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대로 필요한 글만 찝고, 일부 주관적으로 재해석한 글이 섞였습니다.

 

<돈,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다루어라> / <투자는 심리게임이다>

 

- 돈

 . 부자란 절대적인 자산 규모와는 무관하다.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

 . 보석과 밍크코트를 좋아하는 아내는 만족시킬 수 있어도 통장잔고를 쫓는 아내는 평생 만족시킬 수 없다.

 . 고로 돈과는 어느정도 거리를 두어야 하지만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

 

- 투자

 . 내가 투자를 해서 성공한다면, 단순히 돈을 벌었기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보다 올바르다는 것이 입증됐기 때문에 기쁜 것이다. 

 . 주식투자에 뛰어들려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정신적 준비운동이 필요하다. 확실한 수익을 보장해 주는 주식시장은 세상 아무 데도 없다.

 

- 주식시장의 논리

 . 애널리스트들은 어떻게든 애널리스트들은 어떻게든 시세 변동에 대한 논리적인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수요와 공급이 유일한 논리라고 생각한다.

 

- 장기적인 시각으로 보는 경제 발전

 . 개와 주인이 항상 나란히 가진 않지만 장기적으론 같은 방향으로 간다. 너무 멀리 나간 개는 다시 돌아온다.

 

- 어떤 주식을 살 것인가

 . 강세장에서는 최악의 종목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조금은 벌어들일 수 있으나 약세장에서는 최고의 종목이라도 수익을 얻기가 어렵다. 따라서 우선 일반적 추세를 보고 그 다음에 주식을 선별하라

 . 성장 산업(새로운 분야)은 지그재그 식으로 발달한다. 성장과 후퇴를 반복하며 구조조정/선별 작업이 이루어진다

 

- 실제 증권시장의 시세 결정 요소: 통화량과 신주발행(M2), 심리

 

- 거래량이 동반된 상승시세는 불안할 수 있다.

 . 시세가 상승하는 증권시장에서 거래량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더욱더 많은 주식들이 '큰손'에서 '작은 손'으로 가게 되는데, 즉, 심리적으로 안정된 증권시장 참여자들로부터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증권시장 참여자에게로 옮겨가는 것.

 

- 증권시장의 분위기 = 증권시장 참여자들간의 타협점

 

- 돈+심리 = 추세

 . 돈과 심리가 긍정적이면 시세는 올라가고 부정적이면 시세는 하락한다. 한 요소가 긍정적이고 다른 요소가 부정적이면, 흐름은 중화되어 커다란 동요가 없고 재미없는 주식시장이 계속된다. 바로 여기에서 나 자신의 신념이 된 다음의 공식이 나왔다.

 

 . "단기적으로 그리고 중기적으로 심리학은 증권시장의 90퍼센트를 결정한다"

 

 . 투자자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행동(투자)하는 것보다 아무 행동하지 않고 깊이 생각하는 것이 더 낫다.

 

 . 오랜 경험이 쌓인 투자자에게 가장 불행한 일은 대담함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 저평가 또는 고평가'라는 판단은 결코 산술적인 것이 아니고 심리적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는 상대적 평가이다.

 . 즉슨, 상대강도평가 지표는 의심할수 없는 진리가 아니라, 심리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한 포지션이다.

 

 

■ 목차

  1. 원유는 공급과 수요의 파워게임이다
  2. 부활을 꿈꾸는 불멸의 귀금속
  3. 경기를 선도하는 비철금속
  4. 풍요 속의 빈곤, 곡물
  5. 원자재전쟁의 보이지 않는 위협
  6. 원자재 함정에 빠진 세계
  7. 새로운 자원의 탄생, 탄소배출권
  8. 원자재 슈퍼사이클, 지금은 어디인가

■ 왜 읽었는가?

 ≫ 원자재를 배울 곳이 많지 않고, 목차에서부터 저자께서 관련 지식이 매우 다양하다는 느낌이 왔다.

 ≫ 원자재 선물 투자 전략 및 ETF 전략을 구사하기 위한 원자재 정세 파악과 각 원자재 속성 파악.

 

■ 내 마음대로 정리하기

원유 - 원유는 공급과 수요의 파워게임이다.

- 원유? 석유? LNG? LPG?

. 석유란 천연적으로 추출한 원유를 수출하거나 정유공장으로 운송하기 전에 수분과 가스분을 제거한 것을 말하며, 이를 정제한 것을 석유제품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석유는 매장 위치가 지면에서 깊을수록 내부압력이 높아 가스물질의 함량이 높기 때문에 추출비용과 정제비용 등이 많이 발생하게 된다. 결국 저유가의 지속은 유정 투자 손익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생산량 증가의 제약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유전에서 원유를 채취하거나 원유 정제 시 나오는 탄화수소를 낮은 압력에 냉각시켜 액화시킨 것을 LPG라고 하는데, 나프타를 크래킹(Cracking, 중질유 석유를 분해하여 경질 석유 유분을 제조하는 석유분해법)할 때에도 생성된다.

. 천연가스는 천연적으로 산출되는 가스 상태의 탄화수소를 말하며 석유 속에도 소량 용해되어 있다. LNG는 천연가스 중 메탄(CH4) 성분을 정화처리한 후 냉각시킨 것이다. 주로 파이프라인을 통하여 공급되는데, 최근에서는 주로 LNG를 사용한다. 이는 LNG가 공기보다 가벼워 창문으로 배기가 가능해, 비중이 높아 밑바닥에 가라 앉는 LPG보다 안전한 특징이 있다.

. LNG는 천연으로 나오니 액화천연가스, LPG는 원유 정제할 때 나오니 액화석유가스.

 

 - 원유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세 가지

 1. 전 세계 석유 산지는 대부분 중동지역이다.

  . 2015년 기준, 약 60%는 중동지역이 맞다. 그러나 2014년 셰일오일 생산증가로 중동지역의 편중성은 다소 완화되고 있다.

 2. 석유 생산량으로 석유제품 공급 조절이 가능하다고 알고 있다.

 . 상압증류탑과 같은 시설에 투자하면 석유제품을 동시에 일정 비율로 생산한다. 하지만 이러한 연계성으로 특정 제품의 생산량을 조절하는 데 한계가 발생된다.

 LPG는 27도 이하, 나프타 30~120도, 경유 250~350 등..

상압증류탑

 3. 석유는 매장량이 정해져 있어서 지금과 같이 원유 소비를 하면 고갈될 것이다.

 . 향후 석유를 생산할 수 있는 기간을 가채연수라고 하는데, 이는 확인매장량/생산량이다.

 . 석유의 가채연수는 현재 생산기술로 생산할 수 있는 확인 매장량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생산기술의 발전에 따라 또는 대체에너지의 등장에 따라 기존에 발견된 유전으로 회수할 수 있는 확인 매장량의 증가가 가능하다.

 . 즉, 과거 기술력이 부족하여 경제성이 없던 심해와 신규 유전의 발견으로 과거와 같은 가채연수 우려는 다소 완화되었고 앞으로도 완화될 가능성이 높다.

 

원유 공급측면

 . 2016년 국제 공급 측면에서 중동정세와 텍사스 허리케인 피해, 사우디와 이란의 원유 시장점유율 경쟁과 미국 셰일 경쟁이 본격화되었고, 과잉공급 우려가 되는 시장임.

 

전략

 . 2000년 이전

 : 휘발유와 난방유 수요에 따라 움직임, 통상 정유회사는 4~5월부터 6월에 있을 여름 휴가를 위해 휘발유를 생산하여 원유를 소비하므로 4월까지는 원유가격 상승 압력을 받는다.

 : 이후 7~10월까지는 11월말 겨울을 대비하여 난방유 생산을 위해 원유를 소비, 10월까지는 상승세를 나타낸다.

 : 그래서, 미국 정유사들은 10월까지 재고를 쌓고, 12월까지 소비하며 신규매수는 다음 해로 연기.

. 2000년 이후

 : 과거와 달리, 대체에너지의 등장과 미 달러의 강세 등 외생적 변수의 영향이 큼.

 

귀금속

 - 금과 은 : '금'은 수요주도시장 -> 생산에 의한 금 공급은 연간 전체 공급량의 2%

 . 중국이 금 생산량 지속 확대, 세계 최대 생산국으로 도약.

 . 2008년 금융위기 후, 금 관련 글로벌 기업들의 자금부족과 경영난을 겪으며, 중국기업이 해외인수에 나설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2012년 후 국제 금가격 하락하여 광산업체의 투자이익률이 낮아졌음. 이로 인해 채산성 악화로 신규 광산이 둔화되었음.

 . 1985~1989년까지 세계 1위 금 생산국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었으며, 전체 공급의 37%였음.

 .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채광 생산량이 감소한 것은 금광업체들의 채굴비용에 기인하는데, 채굴할수록 지하침수, 암반 붕괴 등 위험요인의 작용과 채굴에 필요한 전력 부족이 작업환경을 더욱 악화시켰으며, 미국의 양적완화 종료(마지막 양적완화는 2012년 12월) 이후 미달러 강세가 남아프리카공화국 금광근로자들의 인건비 부담으로 작용.

 . 2013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유럽경제 부진으로 수출이 둔화되었고, 가계부채 증가와 강성노조에 의한 노동자 파업 및 전력부족이 함께 겹쳐졌으며, 앞으로도 남아프리카공화국 전기의 95%를 에스콤이라는 국영회사가 생산하는데 개선되지 않는다면, 금 생산량의 증대는 당분간 어려울 것임.

 . 2012년 기준, 광산금 이익률은 55~60%, 제련금 이익률은 1%에도 못 미쳤음.

 . 제련금은 과잉생산 해소에 도움, 생산규모를 늘리면 지위를 유지시켜주며 고도의 제련 기술이 필요하여 시장에서 최고급 품질로 인정받으므로 가격경쟁력이 높음.

 . 국내 99.99%의 순금을 대량 생산하는 곳은 LS니꼬동과 고려아연이며 생산된 순금의 90%를 해외로 수출

 . 금의 수요는 대부분 이탈리아,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이었으나 최근엔 인도, 중국, 사우디 등도 추가.

 . 전세계 장신구 금의 최대 수요국은 인도, 결혼 시즌으로 전 세계 금 25% 소비, 10월 셋째 주에 '두세라' 축제와 11월 3~5일간 힌두교 명절인 '디왈리' 때 결혼 시즌.

 . 2015년엔 중국 전통 관습상 아기의 장수와 행복을 바라는 의미의 선물용 금 수요가 증가, 향후 낮은 가격과 맞물려 다자녀 정책이 강화될수록 수요 증가 예상.

 

- 금의 가공수요와 투자수요

 . 가공수요 : 보석, 전기, 치과, 금화, 메달 등.

 . 투자수요 : 바 형태나 금화의 형태로 매매, 수익, 자산배분, 경제 변동에 의한 위험 헤지 목적

 

- 금 공급의 세 가지 분류

 1. 광산채굴 : 실질적으로 늘리는 것은 채굴이 유일

 2. 고금의 회수 : 이미 채굴한 2차적 공급원

 3. 정부와 중앙은행의 공급 : 이미 채굴한 2차적 공급원

 

- 금 가격이 상승할 때 투자 수요가 증가하는 원인?

 . 금 가격 예측을 노력하는 사람들은 금 가격이 지지선이나 저항선에 접근함에 따라 투자자들의 반응을 예의주시한다. 만약 투자자들이 낮은 가격에 반응하여 매입하고 있다면, 가격이 최소한 일시적으로는 상당히 안정될 것으로 생각한다.

 . 일반적으로 투자자들은 상승국면에서 조금 늦게 시장에 편승하려 하고, 이익이 나는 포지션은 노무 오랫동안 보유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투자 수요와 산업 수요가 역의 관계를 갖게 하는 원인이 된다. 금 가격이 상승하면 투자 수요는 증가하나, 산업 수요는 감소하며 금 가격이 하락하면 반대의 경향을 보임.

 

- 금 가격은 경제 선행지표

 . 금 가격의 상승은 인플레이션의 전조로 보며 투자자들은 더 많은 금을 매입하는 경향이 있다.

 . 금 가격이 상승하면 원가 상승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므로 산업 수요는 감소한다.

 . 금 가격이 하락하면 인플레이션이 상당히 억제되었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투자자들은 대량의 금을 매각

 

 - 팔라듐

 . 팔라듐은 백금과 유사한 성질로 귀금속 전성과 연성이 좋음.

 . 백금보단 가격이 낮고 무게가 가볍고 단단하여 전기접점, 고급외과수술, 베어링, 치과재료, 장식용 귀금속.

 . 1990년까진 자동채 배기가스용 촉매를 백금으로 사용했으나, 이후 가솔린엔진 촉매는 팔라듐으로 교체.

 . 디젤엔진 촉매 변환기의 경우 약 25~50%가 팔라듐으로 대체되었음.

 

 - 백금

 . 백금은 주로 니켈을 정제할 때 나오는 부산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러시아, 짐바브웨, 미국, 호주 등이 주요 생산국.

 . 백금 수요는 석유정제, 전기, 화학 및 섬유 산업체에 사용되며 전기산업에서 저항자, 접촉재, X-선 기기 및 화학산업에서는 촉매제로 사용.

 . 백금이 금보다 매장량이 20%나 많지만 생산량의 85%를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공급했으나 백금 3대 생산업체 광산(1위 앵글로아메리칸플래티넘, 2위 임팔라플래티넘, 3위 론민)이 임금인상 및 파업으로 생산성이 저하.

 

비철금속

- 알루미늄

 . 알루미늄은 연성이 좋아 가공이 쉽고 가볍고 산화성이 크고 공기 중에서 산화물 보호피막을 만들어 부식되지 않는 특성.

 . 알루미늄은 보크사이트광석에서 알루미나로 전환한 후 이를 용융시킨 후 전기분해하여 얻기 때문에 다른 비철금속에 비해 생산국 정책과 유가의 변동에 영향을 크게 받는다.

 . 주요 수출국은 인도네시아이며 2007년부터 2013년까지 세계 보크사이트 수출의 60%를 차지.

 . 알루미늄 포일 등 포장 사용을 제외하면 대부분 합금하여 강도를 높이는데 사용되며 승용차와 트럭에 가장 많이 사용(28%) -> 전기자동차 보현화될 시, 많은 양이 이 분야에 사용 예상

 . 각종 용기 및 포장 (23%), 창틀(14%), 지붕 재료 및 건축자재에 사용되며 35%는 전선, 가전, 자동차엔진, 냉난방, 주방기구 등 사용

 . 그 외 적외선 반사율이 높아 열반사체 및 은색 페인트 등.

 . 전세계 보크사이트 광석의 매장량은 380억 톤이며 중국, 러시아, 베트남, 호주, 브라질, 인도, 자메이카가 주 매장 및 생산.

 

- 구리(전기동)

 . 전성과 연성이 좋으며, 다른 금속과 합금하여 여러가지로 사용 (+주석=>청동), +아연(=>황동), +니켈(=>백동))

 . 구리의 60%는 (구리선)전선에 사용 그 외 송수관 지붕, 자동차 라디에이터 등 부품과 방열기, 주화, 장신구에 사용

 . 특히 구리는 전선, 전기기구, 냉난방기 등에 많이 사용되어 국가경제와 생활수준이 높을수록 수요가 많음.

 . 약 34%는 칠레에서 생산되며, 페루(8%), 중국(7%), 미국(7%), 호주(6%), 잠비아(4%), 러시아(4%)이다.

 

- 구리와 알루미늄을 속인 칭다오

 . 2014년, 칭다오 보세창고에 쌓였던 구리와 알루미늄 재고가 급격히 감소, 이는 중국 정부가 기업들이 동일한 금속 재고를 담보로 여러 건의 자금을 대출받은 사실에 대해 조사를 시작하면서부터임.

 . 칭다오 스캔들은 2014년 5월 말, 덕정광업이라는 회사가 2만톤의 전기동과 10만톤의 알루미늄 재고를 2배로 늘려 허위 담보를 설정했다는 혐의를 받게 된 사건.

 . 이로 인해 상해 현물 프리미엄은 급락하고 현금과 3개월물 현물 간 스프레드도 백워데이션이 좁혀졌었던 사건.

 

- 아연

 . 아연은 실온에서는 단단하여 부서지기 쉽고, 전성과 연성이 거의 없다. 그러나 고온(100~150℃)에서는 전성을 띠어 가는 선이나 얇은 판으로 가공할 수 있다. 비교적 좋은 전기전도체이며, 녹는점과 끓는점이 낮아 쉽게 승화된다.
 . 아연은 주로 철에 내부식성 도금 용도로 자동차 도색에 사용, 산화아연은 반도체 물질로 복사기와 자외선 차단제, 흰색 페인트 안료 등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식품 보존제와 탈취제, 비듬방지 샴푸 첨가제, 항균 농약 등에도 사용

 . 아연은 건전지에도 사용되는데, 약 70%는 광석에서 직접 생산되고 나머지는 폐품에서 회수되어 재활용된다.

 . 전 세계 아연 생산량은 약 1,200만 톤으로, 이 중 30%가 중국에서 생산된다. 이외 페루, 호주, 인도, 미국, 캐나다에서 생산된다. 

 

- 납

 . 납은 아주 무르고 연성과 전성이 커서 가공하기 쉽지만, 전기와 소리, 진동은 잘 통하지 않는다. 공기 중에서는 보호 피막이 만들어져 내부가 잘 부식되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다.

 . 납은 구리, 아연, 은 등과 함께 광석에 들어 있다2012년 전 세계 신규 생산량의 약 절반이 중국에서 생산되고 호주, 미국, 멕시코, 페루에서도 생산된다 (가용연수는 약 40년으로 예상)
 . 납은 광석에서 신규 생산되는 것과 비슷한 물량이 재생되어 사용되는데, 주로 자동차용 납축전지에 쓰인다. 또한 X-선 장치와 원자로 방사선 차폐재, 전선 피복제, 땜납, 탄환에도 사용된다.

 . 실제로 1986년에 일어난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 당시 방사능 차폐를 위해 원자재로 2,400톤 규모의 납을 투입했다. 그리고 2011년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때에도 납을 이용하여 방사능을 막았다.

 

- 니켈

 . 중국의 중공업 확대 추진과 인프라 투자에 따라 정련니켈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가격이 급등

 . 니켈의 사용은 철의 합금을 만들어 스테인리스강을 만드는 것, 니켈 총 생산 중 65%가 스테인리스강 제조에 사용.

 . 주방기구, 건물설비, 자동차 및 전자부품, 전력 케이블, 화학공장 설비, 수소화 촉매, 장신구, 동전 등.

 . 주요 생산국은 러시아, 호주, 캐나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 주석

 . 전성과 연성이 좋고, 공기 중에 쉽게 산화되지 않음.

 . 전자제품 회로를 연결하는 땜납으로 사용되며 종, 파이프, 식기와 장식품 등 사용, 일부는 LCD패널이나 MRI 장치의 초전도자석에도 주석 합금이 전선으로 사용.

 . 일부 주석도금은 강철 통(캔)으로 사용, 소비재 기호 변화로 알루미늄이나 PET 등 대체재와의 경쟁이 높아지는 중.

 

LME (런던금속거래소)

- 왜 비철금속은 런던이 중심인가?

19세기 중반만 하더라도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동과 주석의 생산 국가였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광석의 수요가 증가하여 남미나 아프리카 극동 지역으로부터 많은 광석을 수입하였다. 그러나 해상수송의 특성상 선박은 부정기적으로 항구에 도착하였으며, 도착일인 만기일은 알 수 없었다. 이에 따라 가격도 심하게 변동하였으며, 상인과 제조업자 모두 가격변동 위험을 부담해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상인들은 미래에 도착할 상품에 대한 선도 거래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전신이 발명됨으로써 항해중인 화물의 도착 예정일을 알 수 있게 되면서 선일자 판매가 가능해지자, 상인과 제조업자들이 정기적으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자 말레이시아로부터 주석광석 운송기간이 3개월로 단축되어 칠레로부터의 동광석 운송기간과 같아지게 되면서 3개월 선도 거래가 시작되었다. 
이에 금속 거래업자들은 시장 정보를 얻기 위해 런던 항구에 모이기 시작했고, 자신들만의 회합 장소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877년 일단의 금속상인들이 런던금속거래소(London Metal Exchange, LME)를 설립하였고, 회원 수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거래량도 급증하였다. 이 기간에 3개월 선도 거래가 공식화되었으며, 짧은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거래하는 링 거래 관습도 시작되었다.

 

- LME의 주요한 기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가격 결정의 역할 : 거래소에서 접수되는 거래주문은 전 세계에 걸친 사업상의 결과이다. 따라서 거래가격은 어느 한 시점의 세계 비철금속 수급 현황에 대한 정확한 척도가 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LME의 공시가격은 생산자와 소비자들이 실물 장기계약의 가격 결정 기준으로 널리 사용하고 있다. 


둘째, 헤징의 기회를 제공 : LME는 광산회사, 제련회사, 무역회사들에게 헤징의 기회를 제공하여 정치적·경제적 또는 금융상의 혼란으로 야기되는 가격변동에 따른 위험을 방지할 수 있게 해준다.


셋째, 수급조절 기능 : 경기가 침체할 경우 비철금속은 잉여분이 발생하게 되고, 이 잉여분은 거래소 등록창고에 입고된다. 투자자나 금융기관들은 이러한 재고를 매입하는 동시에 선물을 높은 가격에 매도함으로써 위험이 거의 없는 고수익을 올릴 수 있다. 금융 소유주들은 잉여재고를 판매할 수 있게 되므로 금융비용, 보관료 등의 부담을 투자자들에게 넘길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방법에 의해 과잉 재고가 흡수되므로 생산자나 제조업자들이 경기가 침체할 경우에도 조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된다. 


넷째, 실물인수도 기능 : LME는 선물 거래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실물을 사고팔 수 있는 시장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실물 매입자에게는 LME 창고의 상품을 표준규격품으로 보증받을 수가 있으며, 매도자에게는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는 물량의 현물을 처분할 수 있는 기능을 수행한다.


다섯째, 파이낸싱 역할 : 창고증권, 즉 실물을 소유하고 있는 자가 현물을 팔지 않고 단지 포지션을 1개월 연장하고자 한다면 LME에서는 랜딩(Lending, 현물을 매도하고 동시에 선물 원월물을 매입)을 통해 1개월을 연장할 수 있다.

주식투자 리스타트

왜 나는 주식투자로 돈을 못 벌까?

