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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한마디

 ≫ 히틀러는 화가 지망생이였다. 그의 환경이 황제를 꿈꾸는 자리에 이르렀다. 어느 누가 태어날 때부터 점령하고 누군가를 지배하고 싶어하겠는가? 내 생각엔 그것은 환경이 만들어준다고 생각하고 있다. 국가가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가? 편파적인 사회가 만들어지진 않았는가? 반대의 목소리를 내면 그 의견은 매몰당하는가? 국가가 가난한가? 국가가 이기적인 이념을 갖고있지 않은가? 우리도 물론 비슷한 이기주의적인 욕망을 갖고 있다. 아직 그 지식은 얕지만 필리핀전쟁 때의 한국군인들이 했던 짓이라던지, 북한인들 같이 사상이 꽉 막혀있고 사회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시민들은 구제할 방법이 없다며 같은 사람과 시민으로써 보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로 그 이념을 나누는 것 또한 국가적 이기주의라고도 생각된다. 옹호는 하지만 어쩌면 그들이 맞는 말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은 당시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우리 한국도 언뜻 아닌 듯 보이지만 외국인들에 대한 차별대우는 극심하다. 인종과 색상에 극심한 차별적 대우를 한다. 예를 들면 백인은 좋은데 흑인은 싫거나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차별적 대우이다. 극단적인 예지만 이런 사례를 생각한다면 한국 또한 인종주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겉으로 심하게 드러나거나 극단적으로 나아갈 일이 아니기 때문에 방관하는 일도 있다. 아돌프 히틀러라는 책을 읽고 이러한 사회/국가가 개인 한 명, 한 명에게 미치는 영향을 곰곰히 생각해본다. 극단주의 성향 한 사람이 토론도 잘하고 논리적 사고회로도 뛰어나고 출중하며 사회적 이념이 편파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히틀러의 예는 편파적인 정치인이나 엘리트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주는데에도 좋다고 생각한다. 대파를 수용할 줄 알아야 하고 그것의 옳고 그름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참고로 히틀러에 대해 알아가기엔 책의 분량은 매우 짧아 다른 책을 찾아 더 알아볼 예정이다. 독일에서 그가 어떻게 총통이 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있는 책이다.


■ 목차

 1. 화가를 꿈꾸던 소년 히틀러

 2. 1차 세계대전 발발과 참전

 3. 1차 대전 패전과 유대인

 4. 1차 세계대전 패전과 베르사유 조약

 5. 히틀러의 정치 입문

 6. 히틀러의 실패한 쿠데타

 7. 수감 생활과 <나의 투쟁>

 8. 다시 정치에 복귀하다.

 9. 나치의 집권

 10. 구세주 히틀러에 대한 독일의 열망

 11. 2차 세계대전 발발

 12. 두 개의 전선, 히틀러의 패작

 13. 독일 패전과 히틀러의 자결


■ 왜 읽었는가?

 ≫ 2차 세계대전 발발 배경 이전 당시의 독일의 생각과 가치관에 대한 궁금증 (당시 나치 정권의 주장과 독일인들이 지지했던 이유 그리고 유대인을 싫어하는 인종주의는 왜 생겨났는가에 대한 의문)

 ≫ 독일 주변국(영국과 프랑스)이 어떠한 유화정책을 펼쳤고 그 유화정책이 어떻게 세계대전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궁금증, 현대사와 이어본다면 남한이 펼치는 북한에 대한 유화정책이 과거와 비슷한 점이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

 ≫ 2차 세계대전을 만든 히틀러, 과연 히틀러만 없었다면 이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무엇이 히틀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 내 마음대로 책 내용 3줄 요약

 ≫ 그는 7,000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내며 전 세계를 피바다로 만든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 유대인 600여만 명을 학살한 홀로코스트[각주:1]를 저지른 극단적인 인종주의자다.

 ≫ 2차 세계대전 발발엔 주변국들의 유화정책이 있었다. 준비되지 않은 주변국들은 초기 전시상황에서 질 수 밖에 없었지만, 히틀러는 주변국을 넘어 소련 등 다른 나라까지 건드리며 패배하게 된다.


■ 히틀러의 생애

 ≫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던 작은 국경마을 브라우나우암인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알로이스 히틀러는 세관 공무원이였는데 직장을 따라 자주 이사를 다녔고 이사를 자주 다닌 탓에 아돌프 히틀러는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 알로이스는 술을 자주 마셨고 엄격했다고 한다. 히틀러 연구가인 로버트 와이트가 말하길 '알로이스는 아내인 클라라 히틀러에게도 굉장히 거칠게 대했고, 집에서 항상 폭언을 일삼았다'고 한다. 알로이스는 클라라뿐만 아니라 아돌프와 그의 여동생 파울라 히틀러에게도 폭언과 폭력을 행사했다는 주장들이 많다.

 ≫ 알로이스는 아돌프가 15세 때 세상을 떠났고 클라라는 19세 때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클라라가 죽은 뒤 1908년 아돌프는 미술학도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오스티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으로 떠났다. 아돌프는 제국의 수도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충격을 받는다. 빈 거리에는 체코인, 폴란드인, 이탈리아인,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유대인들이 뒤섞여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아돌프는 이 기억을 떠올리며 "인종적인 신성모독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 1차 세계대전 발발

 ≫ 1914년 8월 2일, 아돌프 히틀러가 25살이 되던 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청년들을 징집한다. 빈에 기거하던 히틀러는 징집을 피해 독일의 뮌헨으로 도피했다. 당시 뮌헨은 극우적 국가주의 정서가 강하게 들끓고 있었다.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히틀러는 결국 참전을 결정하고 4년간을 전쟁터에서 보낸다. 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소모적인 전투를 했다. 자기 영역에 참호를 파고 철조망을 친 뒤 기관총 등으로 무장하여 자기 진지만을 지키는 싸움이였다. 맨몸으로 돌격하고 방어사력과 육탄적으로만 참호를 지키는 것이 임무였다. 이런 양상이 4년간 '무한 반복' 됐다. 전사자들의 시신은 쌓였지만 적과 대치하고 있어 제대로 된 처리를 못하였다. 온갖 질병이 퍼졌고 이와 벼룩은 온몸에 득실거렸으며 비라도 쏟아지면 참호는 물 웅덩이가 되었다. 당시 히틀러는 바이에른 제 16보병연대 연락병으로 4년간 복무했다. 연락병은 참호와 참호 사이를 오가며 명령을 전달하는 위험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히틀러는 그 임무를 해냈고, 그 임무로 히틀러는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훗날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을 '잊을 수 없는 가장 숭고한 경험'이라고 회고했다. 그만큼 그 전쟁이 히틀러의 인생을 뒤바꾼 계기가 되었다.


