차게 운전하지 않도록 교육했다. 

 ≫ 결국 최후의 보루인 비상 노심 냉각 시스템마저 꺼져버리자 증기압력이 증가하여 파이프가 파손되고 원자로의 냉각수가 유출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원자로 온도가 치솟아 원자로 노심이 녹기 시작하면서 방사능 수치가 급상승하였다. 관계자들이 원인 파악을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원자로 방호장비가 녹아 최악의 상황 직전까지 갔으나 16시간 만에 간신히 사고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다행으로 교대하는 운전원이 가압기 압력방출 밸브의 미세누설을 발견하고 보조 급수 펌프의 자동기동으로 변경하면서 최악의 사태는 모면할 수 있었다. 결국 수동으로 조작하여 밸브를 닫고 냉각 펌프를 작동시킨 후에야 간신히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원인 파악이 늦어지는 바람에 노심의 절반 이상이 녹았다. 하지만 원자로가 파괴되거나 붕괴되는 사태는 모면하여 인명피해도 없었고 미국 본토에 방사능 낙진이 떨어지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지만 발전소 하나를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더불어 당시 1호기는 고장이 없었는데 2호기에서 사고가 나는 바람에 나란히 가동중지 조치가 내려졌으며 2호기는 1980년대 말까지 정화작업을 해야만 했다.


■ 비상사태 선포, 혼란스러운 대피 행렬

 ≫ 아침 7시경 발전소에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7시 15분에는 보조빌딩에 있던 직원들이 대피했다. 이와 함께 상급 감독기관에 사고 현황이 보고되었다. 7시 20분 격납건물에서 측정된 방사선량은 시간당 800 렘에 달했다. 8시 26분 고압 펌프를 재가동하여 냉각수 보충을 시작했고, 오전 10시 30분이 되어서야 연료봉이 다시 냉각수에 잠겼다. 오전 11시에는 스리마일섬에서 필수 인원을 제외한 모든 직원에게 대피 명령이 내려졌다. 사고 수습에는 원전 제어실, 전력회사(Met Ed), 스리마일섬 인근 지자체, 펜실베니아 주정부,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 에너지성, 백악관을 비롯한 여러 기관들이 개입했는데, 단일 지휘 체계가 확립되지 않고 서로 엇갈리는 정보들이 쏟아지면서 의사소통에 큰 혼돈이 있었다. 또한 언론 매체가 시시 각각 보도를 하면서, 미끄럽지 못한 언론에 대한 대응으로 더 큰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언론에 발표를 할 때는 “예상보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보다는 “생각했던 것 만큼 상황이 나쁘지는 않습니다”가 될 수 있도록 보수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필요가 있는데도, 전력회사 쪽이 사고 초기에 모든 상황이 통제되고 있다는 낙관적 전망을 발표한 이후에 상황이 더 나빠지자 원래 발표를 번복하게 되었다. 

 ≫ 이후 원자로를 정상 상태로 복구하려는 노력이 계속 되었고,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원자로의 정확한 상태 및 피해 상황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 졌다. 여러 지점에서 주기적으로 방사선 측정이 진행되면서 방사능 물질 누출을 감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 잘못된 측정값들이 보도 되면서 혼란을 가중시켰다. 또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주민 대피 계획이 수립되었는데, 주민을 대피 시킬 것인지 말 것인지, 대피시킨다면 언제 대피시킬 것인지, 대피 반경을 얼마로 할 것인지에 대해 각 기관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 결국 사고 발생 이틀 후에 원자로 내부의 피해가 예상보다 크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펜실베니아 주지사였던 리차드 손버그(Richard Thornburgh)는 원전 반경 5마일(8km) 내의 임산부와 아동을 대상으로 대피 권고를 내리자, 뒤이어 약 20만 명의 주민이 자발적으로 대피 행렬에 나섰다. 후에 손버그는 주민 대피 권고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주민 대피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노약자나 중환자실 환자, 인큐베이터 속 신생아들을 대피시킬 때 발생할 수 있는 인명 피해부터, 질서 있게 대피하더라도 발생할 수 있는 교통 사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인명 피해가 예상됩니다. 이런 종류의 주민 대피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고, 홍수나 태풍으로 인한 주민 대피와는 그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반경 5마일 내 주민 대피를 준비할 때, 그것이 반경 10마일, 20마일, 나아가 100마일까지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합니다.”