 

 

■ 나의 한마디

 >> 주식투자에 조금은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뻔할수도 있지만 배울 점도 분명히 있다. 초보가 읽기엔 확실히 좋은 책이다. 기술적분석을 비판하는 내용이 조금 많은데, 기술적분석은 사실 심리에 기반한 분석방법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적합하다. 필자는 기술적분석에 대한 신뢰 비중을 조금 더 갖는 편이지만 '기술적분석만 신뢰하는' 일명 차트쟁이보다는 이 책대로 매매하는 것이 낫다고 본다. 근래에는 접근하기 좋고 친화적인 HTS와 MTS의 도입으로 매매가 너무 간편해졌고 너무나도 쉽게 매매가 가능해지면서 생기는 문제들을 잘 찍어주지만, 초보자들에 대해서 너무 비판적인 것은 아쉽다. 어느 누구나 그럴 수 있는 부분인데, 책이니까 쉽게 하는 말이겠지. 필자가 말하고 싶은 건 주식에 정확한 건 없고, 100% 확률은 없다. '리스크관리와 시나리오를 잘 정돈하고 그에 따라 맞춰서 잘 대응하는 것.' 이 철학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출판사 서평

 >> ‘주식 전쟁’에서 살아남는 법을 알려주는 책!

 >> 단순한 매매 기법이 아닌 주가의 원리를 알려주는 책!

 

 목차

제1장 주식투자에서 실패하는 이유
제2장 리스크와 자금 관리
제3장 언제 투자할 것인가
제4장 승률과 손익비 
제5장 주가가 움직이는 원리

제6장 주가의 속성과 주가 움직임의 해석
제7장 추세 추종 매매
제8장 눌림목 매매

제9장 종가 베팅

 

 왜 읽었는가?

 >>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아주 쉽고 싼 가격에 배울 수 있는 방법은 역시 책이다.

 >> 타인이 생각하고 있는 투자기법을 배우기 위해서

 

 내 마음대로 책 내용 3줄 요약

 >> 형편상 타격을 주지 않는 수준의 가장 쉽게 접하는 자금관리법은 '여유 자금'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자금관리엔 단리식, 복리식, 고정자산비율 베팅법이 있다.

 >> 초반에 기술적분석을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목차에서 보이듯 기술적 매매 기법 기초를 소개하는 모순이 있다.

 >> 주가는 세력이 만든다.

 

 많은 투자자들이 주식시장에서 손실을 보는 이유

  1. 주식시장의 위험성에 대한 개념조차 없고 대충 사놓으면 막연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시장이라고만 생각한다.
  2. 위험관리나 자금 관리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고 , 이런 구조로 매매하는 경우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본 바가 없다.
  3. 시장의 흐름은 무시한 채 항상 시장에 참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기법에 대한 맹신으로 투자한다. 시장에 참여해야 할 때와 빠져야 할 때를 모른다.
  4. 본질적인 가격의 움직임 그 자체는 경시하고 속임수가 많은 불완전한 재료나 기업의 부수적인 요소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여 매매를 한다.
  5. 기술적 지표의 움직임에만 의존하여 주가의 움직임을 해석하고 매매에 활용하려 한다.
  6. 주가가 움직이는 기본적인 원리나 메커니즘에 대해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으며, 무지하다.

 기술적 지표나 매매기법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

 >> 어느정도 매매 경험이 쌓이다 보면 종목에 대한 전망이나 뉴스만 보고 무턱대고 매매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기술적분석'이라는 것을 공부하고, 그러한 움직임에서 규칙을 찾아 기법화하면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런데 매매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것도 한계에 부딪칩니다. 기법이 통하는 경우도 있지만, 안 통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온갖 지표를 조합해보고, 지나간 차트에 대입해서 최적의 값도 찾아내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마법의 공식'을 가지고 공식대로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 빠집니다.

 >> 이것을 '과최적화의 오류'라고 합니다. 즉, 지표의 조합이나 최적화의 값으로 만들어낸 마법 같은 불변의 공식이 주식에 정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주가 흐름의 데이터를 통해 결과적으로 추출해낸 껍데기 공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 기술적 지표를 통한 매매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지만, 이것도 결국은 주가의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가의 움직임의 원인이 되는 '선행지표'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금 관리 방법의 종류

 >> 단리식 자금 관리

  : 수익은 인출해서 원금을 유지하고, 손실이 나면 손실을 보충해서 항상 동일한 금액으로 투자.

  . 문제점 : 수익을 크게 불릴 수 없고, 손실도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없다.

 >> 복리식 자금 관리

  : 이익을 보든 손실을 보든 투자에 의한 손익을 투자 자금에 지속적으로 반영해서 재투자.

  . 문제점 : 수익 규모가 커진 상태에서 큰 손실을 맞게 되면 수익의 상당 부분 역시 복리적으로 잃는다.

 >> 고정 자산 비율 베팅법

  : 손실의 한계를 총 자산비율에서의 %로 관리, 변동성이 큰 투자처일수록 적은 금액을 투입하고 떨어질 때 더 많은 돈으로 희석하여 단가를 낮추는 투자.

  . 책의 필자는 이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소개하는데, 논리적으로는 그럴싸하다. 근데 시장이 좋을 땐 과감해야 한다는 게 리뷰어의 생각이다. 고로, 거시시장 체크 잘 해보고 '시장판단'을 잘하자.

 

 종목간의 상관계수

 >> 종목 간의 상관계수란 개별 종목들이 같이 움직이는 정도를 의미합니다. 즉, 상관계수가 높다는 것은 종목들이 위로든 아래로든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의미이고, 상관계수가 낮다는 것은 종목들이 따로 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상승장에서 상관계수가 낮아지고, 하락장에서 급락 시 종목 간의 상관계수가 높아진다는 사실은, 시장 상황이 양호해서 오를 땐 오르는 종목만 오르지만, 장이 나빠지거나 하락장에서는 대다수의 종목이 같이 하락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종목이든 돈을 벌기 힘든 하락장을 피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시장이 하락장이면 여러분이 아무리 종목 선정을 잘하고 매매를 잘한다 한들 돈을 벌기는커녕 '깨질' 확률이 훨씬 더 높습니다.

 

 주식 매매자들의 심리

  1. 모든 주식 매매자들은 본질적으로 주식으로 돈을 벌려는 투기꾼이고, 기왕이면 많은 돈을 벌려고 합니다. 외국인이든, 개인이든, 기관이든, 세력이든 모든 주식의 매매 주체의 공통적이고 근본적인 목적이 돈을 버는 것.
  2. 모든 주식 매매자들은 매수한 이후 수익이 어느정도 나서 이익을 보는 상황에는 작은 조정이 나와도 추가 상승에 대한 기대감으로 주식을 보유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일단은 수익권이고 크게 손해 보지 않은 상황에서는 심리적으로 여유가 있기 떄문에 추가 상승을 기대하고 함부로 팔지 않는 것이죠.
  3. 모든 주식 매매자들은 뜻하지 않게 일정 수준 이상의 손해를 보면, 추가 수익보다는 일단 원금이라도 찾고 싶은 '본전 심리'가 발동합니다.
  • 결론 : 모든 주식매매자들은 수익을 원하고, 손실은 원하지 않는다. 공통된 심리에는 예외가 없다.

 

  완벽에 대한 반론





■ 나의 한마디

 ≫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기술발전과 유전적강화에 대한 특정 시나리오를 제시하며, 발전적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한 번 더 제동장치를 걸어주는 느낌으로 읽으면 편하다. 항상 마이클샌델의 책은 정답이 오묘하거나 없는 식의 내용이여서 곱씹어보기 좋다. 아래는 책의 옮긴이가 쓴 글인데, 글을 너무 잘 표현해줘서 나의 한마디보다는 이 글이 정리하기에 좋아, 옮겨적는다.


■ 옮긴이의 글

 ≫ 마이클 샌델 교수는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인 2002년부터 4년 동안 생명윤리 위원회의 위원으로 위촉받아 일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 이 위원회는 ‘생명의료 과학기술의 진보가 갖는 윤리적 함의에 대해 미국 대통령에게 자문을 제공하는 기관’이다. 샌델은 이 책을 통해 생명공학의 여러 주제들에 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마땅한지를 제시하면서 우리의 동의를 구하고 있다. 나아가 우리가 어떠한 사회를 만들기 원하는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삶의 방식들이 과연 우리가 바라는 좋은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인지 질문하며, 매우 근본적인 수준에서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 책이 쓰인 목적은 생명공학 시대에 완벽 추구의 윤리에 대한 반대의 입장과 근거를 설명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자세히 읽어보면 샌델의 논의는 생명공학 문제에 대한 응답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생명공학의 노력 근저에 깔려 있는 윤리적 입장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짚어내어 비판하고, 우리가 취해야 할 올바른 윤리적 태도가 무엇인지 고민해볼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는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마음의 습관’에 대한 비판이며 존재 방식에 대한 반성의 촉구다.


 ≫ 이 책을 풀이한 옮긴이는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1. 첫째, 샌델은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하거나 행동을 할 때 마음에 불편함이 따를 경우, 그 감정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마음의 불편은 어디에서 오는가? 왜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할 때 망설이게 되는 것일까? 윤리적 불안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왜 어떤 입장에 대해서는 윤리적 반감이 발생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이 우리 안에서 생길 때, 우리는 생각하게 되고, 생각을 통해 무엇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판단으로 나아갈 수 있다.

  2. 둘째, 샌델은 우리가 어떤 잘못된 입장을 취하게 되면 그 결과가 나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모든 일에는 결과가 따르는 법이다. 그 결과가 처음에 얻으려 했던 목적과 반대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런 행위를 시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적극적으로 사용했던 귀류법의 논리가 윤리적으로 적용된 것이다. 귀류법이란 어떤 주장에 대해 그것이 참이라고 전제하고 결론을 도출해보았을 때 모순이 발견된다면, 최초의 주장 자체가 오류라는 것을 확증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샌델은 유전공학을 적용했을 때 그것이 가져다주는 단기적 성과에만 집착하여 유전공학이 유익하다고 판단하는 데 그치지 말고, 그런 기술이 궁극적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어낼 것인지, 그런 사회가 과연 좋은 것인지 고민해볼 것을 권한다.

  3. 셋째, 샌델은 우리의 삶과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선한 것들의 본래적 가치에 주목해볼 것을 주문한다.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책임의 가치, 서로 돕고 지원하는 사회적 연대의 가치, 또는 뮤지컬이나 스포츠가 왜, 그리고 어떻게 인간에게 감동을 주고 거기서 쾌감을 느껴 좋아하게 되는가를 들여다보라고 권한다. 그리고 우리가 새롭게 사용하려는 기술이 그러한 본래적 가치를 더하는 방향으로 변화를 주는지, 아니면 그것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변화를 주는지 살펴보라고 말한다.


■ 목차

  1. 강화의 윤리학

  2. 생체공학적 운동선수

  3. 맞춤 아기를 설계하는 부모

  4. 우생학의 어제와 오늘

  5. 정복과 선물

  6. 에필로그_배아 윤리학 : 줄기세포 논쟁

  7. 해제_생명공학 시대와 마음의 습관


■ 왜 읽었는가?

 ≫ 샌델이 말하는 완벽함과 완벽하다고 말하는 것에 대한 반론이 무엇인지에 대한 불편한 감정 해소

 ≫ 마이클 샌델이 말하는 윤리학과 생명공학에 대한 궁금증


■ 내 마음대로 책 내용 3줄 요약

 ≫ 유전공학을 통한 신체강화에서 당신이 느끼는 도덕적 불편함은 무엇인가? 이 도덕적 불편함은 사용하는 수단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 목적을 이루는 수단에 달려있다.

 ≫ 자유주의적 우생학은 국가가 강제하는 유전공학을 전혀 거부하지 않는다. 다만 유전공학으로 설계되는 아이의 자율성이 존중되기만을 요구할 뿐이다. 우리는 자유주의적 우생학의 삶을 살고 있다.

 ≫ 재능 역시 선택이 아닌 선물로 주어진 것이기에 생명공학기술을 통한 능력 강화는 지나친 지배와 통제일 수 있다. 설계하고 유전자를 조작하는 우생학적 노력에 담긴 인간의 지배 심리에 대해 돌아보아야 한다.


■ 계획적 장애와 계획적 강화

 계획적 장애 : 몇 년 전 한 커플은 아이를 갖기로 결정했다. 단,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이를 원했다. 레즈비언 커플인 샤론 듀셰스와 캔디 매컬로는 청각장애인이었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들은 듣지 못하는 것을 장애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다. 듀셰스노는 "듣지못하는 것은 그저 삶의 방식일 뿐이다. 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스스로 온전하다고 느끼며, 청각장애인 공동체의 훌륭한 소속감과 유대감을 아이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5대째 청각장애를 갖고 있는 가족의 정자 기증자를 찾아냈고 아들을 청각장애로 태어나게 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워싱턴 포스트에 소개되었고, 엄청난 비난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 그들은 무척 놀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자식에게 고의로 장애를 유발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듀셰스노와 매컬로는 듣지 못하는 것은 장애가 아니라고 항변하며 "우리는 우리 행동이 이성애자 커플들이 아이를 가질 때 하는 행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계획적으로 자녀를 청각장애로 만드는 것은 잘못된 일인가? 그렇다면 왜 잘못인가? 듣지 못하는 것이 장애가 아니라 특별한 정체성이라 가정한다면, 부모가 자신이 가질 자식을 원하는 모습대로 선택하는 것은 잘못인가? 그것은 본래 부모들의 일반적인 행동은 아닌가?


 ≫ 계획적 강화 : 불임 부부는 난자 제공자를 찾는 광고 하나를 실었다. 난자를 제공할 여성은 키 175 이상에 탄탄한 몸매이며 가족 병력도 없고 대학수학 능력시험 SAT 점수가 1400점 이상이어야 했다. 이 요건을 충족하는 난자 제공자에게 5900만원을 주겠다고 광고했다. 그들이 낸 광고에는 일부러 청각장애 아이를 낳은 커플의 경우와 달리 대중의 비난이 쏟아지지 않았다. 키와 지능, 뛰어난 신체조건이 아이에게 주어지지 말아야 할 장애라고 항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 광고엔 도덕적인 불편함이 존재한다. 특정 유전적 특성을 가진 아이를 '주문'하려는 부모의 행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 무엇에서 불편함을 느끼는가? ▶《복제는 태어날 아이의 자율권을 손상시킨다》 "부모가 아이의 유전적 구성을 미리 선택함으로써 이전에 살았던 누군가의 그림자와 같은 삶을 아이에게 부여하여, 스스로 미래를 열어갈 권리를 빼앗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부모가 유전적 구성을 선택하지 않으면 아이가 자신의 특성을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그릇된 가정을 함축한다. 또한 자기 자신을 위한 유전적 강화에 대한 도덕적 망설임을 설명해주진 못한다. (예로, 성형수술)

 ≫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자율성과 공정함, 개인의 권리 같은 개념에 먼저 눈을 돌린다. 그러나 유전공학이 제기하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만한 수단으로 제공해주지는 못한다.


■ 유전공학적 강화

 ≫ 근육 강화 : 떠오르는 이유 두 가지는 안전성과 공정성.
 → 결론은, 불편한 감정은 안정성과 
공정성 때문은 아니다.

  1. 근육강화 유전자 치료법이 안전하면 금지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2. 부상당한 선수가 손상된 근육을 유전자 치료로 복구하는 것이 괜찮다면 건강한 근육을 강화해 과거보다 향상된 몸으로 경기에 출전하는 것은 어째서 잘못인가?

  3. 유전적으로 훌륭한 재능을 타고난 이들은 언제나 존재했다. 이런 선천적 불평등이 스포츠의 공정성을 훼손하지는 않는가?

 ≫ 기억력/신장 강화 : 도덕적 지위에 관한 선결문제의 오류.
 → 
기억력/신장 강화를 쉽게 접근하는 사람과 노화로 시들해지는 자연적 기억력에 만족하는 사람들.

  • ※ 기억력/신장 강화가 후세대까지 연결된다면, 왜 윤리적으로 불편한가?
    1. 가난한 자들이 생명공학 혜택을 누리지 못해서?
    2. 유전적 강화 기술을 누리는 부유층이 인간다움을 잃어버려서?
    3. 비판자들은 성장호르몬 선택적 사용을 성형내분비학이라고 칭하며 비용이 매우 비싸며, 집단적 자기모순적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에 반대함.
  • 왜 강화란 것은 치료와 건강회복에만 사용해야하는가?
    → 향후, 불공평함이 문제라면 공적 보조금을 제공한 불공평한 해소가 있겠으나, 자녀가 충분히 건강한데 추가적인 거금을 사용하는 사회에서 살고싶은지에 대한 질문이 나타남.


■ 스포츠에서의 경기력 강화의 수단

 ≫ 운동 장비 혁신도 일종의 강화의 수단이다. 그것이 경기에 꼭 필요한 능력을 더욱 완벽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그 능력의 '의미'를 퇴색시키는가에 있다. 운동 장비 혁신을 통해서 검증되어야 하는 재능과 실력을 완벽하게 하는가 아니면 왜곡하는가에 달려있다.
 ≫ 1970년~1980년대에 운동 선수들의 체중을 늘리는 방법에 기여한 것은 스테로이드의 사용이었다. 1990년 이를 금지했으나 선수들의 체중은 계속 증가했다. 주로 선수 명단에 오르기 위해 엄청난 양의 음식물을 섭취(대량의 빅맥을 섭취)하는 방법을 택했다.
 : 다량의 빅맥을 섭취하는 것은 최첨단 기술과 관련이 없지만, 스테로이드제나 성장호르몬, 유전공학 기술로 몸집을 불리는 것 못지않게 윤리적인 불편함을 자아낸다.

 ≫ 즉, 강화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강화하는 행위의 적법성'이 '그들이 사용하는 수단에 달려있는 게 아니다'라는 뜻이며, '특정 목적에 달성하기 위한 본질적 목적 수단을 헤치는가에 결정'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본질적 목적 수단이란 것이 과연 무엇인가? 스포츠를 빗대어, 이 본질적 목적 수단이 과연 자연적 재능과 능력의 의미인가? 스포츠에서 본질적이란 것이 단순히 오락을 위한 목적인가?


■ 우생학

[역사 속의 인물] 우생학의 창시자 프랜시스 골턴

영국의 우생학의 창시자 골턴 (1822. 02. 16 ~ 1911. 01. 17)


 ≫ 과거우생학 : 과거 우생학의 창시자는 영국의 유전학자 골턴이었다. 1822년 인체측정학연구실을 창설하였고, 1904년 우생학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골턴의 사상은 20세기 초 미국으로 퍼져나갔고 독일에서는 미국의 우생학적 법안을 숭배하는 인물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등장했다. 히틀러는 자서전 『나의 투쟁 Mein Kampf』에서 우생학에 대한 신념을 이렇게 밝혔다. “유전적으로 열등한 사람들이 똑같이 열등한 자손을 번식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요구에는 매우 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 체계적으로 시행하기만 한다면 그것을 막는 일은 인류가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행동에 해당한다. 수백만의 불운한 자들이 부당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인류 전체의 건강 수준이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 히틀러는 1933년 독일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후 우생학에 근거한 단종법을 공포하여 미국 우생학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콜드스프링하버 출판사에서 발간한 <우생학 뉴스 Eugenical News>는 히틀러의 단종법을 영어로 번역한 것을 실으면서, 그 내용이 미국 우생학 운동가들이 제안한 단종법과 유사하다고 자랑스럽게 보도했다. 우생학 열풍이 고조되어 있던 캘리포니아에서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Los Angeles Times>에 1935년 나치의 우생학에 대한 긍정적인 논평이 실렸다. ‘히틀러는 왜 “유전적 열성자를 불임시키라!”고 말하는가’라는 헤드라인 밑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미국과 전 세계가 비판할 수 없는 새로운 독일의 모습일 것이다.” 결국 히틀러는 우생학을 발판 삼아 미국의 불임수술에 그치지 않고 대량 집단학살을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나치의 잔혹 행위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미국의 우생학 운동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 자유시장 우생학우생학의 그림자는 유전공학과 강화를 둘러싼 오늘날의 논쟁에도 드리워져 있다. 유전공학에 대한 비판자들은 인간 복제, 강화, 맞춤 아기에 대한 욕구가 “민간화된” 또는 “자유시장의” 우생학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한편 유전공학 옹호자들은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유전학적 선택은 우생학과 다르다고, 적어도 우생학이라는 말에 담긴 경멸적인 의미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응수한다.

 ≫ 강제성이 없는 최근의 한 우생학 정책을 생각해보자. 1980년대에 싱가포르 총리 리콴유는 싱가포르 고학력 여성들의 출산율이 저학력 여성들보다 낮은 상황을 우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처럼 한쪽으로 치우친 출산이 계속된다면 싱가포르는 현재의 국가 수준을 유지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이후 세대에서 “재능 있는 인재가 고갈될 것”을 우려했다.12 그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싱가포르 정부는 대졸 여성들의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기 위한 정책들을 만들었다. 국가가 운영하는 온라인 만남 주선 서비스, 출산하는 대졸 여성을 위한 재정 지원, 대학 커리큘럼에 이성교제 강의 개설, 미혼 대졸자들을 위한 무료 ‘사랑의 유람선’ 사업 등이 그것이다. 이와 동시에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는 저소득층 여성들이 불임수술을 받는 것에 동의하는 경우, 그들에게 저가 아파트의 계약금 4000달러를 지원했다. 싱가포르의 정책은 우생학을 자유시장에 맞는 버전으로 변형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강제로 불임수술을 받게 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 과거 우생학의 문제점은 그것에 수반되는 부담이 사회적 약자와 빈자들에게 지나치게 편중되게 지워져서, 그들만 부당하게 차별과 불임수술을 당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유전적 강화가 주는 이로움과 부담이 모두에게 공정하게 분배된다면 우생학적 조치들을 반대할 이유가 없고, 심지어 윤리적으로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이 이 생명윤리학자들의 주장이다. 


 ≫ 자유주의적 우생학이 개인의 선택을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얼핏 보기와는 다르게 국가의 강요라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자식의 행복을 증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부모의 의무임을 감안할 때, 그러한 강화는 허용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의무적인 것이 된다. 부모가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을 국가가 의무화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안전성이 보장된다면) 유전학 기술로 아이의 IQ를 높이는 것도 의무화할 수 있다. 자유주의적 우생학은 국가가 강제하는 유전공학을 전혀 거부하지 않는다. 다만 유전공학으로 설계되는 아이의 자율성이 존중되기만을 요구할 뿐이다.


