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병제 도입하여야 하는가? 징병제 대한민국에 대하여


■ 나의 한마디

 ≫ 내 스스로 악마의 대변인이 되어 스스로를 비판하고 모병제와 징병제의 문제점과 장점을 찾아보고 자신을 성찰하는 과정을 거쳐보겠습니다.

 ≫ 대한민국에서 인구 절벽, 즉 고령화 문제는 언제 가시화되었다고 보시나요? 그 이전에도 많이 언급이 되었습니다만 처음 가시화된 것은 2002년입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0년 기준 대한민국 인구는 4700만명이었으며, 45 ~ 49세 어른은 400만명인데에 비해 0 ~ 4세 어린이는 220만명에 그쳤습니다. 즉 이 0 ~4 세 어린이들이 성인이 되는 시기가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는 시기이며 경제적인 타격을 입게 되는 연도일텐데요. 이 연도를 대한민국 경제학자들과 통계학자들 사이에서는 2020 ~ 2025년으로 꼽고 있습니다. 그래서 2017년 대선을 매우 중요하게 보는 시기도 이 때문입니다.

 통계청 : http://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101&tblId=DT_1IN0001_ENG&conn_path=I2



■ 서론

 ≫ 최근 정치권에서 대한민국 병역 제도의 근간인 ‘징병제’를 ‘모병제’로 전환하자는 논의가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크게 이슈화되는 이유는 전세계적인 인구 감소 위기 상황 때문인데요. 문제는 앞으로 몇 십년 이후엔 이러한 인구의 감소로 더 이상 이전의 징병제 만큼의 효율 및 효과를 누리지 못하는 안보의 문제에 대한 논의와 실제 군인들이 겪고 있는 인권적 문제뿐만이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권리와 복지도 상관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징병제와 모병제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먼저 필요합니다. 

 ≫ 모병제는 남성/여성의 군인들을 강제 징병하지 않고 본인의 지원에 의한 직업군인들을 모병하여 군대를 유지하는 병역제도를 말하는데 물론 이 모병제도 전시에는 모든 나라가 민간인을 징병할 권리를 가집니다. 보호령이나 속령으로서 군대가 없고 타국에 국방을 일부 위임하여도, 자국이 자체적으로 준군사조직을 결성하여 방위하는 경우도 모병제로 분류합니다.

 ≫ 징병제는 국가가 국민을 대상으로, 해당 국가를 방위할 병역 의무를 강제로 부여하는 제도입니다. 관련 법령에서 정하는 일정 연령 이상의 국민들은 반드시 징병검사를 실시해야하고 군인으로 일정기간 복무해야만 하고, 2017년 현재 대한민국은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 모병제, 왜 대두되는가? 징병제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 징병제는 인재활용에 대한 사회적 비용 부담이 존재한다. 때문에 인재활용이 상대적으로 비효율적이다. 과거 제국시대로 들어서는 과정에서 군대는 점차 월급을 받고 군사업무에만 종사하는 용병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 군 병력이 지휘관 개인의 사병화 될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군사반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군 입대에 대한 개인의 결정권을 제한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헌법 상에 보장된 자유민주주의 사상과는 어긋나 있다고 보고 있다.

 ≫ 강제적인 입대를 추구하는 징병제로 인해 군 입대 기피현상과 이를 위한 조직적인 병역비리도 존재하고 있다.

 ≫ 징병제는 급여와 모병 비용을 감소시키나, 전체적인 육성 비용이 증가하여 비용적인 측면에서도 징병제는 단점이 존재한다.

 ≫ 인재의 활용에 따른 사회적 비용 부담이 크다. 단순히 지출되는 군대의 유지비용의 규모만을 볼 것이 아니라, 노동력과 시간, 기회비용까지 함께 감안해야 한다.



■ 모병제를 반대하고, 징병제를 찬성하는 논리

 ■ 모병제와 징병제의 선택에서 많이 언급되는 이야기 중 가장 많은 것은 경제와 안보 그리고 인구의 문제입니다. 과연 징병제를 도입하여 군사의 수는 많으나, 월급을 적게 들이는 것이 최선일지. 모병제를 도입하여 군사의 수는 적으나, 월급을 많이 줄지의 논제가 주였습니다.


 ≫ 모병제를 택하여 현재의 군 체계를 유지할 수 있을만한 충분한 수의 군인을 모집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현대 시대 사람들은 직업을 선택할 때 연봉, 복지, 근무환경을 고려하여 직업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군인을 위한 복지 혜택을 늘린다고 하지만 군대라는 특성상 연봉, 복지, 근무환경이 좋아진다고 한들 이를 환영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의 질문형 반박이 있었습니다. 

 ≫ 많이 나오는 이야기 중, 흔히 '흙수저' 자녀들만 입대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병제는 큰 돈을 정부에 쥐어주면 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부잣집 애는 군대에 가는 사람이 없는데, 없는 집 자식만 군대에 가라는 것이라며 비판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 우리나라(=대한민국)는 정전중인 엄연한 전쟁의 위험을 항상 가지고 있는 국가입니다. 모병제는 포퓰리즘 성격을 가진 선거를 위한 인기 정책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전쟁이 현대화되고 무기의 첨단화가 이루어지더라도 결국 전쟁의 마무리는 보병인 육군이 해야합니다.

 ≫ 미국의 총 인구 3억 2천명 중 군인은 약 140만명으로 인구 대비 군인은 228:1 의 비율입니다. 우리나라는 약 70만명의 군인이 있지만 모병제를 실시한다면 25만 명 수준보다도 적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관학교의 경쟁률이 높아졌다는 것이 과연 애국심이 넘치는 지원자가 많아졌다는 의미인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 '과연 전쟁 발발 시 비싼 미사일을 마구 쏴서 적을 초토화 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적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미사일을 쏘는 것도 문제지만 그 비싼 현대식 미사일을 마구 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사실 비싼 미사일보다도 육군을 투입시키고 육군들이 희생당하여 그에 대한 지원을 하더라도 전시 상황이란 것은 전체주의/국가주의 성향을 보이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보다는 미사일을 쏘는 경제적 이점을 고려하게 됩니다. 즉 이러한 모순을 모병제는 피해갈 수 없습니다.

 ≫ 징병제에서 모병제로의 과도기엔 대처능력이 부재되며, 징병제의 장점은 군 복무기간이 끝난 후에도 모든 대한민국 사람들이 도시에서 어느때나 총만 주어진다면 조준 사격이 가능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전투는 시간과 장소, 상황을 가리지 않습니다. 어느 도시에서도 전투는 일어날 수 있으며 모병제는 군 복무 경험자만이 제대로 된 사격이 가능하지만 군 복무의 경험을 주는 징병제는 모든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기본 사격 능력을 보장해준다는 점에 있습니다.