 ≫ 사고 후 거의 한달이 지난 4월 27일에야 원자로 내부 냉각수가 펌프를 이용하지 않은 자연 순환상태에 이르렀고 냉각수의 온도도 끓는 점 밑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제서야 향후 14년에 걸친 방사능 오염 제거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원전에서 방사능 오염이 얼마나 심했는지 1980년 7월에 원자로 격납건물에 처음 사람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1982년이 되어서야 사진을 통해 연료봉의 피해 상황을 확인하게 되었다. 손상된 원자로와 방사능 물질, 오염된 건물을 처리하는데 총 100억 달러 (1달러를 1000원으로 환산한다면 한화로 약 10조원)가 소요되었다.


■ 스리마일 섬 원전사고 시민들의 불안과 그 이후

 ≫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는 여러 안전장치가 겹겹히 설치되었는데도 예상치 않은 시나리오에 의해 사고가 발생할 수 있고 방사능이 원전 외부로 유출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미국에서 발생한 최악의 원전 사고로서 원자력 발전의 안전성에 대해 큰 경각심을 불러왔다. 원자력 발전을 이용하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원전은 에너지 정책이나 핵무기 개발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각국 정부는 국민에게 원자력 발전이 굉장히 안전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줄 필요가 있었고, 많은 경우에 사고가 축소·은폐되어 왔다. 특히 옛소련에서는 정부가 언론을 장악하면서 대부분의 사고가 국민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사고 처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전 사고는 여러 안전장치가 겹겹히 설치되었는데도 예상치 않은 시나리오에 의해 사고가 발생할 수 있고 방사능이 원전 외부로 유출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 2010년 1월에 1호기는 재운전을 시작했으며, 같은 달에 2호기의 발전기는 해체되어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시런 해리스(Shearon Harris) 원자력 발전소로 옮겨 설치되었다. 발전소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직후 주 정부에서는 인근 지역에 대피령을 내렸고 주민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미친듯이 탈출하였다. 다행히 누출된 방사능 수준이 자연 방사선량에 못 미쳐 민간인들의 피폭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 원자력 발전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하여 반 원자력 발전소 운동이 발생하였고 이에 오일 쇼크로 국면전환을 꾀하던 지미 카터 대통령은 더 이상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여 70여 개에 달하던 원자력 발전소 건설계획이 싸그리 휴지통으로 직행했다

 ≫ 원자력 발전소 건설은 정치권의 금기처럼 치부되다가 버락 후세인 오바마 대통령이 30년~40년 만에 원자력 발전소 건설 재개를 선언하였는데, 하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나면서 반대가 격심해졌다. 일단 오바마 대통령은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었다.

 ≫ 원자로 겉에 붕소-10을 가득넣은 냉각수를 채우는 형태의 극히 안전한 원자로 설계가 나왔으나 도입비가 너무 비싸서 아무도 안 쓰고 있다. 더불어 이 사건을 악화시킨 수위 계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압수형 원자로에는 냉각수의 실제 수위를 표시하는 계측장비 설치가 의무화됐다. 또한 MCR룸을 인체공학적으로 설계 하여 운전수가 MCR의 계측 표시기를 모두 확인할 수 있도록 설계를 변경하였다.

 ≫ 이 사고로 인해서 운전원 교육을 철저하게 시키는 등의 발전이 있었다. 사실 격납용기라도 있어서 다행이었지, 격납용기가 없었다면 체르노빌 원전 사고 꼴이 날 뻔 했다.



