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 대전 종결 후 소련은 독일군, 일본군 포로들을 전후(戰後) 소련의 복구 사업에 동원하기 위해 오랜 기간 강제로 억류한다.


연합국은 이러한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1949년 제네바에서 포로에 관한 협약을 체결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취지는 포로의 신속한 본국 송환에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약의 내용은 아주 인도적이며 규정이 지켜진다면 소련이 저지른 것과 같은 잔인한 포로 취급의 재발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어졌다.



하지만 이 조약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고 이 허점은 6·25 전쟁에서 처음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본국으로의 귀환을 거부하는 포로가 있다면 제네바 조약은 이와 같은 예외사항을 인정하지 않던 것이었다.



6·25 전쟁에서 발생한 공산군 포로의 구성과 성격은 제네바 조약으로 정의내릴 수 없을 만큼 매우 다양하고 복잡했다.


①정규 인민군 

②전쟁 중에 북한군에 강제 동원되었다가 아군에 귀순한 자 및 후퇴시 투항해 온 사람

③남한 주민으로서 전쟁 중에 자진해서 의용군이 되었다가 유엔군에 붙잡힌 사람

④남한 주민으로서 전쟁 중에 강제로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붙잡힌 사람

⑤북한 주민으로서 피난 오다가 유엔군에 수용된 사람 소위 피난민 포로

⑥공작 임무를 띠고 귀순을 가장하여 밀파된 위장포로

⑦중국군


전쟁 중 붙잡힌 북한군 포로의 수는 약 16만 명이었고 중국군 포로의 수는 약 2만명에 달했다.


                <실제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운동하는 포로>


전쟁 초기의 공산군 포로는 전반적으로 온순하여 관리에 우호적이고 협조적이었으므로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부산 포로수용소의 경우에는 10만 명이 넘는 포로들이 매우 좁은 공간에 수용되어 있었고 경비병도 부족했으나 비교적 평온했다.


전쟁 발발 후 1년 동안은 이념적 분리, 대립, 투쟁이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아 평화로운 나날이 흘러갔고 이때는 친공이나 반공의 구분도 없었다.

또한 포로 관리를 담당하는 유엔군 당국도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낙관에 빠져 포로 관리를 소홀히 했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 이후 포로의 수는 급격하게 증가하여 약 14만 명에 이르게 되는데 이때까지의 시설로는 늘어난 포로들을 수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엔군 사령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포로수용소를 확장할 계획을 세운다.






유엔군사령부가 거론한 포로수용소 첫 후보지는 제주도 였다. 그러나 미 8군 사령관은 이 섬이 적절치 않다는 입장을 밝힌다.

그 이유는 1) 제주도가 이미 피난민으로 초만원 2) 이용할 수 있는 물이 부족 3) 이 섬이 오랫동안 공산주의의 온상이었음 4)피난한 한국 정부가 이 섬을 임시정부 장소로 사용할 가능성이 있음 이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떠오른 후보지는 바로 거제도였다. 이유는 1) 섬이기 때문에 포로관리에 최소의 인력과 경비가 소요됨 2) 육지로부터의 이동거리가 짧음 3) 급수가 비교적 좋음 이었다. 섬에 많은 인원을 먹일 만한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는데 거제도만큼은 물 공급상태가 좋았다. 또한 포로를 먹일 양식을 재배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점도 고려가되었다.



이렇게 해서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세워지고 17만 명의 포로가 수용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벌어나는 일이 역사상 전무후무할 정도로 유별나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포로관리를 맡은 미군은 포로의 인권 존중이라는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는데 치중해 포로를 극진히 대우한다. 그래서 공산군 포로들은 인민군 군가를 부르기도 하고 사진과 같이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를 붙여놓고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선동적인 구호나 미국인을 증오하는 구호를 외치는 등 저항 행동을 보인다.



본격적으로 북한의 지령을 하달받은 특수부대 요원들이 포로로 위장하여 잠입해 포로들을 조종하고 조직을 만들고 수용소 근처의 민간인이나 피난민을 매수하여 다른 동의 포로와 정보를 교환하고 외부의 게릴라를 통해 북한과 연락을 주고받는다. 또한 수용소 내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살인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수용소장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사법권이 없다는 이유와 현실적으로 포로의 수가 너무나 많고, 주동자를 가려내기가 어려운 점이었다. 무엇보다 유엔군 측은 이런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었고 실제로 이런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경험이나 방법을 알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안에 썩어있던 고름이 표면위로 대두되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전쟁 중 상황이 급박해 포로를 체계적으로 분류하지 못 하였기 때문이다.