 ≫ 모병제의 괴이한 논리는 모병제를 하면 전문적 군인이 양성되고 징병제인 지금은 전문적 군인 양성이 안되냐는 모병제의 논리에 반박합니다. 전문군인양성 정도의 질적인/수적인 조건이라면 납득되겠으나 이를 덮고 가능성의 문제로 치부하여 모병제를 도입해서는 안됩니다. 앞서 꺼낸 군인 양성 정도의 질적/수적인 조건은 징병제인 현재에도 정책과 지원요건은 충분히 열려있습니다.

 ≫ 우리 사회의 징병제 지지론자들은 지금 미국의 모병제를 실패한 제도로 낙인찍습니다. 이유는 이라크 및 아프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미군이 처한 모병 어려움이 그 근거입니다. 이라크전쟁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던 2006년, 미 국방부는 사면을 대가로 1만7000명의 범죄자를 입대시켰고 미국 시민권을 부여한다는 조건으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모병 캠페인을 전개했으며, 18살이 되는 고등학생을 재학 중에 군에 입대시키는 조처로 부족한 병력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 미군의 하부구조는 하위계층으로 채워진 반면 미 국회의원 자녀 중 군 입대자는 거의 사라졌으며, 하버드 등 유수한 대학 재학생도 군에 입대하는 경우를 찾아보기란 실제로 불가능합니다. 병사뿐만 아니라 장교도 마찬가지인데요. 이 새대에 대위에서 소령까지 초급간부의 경우 3000명이 부족하여 진급 경쟁이라는 말이 아예 사라질 정도였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웨스트포인트(미 육사)를 졸업하고 임관된 장교조차 소령 계급을 마치기 이전에 58%가 군복을 벗고 전역했다는 사실입니다. 레이건 시대 240만명이던 미군 병력은 140만명으로 축소되었으나 이제 이 마저도 충원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꼴이 되었습니다. 이런 미군의 상황을 볼 때 한국에서 모병제 도입은 군에 재앙이 될 것이라고 추측하는 리포트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군 병력이 줄어드는 문제는 북한의 전략적 소모전을 부추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로 30만 명의 군 복무를 목표로 하였을 때, 북한의 100만 군사 중 30만명의 희생으로 남한 군 10만명을 없애라 라고 명령 받기만 하더라도 30만 명의 군에는 상당한 피해가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은 산악지대가 70%라는 점입니다. 전략적 요소를 따져보았을 때 군사의 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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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병제를 반대하고, 모병제를 찬성하는 논리

 ≫ 많은 논리 중 하나인 징병제와 모병제에서는 경제적인 이점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모병제의 경제적 이점을 이야기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첫 번째로 많은 20대 청년들이 징병제로 인해 경제적인 힘을 잃는 것에 있습니다. 이러한 단점은 북한에서도 많은 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면 북한의 군 복무기간은 흔히 10년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즉, 경제력을 가진 청년 국민의 대부분을 국방비에 낭비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현재 대한민국도 징병제를 통해 이러한 청년들의 기회비용을 낭비하고 군 복무자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취업하기 어려운 환경에 있다는 점입니다. 군 복무기간 2년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군 복무로 인해 입는 경제적 피해가 그 뿐이겠는가의 문제입니다. 20살이 되자마자, 군 입대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면 또 그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학을 다니고 있는 청년들은 그나마 괜찮은데, 대학을 다니지 않는 고등학교 졸업자(이하 고졸)들의 문제는 심각합니다. 고졸들의 평균 군 입대 대기기간이 평균 24개월이라는 수치가 있었습니다. 즉, 군 입대 이전에 있는 청년들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여야 하고 언제 군 입대할지 모르는 청년을 회사에서 숙련자로 키우기 위해 취업시키지 않는데에 있다는 것 입니다. 조사 결과 고졸 청년의 실업자 지수는 88%로 조사되었습니다. 잘 해야 아르바이트를 하는 정도라는 겁니다. 이로 인해 끼치는 앞 뒤의 72개월 정도의 경제적 타격이 있다고 합니다.

 ≫ 흔히 모병제를 반박하는 사람들이 하는 주장 중 하나가 모병제를 택하면 부잣집 도련님은 군 복무하지 않고, 없는 집 자식만 군대에 가는 논리가 매우 잘못되었고 정의롭지 못한 발상이라는 비판입니다. 모병제는 무엇보다도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인류 보편적인 가치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부잣집 도련님이 기부한 금액을 통해 그렇지 못한 인력들이 더 높은 월급을 부여받고 더 좋은 근무환경과 복지가 보장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나와 같은 나이이고 똑같진 못하지만 비슷한 능력이지만 나보다 부유한 투자자가 내가 근무하고 있는 회사에 투자하여 내 근무환경이 좋아진다면 근무자는 그 친구가 부유하지 않다면 나와 같은 근무지에서 일 할텐데 그 투자자를 부러워할 뿐 과연 그것이 정의롭지 못한 일인지에 대해서 그 투자자를 비판하여야 하는 문제인가와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므로 요는 직업군인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 사람이 잘못되거나 악한 사람이 아니며, 국가를 위하여 큰 세금을 기부하는 것만으로도 애국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직업군인을 선택한 사람들은 우리는 자랑스럽고 존경해야 마땅한 인물이며 이를 흑백논리로 정의와 부정의한 사람으로 나누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모병제의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아니됩니다. 무엇보다도 이를 논제로 삼는 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그렇다면 징병제인 현재 체제에서 아버지의 직업에 따라 또는 흔히 흑수저/금수저에 따라 아들이 군대를 빠지고 안 빠지고의 문제가 없다고 한다면 또 그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핵심적인 불공정함은 모병제냐 징병제냐의 문제가 아니라, 군대의 비리 문제입니다. 이를 합법적으로 돈을 내고 빠질 수 있느냐, 불법적으로 빠질 수 있느냐의 문제일 것 입니다.

 ≫ 위의 내용과 같은 맥락으로, 영국같은 나라는 노블레스 오블리제로 고위공직자가 되기 위하여 자원입대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병제는 가고 싶은 군대를 만들어주고 이를 통해서 대학 진학이라던지 사회 진출을 위한 토대를 같이 만들어주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도 덧붙이자면 모병제를 하여 군대를 복무하지 않더라도 사실 이 문제는 운영에 차이가 있습니다. 어떻게 사회 봉사를 실천하게 할 것일지에 따라서 오히려 군 복무 비리를 청산하고 더 큰 사회 통합을 이룰 수 있다고 봅니다.

 ≫ 모병제를 반대하는 많은 분들이 북한과의 전시상황을 많이 거론해주시는데요. 실제로 북한이 무서운 것이 백만대군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북한은 현재 핵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죠. 그래서 이 문제를 사람 숫자를 늘리고 계속 유지한다고 해서 군이 강해지고 우리의 안보를 튼튼하게 한다는 생각이 조금 바뀌어야 할 발상이라고 봅니다.

 ≫ 현재 이등병 임금과 장군 임금의 차이는 95배 차이가 납니다. 물론 임무와 역할에 따라 달라야겠지만 국가의무를 가진 병사하고 직업군인으로 선택한 병사의 차이, 그 양극화가 극심합니다. 나라는 국가페이를 앞세워 오히려 20대 경제력을 잃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겁니다.

