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동력원이 필요하다. 아직도 많은 분야에서 석탄, 석유, LNG 등과 같은 화석연료를 사용하고 있으나, 화석연료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가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인식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이산화탄소의 배출을 억제하기 위해 화력발전량을 점차 줄이려 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산업화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에너지 즉 동력원이 필요한데, 마땅하게 화석연료를 대체할 수단이 없다는 데 있다. 우리나라는 일찍이 원자력이라는 ‘제3의 불’을 도입하여 경제발전을 위 한 주 동력원의 역할을 맡겼다. 부존자원이 전혀 없는 우리나라는 1970년대 초, 원자력발전을 도입하여 지금과 같은 경제성장의 길을 열 수 있었고, 아 직도 성장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당분간은 주 동력원인 원자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고 보인다. 원자력에너지는 많은 장점이 있다.


■ 원자력 발전의 장점

 ≫ 우선 경제성이 뛰어 나고, 수송이 용이하며, 환경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깨끗한 에너지라는 점 등입니다.

 1.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고 대규모의 에너지수요 증가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수안이며 현재 다른 대안이 없는데, 화석연료의 대량사용으로 발생되는 이산화탄소(CO2), 황산화물(SOx),질소산화물(NOx)등이 지구온난화와 산성비의 주요 원인이기 때문인데 만약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온실가스 감축 감소를 한다면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세계 1위이며 총 에너지소비 중 화석연료의 비중이 80% 이상인 우리의 에너지인 다 소비형 산업구조에서는 전 산업분야에 크게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지속되는 경제성장에 따라 에너지소비 증가율 10% 이상인 점을 감안할 때 당장 석유나 석탄의 사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그 대신 공해물질을 배출하지 않는 청정 에너지로 대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체에너지로는 소비하더라도 다시 재 생성되는 재생에너지(자연에너지)와 원자력에너지가 있는데 태양열,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는 소용량이며 지리적, 지형적조건의 제한으로 아직 실용단계가 아닙니다. 따라서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고 대규모의 에너지수요 증가에 대처할 수 있는 에너지로는 원자력발전으로서 원자력발전은 연료채굴에서 폐기물처리까지 전과정에서 이산화탄소의 배출량이 수력발전 수준으로 극히 낮을 뿐만 아니라 산성비의원인이 되는 황산화물과 질소산화물을 배출하지 않는 대표적인 환경 친화적 에너지입니다.

 2. 또 다른 이견으로는 연료 공급의 안정성과 비축효과가 있는데 원전의 연료인 우라늄은 세계 전역에 고르게 매장되어 있어 세계의 에너지정세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반면에 석유의 경우 대부분이 중동지역에 편중되어 있어 유사시 공급이 중단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원료인 농축 우라늄만을 수입하여 원전연료 형태로 제작할 수 있는 가공 공장이 있어 중국산 연료로 안정적인 연료공급이 가능합니다. 또한 우라늄은 에너지밀도가 매우 높아 소량의 연료로 막대한 에너지를 낼 수 있어 수송과 저장이 쉽습니다. 예를 들어 100만 kW급 발전소를 1년간 운전하려면석유로는 150만 톤이 필요하나 농축우라늄은 28톤이면 됩니다. 우라늄은 원자로에 한번 장전하면 18개월 가량은 연료를 교체하지 않으므로 그만큼 연료의 비축효과가 있는 셈입니다.이와 같이 다른 에너지원들은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고 있고, 공급이 불안정한 반면 원전의 연료인 우라늄은 공급의 안정, 수송 및 저장의 편리, 큰 비축효과가 있어 에너지를 무기화하는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에너지 자립이라는 국가안보 차원에서도 원자력은 꼭 필요한 에너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3. 또 다른 장점은 고도기술의 준국산 에너지입니다. 원자력발전은 고도의 과학기술을 필요로 하는 기술에너지로서 기술자립만 이룩되면 무한한 개발과 이용이 가능합니다. 특히 첨단 과학기술의 집합체인 원전의 기술자립은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발전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우리나라에서 원전은 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에너지 다변화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70년대 초 당시 아무런 기술과 경험 없이 원전건설을 시작하여 78년 4월 고리1호기가 최초로 가동한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은 세계 10위권에 들어 가는 원전 선진국으로 부상하였습니다. 현재 원자력발전은 건설 및 운영분야 모두 거의 기술자립단계에 있어 우리기술로 건설하고 있고, 세계 정상수준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전체 발전원가 중 연료비 비율이 10%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준 국산에너지입니다. 에너지 소비절약, 에너지소비 산업의 구조조정, 대체에너지의 이용증대로 에너지 수입을 줄여 나가야 합니다.원자력은 고밀도 기술에너지로 원자력발전의 확대는 그 만큼 화석연료의 수입을 적게 해줌으로써 에너지수입 대체효과(외화절감)가 매우 큽니다. 이 블로그의 [세계가 일본된다] 암울한 세계 경제를 요약한 책 라는 책에서 원전의 경제적인 측면을 확인할 수 있고, 원전사고로 인한 일본경제의 타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원자력발전 기술은 하이테크 산업으로 모든 관련 사업으로 모든 관련 산업분야의 기술발전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4. 다음 장점은 유리한 경제성입니다. 원자력발전은 연료가 싸기 때문에 발전원가 중 연료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낮고 발전원가도 낮아 경제성에서 훨씬 유리합니다.원자력발전은 화력발전같은 다른 발전방식에 비하여 건설비가 많이 들어 초기 투자비는 높지만 발전소 수명기간(약 40년)동안 사용하는 연료인 우라늄이 석유나 천연가스에 비해 월등히 싸기 때문에 매우 경제적인 발전방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원자력발전은 연료가 싸기 때문에 발전원가 중 연료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낮고 발전원가도 낮아 경제성에서 훨씬 유리합니다.원자력발전은 화력발전같은 다른 발전방식에 비하여 건설비가 많이 들어 초기 투자비는 높지만 발전소 수명기간(약 40년)동안 사용하는 연료인 우라늄이 석유나 천연가스에 비해 월등히 싸기 때문에 매우 경제적인 발전방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 나라는 에너지원(석유, 석탄, 천연가스)을 대부분 해외에서 수입하고 있습니다. 에너지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것이 우리 생활입니다. 특히 필수 에너지이자 가장 편리한 에너지인 전기는 그 소비가 해마다 급증하고 있어 발전 설비를 계속해서 늘려나가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원자력발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입니다.


■ 원자력 발전의 장점 요약

 1. 원자력 발전소는 에너지 자립의 초석이다. 그리고 에너지 자립은 국력을 좌우한다.

 2. (사고가 발생하지만 않는다면)원자력 발전소는 환경 친화적 에너지이다.

 3. 원자력 발전소는 첨단과학기술의 집합체이며 모두 국산화가 가능하여 고도기술을 선도한다. 북한 원전 또한 우리의 독자적인 기술로 개발된 한국표준형 원전을 통해 기술자립을 이룩했다

 4. 원자력 발전은 안정적인 연료공급 에너지이다. 연료인 우라늄은 세계 전역에 고르게 매장되어 있다.

 5. 원자력 발전은 매우 경제적이다. 다른 발전방식에 비해 건설비가 다소 비싸지만 40년 이상의 운전기간 동안 사용되는 우라늄이 석유나 천연가스에 비해 월등히 싸다.


■ 원자력발전의 단점

 1. 태생적으로 위험적입니다. 현 세대의 모든 산업용 원자로들은 본래 핵무기용 플루토늄 생산, 또는 핵잠수함이나 다른 군함 추진체를 개발하기 위한 디자인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들 원자로의 수명, 규모, 설계 유형은 모두 다르지만 이들 모두가 안전에 있어 매우 심각한 본질적 위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원자력산업계는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방사능 물질과 방사능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이들은 태초부터 존재해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원자력발전, 원자폭탄의 실험, 생산 및 사고를 통해 인류는 기존에 없었던 방사성물질을 만들어냈고, 이제는 이를 관리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2. 또 다른 단점은 원전사고의 위험입니다. 어떤 원전에서든 인간과 환경에 치명적인 방사능이 유출되는 사고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원전은 심지어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동안에도 지속적으로 방사성물질을 대기와 수중으로 방출하고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신규 원전을 건설하는 데 반대하는 흐름이 형성되자 원전 업계는 기존 원전의 수명을 연장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원전이 노후되면 그 위험성이 더욱 높아지기 때문에 노후 원전의 수명이 연장 되어서는 안 되며 안전을 위해 폐로 되어야 합니다.

 3. 또 다른 단점은 핵 폐기물입니다. 핵폐기물은 우라늄 채광 및 농축, 원자로 가동,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 등 핵발전의 모든 단계에서 생산됩니다. 이 같은 핵폐기물의 대부분은 미래세대에 유독성 유산으로 수십만 년 동안 존재하게 됩니다. 폐쇄되는 원전 또한 대량의 핵폐기물을 만들어냅니다. 전세계 대부분의 원자력발전소가 운영을 중단한 이후에도 수 세기 동안 모니터링과 보호조치를 받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4. 마지막으로 핵 확산 위험입니다. 원자력발전을 하고 있는 모든 국가들이 핵무기 개발 능력을 보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원자력발전을 하고 있는 모든 국가가 잠재적으로 핵무기 개발 능력을 보유한 셈입니다.




출처 : 

http://www.greenpeace.org/korea/campaigns/climate-energy/nuclear-phase-out/problems/

■ 친일문학의 세 개의 시기가 있다.

 ≫ 1 시기 : 강제병합 이전, 2 시기 : 일본의 찬미와 합병의 정당성, 3시기 : 일본 문화정책에 흡수되어 일본 정책에 대한 홍보

 ≫ 친일파 이광수는 친일문학 3시기인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필요한 황국식민화 대동학공양론을 예찬하며 전쟁을 미화하고, 징병과 징용과 위안부를 찬미하며 선정 선동하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 친일문학이란

 ≫ 황국시민으로의 이데올로기 강조, 당시 문학예술인과 현재의 문학인이 다르다고 한다. 현 세대로 치면 연예인급. 전쟁에는 파시즘이 필요하다. 전쟁을 말이나 글로 움직이게 하는 힘들 즉 전쟁에 필요한 지식인들, 문화예술인을 통해 전쟁을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만드는 친일파다.


■ 이광수, 그는 누구인가?

 ≫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문학가로, 조선,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소설가, 작가, 시인, 문학평론가, 페미니즘 운동가, 언론인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왕가의 방계혈족이다. 사상가, 기자, 번역가, 자유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 평안북도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다. 창씨개명 한 일본 이름은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 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와 독립신문 등을 맡기도 했었다. 유교적 봉건 도덕에서 현대 윤리학으로 이행하고자 하였고, 여성 해방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했다. 언론인 활동으로는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번역가로도 활동하여 영미권의 작품을 한글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 일본 유학 중에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고,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망명, 1919년 도쿄(東京)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독립신문을 발행했다. 1921년 귀국 후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의 언론에 칼럼과 장·단편 소설, 시 등을 발표하였다.

 ≫ 이광수의 가계는 조선 조선 태조의 고조부인 조선 목조의 후손으로써 목조의 장남 안원대군 진(珍)의 22대손이 된다. 조선 건국 후 안원대군(安原大君)으로 추증된다.

 ≫ 당시 문학 친일로써 대단위 자발성을 가지고 친일행위를 했다. 조선인들의 황국신민화를 선전/선동, 징병이야 말로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며 우리가 아무리 자발성을 가지고 일본인의 DNA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조선인이라는 외부적 형태가 있기 때문에 조선인이라는 차별성이 존재한다 일본인에게만 적용되었던 징병제가 조선인에게도 행해짐으로써 드디어 우리가 일본인과 하나가 되더라, 우리가 어엿한 국민으로써 대우받게 되었다며 눈물을 흘리고 전쟁을 미화하였다


■ 이광수의 생애

 ≫ 1892년 평안북도 청주에서 태어났다.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고, 친형제로는 위로 친형 세 명이 요절하였고, 여동생 두 명이 있었다. 부모를 잃은 뒤 이복형제들과는 연락이 끊겼고, 친 여동생 중 3년 연하인 애경은 만주 영구에 사는 사람과 결혼해서 살다가 1936년에 사망했고, 여동생 애란은 부모를 잃은 뒤 어떤 집의 민며느리로 들어갔다가 결혼 이듬해에 죽었다.

 ≫ 5세에는 천자문을 깨우치고 소학과 명심보감까지 읽어내려갔으며 외할머니에게 《덜걱전》, 《소대성전》, 《장풍운전》 등을 읽어드릴 정도로 명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가정 형편으로 좋은 학교를 보낼수 없어 8세경에는 동리의 글방에서 《사략》, 《대학》, 《중용》, 《맹자》, 《고문진보》 등을 배웠으며 한시와 부(賦)를 지었다. 그 뒤 한시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신동으로 알려졌다.

