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글 : [인물, 아돌프히틀러] 2차 세계대전은 왜 일어난 것인가

관련글 : [인물,니콜라테슬라] 100년의 시대를 앞서간 불운한 천재 과학자


■ 나의 한마디

 ≫ 아인슈타인, 그는 암기식, 주입식 교육을 싫어했다. 아인슈타인에 대한 책은 창의적 교육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예가 아닐까 싶다. 그의 이러한 창의적 재능은 스위스 교육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한국도 함께 본 받았으면 좋겠다. 암기식/주입식 교육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단기적인 효과가 클 뿐 나이가 들어서는 다시 외워야한다는 점일 것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를 회상해보면, 어릴 때 주입식/암기식 교육에 지쳐 공부를 안 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릴 때 그렇게 싫어했던 사회와 역사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 그 때의 교육이 시험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고, 내가 나이가 먹어서도 수학과 영어 정도가 필요할 뿐 사회에서는 필요없다는 어린 지식을 바탕으로 공부했던 듯 싶다. 그 이후로 나이가 점차 들면서 실제 사회에 나와 사회와 정치, 역사에 관련 없는 일을 하고 있지만서도 이렇게 블로그로 포스팅하고 그에 대한 책을 읽고 문학을 감상하는 내 자신을 돌이켜보면, 어릴 때 좀 더 재밌게 공부했다면 나라는 사람이 좀 더 바뀌었을까 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 목차

 1. 지진아 혹은 천재

 2.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우등생이 될 자질이 없다.

 3. 특허국

 4. 기적의 해

 5. 빛은 휘어진다

 6. 망명

 7. 제2차 세계대전


■ 왜 읽었는가?

 ≫ 위대한 과학자로 알려진 아인슈타인, 하지만 정작 스스로 알고 있는 부분이 없기에

 ≫ 핵 개발 및 원자폭탄을 만든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자. 인물에 대한 지식 습득.

 ≫ 1, 2차 세계대전에 대한 필자의 관심으로 인해


■ 내 마음대로 책 내용 3줄 요약

 ≫ 아인슈타인은 철학자가 되고 싶었했고, 어린 나이부터 똑똑했지만 주입식 암기식 공부를 싫어했고 관심있는 분야만 공부했다.

 ≫ 아인슈타인은 혼자서 만들어진 사람이 아니였다. 처음부터 환경이 좋진 않았지만 그의 환경은 토론할 수 있는,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지인이 함께였다.

 ≫ 1905년 아인슈타인에 의해 원자와 분자의 존재가 밝혀지고, 광전기를 발견하여 레이저와 TV의 기초가 되며 상대성 이론을 통해 핵 분열 기술이 개발된다.


■ 아인슈타인의 생애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879년 3월 14일, 독일 남부의 소도시 울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헤르만 아인슈타인과 어머니 파울리네 코흐는 유대인이었지만, 두세 세대를 거치는 동안 독일에 동화되어 유대계적 문화나 관습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 헤르만은 수학에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이었고, 당시 독일의 반유대주의적 정서로 인해 대학 입학 허가를 받지 못하여 상공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유년 시절 학교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놀림을 받았는데, 그때 처음 자신이 이질적 존재임을 느꼈다고 한다. 이런 일에 외톨이적 기질이 더해져 아인슈타인은 평생 이방인으로 살아간다. 

 ≫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 매우 조용한 아이였다. 시끌벅적한 사촌들 틈에서 늘 조용한 자리를 찾아가 혼자 노는 외톨이였다. 또한 두 살이 지나서야 간신히 말을 시작했고, 다섯 살이 되어서야 말을 깨쳤을 만큼 늦된 아이였다. 부모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지진아’로 여겼는데, 하녀들도 마찬가지여서 그를 ‘멍청한 아이’라는 의미의 ‘데페르테(depperte)’라고 부르곤 했다. 어린 아인슈타인은 크게 주눅이 들어서 무슨 말인가를 하기 전에 꼭 여러 번 모든 할 말을 연습하고 입 밖에 내곤 했다. 훗날 위대한 과학자가 된 이후에도 그는 입 속으로 여러 번 말을 반복해보고 말하거나, 중요하거나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는 반드시 두세 번씩 반복해 말했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쉽게 성을 내고 잘 토라지곤 했는데, 화가 날 때면 얼굴이 하얗게 질려 손에 잡히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던졌다. 다섯 살 때는 가정교사에게 의자를 던져서 가정교사가 놀라 달아난 적도 있었다

 ≫ 그가 과학자로서 성장하는 데 첫 번째 토대가 되는 중요한 경험, 처음으로 느낀 자연의 경이로움은 너댓 살 무렵에 찾아왔다. 잔병치레 때문에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아버지가 가지고 놀 ‘특별한 장난감’ 하나를 쥐여 준 것이다. 그 물건은 나침반이었다. 그때까지 아인슈타인은 물건을 만지거나 접촉해야 물건이 움직인다고 믿었는데, 나침반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움직여도 결국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늘 한 방향으로 돌아오는 나침반 바늘은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안겨주었다.

 ≫ 어린 시절 늦되었다는 일화들 때문인지, 아인슈타인에 대해서는 낙제생에서 천재 과학자가 되었다는 신화가 흔하게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여섯 살 때 가톨릭계 학교인 페테르슐레에 입학했다. 학업 성적이 특출하지는 않았지만 과학과 수학만은 매우 우수했다. 성적이 나쁜 과목은 그가 전혀 관심 없는 분야인 데다, 주입식, 암기식 교육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하나하나 문제를 차분히 생각하고, 그에 대해 답을 하기 전에 곱씹는 버릇이 있던 어린 아인슈타인에게 주입식 교육은 곤혹스러웠을 뿐이었다. 반면 수학이나 과학 교과서의 내용을 탐색하고 증명하는 데는 크게 흥미를 느꼈다. 초등교육 시절부터 그는 단순히 교과서적 증명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증명법을 찾으려고 늘 생각했다. 친구들과 놀러 나가지도 않고 온종일 방 안에서 답이 나올 때까지 자신이 만든 증명을 입증하는 데 몰두했다.

 ≫ 독일 남부 지방에서는 목요일에 가난한 유대인 이웃을 초대하여 저녁을 대접하는 전통이 있었다. 탈무트는 그 전통에 따라 목요일마다 아인슈타인의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과학 책을 가져다주고, 당시로서는 현대적인 책에 수록된 여러 과학적 증명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탈무트가 가져다준 책 중 특히 아인슈타인을 사로잡은 책은 기하학 책이었다. 고작 열두 살의 어린 아인슈타인은 유클리드의 평면기하가 소개된 작은 책자를 밤낮으로 읽고 또 읽으며 성경처럼 소중히 여겼다. 탈무트는 아인슈타인이 수학과 과학 문제들을 하나씩 통달해 나가자, 다음으로는 칸트, 흄, 에른스트 마흐 등의 철학 책들을 가져다주었다. 아인슈타인은 그중에서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좋아했는데, 그의 철학적 사고의 기반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아인슈타인은 학업을 마치기 위해 뮌헨에 혼자 남아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권위적인 교사, 구속받는 생활을 싫어하는 그에게 기숙사 생활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무렵에는 주입식 교육에 완전히 진저리를 내서, 학업에 대한 흥미조차 잃었다. 거기에다 열일곱 살이 되면 군대에 가야 했다. 군대라면 끔찍하게 여겼던 그로서는 한 달 한 달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공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들은 하사관 같고 고등학교 교사들은 하급 장교들 같다.”며 싫어했다. 결국 그는 그해 여름에 의사에게 신경쇠약 직전이라는 진단서를 받아내고 가족이 있는 밀라노로 도망쳤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퇴학당했다고 말했지만, 가족은 그가 스스로 학교를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 곳에도 적을 두지 않고 1년여를 빈둥대며 지냈다. 아버지는 고교 중퇴자인 아들의 미래를 걱정했다. 실용적인 직업을 얻으라고 설득했지만 아인슈타인은 철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 아라우 주립학교에서 청년시절 아인슈타인

 ≫ 아인슈타인은 아버지와의 타협 끝에 1년간 아라우 주립학교에서 고교 과정을 마쳤다. 스위스 학교의 수업은 독일 학교와 여러 모로 달랐다. 그는 아라우 주립학교의 자유로운 정신, 권위에 기대지 않는 교사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잃어버린 학문에 대한 호기심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느긋한 스위스식 방식을 사랑하게 되었다. 과학자로서 그에게 큰 업적을 달성하게 할 사고실험도 이 시기에 체득했다. 최초의 논문 <자기장에서 에테르의 상태에 관한 연구에 대하여>도 이 무렵에 썼다. 그러나 여전히 관심 없던 화학, 프랑스어, 생물학 등의 성적은 매우 나빴다. 그럼에도 그는 2등으로 아라우 주립학교를 졸업하고, 1896년 10월 취리히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또한 1896년 1월, 독일 국적을 포기했고, 5년간 무국적자로 지낸 후에 스위스 국적을 취득한다. 취리히 공과대학에서 아인슈타인은 수학과 물리학 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했다. 취리히 공과대학은 당시 세계적으로 명망 높은 기술대학이었다. 학교와 교사의 권위에 대항하는 아인슈타인의 성격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나타났다. 그는 정규 교육 과정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수업에도 자주 불참했다. 이론적인 수업을 중심으로 하는 수학은 입학 초기에 거의 포기했다.
 ≫ 아인슈타인이 처음 얻은 자리는 말단 사무직인 기술심사원이었다. 특허국은 오히려 그가 연구하기에 충분한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일단 초봉이 3,500프랑이었는데, 이것은 당시 취리히 공과대학에 조교로 취직했을 때의 연봉보다 많았다. 또한 이 자리는 각종 기계 장치의 특허들을 심사하는 자리였다. 당시 기술 발전의 흐름을 가장 빨리 대면하기에 적합한 자리였던 것이다. 그는 각종 기계장치들을 사고실험을 통해 구동해보면서 사고실험 능력을 발달시켰다. 상사인 할러로부터 ‘지극히 신중한 태도’로 연구자들이 제출한 서류 하나하나를 꼼꼼히, 회의적인 태도로 바라보는 태도를 배우기도 했다. 업무가 과중하지 않아서 정시에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물리학과 자신의 논문에 대해 숙고할 시간도 충분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시절에 자신의 자리에 만족했으며, 후일 이 자리를 “내가 가장 아름다운 아이디어를 깨치게 된 세계적인 수도원”이라고 일컬었다. 특허국 직원이던 베소와의 우정 역시 그의 사고를 풍부하게 해주었다. 아인슈타인은 당시 그가 쓰던 논문에 대해 공학도 출신인 베소와 수많은 토론을 했다. 베소는 아인슈타인의 논리적 오류를 되짚어주기도 하고 다른 관점을 제시해주기도 했다. 그는 훌륭한 과학 토론 상대이기도 했으며, 음악을 좋아하던 아인슈타인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 아인슈타인의 논문, 뉴턴 논리를 깨다.

 ≫ 1905년은 과학사에서 ‘기적의 해’라고 일컬어진다. 이 해에 아인슈타인은 과학계를 뒤흔들 세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17세기 중반 이후 과학은 뉴턴의 세계관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19세기 들어 과학자들은 뉴턴의 운동 이론만으로 설명하기 힘든 현상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의 세 논문은 기존 고전 물리학의 토대, 즉 뉴턴의 세계관을 부정하고 새로운 물리학적 토대를 세움으로써 이런 의문점들을 해소했다. 아인슈타인의 이 논문들은 고전 물리학의 시대를 벗어나 현대 물리학의 시대를 여는 토대가 된다.


 ≫ 첫 번째 논문 <정지 액체 속에 떠 있는 소립자의 운동에 대하여>는 브라운 운동의 원인에 관한 것이다. 브라운 운동이란 물 위에 떠 있는 꽃가루나 공기 속의 연기 티끌 같은 작은 입자들이 끊임없이 진동하고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일컫는다. 지금이야 원자와 분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일반인들도 알고 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원자의 존재는 논란거리였다. 아인슈타인은 액체나 기체 주위에 있는 보이지 않는 분자들에 의해 이런 소립자들이 움직인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또한 입자들의 움직임을 측정하여 분자의 질량과 수를 계산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 논문을 발표하고 몇 달 후, 독일의 실험물리학자 헨리 자이덴토프가 현미경을 통해 원자와 분자의 존재를 증명했다.


 ≫ 두 번째 논문 <빛의 발생과 변화에 관련된 발견에 도움이 되는 견해에 대하여>는 당대 또 다른 난제인 광전기에 관한 것이다. 뉴턴은 빛이 미립자라는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으며, 이를 통해 빛의 굴절 현상, 광선의 반사 법칙 등을 설명했다. 하지만 뉴턴 역시 이 이론만으로 빛과 관계된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것은 19세기의 과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빛이 파동이냐, 입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과학자들은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빛이 파동의 성질을 지닌 동시에 작은 알갱이, 즉 양자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이 개별 양자(광양자) 이론을 통해 물질이 빛을 흡수했을 때 광전자(光電子)가 생기는 현상, 즉 빛을 비추었을 때 몇몇 고체가 전자를 방출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졌다. 이 이론은 오늘날 TV와 레이저, 태양전지 등 다양한 전기 장치가 개발되는 토대가 된다. 또한 이 논문은 1921년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다.


 ≫ 세 번째 논문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 역학에 대하여>가 바로 그 유명한 상대성 이론이 담긴 논문이다. 이때의 논문은 상대성 이론의 초안 격으로, 그해 발표된 질량과 에너지에 관한 짧은 논문과 함께 ‘특수 상대성 이론’이라고 불린다. 그 전까지 물리학 세계는 뉴턴의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의 법칙으로 설명되었다. 즉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고 본래적이며, 외부의 어떤 것에도 영향 받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이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을 부정했다. 그는 시간과 물체의 운동은 관찰자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가정했다. 즉, 관측하는 사람이 움직이는 속도에 따라 빛이 전달되는 시간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질량과 에너지에 관한 논문 <물체의 관성은 에너지 함량에 따라 달라지는가>는 3쪽짜리 논문이다. 뉴턴의 세계관에서 에너지와 질량은 서로 무관한 것이었다. 즉, 에너지 보존 법칙과 질량 보존의 법칙은 별개의 것이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질량과 에너지가 등가이며, 서로 교환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물체의 질량이 에너지로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논문에서 특수상대성 이론을 바탕으로 변환인자(C²)를 사용하여 에너지와 질량이라는 서로 다른 단위의 물리량이 등가임을 보여주었다. 즉 에너지의 양은 물체의 질량에 빛의 속도를 곱한 값(이것이 그 유명한 공식 E=MC²다)이라는 것이다. 이 개념은 물질 자체에서 큰 힘을 얻어내는 원자폭탄 개발의 기초가 된다. 26살의 청년이 쓴 논문들, 특히 상대성 이론에 관한 논문들은 이때까지의 세계관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았다. 때문에 이 논문들은 처음에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취리히 공과대학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논문을 반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막스 플랑크 등의 몇몇 저명 물리학자들이 그의 이론을 알아보고 지지했다. 그리고 실험 물리학자들에 의해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점차 입증되기 시작하면서, 몇 년 후 아인슈타인은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과학자가 된다.

■ 특수상대성 이론을 넘어선 일반상대성 이론. 빛은 휘어진다

 ≫ 1916년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다. 1905년의 상대성 이론은 우주 공간에서의 현상 및 등속운동에 대한 것으로, 제한적인 설명이라 ‘특수’상대성 이론이라고 불렸다. 1916년의 논문은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이라는 이전의 개념을 보강하고 확장시킨 것으로, 시공간과 물질 간의 관계 및 이 둘을 연결하는 중력의 상호작용에 관한 것이다. 블랙홀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독창적인 다우주론을 제기한 물리학자 존 휠러는 상대성 이론에 대해 “물질은 시공간이 어떻게 휠지를 말해주고, 시공간은 물질이 어떻게 움직일지 말해준다.”고 한마디로 요약했다. 일반상대성 이론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중력에 의해 시공간이 휘어진다는 것이다. 즉 물질의 존재가 주변 공간을 변형시켜 중력장을 만든다는 이론으로, 아인슈타인은 태양을 지나는 별빛이 일정한 각도로 휘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때까지는 뉴턴식 설명에 따라 빛이 직선으로만 나아간다고 여겨졌다. 이 논문은 아인슈타인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이 논문을 구상하고 나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중력 이론을 설명할 수학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친구 그로스만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로스만은 자기보다 기하학에 전문적 지식을 갖춘 수학자 리만을 소개해주었다. 리만의 곡률 방정식을 토대로 아인슈타인은 집요할 정도로 상세하게 자신의 이론을 구축했다. 


■ 특수상대성 이론을 넘어선 일반상대성 이론. 현대 우주 이론의 시발점

 ≫ 일반상대성 이론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세계가 전쟁의 포화 속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 전역에서 군국주의적 가치가 솟아올랐고, 과학자들 역시 불타는 애국심으로 전쟁 무기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는 동료 과학자들이 국수주의자가 되어 전쟁에 뛰어드는 상황에 크게 놀라고 실망했다. 독일 내 지식인들은 심지어 독일이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하고, 평범한 시민을 공격한 사실 관계를 부정하고, 독일의 군국주의가 독일 민족 문화를 유지하게 했다는 선언을 하기까지에 이른다. 이 선언은 독일 정치 지도부의 주도 아래 93명의 독일 지식인들이 서명했다고 하여 ‘93 선언문’이라고 불린다. 아인슈타인은 여기에 반대하여, 과학자들은 세계주의자가 되어야 하며 유럽 학자들은 빨리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호소문을 작성했다. 또한 괴테 연맹을 통해 ‘전쟁에 대한 의견’을 발표했다. 그는 애국주의란 “야만적인 증오와 대량 학살”을 정당화하는 도덕적 요소이며, 이런 야만성은 남성들이 지닌 성적 본성에 따른 것이라고 썼다. 그리고 이런 공격성을 통제하기 위해 세계기구를 창설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당대 수많은 유럽 지식인들이 그랬듯 전쟁은 아인슈타인에게 인간성에 대한 회의를 품게 했다.

 ≫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다. 1919년 5월 29일에는 영국의 아서 에딩턴이 개기일식 관찰을 통해 빛이 휘어지는 현상을 입증했다. 일반상대성 이론이 입증된 것이었다. 영국과 독일은 전쟁 중이었지만, 영국 과학자들 및 언론들은 이 일을 “인간 사고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과”로 인정했다. 이런 극적인 상황은 평소 아인슈타인이 주장하던 세계주의와도 부합했다. 물리학자 레오폴트 인펠트는 “서로 싸우던 나라의 과학자들이 협력하다.”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높아졌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과학의 혁명: 새로운 우주 이론. 뉴턴 이론이 뒤집어지다”라는 기사를 내보냈고, <뉴욕 타임스>는 “하늘에서 빛이 휘어지다: 아인슈타인 이론의 승리”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후 일반상대성 이론에 기초하여 현대 우주 이론이 발전하게 된다.
 ≫ 1920년대에 상대성 이론의 혁명성으로 인해 아인슈타인은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아인슈타인은 영국, 미국 등지에서 수많은 초청 강연을 치르면서 인기를 실감했다. 어느 나라에서나 그를 국빈 대우했으며, 그가 저버렸던 독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독일 시민권을 포기했음에도 독일은 그를 자국민으로 여겼고, 베를린 아카데미 활동을 그의 가장 중심적인 활동이 되게 하려고 했다.