출처 : 나무위키, http://scienceon.hani.co.kr/?document_srl=34785

  1. 멜트다운 : 원자로의 냉각장치가 정지되어 내부의 열이 이상 상승하여 연료인 우라늄을 용해함으로써 원자로의 노심부가 녹아버리는 일 [본문으로]

■ 거인에 대하여

 ≫ 19세기 초만 해도 사람들은 땅 속을 파헤쳐 옛 유물을 찾는다는 생각을 미처 못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고고학자들이 옛 문헌에 비추어 심증이 가는 지역의 땅 속을 파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랜 옛날부터 세계 여러 지역에서는 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거인 네필림과 거인 장수 골리앗 등을 연상시키는 고대 거인들의 유골로 추정되는 뼈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이런 거인들의 유골이 발견될 때 마다 인류학자들이나 과학계, 그리고 종교계와 정부 관계 당국은 대체로 진지한 탐사와 적극적인 연구를 하여 결과를 공표하기 보다는 사실 자체를 은폐하거나 가짜 모조품이라고 외면한 경우가 많았다.


(지금까지 발견된 거인족 크기)

■ 거인유골이 발견된 독일의 브라이텐비너 동굴(Breitenwinner Cave)

  


 ≫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 소재의 오라클 연구소에서 30년 이상 성경적 인류학을 연구해 온 신학자 페트릭 쿡크는 1563년 베르톨드 뷔흐너가 25명의 탐사대를 이끌고 독일 바바리아 지역 동굴 탐사 후 쓴 책을 발견했다. 베르톨드 뷔흐너의 체험기에 따르면 브라이텐비너 동굴 안에는 인골이 너무 빽빽하게 차있어서 내부 탐사를 위해 뼈들을 다른 장소에 옮겨 놓아야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며 대부분 거대한 인류들의 유골이었다고 기록했다. 페트릭 쿡크는 거의 450년이 지난 지금 이토록 값진 인류사의 보물들의 존재 흔적이 발견된 것을 불행하게 생각했다. 그는 16세기 무지하거나 의도적으로 놀라운 거인 인류의 자취를 감추고 외면한 지식인들에 의해 파괴되고 이미 오래전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동굴에 대해 안타까운 심경을 신문에 기고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다. 2007년 12월 초 미지의 한 미국 청년으로 부터 페트릭에게 편지와 함께 비디오 클립이 도착한 것이다. 발신자는 데니, 그는 최근 독일 주둔 미 육군에서 제대한 종군 사진기자인데 페트릭의 브라이텐비너 동굴 기사를 읽었다고 한다. 그는 11월 5일 자신이 소속해 있는 다국적 트레이닝 센터의 동료 2명과 1조가 되어 야외 신속 적응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무숲으로 둘러싸인 야산 언덕에 위치한 훈련 체크포인트 35 구역 부근에서 우연히 동굴을 발견했으며 팀 3명이 호기심에 동굴 안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거인 유골들을 포함해 수천여구가 넘는 해골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비디오 촬영 클립을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대니는 브라이텐비너 동굴 안에는 현 인류보다 엄청 큰 인류의 유골들이 많았는데 수천이 넘는 많은 유골들이 왜 동굴 안에 방치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아마도 16세기 베르톨드 뷔흐너가 발견한 이래 오랜 세월 동안 동굴이 많이 훼손되고 유골들이 도굴된 것처럼 보이며 2차 대전 당시 이곳이 독일군의 연합군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이라서 시체들을 이 동굴에 처리해 정상 유골 숫자가 늘어난 것 아닌가 추정했다. 그에 따르면 체크포인트 35 구역은 현재 나토군의 실탄 사격 훈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며 동굴에 대한 보다 철저한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브라이텐비너 동굴은 여러 인류학자들과 대학교 답사팀들이 공식 탐사를 하고 있는데 지난 수백 년간 버려진 이 동굴 연구 결과가 이번에는 과연 인류학상 어떤 변화와 파란을 몰고 올지 세계인들이 주목하고 있다.