■ 1차 세계대전 패인과 유대인과의 관계

 ≫ 1차 세계대전 패전에 대한 독일 사람들의 생각은 대체로 '억울하게 전쟁에서 졌다'는 것이다. 극우 선동가들은 하나같이 연합국 측과 협상에 나섰던 사람들을 비애국자로 몰아붙였다.

 ≫ 또 하나의 패인은 유대인이라고 여겼다. 당시 독일 신무기 프로젝트에 유대인 과학자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는데 연합군의 중심이었던 영국이 유대인 핵심 세력과 손을 잡고 독일군의 기밀 정보를 빼내 정보망을 교란시켰고 독일의 지하 정보 네트워크 요소요소에도 유대인들 상당수가 가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적국이었던 영국의 외무 장관 발포어가 여왕의 지시를 받고 영국 내 유대인 지도자 중 하나인 금융가 로스차일드를 만나서 중요한 제안을 하나 한다. 만약에 유대인들이 영국을 위해 싸워준다면, 전쟁이 끝난 후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국가를 창설해줄 용의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1917년 11월 2일에 비밀문서로 작성된 ‘발포어 선언’이 그것이다. 그로부터 1주일도 안 돼 독일 정부가 개발하고 있던 비밀 무기 프로젝트 원본이 영국 사령부로 넘어간다. 동시에 독일의 전쟁 네트워크가 군데군데 마비되면서 영국군이 밀고 들어갈 틈이 벌어진다. 전세가 역전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다. 당시 독일군은 유대인에게 증오를 품었다.


▲ 마녀사냥

 ≫ 물론 유대인에 대한 혐오 내지 증오는 독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대인 혐오는 적어도 유럽에서 2,000년 가까이 내려오던 뿌리 깊은 정서였다. 증오와 멸시가 집단적으로 표출된 사건 중에 하나가, 14세기 페스트가 온 유럽을 덮쳤을 때 일어났다. 사람들은 그 탓을 유대인에게 돌려 닥치는 대로 잡아다가 학살했다. 바로 이어진 마녀사냥에서도 유대인 여성이 주요 타깃이었다. 상황은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직전인 19세기 말이 돼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881년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로스 2세의 암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러시아 당국은 유대 극단주의자들의 조직적인 범죄라고 단정 짓고 이듬해 비밀리에 인종분류법인 ‘5월법’을 제정해 유대인 청산에 나섰다. 유대인 성분에 따라 ‘살해’, ‘추방’, ‘동화’ 정책을 펼쳤는데, 이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폴란드, 체코, 헝가리 같은 동유럽으로 이주하게 된다. 1894년에는 프랑스에서 드레퓌스 대위 사건이 벌어진다.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프랑스의 기밀 문건이 하나가 발견됐는데, 그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수사당국이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드레퓌스 대위를 지목한 것이었다. 이때 에밀 졸라와 같은 프랑스 지성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재조사를 요구했고, 덕분에 진범이 잡히고 드레퓌스 대위는 석방이 된다. 하지만 러시아에 이어 프랑스에서도 유대인 혐오사건이 벌어지자 유대인들은 큰 충격에 휩싸인다. 그들은 일종의 자구책으로 1897년 8월 스위스 바젤에서 세계에 흩어진 유대 지도자들이 다 모이는 제1차 시온주의자회의를 개최한다. 이때 유대인 공동체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의 조국을 건설한다는 ‘바젤 계획’을 채택한다. 1차 세계대전에서 수세에 몰리던 영국은 유대인들의 이런 계획을 알아내고 독일 내 유대인들을 회유했던 것이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물리치기 어려운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더 이상 당국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자기 나라’를 가질 수만 있다면 큰 도박에 나설 만도 했다. 그러나 패전국 독일 입장에서는 패전의 핑계로 지목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의 베르사유 조약

 ≫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선언으로 끝났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자 전범국이 되었다. 1914년에 시작돼 1918년에 끝난 이 전쟁에서 930여만 명이 죽고 2,250여만 명이 부상당했다. 1919년 6월 28일 프랑스 파리에서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으로 1차 세계대전은 공식 종결됐다. 이 조약은 연합국으로 참전한 31개국이 독일과 맺은 것이었다. 물론 이 협상에 독일은 초대받지 못했고 결과만 통보 받았다. 이 조약의 핵심은 전범국인 독일을 처벌하고 그 세력을 약화시켜 평화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약은 독일 입장에서는 너무 가혹했다. 전쟁의 모든 책임이 독일에게만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점령지 대부분을 빼앗겼다. 독일인 입장에서는 영토의 13퍼센트와 인구의 10퍼센트가 잘려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중 독일인들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했던 것은 동프로이센을 분할해 18세기에 사라졌던 폴란드를 재건해주고 바다로 가는 통로를 열어준 일이었다. 이 통로는 이후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도화선[각주:2] 역할을 한다

 ≫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의 군인은 10만 명을 넘지 못하게 제한됐고, 탱크와 잠수함 같은 현대식 무기 보유도 금지됐으며, 공군은 창설 자체가 금지됐다. 남아 있던 무기들은 독일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파괴됐다. 독일 라인 강 연변의 라인란트 지역은 연합국 관할로 비무장 지역으로 규정됐다. 거액의 배상금도 책정됐다. 전쟁 피해 복구를 이유로 1,320억 독일 제국 마르크가 책정됐는데, 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에서 빌린 부채를 상환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이 징벌적 배상금이 전후 독일 경제에 직격탄을 날렸음은 물론이다. 이 조약은 평화유지를 목적으로 했으나 강대국 중심으로 치우친 경향이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영토 분할 과정에서 연합국 지도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강하게 반발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은 이 같은 배신감을 바탕으로 자기 정치 세력을 키웠고, 이것이 훗날 베니토 무솔리니를 중심으로 파시즘[각주:3]이 발호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 히틀러의 정치 입문

 ≫ 1차 세계대전 동안 4년간의 복무를 마친 히틀러는 극우주의가 들끓던 뮌헨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 살이었다. 그는 사실 군대에 남아 있고 싶어 했다. 당시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바뀌어 사회민주주의자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대통령으로 집권하고 있었다. 특별한 변수가 없었다면 히틀러는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군인으로 평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으로 무너진 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유럽 전역에서 혁명의 꿈을 뜨겁게 키우고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각주:4](독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정부는 뜨겁게 타오르는 마르크스주의 혁명을 잠재워야 할 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세력이 바로 퇴역 군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극우 어용단체 ‘자유군단’이었다. 정부는 이들의 폭력을 활용해 마르크스주의 혁명운동에 철퇴를 가하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자유군단은 세력을 크게 불릴 수 있었고, 훗날 나치당의 모태가 된다. 히틀러는 자유군단에서 상관들의 눈에 띄어 병사들과 포로들을 정치적으로 재교육하는 임무를 받게 된다." 이 임무를 수행하며 히틀러는 자기가 연설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연설의 핵심은 1919년 6월에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국가적인 수치이고 거기에 동조한 독일 당국은 국가적 배신자라는 비난이었다.