 ≫ 모병제를 한다고 해서 완전히 군 복무를 면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병제를 택하더라도 모두 성인이 되면 기본적으로 8주 간의 군 복무를 마쳐야 하고, 예비군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전시상황이 되면 모두 전쟁에 참여해야 하나, 다만 모병되어 군 복무중이던 군사들이 지휘하는 체제입니다. 2012년에 김관진 국방장관께서 이런 인터뷰를 했는데, "한 나라의 적정 병력은 총 인구의 0.5%가 좋다. 적정 예산은 GDP의 4.5%가 좋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는 적정 병력 인구 수는 25만명인데에 비해 65만명을 가지고 있고 국방비의 GDP의 2.6%밖에 안되어 김관진 국방장관께서는 "우리는 병력은 많고 예산은 적은 가난한 군대다"라고 했습니다. 병력의 수는 줄이되 실제 전시상황에서 줄지 않은 국방력이며 GDP는 늘어나 오히려 더 질 좋은 군 병력이 갖쳐질 것입니다. 요는 사람의 수/병력의 수가 많다고 하여 강한 군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 +@ 추가 필요, 댓글로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참고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60836.html#csidx4837f4425cd38f7a60ae26d0de060d7

https://namu.wiki/w/%EB%AA%A8%EB%B3%91%EC%A0%9C

https://ko.wikipedia.org/wiki/%EC%A7%95%EB%B3%91%EC%A0%9C#.EC.9E.A5.EC.A0.90

https://debatingday.com/13187/%EB%AA%A8%EB%B3%91%EC%A0%9C-%EB%8F%84%EC%9E%85%ED%95%B4%EC%95%BC-%ED%95%98%EB%82%98/comment-page-1/#comment-8977

https://www.youtube.com/watch?v=YMm38JWuKHM

http://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101&tblId=DT_1IN0001_ENG&conn_path=I2


■ 나의 한마디

 ≫ 그들(7인)은 역사에서 실패로 기록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일제강점기 해방 후 우리는 남북으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민족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 뒤에는 이념적인 갈등과 오래된 피해의식으로 인한 혁명의 꿈이 있었고, 사람이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욕구들 그 중 하나인 권력 욕망이 있었다. 우리는 과거 사람들이 꿈꾸던 이상적인 사회와 지금 꿈꾸는 사회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에서야 사회주의국가와 공산주의국가의 실패가 보이고 있어, 그것에 반대하는 세력이 다수지만, 과거의 삶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거대 자본가들에게서 우리의 삶을 되찾을 수 있는 평등함을 꿈꾼 이상적 사회로 비쳐졌을지 모른다. 나는 지금도 경제적 평등을 꿈꾼다. 분배를 꿈꾸고 증세를 통한 복지국가를 꿈꾸고 있다. 적당한 분배가 결국 경제적 풍요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단순하게만 설명해보자면 '한 사람이 100억을 갖고 있는 것보다, 천 명이 100억을 갖고 있는 것이 돈을 더 잘 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생각 역시 우리 한국사회가 제대로 겪어보지 못했고, 필자가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편향된 생각일지 모른다. 현재의 서구 성공사례를 보며 꿈을 키웠고, 아직 지식이 얕고 경험도 적다. 그리고 실패한다면 먼 미래엔 비웃음을 살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 그들이 추구했던 것과 내가 추구하는 것은 같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행복한 삶일 것이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갈등으로 인해 생긴 이러한 초기 남북분단 갈등엔 경제적 배경을 배제할 수가 없다. 2016년 기준으로 한국의 경제체제는 '신자유주의'다. 1970년대 석유 파동을 기점으로 경제가 침체되고 있는 이유를 국가의 규제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는 그것을 동의했다. 미래를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복지는 축소되었고 노동자는 점차 힘이 약해졌다. 기업의 수익성이 높아지면 국부를 창출하고 결국 개인의 삶이 윤택해질 것이라고 했지만 자본가들은 더욱 자본을 축적하기만 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가난해져가고 있다. 다시금 경제와 돈이라는 힘으로 과거 권력 중심의 사회로 역행하고 있다고 본다. 필자의 경제 방향에 대한 생각은 '사회민주주의'다. 하지만 너무나도 과제가 많고 어려운 길이 많다. 인구수 문제, 고령화 외 수만가지의 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사회 문제에 서고 있다. 저자는 '해방 3년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결정론적 시각'이라고 짚었다. 필자는 초기 한국의 통일에 힘 쓴 민족주의 여운형에 대한 복기를 위해 정리할 예정이다. 궁금한 다른 사람은 책을 직접 읽어보는 것을 권한다.


■ 목차

 1.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 프로젝트|여운형과 조선인민당

 2. 혁명으로 인민정부를 건립하라|박헌영과 조선공산당 

 3. 임정법통이냐, 단정이냐|송진우와 한국민주당

 4. 혁명을 위해 분단의 벽을 쌓다|김일성과 북조선공산당

 5. 단정으로 권력을 꿈꾸다|이승만과 독촉국민회

 6. 임정법통론으로 신민주국가를 건립하라|김구와 한국독립당

 7. 좌우가 공존하는 민족통일국가를 꿈꾸다|김규식과 좌우합작위원회

 8.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


■ 왜 읽었는가?

 ≫ 김구, 김규식, 여운형, 박헌영, 송진우, 김일성, 이승만 7인의 행적이 궁금하여

 ≫ 우리는 왜 민족통일을 하지 못하였는가? 그 이유는 무엇이며 현대사에 반영할 수 있는 참고 지식은 없는지

 ≫ 당시 소련과 미국간의 갈등은 무엇이고, 분단국가가 된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여

 

■ 7인의 정치

 ≫ 해방 후 3년은 7인의 정치가를 대상으로 일제강점 하 3년 동안의 갈등과 행적, 각자가 추구하던 미래를 풀어나간다. 민족주의, 공산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 모두 정치 성향이 달랐고 각자가 꿈꾸던 미래는 달랐다. 아래는 그들을 한 줄로 잘 표현했다.

 ≫ 김구가 꿈꾸던 국가 : 임시정부통론으로 세우는 신민주국가

 

 ≫ 김규식이 꿈꾸던 국가 : 좌우가 공존하는 민족통일국가

 

 ≫ 김일성이 꿈꾸던 국가 :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한 국가, 필요하다면 분단도 해야한다

 

 ≫ 박헌영이 꿈꾸던 국가 : 사회주의혁명을 통해 만든 인민정부

 

 ≫ 송진우가 꿈꾸던 국가 :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만들어져야 한다

 

 ≫ 여운형이 꿈꾸던 국가 :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한 민족 국가

 

 ≫ 이승만 : 권력을 위해서라면 단독정부라도 만들어져야 한다.


■ 당시 한국의 배경과 상황

 ≫ 한국은 38선을 중심으로 미국과 소련의 미,소 양국의 분할 점령이 시작되면서 급격히 변화했다. 특히 남한이 심했는데,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미군들의 주둔이 있었다.

