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한마디

 ≫ 그들(7인)은 역사에서 실패로 기록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일제강점기 해방 후 우리는 남북으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민족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 뒤에는 이념적인 갈등과 오래된 피해의식으로 인한 혁명의 꿈이 있었고, 사람이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욕구들 그 중 하나인 권력 욕망이 있었다. 우리는 과거 사람들이 꿈꾸던 이상적인 사회와 지금 꿈꾸는 사회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에서야 사회주의국가와 공산주의국가의 실패가 보이고 있어, 그것에 반대하는 세력이 다수지만, 과거의 삶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거대 자본가들에게서 우리의 삶을 되찾을 수 있는 평등함을 꿈꾼 이상적 사회로 비쳐졌을지 모른다. 나는 지금도 경제적 평등을 꿈꾼다. 분배를 꿈꾸고 증세를 통한 복지국가를 꿈꾸고 있다. 적당한 분배가 결국 경제적 풍요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단순하게만 설명해보자면 '한 사람이 100억을 갖고 있는 것보다, 천 명이 100억을 갖고 있는 것이 돈을 더 잘 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생각 역시 우리 한국사회가 제대로 겪어보지 못했고, 필자가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편향된 생각일지 모른다. 현재의 서구 성공사례를 보며 꿈을 키웠고, 아직 지식이 얕고 경험도 적다. 그리고 실패한다면 먼 미래엔 비웃음을 살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 그들이 추구했던 것과 내가 추구하는 것은 같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행복한 삶일 것이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갈등으로 인해 생긴 이러한 초기 남북분단 갈등엔 경제적 배경을 배제할 수가 없다. 2016년 기준으로 한국의 경제체제는 '신자유주의'다. 1970년대 석유 파동을 기점으로 경제가 침체되고 있는 이유를 국가의 규제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는 그것을 동의했다. 미래를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복지는 축소되었고 노동자는 점차 힘이 약해졌다. 기업의 수익성이 높아지면 국부를 창출하고 결국 개인의 삶이 윤택해질 것이라고 했지만 자본가들은 더욱 자본을 축적하기만 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가난해져가고 있다. 다시금 경제와 돈이라는 힘으로 과거 권력 중심의 사회로 역행하고 있다고 본다. 필자의 경제 방향에 대한 생각은 '사회민주주의'다. 하지만 너무나도 과제가 많고 어려운 길이 많다. 인구수 문제, 고령화 외 수만가지의 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사회 문제에 서고 있다. 저자는 '해방 3년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결정론적 시각'이라고 짚었다. 필자는 초기 한국의 통일에 힘 쓴 민족주의 여운형에 대한 복기를 위해 정리할 예정이다. 궁금한 다른 사람은 책을 직접 읽어보는 것을 권한다.


■ 목차

 1.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 프로젝트|여운형과 조선인민당

 2. 혁명으로 인민정부를 건립하라|박헌영과 조선공산당 

 3. 임정법통이냐, 단정이냐|송진우와 한국민주당

 4. 혁명을 위해 분단의 벽을 쌓다|김일성과 북조선공산당

 5. 단정으로 권력을 꿈꾸다|이승만과 독촉국민회

 6. 임정법통론으로 신민주국가를 건립하라|김구와 한국독립당

 7. 좌우가 공존하는 민족통일국가를 꿈꾸다|김규식과 좌우합작위원회

 8.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


■ 왜 읽었는가?

 ≫ 김구, 김규식, 여운형, 박헌영, 송진우, 김일성, 이승만 7인의 행적이 궁금하여

 ≫ 우리는 왜 민족통일을 하지 못하였는가? 그 이유는 무엇이며 현대사에 반영할 수 있는 참고 지식은 없는지

 ≫ 당시 소련과 미국간의 갈등은 무엇이고, 분단국가가 된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여

 

■ 7인의 정치

 ≫ 해방 후 3년은 7인의 정치가를 대상으로 일제강점 하 3년 동안의 갈등과 행적, 각자가 추구하던 미래를 풀어나간다. 민족주의, 공산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 모두 정치 성향이 달랐고 각자가 꿈꾸던 미래는 달랐다. 아래는 그들을 한 줄로 잘 표현했다.