 ≫ 군인으로서 더 이상 전망이 없을 때 히틀러는 당원으로 남아 전업 정치인의 길을 가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의 정치적 데뷔는 뮌헨의 어느 큰 맥주홀이었다. 뮌헨의 극우세력의 중추는 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들이었는데 그들은 주로 큰 맥주홀에서 회합을 가졌고, 히틀러의 정치 데뷔도 그곳에서 이뤄졌다. 1920년 8월 13일 뮌헨의 맥주홀 브루거브라우켈러(Bürgerbräukeller)가 바로 그 무대였다. 히틀러는 거기서 “우리는 왜 반유대주의자인가?”를 제목으로 연설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자유군단이라는 이름의 국가주의 민병대를 모집하는 최상의 전략으로 반유대주의를 제시한 것이었다. 히틀러의 연설은 독일노동자당의 당원들을 고무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히틀러에 크게 고무된 노동당원들은 1921년 7월 히틀러를 당 지도자로 삼았다. 히틀러는 당명을 '독일노동자당'에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으로 바꿨고 그 약칭이 나치다.

 ≫ 나치당의 모태가 극우적 폭력 단체, 자유군단이었던 만큼 히틀러는 그 특성을 살려 자신의 호위대인 돌격대부터 창설한다. 나치깃발과 눈에 띄는 제복으로 홍보에 성공했고, 시각적 차별화를 둔 탓에 당원 숫자가 기존 2,000명에서 2만 명으로 급증한다. 히틀러가 당권을 잡은 이듬해 이탈리아에선 베니토 무솔리니의 극우 파시스트당이 정권을 잡았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베르사유 조약이 이탈리아에게 불평등하게 맺어졌다고 정치 캠페인을 벌였고 그 캠페인이 국왕 눈에 들어 집권하는데 성공했다. 이 소식을 히틀러가 알게됬고 극우주의자 무솔리니의 성공은 히틀러를 고무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 히틀러의 쿠데타 실패와 수감생활 그리고 정치복귀

 ≫ 1923년 1월 프랑스군과 벨이게군이 전후 배상금을 제때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루루 지역의 탄광을 점령하는 일이 벌어졌다. 3월에는 프랑스 장교가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프랑스군과 독일 국민들 사이에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때 촬영된 영상이 있었는데 이 동영상은 히틀러의 나치당에게 더할 나위 없는 홍보 도구였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총장을 보좌했던 루덴도르프 장군이 나치의 세력으로 들어왔고 우익 참전 군인들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군 내부자들의 협력을 받아 총기를 확보해 루덴도르프를 지도자로 세워 쿠데타를 일으킨다. 뮌헨에서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베를린으로 진격한다는 것이다.

 ≫ 히틀러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루덴도르프는 1차 세계대전 참전 영웅으로써 사면되었다. 하지만 히틀러에게는 녹록치 않은 재판이었다. 그러나 재판에 섰을 때 히틀러는 생각보다 분위기가 자신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프랑스와 벨기에군에 굴욕을 당한 독일 국민들 마음이 그와 같았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자기 웅변 실력을 총동원했고 그 결과 형량이 가벼워졌다. 수감 생활은 호텔처럼 편안했고 언제든지 나치 지지자를 만날 수 있었다. 책과 잡지도 무엇이든 읽을 수 있었고, 인생관과 정치사상을 정리했다. 히틀러가 원고를 쓰고 나치당의 기자가 손보는 형식이었으며, 이 과정으로 <나의 투쟁>이 출간된다.

 ≫ 나의 투쟁에선 <지배종족>이라는 언급이 있는데, 이 지배종족은 영토를 되찾고, 공산주의를 박멸하며 프랑스와 영국은 물론이고 유대인까지 분쇄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 히틀러는 모범수라는 이유로 1924년 11월 20일에 석방된다. 1925년 2월 27일 쿠데타를 도모했던 뮌헨의 맥주집에 다시 돌아와 나치당 지도자로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 독일(당시 바이마르 공화국) 2대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

 ≫ 바이마르 공화국 2대 대통령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총장을 지낸 힌덴부르크가 당선됐다. 군대와 독일 보수파는 힌덴부르크를 중심으로 결집되었다. 독일 좌파들은 군인 출신이 대통령이 되는 상황이 반가울리 없었다. 정치적 라이벌인 루덴도르프는 제거되었고 보수파가 결집되어 나치당원은 17만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돌격대의 규모도 커져 사설 군대와 다름없는 수준이 됐다.

 ≫ 히틀러는 "대중은 여성적이고 우둔하며 오직 감정과 증오로만 그들을 장악할 수 있다"고 여겼다. 히틀러 친위대는 베를린의 유대인 구역에서 시작해 독일 전역에 '증오'를 심기 시작했다.


■ 나치의 집권

 ≫ 나치당은 1930년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18.3 퍼센트를 득표해 제 2당이 됐다. 히틀러는 1932년 그 힘으로 대통령 선거에 나섰지만 힌덴부르크에 밀려났다. 그러나 36.8 퍼센트라는 지지율을 받았다. 1932년 7월엔 나치당은 제 1당에 올라선다. 1당이 되면서 나치당은 총리직을 요구했지만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두 차례에 걸쳐 거부했다. 그러나 1933년 1월 30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안팎의 압박을 견뎌내지 못하고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했다.

 ≫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잡자, <나의 투쟁>은 날개 돋친 듯 팔렸고, 국민의 필수 교양서가 되었다. 나의 투쟁이 책장에 없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견뎌내야 했다. 덕분에 히틀러는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 히틀러는 총리직에 오르자마자 좌파 공산주의 세력과 반대파를 감금, 납치, 암살, 고문하는 등 온갖 불법적인 재판과 처벌을 동원해 탄압했다. 히틀러는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을 비난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들이 포진해 있는 의회가 늘 발목을 잡아서 국가 발전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이를 극복할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선동했다. 3월 24일 전권위임법[각주:5]을 통과시켰다. 전권위임법의 정식 명칭은 '민족과 국가의 위난을 제거하기 위한 법률'이다. 이를 통해 지방의회는 해산됬고 사회민주당은 불법화가 되었다. 이를 통해 나치의 일당독재체제를 완성한다. 이가 가능했던 이유는 바이마르 공화국(독일) 체제의 불안과 불신, 세계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국가경제의 붕괴 때문이었다.

 ≫ 1934년 8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드디어 히틀러 1인 독재체제가 완성된다. 히틀러는 국민투표를 실시해 총리가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게 했고, 그 지위를 총통이라 칭했다. 반대세력은 죽거나 도망쳤고, 유대인은 비국민이 되어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했다.