 ≫ 해방 후, 한반도에는 소련군이 진주[각주:1]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소련군 진주가 더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그 이유는 소련군이 8월 8일 대일본 선전포고를 한 이후 빠른 속도로 진격해왔기 때문이다. 일제 당국도 8월 17일까지 서울을 점령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런데 소련군의 진군이 38선 부근에서 멈췄고, 남쪽엔 미군의 진주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국의 정세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좌우익의 시작이었다.

 ≫ 1945년 9월 8일, 미군 제24군이 인천항에 상륙했다. 일본군의 경계 속에 상륙한 미군은 해방군이라기보다는 점령군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이 날 미군을 환영하러 나왔던 한국인 두 명이 사망했다. 미군으로부터 호위경계를 요청받은 일본군이 발포한 것이다. 일본군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는 향후 미군과 한국인들의 관계를 암시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 미군의 진주 초기부터 미군이 한국인보다 일본인의 말을 더 신뢰하고, 일제에 복무했던 관료들과 경찰들, 한국민주당과 극우적 인사들의 말을 더 신뢰했다. 이러한 미군의 태도는 한국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방해가 되었으며 민족 단결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 1945년 12월 7일,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의안에 관한 보도가 나오면서 미국, 영국, 소련, 중국 정부와 협의한 신탁통치안과 임시정부수립이 나왔다. 한국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미국의 입장, 혁명 분위기의 한국에서 임시정부의 수립이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탄생시키기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소련의 입장이 절충된 결과였다. 신탁통치는 신생국가의 기능을 일부 제한하겠지만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 진행되므로 한국인들이 우려하듯 독립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남한의 주요 언론 <동아일보> 언론들은 실제와 달리 미국이 즉시 독립을 주장하고 소련이 신탁통치안을 주장했다고 보도함으로써 마치 신탁통치안이 모스크바 결의안의 전부인 것처럼 보도하며 결의안의 가장 중요한 '임시정부 수립' 결정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이는 반소련, 반공산주의에 입각한 악의적인 왜곡 보도였다.

 

▲ 1946년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

 ≫  1946년 3월 20일, 미, 소 양국이 남북에 각각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면서, 남북 간 대결이 본격화된 것이다. 2월 8일 북한에서 수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2월 14일 남한에서 조직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 미, 소 대결의 실체였다.  미소공동위원회는 모스크바 결의안에 입각해 미, 소 양국이 남북의 주요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해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임시정부 참여하에 4개국 신탁통치협약을 작성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  미소공위는 극심한 대립을 벌였다. 소련 측이 미국 사령관 하지의 성명과 임시정부 수립 후 반탁운동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한 우익들의 태도를 문제 삼고 나섰던 것이다. 미국 측이 제출한 협의 대상 명부도 문제를 일으켰다. 미국 측이 제출한 20개의 정당과 사회단체 가운데 우익은 17개나 된 반면, 좌익은 3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미 · 소 양측의 의견 대립으로 미소공위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결국 5월 9일 미소공위는 무기한 휴회를 선언하고 말았다

 ≫ 국제적 협정의 이행은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두 갈래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하나는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좌우합작운동이었다. 이승만의 주장은 민족통일국가의 수립을 포기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민족이 위기에 처하자 오직 정권의 탈취만을 노리는 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미 · 소가 남북으로 분할 점령하고 있는 현실에서 분단 세력의 등장은 그만큼 조국의 분단이 현실화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만약 이대로 민족의 분열이 극복되지 못한다면 단정 세력은 점점 더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좌우합작운동은 이러한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탄생했다. 그 시작은 중도좌파를 대변하는 여운형이었고, 파트너는 중도우파를 대변하는 김규식이었다. 그러나 합작운동을 방해하는 이는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이 있었다.

 ≫ 미국정부는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을 통해 입법기구 수립이 통과되자, 여운형과의 약속을 어기고 1946년 10월 14일 ~ 10월 31일까지 입법기구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를 강행했다. 선거법에 의하면 보통선거여야 했지만 사실상 세대주가 투표하는 제한선거였고, 일정한 납세액 이상을 납부하는 자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차별선거였다. 게다가 동, 면, 군, 도에 걸친 4단계의 간접선거여서 민주성을 보장받기도 힘들었다. 이를 통해 선거 결과는 이승만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이 각 지방의 선거를 관리하고 각종 탈법과 부정선거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 여운형 : 자주적 민족국가 프로젝트

 ≫ 한국이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었다. 한국의 해방은 연합군의 공로임은 분명하지만, 한국인의 공로도 들어있었다. 우리 민족이 스스로 독립할 자격과 능력이 충분함을 보여줘야 했다. 여운형은 국내 세력이 총 집중해 일제의 식민지 권력을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에 위치한 관저[각주:2]에서 엔도를 만났다. 엔도는 일본의 항복 소식을 알리면서 여운형에게 한국의 치안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여운형은 자신이 치안을 맡는 조건으로 다섯 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1. 조선의 정치범과 경제범을 석방할 것

 2. 서울의 3개월분 식량을 확보할 것

 3. 치안 유지와 건설 사업에 아무런 구속과 간섭을 하지 말 것

 4. 학생의 훈련과 청년의 조직화에 간섭하지 말 것

 5. 조선 내 각 사업장에 있는 일본 노무자들을 우리의 건설 사업에 협력하게 할 것

 

 ≫ 이 5가지의 내용은 자신의 활동이 단순히 치안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란 선언이었다. 여운형은 치안과 함께 한국의 신국가 건설 사업에 착수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다. 엔도는 단순히 치안유지만 원했지만, 여운형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한국인들에게 명망이 높은 여운형이 치안을 맡아주겠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상황이었다.

 ≫ 여운형은 즉시 한국의 치안과 건국 사업을 주도할 조직,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맨 처음 한 일은 한국인 정치범과 경제범의 석방이었다. 그리고 건국치안대와 식량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한국의 치안과 식량 문제에 적극 대처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해방 후 2~3주라는 짧은 시간 동안 치안과 식량 문제 해결에 큰 성과를 냈을 뿐만 아니라, 민족국가 수립이라는 전 민족적 열망을 거대한 흐름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연합국 중에 어느 누구도 우리 민족의 자치 능력을 믿지 않았지만, 한국인들은 건국 준비위원회를 통해 자신의 자치 능력을 세계에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 여운형은 일찍 공산주의를 받아들였지만 그것은 민족해방 운동의 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경제적 평등에 깊이 공감했지만, 계급투쟁이나 전체주의적 운동 방식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진보적 민주주의나 인민적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였다. 하지만 의미까지 같지는 않았다. 여운형은 현재 한국에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혁명의 방식은 공산주의의 계급혁명이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혁명이며,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민의 경제적 해방과 자유, 평등의 이념을 확대하고자 했다는 측면에서 여운형의 민주주의는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와 유사했다.

