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과 나치즘

(좌) 이탈리아 베니토 무솔리니, (우)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관련글 : [인물, 아돌프히틀러] 2차 세계대전은 왜 일어난 것인가?


■ 파시즘의 정의

 ≫ 1919년 이탈리아의 B.무솔리니가 주장한 국수주의적·권위주의적·반공적인 정치적 주의 및 운동을 말한다. 원래는 '묶음'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파쇼(fascio)에서 나온 말이었으나, 결속·단결의 뜻으로 전용(轉用)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20년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45년까지 세계 여러 국가들 사이에서 나타났던 독재적 정치․경제․사회사상․정치체제의 총칭이기도 하며, '결속주의'라고도 불린다.

 ≫ 본래 파시즘의 초기 등장 배경 이전엔 생디칼리즘(syndicalisme)부터 시작되었다. 생디칼리즘의 '생디카(syndicat)'는 '조합'을 의미하는데, 이 조합은 노동자 조직을 뜻했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경제 분야에서 '직접 행동'을 주장하며 정부를 쓰러뜨리고 노동조합이 생산의 관리권을 장악해야 착취 없는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당시 나라의 경제 독점을 이룬 것은 유대인들이었다. 특히나 독일인들은 이러한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노동을 착취하는 인종주의 갈등이 있었는데, 그들이 유대인이었다. 이 이야기는 아래의 독일 파시즘의 배경에서 자세히 다룬다. 이와 같은 반제국주의적 사상과 반자본주의 사상이 혼합된 것이 초기 파시즘이었으나, 점점 반공주의 가치가 심화되면서 극우적 사상으로 변질되었다.


■ 어떤 것을 파시즘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 정치적으로 급진주의[각주:1]를 일으키는 나라에서 흔히들 발생하는데, 국수주의[각주:2] 즉, 민족주의에서도 흔히 발생할 수 있으며, 그 외에도 역사속에서 반공주의나 전체주의[각주:3] 등에서도 발생했다. 파시즘은 한 마디로 하나의 이념 또는 사상으로 시민들을 묶어 하나로 통치하는 것을 일컫는다. 독일의 파시즘연구가 E.놀테는 파시즘을 유럽적인 현상이라고 이해하여, 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 즉 1919∼1939년이라는 기간의 특유한 현상이라고 지적하였다.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 선 파시즘론에서는 현대사회의 모든 반동적 독재정치운동을 파시즘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파시즘을 지칭한다.


■ 우리에게 주는 파시즘에 대한 시사점

 ≫ 파시즘은 본래 국가와 세계적인 대공황에서 비롯되었다. 즉, 국가의 경제적 위험과 시민들이 살아가기 위한 기본 의식주를 다른 나라에서 뺏어와야 한다는 국가자본주의의 경제사상이다. 이러한 파시즘은 한국에도 주는 시사점이 있다. 위의 정의에서도 앞서 언급했듯, 국가이기주의와 북한과의 대립과 갈등으로 인한 국가이기주의 현상이 발생하고 있으며, 남한과 북한이라는 민족주의로 인한 국수주의 및 북한 핵 위협에 의한 비슷한 현상들이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한국은 파시즘에 이르는 경제적인 이념이 발생하지는 않아 파시즘으로 정의하기는 어려우나 몇몇 국민들에게서 김정일, 김정은에게 선동당하는 북한국민들은 모두 죄악이며, 세계에서 받아들이면 아니하고, 이를 감싸는 행위는 죄악이며 물리쳐야 하는 악의 존재, 그리고 스스로 붕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동일국가에 정치체제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각기 한 나라의 시민이지만 사회적으로 구제할 방법이 없다는 국가이기주의 사상이 발현되고 있다. 북한과의 분단갈등이 70년도 안되었지만, 천년역사가 된 것 마냥 '현실적인 타협'이라며 선동하는 것이다. 필자는 물론 북한은 독재체제이며, 남한이 유화정책을 펴는 것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 시대적 사상을 통해 느끼는 바가 달라질 수 있으며 우리도 현대적인 파시즘을 선동당할 수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본인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위대한 사람이라고 무조건적으로 칭찬일색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본다. 박정희가 자행한 부정부패와 기만성을 보기 보다는 그 정권 때 있었던 경제 성장만을 기억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주제로 선동한다. 나쁜 것은 일체 말하지 않고, 반대파 의견은 좌파, 빨갱이라고 치부하는 것이다. 이는 심리적으로 공감력부재, 물질주의, 이기주의 성향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 또 다른 것은 서구인들에게서 나온 '자연도태설'이다. 이는 특수한 환경 하에서 생존에 적합한 형질을 지닌 종이, 그 환경 하에서 생존에 부적합한 형질을 지닌 종에 비해 생존과 번식에서 이익을 본다는 이론이다. 불쌍한 인민들은 죽어야만이 너무 많아진 인구로 인해 나타날 치명적인 영향을 걱정하며 자연이 스스로 과잉 생물을 주기적으로 제거한다는 것이다. 이는 유럽적, 백인 우월주의적 '정당화'일 가능성이 높다는 시사가 있다.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유리하며 자연도태설을 통해 자신들은 절대로 피해보지 않는다. 그렇지만 수 많은 지식인이나 정치가, 국제기구 책임자들이 이를 옹호했던 일이 있으며 현대 사회에서도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 이를 지지하는 국가이기주의적 성향이 나타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비판하는 노예제도도 이러한 이론을 일부분 근거로 가져와 정당화 했던 과거가 있었다.