 ≫ 김구가 꿈꾸던 국가 : 임시정부통론으로 세우는 신민주국가

 

 ≫ 김규식이 꿈꾸던 국가 : 좌우가 공존하는 민족통일국가

 

 ≫ 김일성이 꿈꾸던 국가 :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한 국가, 필요하다면 분단도 해야한다

 

 ≫ 박헌영이 꿈꾸던 국가 : 사회주의혁명을 통해 만든 인민정부

 

 ≫ 송진우가 꿈꾸던 국가 :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만들어져야 한다

 

 ≫ 여운형이 꿈꾸던 국가 :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한 민족 국가

 

 ≫ 이승만 : 권력을 위해서라면 단독정부라도 만들어져야 한다.


■ 당시 한국의 배경과 상황

 ≫ 한국은 38선을 중심으로 미국과 소련의 미,소 양국의 분할 점령이 시작되면서 급격히 변화했다. 특히 남한이 심했는데,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미군들의 주둔이 있었다.

 ≫ 해방 후, 한반도에는 소련군이 진주[각주:1]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소련군 진주가 더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그 이유는 소련군이 8월 8일 대일본 선전포고를 한 이후 빠른 속도로 진격해왔기 때문이다. 일제 당국도 8월 17일까지 서울을 점령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런데 소련군의 진군이 38선 부근에서 멈췄고, 남쪽엔 미군의 진주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국의 정세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좌우익의 시작이었다.

 ≫ 1945년 9월 8일, 미군 제24군이 인천항에 상륙했다. 일본군의 경계 속에 상륙한 미군은 해방군이라기보다는 점령군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이 날 미군을 환영하러 나왔던 한국인 두 명이 사망했다. 미군으로부터 호위경계를 요청받은 일본군이 발포한 것이다. 일본군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는 향후 미군과 한국인들의 관계를 암시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 미군의 진주 초기부터 미군이 한국인보다 일본인의 말을 더 신뢰하고, 일제에 복무했던 관료들과 경찰들, 한국민주당과 극우적 인사들의 말을 더 신뢰했다. 이러한 미군의 태도는 한국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방해가 되었으며 민족 단결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 1945년 12월 7일,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의안에 관한 보도가 나오면서 미국, 영국, 소련, 중국 정부와 협의한 신탁통치안과 임시정부수립이 나왔다. 한국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미국의 입장, 혁명 분위기의 한국에서 임시정부의 수립이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탄생시키기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소련의 입장이 절충된 결과였다. 신탁통치는 신생국가의 기능을 일부 제한하겠지만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 진행되므로 한국인들이 우려하듯 독립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남한의 주요 언론 <동아일보> 언론들은 실제와 달리 미국이 즉시 독립을 주장하고 소련이 신탁통치안을 주장했다고 보도함으로써 마치 신탁통치안이 모스크바 결의안의 전부인 것처럼 보도하며 결의안의 가장 중요한 '임시정부 수립' 결정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이는 반소련, 반공산주의에 입각한 악의적인 왜곡 보도였다.

 

▲ 1946년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

 ≫  1946년 3월 20일, 미, 소 양국이 남북에 각각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면서, 남북 간 대결이 본격화된 것이다. 2월 8일 북한에서 수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2월 14일 남한에서 조직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 미, 소 대결의 실체였다.  미소공동위원회는 모스크바 결의안에 입각해 미, 소 양국이 남북의 주요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해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임시정부 참여하에 4개국 신탁통치협약을 작성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  미소공위는 극심한 대립을 벌였다. 소련 측이 미국 사령관 하지의 성명과 임시정부 수립 후 반탁운동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한 우익들의 태도를 문제 삼고 나섰던 것이다. 미국 측이 제출한 협의 대상 명부도 문제를 일으켰다. 미국 측이 제출한 20개의 정당과 사회단체 가운데 우익은 17개나 된 반면, 좌익은 3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미 · 소 양측의 의견 대립으로 미소공위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결국 5월 9일 미소공위는 무기한 휴회를 선언하고 말았다