주제 정리해서 보기



■ 나의 한마디

 ≫ 그들(7인)은 역사에서 실패로 기록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일제강점기 해방 후 우리는 남북으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민족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 뒤에는 이념적인 갈등과 오래된 피해의식으로 인한 혁명의 꿈이 있었고, 사람이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욕구들 그 중 하나인 권력 욕망이 있었다. 우리는 과거 사람들이 꿈꾸던 이상적인 사회와 지금 꿈꾸는 사회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에서야 사회주의국가와 공산주의국가의 실패가 보이고 있어, 그것에 반대하는 세력이 다수지만, 과거의 삶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거대 자본가들에게서 우리의 삶을 되찾을 수 있는 평등함을 꿈꾼 이상적 사회로 비쳐졌을지 모른다. 나는 지금도 경제적 평등을 꿈꾼다. 분배를 꿈꾸고 증세를 통한 복지국가를 꿈꾸고 있다. 적당한 분배가 결국 경제적 풍요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단순하게만 설명해보자면 '한 사람이 100억을 갖고 있는 것보다, 천 명이 100억을 갖고 있는 것이 돈을 더 잘 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생각 역시 우리 한국사회가 제대로 겪어보지 못했고, 필자가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편향된 생각일지 모른다. 현재의 서구 성공사례를 보며 꿈을 키웠고, 아직 지식이 얕고 경험도 적다. 그리고 실패한다면 먼 미래엔 비웃음을 살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 그들이 추구했던 것과 내가 추구하는 것은 같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행복한 삶일 것이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갈등으로 인해 생긴 이러한 초기 남북분단 갈등엔 경제적 배경을 배제할 수가 없다. 2016년 기준으로 한국의 경제체제는 '신자유주의'다. 1970년대 석유 파동을 기점으로 경제가 침체되고 있는 이유를 국가의 규제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는 그것을 동의했다. 미래를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복지는 축소되었고 노동자는 점차 힘이 약해졌다. 기업의 수익성이 높아지면 국부를 창출하고 결국 개인의 삶이 윤택해질 것이라고 했지만 자본가들은 더욱 자본을 축적하기만 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가난해져가고 있다. 다시금 경제와 돈이라는 힘으로 과거 권력 중심의 사회로 역행하고 있다고 본다. 필자의 경제 방향에 대한 생각은 '사회민주주의'다. 하지만 너무나도 과제가 많고 어려운 길이 많다. 인구수 문제, 고령화 외 수만가지의 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사회 문제에 서고 있다. 저자는 '해방 3년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결정론적 시각'이라고 짚었다. 필자는 초기 한국의 통일에 힘 쓴 민족주의 여운형에 대한 복기를 위해 정리할 예정이다. 궁금한 다른 사람은 책을 직접 읽어보는 것을 권한다.


■ 목차

 1.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 프로젝트|여운형과 조선인민당

 2. 혁명으로 인민정부를 건립하라|박헌영과 조선공산당 

 3. 임정법통이냐, 단정이냐|송진우와 한국민주당

 4. 혁명을 위해 분단의 벽을 쌓다|김일성과 북조선공산당

 5. 단정으로 권력을 꿈꾸다|이승만과 독촉국민회

 6. 임정법통론으로 신민주국가를 건립하라|김구와 한국독립당

 7. 좌우가 공존하는 민족통일국가를 꿈꾸다|김규식과 좌우합작위원회

 8.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


■ 왜 읽었는가?

 ≫ 김구, 김규식, 여운형, 박헌영, 송진우, 김일성, 이승만 7인의 행적이 궁금하여

 ≫ 우리는 왜 민족통일을 하지 못하였는가? 그 이유는 무엇이며 현대사에 반영할 수 있는 참고 지식은 없는지

 ≫ 당시 소련과 미국간의 갈등은 무엇이고, 분단국가가 된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여

 

■ 7인의 정치

 ≫ 해방 후 3년은 7인의 정치가를 대상으로 일제강점 하 3년 동안의 갈등과 행적, 각자가 추구하던 미래를 풀어나간다. 민족주의, 공산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 모두 정치 성향이 달랐고 각자가 꿈꾸던 미래는 달랐다. 아래는 그들을 한 줄로 잘 표현했다.

 ≫ 김구가 꿈꾸던 국가 : 임시정부통론으로 세우는 신민주국가

 

 ≫ 김규식이 꿈꾸던 국가 : 좌우가 공존하는 민족통일국가

 

 ≫ 김일성이 꿈꾸던 국가 :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한 국가, 필요하다면 분단도 해야한다

 

 ≫ 박헌영이 꿈꾸던 국가 : 사회주의혁명을 통해 만든 인민정부

 

 ≫ 송진우가 꿈꾸던 국가 :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만들어져야 한다

 

 ≫ 여운형이 꿈꾸던 국가 :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한 민족 국가

 

 ≫ 이승만 : 권력을 위해서라면 단독정부라도 만들어져야 한다.


■ 당시 한국의 배경과 상황

 ≫ 한국은 38선을 중심으로 미국과 소련의 미,소 양국의 분할 점령이 시작되면서 급격히 변화했다. 특히 남한이 심했는데,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미군들의 주둔이 있었다.

 ≫ 해방 후, 한반도에는 소련군이 진주[각주:1]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소련군 진주가 더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그 이유는 소련군이 8월 8일 대일본 선전포고를 한 이후 빠른 속도로 진격해왔기 때문이다. 일제 당국도 8월 17일까지 서울을 점령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런데 소련군의 진군이 38선 부근에서 멈췄고, 남쪽엔 미군의 진주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국의 정세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좌우익의 시작이었다.

 ≫ 1945년 9월 8일, 미군 제24군이 인천항에 상륙했다. 일본군의 경계 속에 상륙한 미군은 해방군이라기보다는 점령군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이 날 미군을 환영하러 나왔던 한국인 두 명이 사망했다. 미군으로부터 호위경계를 요청받은 일본군이 발포한 것이다. 일본군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는 향후 미군과 한국인들의 관계를 암시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 미군의 진주 초기부터 미군이 한국인보다 일본인의 말을 더 신뢰하고, 일제에 복무했던 관료들과 경찰들, 한국민주당과 극우적 인사들의 말을 더 신뢰했다. 이러한 미군의 태도는 한국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방해가 되었으며 민족 단결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 1945년 12월 7일,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의안에 관한 보도가 나오면서 미국, 영국, 소련, 중국 정부와 협의한 신탁통치안과 임시정부수립이 나왔다. 한국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미국의 입장, 혁명 분위기의 한국에서 임시정부의 수립이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탄생시키기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소련의 입장이 절충된 결과였다. 신탁통치는 신생국가의 기능을 일부 제한하겠지만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 진행되므로 한국인들이 우려하듯 독립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남한의 주요 언론 <동아일보> 언론들은 실제와 달리 미국이 즉시 독립을 주장하고 소련이 신탁통치안을 주장했다고 보도함으로써 마치 신탁통치안이 모스크바 결의안의 전부인 것처럼 보도하며 결의안의 가장 중요한 '임시정부 수립' 결정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이는 반소련, 반공산주의에 입각한 악의적인 왜곡 보도였다.

 

▲ 1946년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

 ≫  1946년 3월 20일, 미, 소 양국이 남북에 각각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면서, 남북 간 대결이 본격화된 것이다. 2월 8일 북한에서 수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2월 14일 남한에서 조직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 미, 소 대결의 실체였다.  미소공동위원회는 모스크바 결의안에 입각해 미, 소 양국이 남북의 주요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해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임시정부 참여하에 4개국 신탁통치협약을 작성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  미소공위는 극심한 대립을 벌였다. 소련 측이 미국 사령관 하지의 성명과 임시정부 수립 후 반탁운동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한 우익들의 태도를 문제 삼고 나섰던 것이다. 미국 측이 제출한 협의 대상 명부도 문제를 일으켰다. 미국 측이 제출한 20개의 정당과 사회단체 가운데 우익은 17개나 된 반면, 좌익은 3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미 · 소 양측의 의견 대립으로 미소공위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결국 5월 9일 미소공위는 무기한 휴회를 선언하고 말았다

 ≫ 국제적 협정의 이행은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두 갈래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하나는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좌우합작운동이었다. 이승만의 주장은 민족통일국가의 수립을 포기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민족이 위기에 처하자 오직 정권의 탈취만을 노리는 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미 · 소가 남북으로 분할 점령하고 있는 현실에서 분단 세력의 등장은 그만큼 조국의 분단이 현실화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만약 이대로 민족의 분열이 극복되지 못한다면 단정 세력은 점점 더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좌우합작운동은 이러한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탄생했다. 그 시작은 중도좌파를 대변하는 여운형이었고, 파트너는 중도우파를 대변하는 김규식이었다. 그러나 합작운동을 방해하는 이는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이 있었다.

 ≫ 미국정부는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을 통해 입법기구 수립이 통과되자, 여운형과의 약속을 어기고 1946년 10월 14일 ~ 10월 31일까지 입법기구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를 강행했다. 선거법에 의하면 보통선거여야 했지만 사실상 세대주가 투표하는 제한선거였고, 일정한 납세액 이상을 납부하는 자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차별선거였다. 게다가 동, 면, 군, 도에 걸친 4단계의 간접선거여서 민주성을 보장받기도 힘들었다. 이를 통해 선거 결과는 이승만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이 각 지방의 선거를 관리하고 각종 탈법과 부정선거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 여운형 : 자주적 민족국가 프로젝트

 ≫ 한국이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었다. 한국의 해방은 연합군의 공로임은 분명하지만, 한국인의 공로도 들어있었다. 우리 민족이 스스로 독립할 자격과 능력이 충분함을 보여줘야 했다. 여운형은 국내 세력이 총 집중해 일제의 식민지 권력을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에 위치한 관저[각주:2]에서 엔도를 만났다. 엔도는 일본의 항복 소식을 알리면서 여운형에게 한국의 치안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여운형은 자신이 치안을 맡는 조건으로 다섯 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1. 조선의 정치범과 경제범을 석방할 것

 2. 서울의 3개월분 식량을 확보할 것

 3. 치안 유지와 건설 사업에 아무런 구속과 간섭을 하지 말 것

 4. 학생의 훈련과 청년의 조직화에 간섭하지 말 것

 5. 조선 내 각 사업장에 있는 일본 노무자들을 우리의 건설 사업에 협력하게 할 것

 

 ≫ 이 5가지의 내용은 자신의 활동이 단순히 치안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란 선언이었다. 여운형은 치안과 함께 한국의 신국가 건설 사업에 착수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다. 엔도는 단순히 치안유지만 원했지만, 여운형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한국인들에게 명망이 높은 여운형이 치안을 맡아주겠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상황이었다.

 ≫ 여운형은 즉시 한국의 치안과 건국 사업을 주도할 조직,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맨 처음 한 일은 한국인 정치범과 경제범의 석방이었다. 그리고 건국치안대와 식량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한국의 치안과 식량 문제에 적극 대처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해방 후 2~3주라는 짧은 시간 동안 치안과 식량 문제 해결에 큰 성과를 냈을 뿐만 아니라, 민족국가 수립이라는 전 민족적 열망을 거대한 흐름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연합국 중에 어느 누구도 우리 민족의 자치 능력을 믿지 않았지만, 한국인들은 건국 준비위원회를 통해 자신의 자치 능력을 세계에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 여운형은 일찍 공산주의를 받아들였지만 그것은 민족해방 운동의 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경제적 평등에 깊이 공감했지만, 계급투쟁이나 전체주의적 운동 방식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진보적 민주주의나 인민적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였다. 하지만 의미까지 같지는 않았다. 여운형은 현재 한국에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혁명의 방식은 공산주의의 계급혁명이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혁명이며,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민의 경제적 해방과 자유, 평등의 이념을 확대하고자 했다는 측면에서 여운형의 민주주의는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와 유사했다.

 ≫ 여운형은 겅제적 측면에서 주요 산업 시설의 국유화와 토지 문제의 수평적 해결을 통해 봉건 잔재의 청산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는 주요 산업 시설 이외에는 사적 소유를 인정해 개인적 창의와 이윤 추구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발전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토지개혁으로 토지를 잃은 지주에 대해서도 충분한 생계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 한국은 두 가지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상당한 기간 동안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유지해야 했다. 낙후된 농업국에서 고도의 공업국으로 빠른 발전을 도모하려면 신국가의 독립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연합국의 경제적 원조가 필요하며, 계획경제를 수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 여운형은 민족해방을 완수하고 신국가를 건설하는 데 좌우익의 구별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민족통일전선에서 제외되는 것은 반민족 세력이면 족하다고 믿었다.

 ≫ 건국준비위원회에 들어오려던 우익들이 갑자기 불참을 시작했다. 이유는 미군의 진주 소식 때문이었다. 굳이 좌익들이 자리잡고 있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정치 세력화가 가능했다고 판단했다. 9월 1일 조선국민당 16일 한국민주당 등 우익 정당이 결성되었다. 미군의 진주 소식과 함께 여운형은 계획했던 인민대표회의를 현실화 해 전국인민대표자대회의를 열었다. 미군 진주 이전에 과도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수립을 서둘렀다. 정부 수립을 서두르려고 건국준비위원회 관계자와 재건파 공산당, 일부 연락이 가능한 지방 대표들로 채워지는 데 그쳤다. 이로 인해 조선인민공화국은 심각한 대표성 논란에 휩싸였다. 조선인민공화국은 전체가 아니라 일부만을 대표하는 정부가 되었다.

 ≫ 미군은 조선총독부를 대신해 미군정청을 설립하고 이것이 남한의 유일한 정부임을 천명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남한에서 가장 잘 조직되고 영향력있었으나 미군정부는 조선인민공화국을 '정부를 사칭하는 일개 괴뢰정당'으로 취급했다. 여운형의 취급도 마찬가지였다. 미군 사령관 하지는 여운형을 일제의 돈을 받아 정권을 가로챈 친일 사기꾼인 양 취급했다. 그 이유는 미군정 주변 통역사와 고문으로 활약하던 극우 인사들과 한국민주당의 악선전이 작용한 결과였다. 미군이 조선인민공화국을 탄압할수록 그 안에는 탄압에 잘 훈련된 공산주의자들만이 남게 되었다. 결국 박헌영의 공산당파는 이를 중심으로 인민공화국의 중앙과 지방을 모두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박헌영은 정치적으로 최고의 수혜자가 되었다.

 ≫ 여운형이 민족의 역량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사이, 경쟁자들은 이미 조선공산당, 한국민주당 등 하며 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세력의 결집보다 민족의 단결을 우선시했던 여운형은 이 사태에 절망했다.

 ≫ 1945년 10월 5일, 주요 정당들이 만났고, 좌익과 우익 세력들은 각각 인민공화국과 중경의 임시정부를 내세우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논의를 전개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여운형은 달랐다. 그는 민족의 통합을 위해서라면 당장이라도 인민공화국을 해산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여운형의 발언으로 분위기는 급반전했다. 그 결과 10월 10일 '각정당통일위원회'라는 상설회의체가 탄생했다. 이곳의 정당과 단체는 43개에 달했는데 38선 문제와 일본인 재산 문제 등의 긴급 문제를 논의하며 민족의 대동단결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대변했다. 그러나 10월 16일 이 위원회는 힘을 잃었다. 이승만이 귀국한 것이다. 이후 이 임무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로 전환되었고, 이승만에게 모두 넘겼다. 이후 이승만은 독선적이고 편파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결국 여운형과 박헌영은 독립촉정중앙협의회를 탈퇴했다.

 ≫ 1946년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한 휴회되자, 이승만은 단독정부를 주장, 여운형은 좌우합작운동을 벌였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하며 좌우 남북을 묶는 전달자 역할을 자임했다. 특히 그는 주요 정세의 변화 때마다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해 김일성(1912~1994)을 비롯한 북한 지도자들과 협의해왔기 때문에 북한과의 협상에 자신이 있었다.

 ≫ 미군정부는 좌우합작위원회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는데, 그 까닭은, 미군정부가 만든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 남한 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했고 우편향적 성격으로 협상 자리에서도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것도 있었으며 중도 세력까지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통해 1946년 7월 여운형과 김규식의 노력으로 좌우합작운동은 정당 · 사회단체 간 연석협의체로 발전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좌우익은 각각 5명씩 좌우합작위원 10인을 선출되었다. 그러나 박헌영은 우익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들을 제시해 좌우합작을 방해했다. 이는 사실상 민족통일전선을 부정하고 좌우합작을 깨뜨리겠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8월 3일, 이를 타파하기 위해 조선공산당, 인민당, 조선신민당을 하나의 대중정당으로 통합하는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은 인민당과 조선신민당에 침투해 있던 공산당 프락치를 동원해 양당을 흔들었다. 공산당 프락치들은 무조건적 합당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이는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여운형은 크게 분노했다. 그는 박헌영의 민족 분열적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좌우합작의 주요 축 하나인 세력이 반대하는 한, 여운형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 여운형은 다시 좌우합작 좌익의 5원칙과 우익의 8원칙을 절충한 7원칙을 발표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한 삼상회의 결정에 의해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2. 미국,소련 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 것.

 3. 토지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 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며 시가지의 기지 및 대건물을 적정 처리하며 주요 산업을 국유화해 사회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현하며 통화 및 민생문제 등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4.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에서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입법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해 실시케 할 것.

 5. 남북을 통해 현 정권하에서 검거된 정치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의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6. 입법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 방법, 운영 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해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7. 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결사, 출판, 교통, 투표 등의 자유가 절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 그러나 좌우합작 7원칙은 좌우익 양측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좌익에게 문제가 된 것은 입법기구 설치 조항이었고, 우익에게 문제가 된 것은 토지개혁 조항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입법기구 설치 조항이 단정으로 가는 도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운형 측을 극도로 비난했다.

 

 ≫ 김규식과 여운형은 7원칙에 서명하면서 과도입법기구 수립의 조건으로 세 가지 전제 조건을 내세웠다. 이와 함께 그들은 미군정으로부터 몇 가지 조건을 보장받았다.

 1. 좌우합작위원회가 입법기구 의원 2분의 1을 추천할 권한

 2. 간접선거로 치러질 의원선거에서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는 대의원이 될 수 없다.

 3. 간접선거 방식에서 민주주의 보장 약속이나 선거 감시원의 파견, 빠른 시일 내에 직접선거에 의한 입법기구로 대체할 것.

 

 ≫ 여운형과 김규식은 입법기구가 미군정의 자문기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한국인의 자치기구가 되기를 원했다. 과도입법기구가 좌우를 대변하는 한국인의 진정한 자치기구가 되면 이를 기반으로 미소공위를 재개해 임시정부 수립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군정부는 7원칙이 통과되는 순간 좌우합작위원회를 배신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입법기구 수립 조항이었을 뿐, 좌우합작위원회가 내세운 전제 조건이나 요구 조건이 아니었다.

 ≫ 미군정부는 1946년 10월 14일 ~ 10월 31일까지 입법기구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를 강행했다. 선거법에 의하면 보통선거여야 했지만 사실상 세대주가 투표하는 제한선거였고, 일정한 납세액 이상을 납부하는 자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차별선거였다. 게다가 동, 면, 군, 도에 걸친 4단계의 간접선거여서 민주성을 보장받기도 힘들었다. 이를 통해 선거 결과는 이승만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이 각 지방의 선거를 관리하고 각종 탈법과 부정선거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 여운형은 입법기구 설립을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미군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여운형은 12월 12일 개원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참가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배신자의 딱지를 가지게 되었고 그의 정치적 위상은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을 만큼 추락했고 우파와 좌파 모두에게 배척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결국 여운형은 12월 4일 전격적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 여운형 암살

 

 ≫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혜화동 로터리에 들어설 무렵, 파출소 앞에 있던 경찰 차 한 대가 갑자기 차를 막아섰다. 충돌을 피하려고 차가 속도를 줄이는 순간 한 사내가 뒤쪽 범퍼로 뛰어올라 세 발의 총을 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경호원 박성복이 도망가는 사내를 뒤쫓았지만, 모퉁이에서 제지당하고 말았다. 그를 막은 사람은 동대문경찰서 소속의 한 경찰이었다. 범인은 사라졌다.

 ≫ 사건의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미국 소련 공동위원회를 통해 확대된 여운형의 정치적 영향력을 두려워했던 세력이 암살한 범인의 배후라고 추측할 뿐이다. 사건이 발생하자 미군정부는 여운형의 집을 수색했다. 그런데 수색 목적은 암살범을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북한과 연락해본 자료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한의 대정객 여운형에 대한 미군정부의 마지막 대접은 겨우 그 정도였다.

 ≫ 여운형의 죽음과 함께 민족통일국가의 꿈도 종말을 맞았다.

 

 

 

■ 여운형 요약

 ≫ 일본은 여운형에게 치안을 요구했으나, 한국을 위해 일본에게서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 정치범, 경제범을 석방하고 식량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치안과 식량문제에 대처했다.

 ≫ 여운형은 공산주의적 발언을 했었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공산주의자의 경제적 평등은 공감했으나, 그가 꿈꾸던 사회는 선거가 있는 민주주의 사회였다.

 ≫ 여운형은 주요 산업 시설만을 대상으로 봉건 잔재 청산을 제시했다. 다른 산업시설은 자본주의적 발전을 원했다. 그리고 토지를 잃은 지주에겐 생계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 미군 진주 소식이 일자, 여운형은 정부가 미리 존재하는 것이 정치에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정부 수립을 다급히했다. 그렇게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급히 만든 정부는 전체가 아닌 일부만을 대표하는 정부였다. 남한에 도착한 미군은 미군정청만이 유일한 정부라고 주장했다.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은 미군 진주로 해체되었다. 여운형이 만든 조선인민공화국은 괴뢰정당 취급받았다. 조선인민공화국은 이로 인해 여운형에서 박헌영쪽으로 세력이 기울었고 공산주의로 변질되었다. 여운형은 박헌영에게 잠식당한 인민공화국에 거리를 두면서 독자적인 세력화를 꿈꿨다.

 ≫ 1946년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한 휴회되자, 이승만은 단독정부를 주장, 여운형은 통일을 위한 좌우합작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박헌영이 이를 방해했다.