■ 독일의 구세주 히틀러

 ≫ 독일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실업이었다. 그런데 히틀러가 총통에 취임한 뒤 실업률은 크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독재 체제를 활용해 징중 정책을 밀어붙인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베르사유 조약이 파기된 이후 독일군이 재무장에 나선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사람들은 히틀러만 바라보았다. 행복에 젖어 히틀러 얘기만 했다. 변화에 대한 희망이 워낙 컸고, 패전국민으로 짓눌려왔던 독일인들은 히틀러에게서 자긍심을 찾았다.


■ 주변국가의 무장해제

 ≫ 히틀러는 1936년 8월 1일 베를린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했다. 올림픽 기간 중 독일 전역에서는 선동적인 표어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신문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호전적인 기사들이 자취를 감췄다. 독일 정부는 올림픽에 참여하러 온 세계인들에게 독일은 평화롭다는 믿음을 심어주고 싶어 했다. 이러한 가증스런 노력은 일정한 결실을 맺었다. 올림픽이 끝난 뒤 3주 후 영국의 로이드 조지 전 총리가 히틀러의 초대를 받고 독일을 전격 방문했다. 히틀러는 고무됐다. 세계적으로 유력한 정치인이 히틀러를 방문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그 자리에서 1차 세계대전 참전담을 늘어놓았다. 그는 전장에서 종종 영국 군인들과 조우했다고 회상했다. 히틀러의 호의는 로이드 조지를 무장해제시켰다. 로이드 전 총리는 히틀러와 만남을 가진 후, 데일리 익스프레스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고문을 보낸다. “독일이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히틀러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그는 우리와 싸울 의사가 전혀 없다.” 러나 로이드 전 총리는 순진했다. 영국 신문에 독일이 안전하다는 기사가 실릴 때 히틀러는 장관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밀지시를 내렸다. “독일군을 세계 최강으로 재건하지 못한다면 독일은 사라질 것이다. 독일군은 4년 안에 전쟁 준비를 마쳐야 한다."

 ≫ 1937년 9월 28일 이탈리아의 극우주의자 무솔리니가 베를린을 방문했다. 새로운 동맹을 구축하자는 것이었는데 “침략을 위한 군사적 조치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방어적 수단”이라고 강변했다.  

 ≫ 1938년 3월 13일에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합병을 선포한다. 독일군은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오스트리아에 진입했고, “신께서 오스트리아를 구원했다.”고 소리쳤다. 오스트리아 거리에 나치 깃발이 나부꼈지만 병합에 반대하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 된 때가 이 때다.

 ≫ 그 다음은 체코슬로바키아였다.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이 내세웠던 민족자결주의를 역이용한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에 거주하는 독일민족의 자결권을 요구하며 독일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주데텐란트를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1938년 9월 30일 뮌헨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참석해 히틀러의 요구를 승인해준다. 당시 강대국들은 당사자인 체코슬로바키아를 협정에서 배제할 정도로 나치 독일에 유화정책을 폈다.


■ 2차 세계대전 발발

 ≫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기 전 소련의 스탈린에게 히틀러는 미리 전보를 보냈다. 스탈린은 독일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답신을 보낸다. 그리고 전선에는 200만 명의 병사가 히틀러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1939년 9월 1일 새벽 5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나치 독일에 관용적이던 영국과 프랑스도 이틀 뒤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준비해온 독일군은 이미 폴란드 깊숙이 파고들어갔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비밀 협정에 따라 소련도 폴란드 동부를 침공했다. 폴란드는 항복을 거부했고 바르샤바는 초토화됐다.

 ≫ 이듬해인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은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된 지 2주 만에 프랑스군 중심의 연합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국경 해안 도시 됭케르크에서는 연합군 40만 명이 진지를 포기하고 후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해변은 연합군이 버리고 간 무기들로 넘쳐났고, 벨기에와 프랑스의 해안이 독일군 손에 들어갔다. 영국군이 철수하자 홀로 남게 된 프랑스는 1940년 6월 22일 독일에 항복을 선언한다. 히틀러는 나흘 뒤인 28일 새벽 6시 파리에 입성하며 “6주에 걸친 영웅적인 투쟁 끝에 우리 병사들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대들의 위업은 영광스러운 승리로 기록될 것이다. 1주일 동안 깃발을 게양하고 종을 울리도록 명하는 바이다.”라고 말했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과 에펠탑에는 독일군인들이 무리지어 다니며 기념 촬영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 프랑스를 점령해 기세가 등등해진 히틀러는 영국에 평화협정을 제안하지만 처칠은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리고 영국과 독일 간의 공중전이 시작된다. 독일은 영국을 9개월간 공습해 4만 여 명의 사망자를 내지만 영국은 끝끝내 항복을 거부했다. 당시 영국 전투기의 성능이 우수했기 때문에 독일군도 공습 과정에 적지 않은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1941년 5월 독일군은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맛본다. 그때까지 너무 쉽게 이겼던 탓인지 히틀러도 적지 않은 충격에 빠졌다. 히틀러는 갑자기 영국 정복을 포기하고 소련을 침공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소련을 제압하면 영국의 희망도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천하의 독일군이라 해도 위험한 도박이었다. 당시 참모들은 히틀러를 막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무도 나서지를 못했다. 1941년 6월 22일 새벽 3시, 300만 명의 독일군이 소련 국경을 넘었다. 히틀러에게 러시아는 영국에게 인도와 같은 존재였다. 영국이 인도를 점령해 자원을 빼먹듯이 독일도 러시아를 점령해 이용해먹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전투도 연전연승이었다. 모스크바 턱밑까지 독일군이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과거 나폴레옹 때처럼 러시아에게는 겨울이 있었다. 그리고 12월에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습격하면서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시작했다. 독일 장군들은 소련 전선에서 후퇴하자고 히틀러에게 조언했지만, 히틀러는 격노로 답했다. 1차 세계대전을 전장에서 보낸 히틀러는 후퇴 운운하는 장군들에게 오히려 정신 무장을 주문했다

 ≫ 소년부터 노인까지 남자라면 모조리 차출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미국까지 가세한 연합군의 공격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1943년 7월 27일, 700여 대의 폭격기가 함부르크를 공습했고, 도시는 불바다가 됐다. 이 공습으로 함부르크 시민 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즈음 전세는 확실히 역전되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건강도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심장 질환을 앓기 시작했고 파킨슨병 증세도 보였다. 등은 휘었고 손은 떨렸다. 1944년 6월 6일 이른바 디데이 새벽 노르망디 해안. 연합군이 마침내 독일이 점령 중인 프랑스 수복에 나섰다.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매우 기뻐했다. 영국이란 섬에 숨어 있다가 대륙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에 쉽게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히틀러의 착각이었고 망상이었다. 파죽지세는 이제 연합군을 수식하는 말이 됐다. 그 시기 독일군 사령부에서 폭탄이 터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독일 내부의 움직임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전세가 역전된 이유를 참모들의 타락에서 찾았다. 반역자들 때문에 원대한 계획이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의 배후를 캐기 위해 히틀러는 5,000명을 체포했고 200명을 처형했다. 이처럼 전세가 기울면서 독일 내부의 히틀러 지지기반도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 히틀러의 패배, 그리고 자결

