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과 2에서 원자력 발전소의 사고원인과 이유 그리고 노심과 제어봉에 대한 설명을 접할 수 있습니다.

■ 1986년 4월 26일 사건 그 이후, 체르노빌 원전사고에 대한 처리 : 화재 진압과 방사능의 긴급 누출 방지

 
(폭발직후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당시 수석 엔지니어 알렉산드로 아키모프)

 ≫ 체르노빌 발전소의 발전기는 4기가 있었고, 그 중 2기는 추가로 짓고 있던 중이었다. 폭발의 여파로 4호기의 잔해와 3호기에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기 위하여 1986년 4월 26일 사고 직후 소방대원들이 파견되었다. 사고 직후인 1시 28분에 우선 알렉산드르 아키모프가 지휘하는 14명의 소방대원이 파견되어 화재를 진압하기 시작하였고, 오전 4시 경에는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가 지휘하는 250명의 대원이 추가로 파견되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오전 2시 10분에는 기계동 천장의 가장 큰 불이 진압되었고, 2시 30분에는 폭발한 반응로 건물 천장의 화재 또한 진압되었다. 오전 5시에는 반응로 주변에 일어난 대부분의 화재가 모두 진압되었다. 이 기간 동안 아무도 폭발이 일어난 반응로 근처로 가지 못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반응로의 잔해가 계속 불타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사고 후 처음 20시간 동안 소방대원과 발전소 직원들의 화재 진압 시도로 인해 뿌려진 물이 기화하여, 반응로 주변은 증기로 가득한 상태였다. 이 증기는 가열된 흑연이나 반응로 내부의 지르코늄과 같은 다른 물질과 반응하여 수소 가스를 비롯한 많은 가연성 물질들을 만들어냈다. 이 가연성 물질들은 사고 발생 후 약 20시간이 지난 4월 26일 오후 9시 41분에 반응로의 잔해를 폭발시켰다. 폭발의 여파로 만들어진 불기둥은 거의 50m에 달할 정도의 규모였다. 

 ≫ 이 화재를 진압하고 화재로 인한 방사능의 누출을 막기 위해 5월 5일까지 군용 헬리콥터 30대가 동원되어 여러 물질들이 투하되었는데, 이 물질들은 중성자를 흡수하여 연쇄 반응을 막기 위한 40톤의 붕소 화합물, 열을 흡수하고 이산화 탄소를 발생시켜 화재를 진압하기 위한 돌로마이트 600톤, 방사능 차폐를 위한 2400톤의 납과 1800톤의 모래와 진흙 등이다. 동원된 헬리콥터와 그 조종사의 방사능 피폭을 줄이기 위해, 헬리콥터들은 폭심의 바로 위에 멈춰서지 않고 반응로를 날아서 통과하면서 투하물들을 떨어뜨렸다. 이 때문에, 투하물 중 일부는 목표인 노심을 빗나가 그 주변에 떨어졌으며, 이렇게 주변에 떨어진 투하물들은 반응로 내부의 열을 흡수하지 못하고 잡아두는 역할을 해 반응로의 온도를 높이고 방사능의 추가 누출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추측된다. 헬리콥터에 의한 화재 진압 시도는 5월 7일까지 지속되었으나, 폭발로 인해 건물의 구조가 약화되어 추가 폭발 또는 노심 용해 사고가 발생할 우려가 있어 5월 10일까지 중단되었다. 헬리콥터에 의한 시도가 중단된 이후에는 원자로 3호기에 있던 액체 질소를 노심에 주입해 5월 9일 반응로의 화재가 마침내 진압되었다.