 ≫ 그의 집은 지독하게 가난했다. 어머니가 뽕나무 잎을 도둑질해서 키웠다고도 한다. 가난한 집안 환경과 말수 적고 병약한 그는 혼자 사색을 하거나 책을 읽는 것으로 소일하였다. 열 살에 담배장사를 시작했던 이광수는 평생 고아 콤플렉스에 시달리기도 했다. 더구나 그의 어머니가 삼취부인이라는 점을 들먹이면서 그를 무시하며 괴롭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부모는 이광수가 11세가 되던 해(1902년 8월)에 전염병 콜레라로 별세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이후의 그의 성장 과정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 그는 누이동생 둘과 고아가 되어 외가와 재당숙 할아버지 집을 오가며 자랐다. 그의 집안은 태조 이성계의 방계 후손이었지만 스스로 왕족이라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태조의 직계 후손도 아니라서 왕족으로서의 예우도 받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성리학에 대한 상당한 비판적인 의식을 지니게 된다.

 ≫ 경성부 근처에서 육체노동과 상점의 종업원 등을 전전하였다. 어려서 폐렴과 결핵을 얻었는데 병원에 가서 고칠 비용도 없고 치료시기를 놓치면서 평생 병약했다. 가난의 설움을 속 깊이 느꼈으며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이광수에 대한 주변의 멸시와 무시, 무심한 어른들의 막말과 욕설은 그에게 심한 상처와 좌절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육체노동과 상점 종업원 등을 전전하던 그를 딱하게 여긴 어느 천도교인이 그를 위로하였고, 그 호의에 깊이 감명받은 그는 천도교에 입교를 결심한다. 이광수는 배편으로 일본에 건너간 뒤 개신교 목사댁에서 지냈다. 일본인 목사의 집에서 하숙하는 동안 일본인 목사는 매일 새벽과 저녁때 '하나님, 대일본제국을 위해 도와주소서'하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이후 그는 하나님과 정의, 도덕이란 존재하는가에 대해 깊이 회의하게 되었다. 또한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고,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제국주의를 하나님이 구제하지 않는가, 과연 정의란 존재하는가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

 ≫ 1919년 1월 상하이로 가 여운형을 당수로 삼아 조직된 신한청년당 조직에 가담했다. 안창호의 민족운동에 크게 공감해 7월 상해 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회 주임을, 8월에는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을 맡았다. 이광수는 안창호의 사상적 계승자이기도 했다.


■ 이광수의 변절의 계기

 ≫ 이광수의 사상, 세계관은 작품으로도 투영되었는데 1910년 데뷔 이후 초기에는 기독교적 경건함과 애국 계몽주의적인 경향을 띄었다. 이광수의 초기작품들은 인간의 개성과 자유를 계몽하기 위하여 자유 연애를 고취하고, 성인이 된 자녀의 결혼에 부모가 개입하는 것의 부당함을 주장하였으며, 조혼의 폐습을 거부하였는가 하면, 족보를 없애고 위선적인 문벌 사회와, 유교의 학통과 학풍 등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으로 그는 인륜을 어지럽히고 금수화를 획책하는 인간이라는 비방에 시달려야 했다. 무정에서는 서양의 교육을 불신하는 국내 사람들을 조롱하며 신 교육을 받아야 된다는 점을 지적하였고, 개척자에서는 과학사상에 대한 불신을 버릴 것을 역설하였으며, 흙에서는 농민계몽 사상을 고취하면서 민족주의사상을 계몽하였다. 처음에는 기독교적 시민윤리와 사회 계몽을 역설하였지만 인간의 이중적인 본질에 갈등, 번뇌, 환멸감을 느끼면서 점차 현실지향적으로 변해갔다. 1930년대의 한 작품을 발표할 때 "동시대 최선의 세계관을 선택하고 동시대와 인물의 중심계급을 전형화하였다."고 하기도 하였는데, 1930년대에 갈 수록 퇴폐적인 문학이나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지는 극단적 문학관을 지양하였다.

 ≫ 그는 처음 사회 계몽과 개혁을 설파하였으나 사람들은 호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낭만주의자나 공상주의자라고 비판하거나, 단지 소설과 역사 소설에만 관심을 갖는 민중들을 보고 점차 실망하게 되었다.

 ≫ 1920년, 이광수가 기대한 것처럼 조선독립은 쉽사리 실현되지 않아고, 앞으로도 독립의 기회는 찾아올 것 같지가 않았다. 일본은 패전국이 아니라 연합국의 한 나라요, 승전국 측에 속해 있었으며, 국력도 나날이 강해지고 국제적 지위도 날로 높아져갔다.[24] 그러한 일본으로부터 조선이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거의 희망이 없는 일로 보였다. 이광수는 조선 사회에 만연한 요령과 술수, 위선, 속임수 등에 좌절, 절망하였다. 요령과 술수, 속임수를 걷어내지 않고는 독립을 할 수가 없으며, 독립한다손 치더라도 그러한 독립은 오래 갈 수 없다며 절규했다.

 ≫ 같은해 1920년, 그의 생활이 어려워진 것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정형편도 점차 어려워졌다. 1920년 말 재정난으로 사료편찬위원회가 해산되고 독립신문도 속간이 어렵게 되었다. 이광수는 임정으로부터 제네바 주재 대표로 선임되었으나 여비 사정으로 떠나지 못했다. 건강이 악화되어 안창호의 적극 주선으로 병원에 입원한 일도 있었다. 이 무렵부터 이광수는 점점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희망 없는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인지 어떤지에 관해 그는 점차 깊은 회의에 빠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부의 파벌 다툼과 독립운동 단체와 파벌 간의 이권다툼 등도 점차 그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감과 환멸감을 강화시켰다.

 ≫ 이광수는 상하이에서 궁핍한 생활을 계속 지내왔는데, 2년 뒤인 1921년 3월 이광수는 도저히 상하이 생활을 못하겠다고 선언하고는 귀국길에 오른다. 폐병의 악화와, 국민대표자대회 등 임정 요인과 독립운동가들간의 파벌다툼과 의욕 상실 등이 원인이었다. 1921년 2월 이광수가 안창호에게 귀국할 뜻을 보이자 안창호는 적극 만류[각주:1]하였다. 그러나 이광수는 그의 만류를 듣지 않고 귀국한다.

 ≫ 1921년 4월말 단신으로 상하이항을 떠나 배편으로 개성으로 귀국, 열차를 타고 가던 중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검문검속을 하던 일본인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나 혐의가 없어 곧 풀려났다. 그가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나자 이때부터 시중에는 그가 변절자라는 의혹이 나타나게 되었다. 귀국 직후 일제나 총독부의 식민 통치에 별반 저항없이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에 그는 환멸감을 느끼게 되었다.


■ 이광수의 귀국 문필활동, 변하기 시작한 이광수

(1922년 5월호, 개벽에 실린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 1922년 5월에 도산 안창호의 사상에 감화받은 그는 민족개조론에서 일찍이 나태하고 게으르며 무기력한 이 민족의 성격을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으르고 무기력하며, 나약하며 공짜를 바라며, 허황되다, 요령과 술수에 능하다, 그리고 속임수와 눈가리기에 능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러한 습성으로는 서로간의 신뢰도 어렵지만,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는 것은 어렵다고 하였다. 일부 국민들의 의지만으로 독립이 달성되는 것은 아니며,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지 않고는 어느 나라도 조선의 독립을 도와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 우리 민족이 추구해야 할 방도는 일제에 대항하는 독립투쟁이 아니고 독립을 쟁취하고 유지할 만한 실력을 먼저 기르는 민족개조운동, 자치운동론'이라고 주장했다. 〈민족개조론〉의 타협적인 내용은 곧 민족진영 인사들의 감정을 자극, 논란을 일으키면서 문필권에서 소외당하였다. 그러나 이광수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그의 〈민족개조론〉은 실력 양성론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식민지통치를 인정하는 범위내에서 자치를 얻자는 자치운동의 이론적인 뒷받침이 되었다.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을 발표했을 때 이광수의 집에 칼을 든 청년들이 난입했으며 기물들이 파괴되었고, 이광수를 강사로 초빙했던 사람까지 습격당했다.

 ≫ 그는 조선 사회는 요령과 기만, 허위가 판치는 사회이며, 이런 사회, 이런 시민 의식으로는 백년이 지나도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견해에는 공감 보다는 감정적인 반론과 공격이 계속되었다.

 ≫ 1932년 1월의 이봉창의 투탄 사건을 애석히 실패했다 하고, 그해 4월의 윤봉길의 투탄 사건을 쾌거라고 주장했다가 헌병의 귀에 들어가 총독부 경무국으로 소환당했다. 6월 안창호가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인천항에 도착하자, 자동차로 인천항에 가서 안창호의 호송 차량을 경성까지 따라갔다.안창호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자 크게 낙심, 서대문형무소에 가서 안창호를 자주 면회하였다. 안창호의 재판비용과 석방, 구명운동에 나서는 한편 윤치호, 김성수 등을 찾아가 안창호의 출옥을 도와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는 안창호가 심장과 간장 등이 좋지 않음을 들어 병보석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고, 안창호는 징역 4년의 언도를 받게 되었다.


■ 이광수의 변절 그리고 친일행위

 ≫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흥사단 사건)으로 안창호와 함께 경성부에서 체포,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조직원을 불라는 고문을 당했지만 그는 조직원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건강했던 그는 독방에 수감되었고, 안창호와 함께 병 보석으로 출감할 때까지 형무소에서 6개월간 수감, 1938년 초 6개월 만에 병으로 보석되었다.

 ≫ 1938년 3월 정신적 스승인 안창호가 사망하자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졌으며, 이후 조선신궁[각주:2]을 참배하는 등 본격적인 친일행위의 길로 들어섰다.

 ≫ 1939년 친일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에 취임하여 <내선일체[각주:3]와 조선문학>을 쓰는 등 조선문학을 일제의 선전도구로 만드는 데 앞장섰다.

 ≫ 1940년 창씨개명이 실시되자 가야마 미쓰오(香山光郞)로 이름을 바꾸면서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라며 기염을 토했다. 

 ≫ 1941년 8월 25일 임전대책협의회[각주:4]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9월 7일에는 임전대책협의회가 주관한 채권봉공대 종로대에 참가하여 거리에서 '애국채권'을 팔았다. 9월 11일 조선임전보국단[각주:5]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10월 18일 조선임전보국단 대구지부 설치를 위한 위원으로 파견되었다. 이광수는 1941년 8월엔 중일전쟁, 9월엔 태평양전쟁을 위해서 힘 썼다.

 ≫ 1942년 2월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저축강조 전진대강연회 연사로 활약했다. 6월 10일엔 조선문인협회 주최로 부민관에서 열린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에 참석했다.

 ≫ 1943년 징병제 실시가 공표되자 <지원병장행가> <징병제의 감격과 용의> 등을 기고하여 조선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 1943년 2월 25일부터 8월 3일까지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국민개병가' 현상모집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 1943년 11월부터 1944년 1월까지 조선문인보국회가 주관한 “결전소설과 희곡 현상모집”에서 심사위원을 맡았다. 11월 4일부터 7일까지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했다. 

 ≫ 1943년 11월 8일부터 14일경까지 작가 최남선, 기업인 김연수, 친일파 정치인 이성근(李聖根) 등과 함께 부산항을 출발, 일본에서 학생들에게 전쟁 지원병을 권유하는 '선배격려대원'으로 연설했다. 

 ≫ 1943년 11월 24일 일본 도쿄 메이지 대학에서 조선인 전문·대학생들에게 학병에 지원하라는 강연을 했다.

 ≫ 1945년 1월 4일, <모든 것을 바치리>를 낭독했다. 그 내용을 발췌한다.

자, 조선의 동포들아

우리들이 있음으로써

이 큰 싸움을 이기게 하자

우리들이 있음으로써

대아세아 건설을 완수시키자

이럼으로써 비로소

큰 은혜에 보답하여 받듦이 되리라

아아 조선의 동포들아

우리 모든 물건을 바치자

우리 모든 땀을 바치자

우리 모든 피를 바치자

동포야 우리들, 무엇을 아끼랴

내 생명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지 말지어다

내 생명 그것조차 바쳐 올리자

우리 임금님께, 임금님께


■ 이광수의 반민특위부터 사망까지

(이광수 반민특위 수형 시절 1949년 2월 초)

 ≫ 1949년 1월부터 이광수는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게 되었고[37] 반민특위의 2차 검거(문화계)가 시작된 첫날인 1949년 2월 7일에 전격 구속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수감되었다.

 ≫ 이광수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한 경위와 친일의 역사철학적 맥락을 전면적으로 밝힌 《나의 고백》(춘추사)을 간행했다. 이 책에서 민족의식이 싹트던 때부터 일제 말기까지 자기의 행위를 '민족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서술한 후, 일제 말기의 친일 행위 역시 "애국자로서의 명예를 희생하더라도 민족보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고 강변했다. 