 ≫ 8월 3일, 이를 타파하기 위해 조선공산당, 인민당, 조선신민당을 하나의 대중정당으로 통합하는 것을 제안했다.

 ≫ 여운형과 김규식은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고, 미국으로부터 입법기구 2분의 1을 약속받았고, 반대파를 무릅쓰고 승인하였으나 미군정부는 이를 어겼다. 그로 인해 여운형은 배신자 딱지를 가지게 되었고, 1946년 12월 4일 정계를 은퇴했다.

 ≫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혜화동 로터리,  파출소 앞에서 여운형은 암살당했다.

 


  1. 진주 : 군대가 처들어가거나 파견되어 주둔함. [본문으로]
  2. 관저 : 정부에서 장관급 이상의 고관들이 살도록 마련한 집.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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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한마디

 ≫ 아인슈타인, 그는 암기식, 주입식 교육을 싫어했다. 아인슈타인에 대한 책은 창의적 교육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예가 아닐까 싶다. 그의 이러한 창의적 재능은 스위스 교육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한국도 함께 본 받았으면 좋겠다. 암기식/주입식 교육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단기적인 효과가 클 뿐 나이가 들어서는 다시 외워야한다는 점일 것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를 회상해보면, 어릴 때 주입식/암기식 교육에 지쳐 공부를 안 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릴 때 그렇게 싫어했던 사회와 역사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 그 때의 교육이 시험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고, 내가 나이가 먹어서도 수학과 영어 정도가 필요할 뿐 사회에서는 필요없다는 어린 지식을 바탕으로 공부했던 듯 싶다. 그 이후로 나이가 점차 들면서 실제 사회에 나와 사회와 정치, 역사에 관련 없는 일을 하고 있지만서도 이렇게 블로그로 포스팅하고 그에 대한 책을 읽고 문학을 감상하는 내 자신을 돌이켜보면, 어릴 때 좀 더 재밌게 공부했다면 나라는 사람이 좀 더 바뀌었을까 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 목차

 1. 지진아 혹은 천재

 2.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우등생이 될 자질이 없다.

 3. 특허국

 4. 기적의 해

 5. 빛은 휘어진다

 6. 망명

 7. 제2차 세계대전


■ 왜 읽었는가?

 ≫ 위대한 과학자로 알려진 아인슈타인, 하지만 정작 스스로 알고 있는 부분이 없기에

 ≫ 핵 개발 및 원자폭탄을 만든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자. 인물에 대한 지식 습득.

 ≫ 1, 2차 세계대전에 대한 필자의 관심으로 인해


■ 내 마음대로 책 내용 3줄 요약

 ≫ 아인슈타인은 철학자가 되고 싶었했고, 어린 나이부터 똑똑했지만 주입식 암기식 공부를 싫어했고 관심있는 분야만 공부했다.

 ≫ 아인슈타인은 혼자서 만들어진 사람이 아니였다. 처음부터 환경이 좋진 않았지만 그의 환경은 토론할 수 있는,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지인이 함께였다.

 ≫ 1905년 아인슈타인에 의해 원자와 분자의 존재가 밝혀지고, 광전기를 발견하여 레이저와 TV의 기초가 되며 상대성 이론을 통해 핵 분열 기술이 개발된다.


■ 아인슈타인의 생애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879년 3월 14일, 독일 남부의 소도시 울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헤르만 아인슈타인과 어머니 파울리네 코흐는 유대인이었지만, 두세 세대를 거치는 동안 독일에 동화되어 유대계적 문화나 관습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 헤르만은 수학에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이었고, 당시 독일의 반유대주의적 정서로 인해 대학 입학 허가를 받지 못하여 상공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유년 시절 학교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놀림을 받았는데, 그때 처음 자신이 이질적 존재임을 느꼈다고 한다. 이런 일에 외톨이적 기질이 더해져 아인슈타인은 평생 이방인으로 살아간다. 

 ≫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 매우 조용한 아이였다. 시끌벅적한 사촌들 틈에서 늘 조용한 자리를 찾아가 혼자 노는 외톨이였다. 또한 두 살이 지나서야 간신히 말을 시작했고, 다섯 살이 되어서야 말을 깨쳤을 만큼 늦된 아이였다. 부모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지진아’로 여겼는데, 하녀들도 마찬가지여서 그를 ‘멍청한 아이’라는 의미의 ‘데페르테(depperte)’라고 부르곤 했다. 어린 아인슈타인은 크게 주눅이 들어서 무슨 말인가를 하기 전에 꼭 여러 번 모든 할 말을 연습하고 입 밖에 내곤 했다. 훗날 위대한 과학자가 된 이후에도 그는 입 속으로 여러 번 말을 반복해보고 말하거나, 중요하거나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는 반드시 두세 번씩 반복해 말했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쉽게 성을 내고 잘 토라지곤 했는데, 화가 날 때면 얼굴이 하얗게 질려 손에 잡히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던졌다. 다섯 살 때는 가정교사에게 의자를 던져서 가정교사가 놀라 달아난 적도 있었다

 ≫ 그가 과학자로서 성장하는 데 첫 번째 토대가 되는 중요한 경험, 처음으로 느낀 자연의 경이로움은 너댓 살 무렵에 찾아왔다. 잔병치레 때문에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아버지가 가지고 놀 ‘특별한 장난감’ 하나를 쥐여 준 것이다. 그 물건은 나침반이었다. 그때까지 아인슈타인은 물건을 만지거나 접촉해야 물건이 움직인다고 믿었는데, 나침반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움직여도 결국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늘 한 방향으로 돌아오는 나침반 바늘은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안겨주었다.

 ≫ 어린 시절 늦되었다는 일화들 때문인지, 아인슈타인에 대해서는 낙제생에서 천재 과학자가 되었다는 신화가 흔하게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여섯 살 때 가톨릭계 학교인 페테르슐레에 입학했다. 학업 성적이 특출하지는 않았지만 과학과 수학만은 매우 우수했다. 성적이 나쁜 과목은 그가 전혀 관심 없는 분야인 데다, 주입식, 암기식 교육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하나하나 문제를 차분히 생각하고, 그에 대해 답을 하기 전에 곱씹는 버릇이 있던 어린 아인슈타인에게 주입식 교육은 곤혹스러웠을 뿐이었다. 반면 수학이나 과학 교과서의 내용을 탐색하고 증명하는 데는 크게 흥미를 느꼈다. 초등교육 시절부터 그는 단순히 교과서적 증명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증명법을 찾으려고 늘 생각했다. 친구들과 놀러 나가지도 않고 온종일 방 안에서 답이 나올 때까지 자신이 만든 증명을 입증하는 데 몰두했다.

 ≫ 독일 남부 지방에서는 목요일에 가난한 유대인 이웃을 초대하여 저녁을 대접하는 전통이 있었다. 탈무트는 그 전통에 따라 목요일마다 아인슈타인의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과학 책을 가져다주고, 당시로서는 현대적인 책에 수록된 여러 과학적 증명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탈무트가 가져다준 책 중 특히 아인슈타인을 사로잡은 책은 기하학 책이었다. 고작 열두 살의 어린 아인슈타인은 유클리드의 평면기하가 소개된 작은 책자를 밤낮으로 읽고 또 읽으며 성경처럼 소중히 여겼다. 탈무트는 아인슈타인이 수학과 과학 문제들을 하나씩 통달해 나가자, 다음으로는 칸트, 흄, 에른스트 마흐 등의 철학 책들을 가져다주었다. 아인슈타인은 그중에서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좋아했는데, 그의 철학적 사고의 기반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아인슈타인은 학업을 마치기 위해 뮌헨에 혼자 남아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권위적인 교사, 구속받는 생활을 싫어하는 그에게 기숙사 생활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무렵에는 주입식 교육에 완전히 진저리를 내서, 학업에 대한 흥미조차 잃었다. 거기에다 열일곱 살이 되면 군대에 가야 했다. 군대라면 끔찍하게 여겼던 그로서는 한 달 한 달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공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들은 하사관 같고 고등학교 교사들은 하급 장교들 같다.”며 싫어했다. 결국 그는 그해 여름에 의사에게 신경쇠약 직전이라는 진단서를 받아내고 가족이 있는 밀라노로 도망쳤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퇴학당했다고 말했지만, 가족은 그가 스스로 학교를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 곳에도 적을 두지 않고 1년여를 빈둥대며 지냈다. 아버지는 고교 중퇴자인 아들의 미래를 걱정했다. 실용적인 직업을 얻으라고 설득했지만 아인슈타인은 철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 아라우 주립학교에서 청년시절 아인슈타인

 ≫ 아인슈타인은 아버지와의 타협 끝에 1년간 아라우 주립학교에서 고교 과정을 마쳤다. 스위스 학교의 수업은 독일 학교와 여러 모로 달랐다. 그는 아라우 주립학교의 자유로운 정신, 권위에 기대지 않는 교사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잃어버린 학문에 대한 호기심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느긋한 스위스식 방식을 사랑하게 되었다. 과학자로서 그에게 큰 업적을 달성하게 할 사고실험도 이 시기에 체득했다. 최초의 논문 <자기장에서 에테르의 상태에 관한 연구에 대하여>도 이 무렵에 썼다. 그러나 여전히 관심 없던 화학, 프랑스어, 생물학 등의 성적은 매우 나빴다. 그럼에도 그는 2등으로 아라우 주립학교를 졸업하고, 1896년 10월 취리히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또한 1896년 1월, 독일 국적을 포기했고, 5년간 무국적자로 지낸 후에 스위스 국적을 취득한다. 취리히 공과대학에서 아인슈타인은 수학과 물리학 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했다. 취리히 공과대학은 당시 세계적으로 명망 높은 기술대학이었다. 학교와 교사의 권위에 대항하는 아인슈타인의 성격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나타났다. 그는 정규 교육 과정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수업에도 자주 불참했다. 이론적인 수업을 중심으로 하는 수학은 입학 초기에 거의 포기했다.
 ≫ 아인슈타인이 처음 얻은 자리는 말단 사무직인 기술심사원이었다. 특허국은 오히려 그가 연구하기에 충분한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일단 초봉이 3,500프랑이었는데, 이것은 당시 취리히 공과대학에 조교로 취직했을 때의 연봉보다 많았다. 또한 이 자리는 각종 기계 장치의 특허들을 심사하는 자리였다. 당시 기술 발전의 흐름을 가장 빨리 대면하기에 적합한 자리였던 것이다. 그는 각종 기계장치들을 사고실험을 통해 구동해보면서 사고실험 능력을 발달시켰다. 상사인 할러로부터 ‘지극히 신중한 태도’로 연구자들이 제출한 서류 하나하나를 꼼꼼히, 회의적인 태도로 바라보는 태도를 배우기도 했다. 업무가 과중하지 않아서 정시에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물리학과 자신의 논문에 대해 숙고할 시간도 충분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시절에 자신의 자리에 만족했으며, 후일 이 자리를 “내가 가장 아름다운 아이디어를 깨치게 된 세계적인 수도원”이라고 일컬었다. 특허국 직원이던 베소와의 우정 역시 그의 사고를 풍부하게 해주었다. 아인슈타인은 당시 그가 쓰던 논문에 대해 공학도 출신인 베소와 수많은 토론을 했다. 베소는 아인슈타인의 논리적 오류를 되짚어주기도 하고 다른 관점을 제시해주기도 했다. 그는 훌륭한 과학 토론 상대이기도 했으며, 음악을 좋아하던 아인슈타인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 아인슈타인의 논문, 뉴턴 논리를 깨다.

 ≫ 1905년은 과학사에서 ‘기적의 해’라고 일컬어진다. 이 해에 아인슈타인은 과학계를 뒤흔들 세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17세기 중반 이후 과학은 뉴턴의 세계관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19세기 들어 과학자들은 뉴턴의 운동 이론만으로 설명하기 힘든 현상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의 세 논문은 기존 고전 물리학의 토대, 즉 뉴턴의 세계관을 부정하고 새로운 물리학적 토대를 세움으로써 이런 의문점들을 해소했다. 아인슈타인의 이 논문들은 고전 물리학의 시대를 벗어나 현대 물리학의 시대를 여는 토대가 된다.


 ≫ 첫 번째 논문 <정지 액체 속에 떠 있는 소립자의 운동에 대하여>는 브라운 운동의 원인에 관한 것이다. 브라운 운동이란 물 위에 떠 있는 꽃가루나 공기 속의 연기 티끌 같은 작은 입자들이 끊임없이 진동하고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일컫는다. 지금이야 원자와 분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일반인들도 알고 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원자의 존재는 논란거리였다. 아인슈타인은 액체나 기체 주위에 있는 보이지 않는 분자들에 의해 이런 소립자들이 움직인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또한 입자들의 움직임을 측정하여 분자의 질량과 수를 계산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 논문을 발표하고 몇 달 후, 독일의 실험물리학자 헨리 자이덴토프가 현미경을 통해 원자와 분자의 존재를 증명했다.


 ≫ 두 번째 논문 <빛의 발생과 변화에 관련된 발견에 도움이 되는 견해에 대하여>는 당대 또 다른 난제인 광전기에 관한 것이다. 뉴턴은 빛이 미립자라는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으며, 이를 통해 빛의 굴절 현상, 광선의 반사 법칙 등을 설명했다. 하지만 뉴턴 역시 이 이론만으로 빛과 관계된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것은 19세기의 과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빛이 파동이냐, 입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과학자들은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빛이 파동의 성질을 지닌 동시에 작은 알갱이, 즉 양자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이 개별 양자(광양자) 이론을 통해 물질이 빛을 흡수했을 때 광전자(光電子)가 생기는 현상, 즉 빛을 비추었을 때 몇몇 고체가 전자를 방출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졌다. 이 이론은 오늘날 TV와 레이저, 태양전지 등 다양한 전기 장치가 개발되는 토대가 된다. 또한 이 논문은 1921년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다.


 ≫ 세 번째 논문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 역학에 대하여>가 바로 그 유명한 상대성 이론이 담긴 논문이다. 이때의 논문은 상대성 이론의 초안 격으로, 그해 발표된 질량과 에너지에 관한 짧은 논문과 함께 ‘특수 상대성 이론’이라고 불린다. 그 전까지 물리학 세계는 뉴턴의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의 법칙으로 설명되었다. 즉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고 본래적이며, 외부의 어떤 것에도 영향 받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이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을 부정했다. 그는 시간과 물체의 운동은 관찰자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가정했다. 즉, 관측하는 사람이 움직이는 속도에 따라 빛이 전달되는 시간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질량과 에너지에 관한 논문 <물체의 관성은 에너지 함량에 따라 달라지는가>는 3쪽짜리 논문이다. 뉴턴의 세계관에서 에너지와 질량은 서로 무관한 것이었다. 즉, 에너지 보존 법칙과 질량 보존의 법칙은 별개의 것이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질량과 에너지가 등가이며, 서로 교환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물체의 질량이 에너지로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논문에서 특수상대성 이론을 바탕으로 변환인자(C²)를 사용하여 에너지와 질량이라는 서로 다른 단위의 물리량이 등가임을 보여주었다. 즉 에너지의 양은 물체의 질량에 빛의 속도를 곱한 값(이것이 그 유명한 공식 E=MC²다)이라는 것이다. 이 개념은 물질 자체에서 큰 힘을 얻어내는 원자폭탄 개발의 기초가 된다. 26살의 청년이 쓴 논문들, 특히 상대성 이론에 관한 논문들은 이때까지의 세계관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았다. 때문에 이 논문들은 처음에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취리히 공과대학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논문을 반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막스 플랑크 등의 몇몇 저명 물리학자들이 그의 이론을 알아보고 지지했다. 그리고 실험 물리학자들에 의해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점차 입증되기 시작하면서, 몇 년 후 아인슈타인은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과학자가 된다.

■ 특수상대성 이론을 넘어선 일반상대성 이론. 빛은 휘어진다

 ≫ 1916년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다. 1905년의 상대성 이론은 우주 공간에서의 현상 및 등속운동에 대한 것으로, 제한적인 설명이라 ‘특수’상대성 이론이라고 불렸다. 1916년의 논문은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이라는 이전의 개념을 보강하고 확장시킨 것으로, 시공간과 물질 간의 관계 및 이 둘을 연결하는 중력의 상호작용에 관한 것이다. 블랙홀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독창적인 다우주론을 제기한 물리학자 존 휠러는 상대성 이론에 대해 “물질은 시공간이 어떻게 휠지를 말해주고, 시공간은 물질이 어떻게 움직일지 말해준다.”고 한마디로 요약했다. 일반상대성 이론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중력에 의해 시공간이 휘어진다는 것이다. 즉 물질의 존재가 주변 공간을 변형시켜 중력장을 만든다는 이론으로, 아인슈타인은 태양을 지나는 별빛이 일정한 각도로 휘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때까지는 뉴턴식 설명에 따라 빛이 직선으로만 나아간다고 여겨졌다. 이 논문은 아인슈타인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이 논문을 구상하고 나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중력 이론을 설명할 수학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친구 그로스만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로스만은 자기보다 기하학에 전문적 지식을 갖춘 수학자 리만을 소개해주었다. 리만의 곡률 방정식을 토대로 아인슈타인은 집요할 정도로 상세하게 자신의 이론을 구축했다. 


■ 특수상대성 이론을 넘어선 일반상대성 이론. 현대 우주 이론의 시발점

 ≫ 일반상대성 이론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세계가 전쟁의 포화 속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 전역에서 군국주의적 가치가 솟아올랐고, 과학자들 역시 불타는 애국심으로 전쟁 무기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는 동료 과학자들이 국수주의자가 되어 전쟁에 뛰어드는 상황에 크게 놀라고 실망했다. 독일 내 지식인들은 심지어 독일이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하고, 평범한 시민을 공격한 사실 관계를 부정하고, 독일의 군국주의가 독일 민족 문화를 유지하게 했다는 선언을 하기까지에 이른다. 이 선언은 독일 정치 지도부의 주도 아래 93명의 독일 지식인들이 서명했다고 하여 ‘93 선언문’이라고 불린다. 아인슈타인은 여기에 반대하여, 과학자들은 세계주의자가 되어야 하며 유럽 학자들은 빨리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호소문을 작성했다. 또한 괴테 연맹을 통해 ‘전쟁에 대한 의견’을 발표했다. 그는 애국주의란 “야만적인 증오와 대량 학살”을 정당화하는 도덕적 요소이며, 이런 야만성은 남성들이 지닌 성적 본성에 따른 것이라고 썼다. 그리고 이런 공격성을 통제하기 위해 세계기구를 창설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당대 수많은 유럽 지식인들이 그랬듯 전쟁은 아인슈타인에게 인간성에 대한 회의를 품게 했다.

 ≫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다. 1919년 5월 29일에는 영국의 아서 에딩턴이 개기일식 관찰을 통해 빛이 휘어지는 현상을 입증했다. 일반상대성 이론이 입증된 것이었다. 영국과 독일은 전쟁 중이었지만, 영국 과학자들 및 언론들은 이 일을 “인간 사고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과”로 인정했다. 이런 극적인 상황은 평소 아인슈타인이 주장하던 세계주의와도 부합했다. 물리학자 레오폴트 인펠트는 “서로 싸우던 나라의 과학자들이 협력하다.”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높아졌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과학의 혁명: 새로운 우주 이론. 뉴턴 이론이 뒤집어지다”라는 기사를 내보냈고, <뉴욕 타임스>는 “하늘에서 빛이 휘어지다: 아인슈타인 이론의 승리”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후 일반상대성 이론에 기초하여 현대 우주 이론이 발전하게 된다.
 ≫ 1920년대에 상대성 이론의 혁명성으로 인해 아인슈타인은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아인슈타인은 영국, 미국 등지에서 수많은 초청 강연을 치르면서 인기를 실감했다. 어느 나라에서나 그를 국빈 대우했으며, 그가 저버렸던 독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독일 시민권을 포기했음에도 독일은 그를 자국민으로 여겼고, 베를린 아카데미 활동을 그의 가장 중심적인 활동이 되게 하려고 했다.

■ 아인슈타인의 강의 일화

 ≫ 1908년에야 아인슈타인은 베른 대학의 객원 강사 자리를 얻었으며, 이듬해에는 취리히 공과대학 부교수 자리를 얻었다. 취리히 공과대학의 부교수 자리는 당초 친구인 프리드리히 아들러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논문이 지닌 가치를 알아본 아들러는 자신 대신 그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그럼에도 아인슈타인이 교수가 되는 데는 두 가지 장애물이 있었다. 그 자신도 인정했듯 그가 강의를 썩 잘하는 편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상사인 정교수 클라이너는 그를 교수로 채용하기 전에 베른 대학 강의를 청강했다. 아인슈타인은 강의 내용을 미리 준비하는 유형이 아니었다. 그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대로, 논리적 흐름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기 머릿속 사고에 따라서 강의했다. 여기에다 웅얼거리는 말투까지 더해진 아인슈타인의 강의는 마치 독백 연극 같았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자치고는 수학을 잘하지 못했다. 수학적 설명을 하다가 증명을 잘못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복잡한 문제를 풀다가 잠시 멍하니 다른 이야기를 주절거리면서 생각을 마친 끝에 다시 원래의 문제로 돌아오기도 했다. 학생들은 아인슈타인의 강의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재미있게도, 훗날 그가 명성을 얻게 되자 이런 강의 태도까지 매력적 요소로 탈바꿈했다. 학생들은 아인슈타인의 말을 따라잡기 위해 더욱 열심히 귀를 기울였고, 그전까지 비난 요소가 되었던 수학적 실수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 유대인 혐오로 인한 아인슈타인, 미국으로의 망명

 ≫ 아인슈타인의 이름은 과학 분야에서 하나의 권위가 되었다. 하지만 1920년대만 해도 이런 명성에 비례하여 상대성 이론이 허무맹랑하고 공허한 이론이라는 반격들도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특히 독일의 경우 아인슈타인을 전적으로 환영하는 것만도 아니었다. 전쟁 패배와 그 이후에 이어진 정치적, 경제적 혼란들로 인해 독일에서는 국수주의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반유대주의가 다시 기승을 부렸고, 아인슈타인은 매우 좋은 표적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전쟁 기간 동안 독일의 군국주의를 비판한 데다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상대성 이론이 적국인 영국에서 먼저 입증되었다는 것 때문에 배타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과학자들 중에서도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유대인 물리학이라면서 수용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반 아인슈타인 운동에 대해 비이성적이라고 하는 과학자들도 물론 존재했다. 1920년 8월 25일에는 베를린 홀에서 상대성이론과 아인슈타인에 대해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가 일어나기도 했다.