 ≫ 독일의 파시즘 또한 처음엔 경제적 이념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그것이 변질되어 갔다는 점을 시사하여야 한다. 보통 우리가 일컫는 파시즘은 파시즘 후기에 변질되어 버린 '후기 파시즘' 즉 독일의 나치즘을 일컫는 말이므로 함부로 파시즘이란 이야기를 꺼내 누군가를 선언 또는 정의하다간 큰 논쟁이 벌어질 수 있다.


■ 독일 파시즘의 발생 배경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암살과 1차 세계대전 발발

 ≫ 파시즘은 18세기 말부터 누적되어 온 사회적 불안과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만성적 공황 및 전승국과 패전국을 막론한 정치·사회적 불안에서 초래된 각종 혁명적 기운에서 대두되었다. 먼저 독일의 파시즘부터 살펴본다.

 ≫ 1차 세계대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의 옆 나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다수 민족이 살고있었는데, 헝가리 왕국안에서 조차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루마니아인 등 다수의 민족집단이 흘러념쳤다. 그 중 세르비아 민족주의자가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암살것이다. 이로 인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는 도화선 역할을 한다. 암살 4주 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당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이미 여러 인종들이 섞인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몹시 싫어했는데, 전쟁 발발 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에서 독일의 뮌헨으로 도피한다. 당시 히틀러는 25살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옆 나라, 당시 독일은 나폴레옹, 즉 외국 군대가 독일땅을 침범한 적이 없어 전쟁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독일에선 자동차가 생겨났고 현대화가 진행중이었고 20세기 초반 유럽은 평화와 번영이 오는 시대였다. 독일은 제2의 산업국으로 부상하고 있었으며 군대는 강력했다. 뮌헨은 극우적 국가주의 정서가 강하게 들끓었고 히틀러 또한 독일 전쟁에 참여했다.

 ≫ 오스트리아vs세르비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세르비아의 동맹국인 러시아가 움직이려고 하자, 독일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러시아의 동맹국인 프랑스에도 선전포고를 한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vs 독일, 터키, 오스트리아 의 전쟁이었다.


■ 독일 파시즘의 발생 배경 -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

 ≫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 6월 28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베르사유조약이 체결되었다. 파시즘의 원인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 중 가장 큰 원인은 2가지로 해석된다. 첫번째는 해외식민지를 잃은 것이였다. 독일은 아프리카 탄자니아와 토고, 카메룬, 나미비아 등을 식민지로 삼고 있었는데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이러한 식민지를 모두 뺏겨버렸다. 두번째는 전쟁도발의 책임을 물어 연합국 손해에 대한 배상지불이 부과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식민지가 뺏겨 경제는 점차 침체된 상황에서 1921년 5월 1일 배상위원회가 독일에 1320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금으로 갚을 것을 결정했을 때 이 문제가 절정에 다다랐다. 당연히 독일은 이 돈을 갚을 능력이 없었다. 경제적 위기에 봉착하자, 독일 국민은 베르사유 조약과 배상금에 분노했다. 독일은 반-유대주의, 베르사유 조약을 협상하는 정부는 독일시민이 아닌 국가 반역자라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생겨난 이념이 파시즘이며, 선동가로 맥주아돌프 히틀러가 나타났다.