■ 아인슈타인의 강의 일화

 ≫ 1908년에야 아인슈타인은 베른 대학의 객원 강사 자리를 얻었으며, 이듬해에는 취리히 공과대학 부교수 자리를 얻었다. 취리히 공과대학의 부교수 자리는 당초 친구인 프리드리히 아들러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논문이 지닌 가치를 알아본 아들러는 자신 대신 그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그럼에도 아인슈타인이 교수가 되는 데는 두 가지 장애물이 있었다. 그 자신도 인정했듯 그가 강의를 썩 잘하는 편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상사인 정교수 클라이너는 그를 교수로 채용하기 전에 베른 대학 강의를 청강했다. 아인슈타인은 강의 내용을 미리 준비하는 유형이 아니었다. 그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대로, 논리적 흐름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기 머릿속 사고에 따라서 강의했다. 여기에다 웅얼거리는 말투까지 더해진 아인슈타인의 강의는 마치 독백 연극 같았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자치고는 수학을 잘하지 못했다. 수학적 설명을 하다가 증명을 잘못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복잡한 문제를 풀다가 잠시 멍하니 다른 이야기를 주절거리면서 생각을 마친 끝에 다시 원래의 문제로 돌아오기도 했다. 학생들은 아인슈타인의 강의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재미있게도, 훗날 그가 명성을 얻게 되자 이런 강의 태도까지 매력적 요소로 탈바꿈했다. 학생들은 아인슈타인의 말을 따라잡기 위해 더욱 열심히 귀를 기울였고, 그전까지 비난 요소가 되었던 수학적 실수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 유대인 혐오로 인한 아인슈타인, 미국으로의 망명

 ≫ 아인슈타인의 이름은 과학 분야에서 하나의 권위가 되었다. 하지만 1920년대만 해도 이런 명성에 비례하여 상대성 이론이 허무맹랑하고 공허한 이론이라는 반격들도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특히 독일의 경우 아인슈타인을 전적으로 환영하는 것만도 아니었다. 전쟁 패배와 그 이후에 이어진 정치적, 경제적 혼란들로 인해 독일에서는 국수주의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반유대주의가 다시 기승을 부렸고, 아인슈타인은 매우 좋은 표적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전쟁 기간 동안 독일의 군국주의를 비판한 데다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상대성 이론이 적국인 영국에서 먼저 입증되었다는 것 때문에 배타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과학자들 중에서도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유대인 물리학이라면서 수용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반 아인슈타인 운동에 대해 비이성적이라고 하는 과학자들도 물론 존재했다. 1920년 8월 25일에는 베를린 홀에서 상대성이론과 아인슈타인에 대해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가 일어나기도 했다.

 ≫ 그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베를린의 분위기와 자신을 환영하는 미국의 분위기에 크게 이질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세계주의 및 시오니즘을 더욱 지지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아인슈타인이 대면한 유대인들은 대개 유럽의 중산층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그는 가난한 유대인들을 처음 목격했다. 이 일로 그는 전 세계에 퍼진 가난하고 고통받는 유대인들에 대해 인지하게 되었다.

 ≫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반유대주의는 아인슈타인의 목숨을 위협할 수준으로 발전한다. 독일에서는 나치당이 급격히 세력을 확장해나갔고, 세계는 2차 세계대전으로 치달았다. 독일 내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민족주의,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1933년에는 아인슈타인이 50세 생일을 기념하여 지었던 카푸스의 여름 별장이 무장 폭도들의 습격을 받았다.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 앞에서는 상대성 이론에 관한 책을 불태워버린 일도 있었다. 나치가 의회 다수당이 되고, 히틀러가 총통으로 등극하면서 상황은 더욱 좋지 않게 흘러갔다. 나치는 아인슈타인의 재산을 압류하고 은행계좌를 폐쇄했으며, 아인슈타인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베를린 아카데미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반정부 선전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그를 제명했다. 아인슈타인이 망명지로 선택한 곳은 그를 받아준 프린스턴 대학원이 있는 곳, 미국이었다. 당시만 해도 과학의 변방이었던 미국으로, 아인슈타인처럼 많은 망명 과학자들이 몰려들었다. 미국 과학계와 정부, 언론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물론 그중에서 언론 노출이 가장 많은 인물은 아인슈타인이었다


■ 제 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핵 전쟁 우려

 ≫ 1930년 말, 세계는 제 2차 세계대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군국주의와 군대를 극히 싫어했으며,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자였다. 그런 그 역시도 전쟁으로 인한 참상들을 목격하면서 군대의 필요성을 수긍하게 되었다. 그는 전쟁 시에 자국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막강한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무렵, 자신의 이론이 소량의 라듐에서 많은 양의 에너지가 방출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이것은 원자핵에 갇힌 에너지를 인위적으로 방출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겠다는 생각, 즉 원자폭탄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는 당초 화력 발전을 대체할 원자력 발전 시대를 그리면서 이 아이디어를 떠올렸는데, 그러면서도 이것이 원자폭탄이라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또한 원자폭탄이 엄청난 살상 무기를 넘어서서 핵전쟁을 유발할 가능성도 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그는 원자폭탄이 자기 생애 동안 개발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이런 아인슈타인의 태도와 상관없이 세계는 원폭 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다. 1938년 독일이 우라늄 연쇄반응에 성공하면서 원자폭탄 개발 가능성은 유럽 각국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었다. 그럼에도 아인슈타인은 1939년까지 “지금까지의 결과가 원자력 에너지의 실용적인 이용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뉴욕 타임스>에 기고했을 정도로 이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핵에너지 이용과 관련된 연구는 착착 성공을 거두었고, 유럽 각국은 원자폭탄 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다. 영국은 아인슈타인이 구상한 핵에너지 개발안을 실제로 세부사항까지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고 관망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전쟁터가 아닌 미국에서조차 과학자들은 독일이 원자폭탄을 최초로 개발하여 침공할 것을 우려했다 .
 ≫ 미국 정부는 처음에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다가,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원폭 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다. 미 정부는 영국이 독일의 침공 위협 속에 포기했던 원자폭탄 개발 구상과 관련된 정보를 모두 받아냈다. 그리고 1942년 9월 오펜하이머를 필두로 하여 3천여 명의 과학자들을 규합해 맨해튼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원자폭탄 개발 계획을 비밀리에 착수했다. 그 결과 1945년 8월 두 개의 원자폭탄이 일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종전을 맞았다. 아인슈타인이 경고했던 원자폭탄의 무시무시한 기능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뉴욕 사라낙 호수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비서 헬렌 두카스는 라디오를 통해 이 소식을 듣고 아인슈타인에게 알렸다. 일본은 노벨상 수상 당시 아인슈타인을 매우 따뜻하게 환영함으로써 그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긴 나라였다. 그는 매우 비통해했다. 그는 원자폭탄 제조 계획에 실질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으며, 그 계획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계속 회의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원자폭탄 구상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론에서 탄생한 것이었기에, 그는 큰 책임감을 느꼈다. “그날은 내게도 슬픈 날이었다. 내게도 책임이 있다.” 아인슈타인은 원자폭탄의 위력을 목도하고, 핵전쟁 가능성을 다시 떠올렸다. 그는 핵이 전 세계를 파괴하리라고 여겼다.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전쟁이 어떤 모습이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제4차 세계대전에서 인류는 막대기와 돌을 들고 싸우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 평화주의 아인슈타인 그리고 그 죽음까지..

 ≫ 1946년 아인슈타인은 원자 위기관리 과학위원회(Emergency committee of Atomic Scientists)의 의장을 맡았다. 이후로도 그는 다양한 반핵 단체에 이름을 올리고 핵무기 생산 및 유포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쳐나갔다. 또한 전후에 독일이 베를린 아카데미와 플랑크 연구소 명예연구원으로 위촉하는 제안을 보냈을 때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독일인이 저지른 범죄는 문명이 시작된 이래 가장 끔찍한 것이며, 후회나 반성할 줄 모르는 독일 사회를 위해 공헌하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1951년 서독 정부가 수여한 평화 훈장도 거절했다. 말년에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로서의 책임을 촉구하는 평화 운동에 헌신하는 것 외에 외부 활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 1950년경부터 아인슈타인은 동맥류를 앓았는데, 의사의 수술 권유에 인공적으로 수명을 연장하고 싶지 않다면서 거절했다. 결국 1955년 4월 18일, 아인슈타인은 동맥류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날까지도 통일장 이론과 관련된 계산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가족과 지인들 몇 사람만 참석한 자리에서 화장되어 델라웨어 강에 뿌려졌다. 그러나 그의 ‘뇌’만은 조각조각 잘라져 오늘날까지 6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프린스턴 병원의 병리학자 토머스 하비가 부검을 하면서 뇌를 꺼내어 따로 보관한 것이다. 그는 20세기 최고의 천재인 아인슈타인의 뇌를 연구하는 것이 과학적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그 생각에 따라 아인슈타인의 뇌는 그 이후 수많은 연구자들에게 나누어졌다. 이 뇌를 통해 천재와 평범한 사람의 뇌의 차이를 밝히는 연구들이 이루어졌지만, 아직까지 그 어느 연구도 명확하게 입증된 것은 없다.





관련글 : [인물, 아인슈타인] 핵 발전과 우주과학의 창시자, 아인슈타인.

관련글 : 파시즘과 나치즘 그리고 발생된 배경


■ 나의 한마디

 ≫ 히틀러는 화가 지망생이였다. 그의 환경이 황제를 꿈꾸는 자리에 이르렀다. 어느 누가 태어날 때부터 점령하고 누군가를 지배하고 싶어하겠는가? 내 생각엔 그것은 환경이 만들어준다고 생각하고 있다. 국가가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가? 편파적인 사회가 만들어지진 않았는가? 반대의 목소리를 내면 그 의견은 매몰당하는가? 국가가 가난한가? 국가가 이기적인 이념을 갖고있지 않은가? 우리도 물론 비슷한 이기주의적인 욕망을 갖고 있다. 아직 그 지식은 얕지만 필리핀전쟁 때의 한국군인들이 했던 짓이라던지, 북한인들 같이 사상이 꽉 막혀있고 사회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시민들은 구제할 방법이 없다며 같은 사람과 시민으로써 보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로 그 이념을 나누는 것 또한 국가적 이기주의라고도 생각된다. 옹호는 하지만 어쩌면 그들이 맞는 말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은 당시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우리 한국도 언뜻 아닌 듯 보이지만 외국인들에 대한 차별대우는 극심하다. 인종과 색상에 극심한 차별적 대우를 한다. 예를 들면 백인은 좋은데 흑인은 싫거나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차별적 대우이다. 극단적인 예지만 이런 사례를 생각한다면 한국 또한 인종주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겉으로 심하게 드러나거나 극단적으로 나아갈 일이 아니기 때문에 방관하는 일도 있다. 아돌프 히틀러라는 책을 읽고 이러한 사회/국가가 개인 한 명, 한 명에게 미치는 영향을 곰곰히 생각해본다. 극단주의 성향 한 사람이 토론도 잘하고 논리적 사고회로도 뛰어나고 출중하며 사회적 이념이 편파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히틀러의 예는 편파적인 정치인이나 엘리트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주는데에도 좋다고 생각한다. 대파를 수용할 줄 알아야 하고 그것의 옳고 그름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참고로 히틀러에 대해 알아가기엔 책의 분량은 매우 짧아 다른 책을 찾아 더 알아볼 예정이다. 독일에서 그가 어떻게 총통이 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있는 책이다.


■ 목차

 1. 화가를 꿈꾸던 소년 히틀러

 2. 1차 세계대전 발발과 참전

 3. 1차 대전 패전과 유대인

 4. 1차 세계대전 패전과 베르사유 조약

 5. 히틀러의 정치 입문

 6. 히틀러의 실패한 쿠데타

 7. 수감 생활과 <나의 투쟁>

 8. 다시 정치에 복귀하다.

 9. 나치의 집권

 10. 구세주 히틀러에 대한 독일의 열망

 11. 2차 세계대전 발발

 12. 두 개의 전선, 히틀러의 패작

 13. 독일 패전과 히틀러의 자결


■ 왜 읽었는가?

 ≫ 2차 세계대전 발발 배경 이전 당시의 독일의 생각과 가치관에 대한 궁금증 (당시 나치 정권의 주장과 독일인들이 지지했던 이유 그리고 유대인을 싫어하는 인종주의는 왜 생겨났는가에 대한 의문)

 ≫ 독일 주변국(영국과 프랑스)이 어떠한 유화정책을 펼쳤고 그 유화정책이 어떻게 세계대전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궁금증, 현대사와 이어본다면 남한이 펼치는 북한에 대한 유화정책이 과거와 비슷한 점이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

 ≫ 2차 세계대전을 만든 히틀러, 과연 히틀러만 없었다면 이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무엇이 히틀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 내 마음대로 책 내용 3줄 요약

 ≫ 그는 7,000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내며 전 세계를 피바다로 만든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 유대인 600여만 명을 학살한 홀로코스트[각주:1]를 저지른 극단적인 인종주의자다.

 ≫ 2차 세계대전 발발엔 주변국들의 유화정책이 있었다. 준비되지 않은 주변국들은 초기 전시상황에서 질 수 밖에 없었지만, 히틀러는 주변국을 넘어 소련 등 다른 나라까지 건드리며 패배하게 된다.


■ 히틀러의 생애

 ≫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던 작은 국경마을 브라우나우암인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알로이스 히틀러는 세관 공무원이였는데 직장을 따라 자주 이사를 다녔고 이사를 자주 다닌 탓에 아돌프 히틀러는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 알로이스는 술을 자주 마셨고 엄격했다고 한다. 히틀러 연구가인 로버트 와이트가 말하길 '알로이스는 아내인 클라라 히틀러에게도 굉장히 거칠게 대했고, 집에서 항상 폭언을 일삼았다'고 한다. 알로이스는 클라라뿐만 아니라 아돌프와 그의 여동생 파울라 히틀러에게도 폭언과 폭력을 행사했다는 주장들이 많다.

 ≫ 알로이스는 아돌프가 15세 때 세상을 떠났고 클라라는 19세 때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클라라가 죽은 뒤 1908년 아돌프는 미술학도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오스티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으로 떠났다. 아돌프는 제국의 수도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충격을 받는다. 빈 거리에는 체코인, 폴란드인, 이탈리아인,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유대인들이 뒤섞여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아돌프는 이 기억을 떠올리며 "인종적인 신성모독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 1차 세계대전 발발

 ≫ 1914년 8월 2일, 아돌프 히틀러가 25살이 되던 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청년들을 징집한다. 빈에 기거하던 히틀러는 징집을 피해 독일의 뮌헨으로 도피했다. 당시 뮌헨은 극우적 국가주의 정서가 강하게 들끓고 있었다.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히틀러는 결국 참전을 결정하고 4년간을 전쟁터에서 보낸다. 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소모적인 전투를 했다. 자기 영역에 참호를 파고 철조망을 친 뒤 기관총 등으로 무장하여 자기 진지만을 지키는 싸움이였다. 맨몸으로 돌격하고 방어사력과 육탄적으로만 참호를 지키는 것이 임무였다. 이런 양상이 4년간 '무한 반복' 됐다. 전사자들의 시신은 쌓였지만 적과 대치하고 있어 제대로 된 처리를 못하였다. 온갖 질병이 퍼졌고 이와 벼룩은 온몸에 득실거렸으며 비라도 쏟아지면 참호는 물 웅덩이가 되었다. 당시 히틀러는 바이에른 제 16보병연대 연락병으로 4년간 복무했다. 연락병은 참호와 참호 사이를 오가며 명령을 전달하는 위험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히틀러는 그 임무를 해냈고, 그 임무로 히틀러는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훗날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을 '잊을 수 없는 가장 숭고한 경험'이라고 회고했다. 그만큼 그 전쟁이 히틀러의 인생을 뒤바꾼 계기가 되었다.


■ 1차 세계대전 패인과 유대인과의 관계

 ≫ 1차 세계대전 패전에 대한 독일 사람들의 생각은 대체로 '억울하게 전쟁에서 졌다'는 것이다. 극우 선동가들은 하나같이 연합국 측과 협상에 나섰던 사람들을 비애국자로 몰아붙였다.

 ≫ 또 하나의 패인은 유대인이라고 여겼다. 당시 독일 신무기 프로젝트에 유대인 과학자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는데 연합군의 중심이었던 영국이 유대인 핵심 세력과 손을 잡고 독일군의 기밀 정보를 빼내 정보망을 교란시켰고 독일의 지하 정보 네트워크 요소요소에도 유대인들 상당수가 가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적국이었던 영국의 외무 장관 발포어가 여왕의 지시를 받고 영국 내 유대인 지도자 중 하나인 금융가 로스차일드를 만나서 중요한 제안을 하나 한다. 만약에 유대인들이 영국을 위해 싸워준다면, 전쟁이 끝난 후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국가를 창설해줄 용의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1917년 11월 2일에 비밀문서로 작성된 ‘발포어 선언’이 그것이다. 그로부터 1주일도 안 돼 독일 정부가 개발하고 있던 비밀 무기 프로젝트 원본이 영국 사령부로 넘어간다. 동시에 독일의 전쟁 네트워크가 군데군데 마비되면서 영국군이 밀고 들어갈 틈이 벌어진다. 전세가 역전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다. 당시 독일군은 유대인에게 증오를 품었다.