 ≫ 국제적 협정의 이행은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두 갈래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하나는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좌우합작운동이었다. 이승만의 주장은 민족통일국가의 수립을 포기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민족이 위기에 처하자 오직 정권의 탈취만을 노리는 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미 · 소가 남북으로 분할 점령하고 있는 현실에서 분단 세력의 등장은 그만큼 조국의 분단이 현실화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만약 이대로 민족의 분열이 극복되지 못한다면 단정 세력은 점점 더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좌우합작운동은 이러한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탄생했다. 그 시작은 중도좌파를 대변하는 여운형이었고, 파트너는 중도우파를 대변하는 김규식이었다. 그러나 합작운동을 방해하는 이는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이 있었다.

 ≫ 미국정부는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을 통해 입법기구 수립이 통과되자, 여운형과의 약속을 어기고 1946년 10월 14일 ~ 10월 31일까지 입법기구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를 강행했다. 선거법에 의하면 보통선거여야 했지만 사실상 세대주가 투표하는 제한선거였고, 일정한 납세액 이상을 납부하는 자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차별선거였다. 게다가 동, 면, 군, 도에 걸친 4단계의 간접선거여서 민주성을 보장받기도 힘들었다. 이를 통해 선거 결과는 이승만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이 각 지방의 선거를 관리하고 각종 탈법과 부정선거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 여운형 : 자주적 민족국가 프로젝트

 ≫ 한국이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었다. 한국의 해방은 연합군의 공로임은 분명하지만, 한국인의 공로도 들어있었다. 우리 민족이 스스로 독립할 자격과 능력이 충분함을 보여줘야 했다. 여운형은 국내 세력이 총 집중해 일제의 식민지 권력을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에 위치한 관저[각주:2]에서 엔도를 만났다. 엔도는 일본의 항복 소식을 알리면서 여운형에게 한국의 치안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여운형은 자신이 치안을 맡는 조건으로 다섯 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1. 조선의 정치범과 경제범을 석방할 것

 2. 서울의 3개월분 식량을 확보할 것

 3. 치안 유지와 건설 사업에 아무런 구속과 간섭을 하지 말 것

 4. 학생의 훈련과 청년의 조직화에 간섭하지 말 것

 5. 조선 내 각 사업장에 있는 일본 노무자들을 우리의 건설 사업에 협력하게 할 것

 

 ≫ 이 5가지의 내용은 자신의 활동이 단순히 치안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란 선언이었다. 여운형은 치안과 함께 한국의 신국가 건설 사업에 착수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다. 엔도는 단순히 치안유지만 원했지만, 여운형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한국인들에게 명망이 높은 여운형이 치안을 맡아주겠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상황이었다.

 ≫ 여운형은 즉시 한국의 치안과 건국 사업을 주도할 조직,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맨 처음 한 일은 한국인 정치범과 경제범의 석방이었다. 그리고 건국치안대와 식량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한국의 치안과 식량 문제에 적극 대처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해방 후 2~3주라는 짧은 시간 동안 치안과 식량 문제 해결에 큰 성과를 냈을 뿐만 아니라, 민족국가 수립이라는 전 민족적 열망을 거대한 흐름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연합국 중에 어느 누구도 우리 민족의 자치 능력을 믿지 않았지만, 한국인들은 건국 준비위원회를 통해 자신의 자치 능력을 세계에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 여운형은 일찍 공산주의를 받아들였지만 그것은 민족해방 운동의 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경제적 평등에 깊이 공감했지만, 계급투쟁이나 전체주의적 운동 방식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진보적 민주주의나 인민적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였다. 하지만 의미까지 같지는 않았다. 여운형은 현재 한국에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혁명의 방식은 공산주의의 계급혁명이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혁명이며,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민의 경제적 해방과 자유, 평등의 이념을 확대하고자 했다는 측면에서 여운형의 민주주의는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와 유사했다.