■ 독일 파시즘의 발생 배경 -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 1차 세계대전 패전 이전부터 유대인은 독일사람 중 3%에 불과하였으나, 경제의 40~50%를 독점하고 있었다. 독일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경제적 패배의식에 물들어 있었다.  현대에 시사해보면 우리나라도 경제를 잡고있는 것이 다른 민족은 아니지만, 대기업들을 대상으로 대항하는 세력은 보기 힘든 구조를 생각해보았을 때 그 시기가 유대인들에게 반하는 세력을 꽃피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실감캐해주는 예일 수 있다. 오히려 독일은 1차 세계대전 직후까지 유대인에게 관대했고 유럽국가들이 반유대주의 사상이 더 강했다. 독일계 유대인 금융재벌인 막스바르부르크는 히틀러에게 정치자금까지 제공한 걸로 유명하다. 또한 독일은 유대인들에 대해 차별을 하지 않았으며 유대인의 독립국가 형성에 신경을 썼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유대인 과학자들의 정보망 교란이 있었고, 독일이 친 영국 성향의 유대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려하자 당시 독일의 경제를 잡고 있던 유대인들이 독일을 굴복시키기 위해 독일의 수출을 분쇄시키거나 독일상품 불매운동을 벌인다. 또한 공산당활동에 유대인들의 간접협조 혐의와 1936년 프랑스주체 독일 외교관을 암살하자 반유대감정으로 독일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독일엔 국수주의, 즉 인종주의가 발현된다.


■ 반 유대주의는 전체 유럽국가의 짓이며,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학살까지 내몰려고 하지는 않았다(?)

 ≫ 유대인 600만 학살은 조작 확대 되었다는 설이 감돈다. 실제로는 60만정도이며, 그것도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과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대다수라는 것이다. 25(7.6평)평방미터 되는 곳에 7~800명을 집어넣고 독가스로 죽였다는데, 실제론 그런 계산이 나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광객들에게 전시되는 아우슈비츠 가스실과 소각로는 194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스탈린의 소련군 또한 폴란드 유대인을 많이 죽였으며 나중에 이것마저 독일의 만행으로 뒤집어 쓰게 된다.

 ≫ 1933~1941년 까지 독일은 유태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독일의 밀텐슈타인이 유대인이주를, 하인리히 히믈러 SS사령관은 시온주의자의 대아랍 지하군사 조직인 '하가나'의 활동을 도왔다. 1942년 요제프 괴밸스의 본격적인 유태인박해 주장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유대인 학살보다는 그들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섬으로 보내 그들만의 국가를 형성시키고 나중에 독일의 우방으로 삶으려 했다.


■ 이탈리아 파시즘의 발생 배경 - 18세기 부터 1차 세계대전의 흐름

 ≫ 통일 전까지 이탈리아는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서로 성격이 다른 여러 나라들이 모인 지역의 이름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에서 시작한 자유와 평등사상이 전파되면서 이탈리아에도 외세의 지배를 물리치고 자유 민주 국가를 건설하자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다. 1870년, 이탈리아는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었지만 다른 방식과 문화 속에서 살아온 각 지방의 이탈리아인들은 하나로 통합되지 못했다. 게다가 경제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소외된 남부 지역의 농민과 빈민들의 반란이 이어졌고,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되었음에도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하자 이에 따른 경제 침체와 정치 불안이 심해지면서 이탈리아는 혼란에 휩싸이고 만다.