  The Breitenwinner Cave 유골영상



■ 거인유골이 발견된 터키

 ≫ 1976년 터키 남동부 쿠르드지역에서는 신장 2.7m~3m의 거인 유골이 발견됐다.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고고학자들이 고대유적 발굴 중 우연히 발견했는데 발견지가 성경에서 요르단 서쪽 가나안의 유적이 있는 곳으로 묘사된 지역이어서 많은 화제를 모았다. 사람들은 이를 근거로 이 유골이 네피림일 수도 있다고 믿기도 했다.

(유프라테스 강에서 발견된 거인의 대퇴골, 합성이라는 주장도 몇 있다)


 ≫ 1950년 터키 유프라테스강 인근에서도 여러 거인 화석이 발견됐다. 그 중 한 화석의 대퇴골은 길이가 자그마치 1.2m에 달했다. 때문에 당시 학자들은 뼈 주인의 신장을 약 5m이며 발 크기는 56cm라고 추정했다. 또한 이곳 역시 길가메시가 통치한 수메르 문명 발원지와 유관해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 시대를 벗어난 거인의 기록

 ≫ 많은 학자들은 시대를 벗어난 이러한 거인들의 기록이 거인들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며, 또한 거인들이 인류 문명의 시작과 함께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 길가메시 서사시

 ≫ 지금으로부터 5~6000년 전에 메소포타미아에는 수메르·아카드·바빌로니아·아시리아가 차례로 번성했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2500년 아수르 지역에 세워진 국가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1200년에는 강대국 바빌로니아까지 지배했다. 기원전 960년부터 350여 년간 아시리아는 세계에서 제일 큰 제국이었다고 한다. 1851년 니네베 아슈르바니팔 궁전 지하서고에서 길가메시 서사시라는 것이 있었다. 길가메시는 기원전 2812년부터 126년 동안 우르크를 통치했던 왕이다.

(수메르 거인왕)

 ≫ 길가메시는 당시 수메르 왕조의 이자, 전설적인 영웅이다. 당시 길가메시 서사시에 따르면, 길가메시 또한 키가 4미터나 되었다고 하며 길가메시는 사자를 한 손으로 휘어잡고 다닐 정도였다고 하며, 길가메시 이후 거인왕들이 수메르 문명을 통치했다는 기록이 남겨져있기도 한다고 한다. 수메르 문명을 연구하는 고고학자 제카리아 시친은 수메르인들의 설형문자 기록에도 거구의 통치자가 등장한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위 그림의 석판에 새겨진 사람 크기가 다른 것도 거인이 존재했던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또는 사람의 크기를 나눈 것은 당시의 권위적인 상징을 위하여 왕 또는 귀족 등의 사람들을 더 크게 그렸을 뿐이라고 반론하는 학자들도 있다.






■ 원자력 발전소의 안정성을 알기 전에 원자력발전의 원리를 알아보자

 ≫ 원자력발전을 들여다보면, 수증기를 만드는 과정만 제외하고는 그 원리 가 다른 화력발전과 동일하다. 화력발전에서는 보일러에 물을 넣고, 석탄이 나 석유를 태워 물을 끓이면 수증기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 수증기를 이용 하여 터빈과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만든다. 원자력발전도 수증기를 만들어 터빈과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생산하는 것은 동일하다. 다만, 수증기를 만 드는 과정이 다를 뿐이다. 원자로라는 보일러에서 석탄이나 석유를 태워 열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핵분열을 일으켜 발생되는 열을 이용하여 물을 끓인다는 점이 다르다.