▲ 마녀사냥

 ≫ 물론 유대인에 대한 혐오 내지 증오는 독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대인 혐오는 적어도 유럽에서 2,000년 가까이 내려오던 뿌리 깊은 정서였다. 증오와 멸시가 집단적으로 표출된 사건 중에 하나가, 14세기 페스트가 온 유럽을 덮쳤을 때 일어났다. 사람들은 그 탓을 유대인에게 돌려 닥치는 대로 잡아다가 학살했다. 바로 이어진 마녀사냥에서도 유대인 여성이 주요 타깃이었다. 상황은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직전인 19세기 말이 돼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881년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로스 2세의 암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러시아 당국은 유대 극단주의자들의 조직적인 범죄라고 단정 짓고 이듬해 비밀리에 인종분류법인 ‘5월법’을 제정해 유대인 청산에 나섰다. 유대인 성분에 따라 ‘살해’, ‘추방’, ‘동화’ 정책을 펼쳤는데, 이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폴란드, 체코, 헝가리 같은 동유럽으로 이주하게 된다. 1894년에는 프랑스에서 드레퓌스 대위 사건이 벌어진다.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프랑스의 기밀 문건이 하나가 발견됐는데, 그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수사당국이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드레퓌스 대위를 지목한 것이었다. 이때 에밀 졸라와 같은 프랑스 지성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재조사를 요구했고, 덕분에 진범이 잡히고 드레퓌스 대위는 석방이 된다. 하지만 러시아에 이어 프랑스에서도 유대인 혐오사건이 벌어지자 유대인들은 큰 충격에 휩싸인다. 그들은 일종의 자구책으로 1897년 8월 스위스 바젤에서 세계에 흩어진 유대 지도자들이 다 모이는 제1차 시온주의자회의를 개최한다. 이때 유대인 공동체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의 조국을 건설한다는 ‘바젤 계획’을 채택한다. 1차 세계대전에서 수세에 몰리던 영국은 유대인들의 이런 계획을 알아내고 독일 내 유대인들을 회유했던 것이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물리치기 어려운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더 이상 당국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자기 나라’를 가질 수만 있다면 큰 도박에 나설 만도 했다. 그러나 패전국 독일 입장에서는 패전의 핑계로 지목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의 베르사유 조약

 ≫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선언으로 끝났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자 전범국이 되었다. 1914년에 시작돼 1918년에 끝난 이 전쟁에서 930여만 명이 죽고 2,250여만 명이 부상당했다. 1919년 6월 28일 프랑스 파리에서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으로 1차 세계대전은 공식 종결됐다. 이 조약은 연합국으로 참전한 31개국이 독일과 맺은 것이었다. 물론 이 협상에 독일은 초대받지 못했고 결과만 통보 받았다. 이 조약의 핵심은 전범국인 독일을 처벌하고 그 세력을 약화시켜 평화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약은 독일 입장에서는 너무 가혹했다. 전쟁의 모든 책임이 독일에게만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점령지 대부분을 빼앗겼다. 독일인 입장에서는 영토의 13퍼센트와 인구의 10퍼센트가 잘려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중 독일인들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했던 것은 동프로이센을 분할해 18세기에 사라졌던 폴란드를 재건해주고 바다로 가는 통로를 열어준 일이었다. 이 통로는 이후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도화선[각주:2] 역할을 한다

 ≫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의 군인은 10만 명을 넘지 못하게 제한됐고, 탱크와 잠수함 같은 현대식 무기 보유도 금지됐으며, 공군은 창설 자체가 금지됐다. 남아 있던 무기들은 독일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파괴됐다. 독일 라인 강 연변의 라인란트 지역은 연합국 관할로 비무장 지역으로 규정됐다. 거액의 배상금도 책정됐다. 전쟁 피해 복구를 이유로 1,320억 독일 제국 마르크가 책정됐는데, 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에서 빌린 부채를 상환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이 징벌적 배상금이 전후 독일 경제에 직격탄을 날렸음은 물론이다. 이 조약은 평화유지를 목적으로 했으나 강대국 중심으로 치우친 경향이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영토 분할 과정에서 연합국 지도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강하게 반발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은 이 같은 배신감을 바탕으로 자기 정치 세력을 키웠고, 이것이 훗날 베니토 무솔리니를 중심으로 파시즘[각주:3]이 발호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 히틀러의 정치 입문

 ≫ 1차 세계대전 동안 4년간의 복무를 마친 히틀러는 극우주의가 들끓던 뮌헨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 살이었다. 그는 사실 군대에 남아 있고 싶어 했다. 당시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바뀌어 사회민주주의자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대통령으로 집권하고 있었다. 특별한 변수가 없었다면 히틀러는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군인으로 평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으로 무너진 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유럽 전역에서 혁명의 꿈을 뜨겁게 키우고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각주:4](독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정부는 뜨겁게 타오르는 마르크스주의 혁명을 잠재워야 할 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세력이 바로 퇴역 군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극우 어용단체 ‘자유군단’이었다. 정부는 이들의 폭력을 활용해 마르크스주의 혁명운동에 철퇴를 가하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자유군단은 세력을 크게 불릴 수 있었고, 훗날 나치당의 모태가 된다. 히틀러는 자유군단에서 상관들의 눈에 띄어 병사들과 포로들을 정치적으로 재교육하는 임무를 받게 된다." 이 임무를 수행하며 히틀러는 자기가 연설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연설의 핵심은 1919년 6월에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국가적인 수치이고 거기에 동조한 독일 당국은 국가적 배신자라는 비난이었다.


 ≫ 군인으로서 더 이상 전망이 없을 때 히틀러는 당원으로 남아 전업 정치인의 길을 가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의 정치적 데뷔는 뮌헨의 어느 큰 맥주홀이었다. 뮌헨의 극우세력의 중추는 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들이었는데 그들은 주로 큰 맥주홀에서 회합을 가졌고, 히틀러의 정치 데뷔도 그곳에서 이뤄졌다. 1920년 8월 13일 뮌헨의 맥주홀 브루거브라우켈러(Bürgerbräukeller)가 바로 그 무대였다. 히틀러는 거기서 “우리는 왜 반유대주의자인가?”를 제목으로 연설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자유군단이라는 이름의 국가주의 민병대를 모집하는 최상의 전략으로 반유대주의를 제시한 것이었다. 히틀러의 연설은 독일노동자당의 당원들을 고무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히틀러에 크게 고무된 노동당원들은 1921년 7월 히틀러를 당 지도자로 삼았다. 히틀러는 당명을 '독일노동자당'에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으로 바꿨고 그 약칭이 나치다.

 ≫ 나치당의 모태가 극우적 폭력 단체, 자유군단이었던 만큼 히틀러는 그 특성을 살려 자신의 호위대인 돌격대부터 창설한다. 나치깃발과 눈에 띄는 제복으로 홍보에 성공했고, 시각적 차별화를 둔 탓에 당원 숫자가 기존 2,000명에서 2만 명으로 급증한다. 히틀러가 당권을 잡은 이듬해 이탈리아에선 베니토 무솔리니의 극우 파시스트당이 정권을 잡았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베르사유 조약이 이탈리아에게 불평등하게 맺어졌다고 정치 캠페인을 벌였고 그 캠페인이 국왕 눈에 들어 집권하는데 성공했다. 이 소식을 히틀러가 알게됬고 극우주의자 무솔리니의 성공은 히틀러를 고무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 히틀러의 쿠데타 실패와 수감생활 그리고 정치복귀

 ≫ 1923년 1월 프랑스군과 벨이게군이 전후 배상금을 제때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루루 지역의 탄광을 점령하는 일이 벌어졌다. 3월에는 프랑스 장교가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프랑스군과 독일 국민들 사이에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때 촬영된 영상이 있었는데 이 동영상은 히틀러의 나치당에게 더할 나위 없는 홍보 도구였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총장을 보좌했던 루덴도르프 장군이 나치의 세력으로 들어왔고 우익 참전 군인들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군 내부자들의 협력을 받아 총기를 확보해 루덴도르프를 지도자로 세워 쿠데타를 일으킨다. 뮌헨에서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베를린으로 진격한다는 것이다.

 ≫ 히틀러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루덴도르프는 1차 세계대전 참전 영웅으로써 사면되었다. 하지만 히틀러에게는 녹록치 않은 재판이었다. 그러나 재판에 섰을 때 히틀러는 생각보다 분위기가 자신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프랑스와 벨기에군에 굴욕을 당한 독일 국민들 마음이 그와 같았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자기 웅변 실력을 총동원했고 그 결과 형량이 가벼워졌다. 수감 생활은 호텔처럼 편안했고 언제든지 나치 지지자를 만날 수 있었다. 책과 잡지도 무엇이든 읽을 수 있었고, 인생관과 정치사상을 정리했다. 히틀러가 원고를 쓰고 나치당의 기자가 손보는 형식이었으며, 이 과정으로 <나의 투쟁>이 출간된다.

 ≫ 나의 투쟁에선 <지배종족>이라는 언급이 있는데, 이 지배종족은 영토를 되찾고, 공산주의를 박멸하며 프랑스와 영국은 물론이고 유대인까지 분쇄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 히틀러는 모범수라는 이유로 1924년 11월 20일에 석방된다. 1925년 2월 27일 쿠데타를 도모했던 뮌헨의 맥주집에 다시 돌아와 나치당 지도자로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 독일(당시 바이마르 공화국) 2대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

 ≫ 바이마르 공화국 2대 대통령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총장을 지낸 힌덴부르크가 당선됐다. 군대와 독일 보수파는 힌덴부르크를 중심으로 결집되었다. 독일 좌파들은 군인 출신이 대통령이 되는 상황이 반가울리 없었다. 정치적 라이벌인 루덴도르프는 제거되었고 보수파가 결집되어 나치당원은 17만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돌격대의 규모도 커져 사설 군대와 다름없는 수준이 됐다.

 ≫ 히틀러는 "대중은 여성적이고 우둔하며 오직 감정과 증오로만 그들을 장악할 수 있다"고 여겼다. 히틀러 친위대는 베를린의 유대인 구역에서 시작해 독일 전역에 '증오'를 심기 시작했다.


■ 나치의 집권

 ≫ 나치당은 1930년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18.3 퍼센트를 득표해 제 2당이 됐다. 히틀러는 1932년 그 힘으로 대통령 선거에 나섰지만 힌덴부르크에 밀려났다. 그러나 36.8 퍼센트라는 지지율을 받았다. 1932년 7월엔 나치당은 제 1당에 올라선다. 1당이 되면서 나치당은 총리직을 요구했지만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두 차례에 걸쳐 거부했다. 그러나 1933년 1월 30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안팎의 압박을 견뎌내지 못하고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했다.

 ≫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잡자, <나의 투쟁>은 날개 돋친 듯 팔렸고, 국민의 필수 교양서가 되었다. 나의 투쟁이 책장에 없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견뎌내야 했다. 덕분에 히틀러는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 히틀러는 총리직에 오르자마자 좌파 공산주의 세력과 반대파를 감금, 납치, 암살, 고문하는 등 온갖 불법적인 재판과 처벌을 동원해 탄압했다. 히틀러는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을 비난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들이 포진해 있는 의회가 늘 발목을 잡아서 국가 발전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이를 극복할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선동했다. 3월 24일 전권위임법[각주:5]을 통과시켰다. 전권위임법의 정식 명칭은 '민족과 국가의 위난을 제거하기 위한 법률'이다. 이를 통해 지방의회는 해산됬고 사회민주당은 불법화가 되었다. 이를 통해 나치의 일당독재체제를 완성한다. 이가 가능했던 이유는 바이마르 공화국(독일) 체제의 불안과 불신, 세계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국가경제의 붕괴 때문이었다.

 ≫ 1934년 8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드디어 히틀러 1인 독재체제가 완성된다. 히틀러는 국민투표를 실시해 총리가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게 했고, 그 지위를 총통이라 칭했다. 반대세력은 죽거나 도망쳤고, 유대인은 비국민이 되어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했다.


■ 독일의 구세주 히틀러

 ≫ 독일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실업이었다. 그런데 히틀러가 총통에 취임한 뒤 실업률은 크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독재 체제를 활용해 징중 정책을 밀어붙인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베르사유 조약이 파기된 이후 독일군이 재무장에 나선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사람들은 히틀러만 바라보았다. 행복에 젖어 히틀러 얘기만 했다. 변화에 대한 희망이 워낙 컸고, 패전국민으로 짓눌려왔던 독일인들은 히틀러에게서 자긍심을 찾았다.


■ 주변국가의 무장해제

 ≫ 히틀러는 1936년 8월 1일 베를린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했다. 올림픽 기간 중 독일 전역에서는 선동적인 표어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신문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호전적인 기사들이 자취를 감췄다. 독일 정부는 올림픽에 참여하러 온 세계인들에게 독일은 평화롭다는 믿음을 심어주고 싶어 했다. 이러한 가증스런 노력은 일정한 결실을 맺었다. 올림픽이 끝난 뒤 3주 후 영국의 로이드 조지 전 총리가 히틀러의 초대를 받고 독일을 전격 방문했다. 히틀러는 고무됐다. 세계적으로 유력한 정치인이 히틀러를 방문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그 자리에서 1차 세계대전 참전담을 늘어놓았다. 그는 전장에서 종종 영국 군인들과 조우했다고 회상했다. 히틀러의 호의는 로이드 조지를 무장해제시켰다. 로이드 전 총리는 히틀러와 만남을 가진 후, 데일리 익스프레스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고문을 보낸다. “독일이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히틀러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그는 우리와 싸울 의사가 전혀 없다.” 러나 로이드 전 총리는 순진했다. 영국 신문에 독일이 안전하다는 기사가 실릴 때 히틀러는 장관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밀지시를 내렸다. “독일군을 세계 최강으로 재건하지 못한다면 독일은 사라질 것이다. 독일군은 4년 안에 전쟁 준비를 마쳐야 한다."

 ≫ 1937년 9월 28일 이탈리아의 극우주의자 무솔리니가 베를린을 방문했다. 새로운 동맹을 구축하자는 것이었는데 “침략을 위한 군사적 조치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방어적 수단”이라고 강변했다.  

 ≫ 1938년 3월 13일에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합병을 선포한다. 독일군은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오스트리아에 진입했고, “신께서 오스트리아를 구원했다.”고 소리쳤다. 오스트리아 거리에 나치 깃발이 나부꼈지만 병합에 반대하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 된 때가 이 때다.

 ≫ 그 다음은 체코슬로바키아였다.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이 내세웠던 민족자결주의를 역이용한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에 거주하는 독일민족의 자결권을 요구하며 독일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주데텐란트를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1938년 9월 30일 뮌헨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참석해 히틀러의 요구를 승인해준다. 당시 강대국들은 당사자인 체코슬로바키아를 협정에서 배제할 정도로 나치 독일에 유화정책을 폈다.


■ 2차 세계대전 발발

 ≫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기 전 소련의 스탈린에게 히틀러는 미리 전보를 보냈다. 스탈린은 독일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답신을 보낸다. 그리고 전선에는 200만 명의 병사가 히틀러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1939년 9월 1일 새벽 5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나치 독일에 관용적이던 영국과 프랑스도 이틀 뒤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준비해온 독일군은 이미 폴란드 깊숙이 파고들어갔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비밀 협정에 따라 소련도 폴란드 동부를 침공했다. 폴란드는 항복을 거부했고 바르샤바는 초토화됐다.

 ≫ 이듬해인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은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된 지 2주 만에 프랑스군 중심의 연합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국경 해안 도시 됭케르크에서는 연합군 40만 명이 진지를 포기하고 후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해변은 연합군이 버리고 간 무기들로 넘쳐났고, 벨기에와 프랑스의 해안이 독일군 손에 들어갔다. 영국군이 철수하자 홀로 남게 된 프랑스는 1940년 6월 22일 독일에 항복을 선언한다. 히틀러는 나흘 뒤인 28일 새벽 6시 파리에 입성하며 “6주에 걸친 영웅적인 투쟁 끝에 우리 병사들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대들의 위업은 영광스러운 승리로 기록될 것이다. 1주일 동안 깃발을 게양하고 종을 울리도록 명하는 바이다.”라고 말했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과 에펠탑에는 독일군인들이 무리지어 다니며 기념 촬영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 프랑스를 점령해 기세가 등등해진 히틀러는 영국에 평화협정을 제안하지만 처칠은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리고 영국과 독일 간의 공중전이 시작된다. 독일은 영국을 9개월간 공습해 4만 여 명의 사망자를 내지만 영국은 끝끝내 항복을 거부했다. 당시 영국 전투기의 성능이 우수했기 때문에 독일군도 공습 과정에 적지 않은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1941년 5월 독일군은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맛본다. 그때까지 너무 쉽게 이겼던 탓인지 히틀러도 적지 않은 충격에 빠졌다. 히틀러는 갑자기 영국 정복을 포기하고 소련을 침공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소련을 제압하면 영국의 희망도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천하의 독일군이라 해도 위험한 도박이었다. 당시 참모들은 히틀러를 막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무도 나서지를 못했다. 1941년 6월 22일 새벽 3시, 300만 명의 독일군이 소련 국경을 넘었다. 히틀러에게 러시아는 영국에게 인도와 같은 존재였다. 영국이 인도를 점령해 자원을 빼먹듯이 독일도 러시아를 점령해 이용해먹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전투도 연전연승이었다. 모스크바 턱밑까지 독일군이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과거 나폴레옹 때처럼 러시아에게는 겨울이 있었다. 그리고 12월에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습격하면서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시작했다. 독일 장군들은 소련 전선에서 후퇴하자고 히틀러에게 조언했지만, 히틀러는 격노로 답했다. 1차 세계대전을 전장에서 보낸 히틀러는 후퇴 운운하는 장군들에게 오히려 정신 무장을 주문했다

 ≫ 소년부터 노인까지 남자라면 모조리 차출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미국까지 가세한 연합군의 공격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1943년 7월 27일, 700여 대의 폭격기가 함부르크를 공습했고, 도시는 불바다가 됐다. 이 공습으로 함부르크 시민 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즈음 전세는 확실히 역전되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건강도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심장 질환을 앓기 시작했고 파킨슨병 증세도 보였다. 등은 휘었고 손은 떨렸다. 1944년 6월 6일 이른바 디데이 새벽 노르망디 해안. 연합군이 마침내 독일이 점령 중인 프랑스 수복에 나섰다.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매우 기뻐했다. 영국이란 섬에 숨어 있다가 대륙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에 쉽게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히틀러의 착각이었고 망상이었다. 파죽지세는 이제 연합군을 수식하는 말이 됐다. 그 시기 독일군 사령부에서 폭탄이 터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독일 내부의 움직임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전세가 역전된 이유를 참모들의 타락에서 찾았다. 반역자들 때문에 원대한 계획이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의 배후를 캐기 위해 히틀러는 5,000명을 체포했고 200명을 처형했다. 이처럼 전세가 기울면서 독일 내부의 히틀러 지지기반도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 히틀러의 패배, 그리고 자결

 ≫ 1945년 1월 소련군이 베를린 외곽 80킬로미터까지 접근했고, 4월 21일에는 마침내 베를린에 입성했다. 이 전쟁으로 소련에서는 무려 2,000여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희생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군 지휘부는 병사들에게 베를린에서 승리를 자축할 것을 허락했다. 소련군들은 베를린에 남아 있던 여자들을 빈집으로 끌어모았고, 밤새도록 욕을 보였다. 이때 소련군에게 강간당한 독일 여성의 숫자만 200만 명을 헤아렸다. 그때 히틀러는 폐허로 변한 총통 관저의 지하 벙커에서 그의 연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은신하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 클라라 히틀러의 사진 앞에서 에바와 결혼식을 올린 뒤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다. 히틀러는 일기를 통해 자기가 일으킨 전쟁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생각을 남겼는데, 자기중심적인 망상과 집착은 전세가 기울어졌을 때에도 결코 약해지지 않았다. “우리가 졌다는 것을 안다. 적들의 힘이 너무 강하다. 배신까지 당했으니 내 머리에 총알을 박아야 한다. 하지만 절대로 항복하지는 않으리라. 우리는 쓰러지겠지만 세상이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독일이 전쟁을 원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이 전쟁은 서구 정치인들이 도발한 것이다. 그들 모두 유대인을 위해 일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죽는다. 우리 군대, 여성과 노동자들이 내 이름을 걸고 이룩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위업을 알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에서만 5,000만 명에 가까운 인명이 세상을 떠나야 했다. 아시아까지 그 범위를 넓히면 7,00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망상과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국가주의와 인종주의 같은 극단적인 이념에 탐닉할 때 그 끝이 어떤 모습일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인류는 그 대가를 치르면서 평등과 조화, 그리고 다양성과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있다.