 ≫ 1945년 1월 소련군이 베를린 외곽 80킬로미터까지 접근했고, 4월 21일에는 마침내 베를린에 입성했다. 이 전쟁으로 소련에서는 무려 2,000여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희생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군 지휘부는 병사들에게 베를린에서 승리를 자축할 것을 허락했다. 소련군들은 베를린에 남아 있던 여자들을 빈집으로 끌어모았고, 밤새도록 욕을 보였다. 이때 소련군에게 강간당한 독일 여성의 숫자만 200만 명을 헤아렸다. 그때 히틀러는 폐허로 변한 총통 관저의 지하 벙커에서 그의 연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은신하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 클라라 히틀러의 사진 앞에서 에바와 결혼식을 올린 뒤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다. 히틀러는 일기를 통해 자기가 일으킨 전쟁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생각을 남겼는데, 자기중심적인 망상과 집착은 전세가 기울어졌을 때에도 결코 약해지지 않았다. “우리가 졌다는 것을 안다. 적들의 힘이 너무 강하다. 배신까지 당했으니 내 머리에 총알을 박아야 한다. 하지만 절대로 항복하지는 않으리라. 우리는 쓰러지겠지만 세상이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독일이 전쟁을 원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이 전쟁은 서구 정치인들이 도발한 것이다. 그들 모두 유대인을 위해 일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죽는다. 우리 군대, 여성과 노동자들이 내 이름을 걸고 이룩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위업을 알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에서만 5,000만 명에 가까운 인명이 세상을 떠나야 했다. 아시아까지 그 범위를 넓히면 7,00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망상과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국가주의와 인종주의 같은 극단적인 이념에 탐닉할 때 그 끝이 어떤 모습일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인류는 그 대가를 치르면서 평등과 조화, 그리고 다양성과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있다.


  1. 홀로코스트 : 일반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을 대량으로 태워 죽이거나 대학살하는 행위를 총칭하지만, 고유명사로 쓸 때는 제2차세계대전 중 나치스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뜻한다. [본문으로]
  2. 도화선 : 사건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 [본문으로]
  3. 파시즘 : 1919년 이탈리아의 B.무솔리니가 주장한 국수주의적·권위주의적·반공적인 정치적 주의 및 운동을 말한다. 원래 묶음[束]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파쇼(fascio)에서 나온 말이었으나, 결속·단결의 뜻으로 전용(轉用)되었다. [본문으로]
  4. 바이마르 공화국 : 과거 독일의 국가명 [본문으로]
  5. 전권위임법 : 비상사태에 입법부가 행정부에 입법권을 위임하는 법률, 나치 정권은 나치에서 제정한 법률은 의회나 참의원 및 대통령의 권한과 관련된 것을 제외하면 헌법에 위반되어도 유효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 골자였다. [본문으로]

■ 이 글을 보는 분들에게 말씀

 ≫ 노무현 대통령께서 뇌물을 받았다는 증거 기사가 있다면, 댓글로 출처를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증거는 없었고 모두 거짓이라는 기사와 증언이 쏟아졌습니다. 2015년 이인규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에 의해 밝혀졌지만, 대검찰청에 억대의 피아제 시계 뇌물 논란 또한 국정원의 대국민 망신주기 언론 플레이였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는 적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는 시민만을, 약자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故 노무현 대통령 묘소


■ 노무현 대통령의 퇴임

 ≫ 노무현 대통령은 검찰의 뇌물수수혐의 수사 도중 국정원의 모욕주기 언론플레이에 고통받았다. 사망 이후에도 인터넷 여론공작으로 고인 모독을 당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말로 뇌물을 받았을까? 노무현 대통령은 진짜로 차명계좌를 통해 비리를 저질렀을까? 그 진실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보았다. 


■ 노무현 대통령의 차명계좌

 ≫ 조현오 전 청장은 서울경찰청장으로 재직하던 2010년 3월 일선 기동대장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2009년 노 전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날 10만 원권 수표가 입금된 거액의 차명계좌가 발견돼 자살에 이르렀고, 권양숙 여사가 특검을 막기 위해 민주당에 부탁했다"는 허위 발언을 했다. 조현오 경찰청장 내정자의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과 관련, 검찰이 차명계좌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고 문화일보가 2010년 8월 19일 보도했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이날 “(차명계좌 존재 여부 확인에 대해) 하나하나 들여다보겠다”며 “아직 사건이 접수만 됐고 2010년 8월 19일, 검토해서 배당할 것”이라고 신문에 말했다.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2012년 9월 대법원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 유족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조현오 전 경찰청장에 대해 징역 8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차명계좌 설은 결국 "찌라시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현오 전 경찰청장은 수감 8일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조현오 전 청장은 이후 재판과정에서 발언의 출처나 근거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거나 오락가락하는 발언을 했다.


2010년 3월 31일 당시 조현오 서울지방경찰청장은 기동부대 지휘요원 398명을 대상으로 열린 특별교양 강연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기를 앞둔 시점에 나온 그의 발언에 여론의 시선이 집중됐다. 서울경찰청장은 고급정보를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뭐 때문에 사망했습니까? 뭐 때문에 뛰어내렸습니까? 뛰어버린 바로 전날 계좌가 발견됐지 않습니까, 차명계좌가? 10만 원짜리 수표가 타인으로, 거액의 차명계좌가 발표돼, 발견이 됐는데, 그거 가지고 아무리 변명해도 변명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거 때문에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린 겁니다."


관련기사 : 검찰 "노무현 차명계좌 존재하는지 들여다보겠다 2010년 8월 19일 기사

관련기사 : 대법원 '노무현 명예훼손' 조현오, 실형 확정... 왜? 2014년 3월 13일 기사


■ 동아일보의 노무현 죽이기 결국엔 가설.

 ≫ 검찰이 조 전 청장을 사자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기소하기 직전인 2012년 5월 <동아일보>는 "조현오 前 경찰청장 '어느 은행, 누구 명의인지 다 까겠다'"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 신문은 기사에서 "조현오 전 경찰청장 3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차명계좌가 어느 은행에 누구 명의로 돼 있는지 검찰에 출석해 모두 까겠다'고 말했다"며 "이에 따라 노 전 대통령의 차명계좌를 둘러싸고 커다란 정치적 파장이 일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동아일보>는 또 다음 날인 5일에도 "'조현오 파일 실체' 존재한다면 대선판 전체 흔들 '뇌관'"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12월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 '조현오 파일'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조 전 청장이 검찰에서 '노무현 차명계좌'의 객관적 근거를 제시한다면 야권의 대선 후보 구도는 물론이고 대선판 전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근거로 작성됐다.