핵분열이란 자연에 존재하는 가장 무거운 원소인 우라늄이 중성자를 흡수하여 둘 또는 셋으로 조각나는 현상을 말한다. 핵분열이 일어나면 우라늄은 간데없고 다른 원소들이 생성되는데, 이 과정에서 잉여중성자가 나와 반응을 지속시킬 수 있어 끊임없이 핵분열 반응이 지속되는 것을 핵분열 연쇄반응이라 일컫는다. 사실 하나의 핵분열이 일어날 때 발생되는 열량은 아주 적으나, 연쇄반응이 지속적으로 일어난다면 발생되는 에너지가 너무 커서 인간이 제어할 수준을 넘게 될 수 있으며, 아무 조절하지 않고 가만 두면 그것이 바로 핵폭탄이 된다. 한 번의 핵분열이 일어나면 두 개 이상의 잉여중성자가 나오는데 이 중성자로 인해 새롭게 두 번 이상의 핵분열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다음 단계에서는 4번 이상의 반응, 그 다음에는 8번 이상으로 핵분열 반응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발생하는 에너지 양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연쇄반응을 지속하면서 잉여중성자를 하나만 남겨놓고 나머지를 없애버린다면 다음 단계에서 핵분열은 하나만 일으키게 되며, 이런 조절을 매 연쇄반응마다 할 수 있다면 에너지는 충분히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만든 것이 원자력발전이다.


■ 핵분열 연쇄반응은 알았다, 연쇄반응 자체가 위험한 것은 아닌가?

 ≫ 우라늄에는 두가지가 있다. 자연에서 존재하는 우라늄-238, 그리고 실제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우라늄-235가 있다. 우라늄-235는 자연에 1/140 정도로 극히 적은 양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원자로에는 우라늄-238이 95.5%의 비율로 들어가게 된다. 우라늄-238은 핵분열을 할 수 없어서 핵분열 반응을 일으키려면 반드시 그런 반응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우라늄-235가 바로 그것이다. 우라늄-238은 핵분열을 할 수 없지만 우라늄-235의 희석제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폭탄과 원자로에 들어가는 우라늄은 똒같이 우라늄이라고 칭하지만 그 성분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원자로에서는 일부 출력이 갑자기 증가하더라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정도의 자연 우라늄을 섞어 쓴다고 보면 된다. 우라늄-238도 폭발할 수 있지 않은가?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의 예로 우라늄 원광이 있는 지역에서 핵분열 연쇄반응이 일어나 스스로 폭발하는 경우는 아직 한 번도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발생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론적으로 원전은 관리가 정상적으로 잘 된다면 결코 스스로 폭발될 수 없다.


■ 방사선의 종류와 그 위험성, 그리고 활용

 ≫ 방사능과 방사선이 있다. 방사능(Radioactivity)은 정성적으로 방사성 물질이 방사선을 내는 강도를 뜻하며, 정량적으로는 방사성 물질에 들어있는 불안정한 핵의 양을 말한다. 방사선(Radiation)이란 방사능을 가진 원자에서 발생하는 빛 또는 물질이다. 몸을 투과하면 분자와 공명하여 세포를 파괴시키거나, DNA 혹은 RNA의 수소결합을 절단하여 유전자를 파괴하거나 변형시킨다. 일반적인 노출은 인체에 해가 되지만 이를 집중하여 쬐면 종양 등을 파괴하고 유전자를 변형시킬수 있는 수단이 된다. 약한 상호 작용에 의해 원자가 붕괴하면서 나온다. 즉, 방사선을 어떻게 사용하냐에 따라 해가될 수 있고 득이 될 수 있겠다. 이러한 방사선에도 좋류가 있는데, 아래와 같겠다.

 1. 첫번째로 이온화 방사선이라고 있다. 보통 방사선이라고 하면 이온화 방사선을 말한다. 이온화 방사선은 인공적 또는 자연적인 핵반응에 의해 발생되며, 번개에서 초신성 폭발 등 자연적 과정에서 생성된 전자기장에서 전이된 입자의 가속 등에 의해 발생한다. 이온화 방사선은 환경에서 흔히 발견되는데,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방사성 물질과 우주선으로부터 온다. 보통 인공적인 근원으로는 인위적으로 생성된 방사성 동위 원소들, X-선관, 입자 가속기 등이 있다. 이온화 방사선은 보이지 않으며, 인간의 감각으로는 직접적으로 탐지되지 않아, 이온화 방사선이 있는지를 감지하려면 가이거 계수기와 같은 장비가 필요하다.