  1. 홀로코스트 : 일반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을 대량으로 태워 죽이거나 대학살하는 행위를 총칭하지만, 고유명사로 쓸 때는 제2차세계대전 중 나치스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뜻한다. [본문으로]
  2. 도화선 : 사건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 [본문으로]
  3. 파시즘 : 1919년 이탈리아의 B.무솔리니가 주장한 국수주의적·권위주의적·반공적인 정치적 주의 및 운동을 말한다. 원래 묶음[束]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파쇼(fascio)에서 나온 말이었으나, 결속·단결의 뜻으로 전용(轉用)되었다. [본문으로]
  4. 바이마르 공화국 : 과거 독일의 국가명 [본문으로]
  5. 전권위임법 : 비상사태에 입법부가 행정부에 입법권을 위임하는 법률, 나치 정권은 나치에서 제정한 법률은 의회나 참의원 및 대통령의 권한과 관련된 것을 제외하면 헌법에 위반되어도 유효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 골자였다. [본문으로]

■ 이 글을 보는 분들에게 말씀

 ≫ 노무현 대통령께서 뇌물을 받았다는 증거 기사가 있다면, 댓글로 출처를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증거는 없었고 모두 거짓이라는 기사와 증언이 쏟아졌습니다. 2015년 이인규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에 의해 밝혀졌지만, 대검찰청에 억대의 피아제 시계 뇌물 논란 또한 국정원의 대국민 망신주기 언론 플레이였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는 적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는 시민만을, 약자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故 노무현 대통령 묘소


■ 노무현 대통령의 퇴임

 ≫ 노무현 대통령은 검찰의 뇌물수수혐의 수사 도중 국정원의 모욕주기 언론플레이에 고통받았다. 사망 이후에도 인터넷 여론공작으로 고인 모독을 당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말로 뇌물을 받았을까? 노무현 대통령은 진짜로 차명계좌를 통해 비리를 저질렀을까? 그 진실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보았다. 


■ 노무현 대통령의 차명계좌

 ≫ 조현오 전 청장은 서울경찰청장으로 재직하던 2010년 3월 일선 기동대장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2009년 노 전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날 10만 원권 수표가 입금된 거액의 차명계좌가 발견돼 자살에 이르렀고, 권양숙 여사가 특검을 막기 위해 민주당에 부탁했다"는 허위 발언을 했다. 조현오 경찰청장 내정자의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과 관련, 검찰이 차명계좌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고 문화일보가 2010년 8월 19일 보도했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이날 “(차명계좌 존재 여부 확인에 대해) 하나하나 들여다보겠다”며 “아직 사건이 접수만 됐고 2010년 8월 19일, 검토해서 배당할 것”이라고 신문에 말했다.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2012년 9월 대법원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 유족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조현오 전 경찰청장에 대해 징역 8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차명계좌 설은 결국 "찌라시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현오 전 경찰청장은 수감 8일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조현오 전 청장은 이후 재판과정에서 발언의 출처나 근거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거나 오락가락하는 발언을 했다.


2010년 3월 31일 당시 조현오 서울지방경찰청장은 기동부대 지휘요원 398명을 대상으로 열린 특별교양 강연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기를 앞둔 시점에 나온 그의 발언에 여론의 시선이 집중됐다. 서울경찰청장은 고급정보를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뭐 때문에 사망했습니까? 뭐 때문에 뛰어내렸습니까? 뛰어버린 바로 전날 계좌가 발견됐지 않습니까, 차명계좌가? 10만 원짜리 수표가 타인으로, 거액의 차명계좌가 발표돼, 발견이 됐는데, 그거 가지고 아무리 변명해도 변명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거 때문에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린 겁니다."


관련기사 : 검찰 "노무현 차명계좌 존재하는지 들여다보겠다 2010년 8월 19일 기사

관련기사 : 대법원 '노무현 명예훼손' 조현오, 실형 확정... 왜? 2014년 3월 13일 기사


■ 동아일보의 노무현 죽이기 결국엔 가설.

 ≫ 검찰이 조 전 청장을 사자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기소하기 직전인 2012년 5월 <동아일보>는 "조현오 前 경찰청장 '어느 은행, 누구 명의인지 다 까겠다'"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 신문은 기사에서 "조현오 전 경찰청장 3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차명계좌가 어느 은행에 누구 명의로 돼 있는지 검찰에 출석해 모두 까겠다'고 말했다"며 "이에 따라 노 전 대통령의 차명계좌를 둘러싸고 커다란 정치적 파장이 일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동아일보>는 또 다음 날인 5일에도 "'조현오 파일 실체' 존재한다면 대선판 전체 흔들 '뇌관'"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12월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 '조현오 파일'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조 전 청장이 검찰에서 '노무현 차명계좌'의 객관적 근거를 제시한다면 야권의 대선 후보 구도는 물론이고 대선판 전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근거로 작성됐다.


관련기사 : 조현오 前 경찰청장 '어느 은행, 누구 명의인지 다 까겠다 2012년 5월 4일 기사


■ 노무현 대통령의 퇴임 후, 그리고 뇌물 수수

 ≫ 노무현 대통령은 2008년 퇴임 후 전임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고향 김해시 봉하마을로 귀향하였다. 이후 사람사는세상 사이트를 운영하며, 봉하마을 촌장으로 재임하는 등, 민중들과 교류를 추구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역차별 논란에도 불구하고 재임시절 친인척 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할 정도로 친인척 비리를 경계했으나 2009년 '박연차 게이트'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되었다. 박연차 게이트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 세종캐피탈 사장 사이의 세종증권 매각 사건을 조사하던 중 박연차가 수 많은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제공해온 것이 밝혀진 비리 사건이다. 검찰은 박연차가 노 전 대통령에게 15억 원에 대한 수사를 벌였으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차용증을 제시하였고, 사저신축비 용도로 빌린 개인 간의 금전 거래로 판단하여 무혐의 종결 되는 등 비리를 매우 경계했다. 이후 박연차가 권양숙 여사에게 건낸 100만 달러(약 10억-13억원 정도), 정상문에게 건낸 3억 원, 연철호에게 건낸 500만 달러에 대해 수사가 이루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은 임기중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에게 100만 달러와 3억 원을 요구하여 돈을 받은 것을 시인하였는데, 이 돈은 권양숙 여사가 개인 빚 청산과 자녀 유학비로 사용하였다고 밝혔다. 박연차-권양숙 간 돈이 오간 것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 본인은 인지하지 못했다고 주장하였으며, 차용증 등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검찰은 이 또한 개인 간의 금전 거래임을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입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처음 1기 검찰 수사진은 당시에 검찰 내부에서 명망있는 검찰들이었다. 몇 개월에 걸쳐 장기간 수사가 진행되었으나, 1기 검찰 수사진은 퇴임 이후 박연차와의 거래는 사적 거래라 수사할 내용이 없다고 보고 종결지었다.


노무현 재단, 사람사는 세상 사이트 : (클릭)

※ 노무현 재단의 슬로건은 "노무현은 지키지 못했지만, 노무현 정신만은 지키고 싶습니다"의 슬로건으로 기념관이나 교육,연구사업 나눔사업 및 회원참여 프로그램으로 봉사, 참여정부 정책총서 등을 발간하고 있다.



■ 대국민 망신 주기 언론플레이

 ≫ 1기 검찰 수사진의 수사가 종료되고, 수개월 후 2기 검찰 수사진이 꾸려졌다. 이인규, 홍만표 등이 합류하였고 이인규는 이전 수사진의 수사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주변 인물들이 차례차례 소환당했고 일가족 역시 소환당했다. 소환은 한 번이 아니라 수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면서 노무현 대통령을 조여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상황이 방송과 언론을 통해서 매일 매일 브리핑되는 가운데, 어쩐 일인지 검찰은 어떠한 액션도 하지 못한 채 3주 이상이나 지속되었다. 국내 모든 매체는 카메라를 봉하마을에 경쟁적으로 설치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심지어 방송사는 헬리콥터까지 동원하여 봉하마을을 촬영하기까지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홈페이지에 "저의 집은 감옥입니다."는 글을 남겼다. 모든 언론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공격하였고 흡사 온 세상이 압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여론은 노 전 대통령에게 매우 불리하게 형성되었다. 2015년, 이인규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은 “국정원이 노무현 대통령 수사 내용을 과장해 흘렸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인규 전 중앙수사부장은 <경향신문>에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받은 명품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언론보도 등은 국정원 주도로 이뤄진 것”이라며 “검찰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수사내용으로 언론플레이를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당시 원세훈 국정원장이 보낸 국가정보원은 대검찰청에 억대의 피아제 시계 뇌물 논란을 활용한 대국민 망신주기 언론 플레이를 제안하였고, 국정원 측이 자신들의 뜻을 일방적으로 관철하려 하자 검찰은 "수사권 침해"라고 반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검찰은 국정원 직원의 멱살을 잡으며 몸싸움까지 벌였다고 2015년에 2009년에 있던 일이 알려졌다. 이명박 정부가 ‘촛불집회’ 등으로 궁지에 몰리자 검찰이 이를 돌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는 게 정치권과 법조계의 분석이다. 결국 검찰도 국정원과 똑같은 충성 경쟁을 벌였다는 지적이다.


관련기사 : 盧 대통령 수사 두고 검찰과 국정원, ‘멱살잡이’까지 2015년 2월 27일 기사

관련기사 : [SNS] 이인규, 盧수사 폭로.. “공작정치의 끝” 2015년 2월 25일 기사 



■ 국정원의 여론 공작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한 직후, 국민장을 치루며 온 국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국정원은 노무현 대통령을 비하하는 인터넷 게시물 수천 개를 유포시키며 추모 분위기를 방해했다. 이후에도 국정원은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 노무현 대통령을 모욕하는 게시물을 지속적으로 생산, 유포했다. 국정원 직원이며 디씨인사이드에서 활동했던 닉네임 좌익효수(아이디 : chiwoo9300)는 인터넷에 지역감정 조장, 여성혐오, 차별주의적 정치관을 디시인사이드 정치사회 갤러리 위주로 피력[각주:1]했다. 그 중 하나를 가져오면, "홍어 종자 절라디언들은 죽여버려야 한다" 등이다. 닉네임의 뜻은 좌파를 효수(능치처참)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부적격자가 국정원 직원이었단 점에서 국격은 물론 국가기관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다.


관련기사 : 국정원 “놈현 큰 죄가 많았군요~”...서거 후 비하 댓글 수천개 추가 공개 2013년 6월 26일 기사



■ 노무현이 이명박 대통령께 보낸 편지

 ≫ 2008년 7, 8월 이명박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기밀을 빼돌렸다며 봉하마을을 압수수색하라고 지시했다. 압수수색을 지시했던 추측되는 이유는 당시 한/미 FTA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를 중점으로 진행중인 촛불시위 때문으로 추측된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 당시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대응 때 한마디로 "미국산은 위험하니 안된다" 였으나 이명박 대통령은 바로 통과시켰던 문제다. 당시 노무현 지지자들이 이명박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비교하였고 이명박 대통령이 그로 인해 노무현 대통령을 압수수색한 것으로 전해진다. (여론돌리기 및 노무현 잠재우기 등으로 추정)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통치기록을 봉하마을로 가지고 내려갔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와 청와대에서 합의를 본 사항이었다. 그러나,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이 일을 국가 기밀을 빼돌렸다로 지시했다. 노무현은 왜 통치기록을 가져갔을까? 그것은 "민주주의 2.0" 이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개설한 토론 웹사이트였다. 이 사이트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들어와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모든 토론의 형식이나 진행, 시스템 등은 회원 참여에 의해 결정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정책 등을 실시간으로 국민들과 토론하길 원했다. "민주주의 2.0" 을 만들기 위한 서버 컴퓨터 5대를 봉하마을에 가져간 것이다. 이 서버 5대를 이명박 정부는 국가 기밀이라며 일침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썼다고 한다.


(노무현이 정권 퇴임 후, 시민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하기 위해 만든 민주주의 2.0, 노대통령께서 서거하신 현재는 없다)


관련기사 : '민주주의 2.0' 문 열었다 2008년 9월 18일 기사




■ 그 외 노무현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부치지 않은 편지

 ≫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전에 이명박 대통령에게 썼지만 부치지 않았던 편지 1통과 검찰 수사 때 추가진술을 위해 준비했던 글 1편을 비롯한 미공개 글 2편이 공개됐다. 편지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관련기사 : 노무현이 MB에게 '부치지 않은 편지' 공개 2009년 10월 7일 기사

노 대통령의 서거, 편지에 대한 기록은 아래의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내 마음속 대통령
10점


출처 : 분노에 찬 기사 검색 / 구글 검색 및 나무위키 조사, 노무현 관련 책, 팟빵 라디오 등 여러가지


 

관련글 : [날짜확보] 노무현이 서거하신 이유 중 하나, 친일파와 전쟁한 노무현, 친일파 나라를 속이다

[시사 및 리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해외반응

  1. 피력하다 : 생각하는 것을 털어놓고 말함. [본문으로]

■ 시사점

 ≫ 한국 원전이 안전하다. 사고가 난 적이 없다는 것은 믿기 어려움, 과거 역사에서 박정희대통령은 핵 개발을 위해 가압중수로를 들인 적이 있었음. 한국의 구리 원전의 경우 방파제가 취약하여 해일에 대비책이 필요함. 한국 한울 원자력 발전소는 2007년 한국에서 최다 고장 기록함.


원전사고 문자알림 신청하기


■ 원자력안전위원회 의원, 동국대학교 교수 김익중

 ≫ "1979년 미국의 스리마일 원전사고, 1986년 구소련 체르노빌 원전사고, 2013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들에서 공통점을 찾다가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확률입니다. 원전 개수가 많은 나라 순으로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김익중 교수가 방송에서 한 발언이다. 미국은 104개, 사고 당시 소련은 66개, 일본은 54개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순서대로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원전 23개를 운영하고 있지만 현재 건설 중인 원전이 5개, 2022년까지 총 42개를 완공할 예정이라고 한다. 미국에 이어 소련, 그리고 일본에서 원전사고가 났다고 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고는 원전대국들에서 발생한 것이다. 원전개수가 많은 순서대로라는 것인데, 이 시점에서 저자 김익중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원전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확률을 계산해 봤다고 한다. 저자의 추정치는 27%, 참고로 저자는 서울대에서 의학과 미생물학을 졸업했다. 일본 보험회사의 계산법대로라면 30~40년 내로 한국에서 핵사고가 날 수 있다고 한다.

 ≫ 김익중 교수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일단, 원전의 개수를 늘리는 것에 문제를 제기한다. 후쿠시마사고 이후 중국도 일년간은 원전공사를 하지 않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독일,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등은 탈핵의 과정을 밟고 있고, 유럽의 최대 원전대국인 프랑스마저도 원전 개수를 줄이는 것이 대통령 공약사항이라고 한다. 정부가 원전을 없애고 지금부터라도 태양열 등의 재생가능에너지 개발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촉구한다.



■ 현재 한국 원전은 몇 대이며, 생산 용량은 얼마일까?
 ≫ 대한민국은 2015년도 기준으로 4곳의 원자력 발전소와 24기의 원자로를 가동중이다. 발전량 기준으로는 세계 6위이며, 회사 단위로는 세계 2위의 원자력발전회사인 한국수력원자력이 있다. 원전은 한국 내 전체 전기 생산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 대한민국 원자력 발전소는 2001년 4월 2일 설립된 한국전력공사 계열 발전회사인 한국수력원자력에서 독점 운영하고 있으며, 2011년 10월 26일 설립된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원자력안전위원회 산하 위탁집행형 준정부기관인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의 감시감독을 받고 있다.
 ≫ 현재 원전은 4곳이 있다. 한울, 월성, 고리, 한빛이다.


■ 상업운전 개시 순서로 보기

구분

상업운전 개시

원자로형

설비용량 (kW)

고리 1호기

1978년 04월 29일

가압경수로 (PWR)

58만 7천

월성 1호기

1983년 04월 22일

가압중수로 (CANDU)

67만 9천

고리 2호기

1983년 07월 25일

가압경수로 (PWR)

65만

고리 3호기

1985년 09월 30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고리 4호기

1986년 04월 29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빛 1호기

1986년 08월 25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빛 2호기

1987년 06월 10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울 1호기

1988년 09월 10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울 2호기

1989년 09월 30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빛 3호기

1995년 03월 31일

가압경수로 (System 80)

100만

한빛 4호기

1996년 01월 01일

가압경수로 (System 80)

100만

월성 2호기

1997년 07월 01일

가압중수로 (CANDU)

70만

월성 3호기

1998년 07월 01일

가압중수로 (CANDU)

70만

한울 3호기

1998년 08월 11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월성 4호기

1999년 10월 01일

가압중수로 (CANDU)

70만

한울 4호기

1999년 12월 31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빛 5호기

2002년 05월 21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빛 6호기

2002년 12월 24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울 5호기

2004년 07월 29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울 6호기

2005년 04월 22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신고리 1호기

2011년 02월 28일

가압경수로 (OPR-1000)

100만

신고리 2호기

2012년 07월 20일

가압경수로 (OPR-1000)

100만

신월성 1호기

2012년 07월 31일

가압경수로 (OPR-1000)

100만

신월성 2호기

2015년 07월 24일

가압경수로 (OPR-1000)

100만

신고리 3호기 (건설중)

2014년 8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고리 4호기 (건설중)

2014년 9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한울 1호기 (건설중)

2017년 4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고리 5호기 (건설중)

2018년 12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한울 2호기 (건설중)

2018년 4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고리 6호기 (건설중)

2019년 12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한울 3호기 (건설예정)

2020년 6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한울 4호기 (건설예정)

2021년 6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 설비용량 순차로 보기

구분

상업운전 개시

원자로형

설비용량 (kW)

고리 1호기

1978년 04월 29일

가압경수로 (PWR)

58만 7천

고리 2호기

1983년 07월 25일

가압경수로 (PWR)

65만

월성 1호기

1983년 04월 22일

가압중수로 (CANDU)

67만 9천

월성 2호기

1997년 07월 01일

가압중수로 (CANDU)

70만

월성 3호기

1998년 07월 01일

가압중수로 (CANDU)

70만

월성 4호기

1999년 10월 01일

가압중수로 (CANDU)

70만

고리 3호기

1985년 09월 30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고리 4호기

1986년 04월 29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빛 1호기

1986년 08월 25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빛 2호기

1987년 06월 10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울 1호기

1988년 09월 10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울 2호기

1989년 09월 30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신고리 1호기

2011년 02월 28일

가압경수로 (OPR-1000)

100만

신고리 2호기

2012년 07월 20일

가압경수로 (OPR-1000)

100만

신월성 1호기

2012년 07월 31일

가압경수로 (OPR-1000)

100만

신월성 2호기[5]

2015년 07월 24일

가압경수로 (OPR-1000)

100만

한빛 3호기

1995년 03월 31일

가압경수로 (System 80)

100만

한빛 4호기

1996년 01월 01일

가압경수로 (System 80)

100만

한빛 5호기

2002년 05월 21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빛 6호기

2002년 12월 24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울 3호기

1998년 08월 11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울 4호기

1999년 12월 31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울 5호기

2004년 07월 29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울 6호기

2005년 04월 22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신고리 3호기 (건설중)

2014년 8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고리 4호기 (건설중)

2014년 9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고리 5호기 (건설중)

2018년 12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고리 6호기 (건설중)

2019년 12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한울 1호기 (건설중)

2017년 4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한울 2호기 (건설중)

2018년 4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한울 3호기 (건설예정)

2020년 6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한울 4호기 (건설예정)

2021년 6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 현재 한국 원전은 몇 대이며, 생산 용량은 얼마일까?

