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문헌1: 2009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외교학 석사학위로 제출한 논문 (김남수)
참고문헌2: Eisenhower and Korea: Still a Matter of Debate (제임스 I 메트레이 교수)
김남수 교수는 "한국 전쟁 후 한국의 안보를 보장함으로써 한국의 안정과 번영에 기여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은 이승만의 업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당시 미국은 한국과의 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미온적이었고, 한국은 상호방위조약 체결이 국가의 생존과 직결되는 매우 급박한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을 타개한 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교묘한 대미전략이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이승만 대통령의 중요한 업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고 말한다.
1950년 발생한 6.25 전쟁. 51년 6월부터 자유진영과 공산협정 간의 정전협정 논의가 시작된다.
그러나 회담은 큰 진전이 없었고,
양 진영은 53년 3월에도 38선 부근에서 대치 상황이 계속된다.
처음 미국의 입장은 이승만과 같이 한반도의 통일이 목표였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며 한반도의 통일에 대해 회의적으로 변한다.
미국은 군사적 수단을 통해 북한 지역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국과의 전면전을 피할 수 없으며
상황이 어려워 진다면 중국 본토에 핵무기가 필요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칫 3차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수 있는 상황이 우려되었고
결국 자국의 군사적 수단의 사용을 불허한다.
미국의 기밀해제된 NSC 48/5 문서를 보면 미국의 38선 이북 진출을 금지함과 동시에
NSC 118/2 에서는 소련이나 중공과의 전면전 발생 억제를 누차 강조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1952년 11월
미국 본토에서는 아이젠하워가 미 합중국 3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한국을 위해 자국의 군사적, 경제적 희생을 더 이상 원치 않았던
자국민들의 바람이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6.25 전쟁으로 인해 미국은 한반도에서 36,000 명 이상의 사망 및 실종자와
10만명에 가까운 부상자란 인적 손실과 동시에 670억 달러라는 물적 손실을 입었다.
그로 인해 미국에서는 한국전쟁의 빠른 종결과 국방 예산 감축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아이젠하워는 "당선이 되면 한국을 방문해 참상을 직접 알아볼 것" 이라 연설하며
"한국 전쟁의 평화적이고도 신속한 종결" 이란 공약을 내걸고 당선이 된다.
미국은 군사적 수단을 통해 한반도의 통일을 달성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전 후 한국을 포기할 생각도 결코 없었다.
당시 세계 정세는 2차 대전 종전 후 미국 vs 소련
즉, 자유연합 vs 공산권의 세력 싸움에서
유럽의 약소국들이 어디에 붙어 줄을 서야할지 간을 보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유럽의 약소국들이 미국의 신뢰성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있고
공산권에 가담하는 상황이 일어나선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미국은 한국을 포기하려고도, 포기해서도 안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입장과는 별개로
이승만은 정전협정 이후 벌어지게 될 상황에 큰 두려움을 느낀다.
그 이유는 여전히 한반도에는 중공군이 남아있었고
이를 해결짓지 않은 채 섣불리 정전협정을 맺는다면
공산군들이 내려와 한국을 재침략하여 한반도가 공산화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승만은 정전협정 전에 자국의 확실한 안보를
조약으로 보장 받기 위해 미국에게 끊임없이 요구를 하게 되는데,
그 조약이 바로 우리가 아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승만의 요구에 아이젠하워는
지금 당장 상호방위조약은 필요가 없다며 단숨에 거절을 한다.
그 이유는
①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어떤 나라보다 많은 경제 원조와 확실한 안보를 지원 받고 있어 굳이 명시된 조약이 불필요
② 중국이 남하할 시 더욱 엄격한 군사적, 경제적 제재를 가하겠다는 UN 차원에서의 '대제재선언' 이란 안보 공약이 있음.
이러한 미국의 완강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또 다시 주장한다.
한반도 북쪽에 중공군을 냅둔 채로 정전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우리에게 사형선고와도 다름 없으며
한반도에서 중공군과 유엔군의 동시 철수와 함께
양국의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요구한다.
당시 미국은 중공군의 한반도 잔류에 대해 위험성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국의 안보를 위해
중공군의 한반도 잔류라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한반도에서 중공군과 유엔군의 동시 철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한국은 독자적으로 북진을 감행하여 민족 통일의 대업을 달성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한국의 단독 북진 감행이란 얘길 듣자마자 미국은 엄청난 위협을 느끼게 된다.