1952년 2월부터 포로를 이념에 따라 분류 심사를 실시하려는데 각 구역에 사상적으로 어느 한 편이 세력을 장악함으로써 친공 또는 반공 구역의 성격을 띄게 된다. 이때 친공포로들은 자신들의 구역 내에서 심사에 저항을 하게 된다.


52년 3월 판문점의 휴전회담장에서는 포로송환문제를 두고 설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쟁점은 자원송환이냐 또는 강제송환이냐의 문제였다. 연합국은 포로의 결정에 따른 자원송환을 내세웠고 공산군 측은 제네바 협약에 따라 강제송환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대비책으로 미군은 포로를 심사하고 분류하여 명단을 작성해 공산군 측에 넘겨주면 공산군 측에서도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어할 것이라 생각해 심사를 실시한다.



4월 수용소 측은 확성기를 통해 포로 상호교환에 대비하여 송환을 원하는 포로와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를 구분할 목적으로 개별적인 면회심사를 실시할 것을 알렸다. 그리고 이 심사는 포로들의 일생을 좌우할 중대하고도 최종적인 결정이 될 것이므로 심사숙고하여야 한다고 말하는데


단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다른 사람괴 의논해서도 안 되고, 또 자신의 결정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서도 안 된다고 주의를 했다. 그리고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에 대해서는 유엔군사령부가 어떤 보호나 장래에 대한 보장을 약속할 수 없으며, 그들은 거제도에 장기간 억류되어 있을 것이라 말했다. 또한 송환되지 않는 것은 본인의 자유이지만 그러한 결정이 자신의 가족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것임을 분명히 말했다. 


방송에 이어 공산군 측으로 받은 '특별사면 선언문'을 방송한다. 하지만 이 사면 성명과 유엔 당국의 성명은 포로들 사이 큰 파문을 불러 일으킨다. 유엔 당국은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를 지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송환을 강요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엔군 측은 포로들이 가능하면 본국으로 돌아가길 기대했기 때문이다. 한편 송환을 거부하려 했던 포로들은 자신들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친공 세력들은 반대 시위를 일으킨다. 그들은 심사를 받지 않고 포로 전원이 본국으로 송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개인 심사를 하고 송환을 거부하는 사람이 나타나 이탈자가 많이 발생하면 공산주의의 허상이 세상에 밝혀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사는 시작되고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진다. 그 결과 총 10만 6000명을 심사하였는데 공산권으로 돌아가기로 결심을 한 포로는 약 3만 1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내부 사정이 전세계에 밝혀진 사건이 발생한다. 1952년 5월 7일 거제도 포로수용소장인 돗드 준장은 "만일 소장이 면회를 허락한다면 포로 명부 작성에 협조하겠다"는 제 76구역 포로 대변인의 제의를 수락하고 접견하러 간다. 돗드가 문 근처로 접근했을 때 그 옆으로 지나가던 포로 작업조가 순식간에 그를 끌고 수용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렇게 해서 포로수용소장은 자신이 관리하는 포로들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다.


미국은 깜짝 놀라 콜슨 준장을 포로수용소장을 새로이 임명해 포로 대표들에게 돗드 장군을 내보내도록 요구하고 듣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하겠다하나 포로들은 돗드 장군을 인민재판에 회부하는가 하면 그를 인질로 하여 교섭을 요구하면서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내보내지 않겠다 말한다. 결국 콜슨은 이기지 못하고 3차에 걸쳐 요구사항을 수락하는 각서가 교환된 후 돗드는 풀려 나왔다.


석방과정에서 작성된 '콜슨 문서'는 휴전회담장에서 공산군 측이 유엔군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었다. 공산군은 이 각서를 내보이며 유엔군 측이 포로를 부당하게 대우한 증거라며 악착스럽게 물고 늘어졌다. 각서에 나타난 약점을 들어 최대한의 선전효과를 노린거였다. 유엔군 측은 문서의 효력을 부인했지만 수용소장이 작성한 것이 사실이기에 대단히 곤란해졌다. 이로 인해 콜슨은 징계를 받고 후임으로 보트너 준장이 임명된다. (위의 사진과는 무관)


초기 포로 수용에 기준이 없었으므로 함께 수용된 포로들의 이념은 다양했다. 포로송환문제가 부각되면서 각 구역에선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모의와 투쟁이 전개된다. 처음엔 주먹으로 때리거나 천막으로 치는 정도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싸움은 가열됐다. 친공 구역에서는 반공포로를 찾아내 구타하거나 죽이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게 된다.