 2. 두번째로 알파선이 있다. 알파선은 낮은 투과율로 피부를 통과하지 못하나 채네에 유입되면 유해성이 매우 높아진다. 예를 들면 상처난 피부, 호흡, 경구섭취[각주:1] 등이다. 알파선은 높은 이온화 특성을 지니는 입자의 하나이다. 알파 입자는 우라늄이나 라듐과 같은 방사성 물질이 알파 붕괴를 하는 도중에 방출되는데 이 과정에서 때로는 원래의 원자핵이 들뜬 상태에 놓이기도 하며, 남는 에너지는 감마선 방출을 통해서 방출되기도 한다. 알파 입자는 전하와 무거운 질량 때문에 쉽게 물질에 흡수되며 공기 중에서는 몇 센티미터 밖에 나아가지 못한다. 휴지 한장에도 흡수되며 사람의 외피층(약 40 마이크로미터, 몇 개 가량의 세포 두께)에도 흡수된다. 이러한 이유로 먹거나 흡입하지 않는다면 일반적으로는 위험하지 않다. 하지만, 무거운 질량 및 강한 흡수성 때문에 일단 체내에 진입하게 된다면 가장 위험하기도 하다.

 3. 세번째로 베타선이 있다. 몇몇 방사능 핵종에서 방출되는 고에너지, 고속의 전자나 양전자 입자를 베타 입자라고 한다. 이 베타 입자로 방출되는 것을 베타 광선(베타선)이라고 한다. 베타선은 중간정도의 투과력과 중간정도의 이온화능력을 가진다. 대부분의 베타입자들은 수mm의 알루미늄으로 차단시킬 수 있으며 베타선은 알파선보다 이온화가 강하다. 베타 입자들은 눈이나 뼈의 암 등 건강을 다루는데 쓰이고, 인체 내부 관찰을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베타 입자들은 물질들을 관통하여 분자구조를 변형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는 암이나 죽음과 같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만약 DNA의 분자구조가 변형된다면 돌연변이를 만들어낼 것이다. 또한, 베타입자들은 암세포를 죽이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4. 네번째로 감마선이 있다. 방사능 및 전자와 양전자가 충돌하여 없어질 때 감마선이 생성된다. 감마선은 알파선과 베타선에 비해 투과성이 높으며 화상, 암, 유전자 변형과 같은 피해를 유발한다. 핵전쟁등에서 사용될 가능성이 있는 핵무기의 낙진에서 발생하는 감마선은 수많은 사상자를 유발한다. 보통 감마선을 차폐[각주:2]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물질이 필요하다. 감마선의 에너지가 높을수록 더욱 두꺼운 차폐물이 요구된다. 감마선의 강력함은 박테리아 제거 등을 통한 의료기기의 살균에 유용하게 쓰인다. 또한 음식물, 특히 육류나 채소의 신선함을 유지하기 위해 박테리아나 벌레를 제거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감마선은 암을 치료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5. 다섯번째로 중성자선이 있다. 중성자가 빛처럼 나아가는 방사선의 종류 중 하나이며 핵반응시에 나오므로 원자로를 가동할 때나 중성자폭탄이 폭발할 때도 나온다.

 6. 여섯번째로 엑스선이 있다. 엑스선은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전자가 무거운 원자에 충돌할 때 발생한다. 독일의 물리학자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이 처음 발견하여 이름붙였으며, 그의 이름을 따라 뢴트겐선으로도 부르기도 한다. 엑스선은 주로 의료용 엑스선으로 투시검사, 혈관조영 검사, CT검사 등 여러분야에서 사용된다. 또한 산업 및 기타용도로 부품이나 용접 부분에 엑스선 촬영을 실시해 부품, 용접 부위의 무결성을 검사하는데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인천 공항 수하물 스캐너는 수하물의 내부를 엑스선으로 쪼아 투영함으로써 위험 물질이나 무기 등을 찾을 수 있었다. 엑스선은 파장이 짧은 전자기파이기 때문에 물질을 잘 통과한다. 엑스선을 이용하여 물질의 구조를 결정하거나 인체 내부의 이상을 알아보는 등 응용 범위는 매우 넓다.