관련기사 : 조현오 前 경찰청장 '어느 은행, 누구 명의인지 다 까겠다 2012년 5월 4일 기사


■ 노무현 대통령의 퇴임 후, 그리고 뇌물 수수

 ≫ 노무현 대통령은 2008년 퇴임 후 전임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고향 김해시 봉하마을로 귀향하였다. 이후 사람사는세상 사이트를 운영하며, 봉하마을 촌장으로 재임하는 등, 민중들과 교류를 추구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역차별 논란에도 불구하고 재임시절 친인척 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할 정도로 친인척 비리를 경계했으나 2009년 '박연차 게이트'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되었다. 박연차 게이트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 세종캐피탈 사장 사이의 세종증권 매각 사건을 조사하던 중 박연차가 수 많은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제공해온 것이 밝혀진 비리 사건이다. 검찰은 박연차가 노 전 대통령에게 15억 원에 대한 수사를 벌였으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차용증을 제시하였고, 사저신축비 용도로 빌린 개인 간의 금전 거래로 판단하여 무혐의 종결 되는 등 비리를 매우 경계했다. 이후 박연차가 권양숙 여사에게 건낸 100만 달러(약 10억-13억원 정도), 정상문에게 건낸 3억 원, 연철호에게 건낸 500만 달러에 대해 수사가 이루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은 임기중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에게 100만 달러와 3억 원을 요구하여 돈을 받은 것을 시인하였는데, 이 돈은 권양숙 여사가 개인 빚 청산과 자녀 유학비로 사용하였다고 밝혔다. 박연차-권양숙 간 돈이 오간 것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 본인은 인지하지 못했다고 주장하였으며, 차용증 등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검찰은 이 또한 개인 간의 금전 거래임을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입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처음 1기 검찰 수사진은 당시에 검찰 내부에서 명망있는 검찰들이었다. 몇 개월에 걸쳐 장기간 수사가 진행되었으나, 1기 검찰 수사진은 퇴임 이후 박연차와의 거래는 사적 거래라 수사할 내용이 없다고 보고 종결지었다.


노무현 재단, 사람사는 세상 사이트 : (클릭)

※ 노무현 재단의 슬로건은 "노무현은 지키지 못했지만, 노무현 정신만은 지키고 싶습니다"의 슬로건으로 기념관이나 교육,연구사업 나눔사업 및 회원참여 프로그램으로 봉사, 참여정부 정책총서 등을 발간하고 있다.



■ 대국민 망신 주기 언론플레이

 ≫ 1기 검찰 수사진의 수사가 종료되고, 수개월 후 2기 검찰 수사진이 꾸려졌다. 이인규, 홍만표 등이 합류하였고 이인규는 이전 수사진의 수사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주변 인물들이 차례차례 소환당했고 일가족 역시 소환당했다. 소환은 한 번이 아니라 수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면서 노무현 대통령을 조여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상황이 방송과 언론을 통해서 매일 매일 브리핑되는 가운데, 어쩐 일인지 검찰은 어떠한 액션도 하지 못한 채 3주 이상이나 지속되었다. 국내 모든 매체는 카메라를 봉하마을에 경쟁적으로 설치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심지어 방송사는 헬리콥터까지 동원하여 봉하마을을 촬영하기까지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홈페이지에 "저의 집은 감옥입니다."는 글을 남겼다. 모든 언론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공격하였고 흡사 온 세상이 압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여론은 노 전 대통령에게 매우 불리하게 형성되었다. 2015년, 이인규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은 “국정원이 노무현 대통령 수사 내용을 과장해 흘렸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인규 전 중앙수사부장은 <경향신문>에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받은 명품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언론보도 등은 국정원 주도로 이뤄진 것”이라며 “검찰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수사내용으로 언론플레이를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당시 원세훈 국정원장이 보낸 국가정보원은 대검찰청에 억대의 피아제 시계 뇌물 논란을 활용한 대국민 망신주기 언론 플레이를 제안하였고, 국정원 측이 자신들의 뜻을 일방적으로 관철하려 하자 검찰은 "수사권 침해"라고 반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검찰은 국정원 직원의 멱살을 잡으며 몸싸움까지 벌였다고 2015년에 2009년에 있던 일이 알려졌다. 이명박 정부가 ‘촛불집회’ 등으로 궁지에 몰리자 검찰이 이를 돌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는 게 정치권과 법조계의 분석이다. 결국 검찰도 국정원과 똑같은 충성 경쟁을 벌였다는 지적이다.


관련기사 : 盧 대통령 수사 두고 검찰과 국정원, ‘멱살잡이’까지 2015년 2월 27일 기사

관련기사 : [SNS] 이인규, 盧수사 폭로.. “공작정치의 끝” 2015년 2월 25일 기사 



■ 국정원의 여론 공작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한 직후, 국민장을 치루며 온 국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국정원은 노무현 대통령을 비하하는 인터넷 게시물 수천 개를 유포시키며 추모 분위기를 방해했다. 이후에도 국정원은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 노무현 대통령을 모욕하는 게시물을 지속적으로 생산, 유포했다. 국정원 직원이며 디씨인사이드에서 활동했던 닉네임 좌익효수(아이디 : chiwoo9300)는 인터넷에 지역감정 조장, 여성혐오, 차별주의적 정치관을 디시인사이드 정치사회 갤러리 위주로 피력[각주:1]했다. 그 중 하나를 가져오면, "홍어 종자 절라디언들은 죽여버려야 한다" 등이다. 닉네임의 뜻은 좌파를 효수(능치처참)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부적격자가 국정원 직원이었단 점에서 국격은 물론 국가기관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다.


관련기사 : 국정원 “놈현 큰 죄가 많았군요~”...서거 후 비하 댓글 수천개 추가 공개 2013년 6월 26일 기사



■ 노무현이 이명박 대통령께 보낸 편지

 ≫ 2008년 7, 8월 이명박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기밀을 빼돌렸다며 봉하마을을 압수수색하라고 지시했다. 압수수색을 지시했던 추측되는 이유는 당시 한/미 FTA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를 중점으로 진행중인 촛불시위 때문으로 추측된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 당시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대응 때 한마디로 "미국산은 위험하니 안된다" 였으나 이명박 대통령은 바로 통과시켰던 문제다. 당시 노무현 지지자들이 이명박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비교하였고 이명박 대통령이 그로 인해 노무현 대통령을 압수수색한 것으로 전해진다. (여론돌리기 및 노무현 잠재우기 등으로 추정)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통치기록을 봉하마을로 가지고 내려갔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와 청와대에서 합의를 본 사항이었다. 그러나,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이 일을 국가 기밀을 빼돌렸다로 지시했다. 노무현은 왜 통치기록을 가져갔을까? 그것은 "민주주의 2.0" 이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개설한 토론 웹사이트였다. 이 사이트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들어와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모든 토론의 형식이나 진행, 시스템 등은 회원 참여에 의해 결정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정책 등을 실시간으로 국민들과 토론하길 원했다. "민주주의 2.0" 을 만들기 위한 서버 컴퓨터 5대를 봉하마을에 가져간 것이다. 이 서버 5대를 이명박 정부는 국가 기밀이라며 일침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썼다고 한다.