 ≫ 여운형은 겅제적 측면에서 주요 산업 시설의 국유화와 토지 문제의 수평적 해결을 통해 봉건 잔재의 청산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는 주요 산업 시설 이외에는 사적 소유를 인정해 개인적 창의와 이윤 추구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발전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토지개혁으로 토지를 잃은 지주에 대해서도 충분한 생계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 한국은 두 가지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상당한 기간 동안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유지해야 했다. 낙후된 농업국에서 고도의 공업국으로 빠른 발전을 도모하려면 신국가의 독립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연합국의 경제적 원조가 필요하며, 계획경제를 수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 여운형은 민족해방을 완수하고 신국가를 건설하는 데 좌우익의 구별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민족통일전선에서 제외되는 것은 반민족 세력이면 족하다고 믿었다.

 ≫ 건국준비위원회에 들어오려던 우익들이 갑자기 불참을 시작했다. 이유는 미군의 진주 소식 때문이었다. 굳이 좌익들이 자리잡고 있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정치 세력화가 가능했다고 판단했다. 9월 1일 조선국민당 16일 한국민주당 등 우익 정당이 결성되었다. 미군의 진주 소식과 함께 여운형은 계획했던 인민대표회의를 현실화 해 전국인민대표자대회의를 열었다. 미군 진주 이전에 과도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수립을 서둘렀다. 정부 수립을 서두르려고 건국준비위원회 관계자와 재건파 공산당, 일부 연락이 가능한 지방 대표들로 채워지는 데 그쳤다. 이로 인해 조선인민공화국은 심각한 대표성 논란에 휩싸였다. 조선인민공화국은 전체가 아니라 일부만을 대표하는 정부가 되었다.

 ≫ 미군은 조선총독부를 대신해 미군정청을 설립하고 이것이 남한의 유일한 정부임을 천명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남한에서 가장 잘 조직되고 영향력있었으나 미군정부는 조선인민공화국을 '정부를 사칭하는 일개 괴뢰정당'으로 취급했다. 여운형의 취급도 마찬가지였다. 미군 사령관 하지는 여운형을 일제의 돈을 받아 정권을 가로챈 친일 사기꾼인 양 취급했다. 그 이유는 미군정 주변 통역사와 고문으로 활약하던 극우 인사들과 한국민주당의 악선전이 작용한 결과였다. 미군이 조선인민공화국을 탄압할수록 그 안에는 탄압에 잘 훈련된 공산주의자들만이 남게 되었다. 결국 박헌영의 공산당파는 이를 중심으로 인민공화국의 중앙과 지방을 모두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박헌영은 정치적으로 최고의 수혜자가 되었다.

 ≫ 여운형이 민족의 역량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사이, 경쟁자들은 이미 조선공산당, 한국민주당 등 하며 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세력의 결집보다 민족의 단결을 우선시했던 여운형은 이 사태에 절망했다.

 ≫ 1945년 10월 5일, 주요 정당들이 만났고, 좌익과 우익 세력들은 각각 인민공화국과 중경의 임시정부를 내세우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논의를 전개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여운형은 달랐다. 그는 민족의 통합을 위해서라면 당장이라도 인민공화국을 해산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여운형의 발언으로 분위기는 급반전했다. 그 결과 10월 10일 '각정당통일위원회'라는 상설회의체가 탄생했다. 이곳의 정당과 단체는 43개에 달했는데 38선 문제와 일본인 재산 문제 등의 긴급 문제를 논의하며 민족의 대동단결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대변했다. 그러나 10월 16일 이 위원회는 힘을 잃었다. 이승만이 귀국한 것이다. 이후 이 임무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로 전환되었고, 이승만에게 모두 넘겼다. 이후 이승만은 독선적이고 편파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결국 여운형과 박헌영은 독립촉정중앙협의회를 탈퇴했다.