 ≫ 자신이 태평양 전쟁 무렵 협력을 주장한 것에 대해 이광수는 "일제에 협력하면서 참정권과 평등권을 얻어 민족을 보존하면 독립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조선 사람들은 황국신민의 대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창씨개명 안한 사람, 신사참배 안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우리 국민은 문맹자도 많고, 경제자립도 어려워 일본과 싸워 이길 힘이 없습니다.",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 내가 걸은 길이 정경대로(正經大路)는 아니오마는 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오."라고 변명하기도 하였다

 ≫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사흘 전인 6월 22일, 자택에서 고혈압과 폐렴으로 쓰러졌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게 7월 5일에 효자동 집이 차압당하고, 6일에 내무서로 연행되었다. 7월 12일, 이광수는 김규식, 김동원, 안재홍, 방응모, 정인보 등과 함께 납북되었다. 평양에서 강계로 이동되던 도중 지병인 폐결핵에 동상까지 겹쳐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친구 홍명희가 김일성의 허락을 얻어 강계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자신의 숙소로 데려갔다가 인민군 병원으로, 다시 강계군 만포면 고개동의 큰 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이광수는 1950년 10월 25일 지병인 폐결핵의 악화로 승용차 안에서 향년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출처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키워드 : 친일, 친일파, 이광수, 안창호, 한국전쟁, 한국, 역사, 사회, 반민특위, 반민족, 특별행위, 일본, 사기극, 문학, 민족, 개조, 변절, 변절자

  1. 만류 : 붙들고 못 하게 말림. [본문으로]
  2. 조선신궁 : 조선신궁(朝鮮神宮)은 일제 강점기에 경성부의 남산에 세워졌던 신토의 신사이다. [본문으로]
  3. 내선일체 : 일본이 세계대전 중, 해외식민지를 외지라고 불러 일본 본토를 내지라고 하고, 선이란 조선을 가리키는 말로, 일본과 조선이 일체라는 뜻이다. [본문으로]
  4. 임전대책협의회 : 1941년 8월 중일 전쟁에 대한 협조를 위해 자발적으로 황국신민화 운동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논의, 실천 활동을 위한 상설 조직 [본문으로]
  5. 조선임전보국단 :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1년 9월에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해 여러 단체들이 통합되어 조직된 연합 단체이다 [본문으로]

※ 1과 2에서 원자력 발전소의 사고원인과 이유 그리고 노심과 제어봉에 대한 설명을 접할 수 있습니다.

■ 1986년 4월 26일 사건 그 이후, 체르노빌 원전사고에 대한 처리 : 화재 진압과 방사능의 긴급 누출 방지

 
(폭발직후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당시 수석 엔지니어 알렉산드로 아키모프)

 ≫ 체르노빌 발전소의 발전기는 4기가 있었고, 그 중 2기는 추가로 짓고 있던 중이었다. 폭발의 여파로 4호기의 잔해와 3호기에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기 위하여 1986년 4월 26일 사고 직후 소방대원들이 파견되었다. 사고 직후인 1시 28분에 우선 알렉산드르 아키모프가 지휘하는 14명의 소방대원이 파견되어 화재를 진압하기 시작하였고, 오전 4시 경에는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가 지휘하는 250명의 대원이 추가로 파견되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오전 2시 10분에는 기계동 천장의 가장 큰 불이 진압되었고, 2시 30분에는 폭발한 반응로 건물 천장의 화재 또한 진압되었다. 오전 5시에는 반응로 주변에 일어난 대부분의 화재가 모두 진압되었다. 이 기간 동안 아무도 폭발이 일어난 반응로 근처로 가지 못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반응로의 잔해가 계속 불타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사고 후 처음 20시간 동안 소방대원과 발전소 직원들의 화재 진압 시도로 인해 뿌려진 물이 기화하여, 반응로 주변은 증기로 가득한 상태였다. 이 증기는 가열된 흑연이나 반응로 내부의 지르코늄과 같은 다른 물질과 반응하여 수소 가스를 비롯한 많은 가연성 물질들을 만들어냈다. 이 가연성 물질들은 사고 발생 후 약 20시간이 지난 4월 26일 오후 9시 41분에 반응로의 잔해를 폭발시켰다. 폭발의 여파로 만들어진 불기둥은 거의 50m에 달할 정도의 규모였다. 

 ≫ 이 화재를 진압하고 화재로 인한 방사능의 누출을 막기 위해 5월 5일까지 군용 헬리콥터 30대가 동원되어 여러 물질들이 투하되었는데, 이 물질들은 중성자를 흡수하여 연쇄 반응을 막기 위한 40톤의 붕소 화합물, 열을 흡수하고 이산화 탄소를 발생시켜 화재를 진압하기 위한 돌로마이트 600톤, 방사능 차폐를 위한 2400톤의 납과 1800톤의 모래와 진흙 등이다. 동원된 헬리콥터와 그 조종사의 방사능 피폭을 줄이기 위해, 헬리콥터들은 폭심의 바로 위에 멈춰서지 않고 반응로를 날아서 통과하면서 투하물들을 떨어뜨렸다. 이 때문에, 투하물 중 일부는 목표인 노심을 빗나가 그 주변에 떨어졌으며, 이렇게 주변에 떨어진 투하물들은 반응로 내부의 열을 흡수하지 못하고 잡아두는 역할을 해 반응로의 온도를 높이고 방사능의 추가 누출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추측된다. 헬리콥터에 의한 화재 진압 시도는 5월 7일까지 지속되었으나, 폭발로 인해 건물의 구조가 약화되어 추가 폭발 또는 노심 용해 사고가 발생할 우려가 있어 5월 10일까지 중단되었다. 헬리콥터에 의한 시도가 중단된 이후에는 원자로 3호기에 있던 액체 질소를 노심에 주입해 5월 9일 반응로의 화재가 마침내 진압되었다.


■ 소련정부의 사고 공표
 ≫ 소련 정부는 사고가 일어난 사실을 즉시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했던 1986년 4월 26일 아침에, 사고 지점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1,200 km 떨어진 스웨덴의 포스막 원자력 발전소에 출근한 과학자의 의복에서 포스막 발전소에서는 발견된 전례가 없는 방사능이 검출되었다. 4월 27일과 28일에는 정상 수준보다 6배 이상 높은 방사능이 스웨덴뿐만 아니라 핀란드를 포함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여러 지역과 덴마크에서 검출되었고, 스웨덴 정부는 대기 상황을 고려하여 이 물질이 소련에서 날아온 것으로 추측하고 소련 정부에 해명을 요구하였다. 소련 정부는 관영 통신사인 타스를 통하여, 정확한 사고 발생 시각과 피해자의 수 등은 언급하지 않은 채 4월 28일에 사고 발생 사실을 인정하였다.


(원전 4호기를 상공에서 찍은 당시 사진)

 ≫ 소련 정부가 사고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방에서는 사고 규모와 사망자 수에 대한 소문이 진위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채로 퍼졌다. 사고가 처음 공표된 4월 30일경에는 사망자수가 2천 명에서 3천 명에 이른다는 추측성 기사가 보도되었고, 사고 원인도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비슷한 노심용융으로 추측되고 있었다. 소련 정부는 타스 통신을 통해 4월 30일에 이 같은 추측을 부인하고, 방사능 누출로 인해 입원한 환자 수를 밝혔다. 서구 기자들의 취재 요청이 있었지만, 소련 정부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이후 스웨덴 정부 등에 공식적으로 화재 진화를 위한 소방관 파견과 방사능 오염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의료 지원 등을 요청하였고, 같은 시기에 미국의 첩보 위성 등이 심각하게 손상된 원자로를 확인하면서 사고가 매우 심각한 규모라는 사실이 간접적으로 알려졌다. 소련이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보도하기 시작한 것은 5월 6일에 이르러서였다.

■ 소련의 방사능 제거를 위한 노력
 ≫ 방사능의 누출을 막기 위한 최초의 조치로 냉각 장치를 내장한 콘크리트 판을 4호기의 지하에 설치하는 작업이 수행되었다. 이 판들은 고온의 노심을 냉각시키려는 목적과 함께, 노심의 열에 의해 용융된 액체 상태의 방사성 물질이 지하수로 흘러드는 것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이 작업은 약 400명의 작업자에 의해 15일간 진행되었다 콘크리트 판 설치가 완료된 후, 지상에 노출된 노심에 남아있는 핵연료와 방사성 물질에 의한 방사능 누출을 막기 위하여, "석관"(sarcophagus)이라 불리는 콘크리트제 봉인 시설을 건설하는 작업과, 사고 지점 근처에 있는 댐과 호수의 방사능 오염 제거 등의 작업이 먼저 시작되었다. 이 작업에는 약 22만 6천명 정도의 인원이 참여하였다. 호수의 방사능 오염 제거 작업은 1986년 9월경에 완료되었으며, 봉인 시설은 11월에 완공되었다. 이 작업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남아있는 원자로 시설과 발전소 진입로, 그리고 그 주변 지역의 방사능 오염 제거 또한 이루어졌다. 이 작업은 1987년까지 계속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방식이 사용되었다.
1. 오염된 시설의 표면과 장비에 액체와 모래, 증기 등을 분사하여 오염 물질을 청소
2. 오염 지역의 표토를 제거하고 매립
3. 오염된 시설의 표면을 고분자로 코팅한 후 제거함으로써 고분자에 붙은 먼지 입자 등의 방사능 오염 물질을 제거
4. 도로와 기타 아스팔트 포장된 구역의 재포장

■ 폭발현장에서의 시민 희생 : 키예프 시가지지역의 방사능 노동절 축제

(키예프 시가지의 방사능오염수치를 나타낸 표시 : 붉은색은 심각하게 오염된 지역)

 ≫ 폭발현장의 화재를 진압하기위해 소방관들이 보호장구도 없이 급파되어 화재를 진압하려고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원자로의 화재는 쉽게 진화되지 않았고 투입된 소방관들 2명은 그날 저녁에 사망했다. 나머지 28명도 모두 몇개월 안에 치사량의 피폭때문에 사망한다. 가공할 방사능오염물질들이 바람을 타고 온 유럽을 뒤덮었다. 체르노빌의 당사자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도 오염되었다. 


 ≫ 5월은 공산국가의 가장 큰 기념일중 하나인 메이데이(노동절) 축제가 있고 소련은 심각하게 오염된 키예프에서 노동절축제를 강행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사태가 심각하지 않다는 믿음을 주어 사람들의 패닉을 잠재우기 위한 대국민 사기극이었다. 정상치의 수천배가 넘는 방사선수치 속에서 강행된 노동절 축제기간중 수많은 사람들이 피폭되었고 관련통계는 거의 집계발표되지도 않았다. 또한 1986년의 노동절 축제 관련 기록사진 및 필름은 우크라이나 국립 기록 보관원에서 모조리 삭제되었다.


 ≫ 사태 발생 초기에 붕산 모래 혼합물 투하작전에 투입된 소련병사. 평균연령 20대였던 소련군인들은 대부분 작업후에 피폭후유증으로 며칠 못넘기고 모스크바 6호병원에서 사망했다. 그중 27명은 빠르게 죽었다.

 ≫ 2차 폭발의 위험이 제거된 후 소련군이 복구작업에 투입된다. 엔지니어인 레프 볼차코프가 설계한 거대한 콘크리트와 철의 석관을 4호기 위에 덧씌우는 작업에 대량의 공병차량과 크레인, 불도저가 투입된다. 작업원들은 피폭을 최대한 줄이려고 운전석에 납으로 된 판을 부착해 급조하고 작업시간을 최대한 줄여 피폭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작업중 난관에 부딪치는데, 폭발한 원자로의 흑연이 4호기 지붕위를 완전히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각각의 파편들은 제각각 시간당 500~1500 뢴트겐을 뿜어대고 있었고 이런 극한의 상황에 사람은 들어갈 수 없었다. 그들은 로봇을 투입해서 제거작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강렬한 방사선속에서 작업하던 로봇들의 회로가 망가져버려서 결국 사람을 투입하기에 이른다. 이런 환경에 인간을 보낸다는것 자체가 용납될 수 없는 미친짓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투입된 병사들을 바이오 로봇이라고 불렀다.

■ 폭발현장에서의 시민 희생 : 니콜라이 타라카노프장군의 기록필름


(니콜라이 타라카노프 장군)

 ≫ 수습작전을 지휘한 니콜라이 타라카노프 장군. 그가 부하들을 방사능지옥에 투입하면서 한 말이 기록필름으로 남아있다.


 : 동무들, 자네들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해


 : 이틀 전에 내가 한 장교와 함께 저 지붕위로 올라가봤는데,


 : 한 가지 확실하게 알게된 것은


 : 저 위쪽에 올라가봐도 별로 두려워 할 것은 없다는거야.


 ≫ 그들은 시간당 10000 릔트겐의 방사선에 피폭되었고, 병사들은 방사능덩어리들을 삽으로 떠내거나 맨손으로 집어서 옮겨야 했다. 각각의 파편들은 시간당 1500뢴트겐을 뿜어댔고, 이렇게 폐기물들을 쥐고 있던 병사들은 곧 손에서 대단한 통증을 느꼈으며 나중에는 주먹을 쥘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체르노빌 추가 피해는 많은 시민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막을 수 있었다.