(노무현이 정권 퇴임 후, 시민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하기 위해 만든 민주주의 2.0, 노대통령께서 서거하신 현재는 없다)


관련기사 : '민주주의 2.0' 문 열었다 2008년 9월 18일 기사




■ 그 외 노무현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부치지 않은 편지

 ≫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전에 이명박 대통령에게 썼지만 부치지 않았던 편지 1통과 검찰 수사 때 추가진술을 위해 준비했던 글 1편을 비롯한 미공개 글 2편이 공개됐다. 편지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관련기사 : 노무현이 MB에게 '부치지 않은 편지' 공개 2009년 10월 7일 기사

노 대통령의 서거, 편지에 대한 기록은 아래의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내 마음속 대통령
10점


출처 : 분노에 찬 기사 검색 / 구글 검색 및 나무위키 조사, 노무현 관련 책, 팟빵 라디오 등 여러가지


 

관련글 : [날짜확보] 노무현이 서거하신 이유 중 하나, 친일파와 전쟁한 노무현, 친일파 나라를 속이다

[시사 및 리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해외반응

  1. 피력하다 : 생각하는 것을 털어놓고 말함. [본문으로]

■ 해당 이야기에 대해 떠들어보기

 ≫ 친일파 청산이 아직도 이어지는 것과 당시 노무현 대통령께서 일궈낸 밭을 망치는 후대 대통령과 그 행위들을 보면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다. 노무현은 서민들을 위해 싸웠다. 부패한 정권과 싸웠고, 당내에서도 자기편은 소수였다. 모두가 그를 싫어했지만, 국민들만이 그의 편이였다. 마지막엔 국민들마저 실망감에 야유를 퍼부었다. 언론사들도 공격했다. 언론사들도 그의 적이었다. 내용을 정리하면서 이 아픈 마음을 어느 누구에게도 풀 수 없었다. 그냥 이 포스트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아주길 바랄 뿐이다. 친일파 청산 관련 내용의 뼈대는 아고라(출처는 맨 아래)에서 가져왔다. 관련 내용에 대해서 처음부터 신뢰하지 않았다. 아고라에서는 그 증거와 출처가 명확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쓴 글만 보고 그대로 믿고 내가 포스팅하게 된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다시 읽고 다시 포스팅하여 왜곡된 역사를 쓰고 써, 진실도 아닌 역사를 쓰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흔하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인터넷이기에 스크랩은 하되, 최대한 그 출처와 증거를 가져오려고 노력했다.



■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사태

 ≫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절 탄핵 가결일은 2004년 3월 12일이다. 왜 이 날 국회의원들은 탄핵을 결정한 것인가? 그 이유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은 국회에서 2004년 3월 2일이였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이 나온지 불과 10일만에 국회의원들은 들고 일어나 탄핵을 하려고 했다. 

[관련URL]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관련(뉴스 승인 날짜 참고) :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2088

[관련URL] 노무현대통령탄핵사태 날짜 두산백과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25242&cid=40942&categoryId=31778



▼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 후, 매우 좋아하는 국회의원. 친일파 또는 그로 이득을 얻은 분이 아닐까 의심해본다..



■ 노무현 대통령은 유일하게 친일파와 싸웠고 서민들을 위해 힘 쓴 대통령이였다.


■ 노무현 정권 때 만들어지고, 이명박 정권 때 폐지된 것들

 ≫ 이명박 대통령이 법을 직접적으로 없앴다는게 아니라, 간접적으로 없앴다. 그는 이러한 관련된 법을 유지시키지 않고 지키지도 않았다. 혹은 정말로 끝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학생 때 시민운동에 참여했던 그가 이제는 다른 방향으로 혁명을 돌린 것일까

 제 17대 이명박 대통령 재임기간 : 2008 ~ 2013

1.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4년간의 임무를 완수하고 2009년 11월 30일 위원회 활동이 종료되었다" 라는 글이 쓰여져 있다. 해당 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관련URL, 나무위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 https://goo.gl/xEzyb8


2.일제 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 아래 증거 뉴스의 등록 날짜는 2012-09-26일, 해당 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관련URL, 한겨레신문] "일제 강제동원 피해조사위 청와대, 연내 활동종료 주문"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3421.html


3.친일재산조사환수위원회 

 : 아래 증거 뉴스의 등록 날짜는 2010-07-12일 해당 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관련URL, 뉴스데스크] "친일 재산 조사위원회, 4년간의 활동 종료"  : http://imnews.imbc.com/replay/2010/nwdesk/article/2658824_18903.html


4.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모든) 정리조사위원회 

 : 아래는 증거의 위키백과이다. 연혁에서 2010년 12월 31일 해산되었다. 또한 아래 증거, 오마이뉴스에서도 설명한다. 해당 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관련URL, 위키백과] "대한민국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 https://goo.gl/R0ZlJE

[관련URL, 오마이뉴스] "우리는 왜 진실위 조사관 백서를 내는가" : https://goo.gl/tUlqkp


5.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 아래 증거 뉴스의 등록 날짜는 2009년 12월 6일이다. 해당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관련URL, 국민일보] "4년 활동 마치고 해체되는 군의문사진상규명위 윤원중 위원장" : https://goo.gl/CaKjP9


■ 노무현 정권 때 만들어지진 않았으나, 이명박 정권 때 폐지된 것들


1.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

 : 아래 증거 뉴스의 등록 날짜는 2013년 3월 7일이다. 해당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관련URL, 서울의소리] "이명박 국민들몰래...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폐지" : http://www.amn.kr/sub_read.html?uid=8389


2. 투표용지 보존 기간 축소

 : 아래 증거 글은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의 팀장 박대용 방송기자께서 쓰신 글이니 신뢰하여도 된다. 시행 날짜는 2012년 10월 2일이다. 해당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그리고 2012년 12월 19일은 대통령 19대 대선 선거일이다.

[관련URL, 박대용기자 블로그] "투표지 보존기간은 얼마까지 가능할까" : http://biguse.net/686


■ 노무현 정권 임기말 화폐 고액권 발표, 10만원권 김구 주석 확정 그러나..