 ≫ 그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베를린의 분위기와 자신을 환영하는 미국의 분위기에 크게 이질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세계주의 및 시오니즘을 더욱 지지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아인슈타인이 대면한 유대인들은 대개 유럽의 중산층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그는 가난한 유대인들을 처음 목격했다. 이 일로 그는 전 세계에 퍼진 가난하고 고통받는 유대인들에 대해 인지하게 되었다.

 ≫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반유대주의는 아인슈타인의 목숨을 위협할 수준으로 발전한다. 독일에서는 나치당이 급격히 세력을 확장해나갔고, 세계는 2차 세계대전으로 치달았다. 독일 내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민족주의,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1933년에는 아인슈타인이 50세 생일을 기념하여 지었던 카푸스의 여름 별장이 무장 폭도들의 습격을 받았다.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 앞에서는 상대성 이론에 관한 책을 불태워버린 일도 있었다. 나치가 의회 다수당이 되고, 히틀러가 총통으로 등극하면서 상황은 더욱 좋지 않게 흘러갔다. 나치는 아인슈타인의 재산을 압류하고 은행계좌를 폐쇄했으며, 아인슈타인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베를린 아카데미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반정부 선전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그를 제명했다. 아인슈타인이 망명지로 선택한 곳은 그를 받아준 프린스턴 대학원이 있는 곳, 미국이었다. 당시만 해도 과학의 변방이었던 미국으로, 아인슈타인처럼 많은 망명 과학자들이 몰려들었다. 미국 과학계와 정부, 언론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물론 그중에서 언론 노출이 가장 많은 인물은 아인슈타인이었다


■ 제 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핵 전쟁 우려

 ≫ 1930년 말, 세계는 제 2차 세계대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군국주의와 군대를 극히 싫어했으며,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자였다. 그런 그 역시도 전쟁으로 인한 참상들을 목격하면서 군대의 필요성을 수긍하게 되었다. 그는 전쟁 시에 자국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막강한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무렵, 자신의 이론이 소량의 라듐에서 많은 양의 에너지가 방출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이것은 원자핵에 갇힌 에너지를 인위적으로 방출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겠다는 생각, 즉 원자폭탄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는 당초 화력 발전을 대체할 원자력 발전 시대를 그리면서 이 아이디어를 떠올렸는데, 그러면서도 이것이 원자폭탄이라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또한 원자폭탄이 엄청난 살상 무기를 넘어서서 핵전쟁을 유발할 가능성도 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그는 원자폭탄이 자기 생애 동안 개발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이런 아인슈타인의 태도와 상관없이 세계는 원폭 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다. 1938년 독일이 우라늄 연쇄반응에 성공하면서 원자폭탄 개발 가능성은 유럽 각국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었다. 그럼에도 아인슈타인은 1939년까지 “지금까지의 결과가 원자력 에너지의 실용적인 이용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뉴욕 타임스>에 기고했을 정도로 이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핵에너지 이용과 관련된 연구는 착착 성공을 거두었고, 유럽 각국은 원자폭탄 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다. 영국은 아인슈타인이 구상한 핵에너지 개발안을 실제로 세부사항까지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고 관망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전쟁터가 아닌 미국에서조차 과학자들은 독일이 원자폭탄을 최초로 개발하여 침공할 것을 우려했다 .
 ≫ 미국 정부는 처음에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다가,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원폭 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다. 미 정부는 영국이 독일의 침공 위협 속에 포기했던 원자폭탄 개발 구상과 관련된 정보를 모두 받아냈다. 그리고 1942년 9월 오펜하이머를 필두로 하여 3천여 명의 과학자들을 규합해 맨해튼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원자폭탄 개발 계획을 비밀리에 착수했다. 그 결과 1945년 8월 두 개의 원자폭탄이 일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종전을 맞았다. 아인슈타인이 경고했던 원자폭탄의 무시무시한 기능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뉴욕 사라낙 호수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비서 헬렌 두카스는 라디오를 통해 이 소식을 듣고 아인슈타인에게 알렸다. 일본은 노벨상 수상 당시 아인슈타인을 매우 따뜻하게 환영함으로써 그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긴 나라였다. 그는 매우 비통해했다. 그는 원자폭탄 제조 계획에 실질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으며, 그 계획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계속 회의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원자폭탄 구상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론에서 탄생한 것이었기에, 그는 큰 책임감을 느꼈다. “그날은 내게도 슬픈 날이었다. 내게도 책임이 있다.” 아인슈타인은 원자폭탄의 위력을 목도하고, 핵전쟁 가능성을 다시 떠올렸다. 그는 핵이 전 세계를 파괴하리라고 여겼다.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전쟁이 어떤 모습이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제4차 세계대전에서 인류는 막대기와 돌을 들고 싸우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 평화주의 아인슈타인 그리고 그 죽음까지..

 ≫ 1946년 아인슈타인은 원자 위기관리 과학위원회(Emergency committee of Atomic Scientists)의 의장을 맡았다. 이후로도 그는 다양한 반핵 단체에 이름을 올리고 핵무기 생산 및 유포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쳐나갔다. 또한 전후에 독일이 베를린 아카데미와 플랑크 연구소 명예연구원으로 위촉하는 제안을 보냈을 때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독일인이 저지른 범죄는 문명이 시작된 이래 가장 끔찍한 것이며, 후회나 반성할 줄 모르는 독일 사회를 위해 공헌하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1951년 서독 정부가 수여한 평화 훈장도 거절했다. 말년에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로서의 책임을 촉구하는 평화 운동에 헌신하는 것 외에 외부 활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 1950년경부터 아인슈타인은 동맥류를 앓았는데, 의사의 수술 권유에 인공적으로 수명을 연장하고 싶지 않다면서 거절했다. 결국 1955년 4월 18일, 아인슈타인은 동맥류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날까지도 통일장 이론과 관련된 계산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가족과 지인들 몇 사람만 참석한 자리에서 화장되어 델라웨어 강에 뿌려졌다. 그러나 그의 ‘뇌’만은 조각조각 잘라져 오늘날까지 6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프린스턴 병원의 병리학자 토머스 하비가 부검을 하면서 뇌를 꺼내어 따로 보관한 것이다. 그는 20세기 최고의 천재인 아인슈타인의 뇌를 연구하는 것이 과학적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그 생각에 따라 아인슈타인의 뇌는 그 이후 수많은 연구자들에게 나누어졌다. 이 뇌를 통해 천재와 평범한 사람의 뇌의 차이를 밝히는 연구들이 이루어졌지만, 아직까지 그 어느 연구도 명확하게 입증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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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한마디

 ≫ 히틀러는 화가 지망생이였다. 그의 환경이 황제를 꿈꾸는 자리에 이르렀다. 어느 누가 태어날 때부터 점령하고 누군가를 지배하고 싶어하겠는가? 내 생각엔 그것은 환경이 만들어준다고 생각하고 있다. 국가가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가? 편파적인 사회가 만들어지진 않았는가? 반대의 목소리를 내면 그 의견은 매몰당하는가? 국가가 가난한가? 국가가 이기적인 이념을 갖고있지 않은가? 우리도 물론 비슷한 이기주의적인 욕망을 갖고 있다. 아직 그 지식은 얕지만 필리핀전쟁 때의 한국군인들이 했던 짓이라던지, 북한인들 같이 사상이 꽉 막혀있고 사회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시민들은 구제할 방법이 없다며 같은 사람과 시민으로써 보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로 그 이념을 나누는 것 또한 국가적 이기주의라고도 생각된다. 옹호는 하지만 어쩌면 그들이 맞는 말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은 당시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우리 한국도 언뜻 아닌 듯 보이지만 외국인들에 대한 차별대우는 극심하다. 인종과 색상에 극심한 차별적 대우를 한다. 예를 들면 백인은 좋은데 흑인은 싫거나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차별적 대우이다. 극단적인 예지만 이런 사례를 생각한다면 한국 또한 인종주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겉으로 심하게 드러나거나 극단적으로 나아갈 일이 아니기 때문에 방관하는 일도 있다. 아돌프 히틀러라는 책을 읽고 이러한 사회/국가가 개인 한 명, 한 명에게 미치는 영향을 곰곰히 생각해본다. 극단주의 성향 한 사람이 토론도 잘하고 논리적 사고회로도 뛰어나고 출중하며 사회적 이념이 편파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히틀러의 예는 편파적인 정치인이나 엘리트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주는데에도 좋다고 생각한다. 대파를 수용할 줄 알아야 하고 그것의 옳고 그름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참고로 히틀러에 대해 알아가기엔 책의 분량은 매우 짧아 다른 책을 찾아 더 알아볼 예정이다. 독일에서 그가 어떻게 총통이 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있는 책이다.


■ 목차

 1. 화가를 꿈꾸던 소년 히틀러

 2. 1차 세계대전 발발과 참전

 3. 1차 대전 패전과 유대인

 4. 1차 세계대전 패전과 베르사유 조약

 5. 히틀러의 정치 입문

 6. 히틀러의 실패한 쿠데타

 7. 수감 생활과 <나의 투쟁>

 8. 다시 정치에 복귀하다.

 9. 나치의 집권

 10. 구세주 히틀러에 대한 독일의 열망

 11. 2차 세계대전 발발

 12. 두 개의 전선, 히틀러의 패작

 13. 독일 패전과 히틀러의 자결


■ 왜 읽었는가?

 ≫ 2차 세계대전 발발 배경 이전 당시의 독일의 생각과 가치관에 대한 궁금증 (당시 나치 정권의 주장과 독일인들이 지지했던 이유 그리고 유대인을 싫어하는 인종주의는 왜 생겨났는가에 대한 의문)

 ≫ 독일 주변국(영국과 프랑스)이 어떠한 유화정책을 펼쳤고 그 유화정책이 어떻게 세계대전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궁금증, 현대사와 이어본다면 남한이 펼치는 북한에 대한 유화정책이 과거와 비슷한 점이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

 ≫ 2차 세계대전을 만든 히틀러, 과연 히틀러만 없었다면 이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무엇이 히틀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 내 마음대로 책 내용 3줄 요약

 ≫ 그는 7,000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내며 전 세계를 피바다로 만든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 유대인 600여만 명을 학살한 홀로코스트[각주:1]를 저지른 극단적인 인종주의자다.

 ≫ 2차 세계대전 발발엔 주변국들의 유화정책이 있었다. 준비되지 않은 주변국들은 초기 전시상황에서 질 수 밖에 없었지만, 히틀러는 주변국을 넘어 소련 등 다른 나라까지 건드리며 패배하게 된다.


■ 히틀러의 생애

 ≫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던 작은 국경마을 브라우나우암인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알로이스 히틀러는 세관 공무원이였는데 직장을 따라 자주 이사를 다녔고 이사를 자주 다닌 탓에 아돌프 히틀러는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 알로이스는 술을 자주 마셨고 엄격했다고 한다. 히틀러 연구가인 로버트 와이트가 말하길 '알로이스는 아내인 클라라 히틀러에게도 굉장히 거칠게 대했고, 집에서 항상 폭언을 일삼았다'고 한다. 알로이스는 클라라뿐만 아니라 아돌프와 그의 여동생 파울라 히틀러에게도 폭언과 폭력을 행사했다는 주장들이 많다.

 ≫ 알로이스는 아돌프가 15세 때 세상을 떠났고 클라라는 19세 때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클라라가 죽은 뒤 1908년 아돌프는 미술학도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오스티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으로 떠났다. 아돌프는 제국의 수도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충격을 받는다. 빈 거리에는 체코인, 폴란드인, 이탈리아인,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유대인들이 뒤섞여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아돌프는 이 기억을 떠올리며 "인종적인 신성모독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 1차 세계대전 발발

 ≫ 1914년 8월 2일, 아돌프 히틀러가 25살이 되던 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청년들을 징집한다. 빈에 기거하던 히틀러는 징집을 피해 독일의 뮌헨으로 도피했다. 당시 뮌헨은 극우적 국가주의 정서가 강하게 들끓고 있었다.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히틀러는 결국 참전을 결정하고 4년간을 전쟁터에서 보낸다. 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소모적인 전투를 했다. 자기 영역에 참호를 파고 철조망을 친 뒤 기관총 등으로 무장하여 자기 진지만을 지키는 싸움이였다. 맨몸으로 돌격하고 방어사력과 육탄적으로만 참호를 지키는 것이 임무였다. 이런 양상이 4년간 '무한 반복' 됐다. 전사자들의 시신은 쌓였지만 적과 대치하고 있어 제대로 된 처리를 못하였다. 온갖 질병이 퍼졌고 이와 벼룩은 온몸에 득실거렸으며 비라도 쏟아지면 참호는 물 웅덩이가 되었다. 당시 히틀러는 바이에른 제 16보병연대 연락병으로 4년간 복무했다. 연락병은 참호와 참호 사이를 오가며 명령을 전달하는 위험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히틀러는 그 임무를 해냈고, 그 임무로 히틀러는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훗날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을 '잊을 수 없는 가장 숭고한 경험'이라고 회고했다. 그만큼 그 전쟁이 히틀러의 인생을 뒤바꾼 계기가 되었다.


■ 1차 세계대전 패인과 유대인과의 관계

 ≫ 1차 세계대전 패전에 대한 독일 사람들의 생각은 대체로 '억울하게 전쟁에서 졌다'는 것이다. 극우 선동가들은 하나같이 연합국 측과 협상에 나섰던 사람들을 비애국자로 몰아붙였다.

 ≫ 또 하나의 패인은 유대인이라고 여겼다. 당시 독일 신무기 프로젝트에 유대인 과학자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는데 연합군의 중심이었던 영국이 유대인 핵심 세력과 손을 잡고 독일군의 기밀 정보를 빼내 정보망을 교란시켰고 독일의 지하 정보 네트워크 요소요소에도 유대인들 상당수가 가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적국이었던 영국의 외무 장관 발포어가 여왕의 지시를 받고 영국 내 유대인 지도자 중 하나인 금융가 로스차일드를 만나서 중요한 제안을 하나 한다. 만약에 유대인들이 영국을 위해 싸워준다면, 전쟁이 끝난 후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국가를 창설해줄 용의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1917년 11월 2일에 비밀문서로 작성된 ‘발포어 선언’이 그것이다. 그로부터 1주일도 안 돼 독일 정부가 개발하고 있던 비밀 무기 프로젝트 원본이 영국 사령부로 넘어간다. 동시에 독일의 전쟁 네트워크가 군데군데 마비되면서 영국군이 밀고 들어갈 틈이 벌어진다. 전세가 역전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다. 당시 독일군은 유대인에게 증오를 품었다.


▲ 마녀사냥

 ≫ 물론 유대인에 대한 혐오 내지 증오는 독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대인 혐오는 적어도 유럽에서 2,000년 가까이 내려오던 뿌리 깊은 정서였다. 증오와 멸시가 집단적으로 표출된 사건 중에 하나가, 14세기 페스트가 온 유럽을 덮쳤을 때 일어났다. 사람들은 그 탓을 유대인에게 돌려 닥치는 대로 잡아다가 학살했다. 바로 이어진 마녀사냥에서도 유대인 여성이 주요 타깃이었다. 상황은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직전인 19세기 말이 돼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881년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로스 2세의 암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러시아 당국은 유대 극단주의자들의 조직적인 범죄라고 단정 짓고 이듬해 비밀리에 인종분류법인 ‘5월법’을 제정해 유대인 청산에 나섰다. 유대인 성분에 따라 ‘살해’, ‘추방’, ‘동화’ 정책을 펼쳤는데, 이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폴란드, 체코, 헝가리 같은 동유럽으로 이주하게 된다. 1894년에는 프랑스에서 드레퓌스 대위 사건이 벌어진다.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프랑스의 기밀 문건이 하나가 발견됐는데, 그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수사당국이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드레퓌스 대위를 지목한 것이었다. 이때 에밀 졸라와 같은 프랑스 지성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재조사를 요구했고, 덕분에 진범이 잡히고 드레퓌스 대위는 석방이 된다. 하지만 러시아에 이어 프랑스에서도 유대인 혐오사건이 벌어지자 유대인들은 큰 충격에 휩싸인다. 그들은 일종의 자구책으로 1897년 8월 스위스 바젤에서 세계에 흩어진 유대 지도자들이 다 모이는 제1차 시온주의자회의를 개최한다. 이때 유대인 공동체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의 조국을 건설한다는 ‘바젤 계획’을 채택한다. 1차 세계대전에서 수세에 몰리던 영국은 유대인들의 이런 계획을 알아내고 독일 내 유대인들을 회유했던 것이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물리치기 어려운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더 이상 당국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자기 나라’를 가질 수만 있다면 큰 도박에 나설 만도 했다. 그러나 패전국 독일 입장에서는 패전의 핑계로 지목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의 베르사유 조약

 ≫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선언으로 끝났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자 전범국이 되었다. 1914년에 시작돼 1918년에 끝난 이 전쟁에서 930여만 명이 죽고 2,250여만 명이 부상당했다. 1919년 6월 28일 프랑스 파리에서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으로 1차 세계대전은 공식 종결됐다. 이 조약은 연합국으로 참전한 31개국이 독일과 맺은 것이었다. 물론 이 협상에 독일은 초대받지 못했고 결과만 통보 받았다. 이 조약의 핵심은 전범국인 독일을 처벌하고 그 세력을 약화시켜 평화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약은 독일 입장에서는 너무 가혹했다. 전쟁의 모든 책임이 독일에게만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점령지 대부분을 빼앗겼다. 독일인 입장에서는 영토의 13퍼센트와 인구의 10퍼센트가 잘려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중 독일인들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했던 것은 동프로이센을 분할해 18세기에 사라졌던 폴란드를 재건해주고 바다로 가는 통로를 열어준 일이었다. 이 통로는 이후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도화선[각주:2] 역할을 한다

 ≫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의 군인은 10만 명을 넘지 못하게 제한됐고, 탱크와 잠수함 같은 현대식 무기 보유도 금지됐으며, 공군은 창설 자체가 금지됐다. 남아 있던 무기들은 독일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파괴됐다. 독일 라인 강 연변의 라인란트 지역은 연합국 관할로 비무장 지역으로 규정됐다. 거액의 배상금도 책정됐다. 전쟁 피해 복구를 이유로 1,320억 독일 제국 마르크가 책정됐는데, 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에서 빌린 부채를 상환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이 징벌적 배상금이 전후 독일 경제에 직격탄을 날렸음은 물론이다. 이 조약은 평화유지를 목적으로 했으나 강대국 중심으로 치우친 경향이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영토 분할 과정에서 연합국 지도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강하게 반발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은 이 같은 배신감을 바탕으로 자기 정치 세력을 키웠고, 이것이 훗날 베니토 무솔리니를 중심으로 파시즘[각주:3]이 발호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 히틀러의 정치 입문

 ≫ 1차 세계대전 동안 4년간의 복무를 마친 히틀러는 극우주의가 들끓던 뮌헨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 살이었다. 그는 사실 군대에 남아 있고 싶어 했다. 당시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바뀌어 사회민주주의자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대통령으로 집권하고 있었다. 특별한 변수가 없었다면 히틀러는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군인으로 평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으로 무너진 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유럽 전역에서 혁명의 꿈을 뜨겁게 키우고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각주:4](독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정부는 뜨겁게 타오르는 마르크스주의 혁명을 잠재워야 할 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세력이 바로 퇴역 군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극우 어용단체 ‘자유군단’이었다. 정부는 이들의 폭력을 활용해 마르크스주의 혁명운동에 철퇴를 가하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자유군단은 세력을 크게 불릴 수 있었고, 훗날 나치당의 모태가 된다. 히틀러는 자유군단에서 상관들의 눈에 띄어 병사들과 포로들을 정치적으로 재교육하는 임무를 받게 된다." 이 임무를 수행하며 히틀러는 자기가 연설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연설의 핵심은 1919년 6월에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국가적인 수치이고 거기에 동조한 독일 당국은 국가적 배신자라는 비난이었다.


 ≫ 군인으로서 더 이상 전망이 없을 때 히틀러는 당원으로 남아 전업 정치인의 길을 가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의 정치적 데뷔는 뮌헨의 어느 큰 맥주홀이었다. 뮌헨의 극우세력의 중추는 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들이었는데 그들은 주로 큰 맥주홀에서 회합을 가졌고, 히틀러의 정치 데뷔도 그곳에서 이뤄졌다. 1920년 8월 13일 뮌헨의 맥주홀 브루거브라우켈러(Bürgerbräukeller)가 바로 그 무대였다. 히틀러는 거기서 “우리는 왜 반유대주의자인가?”를 제목으로 연설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자유군단이라는 이름의 국가주의 민병대를 모집하는 최상의 전략으로 반유대주의를 제시한 것이었다. 히틀러의 연설은 독일노동자당의 당원들을 고무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히틀러에 크게 고무된 노동당원들은 1921년 7월 히틀러를 당 지도자로 삼았다. 히틀러는 당명을 '독일노동자당'에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으로 바꿨고 그 약칭이 나치다.

 ≫ 나치당의 모태가 극우적 폭력 단체, 자유군단이었던 만큼 히틀러는 그 특성을 살려 자신의 호위대인 돌격대부터 창설한다. 나치깃발과 눈에 띄는 제복으로 홍보에 성공했고, 시각적 차별화를 둔 탓에 당원 숫자가 기존 2,000명에서 2만 명으로 급증한다. 히틀러가 당권을 잡은 이듬해 이탈리아에선 베니토 무솔리니의 극우 파시스트당이 정권을 잡았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베르사유 조약이 이탈리아에게 불평등하게 맺어졌다고 정치 캠페인을 벌였고 그 캠페인이 국왕 눈에 들어 집권하는데 성공했다. 이 소식을 히틀러가 알게됬고 극우주의자 무솔리니의 성공은 히틀러를 고무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 히틀러의 쿠데타 실패와 수감생활 그리고 정치복귀

 ≫ 1923년 1월 프랑스군과 벨이게군이 전후 배상금을 제때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루루 지역의 탄광을 점령하는 일이 벌어졌다. 3월에는 프랑스 장교가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프랑스군과 독일 국민들 사이에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때 촬영된 영상이 있었는데 이 동영상은 히틀러의 나치당에게 더할 나위 없는 홍보 도구였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총장을 보좌했던 루덴도르프 장군이 나치의 세력으로 들어왔고 우익 참전 군인들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군 내부자들의 협력을 받아 총기를 확보해 루덴도르프를 지도자로 세워 쿠데타를 일으킨다. 뮌헨에서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베를린으로 진격한다는 것이다.