 1. 한국의 고리 원자력 발전소

 ≫ 고리 1호기는 국내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입니다..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지어주었고, 1978년 4월 29일 처음 가동되었으며 원전 4기 주위로 방파제가 있는데요. 사진에서 보듯이 방파제가 매우 허술합니다고리 1호기의 탄생으로 우리나라는 21번째로 원자력 발전을 하는 국가가 되었으며, 2015년 6월 12일 기준, 그동안 고리 1호기는 124건의 크고 작은 사고를 일으켜왔습니다. 이후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이 국제기준에 따라 안전성을 심사한 결과 계속운전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2007년 12월에는 결국 주민들과의 합의도 이뤄집니다. 고리 1호기는 이듬해 1월 정부로부터 2017년 6월까지 10년간 운전을 허가받아 다시 가동에 들어가게 됩니다. 2007년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주기적 안전성 평가’ 기준과 미국의 ‘운영 허가 갱신’ 기준 등을 적용한 결과 고리 원전 1호기의 원자로 용기와 배관, 각종 구조물 등 주요 기기가 10년간 충분히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 이후 고리 1호기는 노후 원전의 대명사로 여론의 불신을 받기 시작했는데요.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전 세계의 이슈였던 2011년 4월, 전기제어장치(인입차단기) 고장으로 원자로 가동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맙니다. 원자력 안전에 특히 민감하던 시기여서 부산지방변호사회가 가동중지 가처분 신청을 내고 지방의회까지 결의안을 내는 등 지역 사회의 반발과 우려가 거셌는데요. 결국 정부는 정밀 점검 결과 문제가 없다고 결론 내리고, 5월 재가동을 허가했습니다.

 ≫ 참고로 후쿠시마 원전 1호기는 1971년 2월에 가동을 시작했고, 일본 정부가 수명을 10년 연장했습니다. 우리나라 또한 2008년에 설계수명 30년이 지나자 수명을 10년 연장한것과 닮은 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후쿠시마 원전보다 고리 원전이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고리 원전이 좀 더 안전합니다. 후쿠시마의 경우 전원이 차단되면 수소가 농축되어 폭발할 수 있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폭발했습니다. 하지만 고리 원전은 전원이 차단되어도 수소를 제어할 수 있는 안전 장치가 추가로 설치되어있습니다.


[구글 지도에서 보기]


관련기사 : <고리원전 1호기 10년 더 가동한다>, 동아사이언스 2007년 12월 07일자

관련기사 : 고리원전 1호기 고장… 재가동 논란

관련기사 : [르포]고리 원전 1호기 가보니…



 2. 한국의 월성 원자력 발전소

 ≫ 고리 1호기가 1978년 가동 시작 후, 1983년 월성 1호기가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2,3,4호기는 97년~99년 사이에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고리에 비해 방파제도 길게 잘 만들어진 편(붉은색 다각형), 월성 1,2,3,4호기는 가압 경수로인 고리 원전과 달리 캐내다의 CANDU형 가압중수로로 만들어졌습니다. 가압중수로로 개발된 이유는 발전소 건설이 진행되던 박정희 정권 때 핵개발을 진행했고 70년대 중반에 이미 핵무기 설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경수로에서는 핵물질을 추출할 때 사용할 연료봉 생산이 힘들기 때문에, 캐나다에서 중수로를 사오게 됩니다. 번외로 인도 역시 CANDU형 중수로로 핵개발에 성공했고 캐나다가 이후 한국에 CANDU를 팔지 않게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외부로 기술을 유출했다는 설)

 ≫ 핵무기 개발을 염두하고 중수로를 사들여왔으나, 중간에 미국 포드 행정부의 방해로 인해 한국은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1979년에 핵연료 재처리 시설의 설계가 끝났고 계획대로라면 1985년쯤에는 플루토늄 핵폭탄을 만들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 만약 인도나 파키스탄처럼 주변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발을 했다면, 아마 경제 제제로 인해 현재 경제만큼 부상하지 못했을 것 입니다. 박정희 암살 이후 전두환 정권에서는 한반도 비핵화 선언과 함께 연구 자료와 프로젝트를 전량 폐기했다고 합니다. 한국에 가압중수로 발전소가 있는 이유는 박정희 정권의 70년대 핵개발 열망때문이라는 것.

 ≫ 만들어진지 1년도 안된 1984년에 23톤의 중수가 유출되었고, 1988년에도 누출 사고로 인해 3일간 원자로를 멈춤, 2014년엔 월성 원전이 해킹당했고, 2015년 5월 15일 월성 4호기 사용 후 핵연료봉 낙하사고, 2016년 5월 12일 월성원전 1호기 고장으로 발전이 정지되었습니다.


관련기사 : 원전 해킹..불안감은 여전

관련기사 : 월성 4호기 사용후 핵연료봉 낙하 사고

관련기사 : 월성원전 1호기 고장으로 발전 정지


[구글 지도에서 보기]



3. 한국의 영광 원자력 발전소

 ≫ 다른 발전소들은 다들 동해안에 건설되었는데, 영광만 서해안에 건설된게 이색적입니다. 영광 1호기는 1986년 8월 25일에 운전을 시작했고, 형태는 고리 원전에 사용된 원자로와 유사한 가압 경수로입니다. 1995년에 운전을 시작한 영광 3호기부터는 OPR1000(Optimized Power Reactor 1000=KNSP)이라는 한국형 원자로를 사용하기 시작, 참고로 OPR1000은 북한 영변에 지어주던 경수로와 동일한 형태입니다. 95년부터는 국내 기술 95%의 OPR1000 설계의 원자로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설계 수명은 40년. 기존 고리 1호기의 30년과 비교하여 10년이 더 늘어났습니다.

 ≫ 그림의 왼쪽부터 1호기 마지막 오른쪽이 6호기입니다. 2002년 12월 24일 영광 6호기를 끝으로 이 지역 원전 건설을 끝이난 듯 합니다.

 ≫ 2005년, 김봉열 영광군수는 '영광원전이 가동된 이후 20여 년 동안 124건의 크고 작은 고장이 발생했고 2003년 5·6호기 열전달 완충판 이탈, 동년 12월 5호기 방사성 오염폐수 3500t 바다 유출, 3·4호기 증기발생기 세관 결함이 발생'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관련기사 : 우리나라에 원전 사고가 단 한건도 없었다고?


[구글 지도에서 보기]



4. 한국의 한울(울진) 원자력 발전소

 ≫ 한울(울진) 1호기는 1988년에 프랑스 프라마톰사가 가압 경수로 형태로 지어주었고, 1998년부터 가동을 시작한 한울 3호기부터는 우리나라 독자 규격인 OPR1000 형태로 지어졌습니다. 앞에 길게 늘어선 방파제가 있습니다. 2001년에 뜨끈한 배출수에 유혹되어 밀려들어온 새우떼와 해파리떼 때문에 냉각용 해수 흡입구가 막혀서 원자로를 잠시 멈추는 사고가 발생했고, 그 외에도 몇번 냉각수 유출 사고가 있었습니다. 2003년에는 5년동안 증기 발생기와 안전 시설을 보강하는 작업을 한 바 있습니다. 2016년 기준 6기의 상업용 원자로가 가동중이며, 발전소 인접 부지에 신한울 1,2호기의 공사가 진행중입니다. 2013년 5월에 울진원자력발전소에서 한울원자력발전소로 이름을 변경했습니다. 

 ≫ 2004년 이후 고장 사고로 인한 가동 중지건수가 21건으로, 전체 원자력 발전소 41건의 절반을 차지하여 2007년에 대한민국에서 최다 가동 중지 원자력 발전소로 기록되었으며, 직원의 조작 실수로 인한 고장, 정지건도 총 8건 가운데 이곳이 5건을 차지하였습니다.


관련기사 : 왜 울진原電만 이런일이?…가동중단 사고 최다


원전사고 문자알림 신청하기



출처 및 참고 : 오마이뉴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3yMF&articleno=15601245

http://www.dongascience.com/news/view/7283 그 외 글마다의 아래 관련기사들 참조.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 원자력발전소 이해전에 숙지하기

(제어봉)

 ≫ 원자로는 연쇄핵분열 반응을 통해 열을 생산하는데, 제어봉은 연쇄핵분열의 매개체인 중성자를 흡수해 연쇄핵분열 속도를 조절하는 도구이다. 제어봉을 만드는데 이용되는 물질들은 중성자의 에너지 변화에 따라 중성자 포획 능력이 달라지므로, 제어봉 집합체는 원자로의 다양한 중성자 에너지 영역에 맞추어 설계해야 하며, 보통 은, 카드뮴, 붕소, 인듐이 재료가 된다.

(노심)

 ≫ 원자로의 핵연료를 담고 있는 원자로의 부품으로, 핵반응이 일어나는 곳이다. 노심 안에는 핵연료와 제어봉 있고, 냉각재가 상실되면 중대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체르노빌 사고와 관련 있음), 노심에 핵분열로 생긴 열이 쌓이면 노심의 구조물이 녹거나 파손되는데 그 자체가 파손되어 방사성 물질이 주위에 확산될 수 있다.


■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의 구조와 개략도로 설명하는 원전사고

 ≫ 원자력 발전에서는 핵연료(일반적으로 우라늄)를 핵분열 반응을 통해 태워 물을 끓이고 그 증기로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만들어낸다. 핵분열 반응은 우라늄에 외부 중성자가 흡수되면 우라늄이 더 안정한 다른 원소로 분열되면서 큰 에너지를 방출하고 그 과정에서 여분의 중성자가 생성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중성자들은 다시 근처의 우라늄에 흡수되면서 연쇄적으로 핵분열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큰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다. 원자력 발전에서 핵분열 반응을 조절하기 위해 감속재와 제어봉이 주로 사용되는데, 감속재는 핵분열 반응에서 생성된 중성자의 속도를 느리게 하여 핵분열 반응을 증가시키고(중성자가 너무 빠르면 우라늄에 흡수되지 않고 그냥 통과해 버려 핵분열 반응이 연쇄적으로 발생하지 않게 된다), 제어봉은 중성자를 흡수하여 핵분열 반응을 멈추게 한다. 스리마일 섬 원전인 가압경수로는 일반 물을 감속재로 사용한다. 여기서 ‘가압’이라는 말은 원자로 내부의 냉각수를 고압으로 유지해 물이 끓지 않도록 한다는 뜻이다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의 가압경수로 개략적 구조)


(확대를 위한 원전 구조 -1)

(확대를 위한 원전 구조 -2)

 ≫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 당시 가압기의 증기 배출 밸브(PORV, 7)가 열려 있어 사고 발생 2시간이 지나서야 블록 밸브(Block valve, 9)를 이용하여 증기 배출이 차단되었다. 또한 증기발생기(3)에 연결된 비상 냉각수 공급관의 블록 밸브(24)가 닫혀 있었으며, 방사능에 오염된 1차 계통 냉각수가 보조건물(Auxiliary Building)로 유출되어 냉각수에 녹아 있던 방사능 물질이 환기구(22)를 통해 대기로 방출되었다.

 ≫ 증기발생기에서 냉각된 1차 계통의 냉각수는 냉각수 펌프(Reactor Coolant Pump, 5)에 의해 원자로 노심으로 다시 순환된다. 터빈을 돌리는 데 사용된 2차 계통의 증기는 냉각탑(Cooling Tower, 13)에서 공급되는 외부 냉각수에 의해 응축기(Condenser, 12)에서 다시 물로 변환되고 이온변환기(Demineralizer, 14)에서 불순물이 제거된 뒤에 펌프(Main Feedwater Pump, 23)에 의해 다시 증기발생기로 순환된다. 원자로와 1차 냉각 계통은 격납건물(Reactor Building, Containment)에 설치되고, 증기발생기를 제외한 2차 계통은 터빈 빌딩에 설치된다. 따라서 방사선에 노출되는 1차 계통 냉각수와 발전기를 돌리는 데 사용되는 2차 계통 냉각수가 서로 분리된다.

 ≫ 원자로 내부를 순환하는 1차 계통 냉각수가 증기로 변환되면 냉각수 흐름을 방해하고 원자로가 가열되거나, 중성자 흡수가 낮아져 핵분열 반응이 가속될 수 있다. 따라서 높은 온도에서도 물을 액체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가압기(Pressurizer, 6)가 사용된다. 물의 압력이 높아지면 압력 밥솥에서 그런 것처럼, 끓는 점이 올라가기 때문에 높은 온도에서도 물을 액체 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 가압기의 구조도 압력 밥솥과 비슷한데, 내부에는 물과 증기가 함께 섞여 있고 하단에는 가열기, 상단에는 살수 노즐이 있다. 압력을 높힐 때는 가열기를 이용하여 증기를 더 만들어 압력을 높히고, 압력을 낮출 때는 살수 노즐에서 냉각수를 뿌려 증기 일부를 물로 변환(응축)해 압력을 낮춘다.

 ≫ 압력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상단의 배출 밸브(Pilot Operated Relief Valve, 7)가 열리면서 증기가 배출되고 압력이 낮아진다. 가압기에서 배출된 증기는 격납건물 내의 증기 배출 탱크(Drain Tank)에 저장된다. 원자로 격납 건물 바닥에는 배수조(sump)가 있으며, 이 배수조가 일정 수위 이상으로 차게 되면 보조건물에 마련된 방사능폐기물 저장탱크(Radiation waste storage tank)로 옮겨진다. 보조건물에는 1차 계통 냉각수 양을 조절하기 위한 냉각수 보충 탱크(Makeup tank, 18)가 있고, 비상시에 고압 주입 펌프(High Pressure Injection Pump, 15)에 의해 냉각수가 원자로에 직접 주입될  있다. 냉각수가 너무 많을 경우에는 배출 라인(Let-down)을 통해 붕산염 물 저장 탱크(Borated Water Storage Tank, 붕산염은 중성자를 흡수하여 핵분열 반응을 느리게 함)에 저장된다. 1차 냉각수에 녹아 있는 방사성 물질(주로 제논[Xe]과 같은 비활성 기체)은 배출가스 압축기(Waste Gas Compressor)에 의해 배출가스 감쇠탱크(Waste gas decay tank, 20)에 저장된다.

 ≫ 원자로가 급격히 과열되는 경우 크게 두 가지 긴급 조치가 취해지는데, 첫번째는 원자로 비상정지(SCRAM)라 불리는 방법으로 모든 제어봉을 원자로에 긴급히 삽입하는 것이다. 제어봉은 중성자를 흡수하기 때문에 핵분열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차단한다. 두번째 방법은 노심긴급냉각장치(ECCS; Emergency Core Cooling System)라 불리는데, 여러 장치가 복합적으로 사용되지만 스리마일 섬 원전에서 사용된 방법은 저장되어 있는 냉각수를 고압 펌프(위 그림 2에서 15)를 이용하여 원자로 내부에 직접 주입하는 것이다. 스리마일 사고에서는 이 두가지 방법이 모두 사용되었지만 (ECCS는 부분적으로 사용됨) 핵연료봉이 녹으면서 방사능 물질이 누출되는 노심 용융이 발생했다. 출처/IEEE Spectrum 1979


■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 사고 원인과 당시 상황

(부주시사 윌리엄 스크랜튼(좌) 비상 관리국 국장 오란 핸더슨(우))

 ≫ 1979년 3월 2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미들타운에서 일어난 멜트다운 사고[각주:1]. 국제 원자력 사고 척도로는 시설외까지 위험을 수반한 사고(레벨 5)다. 한국에서도 같은 종류가 가동 중인 가압수형 원자로가 일으킨 역대 최악의 사고당시 스리마일 섬에는 총 2개의 원자로가 건설되어 있었고 원자로의 유형은 가압수형 원자로였다. 가압수형 원자로의 경우 압력을 가한 물을 원자로 냉각재 및 중성자 감속재로 사용하기 때문에 이 물이 끊임없이 순환되도록 유지하여 끓지 않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스리마일 섬 사고의 경우 가장 중요한 급수 시스템에서 문제가 생겼던 것이 원인이다.

 ≫ 사고를 발생시킨 최초원인은 뚜렷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자정 무렵 발전소 1호기의 핵연료 재충전을 위해 차단조치를 내렸고 여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조치로 발전소는 2호기만 가동 중이었고 가동 내내 큰 문제가 없었는데 새벽 4시 무렵 주 급수 펌프가 뻗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조치로 발전소는 2호기만 가동 중이었고 가동 내내 큰 문제가 없었는데 새벽 4시 무렵 주 급수 펌프가 뻗는 사고가 발생했다. 가압수형 원자로는 물 공급이 중요하기 때문에 주 급수 시스템이 뻗으면 보조장치가 바로 작동하여 위험한 사태를 피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는데, 최초 보조급수 계통 밸브가 닫혀있었다. 정상시 보조급수 계통이 개방된 채로 가동되어야 하지만 당시 운전원이 개방이 되었는지 닫혀있었는지 알지 못했었다. MCR 내부 보조급수기가 닫혀있는지 열려있는지를 표시해주는 표시등이 표지판 같은 Tag에 가려져 운전원이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열려야 할 보조급수계통 밸브가 몇 개는 닫혀있었고, 열리지 말아야할 가압기 압력 방출 밸브가 개방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미세한 누출이 있었는데 통제실 콘솔 표시등에는 수치가 정상수치 범위내로 표시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비상 노심 냉각 시스템이 가동되어 원자로를 식히고 있었는데 이걸 정상이라고 판단한 운전원은 비상 노심 냉각 시스템을 꺼버리게 된다.

 ≫ 당시 원자로 내 냉각수는 실제로는 줄어들고 있었지만, 계측기에는 냉각수 수위가 올라가는 것으로 표기되고 있었다. 정상상태에서 고압인 원자로 내 압력이 가압기 압력방출밸브의 미세한 누설로 압력이 빠지고 있었고, 압력이 떨어진 액체 상태의 물은 기체상태로 변하는 현상이 발생하므로 냉각수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당시에 설치되어 있던 노심 수위 계측기는 이 끓어오르는 거품을 판단할 방법이 없었다. 그 결과 압력이 떨어지는데도 수위는 올라간 것으로 계측되었고, 운전원의 관점에서는 냉각수의 수위가 상승하고 있는 상황에서 비상 냉각수를 공급하면 안되므로 당연히 비상노심냉각시스템을 끌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운전원 교육에서는 가압내 내의 냉각수 수위는 절반을 유지하도록 메뉴얼에 지정되어있으며 해당 수위가 가득차게 운전하지 않도록 교육했다. 