친공포로 중에는 전문적인 핵심 공산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조직을 만들어 반공포로를 압도하려 했다. 유엔군 측은 이들을 색출하거나 제어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수용소 내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이에 반공포로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51년 8월 수용소 내에서 '대한반공청년단'을 결성한다. 


하지만 친공포로 조직은 북한의 용의주도한 계획과 지령 자금 지원을 받아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대한반공청년단은 아마추어적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공청년단의 핵심 주류는 과거 북한에서 공산주의의 학정을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반공의식은 아주 투철했다. 


7월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진행되는데 큰 장애요인은 여전히 포로의 송환문제였다. 미국은 "포로의 송환 여부는 포로 자신의 뜻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자원송환 원칙을 제시하고 공산군 측은 제네바 협약에 따라 포로는 원래의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결국 포로송환문제는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빠진다. 이 협상이 포로 송환 문제로 인해 1년 반이나 더 지속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한편 새로 부임한 보트너 소장은 포로들을 이념에 따라 분리 수용하기로 결정한다. 송환거부 포로(반공포로)는 육지에 신설한 수용소로, 중국군 포로는 제주도로, 나머지 친공포로와 심사 분류를 실시하지 못한 포로는 거제도 지역에 분산 배치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친공포로들은 저돌적이고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므로 그는 3단계 작전을 구상한다.



① 거제도에 근무하는 미군의 군기 바로 잡기와 경비병력 보강

-> 자질이 우수한 병사는 주로 전방에 투입되었으며 후방에 포로 경비의 임무를 맡은 군인들의 군기는 대단히 문란해져 있었다. 그래서 이들을 단시간 내에 훈련시켜 근무 자세를 바로 잡았다.


한편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제187공수연대와 캐나다군, 영국군 그리고 그리스군 및 터키군이 거제도로 이동하여 수용소 내 유엔군 병력이 강화되었다. 추가적으로 전차부대와 공병부대까지 투입되어 부대의 힘이 증강되었다.



② 증강된 병력과 장비로 포로를 제압

-> 보트너 장군은 직접 포로 대표를 만나 수용소내 계양된 인공기와 중국기를 철거하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포로가 수용소 당국에 요구 조건 제시를 금지시켰다. 하지만 친공포로들이 여전히 명령을 무시하자 무장병을 수용소 내에 진입시켜 강제로 철거시켰다. 또한 지시를 어기고 계속해서 적기를 게양하는 포로 두 명을 본보기로 사살함으로써 의지를 보여주었는데 이후로 포로들이 기를 올리는게 사라졌다.


그리고 북한 특별공작대가 수용소에 인접한 민가를 이용해 암약하고 있단 사실을 확인하고 수용소 부근에 거주하는 인가를 철거해 주민을 이주시키고 포로들을 용이하게 관리하기 위해 500명 단위의 수용소 건설을 새로 지시한다. 이를 눈치챈 포로들은 수용소 안에서 무기를 만드나 그 동안 포로의 대표 역할을 해온 북한군 포로 이학구 대좌를 찾아내 감금시킨다.



③ 이념에 따라 포로들을 분류하여 강제 분리 이동

-> 친공포로들은 도끼, 몽둥이, 식당 칼, 창, 휘발유,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수용소 정문 안쪽에 파놓은 교통호로 들어가서 대항을 한다. 하지만 보트너 장군은 전차부대와 공수부대로 진압을 한다. 2시간 반 동안 한 발의 총도 쏘지 않고 최루탄으로 진압하는데 수용소 내부 수색에서 포로들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무기가 나오고 참호와 각 막사를 연결하는 지하도와 분리 수용작전에 대항하기 위한 작전계획서도 발견되었다. 


이후 10일 동안 포로를 분리시키는데 친공포로 수용소에서는 지하창고에 사제무기와 시체 16구가 발견된다. 친공포로에 의해 사형된 반공포로였던 것이다. 이 분리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이념에 따라 각기 달리 수용되어 반공포로들은 이제서야 그나마 살인의 위협에 떨지 않게 되었다.



53년 휴전회담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휴전회담에서 한국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고 이승만은 여전히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왜냐하면 회담의 결정이 반공포로들을 중립국인 인도에 보내 90일동안 본국에서 특파된 요원으로부터의 설득의 과정을 거치게 하는데 이때 인도는 공산주의의 영향을 다분히 받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이는 엄연히 부당한 일로써 회담이 끝을 향해 나아가자 이에 이승만은 마음으로만 품어 왔던 엄청난 결심을 하게 된다.