그 이유는 2년 동안 노력해온 정전협정이 평화적으로 마무리 단계를 밟아가는 과정에,
이승만이 단독으로 북진을 감행한다면 신속하고도 평화적인 정전협정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한국에 있는 미군의 안전 또한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이 자국의 협조를 이끌어내려는 행동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는 이승만에게 미국은 한국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한국의 안보를 지켜줄 것이라 약속한다.
그러면서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은 고려될 수 없으며 중공군의 철수는 정전협정 전이 아니라
정전협정 후에 정치회담을 통해 논의될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입장을 강조한다.
이렇게 이승만의 단독 북진 감행이 미국에게 엄청난 위협으로 작용한 이유는
바로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주한미군의 생사가 걸린 문제임과 동시에
자국의 계속된 전쟁 비판 여론 때문이었다.
하루 빨리 전쟁을 끝내야 하는데 이승만이 초를 치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한국과 미국은 상호간의 위협인식이 각각 존재했다.
한국으로서는 미국으로부터 안보를 보장받지 못한 채 방기(放棄)될 두려움.
미국으로서는 한국의 단독 북진 감행으로 전쟁이 재개되어 다시 연루(連累)될 두려움.
결국 미국은 이승만의 단독 북진 감행이란 비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
'에버레디 플랜(Ever-Ready Plan)' 을 구상한다.
이승만이 단독으로 북진을 감행할 것이라고 판단될 시
그를 암살하고 한국 정부를 전복시켜 미국에 호의적인 장면을 앉히려는 계획이었다.
계속된 양국의 입장 차이로 미국은 여러 고민에 빠지게 된다.
① 미국은 자국이 아닌 유엔을 통한 정전협정 체결과 대중 억지 정책으로 한반도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줄이고 싶었음.
② 빠른 정전 협정 체결을 위해선 이승만의 협조가 필요한데 단독 북진 감행의 가능성이 존재.
③ 그러나 상호방위조약 보장해주면 그것을 믿고 이승만이 군사 행동 실시해 북진 통일 실행에 옮길 가능성도 존재.
결국 미국은 이승만과 서로의 입장에 대해 진지하게 토의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1953년 5월 12일
이승만과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 장군이 만난다.
클라크는 이승만에게 자국의 입장과 조건을 잘 설명함과 동시에
이승만의 진의를 파악하여 그 내용을 미 함동참모본부에 전송하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면담 도중 내면에 잠식되어 있던 문제점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는데,
바로 반공포로 이다.
반공포로는 본국으로의 송환을 거부하고
자유진영에 남고 싶어하는 전쟁 포로를 총괄하는 명칭이었다.
휴전회담이 1년 넘게 지연됐던 이유도 반공포로의 처리에 대해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이견 차이가 좁혀지기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자유진영은 포로의 인권을 존중하여 자신의 의사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는 자유송환 원칙을
공산진영은 제네바 협약에 입각해 모든 포로들의 원칙적 본국 송환이라는 강제송환 원칙을 제시한다.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공산진영이 새로운 제안을 내놓는다.
바로 중립국인 인도로 반공포로들을 보내어 90일 동안 본국에서 특파된 요원으로 하여금
설득 기간을 거치고 기간이 지나서도 송환 거부 의사를 밝히는 포로는
자신의 의사에 따르게 한다는 제안이었다.
연합국 측도 계속된 갈등 속에 지쳐가던 중 이 제안에 대해
어느 정도 긍정적인 입장을 표하지만 섣불리 제안을 받아들이진 않았다.
그러나 사실 당시 인도는 명목상으로는 중립국을 표했지만
실제로는 공산주의의 영향을 다분히 받고 있는 국가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반공포로를 인도로 보내는 것은
사실상 공산주의 국가로 보내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이승만은 있을 수 없는 부당한 대우라며 공산진영의 제안에 대해 강력히 반대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진 5월 12일 면담에서
이승만은 클라크 장군에게 반공포로를 인도에 보내는 것에 강력히 항의한다.
이에 클라크는 이승만의 입장에 자신도 동의하며 동맹국들 또한 동의를 표할 것이나
이승만에게 반공포로의 석방과 관련해 단독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엄중한 경고를 한다.
동시에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해서도 논의하는데,
미국의 입장은 여전히 상호방위조약은 현재로서는 체결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미국은 구두로써 끝나는 안보 보장만을 원했지 조약을 체결해
한반도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이 증대되는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당시 한반도의 상황을 짚고 넘어가보도록 한다.