 ≫ 여운형은 겅제적 측면에서 주요 산업 시설의 국유화와 토지 문제의 수평적 해결을 통해 봉건 잔재의 청산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는 주요 산업 시설 이외에는 사적 소유를 인정해 개인적 창의와 이윤 추구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발전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토지개혁으로 토지를 잃은 지주에 대해서도 충분한 생계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 한국은 두 가지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상당한 기간 동안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유지해야 했다. 낙후된 농업국에서 고도의 공업국으로 빠른 발전을 도모하려면 신국가의 독립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연합국의 경제적 원조가 필요하며, 계획경제를 수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 여운형은 민족해방을 완수하고 신국가를 건설하는 데 좌우익의 구별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민족통일전선에서 제외되는 것은 반민족 세력이면 족하다고 믿었다.

 ≫ 건국준비위원회에 들어오려던 우익들이 갑자기 불참을 시작했다. 이유는 미군의 진주 소식 때문이었다. 굳이 좌익들이 자리잡고 있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정치 세력화가 가능했다고 판단했다. 9월 1일 조선국민당 16일 한국민주당 등 우익 정당이 결성되었다. 미군의 진주 소식과 함께 여운형은 계획했던 인민대표회의를 현실화 해 전국인민대표자대회의를 열었다. 미군 진주 이전에 과도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수립을 서둘렀다. 정부 수립을 서두르려고 건국준비위원회 관계자와 재건파 공산당, 일부 연락이 가능한 지방 대표들로 채워지는 데 그쳤다. 이로 인해 조선인민공화국은 심각한 대표성 논란에 휩싸였다. 조선인민공화국은 전체가 아니라 일부만을 대표하는 정부가 되었다.

 ≫ 미군은 조선총독부를 대신해 미군정청을 설립하고 이것이 남한의 유일한 정부임을 천명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남한에서 가장 잘 조직되고 영향력있었으나 미군정부는 조선인민공화국을 '정부를 사칭하는 일개 괴뢰정당'으로 취급했다. 여운형의 취급도 마찬가지였다. 미군 사령관 하지는 여운형을 일제의 돈을 받아 정권을 가로챈 친일 사기꾼인 양 취급했다. 그 이유는 미군정 주변 통역사와 고문으로 활약하던 극우 인사들과 한국민주당의 악선전이 작용한 결과였다. 미군이 조선인민공화국을 탄압할수록 그 안에는 탄압에 잘 훈련된 공산주의자들만이 남게 되었다. 결국 박헌영의 공산당파는 이를 중심으로 인민공화국의 중앙과 지방을 모두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박헌영은 정치적으로 최고의 수혜자가 되었다.

 ≫ 여운형이 민족의 역량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사이, 경쟁자들은 이미 조선공산당, 한국민주당 등 하며 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세력의 결집보다 민족의 단결을 우선시했던 여운형은 이 사태에 절망했다.

 ≫ 1945년 10월 5일, 주요 정당들이 만났고, 좌익과 우익 세력들은 각각 인민공화국과 중경의 임시정부를 내세우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논의를 전개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여운형은 달랐다. 그는 민족의 통합을 위해서라면 당장이라도 인민공화국을 해산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여운형의 발언으로 분위기는 급반전했다. 그 결과 10월 10일 '각정당통일위원회'라는 상설회의체가 탄생했다. 이곳의 정당과 단체는 43개에 달했는데 38선 문제와 일본인 재산 문제 등의 긴급 문제를 논의하며 민족의 대동단결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대변했다. 그러나 10월 16일 이 위원회는 힘을 잃었다. 이승만이 귀국한 것이다. 이후 이 임무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로 전환되었고, 이승만에게 모두 넘겼다. 이후 이승만은 독선적이고 편파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결국 여운형과 박헌영은 독립촉정중앙협의회를 탈퇴했다.

 ≫ 1946년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한 휴회되자, 이승만은 단독정부를 주장, 여운형은 좌우합작운동을 벌였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하며 좌우 남북을 묶는 전달자 역할을 자임했다. 특히 그는 주요 정세의 변화 때마다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해 김일성(1912~1994)을 비롯한 북한 지도자들과 협의해왔기 때문에 북한과의 협상에 자신이 있었다.

 ≫ 미군정부는 좌우합작위원회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는데, 그 까닭은, 미군정부가 만든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 남한 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했고 우편향적 성격으로 협상 자리에서도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것도 있었으며 중도 세력까지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통해 1946년 7월 여운형과 김규식의 노력으로 좌우합작운동은 정당 · 사회단체 간 연석협의체로 발전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좌우익은 각각 5명씩 좌우합작위원 10인을 선출되었다. 그러나 박헌영은 우익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들을 제시해 좌우합작을 방해했다. 이는 사실상 민족통일전선을 부정하고 좌우합작을 깨뜨리겠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8월 3일, 이를 타파하기 위해 조선공산당, 인민당, 조선신민당을 하나의 대중정당으로 통합하는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은 인민당과 조선신민당에 침투해 있던 공산당 프락치를 동원해 양당을 흔들었다. 공산당 프락치들은 무조건적 합당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이는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여운형은 크게 분노했다. 그는 박헌영의 민족 분열적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좌우합작의 주요 축 하나인 세력이 반대하는 한, 여운형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 여운형은 다시 좌우합작 좌익의 5원칙과 우익의 8원칙을 절충한 7원칙을 발표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한 삼상회의 결정에 의해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2. 미국,소련 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 것.

 3. 토지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 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며 시가지의 기지 및 대건물을 적정 처리하며 주요 산업을 국유화해 사회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현하며 통화 및 민생문제 등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4.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에서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입법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해 실시케 할 것.

 5. 남북을 통해 현 정권하에서 검거된 정치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의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6. 입법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 방법, 운영 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해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7. 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결사, 출판, 교통, 투표 등의 자유가 절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 그러나 좌우합작 7원칙은 좌우익 양측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좌익에게 문제가 된 것은 입법기구 설치 조항이었고, 우익에게 문제가 된 것은 토지개혁 조항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입법기구 설치 조항이 단정으로 가는 도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운형 측을 극도로 비난했다.

 

 ≫ 김규식과 여운형은 7원칙에 서명하면서 과도입법기구 수립의 조건으로 세 가지 전제 조건을 내세웠다. 이와 함께 그들은 미군정으로부터 몇 가지 조건을 보장받았다.

 1. 좌우합작위원회가 입법기구 의원 2분의 1을 추천할 권한

 2. 간접선거로 치러질 의원선거에서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는 대의원이 될 수 없다.

 3. 간접선거 방식에서 민주주의 보장 약속이나 선거 감시원의 파견, 빠른 시일 내에 직접선거에 의한 입법기구로 대체할 것.

 

 ≫ 여운형과 김규식은 입법기구가 미군정의 자문기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한국인의 자치기구가 되기를 원했다. 과도입법기구가 좌우를 대변하는 한국인의 진정한 자치기구가 되면 이를 기반으로 미소공위를 재개해 임시정부 수립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군정부는 7원칙이 통과되는 순간 좌우합작위원회를 배신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입법기구 수립 조항이었을 뿐, 좌우합작위원회가 내세운 전제 조건이나 요구 조건이 아니었다.