 ≫ 히틀러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루덴도르프는 1차 세계대전 참전 영웅으로써 사면되었다. 하지만 히틀러에게는 녹록치 않은 재판이었다. 그러나 재판에 섰을 때 히틀러는 생각보다 분위기가 자신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프랑스와 벨기에군에 굴욕을 당한 독일 국민들 마음이 그와 같았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자기 웅변 실력을 총동원했고 그 결과 형량이 가벼워졌다. 수감 생활은 호텔처럼 편안했고 언제든지 나치 지지자를 만날 수 있었다. 책과 잡지도 무엇이든 읽을 수 있었고, 인생관과 정치사상을 정리했다. 히틀러가 원고를 쓰고 나치당의 기자가 손보는 형식이었으며, 이 과정으로 <나의 투쟁>이 출간된다.

 ≫ 나의 투쟁에선 <지배종족>이라는 언급이 있는데, 이 지배종족은 영토를 되찾고, 공산주의를 박멸하며 프랑스와 영국은 물론이고 유대인까지 분쇄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 히틀러는 모범수라는 이유로 1924년 11월 20일에 석방된다. 1925년 2월 27일 쿠데타를 도모했던 뮌헨의 맥주집에 다시 돌아와 나치당 지도자로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 독일(당시 바이마르 공화국) 2대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

 ≫ 바이마르 공화국 2대 대통령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총장을 지낸 힌덴부르크가 당선됐다. 군대와 독일 보수파는 힌덴부르크를 중심으로 결집되었다. 독일 좌파들은 군인 출신이 대통령이 되는 상황이 반가울리 없었다. 정치적 라이벌인 루덴도르프는 제거되었고 보수파가 결집되어 나치당원은 17만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돌격대의 규모도 커져 사설 군대와 다름없는 수준이 됐다.

 ≫ 히틀러는 "대중은 여성적이고 우둔하며 오직 감정과 증오로만 그들을 장악할 수 있다"고 여겼다. 히틀러 친위대는 베를린의 유대인 구역에서 시작해 독일 전역에 '증오'를 심기 시작했다.


■ 나치의 집권

 ≫ 나치당은 1930년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18.3 퍼센트를 득표해 제 2당이 됐다. 히틀러는 1932년 그 힘으로 대통령 선거에 나섰지만 힌덴부르크에 밀려났다. 그러나 36.8 퍼센트라는 지지율을 받았다. 1932년 7월엔 나치당은 제 1당에 올라선다. 1당이 되면서 나치당은 총리직을 요구했지만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두 차례에 걸쳐 거부했다. 그러나 1933년 1월 30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안팎의 압박을 견뎌내지 못하고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했다.

 ≫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잡자, <나의 투쟁>은 날개 돋친 듯 팔렸고, 국민의 필수 교양서가 되었다. 나의 투쟁이 책장에 없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견뎌내야 했다. 덕분에 히틀러는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 히틀러는 총리직에 오르자마자 좌파 공산주의 세력과 반대파를 감금, 납치, 암살, 고문하는 등 온갖 불법적인 재판과 처벌을 동원해 탄압했다. 히틀러는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을 비난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들이 포진해 있는 의회가 늘 발목을 잡아서 국가 발전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이를 극복할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선동했다. 3월 24일 전권위임법[각주:5]을 통과시켰다. 전권위임법의 정식 명칭은 '민족과 국가의 위난을 제거하기 위한 법률'이다. 이를 통해 지방의회는 해산됬고 사회민주당은 불법화가 되었다. 이를 통해 나치의 일당독재체제를 완성한다. 이가 가능했던 이유는 바이마르 공화국(독일) 체제의 불안과 불신, 세계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국가경제의 붕괴 때문이었다.

 ≫ 1934년 8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드디어 히틀러 1인 독재체제가 완성된다. 히틀러는 국민투표를 실시해 총리가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게 했고, 그 지위를 총통이라 칭했다. 반대세력은 죽거나 도망쳤고, 유대인은 비국민이 되어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했다.


■ 독일의 구세주 히틀러

 ≫ 독일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실업이었다. 그런데 히틀러가 총통에 취임한 뒤 실업률은 크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독재 체제를 활용해 징중 정책을 밀어붙인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베르사유 조약이 파기된 이후 독일군이 재무장에 나선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사람들은 히틀러만 바라보았다. 행복에 젖어 히틀러 얘기만 했다. 변화에 대한 희망이 워낙 컸고, 패전국민으로 짓눌려왔던 독일인들은 히틀러에게서 자긍심을 찾았다.


■ 주변국가의 무장해제

 ≫ 히틀러는 1936년 8월 1일 베를린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했다. 올림픽 기간 중 독일 전역에서는 선동적인 표어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신문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호전적인 기사들이 자취를 감췄다. 독일 정부는 올림픽에 참여하러 온 세계인들에게 독일은 평화롭다는 믿음을 심어주고 싶어 했다. 이러한 가증스런 노력은 일정한 결실을 맺었다. 올림픽이 끝난 뒤 3주 후 영국의 로이드 조지 전 총리가 히틀러의 초대를 받고 독일을 전격 방문했다. 히틀러는 고무됐다. 세계적으로 유력한 정치인이 히틀러를 방문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그 자리에서 1차 세계대전 참전담을 늘어놓았다. 그는 전장에서 종종 영국 군인들과 조우했다고 회상했다. 히틀러의 호의는 로이드 조지를 무장해제시켰다. 로이드 전 총리는 히틀러와 만남을 가진 후, 데일리 익스프레스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고문을 보낸다. “독일이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히틀러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그는 우리와 싸울 의사가 전혀 없다.” 러나 로이드 전 총리는 순진했다. 영국 신문에 독일이 안전하다는 기사가 실릴 때 히틀러는 장관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밀지시를 내렸다. “독일군을 세계 최강으로 재건하지 못한다면 독일은 사라질 것이다. 독일군은 4년 안에 전쟁 준비를 마쳐야 한다."

 ≫ 1937년 9월 28일 이탈리아의 극우주의자 무솔리니가 베를린을 방문했다. 새로운 동맹을 구축하자는 것이었는데 “침략을 위한 군사적 조치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방어적 수단”이라고 강변했다.  

 ≫ 1938년 3월 13일에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합병을 선포한다. 독일군은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오스트리아에 진입했고, “신께서 오스트리아를 구원했다.”고 소리쳤다. 오스트리아 거리에 나치 깃발이 나부꼈지만 병합에 반대하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 된 때가 이 때다.

 ≫ 그 다음은 체코슬로바키아였다.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이 내세웠던 민족자결주의를 역이용한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에 거주하는 독일민족의 자결권을 요구하며 독일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주데텐란트를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1938년 9월 30일 뮌헨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참석해 히틀러의 요구를 승인해준다. 당시 강대국들은 당사자인 체코슬로바키아를 협정에서 배제할 정도로 나치 독일에 유화정책을 폈다.


■ 2차 세계대전 발발

 ≫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기 전 소련의 스탈린에게 히틀러는 미리 전보를 보냈다. 스탈린은 독일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답신을 보낸다. 그리고 전선에는 200만 명의 병사가 히틀러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1939년 9월 1일 새벽 5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나치 독일에 관용적이던 영국과 프랑스도 이틀 뒤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준비해온 독일군은 이미 폴란드 깊숙이 파고들어갔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비밀 협정에 따라 소련도 폴란드 동부를 침공했다. 폴란드는 항복을 거부했고 바르샤바는 초토화됐다.

 ≫ 이듬해인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은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된 지 2주 만에 프랑스군 중심의 연합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국경 해안 도시 됭케르크에서는 연합군 40만 명이 진지를 포기하고 후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해변은 연합군이 버리고 간 무기들로 넘쳐났고, 벨기에와 프랑스의 해안이 독일군 손에 들어갔다. 영국군이 철수하자 홀로 남게 된 프랑스는 1940년 6월 22일 독일에 항복을 선언한다. 히틀러는 나흘 뒤인 28일 새벽 6시 파리에 입성하며 “6주에 걸친 영웅적인 투쟁 끝에 우리 병사들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대들의 위업은 영광스러운 승리로 기록될 것이다. 1주일 동안 깃발을 게양하고 종을 울리도록 명하는 바이다.”라고 말했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과 에펠탑에는 독일군인들이 무리지어 다니며 기념 촬영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 프랑스를 점령해 기세가 등등해진 히틀러는 영국에 평화협정을 제안하지만 처칠은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리고 영국과 독일 간의 공중전이 시작된다. 독일은 영국을 9개월간 공습해 4만 여 명의 사망자를 내지만 영국은 끝끝내 항복을 거부했다. 당시 영국 전투기의 성능이 우수했기 때문에 독일군도 공습 과정에 적지 않은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1941년 5월 독일군은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맛본다. 그때까지 너무 쉽게 이겼던 탓인지 히틀러도 적지 않은 충격에 빠졌다. 히틀러는 갑자기 영국 정복을 포기하고 소련을 침공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소련을 제압하면 영국의 희망도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천하의 독일군이라 해도 위험한 도박이었다. 당시 참모들은 히틀러를 막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무도 나서지를 못했다. 1941년 6월 22일 새벽 3시, 300만 명의 독일군이 소련 국경을 넘었다. 히틀러에게 러시아는 영국에게 인도와 같은 존재였다. 영국이 인도를 점령해 자원을 빼먹듯이 독일도 러시아를 점령해 이용해먹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전투도 연전연승이었다. 모스크바 턱밑까지 독일군이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과거 나폴레옹 때처럼 러시아에게는 겨울이 있었다. 그리고 12월에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습격하면서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시작했다. 독일 장군들은 소련 전선에서 후퇴하자고 히틀러에게 조언했지만, 히틀러는 격노로 답했다. 1차 세계대전을 전장에서 보낸 히틀러는 후퇴 운운하는 장군들에게 오히려 정신 무장을 주문했다

 ≫ 소년부터 노인까지 남자라면 모조리 차출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미국까지 가세한 연합군의 공격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1943년 7월 27일, 700여 대의 폭격기가 함부르크를 공습했고, 도시는 불바다가 됐다. 이 공습으로 함부르크 시민 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즈음 전세는 확실히 역전되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건강도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심장 질환을 앓기 시작했고 파킨슨병 증세도 보였다. 등은 휘었고 손은 떨렸다. 1944년 6월 6일 이른바 디데이 새벽 노르망디 해안. 연합군이 마침내 독일이 점령 중인 프랑스 수복에 나섰다.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매우 기뻐했다. 영국이란 섬에 숨어 있다가 대륙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에 쉽게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히틀러의 착각이었고 망상이었다. 파죽지세는 이제 연합군을 수식하는 말이 됐다. 그 시기 독일군 사령부에서 폭탄이 터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독일 내부의 움직임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전세가 역전된 이유를 참모들의 타락에서 찾았다. 반역자들 때문에 원대한 계획이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의 배후를 캐기 위해 히틀러는 5,000명을 체포했고 200명을 처형했다. 이처럼 전세가 기울면서 독일 내부의 히틀러 지지기반도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 히틀러의 패배, 그리고 자결

 ≫ 1945년 1월 소련군이 베를린 외곽 80킬로미터까지 접근했고, 4월 21일에는 마침내 베를린에 입성했다. 이 전쟁으로 소련에서는 무려 2,000여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희생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군 지휘부는 병사들에게 베를린에서 승리를 자축할 것을 허락했다. 소련군들은 베를린에 남아 있던 여자들을 빈집으로 끌어모았고, 밤새도록 욕을 보였다. 이때 소련군에게 강간당한 독일 여성의 숫자만 200만 명을 헤아렸다. 그때 히틀러는 폐허로 변한 총통 관저의 지하 벙커에서 그의 연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은신하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 클라라 히틀러의 사진 앞에서 에바와 결혼식을 올린 뒤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다. 히틀러는 일기를 통해 자기가 일으킨 전쟁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생각을 남겼는데, 자기중심적인 망상과 집착은 전세가 기울어졌을 때에도 결코 약해지지 않았다. “우리가 졌다는 것을 안다. 적들의 힘이 너무 강하다. 배신까지 당했으니 내 머리에 총알을 박아야 한다. 하지만 절대로 항복하지는 않으리라. 우리는 쓰러지겠지만 세상이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독일이 전쟁을 원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이 전쟁은 서구 정치인들이 도발한 것이다. 그들 모두 유대인을 위해 일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죽는다. 우리 군대, 여성과 노동자들이 내 이름을 걸고 이룩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위업을 알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에서만 5,000만 명에 가까운 인명이 세상을 떠나야 했다. 아시아까지 그 범위를 넓히면 7,00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망상과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국가주의와 인종주의 같은 극단적인 이념에 탐닉할 때 그 끝이 어떤 모습일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인류는 그 대가를 치르면서 평등과 조화, 그리고 다양성과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있다.


  1. 홀로코스트 : 일반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을 대량으로 태워 죽이거나 대학살하는 행위를 총칭하지만, 고유명사로 쓸 때는 제2차세계대전 중 나치스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뜻한다. [본문으로]
  2. 도화선 : 사건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 [본문으로]
  3. 파시즘 : 1919년 이탈리아의 B.무솔리니가 주장한 국수주의적·권위주의적·반공적인 정치적 주의 및 운동을 말한다. 원래 묶음[束]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파쇼(fascio)에서 나온 말이었으나, 결속·단결의 뜻으로 전용(轉用)되었다. [본문으로]
  4. 바이마르 공화국 : 과거 독일의 국가명 [본문으로]
  5. 전권위임법 : 비상사태에 입법부가 행정부에 입법권을 위임하는 법률, 나치 정권은 나치에서 제정한 법률은 의회나 참의원 및 대통령의 권한과 관련된 것을 제외하면 헌법에 위반되어도 유효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 골자였다. [본문으로]

■ 나의 한마디

 ≫ 통합 영어 학습법은 16년 10월 5일 기준으로 3권까지 있습니다. 1권은 총론, 2권은 문법, 3권은 연습방법입니다. 저자는 순서대로 읽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합니다. 영어 외에도 일본어 등 제 3 외국어까지도 이 방법이 통용되었다고 합니다. 읽을수록 납득이 되는 이론을 설명하니, 천천히 읽어보면서 내가 하고 있는 공부방법이 옳은지, 노력은 부족하지 않았는지를 다시 한번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필자 또한 내가 쓴 리뷰를 보면서 마음을 되새길 생각입니다.



■ 목차

1. 한국 영어 교육의 실패

2. 우리에게는 어떤 수준의 영어가 필요한가

3. 한국 영어 교육의 현실

4. 영어로 생각하기는 가능한가

5. 직독직해, 영어를 죽이는 가장 나쁜 방법

6. 문장구조에 대한 왜곡된 인식

7. 영어는 평생 공부해야 할까

8. 새로운 영어 학습법이 필요하다

9. 제 4세대 통합 영어 학습법(1)

10. 디코딩

11. 언어 구조에 대한 새로운 이해

12. 의미 단락에 대한 올바른 이해

13. 문장구조 습득을 판단하는 방법

14. 도대체 얼마나 공부해야 하는가

15. 시간 내 암기

16. 제 4세대 통합 영어 학습법(2)

17. 영어를 죽이는 나쁜 습관들 (외 6개)

18. 부록


■ 왜 읽었는가?

 ≫ 영어 단어장 만들고 외우기, 수동태/능동태, 분사, 동사, 형용사, 명사 등 난 언어를 배우는 것인데 왜 암기를 하고 있지? 에 대한 회의감.

 ≫ 영어 공부도 하고 회화모임도 열심히 나가는데 늘어나지 않는 듯한 영어실력에 답답함.

 ≫ 배우고는 있는데 "잘못" 배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요즘 잘 나간다는 제4세대 통합 영어 학습법 지식 습득


■ 내 마음대로 책 내용 3줄 요약

 ≫ 통합 학습법은, 한 시간의 투자로 읽기, 말하기, 듣기, 쓰기에 각각 한 시간 연습 효과를 낼 수 있어 한 시간을 투자해 4시간의 학습 효과를 내는 연습을 지향한다. 이 방법으로 1년으로 4년의 효과를 볼 수 있다.

 ≫ 우리는 듣기를 통해서 말을 배운다. 달리 표현하면 듣기를 통해서 문장구조를 습득한다.

 ≫ 영어 학습의 성과가 부진할 때 학습자의 불성실로 원인을 돌릴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배우고 가르치는 기존 내용과 인식에 오류가 없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 책에서 말하는 주의할 점

 ≫ 통합 학습법을 '비법'으로 간주하면 안된다. 기존의 영어 공부 방식으로 실패한 사람들이 이 함정에 빠지기 쉽다. 이들은 결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으면 실망하는 경향을 보인다.

 ≫ '영어를 잘하게 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에 대한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다. 가장 알고 싶어하는 사항이지만 대답은 쉽지 않다. 학습자의 이해력, 투자할 수 있는 시간, 요구되는 집중력, 영어 파트너의 존재여부, 자발적 동기부여, 교습자의 역량 등 정말 많은 변수가 있다. 그래서 기계적으로 1년, 2년이라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도 '평균치를 말해달라'는 질문을 받으면 1년 걸린다면 도전해보겠다는 학생이 100 퍼센트다. 2년은 70, 3년은 30, 4년이라고 하면 도전자가 10 퍼센트도 안된다. 이것은 현실이다. 영어 공부에 도전했다 실패한 경험이 새로운 도전에 대한 의욕마저도 삼켜버리는 것 같다. 새로운 방법으로 도전했을 때 그 실효성을 의심하면서 공부한다면 그 스트레스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군복무 기간이 좀 길더라도 언제 끝날지 알면 고된 군생활을 견딜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장기 학습 계획을 방해하고 한국의 영어 교육을 망치는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이 조급증이다.

 ≫ 기존 직독직해 방식에 의구심을 품었던 학생이나, 새로운 것을 빨리 받아들이고 배우는 학생, 영어를 잘하고 싶은 열망이 강한 학생들은 좀 더 빠른 향상을 보인 데 반해, 당장 시험 점수를 올려야 하는 학생들은 개념은 이해하지만 습득이 느린 경우가 많다. 이처럼 천차만별이라 새로운 의미 단락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다. 그래도 직독직해를 벗어나는 데 걸리는 기간을 집요하게 묻는다. 딱 떨어지는 숫자를 제공하지 않으면 답답해하고, 보수적으로 기간을 길게 잡아 1년이 걸린다고 하면 가치판단을 떠나서 일단 부담스러워한다. 결국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빨리 되느냐 아니냐를 판단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급한 태도가 영어 실패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하루에 1~2시간 공부해서 3개월 정도는 걸린다고 기준을 정해버리면 성과가 늦게 나타나는 학생들은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는다. ‘나는 역시 안 돼’, ‘나는 역시 머리가 나쁜가 봐’, ‘나는 언어 감각이 없는 것 같아’ 등의 자기비하로까지 이어진다. 그런가 하면, 하루에 1~2시간 공부해서 넉넉하게 1년 정도는 해야 된다고 말하면, 아예 시작하기조차 부담스러워한다. 기본과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서 뭔가 급하게 이루려고만 하는 성향이 영어 학습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소들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한국인들은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교육제도를 비난하고 선진국의 교육제도를 부러워한다. 하지만 대학에서 소위 선진국의 수업 방식과 비슷하게 토론을 시키거나 팀별 프로젝트 과제를 내주거나 의견을 논술형으로 서술하라고 하면 상당히 귀찮아하는 경향을 보인다. 비난의 대상이었던 교육제도에 어느새 적응이 되어 새로운 것을 찾거나 시도하거나 받아들이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 '일상 대화 수준'이 목표?

 ≫ 저자는 영어 공부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목표 설정이 왜 중요한지를 학생들에게 이야기 해왔다고 한다. 모두들 충분히 공감하며 동의한다고 했다. 하지만 3~4개월쯤 지나 첫 고비에 직면하면 "나는 그 정도 수준까지 공부하고 싶지는 않아요"라며 발뺌을 하는 학생들이 나온다. '10년을 공부했는데도 영어가 이 지경인데 체계적으로 공부한다 해도 그런 수준에 도달하려면 평생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포기를 해버린다. 그러면서 '그냥 일상 대화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으면 된다'고 자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학생의 '일상 대화'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이성에 대한 고민도 있고, 취업 고민, 다양한 활동에 대해 주고받는 대화, 친구들과의 대화도 포함될 것이다. 연애할 때 애인과 주고받는 사랑의 밀어도 일상 대화의 일부분이다. 영어로 일상 대화를 할 수 있는 정도만 되어도 좋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광범위한 내용을 염두에 두는것인가? '일상 대화 수준의 영어'는 가장 완벽한 구사력을 갖추었음을 의미할 수 있다.


■ '영어를 잘한다'는 의미

 ≫ 영어권 나라에서 태어난 고등학생의 예다. 영어가 아주 유창한 학생은 졸업 후 우리나라의 대기업에 취업하려 한다. 이 기업은 영어가 유창하다고 그를 선발할까? 아니다, 영어 구사력과 업무 처리 능력은 별개다. 완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미국의 고등학생보다는 상대적으로 영어는 서툴지만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한국 사람이 채용될 확률이 훨씬 높다.

 ≫ 어느 중소기업 과장이 있다. 이 사람은 영어를 잘한다는 주변의 평가를 받아왔다. 해외 출장을 가면 일행들을 대표해 영어로 모든 것을 다 해주었다. 회사 측에서는 이 과장에게 업무를 맡기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과장은 한국의 다른 업체들과 계약할 때 협상 능력이 떨어져 회사에서는 과장에게 협상을 맡기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말 협상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영어를 구상할 줄 안다고 해서 영어 협상을 잘 해낼 수 있을까?

 ≫ 위 두 가지 사례는 우리가 영어로 말을 할 줄 아는 것에 대해 얼마나 과대평가를 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 어느정도까지 영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할까?

 ≫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자신이 구사하는 한국어를 영어로도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이다. 당연히 문화 차이는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협상을 할 경우도 마찬가지다. 협상에 필요한 '생각하는 힘'을 바탕으로 우리말을 사용할 때만큼 내용을 잘 전달할 수 있도록 영어를 배운다면 완벽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 정도 수준에 도달하기는 결콘 쉽지 않다.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올바른 목표치 설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목표 달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를 판단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 영어로 생각하기는 가능한가?