당시 한반도에는 2개의 교섭 진행중이었다.
① 6.25 전쟁의 정전을 위한 자유진영 vs 공산진영 간의 교섭
② 한국 vs 미국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②번이다.
그렇다면 한국과 미국간의 교섭에 따르는 각 국의 국가 이익은 무엇일까?
미국은 한반도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제 1이익과
그에 부차로써의 제 2이익이 있었다.
제 1이익은 6.25 전쟁의 신속하고도 평화적인 종결
제 2이익은 자국의 영향력이 감소된 구두로서만 끝나는 안보 보장(ex. 유엔 차원에서의 '대제재선언')
이에 반해 한국의 국가 이익은?
제 1이익은 북진 통일으로 민족적 대업을 이루는 것
제 2이익은 제 1이익을 달성하지 못할 경우 차선으로써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한 안보 체제 확립
이처럼 6.25 전쟁의 종전을 앞두고 각 국은 치열한 수싸움을 벌이게 된다.
미국의 제 1이익은 한국이 단독 북진 행동을 벌이지 않는다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만약 한국이 제 2이익까지 보장 받지 못 한다고 판단되는 경우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북진을 감행해 판을 깨버릴 가능성이 존재했었다.
아이젠하워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이 원하는 상호방위조약의 성격(한국이 공격 당한다면 자동개입)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구두로써만 끝나고 법적 효력이 없는 유엔 차원의 대제재선언을 한국에게 내밀며
유엔 차원에서 안보를 보장해줄테니 굳이 명시된 조약은 불필요 하다는 입장을 내세울 수 밖에 없던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와 회담 후 열흘이 지난 5월 22일
아이젠하워는 한·미간 갈등 요소와 정전협정의 조항들을 정리하여
클라크 사령관과 주미대사 브리그스에게 이승만을 만나서
정전협정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입장을 전달하고 이승만으로 하여금 이를 받아들이게 할 것을 지시한다.
25일 이 문서를 토대로 클라크와 브리그스는 이승만을 만나나
이승만의 태도는 매우 비협조적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정전협정 특히 반공포로 석방 문제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으며
대제제선언의 실질적인 효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부정적인 입장을 강력히 표명한다.
면담을 통해 클라크와 브리그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바로 이승만이 반공 포로를 석방하는 단독 행동을 감행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반공 포로 석방은 누구나 한 번 생각은 해 볼 수 있는 문제였지만
현실에서는 시도조차 하기 두려운 대단히 모험적이고도 위험이 따르는 행동이었다.
클라크는 이런 사실을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해 29일 미 합참에 보고한다.
미 국무부-합참은 워싱턴 시각으로 5월 29일 오전 11시
'남한에서 가능한 비상조치(Possible Emergency Actions in South Korea)'를 주제로 회의를 열게 된다.
회의의 핵심 논의는
① 한국으로부터 미군을 철수시키는 문제
② 비상 상황시 남한 정부를 전복할 권한이 자국에게 있는지에 대한 문제
③ 한국에 대한 상호방위조약의 제안에 관한 문제
1번의 미군 철수는 정치적 문제 뿐만 아니라 군사적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결정나지 못한다.
2번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를 전복시키는 에버레디 플랜은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만 실행될 것이며 가능하면 한국인의 주도로 이루어질 것을 결정한다.
3번에서 기존 미국의 입장이 바뀌게 되는데 이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로 작용한다.
당시 해군 부참모총장 이던 던컨 제독은
이승만이란 작자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상호방위조약이란
카드를 제안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 판단한다.
즉, 이승만의 단독 행동을 염려한 미국은
채찍이 아닌 당근을 주어 이승만과 딜을 시도한 것이다.
합동 회의에서 이 내용은 결국 채택이 되고
종합된 회의 내용은 30일 아이젠하워에게 보고가 된다.
아이젠하워는 내용을 받아들고 현 상황에서 실제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조약에 대한 협상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새로운 제안을 하라고 결정한다.
다만 하나의 조건이 붙었는데 그것은 이승만에게 정전협정에 대해 절대적으로 협조하고
단독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전제하에서 협상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같은 날인 30일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편지를 보낸다.
편지의 내용은 이전과 같은 중국군과 유엔군의 한반도 동시 철수
상호방위조약의 우선적 체결, 한국군의 증강이었다.
이 편지를 받은 미국 관료들은 이승만의 어조가 과거에 비해 훨씬 부드러워 졌다고 평가한다.