 ≫ 결국 최후의 보루인 비상 노심 냉각 시스템마저 꺼져버리자 증기압력이 증가하여 파이프가 파손되고 원자로의 냉각수가 유출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원자로 온도가 치솟아 원자로 노심이 녹기 시작하면서 방사능 수치가 급상승하였다. 관계자들이 원인 파악을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원자로 방호장비가 녹아 최악의 상황 직전까지 갔으나 16시간 만에 간신히 사고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다행으로 교대하는 운전원이 가압기 압력방출 밸브의 미세누설을 발견하고 보조 급수 펌프의 자동기동으로 변경하면서 최악의 사태는 모면할 수 있었다. 결국 수동으로 조작하여 밸브를 닫고 냉각 펌프를 작동시킨 후에야 간신히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원인 파악이 늦어지는 바람에 노심의 절반 이상이 녹았다. 하지만 원자로가 파괴되거나 붕괴되는 사태는 모면하여 인명피해도 없었고 미국 본토에 방사능 낙진이 떨어지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지만 발전소 하나를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더불어 당시 1호기는 고장이 없었는데 2호기에서 사고가 나는 바람에 나란히 가동중지 조치가 내려졌으며 2호기는 1980년대 말까지 정화작업을 해야만 했다.


■ 비상사태 선포, 혼란스러운 대피 행렬

 ≫ 아침 7시경 발전소에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7시 15분에는 보조빌딩에 있던 직원들이 대피했다. 이와 함께 상급 감독기관에 사고 현황이 보고되었다. 7시 20분 격납건물에서 측정된 방사선량은 시간당 800 렘에 달했다. 8시 26분 고압 펌프를 재가동하여 냉각수 보충을 시작했고, 오전 10시 30분이 되어서야 연료봉이 다시 냉각수에 잠겼다. 오전 11시에는 스리마일섬에서 필수 인원을 제외한 모든 직원에게 대피 명령이 내려졌다. 사고 수습에는 원전 제어실, 전력회사(Met Ed), 스리마일섬 인근 지자체, 펜실베니아 주정부,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 에너지성, 백악관을 비롯한 여러 기관들이 개입했는데, 단일 지휘 체계가 확립되지 않고 서로 엇갈리는 정보들이 쏟아지면서 의사소통에 큰 혼돈이 있었다. 또한 언론 매체가 시시 각각 보도를 하면서, 미끄럽지 못한 언론에 대한 대응으로 더 큰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언론에 발표를 할 때는 “예상보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보다는 “생각했던 것 만큼 상황이 나쁘지는 않습니다”가 될 수 있도록 보수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필요가 있는데도, 전력회사 쪽이 사고 초기에 모든 상황이 통제되고 있다는 낙관적 전망을 발표한 이후에 상황이 더 나빠지자 원래 발표를 번복하게 되었다. 

 ≫ 이후 원자로를 정상 상태로 복구하려는 노력이 계속 되었고,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원자로의 정확한 상태 및 피해 상황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 졌다. 여러 지점에서 주기적으로 방사선 측정이 진행되면서 방사능 물질 누출을 감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 잘못된 측정값들이 보도 되면서 혼란을 가중시켰다. 또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주민 대피 계획이 수립되었는데, 주민을 대피 시킬 것인지 말 것인지, 대피시킨다면 언제 대피시킬 것인지, 대피 반경을 얼마로 할 것인지에 대해 각 기관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 결국 사고 발생 이틀 후에 원자로 내부의 피해가 예상보다 크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펜실베니아 주지사였던 리차드 손버그(Richard Thornburgh)는 원전 반경 5마일(8km) 내의 임산부와 아동을 대상으로 대피 권고를 내리자, 뒤이어 약 20만 명의 주민이 자발적으로 대피 행렬에 나섰다. 후에 손버그는 주민 대피 권고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주민 대피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노약자나 중환자실 환자, 인큐베이터 속 신생아들을 대피시킬 때 발생할 수 있는 인명 피해부터, 질서 있게 대피하더라도 발생할 수 있는 교통 사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인명 피해가 예상됩니다. 이런 종류의 주민 대피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고, 홍수나 태풍으로 인한 주민 대피와는 그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반경 5마일 내 주민 대피를 준비할 때, 그것이 반경 10마일, 20마일, 나아가 100마일까지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합니다.”

 ≫ 사고 후 거의 한달이 지난 4월 27일에야 원자로 내부 냉각수가 펌프를 이용하지 않은 자연 순환상태에 이르렀고 냉각수의 온도도 끓는 점 밑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제서야 향후 14년에 걸친 방사능 오염 제거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원전에서 방사능 오염이 얼마나 심했는지 1980년 7월에 원자로 격납건물에 처음 사람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1982년이 되어서야 사진을 통해 연료봉의 피해 상황을 확인하게 되었다. 손상된 원자로와 방사능 물질, 오염된 건물을 처리하는데 총 100억 달러 (1달러를 1000원으로 환산한다면 한화로 약 10조원)가 소요되었다.


■ 스리마일 섬 원전사고 시민들의 불안과 그 이후

 ≫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는 여러 안전장치가 겹겹히 설치되었는데도 예상치 않은 시나리오에 의해 사고가 발생할 수 있고 방사능이 원전 외부로 유출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미국에서 발생한 최악의 원전 사고로서 원자력 발전의 안전성에 대해 큰 경각심을 불러왔다. 원자력 발전을 이용하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원전은 에너지 정책이나 핵무기 개발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각국 정부는 국민에게 원자력 발전이 굉장히 안전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줄 필요가 있었고, 많은 경우에 사고가 축소·은폐되어 왔다. 특히 옛소련에서는 정부가 언론을 장악하면서 대부분의 사고가 국민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사고 처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전 사고는 여러 안전장치가 겹겹히 설치되었는데도 예상치 않은 시나리오에 의해 사고가 발생할 수 있고 방사능이 원전 외부로 유출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 2010년 1월에 1호기는 재운전을 시작했으며, 같은 달에 2호기의 발전기는 해체되어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시런 해리스(Shearon Harris) 원자력 발전소로 옮겨 설치되었다. 발전소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직후 주 정부에서는 인근 지역에 대피령을 내렸고 주민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미친듯이 탈출하였다. 다행히 누출된 방사능 수준이 자연 방사선량에 못 미쳐 민간인들의 피폭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 원자력 발전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하여 반 원자력 발전소 운동이 발생하였고 이에 오일 쇼크로 국면전환을 꾀하던 지미 카터 대통령은 더 이상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여 70여 개에 달하던 원자력 발전소 건설계획이 싸그리 휴지통으로 직행했다

 ≫ 원자력 발전소 건설은 정치권의 금기처럼 치부되다가 버락 후세인 오바마 대통령이 30년~40년 만에 원자력 발전소 건설 재개를 선언하였는데, 하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나면서 반대가 격심해졌다. 일단 오바마 대통령은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었다.

 ≫ 원자로 겉에 붕소-10을 가득넣은 냉각수를 채우는 형태의 극히 안전한 원자로 설계가 나왔으나 도입비가 너무 비싸서 아무도 안 쓰고 있다. 더불어 이 사건을 악화시킨 수위 계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압수형 원자로에는 냉각수의 실제 수위를 표시하는 계측장비 설치가 의무화됐다. 또한 MCR룸을 인체공학적으로 설계 하여 운전수가 MCR의 계측 표시기를 모두 확인할 수 있도록 설계를 변경하였다.

 ≫ 이 사고로 인해서 운전원 교육을 철저하게 시키는 등의 발전이 있었다. 사실 격납용기라도 있어서 다행이었지, 격납용기가 없었다면 체르노빌 원전 사고 꼴이 날 뻔 했다.



출처 : 나무위키, http://scienceon.hani.co.kr/?document_srl=34785

  1. 멜트다운 : 원자로의 냉각장치가 정지되어 내부의 열이 이상 상승하여 연료인 우라늄을 용해함으로써 원자로의 노심부가 녹아버리는 일 [본문으로]

■ 거인에 대하여

 ≫ 19세기 초만 해도 사람들은 땅 속을 파헤쳐 옛 유물을 찾는다는 생각을 미처 못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고고학자들이 옛 문헌에 비추어 심증이 가는 지역의 땅 속을 파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랜 옛날부터 세계 여러 지역에서는 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거인 네필림과 거인 장수 골리앗 등을 연상시키는 고대 거인들의 유골로 추정되는 뼈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이런 거인들의 유골이 발견될 때 마다 인류학자들이나 과학계, 그리고 종교계와 정부 관계 당국은 대체로 진지한 탐사와 적극적인 연구를 하여 결과를 공표하기 보다는 사실 자체를 은폐하거나 가짜 모조품이라고 외면한 경우가 많았다.


(지금까지 발견된 거인족 크기)

■ 거인유골이 발견된 독일의 브라이텐비너 동굴(Breitenwinner Cave)

  


 ≫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 소재의 오라클 연구소에서 30년 이상 성경적 인류학을 연구해 온 신학자 페트릭 쿡크는 1563년 베르톨드 뷔흐너가 25명의 탐사대를 이끌고 독일 바바리아 지역 동굴 탐사 후 쓴 책을 발견했다. 베르톨드 뷔흐너의 체험기에 따르면 브라이텐비너 동굴 안에는 인골이 너무 빽빽하게 차있어서 내부 탐사를 위해 뼈들을 다른 장소에 옮겨 놓아야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며 대부분 거대한 인류들의 유골이었다고 기록했다. 페트릭 쿡크는 거의 450년이 지난 지금 이토록 값진 인류사의 보물들의 존재 흔적이 발견된 것을 불행하게 생각했다. 그는 16세기 무지하거나 의도적으로 놀라운 거인 인류의 자취를 감추고 외면한 지식인들에 의해 파괴되고 이미 오래전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동굴에 대해 안타까운 심경을 신문에 기고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다. 2007년 12월 초 미지의 한 미국 청년으로 부터 페트릭에게 편지와 함께 비디오 클립이 도착한 것이다. 발신자는 데니, 그는 최근 독일 주둔 미 육군에서 제대한 종군 사진기자인데 페트릭의 브라이텐비너 동굴 기사를 읽었다고 한다. 그는 11월 5일 자신이 소속해 있는 다국적 트레이닝 센터의 동료 2명과 1조가 되어 야외 신속 적응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무숲으로 둘러싸인 야산 언덕에 위치한 훈련 체크포인트 35 구역 부근에서 우연히 동굴을 발견했으며 팀 3명이 호기심에 동굴 안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거인 유골들을 포함해 수천여구가 넘는 해골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비디오 촬영 클립을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대니는 브라이텐비너 동굴 안에는 현 인류보다 엄청 큰 인류의 유골들이 많았는데 수천이 넘는 많은 유골들이 왜 동굴 안에 방치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아마도 16세기 베르톨드 뷔흐너가 발견한 이래 오랜 세월 동안 동굴이 많이 훼손되고 유골들이 도굴된 것처럼 보이며 2차 대전 당시 이곳이 독일군의 연합군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이라서 시체들을 이 동굴에 처리해 정상 유골 숫자가 늘어난 것 아닌가 추정했다. 그에 따르면 체크포인트 35 구역은 현재 나토군의 실탄 사격 훈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며 동굴에 대한 보다 철저한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브라이텐비너 동굴은 여러 인류학자들과 대학교 답사팀들이 공식 탐사를 하고 있는데 지난 수백 년간 버려진 이 동굴 연구 결과가 이번에는 과연 인류학상 어떤 변화와 파란을 몰고 올지 세계인들이 주목하고 있다.


  The Breitenwinner Cave 유골영상



■ 거인유골이 발견된 터키

 ≫ 1976년 터키 남동부 쿠르드지역에서는 신장 2.7m~3m의 거인 유골이 발견됐다.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고고학자들이 고대유적 발굴 중 우연히 발견했는데 발견지가 성경에서 요르단 서쪽 가나안의 유적이 있는 곳으로 묘사된 지역이어서 많은 화제를 모았다. 사람들은 이를 근거로 이 유골이 네피림일 수도 있다고 믿기도 했다.

(유프라테스 강에서 발견된 거인의 대퇴골, 합성이라는 주장도 몇 있다)


 ≫ 1950년 터키 유프라테스강 인근에서도 여러 거인 화석이 발견됐다. 그 중 한 화석의 대퇴골은 길이가 자그마치 1.2m에 달했다. 때문에 당시 학자들은 뼈 주인의 신장을 약 5m이며 발 크기는 56cm라고 추정했다. 또한 이곳 역시 길가메시가 통치한 수메르 문명 발원지와 유관해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 시대를 벗어난 거인의 기록

 ≫ 많은 학자들은 시대를 벗어난 이러한 거인들의 기록이 거인들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며, 또한 거인들이 인류 문명의 시작과 함께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 길가메시 서사시

 ≫ 지금으로부터 5~6000년 전에 메소포타미아에는 수메르·아카드·바빌로니아·아시리아가 차례로 번성했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2500년 아수르 지역에 세워진 국가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1200년에는 강대국 바빌로니아까지 지배했다. 기원전 960년부터 350여 년간 아시리아는 세계에서 제일 큰 제국이었다고 한다. 1851년 니네베 아슈르바니팔 궁전 지하서고에서 길가메시 서사시라는 것이 있었다. 길가메시는 기원전 2812년부터 126년 동안 우르크를 통치했던 왕이다.

(수메르 거인왕)

 ≫ 길가메시는 당시 수메르 왕조의 이자, 전설적인 영웅이다. 당시 길가메시 서사시에 따르면, 길가메시 또한 키가 4미터나 되었다고 하며 길가메시는 사자를 한 손으로 휘어잡고 다닐 정도였다고 하며, 길가메시 이후 거인왕들이 수메르 문명을 통치했다는 기록이 남겨져있기도 한다고 한다. 수메르 문명을 연구하는 고고학자 제카리아 시친은 수메르인들의 설형문자 기록에도 거구의 통치자가 등장한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위 그림의 석판에 새겨진 사람 크기가 다른 것도 거인이 존재했던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또는 사람의 크기를 나눈 것은 당시의 권위적인 상징을 위하여 왕 또는 귀족 등의 사람들을 더 크게 그렸을 뿐이라고 반론하는 학자들도 있다.







※ 1과 2에서 원자력 발전소의 사고원인과 이유 그리고 노심과 제어봉에 대한 설명을 접할 수 있습니다.

■ 1986년 4월 26일 사건 그 이후, 체르노빌 원전사고에 대한 처리 : 화재 진압과 방사능의 긴급 누출 방지

 
(폭발직후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당시 수석 엔지니어 알렉산드로 아키모프)

 ≫ 체르노빌 발전소의 발전기는 4기가 있었고, 그 중 2기는 추가로 짓고 있던 중이었다. 폭발의 여파로 4호기의 잔해와 3호기에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기 위하여 1986년 4월 26일 사고 직후 소방대원들이 파견되었다. 사고 직후인 1시 28분에 우선 알렉산드르 아키모프가 지휘하는 14명의 소방대원이 파견되어 화재를 진압하기 시작하였고, 오전 4시 경에는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가 지휘하는 250명의 대원이 추가로 파견되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오전 2시 10분에는 기계동 천장의 가장 큰 불이 진압되었고, 2시 30분에는 폭발한 반응로 건물 천장의 화재 또한 진압되었다. 오전 5시에는 반응로 주변에 일어난 대부분의 화재가 모두 진압되었다. 이 기간 동안 아무도 폭발이 일어난 반응로 근처로 가지 못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반응로의 잔해가 계속 불타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사고 후 처음 20시간 동안 소방대원과 발전소 직원들의 화재 진압 시도로 인해 뿌려진 물이 기화하여, 반응로 주변은 증기로 가득한 상태였다. 이 증기는 가열된 흑연이나 반응로 내부의 지르코늄과 같은 다른 물질과 반응하여 수소 가스를 비롯한 많은 가연성 물질들을 만들어냈다. 이 가연성 물질들은 사고 발생 후 약 20시간이 지난 4월 26일 오후 9시 41분에 반응로의 잔해를 폭발시켰다. 폭발의 여파로 만들어진 불기둥은 거의 50m에 달할 정도의 규모였다. 

 ≫ 이 화재를 진압하고 화재로 인한 방사능의 누출을 막기 위해 5월 5일까지 군용 헬리콥터 30대가 동원되어 여러 물질들이 투하되었는데, 이 물질들은 중성자를 흡수하여 연쇄 반응을 막기 위한 40톤의 붕소 화합물, 열을 흡수하고 이산화 탄소를 발생시켜 화재를 진압하기 위한 돌로마이트 600톤, 방사능 차폐를 위한 2400톤의 납과 1800톤의 모래와 진흙 등이다. 동원된 헬리콥터와 그 조종사의 방사능 피폭을 줄이기 위해, 헬리콥터들은 폭심의 바로 위에 멈춰서지 않고 반응로를 날아서 통과하면서 투하물들을 떨어뜨렸다. 이 때문에, 투하물 중 일부는 목표인 노심을 빗나가 그 주변에 떨어졌으며, 이렇게 주변에 떨어진 투하물들은 반응로 내부의 열을 흡수하지 못하고 잡아두는 역할을 해 반응로의 온도를 높이고 방사능의 추가 누출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추측된다. 헬리콥터에 의한 화재 진압 시도는 5월 7일까지 지속되었으나, 폭발로 인해 건물의 구조가 약화되어 추가 폭발 또는 노심 용해 사고가 발생할 우려가 있어 5월 10일까지 중단되었다. 헬리콥터에 의한 시도가 중단된 이후에는 원자로 3호기에 있던 액체 질소를 노심에 주입해 5월 9일 반응로의 화재가 마침내 진압되었다.


■ 소련정부의 사고 공표
 ≫ 소련 정부는 사고가 일어난 사실을 즉시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했던 1986년 4월 26일 아침에, 사고 지점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1,200 km 떨어진 스웨덴의 포스막 원자력 발전소에 출근한 과학자의 의복에서 포스막 발전소에서는 발견된 전례가 없는 방사능이 검출되었다. 4월 27일과 28일에는 정상 수준보다 6배 이상 높은 방사능이 스웨덴뿐만 아니라 핀란드를 포함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여러 지역과 덴마크에서 검출되었고, 스웨덴 정부는 대기 상황을 고려하여 이 물질이 소련에서 날아온 것으로 추측하고 소련 정부에 해명을 요구하였다. 소련 정부는 관영 통신사인 타스를 통하여, 정확한 사고 발생 시각과 피해자의 수 등은 언급하지 않은 채 4월 28일에 사고 발생 사실을 인정하였다.


(원전 4호기를 상공에서 찍은 당시 사진)

 ≫ 소련 정부가 사고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방에서는 사고 규모와 사망자 수에 대한 소문이 진위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채로 퍼졌다. 사고가 처음 공표된 4월 30일경에는 사망자수가 2천 명에서 3천 명에 이른다는 추측성 기사가 보도되었고, 사고 원인도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비슷한 노심용융으로 추측되고 있었다. 소련 정부는 타스 통신을 통해 4월 30일에 이 같은 추측을 부인하고, 방사능 누출로 인해 입원한 환자 수를 밝혔다. 서구 기자들의 취재 요청이 있었지만, 소련 정부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이후 스웨덴 정부 등에 공식적으로 화재 진화를 위한 소방관 파견과 방사능 오염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의료 지원 등을 요청하였고, 같은 시기에 미국의 첩보 위성 등이 심각하게 손상된 원자로를 확인하면서 사고가 매우 심각한 규모라는 사실이 간접적으로 알려졌다. 소련이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보도하기 시작한 것은 5월 6일에 이르러서였다.