■ 소련정부의 사고 공표
 ≫ 소련 정부는 사고가 일어난 사실을 즉시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했던 1986년 4월 26일 아침에, 사고 지점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1,200 km 떨어진 스웨덴의 포스막 원자력 발전소에 출근한 과학자의 의복에서 포스막 발전소에서는 발견된 전례가 없는 방사능이 검출되었다. 4월 27일과 28일에는 정상 수준보다 6배 이상 높은 방사능이 스웨덴뿐만 아니라 핀란드를 포함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여러 지역과 덴마크에서 검출되었고, 스웨덴 정부는 대기 상황을 고려하여 이 물질이 소련에서 날아온 것으로 추측하고 소련 정부에 해명을 요구하였다. 소련 정부는 관영 통신사인 타스를 통하여, 정확한 사고 발생 시각과 피해자의 수 등은 언급하지 않은 채 4월 28일에 사고 발생 사실을 인정하였다.


(원전 4호기를 상공에서 찍은 당시 사진)

 ≫ 소련 정부가 사고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방에서는 사고 규모와 사망자 수에 대한 소문이 진위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채로 퍼졌다. 사고가 처음 공표된 4월 30일경에는 사망자수가 2천 명에서 3천 명에 이른다는 추측성 기사가 보도되었고, 사고 원인도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비슷한 노심용융으로 추측되고 있었다. 소련 정부는 타스 통신을 통해 4월 30일에 이 같은 추측을 부인하고, 방사능 누출로 인해 입원한 환자 수를 밝혔다. 서구 기자들의 취재 요청이 있었지만, 소련 정부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이후 스웨덴 정부 등에 공식적으로 화재 진화를 위한 소방관 파견과 방사능 오염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의료 지원 등을 요청하였고, 같은 시기에 미국의 첩보 위성 등이 심각하게 손상된 원자로를 확인하면서 사고가 매우 심각한 규모라는 사실이 간접적으로 알려졌다. 소련이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보도하기 시작한 것은 5월 6일에 이르러서였다.

■ 소련의 방사능 제거를 위한 노력
 ≫ 방사능의 누출을 막기 위한 최초의 조치로 냉각 장치를 내장한 콘크리트 판을 4호기의 지하에 설치하는 작업이 수행되었다. 이 판들은 고온의 노심을 냉각시키려는 목적과 함께, 노심의 열에 의해 용융된 액체 상태의 방사성 물질이 지하수로 흘러드는 것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이 작업은 약 400명의 작업자에 의해 15일간 진행되었다 콘크리트 판 설치가 완료된 후, 지상에 노출된 노심에 남아있는 핵연료와 방사성 물질에 의한 방사능 누출을 막기 위하여, "석관"(sarcophagus)이라 불리는 콘크리트제 봉인 시설을 건설하는 작업과, 사고 지점 근처에 있는 댐과 호수의 방사능 오염 제거 등의 작업이 먼저 시작되었다. 이 작업에는 약 22만 6천명 정도의 인원이 참여하였다. 호수의 방사능 오염 제거 작업은 1986년 9월경에 완료되었으며, 봉인 시설은 11월에 완공되었다. 이 작업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남아있는 원자로 시설과 발전소 진입로, 그리고 그 주변 지역의 방사능 오염 제거 또한 이루어졌다. 이 작업은 1987년까지 계속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방식이 사용되었다.
1. 오염된 시설의 표면과 장비에 액체와 모래, 증기 등을 분사하여 오염 물질을 청소
2. 오염 지역의 표토를 제거하고 매립
3. 오염된 시설의 표면을 고분자로 코팅한 후 제거함으로써 고분자에 붙은 먼지 입자 등의 방사능 오염 물질을 제거
4. 도로와 기타 아스팔트 포장된 구역의 재포장

■ 폭발현장에서의 시민 희생 : 키예프 시가지지역의 방사능 노동절 축제

(키예프 시가지의 방사능오염수치를 나타낸 표시 : 붉은색은 심각하게 오염된 지역)

 ≫ 폭발현장의 화재를 진압하기위해 소방관들이 보호장구도 없이 급파되어 화재를 진압하려고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원자로의 화재는 쉽게 진화되지 않았고 투입된 소방관들 2명은 그날 저녁에 사망했다. 나머지 28명도 모두 몇개월 안에 치사량의 피폭때문에 사망한다. 가공할 방사능오염물질들이 바람을 타고 온 유럽을 뒤덮었다. 체르노빌의 당사자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도 오염되었다. 