 ≫ 1946년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한 휴회되자, 이승만은 단독정부를 주장, 여운형은 좌우합작운동을 벌였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하며 좌우 남북을 묶는 전달자 역할을 자임했다. 특히 그는 주요 정세의 변화 때마다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해 김일성(1912~1994)을 비롯한 북한 지도자들과 협의해왔기 때문에 북한과의 협상에 자신이 있었다.

 ≫ 미군정부는 좌우합작위원회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는데, 그 까닭은, 미군정부가 만든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 남한 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했고 우편향적 성격으로 협상 자리에서도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것도 있었으며 중도 세력까지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통해 1946년 7월 여운형과 김규식의 노력으로 좌우합작운동은 정당 · 사회단체 간 연석협의체로 발전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좌우익은 각각 5명씩 좌우합작위원 10인을 선출되었다. 그러나 박헌영은 우익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들을 제시해 좌우합작을 방해했다. 이는 사실상 민족통일전선을 부정하고 좌우합작을 깨뜨리겠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8월 3일, 이를 타파하기 위해 조선공산당, 인민당, 조선신민당을 하나의 대중정당으로 통합하는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은 인민당과 조선신민당에 침투해 있던 공산당 프락치를 동원해 양당을 흔들었다. 공산당 프락치들은 무조건적 합당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이는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여운형은 크게 분노했다. 그는 박헌영의 민족 분열적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좌우합작의 주요 축 하나인 세력이 반대하는 한, 여운형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 여운형은 다시 좌우합작 좌익의 5원칙과 우익의 8원칙을 절충한 7원칙을 발표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한 삼상회의 결정에 의해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2. 미국,소련 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 것.

 3. 토지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 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며 시가지의 기지 및 대건물을 적정 처리하며 주요 산업을 국유화해 사회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현하며 통화 및 민생문제 등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4.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에서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입법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해 실시케 할 것.

 5. 남북을 통해 현 정권하에서 검거된 정치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의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6. 입법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 방법, 운영 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해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7. 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결사, 출판, 교통, 투표 등의 자유가 절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 그러나 좌우합작 7원칙은 좌우익 양측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좌익에게 문제가 된 것은 입법기구 설치 조항이었고, 우익에게 문제가 된 것은 토지개혁 조항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입법기구 설치 조항이 단정으로 가는 도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운형 측을 극도로 비난했다.

 

 ≫ 김규식과 여운형은 7원칙에 서명하면서 과도입법기구 수립의 조건으로 세 가지 전제 조건을 내세웠다. 이와 함께 그들은 미군정으로부터 몇 가지 조건을 보장받았다.

 1. 좌우합작위원회가 입법기구 의원 2분의 1을 추천할 권한

 2. 간접선거로 치러질 의원선거에서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는 대의원이 될 수 없다.

 3. 간접선거 방식에서 민주주의 보장 약속이나 선거 감시원의 파견, 빠른 시일 내에 직접선거에 의한 입법기구로 대체할 것.

 

 ≫ 여운형과 김규식은 입법기구가 미군정의 자문기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한국인의 자치기구가 되기를 원했다. 과도입법기구가 좌우를 대변하는 한국인의 진정한 자치기구가 되면 이를 기반으로 미소공위를 재개해 임시정부 수립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군정부는 7원칙이 통과되는 순간 좌우합작위원회를 배신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입법기구 수립 조항이었을 뿐, 좌우합작위원회가 내세운 전제 조건이나 요구 조건이 아니었다.