​ 

그것은 바로 '반공포로 석방' 이었다. 반공포로 석방은 그 당시로서는 대단히 놀라운 발상이었다. 설사 한 번쯤 생각해 볼 수는 있는 일이었겠지만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 실현은 절대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될 일임이 분명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라 해도 포로를 한국군이 관리하지도 않고 작전 지휘권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포로수용소는 미군 병참관구사령부(KCOMZ)가 관할하고 있었으며 한국군은 다만 경비부대와 헌병을 파견해 수용소의 경비를 맡을 뿐이었다.



또한 포로를 석방한다면 미국과 유엔 참전국들과의 충돌을 초래하고 나아가 공산군 측의 비난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모험적인 일을 단행하려고 결심한 요인을 자신이 직접 밝힌 바는 없지만 당시의 정황과 이 사건을 전후해 표명한 언행으로 미루어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① 반공포로를 공산 진영으로 넘겨줄 수 없다는 이념적인 측면

② 외교적 주도권의 장악

③ 반공 통일에 대한 한국 국민의 의지

④ 휴전협상에 전쟁 당사국인 한국의 입장이 전혀 참작되지 않고 있는데 대한 국민적 분노

⑤ 반공포로들의 열망과 그들이 제출한 직,간접적인 탄원


6월 6일 아침 이승만은 헌병총사령관인 원용덕 소장을 경무대로 불러 "한인 반공포로를 석방하라"는 임무를 부여한다. 여기서 한인 반공포로란 유엔군사령부에 의해 포로 분리작전에 의해 거제도에서 육지로 수송되어 분산 수용되어 있던 약 3만 5000여 명의 한국인 포로를 말하는 것이었다. 지시를 받은 원용덕은 이렇게 엄청난 중대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을 성사시키는 데에 따르는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이 유엔군 사령관에게 이양되어 있기에 대통령의 명령이라 해도 포로 석방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포로수용소의 관리를 미군이 담당하고 있어 그들의 동의나 협조 없이는 포로 석방이 곤란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국방부장관이나 육군총참모장이 배제되어 있어 정상적인 지휘계통에 의한 업무처리가 불가능하다. 헌병총사령관이라고 해도 육·해·공군 헌병을 지휘할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수용소 경비를 담당하는 육군 헌병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에 원용덕은 포로에 관한 제네바 협약에서 교전 당사국으로서 전쟁포로에 대한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단 해석이 가능한 규정을 발견하고 미군이 관리하고 있는 포로를 한국군이 처리한다 해도 위법이 아닐 수 있다는 다분히 자기중심적인 법적 해석 근거를 도출해 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포로 석방을 위해 각 수용소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육군 헌병을 헌병총사령관 지휘 하에 넣기 위해 이승만을 찾아가 '오늘부터 육·해·공군의 모든 헌병은 헌병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들어갈 것을 명령함' 이라는 내용의 문서를 서명받고 '반공포로 석방명령서도' 도 받는다.



원용덕은 경무대를 나서 진헌식 내무부장관을 찾아간다. 반공포로 석방 자체는 군이 담당하지만 석방 후에 있을 포로의 안내와 보호는 경찰의 임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해서 초기 반공포로 석방 관련 정보를 알고 있었던 사람은 원용덕, 진헌식 내무부장관 당시 휴전회담의 한국측 대표 최덕신 소장 그리고 갈홍기 공보처장이었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국방장관과 육군총참모장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드디어 6월 9일 긴급명령으로 육군헌병사령부 요원 석주암 준장, 송효순 대령, 홍규표 대령을 소집한다. 회의가 시작되자 원용덕은 처음부터 "본 회의에서 논의되는 일은 국가 1급 비밀이므로 참석한 여러분은 회의 내용을 절대 비밀로 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방안은 기습적으로 포로를 석방하는 것으로 한국군 경비부대와 헌병대가 협조하여 미군의 눈을 속이고 야간에 철조망을 절단하여 포로들을 탈출 시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거사를 6월 18일 0시로 정했다. 일시와 방법이 정해지자 포로 석방계획을 작전 명령 형식으로 만들고 사령관이 날인한 봉투에 넣어 밀봉해 이 명령서를 각 포로수용소로 전달하기 위해 헌병 영관장교 5명을 밀사로 선발한다. 