■ 소련의 방사능 제거를 위한 노력
 ≫ 방사능의 누출을 막기 위한 최초의 조치로 냉각 장치를 내장한 콘크리트 판을 4호기의 지하에 설치하는 작업이 수행되었다. 이 판들은 고온의 노심을 냉각시키려는 목적과 함께, 노심의 열에 의해 용융된 액체 상태의 방사성 물질이 지하수로 흘러드는 것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이 작업은 약 400명의 작업자에 의해 15일간 진행되었다 콘크리트 판 설치가 완료된 후, 지상에 노출된 노심에 남아있는 핵연료와 방사성 물질에 의한 방사능 누출을 막기 위하여, "석관"(sarcophagus)이라 불리는 콘크리트제 봉인 시설을 건설하는 작업과, 사고 지점 근처에 있는 댐과 호수의 방사능 오염 제거 등의 작업이 먼저 시작되었다. 이 작업에는 약 22만 6천명 정도의 인원이 참여하였다. 호수의 방사능 오염 제거 작업은 1986년 9월경에 완료되었으며, 봉인 시설은 11월에 완공되었다. 이 작업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남아있는 원자로 시설과 발전소 진입로, 그리고 그 주변 지역의 방사능 오염 제거 또한 이루어졌다. 이 작업은 1987년까지 계속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방식이 사용되었다.
1. 오염된 시설의 표면과 장비에 액체와 모래, 증기 등을 분사하여 오염 물질을 청소
2. 오염 지역의 표토를 제거하고 매립
3. 오염된 시설의 표면을 고분자로 코팅한 후 제거함으로써 고분자에 붙은 먼지 입자 등의 방사능 오염 물질을 제거
4. 도로와 기타 아스팔트 포장된 구역의 재포장

■ 폭발현장에서의 시민 희생 : 키예프 시가지지역의 방사능 노동절 축제

(키예프 시가지의 방사능오염수치를 나타낸 표시 : 붉은색은 심각하게 오염된 지역)

 ≫ 폭발현장의 화재를 진압하기위해 소방관들이 보호장구도 없이 급파되어 화재를 진압하려고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원자로의 화재는 쉽게 진화되지 않았고 투입된 소방관들 2명은 그날 저녁에 사망했다. 나머지 28명도 모두 몇개월 안에 치사량의 피폭때문에 사망한다. 가공할 방사능오염물질들이 바람을 타고 온 유럽을 뒤덮었다. 체르노빌의 당사자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도 오염되었다. 


 ≫ 5월은 공산국가의 가장 큰 기념일중 하나인 메이데이(노동절) 축제가 있고 소련은 심각하게 오염된 키예프에서 노동절축제를 강행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사태가 심각하지 않다는 믿음을 주어 사람들의 패닉을 잠재우기 위한 대국민 사기극이었다. 정상치의 수천배가 넘는 방사선수치 속에서 강행된 노동절 축제기간중 수많은 사람들이 피폭되었고 관련통계는 거의 집계발표되지도 않았다. 또한 1986년의 노동절 축제 관련 기록사진 및 필름은 우크라이나 국립 기록 보관원에서 모조리 삭제되었다.


 ≫ 사태 발생 초기에 붕산 모래 혼합물 투하작전에 투입된 소련병사. 평균연령 20대였던 소련군인들은 대부분 작업후에 피폭후유증으로 며칠 못넘기고 모스크바 6호병원에서 사망했다. 그중 27명은 빠르게 죽었다.

 ≫ 2차 폭발의 위험이 제거된 후 소련군이 복구작업에 투입된다. 엔지니어인 레프 볼차코프가 설계한 거대한 콘크리트와 철의 석관을 4호기 위에 덧씌우는 작업에 대량의 공병차량과 크레인, 불도저가 투입된다. 작업원들은 피폭을 최대한 줄이려고 운전석에 납으로 된 판을 부착해 급조하고 작업시간을 최대한 줄여 피폭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작업중 난관에 부딪치는데, 폭발한 원자로의 흑연이 4호기 지붕위를 완전히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각각의 파편들은 제각각 시간당 500~1500 뢴트겐을 뿜어대고 있었고 이런 극한의 상황에 사람은 들어갈 수 없었다. 그들은 로봇을 투입해서 제거작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강렬한 방사선속에서 작업하던 로봇들의 회로가 망가져버려서 결국 사람을 투입하기에 이른다. 이런 환경에 인간을 보낸다는것 자체가 용납될 수 없는 미친짓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투입된 병사들을 바이오 로봇이라고 불렀다.

■ 폭발현장에서의 시민 희생 : 니콜라이 타라카노프장군의 기록필름


(니콜라이 타라카노프 장군)

 ≫ 수습작전을 지휘한 니콜라이 타라카노프 장군. 그가 부하들을 방사능지옥에 투입하면서 한 말이 기록필름으로 남아있다.


 : 동무들, 자네들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해


 : 이틀 전에 내가 한 장교와 함께 저 지붕위로 올라가봤는데,


 : 한 가지 확실하게 알게된 것은


 : 저 위쪽에 올라가봐도 별로 두려워 할 것은 없다는거야.


 ≫ 그들은 시간당 10000 릔트겐의 방사선에 피폭되었고, 병사들은 방사능덩어리들을 삽으로 떠내거나 맨손으로 집어서 옮겨야 했다. 각각의 파편들은 시간당 1500뢴트겐을 뿜어댔고, 이렇게 폐기물들을 쥐고 있던 병사들은 곧 손에서 대단한 통증을 느꼈으며 나중에는 주먹을 쥘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체르노빌 추가 피해는 많은 시민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막을 수 있었다.


출처 : 체르노빌의 진실(http://m.jjang0u.com/chalkadak/view?db=160&no=177100)

,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사고 위키 : https://ko.wikipedia.org/wiki/%EC%B2%B4%EB%A5%B4%EB%85%B8%EB%B9%8C_%EC%9B%90%EC%9E%90%EB%A0%A5_%EB%B0%9C%EC%A0%84%EC%86%8C_%EC%82%AC%EA%B3%A0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이유 그리고 그 과정 #1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체르노빌 사고 그 사건,사고의 진실 그리고 시민들의 희생 #3


■ RBMK 이해전에 숙지

: (제어봉)

 ≫ 원자로는 연쇄핵분열 반응을 통해 열을 생산하는데, 제어봉은 연쇄핵분열의 매개체인 중성자를 흡수해 연쇄핵분열 속도를 조절하는 도구이다. 제어봉을 만드는데 이용되는 물질들은 중성자의 에너지 변화에 따라 중성자 포획 능력이 달라지므로, 제어봉 집합체는 원자로의 다양한 중성자 에너지 영역에 맞추어 설계해야 하며, 보통 은, 카드뮴, 붕소, 인듐이 재료가 된다.

 : (노심)

 ≫ 원자로의 핵연료를 담고 있는 원자로의 부품으로, 핵반응이 일어나는 곳이다. 노심 안에는 핵 연료와 제어봉 있고, 냉각재가 상실되면 중대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체르노빌 사고와 관련 있음), 노심에 핵분열로 생긴 열이 쌓이면 노심의 구조물이 녹거나 파손되는데 그 자체가 파손되어 방사성 물질이 주위에 확산될 수 있다.



■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원자로 (RBMK)

 ≫ RBMK 또는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黑鉛減速沸騰輕水壓力管型原子爐)는 소비에트 연방이 개발한 원자로 형식으로, 러시아어 Реактор Большой Мощности Канальный(영어: Reaktor Bolshoy Moshchnosti Kanalniy, 채널형 고출력 원자로)의 첫글자를 따서 RBMK라고 부르며, 현재는 소비에트 연방[각주:1]이 만든 흑연감속 원자로의 뜻으로만 사용된다. RBMK는 체르노빌 사고를 일으킨 원자로 유형이며, 2004년 현재 더 이상의 건설계획은 없으며 체르노빌의 마지막 RBMK는 2000년까지 폐로되지 않았고, 2012년까지 적어도 11개의 RBMK 반응로가 러시아에서 운영되고 있다

 ≫ RBMK는 소련의 플루토늄 생산용 원자로를 기반으로 한 원자로를 만드는 소련의 프로젝트 중 최고의 작품이었다. 세계 최초 원자력 발전소(최초로 원자로에서 전력생산)에 쓰인 첫 번째 RBMK인 AM-1은 5MW의 전력(열효율 30MW)을 오브닌스크[각주:2]에 1954년부터 59년까지 공급했다.

 ≫ RBMK는 경수[각주:3]를 냉각재로 감속재[각주:4]로 흑연[각주:5]을 사용하며, 연료로는 천연우라늄을 사용할 수 있으며(일반적으로 2.4%의 농축우라늄을 사용한다), 압력관 갯수만 늘리면 원자로를 크게 만들수 있고, 또한 운전중 연료교체가 가능하기 때문에 운전성이 높다는 장점이 있다. 그 대신, 다른 원자로 유형에 비해 불안정하다는 단점이 있다.


■ RBMK의 설계

 ≫ RBMK는 흑연 감속재를 통과하는 7m 가량의 압력튜브로 되어있으며, 냉각재로 물을 사용하는데 비등수형 원자로와 비슷한 온도인 290°C 정도로 비등한다. RBMK의 연료는 저농축 우라늄을 사용하며, 3.5 미터 길이의 연료집합체에 장착한다. RBMK는 감속재로 흑연을 사용하기 때문에 엇나갈경우 체르노빌 사고와 같은 재앙이 일어날수 있다.

 ≫ 일반적인 RBMK의 노심에는 3000개의 연료 집합체를 넣을 수 있다. 연료집합체는 우라늄 산화물 펠릿[각주:6]으로 가득찬 연료봉의 집합으로 되어 있으며, 밑부분에는 연료봉의 버팀목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시켜 주는 금속 받침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노심은 연료집합체에서 끌어낸 열 에너지를 잠시 저장해두는 역할을 하고 있다. 원자로가 가동하면, 연료속의 235U가 연쇄반응을 내면서 줄어들게 된다. 몇몇 238U원자들은 여분의 중성자를 얻어 분열가능한 플루토늄으로 변화하여 에너지를 낸다. 이 반응으로 세슘이 생성되며, 이런 세슘은 연쇄반응과 열생산을 저해시킨다. RBMK는 운전중 연료교환이 가능하여, 다른 원자로에 비해 가동률을 높일 수 있다.


■ RBMK의 안정성

 ≫ RBMK의 디자인은 정상 운전, 그리고 비상시 상황에 필요한 몇몇 안전 시스템이 있다. 그중 하나는 노심 출력을 감시하는 피드백 센서로, 출력이 증가할시 자동적으로 제어봉을 노심에 삽입하여 출력을 낮추고, 반대로 출력이 낮아질시엔 제어봉을 인출하여 출력을 높인다. 만약 이 센서가 갑자기, 과격하게 출력이 오르는걸 감지하면, 211개의 붕소 제어봉이 노심으로 들어가 반응을 중단하는 원자로 보호 시스템이 있다. 이 시스템은 필요로 하거나, 혹은 운전원에 의해 자동적으로 실행된다.

 ≫ RBMK 원자로는 발전소와 주변환경의 방사선을 감시하는 방사선 모니터링 관측소가 있으며, 매우많은 차폐벽이 방사선을 흡수하고, 일반 운전과 비상 상황 모두를 포괄한다. 그리고 또한 RBMK은 사고 국부화 시스템이 있는데, 이 시스템은 격리에 도움이 되나, 이 시스템은 오직 약간의 국소 파이프 고장에만 도움이 되었고, 체르노빌 사고에선 무용지물이란걸 보여줬다.


■ 체르노빌 사고 이후 개선

 ≫ 체르노빌 사고이후, 모든 운영중인 RBMK는 여러 안전조치를 추가하였다. 제일 크게 바뀐곳은 RBMK의 제어봉 설계였다. 예전 제어봉 설계는 흑연 감속재의 위에 있어서, 연쇄반응을 조절하기 위해 제어봉을 삽입하면 제어봉은 흑연에 걸려 느리게 내려가거나 혹은 멈춰있는 경우가 있었다. 체르노빌 사고에서는 이 하자로 인해서 체르노빌 원자로의 첫 번째 폭발을 도왔다. 새로 바뀐 개선점은 다음과 같다.

  1. 연료 농축률을 2%에서 2.4%로 높였다. 이로 인해 중성자 흡수율이 높아져 원자로 제어의 신뢰성을 높였다.
  2. 수동 제어봉 갯수가 30에서 45개로 늘어났다.
    (수동 제어봉 개수에 대한 문제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이유 그리고 그 과정 #1에서 다룬다)
  3. RBMK 설계가 위험하기 때문에, 80개의 추가 중성자 흡수재가 저출력을 억제한다.
    (저출력 관련 문제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이유 그리고 그 과정 #1에서 다룬다)
  4. SCRAM (원자로 긴급 정지) 시간을 18초에서 12초로 단축시켰다.
  5. 예방책으로 긴급 안전시스템에 승인되지 않은 접근을 대비하였다.

출처 :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https://ko.wikipedia.org/wiki/%ED%9D%91%EC%97%B0%EA%B0%90%EC%86%8D_%EB%B9%84%EB%93%B1%EA%B2%BD%EC%88%98_%EC%95%95%EB%A0%A5%EA%B4%80%ED%98%95_%EC%9B%90%EC%9E%90%EB%A1%9C)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이유 그리고 그 과정 #1


  1. 소비에트 연방 : 러시아(구 소련의 명칭) [본문으로]
  2. 오브닌스크 : 러시아 서부, 칼루가 주 북동부의 도시. 모스크바 남서쪽에 위치. 인구 10만 8000명. 1955년 러시아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가 세워진 곳. [본문으로]
  3. 경수 : 보통의 물을 상대하여 이르는 말. [본문으로]
  4. 감속재 : 원자로 안에서 핵분열의 연쇄반응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연료체로부터 방출되는 중성자를 감속시키는 물질. [본문으로]
  5. 흑연 : 수정과 같은 결정구조를 가지는 육방정계에 속하는 광물로 석묵이라고도 한다. 흑색을 띠며 금속광택을 가진다. 전기의 양도체, 연필심·도가니·전기로·아크 등의 전극 등에 사용되며 활마재로도 사용된다. [본문으로]
  6. 펠릿 : 원자로에 쓰는 산화우라늄이나 산화플루토늄 가루를 원기둥 모양으로 만들어 고온에서 구워 굳힌 것. 이것을 헬륨 가스와 함께 피복관(被覆管)에 밀봉한 것을 ‘연료봉’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RBMK) #2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체르노빌 사고 그 사건,사고의 진실 그리고 시민들의 희생 #3


■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 정식 명칭은 V.I. 레닌 공산주의 기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이름답게 입구에는 레닌 흉상까지 있었다고 한다. 1971년에 착공되어 1978년 5월에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상용운전을 개시했던 구 소련의 원자력 발전소로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 방식이다.  이 방식의 원자로는 기술이 많이 필요 없고 가격이 싼 편이지만 안전성이 상당히 낮은 데다 제어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소련이 자기네들이 쓰던 군사용 플루토늄 생산로를 대충 고쳐서 전력용으로 써먹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원자로로는 영국에서 개발한 마그녹스가 있다. 

 ≫ 체르노빌 발전소는 총 4기의 원자로를 운용 중이었고, 2기의 원자로를 추가로 짓고 있었다. 그 중 사고가 일어난 체르노빌 원자로는 현재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국경 근처에, 체르노빌에서 북서쪽으로 약 18 km 떨어진 곳에 있다. 사고로부터 2년 후 죄책감으로 자살한 발레리 레가소프에 의하면 이미 사고 이전부터 소련 정부는 이 흑연감속 비등경수 방식의 발전소의 위험성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를 은폐했다고 한다.


■ 체르노빌 사고

 ≫ 체르노빌 발전소의 원자로 4호기의 비정상적인 핵 반응으로 발생한 열이 냉각수를 열분해시키고, 그에 의해 발생한 수소가 원자로 내부에서 폭발함으로써 생긴 사고이다. 폭발은 원자로 4호기의 천장을 파괴하였으며, 파괴된 천장을 통해 핵 반응으로 생성된 다량의 방사성 물질들이 누출되었다.


■ 불안정한 체르노빌 원전

 ≫ 방송에서 체르노빌 사고는 원전의 기술자와 책임자와의 작은 갈등에서 시작한다. 원자로가 불안정한 상태에서 가동시키는 것은 위험하다며 기술자들은 몇번이고 건의를 했으나 책임자는 "당장 출력을 높이지 않으면 자네는 해고야" 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원자력 출력에 앞서 테스트를 하기 위해 원자로를 제어하는 제어봉을 빼내는 과정이 필요한데, 오전 12시 54분 비상벨이 울리자 당황한 책임자는 안전 수칙을 무시하고 테스트를 중지시킨다. 충분히 발전시킨 후 터빈을 끄려고 했으나 계속해서 출력이 올라가는 문제가 발생한다. 조작원들은 황급하게 원자로 가동을 중지하려 했으나 제어봉이 삽입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직원들은 혼란에 빠지고 원자로를 냉각시키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 체르노빌 사고 발생의 원인

 ≫ 사고 전날인 4월 25일에 원자로 4호기는 정기 점검을 위해 가동이 잠시 중단될 예정이었다. 원자로 4호기에는 이전부터 원자로의 가동 중단에 대비해 원자로의 가동 중단시 냉각 펌프와 다른 제어 장치들을 가동할 수 있는 3기의 비상용 디젤 발전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 발전기들은 충분한 전력을 생산하기까지 약 1분의 시간이 걸렸고, 그 때문에 원자로의 가동 중단 시 즉시 냉각 펌프가 작동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불확실하였다. 그 때문에 발전소에서는 주 전원이 끊어진 상태에서 원자로의 터빈이 관성에 의해 회전할 때, 그 회전 에너지가 원자로의 냉각 펌프 등에 얼마나 오랫동안 충분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실험을 계획하였다. 이 실험은 이전에 작동 정지가 있을 때에도 행해진 적이 있었지만, 터빈으로부터 공급되는 에너지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감소하여 결과가 도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전소에서는 결과 도출을 위해 재실험을 하기로 하였다.


■ 체르노빌 사고 발생의 이유 이해전에 숙지

(제어봉)

 ≫ 발생이유를 따져보기 전에 제어봉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원자로는 연쇄핵분열 반응을 통해 열을 생산하는데, 제어봉은 연쇄핵분열의 매개체인 중성자를 흡수해 연쇄핵분열 속도를 조절하는 도구이다. 제어봉을 만드는데 이용되는 물질들은 중성자의 에너지 변화에 따라 중성자 포획 능력이 달라지므로, 제어봉 집합체는 원자로의 다양한 중성자 에너지 영역에 맞추어 설계해야 하며, 보통 은, 카드뮴, 붕소, 인듐이 재료가 된다.