또한 이승만이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는데
훗날 이것은 미국이 이승만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반증이 된다.
이에 아이젠하워는 6월 6일 답신을 보내게 되는데 문제는 상호방위조약의 협상 날짜였다.
이승만은 정전협정 이전에 협상을 하자고 주장하나
아이젠하워는 신속한 전쟁의 종결이 목적이었기에 정전협정 이후 논의하자고 단언한다.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수 있다는 미국의 정책 변경은
정전협정을 방해하기 위한 한국의 단독 행동 즉,
① 반공포로 석방 ② 한국의 유엔군 탈퇴 후 단독 북진
두 가지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국이 한반도의 지리적 이점 때문에 상호방위조약을 맺어준게 아니다.
한국과의 외교적 수싸움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한 계산된 행동이었던 것이다.
6월 4일 정전협정이라는 씨름이 계속되고 있는 판문점에서
공산측 대표들이 기존의 제안에 몇 가지 사항을 추가한 새로운 제안을 내놓게 된다.
바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에 대해 중립국송환위원회에서
120일 간의 체류 기간을 거친 후에 포로를 시민 자격으로 변경해 주고
원하는 경우엔 중립국으로 보내도록 지원해주자는 내용이었다.
미국 측은 반공포로 처리에 대한 문제 때문에
정전협정을 1년 이상 질질 끌고 있어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하루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은 마당에 공산진영의 태도 변화는
기대했던 것 이상이라며 호평하고 정전협정 체결에 박차를 가한다.
정전협정이 끝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6월 5일 클라크와 브리그스가 상호방위조약의 협상 제안을 허락받은 권한을 가지고
이승만을 만나 한국의 정전협정 협조를 다시 한 번 확인받고자 조우하게 된다.
그러나 이승만은 정전협정에 대한 유엔의 최종안에 여전히 큰 불만을 표시했으며
그들은 이승만에게 미국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재차 거센 압박을 가한다.
4일 뒤 9일에는 미 합참의장 테일러가 이승만을 만나는데
이승만은 여기서 큰 고민에 빠지게 된다.
아이젠하워에게 반대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왜 정전협정에 반대하는지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테일러는 이승만에게 정전협정과 관련되어 한국에 인도와 공산국가의 대표단이
파견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포기하라고 권유한다.
클라크 사령관은 이러한 테일러의 보고를 덧붙여
아이젠하워에게 이승만이 정전협정 체결이 기정 사실화가 되었다는 것을 이승만 자신도 깨달았고
정전협정을 빠르게 체결하여 이승만의 단독 행동을 원천 봉쇄하여야 한다고 최종 보고한다.
이로써 미국은 이승만에게 자신의 힘으로는 정전협정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빠른 정전협정 체결에 박차를 가하여 6월 18일 최종적인 체결만 남기게 된다.
이로써 미국이 바라는 그림이 모두 그려지고 마지막 작업만이 남아있는듯 했다.
하지만 18일 새벽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승만은 미국과 세계를 향해 보란 듯이 18일 새벽
약 2만 5천여명의 한인 반공포로를 일제히 석방하는 단독 행동을 감행한다.
이 사건의 여파로 18일 예정되어있던 정전협정의 체결은 무산된다.
아침이 밝자 이승만은 미국을 겨냥한 듯한 성명을 발표한다.
반공포로 석방은 한국의 입장을 현실화하기 위한
자신의 모든 권한을 걸고 실행한 최대한의 행동이었으며
이 계획을 미리 알았더라면 미국이 난처함에 처할 것이 분명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인도의 군인과 공산주의자들이 반공포로를 관리하며
포로들을 세뇌시킬 상황을 나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이것은 개인만의 의지가 아닌 국가와 민족의 의지가 반영된
어쩔 수 없는 행동이라 발표한다.
또한 이 행동은 미국이 우려하던 '단독 행동' 의 시작이 아니라고 약속하며
한·미 양측에서는 이 사건을 오해하여 더 나쁜 상황으로 몰고가려는 사람들을 조심하자고 당부한다.
미국은 날이 밝기가 무섭게 바로 제 150차 국가안보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를 소집한다.
그들은 이승만의 반공포로에 대해 매우 심도있게 논의한다.
이승만에게 빅엿을 먹은 아이젠하워는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친구 대신에 또 다른 적이 나타난거 같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은
미국이 그 가능성에 대해서 5월부터 어느정도는 짐작을 했고
사실 그 방법 말고는 반공포로를 자유롭게 해줄 수 없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자신들도 인정한 바가 있었다.