출처 : 체르노빌의 진실(http://m.jjang0u.com/chalkadak/view?db=160&no=177100)

,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사고 위키 : https://ko.wikipedia.org/wiki/%EC%B2%B4%EB%A5%B4%EB%85%B8%EB%B9%8C_%EC%9B%90%EC%9E%90%EB%A0%A5_%EB%B0%9C%EC%A0%84%EC%86%8C_%EC%82%AC%EA%B3%A0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이유 그리고 그 과정 #1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체르노빌 사고 그 사건,사고의 진실 그리고 시민들의 희생 #3


■ RBMK 이해전에 숙지

: (제어봉)

 ≫ 원자로는 연쇄핵분열 반응을 통해 열을 생산하는데, 제어봉은 연쇄핵분열의 매개체인 중성자를 흡수해 연쇄핵분열 속도를 조절하는 도구이다. 제어봉을 만드는데 이용되는 물질들은 중성자의 에너지 변화에 따라 중성자 포획 능력이 달라지므로, 제어봉 집합체는 원자로의 다양한 중성자 에너지 영역에 맞추어 설계해야 하며, 보통 은, 카드뮴, 붕소, 인듐이 재료가 된다.

 : (노심)

 ≫ 원자로의 핵연료를 담고 있는 원자로의 부품으로, 핵반응이 일어나는 곳이다. 노심 안에는 핵 연료와 제어봉 있고, 냉각재가 상실되면 중대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체르노빌 사고와 관련 있음), 노심에 핵분열로 생긴 열이 쌓이면 노심의 구조물이 녹거나 파손되는데 그 자체가 파손되어 방사성 물질이 주위에 확산될 수 있다.



■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원자로 (RBMK)

 ≫ RBMK 또는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黑鉛減速沸騰輕水壓力管型原子爐)는 소비에트 연방이 개발한 원자로 형식으로, 러시아어 Реактор Большой Мощности Канальный(영어: Reaktor Bolshoy Moshchnosti Kanalniy, 채널형 고출력 원자로)의 첫글자를 따서 RBMK라고 부르며, 현재는 소비에트 연방[각주:1]이 만든 흑연감속 원자로의 뜻으로만 사용된다. RBMK는 체르노빌 사고를 일으킨 원자로 유형이며, 2004년 현재 더 이상의 건설계획은 없으며 체르노빌의 마지막 RBMK는 2000년까지 폐로되지 않았고, 2012년까지 적어도 11개의 RBMK 반응로가 러시아에서 운영되고 있다

 ≫ RBMK는 소련의 플루토늄 생산용 원자로를 기반으로 한 원자로를 만드는 소련의 프로젝트 중 최고의 작품이었다. 세계 최초 원자력 발전소(최초로 원자로에서 전력생산)에 쓰인 첫 번째 RBMK인 AM-1은 5MW의 전력(열효율 30MW)을 오브닌스크[각주:2]에 1954년부터 59년까지 공급했다.

 ≫ RBMK는 경수[각주:3]를 냉각재로 감속재[각주:4]로 흑연[각주:5]을 사용하며, 연료로는 천연우라늄을 사용할 수 있으며(일반적으로 2.4%의 농축우라늄을 사용한다), 압력관 갯수만 늘리면 원자로를 크게 만들수 있고, 또한 운전중 연료교체가 가능하기 때문에 운전성이 높다는 장점이 있다. 그 대신, 다른 원자로 유형에 비해 불안정하다는 단점이 있다.


■ RBMK의 설계

 ≫ RBMK는 흑연 감속재를 통과하는 7m 가량의 압력튜브로 되어있으며, 냉각재로 물을 사용하는데 비등수형 원자로와 비슷한 온도인 290°C 정도로 비등한다. RBMK의 연료는 저농축 우라늄을 사용하며, 3.5 미터 길이의 연료집합체에 장착한다. RBMK는 감속재로 흑연을 사용하기 때문에 엇나갈경우 체르노빌 사고와 같은 재앙이 일어날수 있다.

 ≫ 일반적인 RBMK의 노심에는 3000개의 연료 집합체를 넣을 수 있다. 연료집합체는 우라늄 산화물 펠릿[각주:6]으로 가득찬 연료봉의 집합으로 되어 있으며, 밑부분에는 연료봉의 버팀목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시켜 주는 금속 받침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노심은 연료집합체에서 끌어낸 열 에너지를 잠시 저장해두는 역할을 하고 있다. 원자로가 가동하면, 연료속의 235U가 연쇄반응을 내면서 줄어들게 된다. 몇몇 238U원자들은 여분의 중성자를 얻어 분열가능한 플루토늄으로 변화하여 에너지를 낸다. 이 반응으로 세슘이 생성되며, 이런 세슘은 연쇄반응과 열생산을 저해시킨다. RBMK는 운전중 연료교환이 가능하여, 다른 원자로에 비해 가동률을 높일 수 있다.


■ RBMK의 안정성

 ≫ RBMK의 디자인은 정상 운전, 그리고 비상시 상황에 필요한 몇몇 안전 시스템이 있다. 그중 하나는 노심 출력을 감시하는 피드백 센서로, 출력이 증가할시 자동적으로 제어봉을 노심에 삽입하여 출력을 낮추고, 반대로 출력이 낮아질시엔 제어봉을 인출하여 출력을 높인다. 만약 이 센서가 갑자기, 과격하게 출력이 오르는걸 감지하면, 211개의 붕소 제어봉이 노심으로 들어가 반응을 중단하는 원자로 보호 시스템이 있다. 이 시스템은 필요로 하거나, 혹은 운전원에 의해 자동적으로 실행된다.

 ≫ RBMK 원자로는 발전소와 주변환경의 방사선을 감시하는 방사선 모니터링 관측소가 있으며, 매우많은 차폐벽이 방사선을 흡수하고, 일반 운전과 비상 상황 모두를 포괄한다. 그리고 또한 RBMK은 사고 국부화 시스템이 있는데, 이 시스템은 격리에 도움이 되나, 이 시스템은 오직 약간의 국소 파이프 고장에만 도움이 되었고, 체르노빌 사고에선 무용지물이란걸 보여줬다.


■ 체르노빌 사고 이후 개선

 ≫ 체르노빌 사고이후, 모든 운영중인 RBMK는 여러 안전조치를 추가하였다. 제일 크게 바뀐곳은 RBMK의 제어봉 설계였다. 예전 제어봉 설계는 흑연 감속재의 위에 있어서, 연쇄반응을 조절하기 위해 제어봉을 삽입하면 제어봉은 흑연에 걸려 느리게 내려가거나 혹은 멈춰있는 경우가 있었다. 체르노빌 사고에서는 이 하자로 인해서 체르노빌 원자로의 첫 번째 폭발을 도왔다. 새로 바뀐 개선점은 다음과 같다.

  1. 연료 농축률을 2%에서 2.4%로 높였다. 이로 인해 중성자 흡수율이 높아져 원자로 제어의 신뢰성을 높였다.
  2. 수동 제어봉 갯수가 30에서 45개로 늘어났다.
    (수동 제어봉 개수에 대한 문제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이유 그리고 그 과정 #1에서 다룬다)
  3. RBMK 설계가 위험하기 때문에, 80개의 추가 중성자 흡수재가 저출력을 억제한다.
    (저출력 관련 문제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이유 그리고 그 과정 #1에서 다룬다)
  4. SCRAM (원자로 긴급 정지) 시간을 18초에서 12초로 단축시켰다.
  5. 예방책으로 긴급 안전시스템에 승인되지 않은 접근을 대비하였다.

출처 :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https://ko.wikipedia.org/wiki/%ED%9D%91%EC%97%B0%EA%B0%90%EC%86%8D_%EB%B9%84%EB%93%B1%EA%B2%BD%EC%88%98_%EC%95%95%EB%A0%A5%EA%B4%80%ED%98%95_%EC%9B%90%EC%9E%90%EB%A1%9C)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이유 그리고 그 과정 #1


  1. 소비에트 연방 : 러시아(구 소련의 명칭) [본문으로]
  2. 오브닌스크 : 러시아 서부, 칼루가 주 북동부의 도시. 모스크바 남서쪽에 위치. 인구 10만 8000명. 1955년 러시아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가 세워진 곳. [본문으로]
  3. 경수 : 보통의 물을 상대하여 이르는 말. [본문으로]
  4. 감속재 : 원자로 안에서 핵분열의 연쇄반응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연료체로부터 방출되는 중성자를 감속시키는 물질. [본문으로]
  5. 흑연 : 수정과 같은 결정구조를 가지는 육방정계에 속하는 광물로 석묵이라고도 한다. 흑색을 띠며 금속광택을 가진다. 전기의 양도체, 연필심·도가니·전기로·아크 등의 전극 등에 사용되며 활마재로도 사용된다. [본문으로]
  6. 펠릿 : 원자로에 쓰는 산화우라늄이나 산화플루토늄 가루를 원기둥 모양으로 만들어 고온에서 구워 굳힌 것. 이것을 헬륨 가스와 함께 피복관(被覆管)에 밀봉한 것을 ‘연료봉’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RBMK) #2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체르노빌 사고 그 사건,사고의 진실 그리고 시민들의 희생 #3


■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 정식 명칭은 V.I. 레닌 공산주의 기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이름답게 입구에는 레닌 흉상까지 있었다고 한다. 1971년에 착공되어 1978년 5월에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상용운전을 개시했던 구 소련의 원자력 발전소로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 방식이다.  이 방식의 원자로는 기술이 많이 필요 없고 가격이 싼 편이지만 안전성이 상당히 낮은 데다 제어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소련이 자기네들이 쓰던 군사용 플루토늄 생산로를 대충 고쳐서 전력용으로 써먹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원자로로는 영국에서 개발한 마그녹스가 있다. 

 ≫ 체르노빌 발전소는 총 4기의 원자로를 운용 중이었고, 2기의 원자로를 추가로 짓고 있었다. 그 중 사고가 일어난 체르노빌 원자로는 현재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국경 근처에, 체르노빌에서 북서쪽으로 약 18 km 떨어진 곳에 있다. 사고로부터 2년 후 죄책감으로 자살한 발레리 레가소프에 의하면 이미 사고 이전부터 소련 정부는 이 흑연감속 비등경수 방식의 발전소의 위험성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를 은폐했다고 한다.


■ 체르노빌 사고

 ≫ 체르노빌 발전소의 원자로 4호기의 비정상적인 핵 반응으로 발생한 열이 냉각수를 열분해시키고, 그에 의해 발생한 수소가 원자로 내부에서 폭발함으로써 생긴 사고이다. 폭발은 원자로 4호기의 천장을 파괴하였으며, 파괴된 천장을 통해 핵 반응으로 생성된 다량의 방사성 물질들이 누출되었다.


■ 불안정한 체르노빌 원전

 ≫ 방송에서 체르노빌 사고는 원전의 기술자와 책임자와의 작은 갈등에서 시작한다. 원자로가 불안정한 상태에서 가동시키는 것은 위험하다며 기술자들은 몇번이고 건의를 했으나 책임자는 "당장 출력을 높이지 않으면 자네는 해고야" 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원자력 출력에 앞서 테스트를 하기 위해 원자로를 제어하는 제어봉을 빼내는 과정이 필요한데, 오전 12시 54분 비상벨이 울리자 당황한 책임자는 안전 수칙을 무시하고 테스트를 중지시킨다. 충분히 발전시킨 후 터빈을 끄려고 했으나 계속해서 출력이 올라가는 문제가 발생한다. 조작원들은 황급하게 원자로 가동을 중지하려 했으나 제어봉이 삽입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직원들은 혼란에 빠지고 원자로를 냉각시키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 체르노빌 사고 발생의 원인

 ≫ 사고 전날인 4월 25일에 원자로 4호기는 정기 점검을 위해 가동이 잠시 중단될 예정이었다. 원자로 4호기에는 이전부터 원자로의 가동 중단에 대비해 원자로의 가동 중단시 냉각 펌프와 다른 제어 장치들을 가동할 수 있는 3기의 비상용 디젤 발전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 발전기들은 충분한 전력을 생산하기까지 약 1분의 시간이 걸렸고, 그 때문에 원자로의 가동 중단 시 즉시 냉각 펌프가 작동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불확실하였다. 그 때문에 발전소에서는 주 전원이 끊어진 상태에서 원자로의 터빈이 관성에 의해 회전할 때, 그 회전 에너지가 원자로의 냉각 펌프 등에 얼마나 오랫동안 충분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실험을 계획하였다. 이 실험은 이전에 작동 정지가 있을 때에도 행해진 적이 있었지만, 터빈으로부터 공급되는 에너지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감소하여 결과가 도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전소에서는 결과 도출을 위해 재실험을 하기로 하였다.


■ 체르노빌 사고 발생의 이유 이해전에 숙지

(제어봉)

 ≫ 발생이유를 따져보기 전에 제어봉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원자로는 연쇄핵분열 반응을 통해 열을 생산하는데, 제어봉은 연쇄핵분열의 매개체인 중성자를 흡수해 연쇄핵분열 속도를 조절하는 도구이다. 제어봉을 만드는데 이용되는 물질들은 중성자의 에너지 변화에 따라 중성자 포획 능력이 달라지므로, 제어봉 집합체는 원자로의 다양한 중성자 에너지 영역에 맞추어 설계해야 하며, 보통 은, 카드뮴, 붕소, 인듐이 재료가 된다.