 ≫ 미군정부는 1946년 10월 14일 ~ 10월 31일까지 입법기구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를 강행했다. 선거법에 의하면 보통선거여야 했지만 사실상 세대주가 투표하는 제한선거였고, 일정한 납세액 이상을 납부하는 자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차별선거였다. 게다가 동, 면, 군, 도에 걸친 4단계의 간접선거여서 민주성을 보장받기도 힘들었다. 이를 통해 선거 결과는 이승만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이 각 지방의 선거를 관리하고 각종 탈법과 부정선거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 여운형은 입법기구 설립을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미군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여운형은 12월 12일 개원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참가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배신자의 딱지를 가지게 되었고 그의 정치적 위상은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을 만큼 추락했고 우파와 좌파 모두에게 배척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결국 여운형은 12월 4일 전격적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 여운형 암살

 

 ≫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혜화동 로터리에 들어설 무렵, 파출소 앞에 있던 경찰 차 한 대가 갑자기 차를 막아섰다. 충돌을 피하려고 차가 속도를 줄이는 순간 한 사내가 뒤쪽 범퍼로 뛰어올라 세 발의 총을 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경호원 박성복이 도망가는 사내를 뒤쫓았지만, 모퉁이에서 제지당하고 말았다. 그를 막은 사람은 동대문경찰서 소속의 한 경찰이었다. 범인은 사라졌다.

 ≫ 사건의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미국 소련 공동위원회를 통해 확대된 여운형의 정치적 영향력을 두려워했던 세력이 암살한 범인의 배후라고 추측할 뿐이다. 사건이 발생하자 미군정부는 여운형의 집을 수색했다. 그런데 수색 목적은 암살범을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북한과 연락해본 자료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한의 대정객 여운형에 대한 미군정부의 마지막 대접은 겨우 그 정도였다.

 ≫ 여운형의 죽음과 함께 민족통일국가의 꿈도 종말을 맞았다.

 

 

 

■ 여운형 요약

 ≫ 일본은 여운형에게 치안을 요구했으나, 한국을 위해 일본에게서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 정치범, 경제범을 석방하고 식량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치안과 식량문제에 대처했다.

 ≫ 여운형은 공산주의적 발언을 했었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공산주의자의 경제적 평등은 공감했으나, 그가 꿈꾸던 사회는 선거가 있는 민주주의 사회였다.

 ≫ 여운형은 주요 산업 시설만을 대상으로 봉건 잔재 청산을 제시했다. 다른 산업시설은 자본주의적 발전을 원했다. 그리고 토지를 잃은 지주에겐 생계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 미군 진주 소식이 일자, 여운형은 정부가 미리 존재하는 것이 정치에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정부 수립을 다급히했다. 그렇게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급히 만든 정부는 전체가 아닌 일부만을 대표하는 정부였다. 남한에 도착한 미군은 미군정청만이 유일한 정부라고 주장했다.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은 미군 진주로 해체되었다. 여운형이 만든 조선인민공화국은 괴뢰정당 취급받았다. 조선인민공화국은 이로 인해 여운형에서 박헌영쪽으로 세력이 기울었고 공산주의로 변질되었다. 여운형은 박헌영에게 잠식당한 인민공화국에 거리를 두면서 독자적인 세력화를 꿈꿨다.

 ≫ 1946년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한 휴회되자, 이승만은 단독정부를 주장, 여운형은 통일을 위한 좌우합작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박헌영이 이를 방해했다.

 ≫ 8월 3일, 이를 타파하기 위해 조선공산당, 인민당, 조선신민당을 하나의 대중정당으로 통합하는 것을 제안했다.

 ≫ 여운형과 김규식은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고, 미국으로부터 입법기구 2분의 1을 약속받았고, 반대파를 무릅쓰고 승인하였으나 미군정부는 이를 어겼다. 그로 인해 여운형은 배신자 딱지를 가지게 되었고, 1946년 12월 4일 정계를 은퇴했다.

 ≫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혜화동 로터리,  파출소 앞에서 여운형은 암살당했다.

 


  1. 진주 : 군대가 처들어가거나 파견되어 주둔함. [본문으로]
  2. 관저 : 정부에서 장관급 이상의 고관들이 살도록 마련한 집.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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