밀사를 파견한 후 17일 날이 어두워지자 송효순은 교환대를 통해 들어오는 모든 전화를 부사령관실로 직접 돌리도록 조치한다. 이 과정에서 통신 보안에 유의하여 기밀 누설방지에 온 신경을 쓴다. 원용덕은 이번의 국가적 대명이 일생일대의 막중한 책무였기에 실패라도 한다면 책임을 지고 할복자살이라도 하여 사죄하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나타낸다.



18일 새벽 드디어 각 수용소로부터 보고가 들어온다. 거사는 성공적이었다. 다만 영천 수용소는 사전에 미군 측에 탐지되어 실패하고 나머지 수용소는 모두 반공포로 석방에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원용덕은 새벽 4시 경무대 비서실을 통해 이승만에게 거사 성공을 보고한다. 6시 정각엔 원용덕이 국민에게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담화문'을 발표한다. 



새벽 2시 육군 총참모장 백선엽 장군에게 빗발치듯 전화가 걸려온다. 포로수용소를 관장하는 병참관구사령관 헤렌장군, KMAC 단장 로저스 장군, 미 제8군사령관 테일러 장군, 도쿄의 클라크 유엔사령관 등이었다. 모두 충격을 받고 백선엽 자신도 놀랬으나 어떠한 답변이나 해명도 할 수가 없었다. 이에 경무대로 전화를 거나 이승만은 담담했다. 이 사건을 '대통령이 지시한 일' 이라 말하라 했다. 이어 이승만은 성명에서 자신이 포로 탈출에 연루되어있음을 신속하고 솔직하게 시인했다.




반공 포로 석방의 관한 현황은 육군본부가 제시한 위의 표와 같다. 석방된 포로들은 각 기관을 방문하여 감사를 표하고 군경 유가족에 대한 노력 봉사, 농가 지원 등의 자발적인 봉사를 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그들 중 군 입대를 원하는 자는 우선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일부는 의용경찰로 채용된다.



미군 당국은 경비대를 미군 부대로 교체하고 가능한 한 많은 포로를 찾아내 재수용하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탈출한 포로들은 대부분 지방 주민과 섞여 버렸고 한국 정부와 국민들이 그들을 보호하였기 떄문에 사실상 불가능했다. 한국의 행정기관과 국민들은 포로들에게 옷을 주고 그들을 민가에 숨겨주기에 이른다.



이 사건에 대해 미국은 얼른 전쟁을 종결시키고 싶었기에 난감한 입장에 처한다. 처음엔 크게 분노하나 곧바로 이 방법 말고는 반공포로를 자유롭게 석방하는 방법이 사실상 없었음을 인정하고 이승만을 계속 설득하고 휴전협상 체결에 협조할 것과 협정 이행 방해를 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끊임 없이 요구하고 이로 인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한편 공산군 측의 입장은 어땠을까? 처음엔 강력히 반발하나 의외로 시간이 지남으로써 휴전 조인의 무기한 지연이나 협상의 전면 중단으로까지 사태를 몰고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이를 통해 그들도 이미 휴전을 바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한국 국민들은 반공포로들을 보호해주고 미군 수색대원을 상대로 게릴라처럼 행동하며 포로들을 환대해준다. 즉 한국 국민들과 이승만의 결단으로 이루어진 이 사건은 일치단결된 민족적 정기의 발원이였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석방되지 못한 나머지 반공포로는 중립국으로 넘겨저 90일 동안 포로의 본국 복귀 설득 과정을 밟게 되기로 하고 정전협정이 조인된다.


다만 반공포로 석방의 대가는 분명 있었다.


휴전을 절실히 원했던 공산 측은 이승만의 휴전 동의를 끌어내기 위해서라도 국군을 강타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런 이유로 발발했던 게 휴전 마지막에 벌어졌던 '금성전투'였다. (중공군 7차 공세)


마오쩌둥은 이승만 절대 용서못하고, 석방된 반공포로만큼 남조선 군인을 죽이도록 지시하였고, 이 전투로 인해 국군은 2만명 가까운 병력이 손실되고 서울 면적의 1/3이나 되는 귀중한 영토를 상실하게 된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을 이렇게 평했다.

이승만은 너무 비협조적이었고, 고집을 부린 사례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공산 국가 못지 않게 이승만은 너무도 불만스러운 동맹자였으며, 이는 아무리 심한 말로 비난해도 지나치지가 않는다. (한국전쟁연구회, 탈냉전시대 한국전쟁 재조명 p228)


3줄 요약


1. 제네바 협약으로 정의내릴 수 없는 포로들이 존재


2. 본국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반공포로)들의 고된 나날이 존재


3. 결국 이승만의 결단으로 석방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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