(노심)

 ≫ 원자로의 핵연료를 담고 있는 원자로의 부품으로, 핵반응이 일어나는 곳이다. 노심 안에는 핵연료와 제어봉 있고, 냉각재가 상실되면 중대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체르노빌 사고와 관련 있음), 노심에 핵분열로 생긴 열이 쌓이면 노심의 구조물이 녹거나 파손되는데 그 자체가 파손되어 방사성 물질이 주위에 확산될 수 있다.


■ 체르노빌 사고 발생의 이유

 ≫ 체르노빌 원전의 실험은 위 언급과 같이 회전 에너지가 얼마나 오랫동안 충분한 전력을 공급하는가이다. 

 ≫ 원인 1 : 원전은 출력강하 실험중이였다. 실험 중 배전담당자는 당일 오후 11시까지 전력을 공급할 것을 발전소 측에 요청하였고, 원전의 출력강하를 정지시켜 실험을 중단했다. 노심이 정상 상태라면 중성자를 흡수해 안정한 상태로 돌아가지만 원자로의 낮은 출력 상태가 지속되면서 노심에 있는 중성자의 수가 줄어들었고 축적되기 시작했다.

 ≫ 원인 2 : 전력 공급을 끝낸 후, 출력강하가 시작되었고 출력을 목표 수준으로 올리기 위해 실험을 진행하던 운전요원들은 수동조작을 통해 제어봉을 제거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조작으로 출력이 상승했으나, 200MW에서 멈추었다. 이는 원인 1의 중성자가 줄어들었던 것이 원인이 된다. 원자로 출력이 정상보다 낮았기 때문에 삽입되어 있는 제어봉을 계속하여 인출하였다. 당시 노심엔 안전 기준인 30개 보다 훨씬 적은 6~8개만이 제어봉이 있었다.

 ≫ 원인 3 : 원인 1의 낮은 출력과 원인 2의 제어봉의 과도한 인출은 모두 안전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 원인 4 : 원자로에서 발생하는 증기의 응축수[각주:1]를 제거하고 증기만을 과열기로 공급하는 기수분리기가 있는데, 이 기수분리기는 노심의 증기량이 감소하면 기수분리기에 의해 비상노심냉각장치[각주:2]가 작동된다. 실험의 일환으로 원자로의 냉각 시스템에 달린 냉각 펌프 중 정상상태에서 가동하지 않는 펌프 2개를 작동시켰다. 이 과정에서 증기가 감소했고 기수분리기를 통과하는 증기량이 감소하여 기수분리기로 인한 비상노심냉각장치를 작동하지 않도록 조작했다.

 ≫ 원인 5 : 원인 4 조작으로 증기량이 감소했고 증기량 감소로 인해 발전용 터빈에 도달하는 증기가 차단되었다. 냉각 펌프에 전달되는 전력은 감소하였고 그에 따라 냉각 시스템에 흐르는 냉각수의 양이 부족하기 시작하였다. 냉각수 부족으로 내부에서 발생한 열이 충분히 냉각되지 않게 되었고, 이 열은 냉각수를 끓여 노심에 증기의 양을 늘리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핵반응 속도가 증가하여 핵연료가 급격하게 분열하기 시작한다.

 ≫ 결과 : 기술자들은 긴급 정지 시스템을 작동시켰고 제어봉을 다시 삽입했지만 제어봉이 이전의 조치로 완전히 빠져있었고 이것들이 완전히 삽입되어 출력을 제어하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이로 인해 출력은 정상 출력의 100배로 치솟았고 냉각수를 끓어오르게 하여 반응로가 감당할 수 있는 한도 이상으로 증가되었고, 폭발했다.


(발레리 레가소프)

■ 발레리 레가소프 박사

 ≫ 발레리 레가소프는 소련의 저명한 과학자 였고 모스크바 주립 대학 화학기술과 학장이였다. 체르노빌 사건 발생후 그는 사건의 원인과 사고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며 지역 상황을 정부가 빨리 알 수 있도록 하는 조사 위원회 소속, 당시 모든 사건의 발생 원인과 그 과정들을 상세히 조사하였고 동료와 과학자들에게 얘기하는걸 주저하지 않고 당장 프리피야트 주민들의 철수를 주장했지만, 사건은 벌어집니다. 당시 원자력 발전소의 원인은 사실 원자로 자체에 결함으로 인해 일어난 사고였지만, 당시 소련 정부의 압력으로 인해 비엔나에서 열린 국제 원자력 기구 특별 회의에서 원자로의결함이 아닌 원자로를 당시 운영했던 연구원들의 과실이라고 말하며 그 연구원들을 비난하고 맙니다. 그는 체르노빌 사고 조사 과정에서 방사선에 너무 많이 노출되면서 건강조차도 급격하게 악화됐으며 그 이후 1988년 결국 그는 체르노빌 원전사고 2년이 되는 해에 자신의 집 아파트에서 목을 매고 자살로 자신의 거짓 증언을 속죄하게됩니다


■ 발레리 레가소프 박사 (자살전 마지막 녹취)

 ≫ 당시 그는 죽기 전에 테이프와 자신의 조사 보고서를 남긴채 죽었다. "장관님 죄송합니다만, 지금 이해를 못하시나 본데, 지금 원자로가 불타고 있어요. 흑연 감속재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양의 방사능 물질인데다가 지금 노심이, 불타고 있어요. 2만 5천 톤에 달하는 탄소가 시간당 1톤씩만 탄다고 가정해도 석 달입니다. 지금까지 전 세계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에서 방출된 방사능보다도 훨씬 많은 양의 방사능이 매일 방출될 겁니다. 매일! 석 달 동안요! 오늘 밤 이 도시에서 잠자리에 드는 많은 사람들이 내일 시체로 발견될 거예요. 이 방에 있는 모든 분들의 몸 속에도 방사능이 들어갈 것이고,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집니다. 더 이상 속일 수 없어요! 이건 범죄 행위예요! 이건 막아야 합니다! 그냥 내버려 둔다면, 절대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없어요!"

.......

"솔직히 처음 전 자랑스러웠습니다.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했고 역사상 가장 큰 규모였지만, 우리 소련의 기술과, 우리의 인력이 위기를 잘 극복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으니까요. 만사가 다 순조로워 보였죠.


방사능에 노출되면 몸이 쇠약해지고, 치료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처음엔 어지럽고 구토 증세를 보이다가 혀처럼 민감한 곳이 부풀어오르고, 피부가 검어지면서 떨어져 나가고 온 몸의 세포들이 삭아버립니다. DNA까지 완전히 변해서, 방사능에 노출된 이후 서서히 죽어가게 되는데, 더 이상 인간의 몰골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너무 끔찍해서.. 그 날 밤부터 예상치 못한 시체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쓰러진 직원을 옮기던 소방관들도 쓰러지기 시작했지요. 온 몸의 피부가 방사능을 그대로 흡수하듯, 가슴 속 깊은 곳까지 극한의 공포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내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상상을 초월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 결론지어버리게 됩니다.

 

4월 26일 아침은 아주 따뜻하고 아름다운 날씨였습니다. 하지만 해가 뜨기도 전에 맑은 하늘은 이미 변해 있었고, 모든 것이 오염되어 있었어요. 먼지와 머리카락, 옷, 수돗물, 농작물, 가축까지. 만들던 음식과 우유도 모두, 독극물이었습니다.

 

이미 소문이 퍼졌지만 일부만 피난을 떠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문을 믿지 않았습니다. 평균치보다 400배나 많은 방사능이 공기 중을 떠다녔지만, 3만 5천여명의 주민들은 위험하지 않다는 말만 믿고 토요일 오후를 보냈습니다. 여전히 경고 방송조차 없었지요.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아이들의 갑상선이 방사능을 흡수했지만, 요오드조차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죄책감을 부정할 수 없었고, 물집 생긴 피부를 보며 더 이상 거짓을 말할 수도 없었죠. 하지만 윗사람들은 알면서도 아예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진실이란 살인마보다도 더 위협적인 것이었습니다.

 

소란이나 소동도 없었습니다. 결국 11만 6천여명의 사람들이 소개됐고, 몇 분이면 될 결정을 내리는 데에 몇 달이 걸렸습니다. 몇 년 동안의 경기 침체와 이기적인 관료주의를 겪으며, 이제 남은 건 고통과 잔인한 결단력 뿐이었습니다. 위원회에서 회의를 할 때도, 우리는 조심스럽게 이 일의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서 몇 사람의 희생이 따라야 일을 처리할 수 있을지를 따졌습니다. 그 동안 방사능의 수치는 하룻밤 새 200만에서 400만 뢴트겐으로 상승했습니다.

 

열폭발을 막기 위해 저장고의 물을 빼내야 했고, 소방관들이 펌프를 작동하고 있었지만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방사능에 오염된 물 속으로 잠수부들이 들어가 밸브를 수동으로 열어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우리가 그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랬지요. 우린 군인들에게 진실을 말했고, 그들은 우리를 믿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이게 꼭 필요한 일이냐고 물었고, 우린 할 말이 없었습니다.

 

우린 해 냈고, 결국 100만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죠.

 

곧 제어실의 연구원들이 죽어가자 사람들은 정의의 심판이라 말했지만, 진실은 그보다 훨씬 더 끔찍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구한 용감한 자들과 다르지 않았어요. 우리는 그들에게 위험성을 설명해 주지도 않았고, 제어봉과 원자로에 대한 진실을 감추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믿었죠. 진실을 감춘 이상, 참사는 불가피했습니다.

 

저는 솔직하지 못했지요. 비엔나 국제 회의에 온 전 세계의 사람들 앞에서 제어실의 연구원들을 비난했고, 그들의 무지 속에서 제가 한 일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솔직히 밝히고 허상을 폭로하려 했지만 제가 쓴 보고서나 인터뷰 기사들은 발표되지 않았고, 전 그저 경력에 오점을 남겼을 뿐이었지요.

 

비밀주의는 재앙을 가져올 뿐입니다.

 

이제 2년이 흘렀습니다. 그 날 이후, 사고가 난 날부터 난 너무 힘들었어요. 전 그냥.. 그저.. 단지..."


■ 참고, EBS 다큐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후쿠시마원자력발전소 [福島原子力発電所(복도발전소)] (두산백과)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mystery&no=444207&page=1)
, (http://instiz.net/pt/154606)

, 체르노빌 실험 출처 : (http://www.world-nuclear.org/information-library/safety-and-security/safety-of-plants/chernobyl-accident.aspx)

,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사고 위키 : https://ko.wikipedia.org/wiki/%EC%B2%B4%EB%A5%B4%EB%85%B8%EB%B9%8C_%EC%9B%90%EC%9E%90%EB%A0%A5_%EB%B0%9C%EC%A0%84%EC%86%8C_%EC%82%AC%EA%B3%A0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RBMK) #2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체르노빌 사고 그 사건,사고의 진실 그리고 시민들의 희생 #3



키워드 : 사고, 역사, 우라늄, 방사능, 원자력, 발전소, 원자, 체르노빌, 후쿠시마, 지진, 실험, 위해, 악재, 누출, 사고, 사태


  1. 응축수 : 열교환기에서 생기는 수증기의 응축물, 온도가 하강함으로써 생성된 물과 같은 액체. [본문으로]
  2. 비상노심냉각장치 : 대량의 냉각재를 노심에 공급해주어 노심을 안전하게 정지시키는 장치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 나의 한마디

≫ 이 글만 읽어본다면 미국은 나라의 경제를 위해서 전쟁 도발하는 나라로만 보인다.

과연 진실일까, 몇 가지 정론이 보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책을 읽고 그것이 100% 진실인양 맹신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지식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근래엔 주한미군에 대해서 100% 돈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하는 트럼프의 주장을 보면 확실히 미국은 한국의 편보다는 경제적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에서 존재하는 역사, 추측, 분석이 나의 생각을 한쪽으로 편향하도록 만들었으나, 미국 군수산업에 대한 나의 흥미 또한 자극시켰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알면 앞으로의 미국이 보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목차

1. 아이젠하워, 퇴임식에서 군산 복합체의 부당한 압력을 경고하다

2. 군산 복합체의 원조, 존 피어폰트 모건과 듀퐁

3. 미국의 군수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1,2차 세계 대전

4. 미국을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게 한 6.25 전쟁

5. 미국, 베트남전에 참전하다

6. 군산 복합체, 중동 전쟁의 덕을 보다

7. 북한의 활약

8. 미국,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참전하다

9. 미국 군사비 지출, 세계 군사비 지출의 43퍼센트

10. 부시 일가와 관련이 있는 군산 복합체 칼라일 그룹

11. 아버지 부시를 앞세운 칼라일의 한국 공략

12. 한국, 무기 수입 세계 2위

13. 신보수주의 네오콘의 득세


■ 왜 읽었는가?

≫ 제목부터가 흥미로웠다.

≫ 대한민국이 북한과의 대치상황 때문에 미국에 무기 수입을 의존하고 있기 때문

≫ 트럼프의 주한미군 100% 발언. 모든 미국시민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누군가는 그것에 동조할 수 있다는 것에 우리는 방위조약의 친미여야하는가? 경제의 편의 친중이여야 하는가? 미국의 진실과 역사가 궁금하여..