 ≫ 영어로 생각하기(Thinking in English)란 한국인에게는 허구다. 회화 수업에서 강사가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의 하나가 '영어로 생각하라'일 것이다. 우리말을 떠올려서 번역하는 방식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말이다. 미국이나 영국, 캐나다 등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국가에서 어학연수를 경험한 학생들이 특히 많이 들었던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들으면 상당히 그럴싸하다. 영어를 배우는 입장에서 '영어로 생각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최종 목표일 수 있다. 뇌의 언어 영역에 한국어와 영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같아진다면 영어권 국가에서 공부하거나 일하면서 매일 영어를 쓰는 상황이라면 영어로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막 영어를 공부하는 한국 사람이 '영어로 생각한다'면 거짓말이다.

 ≫ 영어로 생각하기는 어떻게 나왔을까? 회하나 어학연수 프로그램은 유창성을 강조한다. 간단한 말이라도 자연스럽게 빠른 속도로 구사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실제로 유창성은 언어 구사에서 중요한 요소이며, 영어권 국가로 이민을 간 사람들이나 유학생들에게는 특히 중요할 수 있다. 따라서 설사 조금 틀리더라도 원어민의 속도로 말하는 것을 권장하는 경향이 있다. 어린이들이 언어를 습득해가는 과정에서 그러하듯 처음에 부정확해도 자꾸 말하다 보면 정확성도 좋아진다고 보는 것이다. 회화가 초보인 학생들에게 '유창하게 말하려면 영어로 생각하라'고 강조하는 것은 아직 걷지도 못하는 어린아이에게 마라톤을 시키는 일과 같다.

 ≫ 뇌의 언어 영역에 우리말이 99퍼센트, 영어가 1퍼센트를 차지한 상황이라면 이 1퍼센트의 영어 영역을 점점 확장해가는 것이 영어 공부의 과정이다. 우리 뇌에서 영어가 스스로 작동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의 습득량이 늘어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입되어야 한다. 따라서 영어 습득률을 높이려면 한국어를 억제할 것이 아니라 한국어와 효과적인 상호관계를 맺어야 한다.


■ 직독직해는 영어를 죽이는 가장 나쁜 방법이다.

 ≫ I love you를 직독직해 하면 '나는/사랑한다/당신을'이 된다. 하지만 영어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I love you의 의미를 설명한다면 뭐라고 할까? 당신을 사랑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영어로 말할 때, 'I/you/love'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영어로 말할 땐 영어 어순을, 우리말로 말할 때는 우리말 어순을 지켜야 문장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 문장구조에 대한 왜곡된 인식

 ≫ 사람이 한국어의 언어 구조를 습득했다는 것은 한국어를 할 때 문법을 의식하거나 문법 개념들을 떠올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각을 적절한 문장으로 만들어 표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어떤 경우라도 '주어를 무엇으로 설정해야 할까 혹은 다음에는 목적어가 나와야겠지...' 등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 말을 하지는 않는다. 말하는 순간에 자연스러운 우리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한국인에게 이는 매우 당연한 듯하지만, 실은 한국어의 언어 구조를 습득하지 않은 상태라면 불가능한 언어능력이다.

 ≫ '나는 밥 먹었어요'와 '나도 밥 먹었어요'가 있다. 조사 '는'과 '도' 가 내포하는 의미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외국 사람이 위의 예문을 듣는다면 어떨까? 조사 '는'과 '도'의 기능과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보다는 '나' '밥' '먹어' 등 내용이 중심으로 듣고 이해할 확률이 크다.

 ≫ 모국어 습득 과정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해당 언어의 구조나 규칙을 따로 분리해서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모국어로 된 책을 읽을 때 문법이 틀린 문장이나 앞뒤가 안 맞는 내용, 잘못 사용된 단어들을 쉽게 파악하고, 상대방이 실수로 잘못 말한 부분도 문맥에 맞게 알아서 고쳐 듣는 능력 등은 모국어의 언어 구조를 체득했기에 가능한 것들이다.


■ 용어로 문장구조를 이해하면 표현들을 연상하기 어렵다

 ≫ 가령 명사 하나를 연상해보라고 할 때 '내가 사랑하는 그 남자(The man who I really love)' 같은 표현을 연상할 수 없고, 형용사 하나를 연상해보라고 할 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most beautiful in the world)' 같은 표현을 생각해내지 않는다. 문장구조에서 '동사'에 해당되는 부분 역시 동사인 단어 하나만 떠올릴 가능성이 높다. 예로 'do', 'give', 'have', 'eat', 'make' 등이다. 기껏 해야 조동사를 붙여 쓰거나 조동사에 준하는 표현들을 구사하는 데 그치기 쉽다. 예로, '~를 해야한다'라는 표현을 의미에 맞게 '동사'를 연상하면 'have to do', 'should do', 'must do' 등에 국한되기 십상이다. 경우에 따라 'be supposed to do', 'be asked to do', 'be told to do', 'be required to do' 등 다양한 표현들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하는데, '동사' 라는 용어로 문장구조를 이해하면 이런 표현들을 연상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문장성분을 말할 때는 '동사'가 아니라 '서술어'라고 하는 것이 맞다.


■ 시간은 얼마나 투자해야 할까?

 ≫ 실제로 투입하는 영어 말하기 연습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기초 단계에서 학생들은 1분 정도는 말할 수 있다고 하고, 중급 단계는 5분은 말하는 것 같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느낌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회화 수준을 10단계로 나누고 6~7단계의 학생들이 1분 정도 하는 말을 녹음한 다음, 받아 적어서 다시 원어민이 말하는 속도로 읽어보았다. 개인차는 있었지만 15초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 원어민이 평균 속도로 3분 정도 말하는 분량은 보통 A4 용지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양이다. 이를 기준으로 중급 회화 수준의 학습자도 한 시간 회화 수업을 하는 동안 3분 이상, 즉 A4 한 페이지 분량을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외 어학연수를 기준으로 수준이나 성향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1시간 30분 수업에서 3분 정도 말한다고 보면 된다. 이 것이 네 번 있다고 했을 때 12분 분량이고, 수업 이외의 상황에서 영어를 말하는 시간을 합친다 해도 20분이 채 안 된다. 이를 토대로 한국에서 하루 1시간씩 회화 수업을 듣는 학생이 실제로 말하기를 연습하는 시간을 계산한다. 하루 평균 5분 정도를 영어로 말한다고 해보자. 한달 20일, 1년이면 240일 수업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는다면 1,200분 분량이다. 1,200분이면 20시간이다. 3년 동안 회화 수업을 하루도 안 빠지고 들어도 평균 60시간 정도이다. 어학 연수도 하루 중 영어로 말하는 시간을 대략 20분이라고 가정해도 1년에 120시간이다. 항상 반복하는 말들을 빼면 실제로 연습분량은 100시간 남짓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듯, 우리나라 영어 학습자들의 실질적인 말하기 연습 시간/분량은 원어민에 비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다. 이런 정도의 투입량으로 영어가 완성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다.


■ 디코딩(영.번역)은 해야 한다

 ≫ 영어 공부 방법 중에 '번역하지 마라' 라는 말이 있는데, 잘못된 조언이다. 영어를 읽을 때 우리말로 번역하지 말고 영어 그대로 받아들이고, 영어로 말해야 할 때도 우리말로 의미를 떠올리지 말고 영어로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번역을 하게 되면 정해진 시간 내에 문제를 순발력 있게 풀거나 말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물론 실전에서 읽기 지문을 하나하나 번역하는 것도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이것은 통합 학습법에 입각한 연습 1 단계에서 번역은 반드시 필요하다. 한편, 완벽한 번역을 하기 어렵다는 점 또한 이해해야 한다. 일대일로 완벽하게 대응될 리 없기 때문이다. 언어는 문화를 반영한다. 예로 '용'을 영어로 'dragon'으로 번역할 수 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 용은 성스로운 동물이지만 서구에서 dragon은 악의 상징이기 때문에 단어를 번역한다고 뉘앙스를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또 아이가 엄마에게 Where are you going? 이라고 물을 때, you를 '당신'이라고 옮긴다면 한국 문화에서는 올바르지 않은 번역이다. 여기서 영.번역인 디코딩은 단순히 의미 파악이 아니다. 단어의 올바른 이해, 문법 기능에 대한 이해 등을 포함해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정확하게 의미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다.


■ 너무나 빠른 우리의 뇌, 인지만 못할 뿐

 ≫ 한국 사람이 영어를 습득하려고 할 때는 2개 국어 사용자의 입장에서 디코딩(영.번역)을 통해 의미를 파악해야 하고, 파악된 의미를 바탕으로 반복 훈련을 통해 문장구조를 습득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앞에서 밝혔다. 그런데 우리 영어 교육에는 디코딩(영.번역) 단계에서부터 직독직해라는 방식이 만연해 있다. 직독직해는 문장이 전개되는 어순에 따라 들으면서 동시에 의미를 이해한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문장의 의미는 문장이 전개되는 어순대로 단어를 듣는 동시에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문장성분 하나하나가 연이어 임시 저장되었다가 문장이 끝나면서 한꺼번에 이해가 되는 것이다. ‘나는 매일 버스로 학교에 간다’라는 말을 아주 천천히 말한다고 해보자. ‘나는’까지만 말했을 때 아직 문장의 메시지는 전달되지 않는다. ‘나는 매일’까지 말해도 마찬가지다. 조금 더 나아가 ‘나는 매일 버스로’까지 말하거나 ‘학교에’를 추가해도 문장의 의미가 완전히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문장을 끝까지 말하지 않아도 듣는 사람은 정황을 통해 문장의 의미를 추론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100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다. ‘나는 매일 버스로 학교에 가……는 것은 아니야’라는 문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말에서 한 문장의 의미가 완전하게 전달되는 시점은 마지막 단어의 끝 글자까지 들려준 후이다. 의미가 전달되는 이런 과정을 모국어로 의사소통을 할 때는 의식하기 힘들다. 너무나 익숙하고 순식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상대방이 말하는 문장에서 단어가 들리는 순서대로 주욱 입력되고 바로바로 이해되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사실은 ‘나는/매일/버스로/학교에/간다’라는 문장을 이해하는 과정은 ‘임시 저장/임시 저장/임시 저장/임시 저장/의미 이해’라는 과정을 거친다. 만약 네 문장을 듣는다면, 이해 과정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낼 수 있다. "(임시 저장), (임시 저장), (임시 저장), (의미 이해) // (임시 저장), (임시 저장), (임시 저장), (의미 이해) // (임시 저장), (임시 저장), (임시 저장), (임시 저장), (의미 이해) // (임시 저장), (임시 저장), (의미 이해) 이러한 의미 전달 과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기 때문에 의식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분명히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게 된다. 모국어에서는 이 과정이 매우 빠르게 일어날 뿐만 아니라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 이야기의 앞뒤가 논리에 어긋나거나 어법상 오류가 있으면 금세 찾아내는 것이다. 뇌의 언어 정보 처리 속도는 상상 이상이다.

종종 한국어는 끝까지 들어야 의미가 파악되고, 영어는 서술어까지만 들어도 의미가 파악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영어도 우리말도 의미 단락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의미 파악이 가능하다. 또 영어에서는 동사가 제일 중요하다는 말도 자주 하는데, 일리가 없진 않으나 정확한 주장은 아니다. 왜냐하면, 가령 I go to school by bus every day라는 문장의 의미를 전달할 때 중요하지 않은 부분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주어 I가 he로 바뀌거나 서술어 go가 went로 변하면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기존 문법에서는 부사구로 취급해 경시했던 서술보충어는 어떤가? by bus가 아니라 on foot이 되거나, every day가 아니라 every Tuesday가 된다면, 주어와 서술어가 바뀌는 것만큼이나 큰 차이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I go to school by bus every day라는 문장을 이해할 때 ‘나는/간다/학교에/버스로/매일’ 형태로 디코딩할 것이 아니라 ‘나는 매일 버스로 학교에 간다’라고 의미 단락 전체를 디코딩해야 한다. 즉 영어 문장을 보면서 동시에 어구의 어순대로 번역할 게 아니라, 의미 단락인 영어 문장이 종결된 후에 의미 파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문장 하나가 아니라 대여섯 문장으로 구성된 하나의 문단을 듣는다면, 앞에서 제시한 패턴대로 임시 저장된 내용들이 이어지다가 한 문장의 의미가 파악되고, 또 임시 저장이 무수히 이루어지다가 또 다른 문장의 의미가 이해된다. 전체 문단이 마무리될 때까지 계속 이런 과정이 일어난다. 물론 처음에는 우리말로 디코딩하는 속도가 매우 더딜 것이다. 왜냐하면 영어 문장을 다 읽은 후에야 의미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나 영어 문장이 종결됨과 동시에 우리말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이는 통합 학습법의 연습 방법을 통해서 가능하다


■ 정보처리 용량의 한계, 신비의 암기법

 ≫ 마법의 수 7±2: 정보처리 용량의 한계(The Magical Number Seven, Plus or Minus Two: Some Limits on Our Capacity for Processing Information)」라는 단기기억장치에 관한 논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논문은 인지심리학자인 조지 밀러(George A. Miller) 박사가 1956년에 발표했는데, 내용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 인간의 단기기억장치가 저장할 수 있는 정보 단위(chunk)의 개수는 5개 이상, 많아도 9개를 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 우편번호나 전화번호가 6~8자리임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단어를 불러주고 몇 개를 암기할 수 있는지 살펴보면, 적어도 5개, 아무리 많아도 9개를 넘지 않는다. 따라서 단기기억 용량을 늘리는 방법은, 기억 단위의 개수를 늘리는 게 아니라 한 기억 단위(chunk)의 크기를 크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창문’, ‘겨울’, ‘남자’, 교회’, ‘전화’ 등 단어를 하나씩 암기하면 단어 하나가 하나의 단위(chunk)가 되어 많아도 아홉 개를 넘지 못한다. 하지만 이 단어들을 결합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어느 겨울에 교회 창문으로 보이는 한 남자는 전화를 하고 있었다”라고 기억한다면 이 5개의 단어가 묶여서 하나의 기억 단위로 뇌의 단기기억장치에 저장된다. 이런 방식으로 단기기억장치에 저장할 경우 25개 이상의 단어도 암기할 수 있다. 즉 이야기를 잘 만들어 하나의 단위에 더 많은 단어를 포함할 수 있다면 훨씬 많은 단어를 기억할 수 있다. 이렇듯, 하나의 단위를 크게 할 수는 있지만 단기기억장치에 저장되는 기본 단위의 개수는 5~9개 정도이다. 흔히 말하는 신비의 암기법은 이 기본 기억 단위의 크기를 효율적으로 크게 만든 방법들이다. 

 ≫ 실제로 수업 시간에 숫자를 가지고 실험을 해봤다. 칠판에 숫자를 적기 전에, 다 쓰고 나면 바로 지울 것이므로 집중해서 외워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칠판에 숫자를 30여 개를 적고 바로 지웠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숫자를 두 개씩 묶어 외웠고, 숫자에 강한 학생들은 세 개씩을 한 단위로 외웠다. 역시 대부분 5~6개 단위를 기억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두 개씩 외운 학생들은 10~12개의 숫자를, 세 개씩 외운 학생들은 15~18개까지 기억해냈다. 암기 대상을 단어가 아니라 숫자로 선택한 이유는 단기기억이 가능한 단위의 개수를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단어를 이용하면 익숙한 단어들일 경우 이야기를 만들어서 외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7 7 8 5 7 2 4 6 2 4 5 5 4 0 0 5 0 6 0 8 4 3 1 8…… 같은 식으로 나열했다. 그런데 이 숫자들은 전화번호들을 나열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778 5724’, ‘554 0050’ 같은 식이다. 만약 학생들이 이러한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다면 숫자를 2~3개씩 묶어서 기억하는 게 아니라, 7개의 숫자를 한 단위로 기억할 것이며, 총 기억할 수 있는 숫자의 개수는 (5단위를 기억한다면) 35개일 것이다. 이 단기기억장치의 기능을 이해함으로써 영어의 문장구조 습득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나온다. 보통 ‘나는 배가 고프다’라고 하면 이를 하나의 단위로 이해하지, ‘나는’, ‘배가’, ‘고프다’를 각각 이해하지는 않는다. 즉 하나의 의미단위인 문장은 하나의 단기기억 단위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에 5~6문장 정도 기억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 토익 점수 600점 수준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한 문장은 대략 10개 전후의 단어로 구성되었으며, 이야기의 흐름이 있는 4~5개의 문장을 암기하도록 했다. 집중력이 유지되도록 약간의 연습을 한 후 실시했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한 문장 정도를 기억해냈다. 간혹 두 문장까지 기억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10퍼센트 미만으로 나타났다. 이유가 무엇일까? 만약 암기력에 관한 문제였다면 우리말 문장 역시 5~6개를 기억해내기 불가능했을 것이다. 즉 이것은 단순히 암기력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영어 문장들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영어 문장을 들을 때, 하나의 의미로 듣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단어로 듣기 때문이다.


■ 얼마나 긴 문장을 외워야 하나?

 ≫ 하루 다섯 문장씩 외운다. 단, I love you 같은 짧은 문장은 안되고, 최소한 I am going to meet the man who you mentioned before 또는 Janet, one of my best friends, was fired due to repeated absences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문장들이 하나의 이야기 흐름이 되어 한국어로도 기억할 수 있으면 더 좋다. 그렇게 5개의 문장이 계속 이어져서 하나의 책 한권의 분량이 되었을 때,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이 반복되어야 한다.




■ 나의 한마디

≫ 이 글만 읽어본다면 미국은 나라의 경제를 위해서 전쟁 도발하는 나라로만 보인다.

과연 진실일까, 몇 가지 정론이 보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책을 읽고 그것이 100% 진실인양 맹신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지식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근래엔 주한미군에 대해서 100% 돈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하는 트럼프의 주장을 보면 확실히 미국은 한국의 편보다는 경제적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에서 존재하는 역사, 추측, 분석이 나의 생각을 한쪽으로 편향하도록 만들었으나, 미국 군수산업에 대한 나의 흥미 또한 자극시켰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알면 앞으로의 미국이 보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목차

1. 아이젠하워, 퇴임식에서 군산 복합체의 부당한 압력을 경고하다

2. 군산 복합체의 원조, 존 피어폰트 모건과 듀퐁

3. 미국의 군수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1,2차 세계 대전

4. 미국을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게 한 6.25 전쟁

5. 미국, 베트남전에 참전하다

6. 군산 복합체, 중동 전쟁의 덕을 보다

7. 북한의 활약

8. 미국,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참전하다

9. 미국 군사비 지출, 세계 군사비 지출의 43퍼센트

10. 부시 일가와 관련이 있는 군산 복합체 칼라일 그룹

11. 아버지 부시를 앞세운 칼라일의 한국 공략

12. 한국, 무기 수입 세계 2위

13. 신보수주의 네오콘의 득세


■ 왜 읽었는가?

≫ 제목부터가 흥미로웠다.

≫ 대한민국이 북한과의 대치상황 때문에 미국에 무기 수입을 의존하고 있기 때문

≫ 트럼프의 주한미군 100% 발언. 모든 미국시민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누군가는 그것에 동조할 수 있다는 것에 우리는 방위조약의 친미여야하는가? 경제의 편의 친중이여야 하는가? 미국의 진실과 역사가 궁금하여..

 

■ 내 마음대로 책 내용 3줄 요약

≫ 역사적으로 세계적인 경제 공황이 찾아오면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그것을 세계가 원치 않더라도 어떤 국가는 그것을 원해왔다. 군수산업 국가인 미국처럼

≫ 전쟁이란 돈을 끌어모으는 수단이며, 경제 공황의 탈출구다. 미국은 여러 전쟁에 참전하며 돈을 끌어모았고, 한국과 일본 또한 그 수순을 밟아왔다. (베트남참전/이라크파병 등)

≫ 미국은 이란과 북한의 핵 무기는 악의 축으로, 이스라엘 핵무기는 일절 발설도 못하게 한다. 미국의 이스라엘 사랑은 핵심부에 유대인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바마 내각 또한 마찬가지라는 점이며 현재진행형이다.


■ 군수산업의 배경

◀ JP모건 설립자 존 피어폰트 모건

≫ 1861년 존 피어폰트 모건은 스물 네살, 미국 남북 전쟁 때 북군이 폐기 처분하는 낡은 카빈 소총을 사재기하여 동일한 방법으로 북군/남군에 번갈아 되팔아 뒷돈을 챙겼다. 전쟁이 계속되며 군사 물자의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이를 통한 부를 밑천으로 제이피모건을 설립했다.

≫ 군수 산업은 "모건/록펠러/듀퐁" 3 군수 재벌로 이어진다. 그들은 화약생산 등 군수산업에 관련이 있었고, 세계대전을 통해 막대한 부를 쟁취한다.

≫ 1차 세계 대전은 1914년~1918년까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연합국과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동맹국 양 진영 사이에 벌어진 세계 규모의 전쟁이었다. 1차 대전 초기에 전선은 유럽 지역에 국한되었지만 1917년 4월 6일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선이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 미국의 참전은 독일 패전에 결정적 작용을 했는데, 참전의 표면상 이유는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인한 민간 상성 피해였다. 그러나 미국 참전의 실질적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분석된다. 당시의 중동 석유와 제이피모건 등의 참전종용이다.

≫ 미국은 석유를 놓고 다투는 열강들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바빠졌다. 중동을 유럽 열강들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다. 전쟁으로 형성된 황금 시장을 미국 산업 진흥에 연계시킬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연합국의 물품 구매력은 예상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미국은 전쟁참전 명분을 찾아야했고, 서섹스호 피격 사건을 조작해낸다. 서섹스호가 독일에 피격, 침몰되었다는 것이다. 종전 후 서섹스호는 총알 한 발도 맞은 적이 없었음이 밝혀진다.


■ 2차 세계 대전을 원한 미국

≫ 기업은 항상 평시보다 전시와 같은 비상시에 돈을 더 많이 번다. 미국에 있는 유대인들은 나치 독일의 박해를 받던 유럽의 유대인들을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직간접적 참전을 종용했다.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은 전쟁에 참여할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일본을 상대로 다양한 도발적 조치를 취했다. 루스벨트 정부는 미국에 존재하는 일본 자산을 동결했고, 파나마 운하 사용을 불허하였으며 영국과 공조해 일본에 대한 무제한적 무역 봉쇄 조치도 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을 지속하기 위한 석유 등 전략 자원의 수입이 불가능해졌다.