 ≫ 5월은 공산국가의 가장 큰 기념일중 하나인 메이데이(노동절) 축제가 있고 소련은 심각하게 오염된 키예프에서 노동절축제를 강행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사태가 심각하지 않다는 믿음을 주어 사람들의 패닉을 잠재우기 위한 대국민 사기극이었다. 정상치의 수천배가 넘는 방사선수치 속에서 강행된 노동절 축제기간중 수많은 사람들이 피폭되었고 관련통계는 거의 집계발표되지도 않았다. 또한 1986년의 노동절 축제 관련 기록사진 및 필름은 우크라이나 국립 기록 보관원에서 모조리 삭제되었다.


 ≫ 사태 발생 초기에 붕산 모래 혼합물 투하작전에 투입된 소련병사. 평균연령 20대였던 소련군인들은 대부분 작업후에 피폭후유증으로 며칠 못넘기고 모스크바 6호병원에서 사망했다. 그중 27명은 빠르게 죽었다.

 ≫ 2차 폭발의 위험이 제거된 후 소련군이 복구작업에 투입된다. 엔지니어인 레프 볼차코프가 설계한 거대한 콘크리트와 철의 석관을 4호기 위에 덧씌우는 작업에 대량의 공병차량과 크레인, 불도저가 투입된다. 작업원들은 피폭을 최대한 줄이려고 운전석에 납으로 된 판을 부착해 급조하고 작업시간을 최대한 줄여 피폭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작업중 난관에 부딪치는데, 폭발한 원자로의 흑연이 4호기 지붕위를 완전히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각각의 파편들은 제각각 시간당 500~1500 뢴트겐을 뿜어대고 있었고 이런 극한의 상황에 사람은 들어갈 수 없었다. 그들은 로봇을 투입해서 제거작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강렬한 방사선속에서 작업하던 로봇들의 회로가 망가져버려서 결국 사람을 투입하기에 이른다. 이런 환경에 인간을 보낸다는것 자체가 용납될 수 없는 미친짓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투입된 병사들을 바이오 로봇이라고 불렀다.

■ 폭발현장에서의 시민 희생 : 니콜라이 타라카노프장군의 기록필름


(니콜라이 타라카노프 장군)

 ≫ 수습작전을 지휘한 니콜라이 타라카노프 장군. 그가 부하들을 방사능지옥에 투입하면서 한 말이 기록필름으로 남아있다.


 : 동무들, 자네들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해


 : 이틀 전에 내가 한 장교와 함께 저 지붕위로 올라가봤는데,


 : 한 가지 확실하게 알게된 것은


 : 저 위쪽에 올라가봐도 별로 두려워 할 것은 없다는거야.


 ≫ 그들은 시간당 10000 릔트겐의 방사선에 피폭되었고, 병사들은 방사능덩어리들을 삽으로 떠내거나 맨손으로 집어서 옮겨야 했다. 각각의 파편들은 시간당 1500뢴트겐을 뿜어댔고, 이렇게 폐기물들을 쥐고 있던 병사들은 곧 손에서 대단한 통증을 느꼈으며 나중에는 주먹을 쥘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체르노빌 추가 피해는 많은 시민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막을 수 있었다.


출처 : 체르노빌의 진실(http://m.jjang0u.com/chalkadak/view?db=160&no=177100)

,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사고 위키 : https://ko.wikipedia.org/wiki/%EC%B2%B4%EB%A5%B4%EB%85%B8%EB%B9%8C_%EC%9B%90%EC%9E%90%EB%A0%A5_%EB%B0%9C%EC%A0%84%EC%86%8C_%EC%82%AC%EA%B3%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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