 

■ 내 마음대로 책 내용 3줄 요약

≫ 역사적으로 세계적인 경제 공황이 찾아오면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그것을 세계가 원치 않더라도 어떤 국가는 그것을 원해왔다. 군수산업 국가인 미국처럼

≫ 전쟁이란 돈을 끌어모으는 수단이며, 경제 공황의 탈출구다. 미국은 여러 전쟁에 참전하며 돈을 끌어모았고, 한국과 일본 또한 그 수순을 밟아왔다. (베트남참전/이라크파병 등)

≫ 미국은 이란과 북한의 핵 무기는 악의 축으로, 이스라엘 핵무기는 일절 발설도 못하게 한다. 미국의 이스라엘 사랑은 핵심부에 유대인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바마 내각 또한 마찬가지라는 점이며 현재진행형이다.


■ 군수산업의 배경

◀ JP모건 설립자 존 피어폰트 모건

≫ 1861년 존 피어폰트 모건은 스물 네살, 미국 남북 전쟁 때 북군이 폐기 처분하는 낡은 카빈 소총을 사재기하여 동일한 방법으로 북군/남군에 번갈아 되팔아 뒷돈을 챙겼다. 전쟁이 계속되며 군사 물자의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이를 통한 부를 밑천으로 제이피모건을 설립했다.

≫ 군수 산업은 "모건/록펠러/듀퐁" 3 군수 재벌로 이어진다. 그들은 화약생산 등 군수산업에 관련이 있었고, 세계대전을 통해 막대한 부를 쟁취한다.

≫ 1차 세계 대전은 1914년~1918년까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연합국과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동맹국 양 진영 사이에 벌어진 세계 규모의 전쟁이었다. 1차 대전 초기에 전선은 유럽 지역에 국한되었지만 1917년 4월 6일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선이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 미국의 참전은 독일 패전에 결정적 작용을 했는데, 참전의 표면상 이유는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인한 민간 상성 피해였다. 그러나 미국 참전의 실질적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분석된다. 당시의 중동 석유와 제이피모건 등의 참전종용이다.

≫ 미국은 석유를 놓고 다투는 열강들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바빠졌다. 중동을 유럽 열강들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다. 전쟁으로 형성된 황금 시장을 미국 산업 진흥에 연계시킬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연합국의 물품 구매력은 예상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미국은 전쟁참전 명분을 찾아야했고, 서섹스호 피격 사건을 조작해낸다. 서섹스호가 독일에 피격, 침몰되었다는 것이다. 종전 후 서섹스호는 총알 한 발도 맞은 적이 없었음이 밝혀진다.


■ 2차 세계 대전을 원한 미국

≫ 기업은 항상 평시보다 전시와 같은 비상시에 돈을 더 많이 번다. 미국에 있는 유대인들은 나치 독일의 박해를 받던 유럽의 유대인들을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직간접적 참전을 종용했다.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은 전쟁에 참여할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일본을 상대로 다양한 도발적 조치를 취했다. 루스벨트 정부는 미국에 존재하는 일본 자산을 동결했고, 파나마 운하 사용을 불허하였으며 영국과 공조해 일본에 대한 무제한적 무역 봉쇄 조치도 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을 지속하기 위한 석유 등 전략 자원의 수입이 불가능해졌다.

 1941년 11월 26일 미국은 일본에 통첩을 보낸다. 미국은 무역 봉쇄 해제에 대한 조건으로 중국과 인도차이나로부터 완전 철수와 독일, 이탈리아와의 동맹에서 탈퇴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미국도 잘 알고 있었다.
 1941년 12월 일본은 미국의 함정에 빠지듯 미국 진주만 기습을 감행했다 진주만 폭격은 미국을 2차 대전속으로 넣었다. 일본은 인도네시아와 보르네오에 있는 유전지대[각주:1]를 노렸다. 유전지대 점령은 간단했지만 배후에 미국 태평양 함대가 존재하여 안정적인 석유 수송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일본은 진주만을 폭격하고 유전지대를 얻었지만 미국의 잠수함 공격으로 석유 반입은 실패했다.

 일본의 가미가제 자살 폭격도 항공유 부족에서 나온 고육지책이었다.


■ 미군의 작전사령관실은 모두 군수업자

 2차 대전 당시 지휘관들은 록펠러와 모건 재벌의 고문 변호사 회장, 사장 등 재벌 중역 출신들이 많았다. 작전 본부는 증권 거래소 중역 회의와 다름없었다.


■ 전쟁의 효율성

 미국은 1600만 명의 군인들을 무장시키기 위해 방위 산업과 군비를 확대했다. 1939년에 미국 국민 총생산의 1.5 퍼센트에 불과하던 국방비 지출은 1944년 국민총생산의 45퍼센트까지 상승했다. 덕분에 1939년 17퍼센트의 실업률은 1944년엔 1.2퍼센트로 떨어지는 완전 고용 상태에 이르렀다. 이는 전쟁이 미국의 경기 부양에 얼마나 효율적으로 기여했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 미국을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게 한 6.25 전쟁과 애치슨 라인

 1950년 1월 10일 애치슨 국무장관은 "미국의 방위선은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이 방위선에 대해서는 미국이 책임을 지지만, 그 외의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우선 공격을 받은 국민의 저항으로 대비한 후 다음 국제 연합 헌장 아래 전 문명 세계의 원조에 의존한다"는 애치슨 라인을 발표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한국과 대만은 제외한 것이다. 김일성은 미국이 남한에 대한 방어의지를 포기한 것으로 판단하여 소련에 전쟁서약을 받아내었고 5개월 뒤 6.25 전쟁이 일어난다.

 2차 세계 대전 직후 미국의 군수산업은 판매 시장이 없어 불황에 빠졌었고 미국 경제도 침체를 겪고있었다. 미국의 경기침체를 해결해 준 것이 한국의 6.25 전쟁이었다. 1950~1953년까지 벌어진 6.25 전쟁은 미국경제의 회복과 재건에 크게 기여했고 이후 월스트리트 주가가 급속도로 상승세를 보였다.


■ 한국, 2014년 세계 최대 무기 수입국으로 부상

 우리나라가 2014년 세계 최대 무기 수입국이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뉴욕 타임스는 미국 의회조사국이 발간한 연례 보고서를 인용해 우리나라가 2014년에 78억 달러(9조 1300억원) 규모의 무기 구매 계약을 체결해 세계에서 무기 구입에 가장 많은 돈을 쓴 나라가 됐다고 보도했다. 78억 중 70억 달러 이상이 미국산 무기 구입에 사용됐다고 보도했다.



  1. 유전지대 : 석유를 함유한 하나 또는 몇 개의 지층이 단일 지질구조에 지배되어 존재하는 지역. [본문으로]

■ 해당 이야기에 대해 떠들어보기

 ≫ 친일파 청산이 아직도 이어지는 것과 당시 노무현 대통령께서 일궈낸 밭을 망치는 후대 대통령과 그 행위들을 보면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다. 노무현은 서민들을 위해 싸웠다. 부패한 정권과 싸웠고, 당내에서도 자기편은 소수였다. 모두가 그를 싫어했지만, 국민들만이 그의 편이였다. 마지막엔 국민들마저 실망감에 야유를 퍼부었다. 언론사들도 공격했다. 언론사들도 그의 적이었다. 내용을 정리하면서 이 아픈 마음을 어느 누구에게도 풀 수 없었다. 그냥 이 포스트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아주길 바랄 뿐이다. 친일파 청산 관련 내용의 뼈대는 아고라(출처는 맨 아래)에서 가져왔다. 관련 내용에 대해서 처음부터 신뢰하지 않았다. 아고라에서는 그 증거와 출처가 명확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쓴 글만 보고 그대로 믿고 내가 포스팅하게 된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다시 읽고 다시 포스팅하여 왜곡된 역사를 쓰고 써, 진실도 아닌 역사를 쓰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흔하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인터넷이기에 스크랩은 하되, 최대한 그 출처와 증거를 가져오려고 노력했다.



■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사태

 ≫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절 탄핵 가결일은 2004년 3월 12일이다. 왜 이 날 국회의원들은 탄핵을 결정한 것인가? 그 이유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은 국회에서 2004년 3월 2일이였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이 나온지 불과 10일만에 국회의원들은 들고 일어나 탄핵을 하려고 했다. 

[관련URL]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관련(뉴스 승인 날짜 참고) :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2088

[관련URL] 노무현대통령탄핵사태 날짜 두산백과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25242&cid=40942&categoryId=31778



▼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 후, 매우 좋아하는 국회의원. 친일파 또는 그로 이득을 얻은 분이 아닐까 의심해본다..



■ 노무현 대통령은 유일하게 친일파와 싸웠고 서민들을 위해 힘 쓴 대통령이였다.


■ 노무현 정권 때 만들어지고, 이명박 정권 때 폐지된 것들

 ≫ 이명박 대통령이 법을 직접적으로 없앴다는게 아니라, 간접적으로 없앴다. 그는 이러한 관련된 법을 유지시키지 않고 지키지도 않았다. 혹은 정말로 끝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학생 때 시민운동에 참여했던 그가 이제는 다른 방향으로 혁명을 돌린 것일까

 제 17대 이명박 대통령 재임기간 : 2008 ~ 2013

1.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4년간의 임무를 완수하고 2009년 11월 30일 위원회 활동이 종료되었다" 라는 글이 쓰여져 있다. 해당 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관련URL, 나무위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 https://goo.gl/xEzyb8


2.일제 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 아래 증거 뉴스의 등록 날짜는 2012-09-26일, 해당 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관련URL, 한겨레신문] "일제 강제동원 피해조사위 청와대, 연내 활동종료 주문"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3421.html


3.친일재산조사환수위원회 

 : 아래 증거 뉴스의 등록 날짜는 2010-07-12일 해당 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관련URL, 뉴스데스크] "친일 재산 조사위원회, 4년간의 활동 종료"  : http://imnews.imbc.com/replay/2010/nwdesk/article/2658824_18903.html


4.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모든) 정리조사위원회 

 : 아래는 증거의 위키백과이다. 연혁에서 2010년 12월 31일 해산되었다. 또한 아래 증거, 오마이뉴스에서도 설명한다. 해당 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관련URL, 위키백과] "대한민국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 https://goo.gl/R0ZlJE

[관련URL, 오마이뉴스] "우리는 왜 진실위 조사관 백서를 내는가" : https://goo.gl/tUlqkp


5.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 아래 증거 뉴스의 등록 날짜는 2009년 12월 6일이다. 해당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관련URL, 국민일보] "4년 활동 마치고 해체되는 군의문사진상규명위 윤원중 위원장" : https://goo.gl/CaKjP9


■ 노무현 정권 때 만들어지진 않았으나, 이명박 정권 때 폐지된 것들


1.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

 : 아래 증거 뉴스의 등록 날짜는 2013년 3월 7일이다. 해당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관련URL, 서울의소리] "이명박 국민들몰래...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폐지" : http://www.amn.kr/sub_read.html?uid=8389


2. 투표용지 보존 기간 축소

 : 아래 증거 글은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의 팀장 박대용 방송기자께서 쓰신 글이니 신뢰하여도 된다. 시행 날짜는 2012년 10월 2일이다. 해당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그리고 2012년 12월 19일은 대통령 19대 대선 선거일이다.

[관련URL, 박대용기자 블로그] "투표지 보존기간은 얼마까지 가능할까" : http://biguse.net/686


■ 노무현 정권 임기말 화폐 고액권 발표, 10만원권 김구 주석 확정 그러나..

 ≫ 노무현 정부 임기말 , "대한민국 화폐에는 독립유공자 애국지사분들이 단 한 분도 없다. 한국인이 없다." 라며 확정했지만, 이명박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12월초 10만원권 발행을 무기한 연기 직후 같은 달 발행결정을 취소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5만원권과 10만원권 등의 고액권 발행은 지난 정부에서 정식으로 발표하여 추진하던 사안이었다. 


 ≫ 당시 시점으로 1만원권이 나오고 나서 물가가 12배 이상 올랐으므로 고액권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7대 국회에서 먼저 여야 합의로 고액권 발행 촉구 결의안을 냈고(이것은 법률적 효력을 갖는다) 이를 수용한 정부에서 국민 여론을 조사한 후 5만원에는 신사임당, 10만원권에는 김구의 초상을 넣기로 결정한 바 있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14일 보수우익단체들이 한국은행 앞에서, '10만원권은 이승만, 5만원권은 박정희'라는 주장을 펼치며 시위를 한 후 한국은행의 태도가 돌변해 버린 것이다. 한국은행은 "정부의 요청으로 10만원권의 발행을 유보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관련URL, 오마이뉴스 발췌] "뉴라이트와 현 정부에 조롱당하는 김구 주석"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51135



■ 박근혜 정부 "항일 흔적 지우기"

 : 2014년 1월 1일부터 도로명 주소 전면 시행, 친일파 동아일보 창립자 김성수의 호를 딴 도로는 존치[각주:1]하고, 반면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의 호를 딴 서울 "명동우당로"는 명동 11길로 변경.