 1941년 11월 26일 미국은 일본에 통첩을 보낸다. 미국은 무역 봉쇄 해제에 대한 조건으로 중국과 인도차이나로부터 완전 철수와 독일, 이탈리아와의 동맹에서 탈퇴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미국도 잘 알고 있었다.
 1941년 12월 일본은 미국의 함정에 빠지듯 미국 진주만 기습을 감행했다 진주만 폭격은 미국을 2차 대전속으로 넣었다. 일본은 인도네시아와 보르네오에 있는 유전지대[각주:1]를 노렸다. 유전지대 점령은 간단했지만 배후에 미국 태평양 함대가 존재하여 안정적인 석유 수송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일본은 진주만을 폭격하고 유전지대를 얻었지만 미국의 잠수함 공격으로 석유 반입은 실패했다.

 일본의 가미가제 자살 폭격도 항공유 부족에서 나온 고육지책이었다.


■ 미군의 작전사령관실은 모두 군수업자

 2차 대전 당시 지휘관들은 록펠러와 모건 재벌의 고문 변호사 회장, 사장 등 재벌 중역 출신들이 많았다. 작전 본부는 증권 거래소 중역 회의와 다름없었다.


■ 전쟁의 효율성

 미국은 1600만 명의 군인들을 무장시키기 위해 방위 산업과 군비를 확대했다. 1939년에 미국 국민 총생산의 1.5 퍼센트에 불과하던 국방비 지출은 1944년 국민총생산의 45퍼센트까지 상승했다. 덕분에 1939년 17퍼센트의 실업률은 1944년엔 1.2퍼센트로 떨어지는 완전 고용 상태에 이르렀다. 이는 전쟁이 미국의 경기 부양에 얼마나 효율적으로 기여했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 미국을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게 한 6.25 전쟁과 애치슨 라인

 1950년 1월 10일 애치슨 국무장관은 "미국의 방위선은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이 방위선에 대해서는 미국이 책임을 지지만, 그 외의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우선 공격을 받은 국민의 저항으로 대비한 후 다음 국제 연합 헌장 아래 전 문명 세계의 원조에 의존한다"는 애치슨 라인을 발표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한국과 대만은 제외한 것이다. 김일성은 미국이 남한에 대한 방어의지를 포기한 것으로 판단하여 소련에 전쟁서약을 받아내었고 5개월 뒤 6.25 전쟁이 일어난다.

 2차 세계 대전 직후 미국의 군수산업은 판매 시장이 없어 불황에 빠졌었고 미국 경제도 침체를 겪고있었다. 미국의 경기침체를 해결해 준 것이 한국의 6.25 전쟁이었다. 1950~1953년까지 벌어진 6.25 전쟁은 미국경제의 회복과 재건에 크게 기여했고 이후 월스트리트 주가가 급속도로 상승세를 보였다.


■ 한국, 2014년 세계 최대 무기 수입국으로 부상

 우리나라가 2014년 세계 최대 무기 수입국이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뉴욕 타임스는 미국 의회조사국이 발간한 연례 보고서를 인용해 우리나라가 2014년에 78억 달러(9조 1300억원) 규모의 무기 구매 계약을 체결해 세계에서 무기 구입에 가장 많은 돈을 쓴 나라가 됐다고 보도했다. 78억 중 70억 달러 이상이 미국산 무기 구입에 사용됐다고 보도했다.



  1. 유전지대 : 석유를 함유한 하나 또는 몇 개의 지층이 단일 지질구조에 지배되어 존재하는 지역. [본문으로]





■ 나의 한마디

≫ 개인적으로 매우 존경하는 분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알고있는 역사책의 한국현대사가 아니라 나의 한국현대사라는 것이다. 보수진형에서 읽어본다면 꽤 반론이 많을 수 있는 내용들이 많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유시민의원께서 이 책을 쓰기 위해 정말 많은 문헌을 참고했고 그 노력이 읽는 내내 보였다. 어느 기사 참고부터 다른 책, 인물사 등을 샅샅이 뒤져보고 쓴 것이 보였다. 읽으면서 다시 한번 역사를 알아야 현재를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학생때는 그렇게 싫어하던 역사를 지금 나이에 다시 읽으면서 왜 선생님들은 이렇게 재미있게 설명해주지 않았을까 또는 내가 그만큼 관심이 없었나? 라는 회의감에 잠시 젖어본다.


■ 목차

1. 역사의 지충을 가로지르다 : 1959년과 2014년의 대한민국

2. 4.19와 5.16 난민촌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

3. 경제발전의 빛과 그늘 : 절대빈곤, 고도성장, 양극화

4. 한국형 민주화 :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한 민주주의 정치혁명

5. 사회문화의 급진적 변화 : 단색의 병영에서 다양성의 광장으로

6. 남북관계 70년 : 거짓 혁명과 거짓 공포의 적대적 공존


■ 왜 읽었는가?

≫ 개인적으로 매우 존경하는 분, 글도 잘 쓰시고 말쏨씨도 뛰어나며 서민의 편에서 나라를 생각하는 몇 안되는 분이기 때문에

≫ 필자는 한국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높다. 특히 과거 한국대통령들의 일대기가 궁금했다. 50년이 길다면 길고 멀다면 멀겠지만 가까운 역사인 만큼 현재가 보일 것이라 생각한다.

 

■ 내 마음대로 책 내용 3줄 요약

≫ 유시민이 말하는 한국근현대사이다. 그의 정치적 성향이 들어가있으며 개인적으로는 진보성향에 가깝고 그렇게 받아들이며 읽혀진다.

≫ 북한과 대한민국의 흐름, 당시 대통령들의 상황과 유시민의 추론이 들어가며 이승만부터 현재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유시민의원님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 대한민국 현대사를 만든 힘은 욕망이였다. 생리적, 안전, 소속감과 사랑, 자기 존중, 자아실현의 5가지 욕망이다.


■ 유시민이 말하는 북한과의 이야기

 (죽산 조봉암 나무위키 : https://namu.wiki/w/%EC%A1%B0%EB%B4%89%EC%95%94)

≫ 1959년 이승만 대통령은 조봉암을 법살했다. 청년 시절 열혈 공산주의자로서 투옥과 고문을 당하고 반일투쟁과 노동운동을 벌였던 죽산 조봉암은 해방 후 공산당과 결별했다. 정치에 투신해 국회의 헌법기초위원으로 제헌헌법을 만드는 데 기여, 대한민국 첫 농림부장관이 되었다. 그는 '북진통일론'을 비판하고 '평화통일론'을 주장한 죄로 교수형을 당했으며, 사형집행 임석검사에게 말했다. "나는 공산당도 간첩도 아니오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 져서 정치적 이유로 죽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할 것이오" 1959년 대한민국은 목숨을 걸지 않고는 권력의 불의에 대항하거나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행사할 수 없는 나라였다.

≫ 북한은 '미제 식민지 남조선의 해방'을 공공연히 주장하고 전쟁까지 일으켰지만 대한민국은 오로지 자기를 지키는 데 급급했다. 이승만 정부는 '북진통일', '멸공통일'을 외쳤지만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일재 잔재를 청산하지 않았으며 헌법이 명시한 민주주의를 실현하지도 않았다.

≫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북위 38도선 남북을 각자 점령한 미국과 소련에 있다. 애초에 자기 힘으로 광복을 이루지 못한 것은 우리의 부족함 탓이었다. 그렇다고 분단의 책임을 우리민족에게 묻는 것은 강도 피해자에게 범죄의 책임을 지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 유시민이 말하는 한국을 만든 힘

≫ 대한민국 현대사를 만든 힘은 5가지 욕망이였다. 안보국가 > 발전국가 > 민주국가 >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것은 인류의 문명사에서 보편적인 국가의 '계통 발생'이다. 국가의 진화는 '욕망의 위계'를 반영한다.


■ 유시민이 말하는 이승만

 (제1대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 이승만 박사는 1919~1925년까지 임시정부 대통령을 할 정도로 널리 인정받는 독립운동가였다. 투쟁보다는 외교에 치중한 나머지 힘도 없는 국제연맹에 조선을 위임통치해달라고 청원했다가 탄핵을 당해 임시정부를 떠났다. 그는 강대국 정부에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 일에 주력, 특히 미국 정부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했으며 1940년엔 일본이 미국을 침략할 것임을 경고하는 책을 출간해 미국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미리 승인해두지 않으면 독립하면서 소련의 손아귀에 들어가 동아시아 전체가 공산화될 것이라고 미국 정부와 국민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태평양에서 일본과 싸우는 데 소련의 협력이 필요했던 미국은 임시정부를 승인하면 소련 공산당을 자극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여 청원을 거절했다.

≫ 해방 후, 공산화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통일국가로 가는 길, 북한을 공산주의자들에게 주고 남한은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있었다. 후자의 대표자가 이승만 박사였다. 독재, 부패, 부정 선거를 저지르고 수많은 시민을 살상했지만 그는 분단국가를 세움으로써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확실하게 막았다. 하지만 아무리 빛나는 이념을 내세운다고 해도 사회 구성원 다수가 인정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나라의 국민이 기꺼이 받아들일 때, 국가의 결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복종할 때, 공동체를 지키려고 헌신하려는 태도를 보일 때, 그 국가는 정통성 있는 국가가 되며 자연스럽게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다.

이승만 정부는 절대빈곤에 빠진 국민의 경제생활을 개선하지 못했다.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제조업, 광업, 전력 등 일제강점기 산업의 중심지는 북한이었기 떄문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이며 정치인, 이승만을 비롯해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 김일성과의 라이벌 구도도 있었다고 함)

≫ 김구 선생을 비롯한 중도파들이 분단을 막으려고 38선을 넘나들며 협상을 벌이는 동안 이승만 박사는 분단국가의 권력을 장악할 준비를 했다. 이승만은 통일정부를 만드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면 분단을 막겠지만 통일국가의 권력을 공산주의자에게 뺏길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손을 잡았다. 자발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했다가 광복 후 '친미', '반공'의 깃발을 들고 살아남은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당시 반민특위[각주:1]는 682명을 조사해 559명을 특별검찰에 송치했다. 1949년 1월 반민특위가 노덕술을 체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을 즉각 석방하고 반민특위 관계자를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노덕술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해 고문했던 일제 특고형사가 아니라 반공정신으로 공산당을 때려잡는 대한민국의 경찰관이라는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반민특위 해체와 정부요인 암살 음모를 꾸몄다가 실패하자 특위활동에 앞장선 젊은 국회의원들을 간첩으로 몰아 구속했다. 이 사건으로 반민특위가 해체되는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국회는 1951년 반민법을 폐지한다. 처벌받은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 정부, 국회, 권력기관, 경제, 문화계에도 친일행위를 한 장본인이 권력을 쥐는 경우는 이제 거의 없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이 민족사적 정통성을 결여한 채 출발한 이유와 과정을 엄정하게 평가하고 철학적으로 소화하는 것뿐이다.


■ 유시민이 말하는 박정희

 ◀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서울시청 앞에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 소장

≫ 1961년 박정희 소장이 3,500여 명의 무장병력을 이끌고 헌법적 권한과 기능을 폭력으로 정지시키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혁명공약의 핵심은 두가지였다. 국가 자립경제 재건에 총력을 기울여 기아선상에 방황하는 민생고를 해결함으로써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과업을 이루면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는 것이다. '민생고 해결'은 아마도 박정희 소장의 진심이였을 것이지만 '병영복귀' 약속은 의도적인 거짓말이었다.

≫ 혁명과 쿠데타를 구분하는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쿠데타는 혁명과 달리 민중의 동의, 지지와 참여가 없이 폭력으로 국가질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행위이다. 군대를 동원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군사쿠데타다.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운영을 잘해서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고 해도 5.16이 군사쿠데타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 그는 국민의 관심과 지지를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부정선거를 저질렀던 내무부장관 최인규, 정치깡패 이정재, 조폭 두목 신정식, 발포 명령을 내린 대통령 경호실장 곽영주 등을 '혁명재판'에 회부해 사형을 확정한 다음 거리에 끌어내 '조리돌림'을 했다. 북한 인민재판이나 중국 문화대혁명 때 벌어진 것과 비슷한 야만행위였지만, 헌법과 법률의 절차를 지키느라 재판 절차를 지지부진하게 끌어가던 정부와 비교하면 당시 국민의 눈높이에서는 한결 속 시원한 응징이었다.

≫ 폭력으로 권력을 탈취했지만 폭력으로만 통치하지는 않았다. 고속도로와 비행장을 비롯한 사회간접자본을 건설, 전국에 상하수도와 전기를 보급했고 기생충과 전염병을 퇴치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결코 고결한 인간은 아니었으나 독재자로서는 크게 성공한 것이다.

1975년 5.13일 박정희 대통령은 유언비어 날조 유포, 헌법에 대한 부정,반대,왜곡,비방과 헌법개정 청원 선전/선동 등을 모두 처벌대상으로 규정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지 않으면 누구든 범죄가가 될 수 있었다. 1979년 10월까지 구속된 사람은 1,400명이었고 그중 1,000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정부는 대학생들을 대거 제적하고 감옥과 병영으로 보냈으며 대학교수와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언론자유수호투쟁을 벌인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함으로써 정부에 굴복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하는 시민들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대상은 사실 그의 인격과 행위가 아니라 그 시대를 통과하면서 시민들 자신이 쏟았던 열정과 이루었던 성취, 자기자신의 인생일 것이라고 유시민의원은 추측한다


■ 유시민이 말하는 김종필


≫ 박정희 참조들 가운데 가장 중요 인물은 김종필이었다. 1963년 공화당 당의장이 되었으며 2004년까지 9번이나 국회의원을 했다. 박정희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까지 40여 년 동안 정권의 '2인자' 역할을 했다. 1963년 고려대학교에서 강연을 한 데 이어 서울대 문리대에 가서 학생들과 토론회를 했다. 군사쿠데타의 주역이며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사람이 반정부투쟁을 하는 학생 대표들과 공개토론을 한 것을 보면, 그는 낭만적이고 수준 있는 정치인이었던 것 같다. 요즘 보수정당에는 그런 정치인이 보이지 않는다.

≫ 1961~1962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오히라 일본 외상과 협상 끝에 '무상 3억달러, 정부차관 2억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 이상'을 일본이 제공하는 것으로 청구권에 대한 합의를 이루었다. 1963년 9월 25일 중앙정보부는 반공법 위반, 내란음모죄, 내란선동죄를 적용해 서울에 군 병력을 투입했다. 1,000여 명이 체포되고 350명이 뇌란죄와 소요죄로 구속당해 박정희 정부와 2년 넘게 투쟁을 벌였던 청년들은 '63세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학생운동 리더로 명성이 높았던 인물로는 "김중태, 손학규, 이재오, 김덕룡, 현승일, 이명박, 정대칠, 이부영, 서청원, 박관용, 하순봉, 김경재" 등이다. 그 때 거리시위에 참여했던 20대 청년들이 70대 고령층이 되어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청옹성처럼 지키고 있다.

≫ 1979년 10월 26일 서울 궁정동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을 쐈다. 김재규 부장의 군법회의 진술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사태(시민시위)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했으니 총살됐지 내가 발포 명령을 하면 누가 날 총살하겠느냐" 라는 말에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 300만명이나 죽었는데 우리가 100~200만 죽는다고 뭐가 문제냐"며 맞장구 쳤다. 김종필은 이것은 민주혁명이며 5.16이 정당하다면 이것도 정당하다고 주장했지만 1980년 5월 24일 교수대에 올랐다.


■ 유시민이 말하는 한국 경제


≫ 국민경제를 비행기라고 생각하자. 4.19와 5.16이 연이어 일어난 1960년대 초 한국경제는 시동을 걸지 못한 비행기였다. 연료도 활주로도 없다. 1972년 무렵, 비행기는 가속도를 붙이면서 활주로를 달렸다. 10.26 사건이 난 1979년에는 바퀴가 땅을 차고 오른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가파른 상승은 1997년 갑자기 끝이 났다. IMF 경제위기였다. 1999년 반등한 한국 경제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불안정하지만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였다. 2008~2009년의 하락은 부동산대출 전문 금융회사들의 파산으로 시작된 미국발 국제금융위기와 환율관리 실패때문이었다. 현재 고도를 되찾았지만 예전과 같은 상승세는 회복하지 못했다.

≫ 경제성장만큼은 독재, 권위주의, 보수정권이 민주, 자유주의, 진보정권보다 더 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위 그림은 이것이 실증적 근거가 없는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한국 경제는 박정희 정권 때 이륙했다. 그런데 1인당 국민소득의 상승폭은 민주화 이후 10여 년 동안이 그 이전보다 더 컸다. 1979~1980 / 1997년 외환위기, 2008~2009년의 금융위기는 모두 보수정권이 일으켰다. 결국 보수와 진보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잘했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는 것이다.

≫ 국가가 주도하는 계획경제가 러시아공산당의 작품인 것은 박정희대통령에겐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유시민의원은 인간 박정희가 아무 '주의자'도 아니었다고 본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반공주의, 군국주의, 자유주의 그 어떤 이념도 그를 사로잡지 못했다. 박정희는 이승만 박사와 달리 자유주의 이념에 갇히지 않았다. 박정희 시대 한국 경제는 자본주의 선진국과 제국주의의 일본,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을 반씩 닮은 체제였다. 사유재산을 인정하면서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를 결합한 혼합형 경제체제였다. 오늘날 중국의 경제체제도 그와 비슷하다. 중국관료들이 한국 경제 발전과정을 연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담당자들이 '경제개발 7개년계획'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계획 경제는 공산당이 하는 짓이라고 생각한 탓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념적 편견에 사로잡혀 경제발전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역할을 내팽개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저지른 잘못 중, 가장 어리석다고 할 수 있다. 대중의 물질적 욕망을 외면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 유시민이 말하는 한국 경제의 발전

≫ 전통적 경제이론에 따르면 생산의 필수 요소는 자본과 노동력이다. 영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선진국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이 과제를 해결했다. 첫째는 봉건적 특권을 자본화하는 것이다. 농민들이 가지고 있떤 경작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해 토지의 특권을 소유권으로 전환했다. 양모 값이 오르자 농민들을 영지에서 추방했다. 쫓겨난 농민들은 도시로 이주해 노동자가 되었다. 둘째는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수탈이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등 산업국이 군사력으로 정복해 부와 노동력, 자원을 약탈하여 자본을 축적했다.

≫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실정에서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을 채택했다. 우리는 자본화할 특권이 존재하지 않았고 다른 나라를 수탈할 수도 없으며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동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자본을 해외에서 차입하고 기업으로 하여금 폭리를 취하여 자본의 축적을 이룬 것이다. 박정희 정권 때 일재의 착취와 수탈, 학살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3억 달러라는 헐값에 넘겨주었다. 정부는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하는 '기생관광'을 공공연하게 허용했다.

 한국 경제는 시장경제체제가 아니었다. 대한민국에는 자본시장과 금융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외국이나 한국은행에서 돈을 빌려 만든 투자재원을 정부가 기업에 직접 나누어주었다. 정부의 실체는 박정희 대통령과 측근 참모였다. 기업은 정부에 줄을 대지 못하면 자금을 받을 수 없었다. 특혜가 있는 곳에는 부패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재벌체제가 탄생했다. 현대그룹 정주영, 선경그룹 최종현, 삼성그룹 이병철은 그런 일에 빼어난 능력을 발휘한 사람들이었다. 재벌 총수들은 대통령과 권력실세들에게 통치자금을 넉넉하게 바쳤다.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IMF의 표준 처방전은 심한 부작용을 야기했다. 민간가계의 소비지출과 기업의 투자지출이 급감해 경기가 곤두박질한 상황에서 정부마저 재정지출을 축소하자 경기는 더 악화되었다. 기업의 차입경영 거품을 뺀다며 이자율을 사채금리 수준으로 올리는 바람에 일시적 유동성 부족에 빠진 기업들이 쓰러졌다. 주식가격이 바닥인 상황에서 강제한 공기업 민영화는 심대한 국가자산 손실을 낳았다.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이름 아래 기업이 노동자를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게 허용하는 정리해고제를 도입했고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연봉제와 성과급 제도를 확산시켰다. 노동조합은 약화되었고 실질임금이 하락했으며 고용불안은 높아졌다.


■ 유시민이 말하는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립

◀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

≫ 김영삼, 이철승과 3파전을 벌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역전승을 거둔 김대중 후보는 미,일,중,소 4대국의 한반도 평화보장론, 3단계 통일론, 자립경제와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대중경제론으로 의제를 선점했으며 향토예비군과 학생 군사교육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정책선거를 보여주었다. 김대중 후보는 "이번에도 정권교체를 못하면 박정희씨의 영구집권 총통시대가 오는 것" 이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김대중 후보의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 당시 김대중 후보는 90만 표 차이로 졌다. 공무원을 동원한 관권선거와 금품 살포, 군 부재자 부정투표, 야당 참관인 매수와 부정 투개표 등 만만치 않은 부정선거를 고려하면 사실상 김대중 후보가 이긴 선거라고 할 수도 있었다. 선거에서 이긴 박정희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했으며 헌법 효력을 정지시키고 비상국무회의가 국회 기능을 대신하게 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반쪽 민주주의에서 완전한 독재국가로 전락했다.

≫ 1973년 8월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졌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이 매우 성가신 인물이었다.


■ 유시민이 말하는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 위의 위인들에 대한 내용 정리는 필자는 다른 책에서 정리할 예정이다. 

 나의 한국현대사에서는 양김(김영삼,김대중) 그리고 전두환과 노태우 대통령의 정권장악과 독재. 노무현대통령의 스스로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1.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 약칭 반민특위(反民特委)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본제국과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악질적으로 반민족적 행위를 한 자를 조사하기 위하여 제헌국회에서 설치한 특별위원회이다. 제헌국회에서는 1948년 9월 7일 국권강탈에 적극 협력한 자, 일제치하의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박해한 자 등을 처벌하는 목적으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켰다. 반민특위는 그 산하에 배치되어 있는 특별경찰대를 활용, 일제시대의 악질기업가였던 박흥식, 일제를 옹호하여 조국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던 최남선·이광수 등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는 등 민족정기를 흐리게 했던 많은 친일매국분자들을 색출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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