(노심)

 ≫ 원자로의 핵연료를 담고 있는 원자로의 부품으로, 핵반응이 일어나는 곳이다. 노심 안에는 핵연료와 제어봉 있고, 냉각재가 상실되면 중대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체르노빌 사고와 관련 있음), 노심에 핵분열로 생긴 열이 쌓이면 노심의 구조물이 녹거나 파손되는데 그 자체가 파손되어 방사성 물질이 주위에 확산될 수 있다.


■ 체르노빌 사고 발생의 이유

 ≫ 체르노빌 원전의 실험은 위 언급과 같이 회전 에너지가 얼마나 오랫동안 충분한 전력을 공급하는가이다. 

 ≫ 원인 1 : 원전은 출력강하 실험중이였다. 실험 중 배전담당자는 당일 오후 11시까지 전력을 공급할 것을 발전소 측에 요청하였고, 원전의 출력강하를 정지시켜 실험을 중단했다. 노심이 정상 상태라면 중성자를 흡수해 안정한 상태로 돌아가지만 원자로의 낮은 출력 상태가 지속되면서 노심에 있는 중성자의 수가 줄어들었고 축적되기 시작했다.

 ≫ 원인 2 : 전력 공급을 끝낸 후, 출력강하가 시작되었고 출력을 목표 수준으로 올리기 위해 실험을 진행하던 운전요원들은 수동조작을 통해 제어봉을 제거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조작으로 출력이 상승했으나, 200MW에서 멈추었다. 이는 원인 1의 중성자가 줄어들었던 것이 원인이 된다. 원자로 출력이 정상보다 낮았기 때문에 삽입되어 있는 제어봉을 계속하여 인출하였다. 당시 노심엔 안전 기준인 30개 보다 훨씬 적은 6~8개만이 제어봉이 있었다.

 ≫ 원인 3 : 원인 1의 낮은 출력과 원인 2의 제어봉의 과도한 인출은 모두 안전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 원인 4 : 원자로에서 발생하는 증기의 응축수[각주:1]를 제거하고 증기만을 과열기로 공급하는 기수분리기가 있는데, 이 기수분리기는 노심의 증기량이 감소하면 기수분리기에 의해 비상노심냉각장치[각주:2]가 작동된다. 실험의 일환으로 원자로의 냉각 시스템에 달린 냉각 펌프 중 정상상태에서 가동하지 않는 펌프 2개를 작동시켰다. 이 과정에서 증기가 감소했고 기수분리기를 통과하는 증기량이 감소하여 기수분리기로 인한 비상노심냉각장치를 작동하지 않도록 조작했다.

 ≫ 원인 5 : 원인 4 조작으로 증기량이 감소했고 증기량 감소로 인해 발전용 터빈에 도달하는 증기가 차단되었다. 냉각 펌프에 전달되는 전력은 감소하였고 그에 따라 냉각 시스템에 흐르는 냉각수의 양이 부족하기 시작하였다. 냉각수 부족으로 내부에서 발생한 열이 충분히 냉각되지 않게 되었고, 이 열은 냉각수를 끓여 노심에 증기의 양을 늘리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핵반응 속도가 증가하여 핵연료가 급격하게 분열하기 시작한다.

 ≫ 결과 : 기술자들은 긴급 정지 시스템을 작동시켰고 제어봉을 다시 삽입했지만 제어봉이 이전의 조치로 완전히 빠져있었고 이것들이 완전히 삽입되어 출력을 제어하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이로 인해 출력은 정상 출력의 100배로 치솟았고 냉각수를 끓어오르게 하여 반응로가 감당할 수 있는 한도 이상으로 증가되었고, 폭발했다.


(발레리 레가소프)

■ 발레리 레가소프 박사

 ≫ 발레리 레가소프는 소련의 저명한 과학자 였고 모스크바 주립 대학 화학기술과 학장이였다. 체르노빌 사건 발생후 그는 사건의 원인과 사고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며 지역 상황을 정부가 빨리 알 수 있도록 하는 조사 위원회 소속, 당시 모든 사건의 발생 원인과 그 과정들을 상세히 조사하였고 동료와 과학자들에게 얘기하는걸 주저하지 않고 당장 프리피야트 주민들의 철수를 주장했지만, 사건은 벌어집니다. 당시 원자력 발전소의 원인은 사실 원자로 자체에 결함으로 인해 일어난 사고였지만, 당시 소련 정부의 압력으로 인해 비엔나에서 열린 국제 원자력 기구 특별 회의에서 원자로의결함이 아닌 원자로를 당시 운영했던 연구원들의 과실이라고 말하며 그 연구원들을 비난하고 맙니다. 그는 체르노빌 사고 조사 과정에서 방사선에 너무 많이 노출되면서 건강조차도 급격하게 악화됐으며 그 이후 1988년 결국 그는 체르노빌 원전사고 2년이 되는 해에 자신의 집 아파트에서 목을 매고 자살로 자신의 거짓 증언을 속죄하게됩니다


■ 발레리 레가소프 박사 (자살전 마지막 녹취)

 ≫ 당시 그는 죽기 전에 테이프와 자신의 조사 보고서를 남긴채 죽었다. "장관님 죄송합니다만, 지금 이해를 못하시나 본데, 지금 원자로가 불타고 있어요. 흑연 감속재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양의 방사능 물질인데다가 지금 노심이, 불타고 있어요. 2만 5천 톤에 달하는 탄소가 시간당 1톤씩만 탄다고 가정해도 석 달입니다. 지금까지 전 세계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에서 방출된 방사능보다도 훨씬 많은 양의 방사능이 매일 방출될 겁니다. 매일! 석 달 동안요! 오늘 밤 이 도시에서 잠자리에 드는 많은 사람들이 내일 시체로 발견될 거예요. 이 방에 있는 모든 분들의 몸 속에도 방사능이 들어갈 것이고,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집니다. 더 이상 속일 수 없어요! 이건 범죄 행위예요! 이건 막아야 합니다! 그냥 내버려 둔다면, 절대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없어요!"

.......

"솔직히 처음 전 자랑스러웠습니다.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했고 역사상 가장 큰 규모였지만, 우리 소련의 기술과, 우리의 인력이 위기를 잘 극복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으니까요. 만사가 다 순조로워 보였죠.


방사능에 노출되면 몸이 쇠약해지고, 치료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처음엔 어지럽고 구토 증세를 보이다가 혀처럼 민감한 곳이 부풀어오르고, 피부가 검어지면서 떨어져 나가고 온 몸의 세포들이 삭아버립니다. DNA까지 완전히 변해서, 방사능에 노출된 이후 서서히 죽어가게 되는데, 더 이상 인간의 몰골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너무 끔찍해서.. 그 날 밤부터 예상치 못한 시체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쓰러진 직원을 옮기던 소방관들도 쓰러지기 시작했지요. 온 몸의 피부가 방사능을 그대로 흡수하듯, 가슴 속 깊은 곳까지 극한의 공포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내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상상을 초월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 결론지어버리게 됩니다.

 

4월 26일 아침은 아주 따뜻하고 아름다운 날씨였습니다. 하지만 해가 뜨기도 전에 맑은 하늘은 이미 변해 있었고, 모든 것이 오염되어 있었어요. 먼지와 머리카락, 옷, 수돗물, 농작물, 가축까지. 만들던 음식과 우유도 모두, 독극물이었습니다.

 

이미 소문이 퍼졌지만 일부만 피난을 떠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문을 믿지 않았습니다. 평균치보다 400배나 많은 방사능이 공기 중을 떠다녔지만, 3만 5천여명의 주민들은 위험하지 않다는 말만 믿고 토요일 오후를 보냈습니다. 여전히 경고 방송조차 없었지요.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아이들의 갑상선이 방사능을 흡수했지만, 요오드조차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죄책감을 부정할 수 없었고, 물집 생긴 피부를 보며 더 이상 거짓을 말할 수도 없었죠. 하지만 윗사람들은 알면서도 아예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진실이란 살인마보다도 더 위협적인 것이었습니다.

 

소란이나 소동도 없었습니다. 결국 11만 6천여명의 사람들이 소개됐고, 몇 분이면 될 결정을 내리는 데에 몇 달이 걸렸습니다. 몇 년 동안의 경기 침체와 이기적인 관료주의를 겪으며, 이제 남은 건 고통과 잔인한 결단력 뿐이었습니다. 위원회에서 회의를 할 때도, 우리는 조심스럽게 이 일의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서 몇 사람의 희생이 따라야 일을 처리할 수 있을지를 따졌습니다. 그 동안 방사능의 수치는 하룻밤 새 200만에서 400만 뢴트겐으로 상승했습니다.

 

열폭발을 막기 위해 저장고의 물을 빼내야 했고, 소방관들이 펌프를 작동하고 있었지만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방사능에 오염된 물 속으로 잠수부들이 들어가 밸브를 수동으로 열어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우리가 그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랬지요. 우린 군인들에게 진실을 말했고, 그들은 우리를 믿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이게 꼭 필요한 일이냐고 물었고, 우린 할 말이 없었습니다.

 

우린 해 냈고, 결국 100만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죠.

 

곧 제어실의 연구원들이 죽어가자 사람들은 정의의 심판이라 말했지만, 진실은 그보다 훨씬 더 끔찍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구한 용감한 자들과 다르지 않았어요. 우리는 그들에게 위험성을 설명해 주지도 않았고, 제어봉과 원자로에 대한 진실을 감추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믿었죠. 진실을 감춘 이상, 참사는 불가피했습니다.

 

저는 솔직하지 못했지요. 비엔나 국제 회의에 온 전 세계의 사람들 앞에서 제어실의 연구원들을 비난했고, 그들의 무지 속에서 제가 한 일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솔직히 밝히고 허상을 폭로하려 했지만 제가 쓴 보고서나 인터뷰 기사들은 발표되지 않았고, 전 그저 경력에 오점을 남겼을 뿐이었지요.

 

비밀주의는 재앙을 가져올 뿐입니다.

 

이제 2년이 흘렀습니다. 그 날 이후, 사고가 난 날부터 난 너무 힘들었어요. 전 그냥.. 그저.. 단지..."


■ 참고, EBS 다큐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후쿠시마원자력발전소 [福島原子力発電所(복도발전소)] (두산백과)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mystery&no=444207&page=1)
, (http://instiz.net/pt/154606)

, 체르노빌 실험 출처 : (http://www.world-nuclear.org/information-library/safety-and-security/safety-of-plants/chernobyl-accident.aspx)

,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사고 위키 : https://ko.wikipedia.org/wiki/%EC%B2%B4%EB%A5%B4%EB%85%B8%EB%B9%8C_%EC%9B%90%EC%9E%90%EB%A0%A5_%EB%B0%9C%EC%A0%84%EC%86%8C_%EC%82%AC%EA%B3%A0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RBMK) #2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체르노빌 사고 그 사건,사고의 진실 그리고 시민들의 희생 #3



키워드 : 사고, 역사, 우라늄, 방사능, 원자력, 발전소, 원자, 체르노빌, 후쿠시마, 지진, 실험, 위해, 악재, 누출, 사고, 사태


  1. 응축수 : 열교환기에서 생기는 수증기의 응축물, 온도가 하강함으로써 생성된 물과 같은 액체. [본문으로]
  2. 비상노심냉각장치 : 대량의 냉각재를 노심에 공급해주어 노심을 안전하게 정지시키는 장치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 해당 이야기에 대해 떠들어보기

 ≫ 친일파 청산이 아직도 이어지는 것과 당시 노무현 대통령께서 일궈낸 밭을 망치는 후대 대통령과 그 행위들을 보면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다. 노무현은 서민들을 위해 싸웠다. 부패한 정권과 싸웠고, 당내에서도 자기편은 소수였다. 모두가 그를 싫어했지만, 국민들만이 그의 편이였다. 마지막엔 국민들마저 실망감에 야유를 퍼부었다. 언론사들도 공격했다. 언론사들도 그의 적이었다. 내용을 정리하면서 이 아픈 마음을 어느 누구에게도 풀 수 없었다. 그냥 이 포스트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아주길 바랄 뿐이다. 친일파 청산 관련 내용의 뼈대는 아고라(출처는 맨 아래)에서 가져왔다. 관련 내용에 대해서 처음부터 신뢰하지 않았다. 아고라에서는 그 증거와 출처가 명확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쓴 글만 보고 그대로 믿고 내가 포스팅하게 된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다시 읽고 다시 포스팅하여 왜곡된 역사를 쓰고 써, 진실도 아닌 역사를 쓰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흔하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인터넷이기에 스크랩은 하되, 최대한 그 출처와 증거를 가져오려고 노력했다.



■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사태

 ≫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절 탄핵 가결일은 2004년 3월 12일이다. 왜 이 날 국회의원들은 탄핵을 결정한 것인가? 그 이유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은 국회에서 2004년 3월 2일이였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이 나온지 불과 10일만에 국회의원들은 들고 일어나 탄핵을 하려고 했다. 

[관련URL]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관련(뉴스 승인 날짜 참고) :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2088

[관련URL] 노무현대통령탄핵사태 날짜 두산백과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25242&cid=40942&categoryId=31778



▼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 후, 매우 좋아하는 국회의원. 친일파 또는 그로 이득을 얻은 분이 아닐까 의심해본다..



■ 노무현 대통령은 유일하게 친일파와 싸웠고 서민들을 위해 힘 쓴 대통령이였다.


■ 노무현 정권 때 만들어지고, 이명박 정권 때 폐지된 것들

 ≫ 이명박 대통령이 법을 직접적으로 없앴다는게 아니라, 간접적으로 없앴다. 그는 이러한 관련된 법을 유지시키지 않고 지키지도 않았다. 혹은 정말로 끝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학생 때 시민운동에 참여했던 그가 이제는 다른 방향으로 혁명을 돌린 것일까

 제 17대 이명박 대통령 재임기간 : 2008 ~ 2013

1.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4년간의 임무를 완수하고 2009년 11월 30일 위원회 활동이 종료되었다" 라는 글이 쓰여져 있다. 해당 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관련URL, 나무위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 https://goo.gl/xEzyb8


2.일제 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 아래 증거 뉴스의 등록 날짜는 2012-09-26일, 해당 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관련URL, 한겨레신문] "일제 강제동원 피해조사위 청와대, 연내 활동종료 주문"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3421.html


3.친일재산조사환수위원회 

 : 아래 증거 뉴스의 등록 날짜는 2010-07-12일 해당 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관련URL, 뉴스데스크] "친일 재산 조사위원회, 4년간의 활동 종료"  : http://imnews.imbc.com/replay/2010/nwdesk/article/2658824_18903.html


4.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모든) 정리조사위원회 

 : 아래는 증거의 위키백과이다. 연혁에서 2010년 12월 31일 해산되었다. 또한 아래 증거, 오마이뉴스에서도 설명한다. 해당 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관련URL, 위키백과] "대한민국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 https://goo.gl/R0ZlJE

[관련URL, 오마이뉴스] "우리는 왜 진실위 조사관 백서를 내는가" : https://goo.gl/tUlqkp


5.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 아래 증거 뉴스의 등록 날짜는 2009년 12월 6일이다. 해당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관련URL, 국민일보] "4년 활동 마치고 해체되는 군의문사진상규명위 윤원중 위원장" : https://goo.gl/CaKjP9


■ 노무현 정권 때 만들어지진 않았으나, 이명박 정권 때 폐지된 것들


1.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

 : 아래 증거 뉴스의 등록 날짜는 2013년 3월 7일이다. 해당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관련URL, 서울의소리] "이명박 국민들몰래...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폐지" : http://www.amn.kr/sub_read.html?uid=8389


2. 투표용지 보존 기간 축소

 : 아래 증거 글은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의 팀장 박대용 방송기자께서 쓰신 글이니 신뢰하여도 된다. 시행 날짜는 2012년 10월 2일이다. 해당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그리고 2012년 12월 19일은 대통령 19대 대선 선거일이다.

[관련URL, 박대용기자 블로그] "투표지 보존기간은 얼마까지 가능할까" : http://biguse.net/686


■ 노무현 정권 임기말 화폐 고액권 발표, 10만원권 김구 주석 확정 그러나..

 ≫ 노무현 정부 임기말 , "대한민국 화폐에는 독립유공자 애국지사분들이 단 한 분도 없다. 한국인이 없다." 라며 확정했지만, 이명박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12월초 10만원권 발행을 무기한 연기 직후 같은 달 발행결정을 취소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5만원권과 10만원권 등의 고액권 발행은 지난 정부에서 정식으로 발표하여 추진하던 사안이었다. 


 ≫ 당시 시점으로 1만원권이 나오고 나서 물가가 12배 이상 올랐으므로 고액권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7대 국회에서 먼저 여야 합의로 고액권 발행 촉구 결의안을 냈고(이것은 법률적 효력을 갖는다) 이를 수용한 정부에서 국민 여론을 조사한 후 5만원에는 신사임당, 10만원권에는 김구의 초상을 넣기로 결정한 바 있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14일 보수우익단체들이 한국은행 앞에서, '10만원권은 이승만, 5만원권은 박정희'라는 주장을 펼치며 시위를 한 후 한국은행의 태도가 돌변해 버린 것이다. 한국은행은 "정부의 요청으로 10만원권의 발행을 유보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관련URL, 오마이뉴스 발췌] "뉴라이트와 현 정부에 조롱당하는 김구 주석"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51135



■ 박근혜 정부 "항일 흔적 지우기"

 : 2014년 1월 1일부터 도로명 주소 전면 시행, 친일파 동아일보 창립자 김성수의 호를 딴 도로는 존치[각주:1]하고, 반면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의 호를 딴 서울 "명동우당로"는 명동 11길로 변경.


■ 클릭한 순간 노무현 대통령께서 서거하신 진짜 이유를 알 수 있다.



키워드 : 10만원,  10만원권,  19대,  1만원,  5만원,  5만원권,  60년,  가결,  갈등,  강제,  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광복,  교체,  국민,  국민일보,  국회,  규명,  기간,  김구,  노무현,  노태우,  뉴스,  뉴스데스크,  대통령,  독재,  동원,  박근혜,  박대용기자,  박정희,  발표,  법,  보존,  부정,  부정선거,  부패,  분열,  비리,  사유,  사태,  서거,  선거,  선거개입,  세력,  시대,  신문,  싸움,  역사,  올바른 역사,  우익,  위원회,  이명박,  이명박 비리,  일보,  일제,  재산,  재임,  전두환,  정권,  정리조사위원회,  정부,  정식,  조롱,  좌우,  좌익,  주석,  죽음,  진상,  진상규명,  진상규명위원회,  진실,  진실위,  진실화해,  처벌,  청산,  축소,  출처,  친일,  친일반민족행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세력,  친일인명사전,  친일재산조사,  친일재산환수위원회,  친일파,  탄핵,  태도,  투표용지,  투표용지 보존기간,  특별법,  포스팅,  한겨레,  한국은행,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해방,  해소,  행적,  화해,  환수,  환수위원회

  1. 존치하다 : 제도나 설비 따위를 없애지 아니하고 그대로 두다. [본문으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