■ 클릭한 순간 노무현 대통령께서 서거하신 진짜 이유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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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존치하다 : 제도나 설비 따위를 없애지 아니하고 그대로 두다. [본문으로]

노덕술 1899년 ~ 1968년 4월 1일


■ 노덕술 그는 누구인가?

 ≫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경찰 간부. 경상남도 울산 출신으로 창씨개명 한 일본 이름은 마쓰우라 히로(松浦鴻). 

진보든 보수든 양쪽에서 친일파로 공인된 인물이며,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 그의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고등계 형사 겸 친일 경찰이었으며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친일파 경찰에서 수도경찰청 간부로 활약하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반공 투사"라고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 고등계 형사로 악질 친일경찰로 유명했는데, 불령선인으로 찍힌 항일 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 취조하는 데에 앞장섰으며 고문치사한 사람까지 나왔고, 고문 취조를 통한 건수 올리기로 일사천리로 승진가도에 올랐다. 어찌나 악랄했던지 민중들 사이에도 친일 고문 경찰=노덕술이라고 인식될 정도. 장택상은 차라리 이 사람보단 양반이라고 인식될 정도다
 ≫ 해방 이후 잠시 평양 경찰서장을 맡고 있던 중 공산주의 세력에게 체포되어 몇 달간 구금되었다가 1945년 말에 월남하였고, 다음해에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의 반이승만 세력 숙청, 좌익분자 검거를 주도하였다. 장택상과 더불어 여운형 암살 배후로 거론되기도 한다.
 ≫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바가 있었으나 반민특위 해체로 풀려나 경찰직 복귀 이후에도 대한민국 경찰직에서 고위간부로 지내는 등의 호사를 누렸다.

■ 노덕술의 생애
 ≫ 1899년 6월 1일 경상남도 울산군 장생포에서 태어났다. 일설에는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울산으로 이주했다고도 한다. 경상남도 울산 보통학교 2년을 다니다 중퇴하고, 그 후 일본인이 경영하던 잡화상의 고용인으로 근무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홋카이도에서 취직을 위해 머물렀다.
 ≫ 귀국 후 경찰관에 지원하여 1920년에 경남에 있는 순사교습소에 지원하여 6월 경상남도 순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순사교습소를 수료한 후, 같은 달 경찰부 보안과 순사로 근무하다가 1922년경 경상남도 울산경찰서 사법계 순사부장으로 재직했다. 1924년 12월 도경부 및 도경부보고시에 합격한 후, 같은 달 경부보로 승진하여 경상남도 의령경찰서 경부보, 1926년 4월 거창경찰서 경부보를 지냈으며, 1927년 12월 동래경찰서 경부보로 전근해 사법주임을 지냈다 
 ≫ 1932년 7월 경부로 승진하여 울산경찰서 경부로 전근했다가 같은 해 8월 다시 경기도 경성부 본정경찰서(오늘날 서울 명동) 경부로 옮겨 사업주임을 지냈다.
 ≫ 1933년 2월 인천경찰서 경부, 1934년 2월 양주경찰서 경부, 1938년 11월 개성경찰서 경부로 전근해 사법주임을 지냈다.

■ 노덕술의 만행
 ≫ 동래경찰서 경부보로 재직 중이던 1928년 10월 동래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및 신간회 동래지회 간부로 활동하던 박일형을 체포하여 고문했다. 같은 해 겨울에는 부산제이상업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동맹휴교사건을 수사하다가 동맹휴교의 배후에 '혁조회'라는 반일단체가 있음을 알고 혁조회 관련자인 김규직, 유진흥 등을 체포하여 고문했다. 김규직은 고문 후유증으로 1929년 12월 옥사했다. 같은 해 12월 조선공산당사건과 관련하여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의 제보를 받고 보통학교 교원을 체포하여 심문했다.
 ≫ 1929년 8월 동래유학생학우회 주최로 조선인 일본유학생들이 동래유치원에서 개최한 강연회의 강연 내용이 일본정치를 비난하는 등 내용이 불순하다고 강연자들을 체포하여 심문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문재순, 추학, 차일명등이 주도하여 광주학생운동 관련자 석방 등을 주장하며 동맹휴학을 일으키자 부하들을 지휘하여 관련자들을 체포하는 한편, 체포된 학생들에게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 1931년 경상남도 통영 경찰서 경부보로 전근해 사법주임을 지냈다. 통영경찰서 경부보로 재직 중이던 1932년 5월 노동운동가 김재학을 '메이데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체포하여 고문했다.


■ 노덕술의 광복이후
 ≫ 1945년 8월부터 평안남도 평양경찰서 서장을 맡고 있다가 소련군이 진주하자, 이내 곧 공산주의 세력에게 체포되어 몇 달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1945년 말에 월남을 하게 된다. 다음해 1946년에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부의 '반이승만 세력' 숙청, '좌익분자' 검거 등을 주도하였다.
 ≫ 1946년 1월 경기도 경찰부 수사과장에, 9월 제1경무총감부 관방장 겸 수도관구 경찰청 수사과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4월, 당시의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를 암살한 한현우 등을 검거함으로써 장택상을 비롯한 경찰 수뇌부들의 인정을 받았다.
 ≫ 1948년 7월,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저격 혐의로 체포된 박성근을 고문치사 시킨 후 시신을 한강에 투기한 혐의로 경무국 수사국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다가 석방되었다
 ≫ 1949년 1월 24일,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백민태라는 청부업자를 고용하여 '반민특위 간부들을 암살하라.'고 지시한 음모가 알려지면서 사실이 밝혀졌다.
 ≫ 이틀 뒤,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노덕술은 반공투사다. 그를 풀어줘라.'라고 그의 석방을 요구했고, 반민특위는 석방을 거절했으나 얼마 안가 대통령 이승만과 내무차관 장경근의 주도하에 조작된 국회프락치 사건, '6.6 반민특위 습격사건' 등으로 반민특위는 와해되었고, 노덕술은 풀려나게 되어 경기도 경찰부 보안주임으로 영전한다.
 ≫ 헌병 중령으로 변신하여 1950년에는 육군 본부에서 범죄수사단장으로 근무하는 등 대공업무를 담당하였으며, 1955년 서울 15범죄수사대 대장을 지냈다. 1955년, 부산 제2육군범죄수사단 대장으로 재임 시의 뇌물수뢰 혐의로 그 해 11월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징역 6개월을 언도받으면서 파면되었다.
 ≫ 1956년 이후 고향 울산으로 내려가 칩거 생활하면서 지내다가 1960년 7월 제5대 국회의원(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1968년 4월,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병사했다.

■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53년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
 ≫ 2002년 2월 28일, 국회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에서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 명단'을 발표했다. 이로써 1949년 반민특위 해체 이후 53년만에 친일파 문제를 공론화시킨 것이다. 미군정 하에서 친일파 청산의 기회를 놓쳤지만, 1948년 온 국민의 열망과 관심 속에서 '만민특위(반민족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가 만들어졌을 때만 해도 친일파를 척결하고 민족정기를 수립할 수 있다는 기대가 가득했다. 그러나 1949년 6월 6일, '특위 습격 사건'으로 인해, '반민특위'는 사실상 와해되었고 일제 청산의 과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말았다.
 ≫ 반민특위에 의해 전격 체포되었던 친일경찰 노덕술, 그는 '일경의 호랑이'로 악명이 높았으나 해방 이후 수도경찰청 수사국장으로 중용되었으며, 이후 1948년 10월 '반민특위 위원 암살 사건' 모의를 주도하는 등의 악행을 계속했다. 이렇게 일제 시대 고문경찰이었던 그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으면서 전봉덕, 이익흥 등의 친일 경찰 세력들과 함께 독재정권의 핵심 역할을 했다.
 ≫ 2002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53년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에서는 대표적인 친일경찰 노덕술을 통해 이 시대 친일파 청산의 문제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이유를 찾아본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영상을 참고하면 되겠다.



출처 및 참고 : 나무위키, 위키백과, 노덕술-노재봉(http://blog.daum.net/kim0909/18288291)


■ 안두희의 백범김구 암살

안두희 1917년 ~ 1996년 10.23일

 : 1934년 신의주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대학에 다니면서 기생과 결혼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했다. 해방 후 남조선국방경비대 장교로 임관하여 포병사령부 소속 포병소위가 되었고 1947년에 서북청년회에 가입했다.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 서재에서 백범 김구를 권총으로 암살하였다


■ 당시 백범김구선생의 비서였던 선우진

백범 김구 비서 선우진 1992년 ~ 2009년 5.17일

 ≫ 1949년 6월 26일, 시간 12시 45분경 안두희는 백범김구선생을 살해했다. 당시 김구선생의 비서였던 선우진은 당시 정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 당시 기록

“안두희(安斗熙) 소위가 왔습니다.”

“그래. 들어오라 해.”


그 즉석에서 허락하시므로 그를 선생님 거실로 들여보낸 때가 12시 30분께였다. 아래층으로 내려올 때 응접실에서는 라디오 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곧 지하실로 가서 선생님의 오찬 준비 상황을 알아보았다. 식모는 “네, 만둣국을 다 끓여가요”라고 했다.


주방에서 아줌마의 말을 듣는 순간 윗 층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동이 났다. 1층으로 뛰어올라가 다시 2층 백범 선생 방으로 뛰어오르던 나는 층계에서 한 손에 들었던 권총을 떨어뜨리며 “내가 선생님을 쏘았소” 하는 흉측한 모습의 안두희를 만났다.


허둥지둥 방으로 뛰어올라간 나는 “선생님, 이게 어인 일입니까” 하며 울부짖었으나 유혈이 낭자한 채 책상에 엎드린 선생은 말씀이 없으셨다. 순식간의 참변이었다. 아직 체온이 식지 않은 선생을 다다미방으로 모시고 이웃해 있는 적십자 병원에 의사를 부르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1층으로 다시 내려오니 비서진들에게 얻어맞은 범인 안은 쓰러져 있고 경비실에서 연락을 받은 경찰이 달려와서 그를 데려 가려는데 그 시간을 기다렸다는 듯 정체 모를 군인들이 떼 지어 몰려와 범인이 군인이란 이유로 저격범 안두희를 바람같이 쓰리쿼터로 끌고 갔다. 불과 2,3분 사이의 암살 음모공작 현장이었다.



▲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한 김구



■ 안두희는 왜 백범을 암살하였는가?

≫ 지금까지 백범 암살을 보는 시각은 네 가지다. 

1. 첫째 반민특위 활동에 위협을 느끼는 친일파들이 생존의 돌파구로 친일파 숙청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백범을 암살했다는 설.

2. 둘째 이승만 대통령에게 아부하는 과잉충성분자들이 이 대통령의 뜻과는 관계없이 정적이라고 생각되는 백범을 암살하고 권력을 농단하기 위해 암살했다는 설.

3. 동, 서의 냉전질서가 구축되면서 미국이 한반도에서 배타적 지배권을 구축하고 이승만 체제의 통치 질서의 안정을 위해 남, 북협상을 주창한 백범을 암살했다는 설.

4. 배후에서 리모트 컨트롤 하는 세력과는 별개로 북에서 월남한 극단주의자를 대표한 안두희의 소영웅주의적 망상에서 비롯된 단독범행설이다.


■ 백범 암살 그 이후의 안두희

 ≫ 암살 이후 특무대에 연행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석 달 뒤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1950년 7월 10일 육군 포병소위로 복직하고 9월 15일 중위로 진급하였다. 1951년 2월 15일 잔형 면제를 받고 12월 15일 대위로 진급, 그뒤 1953년 2월 15일에 완전 복권되었으며 1953년 12월 15일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1953년 완전 복권되었으나, 여러 차례 신변의 위협을 당했다.

 ≫ 그 후, 안두희의 동향 친구인 양구 주둔 26사단 사단장 이기건의 배려로 콩나물과 두부 납품을 시작했다 (반공포로로 625때 월남한 26사단장 전속부관 S씨 증언)

 ≫ 1959년 일본에서 벌어진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을 보면 이때에도 국군 소속의 특무 기관원으로 활동하고 있던것으로 보아, 서류상으로는 전역했지만 실제로는 계속 육군 정보요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김구 선생 살해 진상조사위원회가 발족되자 잠적하였다가 1961년 해당 단체의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게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풀려났다. 1965년 김구를 추종하던 곽태영에게 목을 찔린 다음에 가까스로 살아나서 이후 약 10년 동안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은거했다

1992년 2월 28일에 김구 선생의 묘소를 강제(로 끌려가서) 참배하기도 하였다. 이 참배에서 그는 자신의 범행이 어디까지나 우발적인 단독 범행이었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 안두희를 살해한 시민 박기서

 ≫ 범행 시점인 1996년 당시 박기서는 47세로 부천 소신여객 버스 기사였다. 그는 1995년 권중희의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를 읽은 뒤 범행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살인의 동기는 민족정기를 해친 사람이 천수를 누리면 안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길이 40cm 정도의 홍두깨에 매직으로 '정의봉' 이름을 썼고 근처 문방구에서 장난감 총을 구입한 뒤, 사전답사했던 안두희의 집에 침입해 안두희의 부인을 묶고 자리에 누워있던 안두희를 죽을 때까지 정의봉으로 때려 살해했다. 