■ 이탈리아 파시즘의 발생 배경 - 베니토 무솔리니의 탄생

 ≫ 1883년 7월 29일 베니토 무솔리니가 태어났다. 무솔리니 일가의 아버지는 사회주의자로 당의 화합에 자주 데려갔다. 무솔리니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했다고 한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폭력을 써서 길을 터간다고 하는 수단, 후의 이탈리아 파시즘의 씨앗이 보였다. 무솔리니는 10살 무렵부터 식사 문제로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켰으며, 11살 때엔 학급의 친구를 칼로 찔렀다. 26살 때 무솔리니는 사회당계의 신문 라 로타 디 크랏세의 편집장으로 취임하여 선동적인 기사를 써 나갔다. 대중들이 어떤 일이든지 믿을 수 있게 하는 법을 배웠으며, 거짓말 기사를 써도 시민들이 믿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만큼 대중은 잊는 것도 빠르니까. 눈치채기 전에 정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무솔리니는 미디어를 통해 대중을 컨트롤하는 방법을 택한 파시스트다.


■ 이탈리아 파시즘의 발생 배경 - 1차 세계대전과 무솔리니의 정치

 ≫ 1915년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하자, 평화주의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는 소집에 응하여 1년 반동안 알프스 산 중에서 전쟁에 참가한다. 1917년 2월 수류탄의 폭발로 무솔리니는 전신에 40곳에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입으나, 후에 선동 정치에서 그는 폭발의 순간을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며 포장 정치를 하게 된다. 종전 후 1919년 이탈리아는 대혼란에 빠졌고 내전의 고비를 겪었다. 노동자들의 폭동과 파업이 연이었고 이탈리아 중산층들은 국기를 대신해 공산주의 깃발이 걸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우려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그는 이 공포를 이용하여 공산주의자를 제거하기 시작했고, 법과 질서의 회복과 실업률의 저하를 막는 것을 약속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무솔리니는 퇴역군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 39살의 무솔리니는 인민을 다스리는 멍청한 정치가들의 목을 조르겠다고 선언하고 의회의 해산과 무솔리니의 수상 임명을 국왕에게 요구할 것을 선동했다. 이렇게 무솔리니는 이탈리아는 내셔널리즘의 호소를 통해 대중적 지지를 획득하였고, 정치와 경제의 긴밀한 협동체계를 꾀함으로써 파시즘을 창출하였다. 무솔리니는 로마진군을 행하여 계급 개념 위에 민족 개념을 두고 ‘아래로부터 형성, 조직된 국가’임을 주장하였다. 1933년 1월에는 독일 나치스정권과 손잡고 에티오피아 침략, 국제연맹 탈퇴, 40년에는 독․이․일 3국 동맹체결을 거쳐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도국이 되었다.


■ 독일의 파시즘(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 나치즘과 파시즘은 모두 사회주의 세력 성장에 반대했고, 중산층의 지지를 얻었으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침략전쟁을 시도하여 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었으며, 나치즘은 여기에 인종차별까지 했다. 둘의 공통점은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경제적 공황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둘 다 초기에 퇴역군인을 통한 무력을 이용했다. 



독일 파시즘 출처 및 참고 : http://tip.daum.net/question/2993734

https://www.youtube.com/watch?v=wp9FnJhLZs0
https://ko.wikipedia.org/wiki/%ED%8C%8C%EC%8B%9C%EC%A6%98
https://www.youtube.com/watch?v=b2h20vxX2m4
http://utopiand-reamers.tistory.com/58


이탈리아 파시즘 출처 및 참고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57179&cid=47315&categoryId=47315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07750&cid=43041&categoryId=43041

https://www.youtube.com/watch?v=v56IHdQ67Sc

http://bobeathaja.tk/%ED%8C%8C%EC%8B%9C%EC%A6%98%EA%B3%BC-%EB%82%98%EC%B9%98%EC%A6%98%EC%9D%98-%EB%9C%BB%EA%B3%BC-%EC%B0%A8%EC%9D%B4%EC%A0%90-%EB%B9%84%EA%B5%90/


  1. 급진주의 : 사회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현재의 사회 제도나 정치 체제 관행 따위를 급격하게 변혁하려는 주의. [본문으로]
  2. 국수주의 : 편협된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극단적인 국가주의, 타 민족, 타 국가에 배타적이거나 초월적 성격을 지닌다. [본문으로]
  3. 전체주의 : 개인은 전체 속에서 비로소 존재가치를 갖는다는 주장을 근거로 강력한 국가권력이 국민생활을 간섭·통제하는 사상 및 그 체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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