■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장치

 ≫ 원자력 발전소 안전설계의 근본적인 개념은「심층방호(Defense in Depth)」이다. 여러 겹의 방어선을 설치하여 고장 즉 이상상태가 더욱 확대된 결과 발생되는 사고(Accident)를 각 방어선에서 막도록 하되 어느 하나가 실패하면 그 다음 방어선이 막는다는 개념이다. 원자력 발전소의 정상운전 상태를 벗어나서 안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일반적인 이상(異常)상태는 원자로 긴급정지로써 사고로 확대됨을 충분히 방지할 수 있지만, 긴급정지만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사고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원자력 발전소 최악의 가상사고인 원자로 냉각재 상실사고 등이 있다. 냉각재가 부족하여 노심이 녹아 손상되는 등은 긴급정지로 막을 수가 없다. 대표적으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이유 그리고 그 과정 #1에서 다루는 이유가 냉각재 상실사고와 연관이 있다. 이러한 만약에 상황이 발생하여 냉각능력을 상실하더라도 원자로 바깥에 별도로 설치되어 있는 탱크에서 자동으로 비상용의 냉각재 및 중성자 흡수물질인 붕산수를 함께 원자로 내에 공급하여 핵분열 반응을 중지시킴과 동시에 과열된 핵연료를 냉각시켜 방사성 물질의 근원인 핵연료봉의 손상을 방지해준다. 그 외에 원자로 냉각재 주요 배관이 절된되는 경우 고압안전주입 장치가 작동하고 있어서 안전주입탱크 및 저압안전주입장치가 순차적으로 작동되어 원자로 내에 붕산수를 공급하여 과열된 노심을 냉각시키게 된다. 또한 냉각재 계통의 주요 배관이 약간만 파손되어 원자로내의 냉각수 물이 서서히 감소되더라도 먼저 고압안전주입장치가 작동하고 원자로내의 압력이 점차 감소하여 물이 끓게 되어 핵연료봉의 냉각이 어려워지면 이어서 안전주입탱크, 저압안전주입장치가 차례로 작동하여 과열된 노심을 냉각시킨다.

 ≫ 그 외에도 격납용기 압력강하장치라고 하여 고온, 고압의 원자로 냉각재가 파열부위를 통해 바깥으로 빠져 나오면 순간적으로 증발되어 매우 큰 압력을 미치게 되는데 이러한 이유로 이러한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원자로 천정에 분무 장치를 두어 격납용기의 압력이 상승하여 일정 한계치에 도달하면 자동적으로 붕산수를 분사시켜 수증기를 응축시킴으로써 인체에 유해한 방사성 기체를 제거한다. 이러한 심층방호 구조로 하나의 문제가 발생하면 다른 방어선에서 막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 결정적 문제는 이러한 긴급노심냉각장치 등을 사용자가 수동으로 꺼버리는 사태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이유 그리고 그 과정 #1에서 관련 내용을 다룬다. 체르노빌 원자력 사고에서는 실험을 위해 연구원이 긴급노심냉각장치를 꺼버린다.



■ 아래는 방사능의 안정성에 대한 유튜브 영상을 가져왔다.

 ≫ 사실 본 내용은 방사능의 위험성도 소개하지만, 본 주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은 함정본 내용에 관심있게 읽었다면 재밌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http://www.karc.or.kr/pds/data/1351743489_02.pdf, http://tip.daum.net/question/3612172

그 외 방사선, 알파선, 베타선, 감마선, 중성자선, 엑스선 등의 위키백과



  1. 경구섭취 : 방사성 물질이 체내로 섭취되는 경로의 하나로 입에서 소화기관에 들어가는 것. [본문으로]
  2. 차폐 : 가려막아 덮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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