≫ 오마이뉴스에서는 그를 여러번 인터뷰했는데 본인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죽일 생각이었으나 막상 대면하고 보니 나이들고 힘없는 노인이어서 주저하는 사이에 안두희 눈을 보았는데 매우 날카롭고 기회를 노리는 눈빛이었다고 한다. 순간, 잘못하면 자기가 당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범행에 이르렀다 범행 직후 본인이 다니던 성당에 가 고해성사를 하였다.


■ 범행 직후의 박기서

≫ 당연히 뉴스에도 보도되었고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일단은 물증, 계획성, 고의성, 자백 등이 모두 완벽하게 있는 확신범이자 살인자였으므로 버스회사에서도 해고되었고 구속 상태에서 재판에 회부되었다. 가족들도 평소 그가 그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면서 매우 당혹스러워 했다.

≫ 초기 8년 구형에 5년이 선고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법정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살인죄의 법정 최저형량이 5년임을 감안하면 징역 3년은 엄청난 선처를 한 것이다. 당시 대법원이 형량을 결정한 취지를 '박기서의 살인행위는 주관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지나 우리나라 법질서 전체 관점으로 볼 때에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라고 밝혔는데, 표현상 원칙을 고수한 것처럼 보이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결국 법조계가 박기서의 행위에 면죄부를 준 게 아니냐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98년 3월 1일 3.1절 대사면 때 대상자에 포함되어 3월 13일 수감 1년 5개월만에 출소하였다. 

≫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사회 각계 단체 및 개인들이 박기서의 처단을 응원하는 취지에서 격려금과 편지들을 보냈다. 초등학생인 아들이 다니던 태권도학원 관장이 수업료를 면제해주고, 백범기념사업회에서 그의 아내에게 취업자리를 알선해 주기도 했다. 본인은 익명의 누군가에게 출소할 때까지 매달 백만 원씩을 받았다고도 한다. 출소 후에도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자리, 집 등을 제공받아서 출소 이후에는 택시 기사가 되었다.



■ 박기서에 대한 개인적으로 떠들기

≫ 그는 살인자다. 법적으로 살인은 용서받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정당하다고 했을 때 나는 옹호하고 싶다. 시민 박기서를 살인자라고 한다면 안중근 의사는 살인마인가? 안중근 의사 또한 사람(이토 히로부미)을 살해했다. 당시 20년 이상의 일제강점기를 맞은 나라에서 임시정부와 독립을 위해 싸운 행위를 일반인들은 일본인들은 20살 아래의 학생/시민들은 그들을 테러리스트라고 할 수도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독립을 위해 싸운 위인들 모두 살인자인가? 대한민국은 왜 그분들께 건국훈장을 주었는가? 내 생각엔 시대적 이념이, 현재의 가치관이 그를 살인자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 다시 한번 우리나라가 식민지가 됬을 때, 그 식민지가 20년 이상 지속되었을 때 박기서 시민과 같이 행동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자를 영웅으로 위인으로 칭송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 및 출처 : 나무위키, 노컷뉴스(http://m.nocutnews.co.kr/news/4055084), 미래한국(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525), 우남 이승만과 건국사(http://cafe.daum.net/syngmanrhee/D9pI/1093)




■ 보이니치 필사본이란

≫ 15세기 초반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책으로 여러 그림을 포함하고 있으며 알려지지 않은 문자와 언어로 쓰여 있다. 이 책은 송아지 피지로 만든 235 페이지 분량의 고문서 필사본이다.

 ≫ 필사본에는 알 수 없는 문자들과 기이한 형태의 그림들로 구성되어있으며, 그림은 주로 나체의 여인들과 식물, 별, 점성술적인 도표 등의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림의 외각은 깃펜으로 그려져 있으며 다양한 색상으로까지 채색되어 있다. 또한 누군가가 쓴 듯한 필기체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는 희귀 문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이 뜻은 절대 알 수 없는 문자로 되어 있다.




■ 이름의 유래

 (윌 프레드 M 보이니치)

 ≫ 보이니치 필사본의 이름은 1912년 7월 12일 이탈리아 로마근교 프라스카티 빌라 몬드라고네 사원에서 윌 프레드 M 보이니치가 발견했으며, 처음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보이니치 필사본>이라고 명명했다.


■ 윌 프레드 보이니치의 고문서 연구가 분석 의뢰 (연금술 서적이다)

 : 아담맥린 (보이니치 필사본이 연금술 서적이라고 주장)


 : 테렌스 멕케나 (보이니치 필사본이 연금술 서적이라고 주장)


 ≫ 아담맥린 / 테렌스맥케나 (보이니치 필사본이 연금술 서적이라고 주장한 학자)

 . 그들의 주장으로는 보이니치 필사본의 문자들을 해독할 수 없는 이유는 자시만 알아볼 수 있도록 암호화된 문자와 그림으로 정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윌 프레드 보이니치의 고문서 연구가 분석 의뢰 (과학 관련 서적이다)


 : 윌리엄 로메인 뉴볼드 교수 (보이니치 필사본이 과학 관련 서적이라고 주장)

 ≫ 윌리엄 로메인 뉴볼드

 .  사실 실제로는 보이니치 필사본 발견 당시 필사본 안에는 편지가 한장 발견되었다. 편지는 1666년 장 마렉 마르처라는 남자가 아타나시우스 키르허라는 로마의 성직자에게 보낸 편지로, 편지 내용에 따르면 보이니치 필사본을 소유하고 있떤 사람은 루돌프 2세이고, 로저 베이콘이 보이니치 필사본의 저자라고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로저베이컨은 누구인가?

 ≫ 로저 베이컨 (13세기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이며 자연 과학자)

 . 실제로 보이니치 필사본의 그림을 보면 천체의 형상이나 식물 세포조직으로 추정되는 그림들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보이니치 필사본은 과학관련 서적이라는 것이다. (윌리엄 로메인 뉴볼드 주장)

 . 그러나,  로저 베이컨이 살던 시대에는 망원경이나 현미경이 존재하지 않았다.

 . 그러자 윌리엄 로메인 뉴볼드 교수는 로저 베이컨은 이미 13세기부터 망원경과 현미경을 발명해 사용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세계최초의 현미경은 자하리아스 얀센이 1590년에 발명하였고, 망원경은 1608년 안경장이였던 한스 리페르세이가 최초로 발명하였다고 알려져있다. 이러한 역사속에서 만약 윌리엄 로베인 뉴볼드 교수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역사를 다시 써야하는 문제 충격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 문제는 로저 베이컨이 어느 역사 문헌에서도 현미경과 망원경을 사용했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윌리엄 로메인 뉴볼드의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 윌 프레드 보이니치의 고문서 연구가 분석 의뢰 (식물학 관련 서적이다)

 ≫ 레오 레비토브 / 에디스 쉐우드

 . 레오 레비토브 / 에디스 쉐우드 학자는 또 다른 주장을 펼쳤다 보이니치 필사본과 함께 발견된 편지에는 루돌프 2세가 언급되어있었는데, 루돌프 2세는 신비주의에 심취해있었다고 한다.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에드워드 켈리라는 영국인 모험가가 루돌프 2세에게 한 권의 필사본을 소개했고, 그 책을 본 왕은 반색하며 좋아했다고 한다. 그 책을 본 루돌프 2세 왕은 에드워드에게 600 두카토(지금의 돈으로 3만달러 이상)을 지불하고 필사본을 구입했다는 것이다. 또한 루돌프 2세는 보이니치 필사본에 자신의 서명을 쓰고 당시 궁전 식물원 관리자인 야코부스 호르시키에게 연구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궁정기록에도 남아있다는 것이다. 당시 루돌프 2세가 식물 관리원에게 연구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보아 보이니치 필사본은 식물 관련 서적일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보이니치 필사본은 식물학이나 식물도감일 것이다. 그러나, 도감이라면 왜 해독하기 힘든 난해한 문자들로 기술했던것일까? 일각에서는 루돌프 2세를 속이기 위한 아무 의미없는 가짜 문서라는 것이다. 에드워드 켈리라는 남자는 오컬트에 심취해 있는 루돌프 2세를 속이기 위해 돈을 벌 목적으로 알 수 없는 문자들과 기이한 형태의 그림으로 필사본을 완성하고 결국 완벽하게 속였다는 것이다. 즉, 보이니치 필사본은 희대의 사기극에 사용된 결정적인 소품이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복잡한 구조와 미묘한 질서를 가지고 있는 문자가 많으며 200여 장이 넘는 방대한 양이 기술되어 있어 장난으로 또는 돈을 벌 목적으로 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많다.



■ 윌 프레드 보이니치의 고문서 연구가 분석 의뢰 (종교 관련 서적이다)

 ≫ 학자들은 다시금 수수께끼를 해결하기 위해 처음 발견된 빌라 몬드라고네 지역에 주목했다.

 . 처음 발견된 장소를 추척한 결과, 이곳은 한 때 예수회의 교육원이였으며 보이니치 필사본이 예수회 장서 목록에 올라 있었다고 한다. 즉, 보이니치 필사본은 종교 관련 서적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인류 문명의 번성과 종말에 관한 예언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숨기기 위해 암호를 썼다는 것이다. 보이니치 필사본은 여태까지 단 한 글자도 해석되지 않아 발달된 과학기술을 가졌던 미지의 인류가 가졌을 것으로 추정도 하고 있다.


■ 보이니치 필사본 문자 분석해보기

 ≫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여있다.

 ≫ 긴 부문은 문단으로 나뉘어 있고, 종종 문단이 시작되는 왼쪽에 일종의 표식이 붙어 있기도 하다.

 ≫ 별도의 문장 부호는 보이지 않으며, 필체는 부드럽고 글을 쓴 사람일 것이다. 

 ≫ 글을 쓰면서 지운 흔적이 없어 분명, 이 글을 충분히 이해한 듯 자연스럽다고 한다.

 ≫ 전체 문서는 17만 여개의 문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문자들은 약간의 간격을 두고 구별된다.

 ≫ 대부분의 문자는 한 획이나 두 획만으로 쓸 수 있다.

 ≫ 사용된 문자를 어떻게 분류하느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한 두 번 정도 나타나는 특이한 문자를 빼고는 대략 20 종류에서 30 종류의 문자만으로 모든 내용을 쓸 수 있다.

 ≫ 이 문자들은 좀 더 넓은 간격으로 3만 5천여개 정도의 단어로 구분된다.

 ≫ 단어들은 일정한 음성학적 법칙이나 철자법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특정한 문자는 각각의 단어에 항상 나타나야 하며, 어떤 문자는 다른 문자 뒤에 절대로 오지 않고 어떤 문자는 반복해서 쓸 수 있지만 어떤 문자는 아니다. (추측컨대 언어에 적어도 조사 또는 동사가 존재했을 것 같고 막 휘갈긴 문자가 아니라 일정한 규칙이 있다는 것이다)


■ 보이니치 필사본 그림 분석해보기

 

☞ 약초학 (Herbal)

 ≫ 각 쪽마다 약초 삽화와 문장 몇 개가 들어있다. 이 형식은 중세 유럽 약초학 서적의 일반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 약학 (Pharmaceutical)

 ≫ 해당 약초에 대한 상세정보를 보려면 어디어디로 가라는 등의 의미가 숨겨져있는 것처럼 약초의 부분마다 태그(tag)가 달려있다. 가장자리에는 해당 약제를 담는 약제용 그릇을 닮는 모양이 그려져있고 글과 함께 있다. 태그를 보여주기 위해 사진에 붉은색 동그라미를 쳐봤다


 

 ☞ 천문학 (Astronomical)

 ≫ 원형 도식과 함께 종종 태양, 달, 별이 들어 있어서 천문학이나 점성학에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몇몇 페이지들은 접혀있고 펼칠 수 있게 되어 있다. 어떤 그림엔 중앙에 양, 물고기, 천칭, 강아지, 석궁을 쏘는 사람(사수자리 예상), 왕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그려져있기도 한다.



 ☞ 생물학 (Biological)

 ≫ 한 쪽에 꽉 찬 글 사이사이에 큰 그림이 들어가 있거나 대부분의 그림은 나체의 여자들이 파이프들로 연결된 욕조에서 목욕을 하는 모습이다. 그 중 몇몇은 인체 기관과 매우 흡사한데, 필자는 흡사한 그림의 예시를 위해 위에 붉은색 동그라미를 쳐봤다. 위 그림은 아무리 봐도 사람의 인체 기관인 장을 연상시키는 그림이다. 나체의 여성들이 많은 것을 보면 이 시대에도 인체구조를 표현하기 위함인듯하다. 몇몇 여자들은 관을 쓰는 모습을 보인다.


 

 ☞ 처방전 (Recipes)

 ≫ 대체로 짧은 문장들이 많고 각각의 꽃이나 별과 비슷하게 생긴 "표식"으로 표시되어 있다.


▼ 아래는 처방전의 "표식"을 확대했다.

보이니치 필사본 원본을 볼 수 있는 URL : https://archive.org/details/TheVoynichManuscript


출처 및 참고 : 나무위키, 각종의 유튜브, 엔하위키, http://mysterytraveler.tistory.com/119, 익스트림 서프라이즈, 실제 보이니치 필사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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