 ≫ 미군정부는 1946년 10월 14일 ~ 10월 31일까지 입법기구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를 강행했다. 선거법에 의하면 보통선거여야 했지만 사실상 세대주가 투표하는 제한선거였고, 일정한 납세액 이상을 납부하는 자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차별선거였다. 게다가 동, 면, 군, 도에 걸친 4단계의 간접선거여서 민주성을 보장받기도 힘들었다. 이를 통해 선거 결과는 이승만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이 각 지방의 선거를 관리하고 각종 탈법과 부정선거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 여운형은 입법기구 설립을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미군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여운형은 12월 12일 개원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참가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배신자의 딱지를 가지게 되었고 그의 정치적 위상은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을 만큼 추락했고 우파와 좌파 모두에게 배척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결국 여운형은 12월 4일 전격적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 여운형 암살

 

 ≫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혜화동 로터리에 들어설 무렵, 파출소 앞에 있던 경찰 차 한 대가 갑자기 차를 막아섰다. 충돌을 피하려고 차가 속도를 줄이는 순간 한 사내가 뒤쪽 범퍼로 뛰어올라 세 발의 총을 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경호원 박성복이 도망가는 사내를 뒤쫓았지만, 모퉁이에서 제지당하고 말았다. 그를 막은 사람은 동대문경찰서 소속의 한 경찰이었다. 범인은 사라졌다.

 ≫ 사건의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미국 소련 공동위원회를 통해 확대된 여운형의 정치적 영향력을 두려워했던 세력이 암살한 범인의 배후라고 추측할 뿐이다. 사건이 발생하자 미군정부는 여운형의 집을 수색했다. 그런데 수색 목적은 암살범을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북한과 연락해본 자료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한의 대정객 여운형에 대한 미군정부의 마지막 대접은 겨우 그 정도였다.

 ≫ 여운형의 죽음과 함께 민족통일국가의 꿈도 종말을 맞았다.

 

 

 

■ 여운형 요약

 ≫ 일본은 여운형에게 치안을 요구했으나, 한국을 위해 일본에게서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 정치범, 경제범을 석방하고 식량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치안과 식량문제에 대처했다.

 ≫ 여운형은 공산주의적 발언을 했었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공산주의자의 경제적 평등은 공감했으나, 그가 꿈꾸던 사회는 선거가 있는 민주주의 사회였다.

 ≫ 여운형은 주요 산업 시설만을 대상으로 봉건 잔재 청산을 제시했다. 다른 산업시설은 자본주의적 발전을 원했다. 그리고 토지를 잃은 지주에겐 생계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 미군 진주 소식이 일자, 여운형은 정부가 미리 존재하는 것이 정치에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정부 수립을 다급히했다. 그렇게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급히 만든 정부는 전체가 아닌 일부만을 대표하는 정부였다. 남한에 도착한 미군은 미군정청만이 유일한 정부라고 주장했다.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은 미군 진주로 해체되었다. 여운형이 만든 조선인민공화국은 괴뢰정당 취급받았다. 조선인민공화국은 이로 인해 여운형에서 박헌영쪽으로 세력이 기울었고 공산주의로 변질되었다. 여운형은 박헌영에게 잠식당한 인민공화국에 거리를 두면서 독자적인 세력화를 꿈꿨다.

 ≫ 1946년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한 휴회되자, 이승만은 단독정부를 주장, 여운형은 통일을 위한 좌우합작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박헌영이 이를 방해했다.

 ≫ 8월 3일, 이를 타파하기 위해 조선공산당, 인민당, 조선신민당을 하나의 대중정당으로 통합하는 것을 제안했다.

 ≫ 여운형과 김규식은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고, 미국으로부터 입법기구 2분의 1을 약속받았고, 반대파를 무릅쓰고 승인하였으나 미군정부는 이를 어겼다. 그로 인해 여운형은 배신자 딱지를 가지게 되었고, 1946년 12월 4일 정계를 은퇴했다.

 ≫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혜화동 로터리,  파출소 앞에서 여운형은 암살당했다.

 


  1. 진주 : 군대가 처들어가거나 파견되어 주둔함. [본문으로]
  2. 관저 : 정부에서 장관급 이상의 고관들이 살도록 마련한 집. [본문으로]

  파시즘과 나치즘

(좌) 이탈리아 베니토 무솔리니, (우)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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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시즘의 정의

 ≫ 1919년 이탈리아의 B.무솔리니가 주장한 국수주의적·권위주의적·반공적인 정치적 주의 및 운동을 말한다. 원래는 '묶음'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파쇼(fascio)에서 나온 말이었으나, 결속·단결의 뜻으로 전용(轉用)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20년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45년까지 세계 여러 국가들 사이에서 나타났던 독재적 정치․경제․사회사상․정치체제의 총칭이기도 하며, '결속주의'라고도 불린다.

 ≫ 본래 파시즘의 초기 등장 배경 이전엔 생디칼리즘(syndicalisme)부터 시작되었다. 생디칼리즘의 '생디카(syndicat)'는 '조합'을 의미하는데, 이 조합은 노동자 조직을 뜻했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경제 분야에서 '직접 행동'을 주장하며 정부를 쓰러뜨리고 노동조합이 생산의 관리권을 장악해야 착취 없는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당시 나라의 경제 독점을 이룬 것은 유대인들이었다. 특히나 독일인들은 이러한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노동을 착취하는 인종주의 갈등이 있었는데, 그들이 유대인이었다. 이 이야기는 아래의 독일 파시즘의 배경에서 자세히 다룬다. 이와 같은 반제국주의적 사상과 반자본주의 사상이 혼합된 것이 초기 파시즘이었으나, 점점 반공주의 가치가 심화되면서 극우적 사상으로 변질되었다.


■ 어떤 것을 파시즘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 정치적으로 급진주의[각주:1]를 일으키는 나라에서 흔히들 발생하는데, 국수주의[각주:2] 즉, 민족주의에서도 흔히 발생할 수 있으며, 그 외에도 역사속에서 반공주의나 전체주의[각주:3] 등에서도 발생했다. 파시즘은 한 마디로 하나의 이념 또는 사상으로 시민들을 묶어 하나로 통치하는 것을 일컫는다. 독일의 파시즘연구가 E.놀테는 파시즘을 유럽적인 현상이라고 이해하여, 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 즉 1919∼1939년이라는 기간의 특유한 현상이라고 지적하였다.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 선 파시즘론에서는 현대사회의 모든 반동적 독재정치운동을 파시즘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파시즘을 지칭한다.