또한 이승만의 성명을 통해 그 의도를 명확하게 밝혔기에
사실상 이승만의 행동을 인정하게 된다.
미국은 반공포로 석방 이후 이승만에게 매우 강한 위협을 느끼고
직접적인 대화만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미국의 아시아 극동담당 차관 로버트슨을 특파로 파견한다.
회담은 6월 24일부터 7월 12일까지 계속되는데 이승만은 여전히 단호했다.
따라서 미국은 이승만에게 자동 북진은 불가능함을 설명하며
만약 정치회담이 결렬된다면 그 다음의 행동에 대해서는
반드시 한국과 상의하여 최대한의 협조를 보이겠다는 제안을 한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의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었으나
이쯤 되면 미국의 입장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계속된 미국의 대한국 정책이 NSC에서 거듭된 수정을 거쳐나가며
1953년 7월 미국은 이승만이 정전협정에 대해 협조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후의 전략을 설계한다.
초기에는 상호방위조약의 필요성을 부인했으나
이제는 상호방위조약을 통해 한국과 함께
중국에 대한 억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우회한 것이다.
드디어 7월 27일
미국을 대표하는 자유진영과 소련을 대표하는 공산진영간의
6.25 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다.
이승만은 한국 문제에 대한 미국과 아이젠하워의 노력과 인내에 감사드린다고 말한다.
이에 미국은 약속한대로 한국과의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착수하겠다고 말한다.
조약의 체결을 위해 미국은 덜레스 국무장관을 파견하여
8월 5일부터 8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회의를 진행하여 양국 간 의견 조율을 한다.
이렇게 하여 이승만과 덜레스는 7일 조약의 내용을 발표한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국과 미국간의 수싸움 사이에서 탄생한 조약이며
한국은 이 조약을 토대로 굳건한 안보를 보장받게 되었고
이는 향후 한국의 경제 발전에 초석이 된다.
10월 1일 미국의 워싱턴
한국의 외무부 장관 변영태와 미국의 국무장관 덜레스가 만나
조약에 서명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최종적으로 체결된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철저히 한국과 미국간의 외교적 수싸움에서
탄생한 조약이고 국제 외교 관계에 있어 모든 것은
이해 관계에 입각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순전히 미국이 한반도의 지리적 이점 때문에 조약을 맺은 것이 아니다.
실리 없는 외교는 존재할 수 없다.
6.25 전쟁 후 세계 최빈국 130개 국 중에서 129위 였던 한국.
그런 한국의 지도자가 강대국인 미국을 상대로
동등한 위치로서의 상호방위조약을 얻어냈다.
이승만은 조약이 체결된 후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후손이 앞으로 누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많은 혜택을 누릴 것이다."
3줄 요약
1. 당시 한반도에는 2가지 교섭이 진행중이었다.
A. 자유진영(미국) vs 공산진영(소련)
B. 한국 vs 미국
A는 6.25 전쟁의 휴전에 대한 교섭이었고
B는 한국과 미국이 각 국의 이익을 두고 벌어지는 외교 싸움이었다.
2. 한국의 제1이익 -> 미국의 6.25 전쟁 휴전을 막고 함께 북진하여 한반도 통일
한국의 제2이익 ->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한 한반도 안보 체재 보장
미국의 제1이익 -> 6.25 전쟁의 신속하고도 평화적인 종결
미국의 제2이익 -> 법적효력이 없는 구두로써의 방위조약(ex.대제재선언)
3. 애초에 한국이 단독 북진을 감행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제1이익은 자동으로 이루어지는건데
한국이 제2이익까지 보장받지 못할 경우 다 죽자는 식으로 판 깨드리면 죶되니까
미국이 이승만에게 때로는 멋대로 행동하지 말라는 압박을 하면서도
너 그러면 안돼 일단 내 말좀 들어봐 등의 회유의 정책을 쓰며 정전협정 체결에 열을 올리게 된다.
4. 그러나 이승만이 정전협정 체결 전에 미국 니네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거리며 반공포로 석방이란
그레이트 빅엿을 먹임으로써 미국이 한국한테 한 수 접고 한국하고 상호방위조약을 맺어준다.
그런데 이걸 통해 대중 억지 정책으로 사용하자는 새로운 해석을 곁들이게 됨으로써 조약을 체결하게 됨.
5. 이처럼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국과 미국 사이 철저한 외교적인 수싸움에서 탄생한 조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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