■ 우리에게 주는 파시즘에 대한 시사점

 ≫ 파시즘은 본래 국가와 세계적인 대공황에서 비롯되었다. 즉, 국가의 경제적 위험과 시민들이 살아가기 위한 기본 의식주를 다른 나라에서 뺏어와야 한다는 국가자본주의의 경제사상이다. 이러한 파시즘은 한국에도 주는 시사점이 있다. 위의 정의에서도 앞서 언급했듯, 국가이기주의와 북한과의 대립과 갈등으로 인한 국가이기주의 현상이 발생하고 있으며, 남한과 북한이라는 민족주의로 인한 국수주의 및 북한 핵 위협에 의한 비슷한 현상들이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한국은 파시즘에 이르는 경제적인 이념이 발생하지는 않아 파시즘으로 정의하기는 어려우나 몇몇 국민들에게서 김정일, 김정은에게 선동당하는 북한국민들은 모두 죄악이며, 세계에서 받아들이면 아니하고, 이를 감싸는 행위는 죄악이며 물리쳐야 하는 악의 존재, 그리고 스스로 붕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동일국가에 정치체제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각기 한 나라의 시민이지만 사회적으로 구제할 방법이 없다는 국가이기주의 사상이 발현되고 있다. 북한과의 분단갈등이 70년도 안되었지만, 천년역사가 된 것 마냥 '현실적인 타협'이라며 선동하는 것이다. 필자는 물론 북한은 독재체제이며, 남한이 유화정책을 펴는 것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 시대적 사상을 통해 느끼는 바가 달라질 수 있으며 우리도 현대적인 파시즘을 선동당할 수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본인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위대한 사람이라고 무조건적으로 칭찬일색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본다. 박정희가 자행한 부정부패와 기만성을 보기 보다는 그 정권 때 있었던 경제 성장만을 기억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주제로 선동한다. 나쁜 것은 일체 말하지 않고, 반대파 의견은 좌파, 빨갱이라고 치부하는 것이다. 이는 심리적으로 공감력부재, 물질주의, 이기주의 성향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 또 다른 것은 서구인들에게서 나온 '자연도태설'이다. 이는 특수한 환경 하에서 생존에 적합한 형질을 지닌 종이, 그 환경 하에서 생존에 부적합한 형질을 지닌 종에 비해 생존과 번식에서 이익을 본다는 이론이다. 불쌍한 인민들은 죽어야만이 너무 많아진 인구로 인해 나타날 치명적인 영향을 걱정하며 자연이 스스로 과잉 생물을 주기적으로 제거한다는 것이다. 이는 유럽적, 백인 우월주의적 '정당화'일 가능성이 높다는 시사가 있다.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유리하며 자연도태설을 통해 자신들은 절대로 피해보지 않는다. 그렇지만 수 많은 지식인이나 정치가, 국제기구 책임자들이 이를 옹호했던 일이 있으며 현대 사회에서도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 이를 지지하는 국가이기주의적 성향이 나타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비판하는 노예제도도 이러한 이론을 일부분 근거로 가져와 정당화 했던 과거가 있었다.

 ≫ 독일의 파시즘 또한 처음엔 경제적 이념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그것이 변질되어 갔다는 점을 시사하여야 한다. 보통 우리가 일컫는 파시즘은 파시즘 후기에 변질되어 버린 '후기 파시즘' 즉 독일의 나치즘을 일컫는 말이므로 함부로 파시즘이란 이야기를 꺼내 누군가를 선언 또는 정의하다간 큰 논쟁이 벌어질 수 있다.


■ 독일 파시즘의 발생 배경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암살과 1차 세계대전 발발

 ≫ 파시즘은 18세기 말부터 누적되어 온 사회적 불안과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만성적 공황 및 전승국과 패전국을 막론한 정치·사회적 불안에서 초래된 각종 혁명적 기운에서 대두되었다. 먼저 독일의 파시즘부터 살펴본다.

 ≫ 1차 세계대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의 옆 나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다수 민족이 살고있었는데, 헝가리 왕국안에서 조차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루마니아인 등 다수의 민족집단이 흘러념쳤다. 그 중 세르비아 민족주의자가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암살것이다. 이로 인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는 도화선 역할을 한다. 암살 4주 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당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이미 여러 인종들이 섞인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몹시 싫어했는데, 전쟁 발발 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에서 독일의 뮌헨으로 도피한다. 당시 히틀러는 25살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옆 나라, 당시 독일은 나폴레옹, 즉 외국 군대가 독일땅을 침범한 적이 없어 전쟁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독일에선 자동차가 생겨났고 현대화가 진행중이었고 20세기 초반 유럽은 평화와 번영이 오는 시대였다. 독일은 제2의 산업국으로 부상하고 있었으며 군대는 강력했다. 뮌헨은 극우적 국가주의 정서가 강하게 들끓었고 히틀러 또한 독일 전쟁에 참여했다.

 ≫ 오스트리아vs세르비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세르비아의 동맹국인 러시아가 움직이려고 하자, 독일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러시아의 동맹국인 프랑스에도 선전포고를 한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vs 독일, 터키, 오스트리아 의 전쟁이었다.


■ 독일 파시즘의 발생 배경 -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

 ≫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 6월 28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베르사유조약이 체결되었다. 파시즘의 원인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 중 가장 큰 원인은 2가지로 해석된다. 첫번째는 해외식민지를 잃은 것이였다. 독일은 아프리카 탄자니아와 토고, 카메룬, 나미비아 등을 식민지로 삼고 있었는데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이러한 식민지를 모두 뺏겨버렸다. 두번째는 전쟁도발의 책임을 물어 연합국 손해에 대한 배상지불이 부과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식민지가 뺏겨 경제는 점차 침체된 상황에서 1921년 5월 1일 배상위원회가 독일에 1320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금으로 갚을 것을 결정했을 때 이 문제가 절정에 다다랐다. 당연히 독일은 이 돈을 갚을 능력이 없었다. 경제적 위기에 봉착하자, 독일 국민은 베르사유 조약과 배상금에 분노했다. 독일은 반-유대주의, 베르사유 조약을 협상하는 정부는 독일시민이 아닌 국가 반역자라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생겨난 이념이 파시즘이며, 선동가로 맥주아돌프 히틀러가 나타났다.


■ 독일 파시즘의 발생 배경 -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 1차 세계대전 패전 이전부터 유대인은 독일사람 중 3%에 불과하였으나, 경제의 40~50%를 독점하고 있었다. 독일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경제적 패배의식에 물들어 있었다.  현대에 시사해보면 우리나라도 경제를 잡고있는 것이 다른 민족은 아니지만, 대기업들을 대상으로 대항하는 세력은 보기 힘든 구조를 생각해보았을 때 그 시기가 유대인들에게 반하는 세력을 꽃피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실감캐해주는 예일 수 있다. 오히려 독일은 1차 세계대전 직후까지 유대인에게 관대했고 유럽국가들이 반유대주의 사상이 더 강했다. 독일계 유대인 금융재벌인 막스바르부르크는 히틀러에게 정치자금까지 제공한 걸로 유명하다. 또한 독일은 유대인들에 대해 차별을 하지 않았으며 유대인의 독립국가 형성에 신경을 썼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유대인 과학자들의 정보망 교란이 있었고, 독일이 친 영국 성향의 유대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려하자 당시 독일의 경제를 잡고 있던 유대인들이 독일을 굴복시키기 위해 독일의 수출을 분쇄시키거나 독일상품 불매운동을 벌인다. 또한 공산당활동에 유대인들의 간접협조 혐의와 1936년 프랑스주체 독일 외교관을 암살하자 반유대감정으로 독일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독일엔 국수주의, 즉 인종주의가 발현된다.


■ 반 유대주의는 전체 유럽국가의 짓이며,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학살까지 내몰려고 하지는 않았다(?)

 ≫ 유대인 600만 학살은 조작 확대 되었다는 설이 감돈다. 실제로는 60만정도이며, 그것도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과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대다수라는 것이다. 25(7.6평)평방미터 되는 곳에 7~800명을 집어넣고 독가스로 죽였다는데, 실제론 그런 계산이 나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광객들에게 전시되는 아우슈비츠 가스실과 소각로는 194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스탈린의 소련군 또한 폴란드 유대인을 많이 죽였으며 나중에 이것마저 독일의 만행으로 뒤집어 쓰게 된다.

 ≫ 1933~1941년 까지 독일은 유태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독일의 밀텐슈타인이 유대인이주를, 하인리히 히믈러 SS사령관은 시온주의자의 대아랍 지하군사 조직인 '하가나'의 활동을 도왔다. 1942년 요제프 괴밸스의 본격적인 유태인박해 주장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유대인 학살보다는 그들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섬으로 보내 그들만의 국가를 형성시키고 나중에 독일의 우방으로 삶으려 했다.


■ 이탈리아 파시즘의 발생 배경 - 18세기 부터 1차 세계대전의 흐름

 ≫ 통일 전까지 이탈리아는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서로 성격이 다른 여러 나라들이 모인 지역의 이름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에서 시작한 자유와 평등사상이 전파되면서 이탈리아에도 외세의 지배를 물리치고 자유 민주 국가를 건설하자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다. 1870년, 이탈리아는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었지만 다른 방식과 문화 속에서 살아온 각 지방의 이탈리아인들은 하나로 통합되지 못했다. 게다가 경제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소외된 남부 지역의 농민과 빈민들의 반란이 이어졌고,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되었음에도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하자 이에 따른 경제 침체와 정치 불안이 심해지면서 이탈리아는 혼란에 휩싸이고 만다.


■ 이탈리아 파시즘의 발생 배경 - 베니토 무솔리니의 탄생

 ≫ 1883년 7월 29일 베니토 무솔리니가 태어났다. 무솔리니 일가의 아버지는 사회주의자로 당의 화합에 자주 데려갔다. 무솔리니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했다고 한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폭력을 써서 길을 터간다고 하는 수단, 후의 이탈리아 파시즘의 씨앗이 보였다. 무솔리니는 10살 무렵부터 식사 문제로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켰으며, 11살 때엔 학급의 친구를 칼로 찔렀다. 26살 때 무솔리니는 사회당계의 신문 라 로타 디 크랏세의 편집장으로 취임하여 선동적인 기사를 써 나갔다. 대중들이 어떤 일이든지 믿을 수 있게 하는 법을 배웠으며, 거짓말 기사를 써도 시민들이 믿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만큼 대중은 잊는 것도 빠르니까. 눈치채기 전에 정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무솔리니는 미디어를 통해 대중을 컨트롤하는 방법을 택한 파시스트다.


■ 이탈리아 파시즘의 발생 배경 - 1차 세계대전과 무솔리니의 정치

 ≫ 1915년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하자, 평화주의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는 소집에 응하여 1년 반동안 알프스 산 중에서 전쟁에 참가한다. 1917년 2월 수류탄의 폭발로 무솔리니는 전신에 40곳에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입으나, 후에 선동 정치에서 그는 폭발의 순간을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며 포장 정치를 하게 된다. 종전 후 1919년 이탈리아는 대혼란에 빠졌고 내전의 고비를 겪었다. 노동자들의 폭동과 파업이 연이었고 이탈리아 중산층들은 국기를 대신해 공산주의 깃발이 걸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우려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그는 이 공포를 이용하여 공산주의자를 제거하기 시작했고, 법과 질서의 회복과 실업률의 저하를 막는 것을 약속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무솔리니는 퇴역군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 39살의 무솔리니는 인민을 다스리는 멍청한 정치가들의 목을 조르겠다고 선언하고 의회의 해산과 무솔리니의 수상 임명을 국왕에게 요구할 것을 선동했다. 이렇게 무솔리니는 이탈리아는 내셔널리즘의 호소를 통해 대중적 지지를 획득하였고, 정치와 경제의 긴밀한 협동체계를 꾀함으로써 파시즘을 창출하였다. 무솔리니는 로마진군을 행하여 계급 개념 위에 민족 개념을 두고 ‘아래로부터 형성, 조직된 국가’임을 주장하였다. 1933년 1월에는 독일 나치스정권과 손잡고 에티오피아 침략, 국제연맹 탈퇴, 40년에는 독․이․일 3국 동맹체결을 거쳐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도국이 되었다.


■ 독일의 파시즘(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 나치즘과 파시즘은 모두 사회주의 세력 성장에 반대했고, 중산층의 지지를 얻었으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침략전쟁을 시도하여 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었으며, 나치즘은 여기에 인종차별까지 했다. 둘의 공통점은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경제적 공황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둘 다 초기에 퇴역군인을 통한 무력을 이용했다. 



독일 파시즘 출처 및 참고 : http://tip.daum.net/question/2993734

https://www.youtube.com/watch?v=wp9FnJhLZs0
https://ko.wikipedia.org/wiki/%ED%8C%8C%EC%8B%9C%EC%A6%98
https://www.youtube.com/watch?v=b2h20vxX2m4
http://utopiand-reamers.tistory.com/58


이탈리아 파시즘 출처 및 참고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57179&cid=47315&categoryId=47315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07750&cid=43041&categoryId=43041

https://www.youtube.com/watch?v=v56IHdQ67Sc

http://bobeathaja.tk/%ED%8C%8C%EC%8B%9C%EC%A6%98%EA%B3%BC-%EB%82%98%EC%B9%98%EC%A6%98%EC%9D%98-%EB%9C%BB%EA%B3%BC-%EC%B0%A8%EC%9D%B4%EC%A0%90-%EB%B9%84%EA%B5%90/


  1. 급진주의 : 사회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현재의 사회 제도나 정치 체제 관행 따위를 급격하게 변혁하려는 주의. [본문으로]
  2. 국수주의 : 편협된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극단적인 국가주의, 타 민족, 타 국가에 배타적이거나 초월적 성격을 지닌다. [본문으로]
  3. 전체주의 : 개인은 전체 속에서 비로소 존재가치를 갖는다는 주장을 근거로 강력한 국가권력이 국민생활을 간섭·통제하는 사상 및 그 체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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