 ≫ 노무현 정부 임기말 , "대한민국 화폐에는 독립유공자 애국지사분들이 단 한 분도 없다. 한국인이 없다." 라며 확정했지만, 이명박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12월초 10만원권 발행을 무기한 연기 직후 같은 달 발행결정을 취소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5만원권과 10만원권 등의 고액권 발행은 지난 정부에서 정식으로 발표하여 추진하던 사안이었다. 


 ≫ 당시 시점으로 1만원권이 나오고 나서 물가가 12배 이상 올랐으므로 고액권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7대 국회에서 먼저 여야 합의로 고액권 발행 촉구 결의안을 냈고(이것은 법률적 효력을 갖는다) 이를 수용한 정부에서 국민 여론을 조사한 후 5만원에는 신사임당, 10만원권에는 김구의 초상을 넣기로 결정한 바 있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14일 보수우익단체들이 한국은행 앞에서, '10만원권은 이승만, 5만원권은 박정희'라는 주장을 펼치며 시위를 한 후 한국은행의 태도가 돌변해 버린 것이다. 한국은행은 "정부의 요청으로 10만원권의 발행을 유보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관련URL, 오마이뉴스 발췌] "뉴라이트와 현 정부에 조롱당하는 김구 주석"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51135



■ 박근혜 정부 "항일 흔적 지우기"

 : 2014년 1월 1일부터 도로명 주소 전면 시행, 친일파 동아일보 창립자 김성수의 호를 딴 도로는 존치[각주:1]하고, 반면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의 호를 딴 서울 "명동우당로"는 명동 11길로 변경.


■ 클릭한 순간 노무현 대통령께서 서거하신 진짜 이유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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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존치하다 : 제도나 설비 따위를 없애지 아니하고 그대로 두다. [본문으로]

■ 안두희의 백범김구 암살

안두희 1917년 ~ 1996년 10.23일

 : 1934년 신의주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대학에 다니면서 기생과 결혼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했다. 해방 후 남조선국방경비대 장교로 임관하여 포병사령부 소속 포병소위가 되었고 1947년에 서북청년회에 가입했다.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 서재에서 백범 김구를 권총으로 암살하였다


■ 당시 백범김구선생의 비서였던 선우진

백범 김구 비서 선우진 1992년 ~ 2009년 5.17일

 ≫ 1949년 6월 26일, 시간 12시 45분경 안두희는 백범김구선생을 살해했다. 당시 김구선생의 비서였던 선우진은 당시 정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 당시 기록

“안두희(安斗熙) 소위가 왔습니다.”

“그래. 들어오라 해.”


그 즉석에서 허락하시므로 그를 선생님 거실로 들여보낸 때가 12시 30분께였다. 아래층으로 내려올 때 응접실에서는 라디오 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곧 지하실로 가서 선생님의 오찬 준비 상황을 알아보았다. 식모는 “네, 만둣국을 다 끓여가요”라고 했다.


주방에서 아줌마의 말을 듣는 순간 윗 층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동이 났다. 1층으로 뛰어올라가 다시 2층 백범 선생 방으로 뛰어오르던 나는 층계에서 한 손에 들었던 권총을 떨어뜨리며 “내가 선생님을 쏘았소” 하는 흉측한 모습의 안두희를 만났다.


허둥지둥 방으로 뛰어올라간 나는 “선생님, 이게 어인 일입니까” 하며 울부짖었으나 유혈이 낭자한 채 책상에 엎드린 선생은 말씀이 없으셨다. 순식간의 참변이었다. 아직 체온이 식지 않은 선생을 다다미방으로 모시고 이웃해 있는 적십자 병원에 의사를 부르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1층으로 다시 내려오니 비서진들에게 얻어맞은 범인 안은 쓰러져 있고 경비실에서 연락을 받은 경찰이 달려와서 그를 데려 가려는데 그 시간을 기다렸다는 듯 정체 모를 군인들이 떼 지어 몰려와 범인이 군인이란 이유로 저격범 안두희를 바람같이 쓰리쿼터로 끌고 갔다. 불과 2,3분 사이의 암살 음모공작 현장이었다.



▲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한 김구



■ 안두희는 왜 백범을 암살하였는가?

≫ 지금까지 백범 암살을 보는 시각은 네 가지다. 

1. 첫째 반민특위 활동에 위협을 느끼는 친일파들이 생존의 돌파구로 친일파 숙청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백범을 암살했다는 설.

2. 둘째 이승만 대통령에게 아부하는 과잉충성분자들이 이 대통령의 뜻과는 관계없이 정적이라고 생각되는 백범을 암살하고 권력을 농단하기 위해 암살했다는 설.

3. 동, 서의 냉전질서가 구축되면서 미국이 한반도에서 배타적 지배권을 구축하고 이승만 체제의 통치 질서의 안정을 위해 남, 북협상을 주창한 백범을 암살했다는 설.

4. 배후에서 리모트 컨트롤 하는 세력과는 별개로 북에서 월남한 극단주의자를 대표한 안두희의 소영웅주의적 망상에서 비롯된 단독범행설이다.


■ 백범 암살 그 이후의 안두희

 ≫ 암살 이후 특무대에 연행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석 달 뒤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1950년 7월 10일 육군 포병소위로 복직하고 9월 15일 중위로 진급하였다. 1951년 2월 15일 잔형 면제를 받고 12월 15일 대위로 진급, 그뒤 1953년 2월 15일에 완전 복권되었으며 1953년 12월 15일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1953년 완전 복권되었으나, 여러 차례 신변의 위협을 당했다.

 ≫ 그 후, 안두희의 동향 친구인 양구 주둔 26사단 사단장 이기건의 배려로 콩나물과 두부 납품을 시작했다 (반공포로로 625때 월남한 26사단장 전속부관 S씨 증언)

 ≫ 1959년 일본에서 벌어진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을 보면 이때에도 국군 소속의 특무 기관원으로 활동하고 있던것으로 보아, 서류상으로는 전역했지만 실제로는 계속 육군 정보요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김구 선생 살해 진상조사위원회가 발족되자 잠적하였다가 1961년 해당 단체의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게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풀려났다. 1965년 김구를 추종하던 곽태영에게 목을 찔린 다음에 가까스로 살아나서 이후 약 10년 동안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은거했다

1992년 2월 28일에 김구 선생의 묘소를 강제(로 끌려가서) 참배하기도 하였다. 이 참배에서 그는 자신의 범행이 어디까지나 우발적인 단독 범행이었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 안두희를 살해한 시민 박기서

 ≫ 범행 시점인 1996년 당시 박기서는 47세로 부천 소신여객 버스 기사였다. 그는 1995년 권중희의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를 읽은 뒤 범행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살인의 동기는 민족정기를 해친 사람이 천수를 누리면 안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길이 40cm 정도의 홍두깨에 매직으로 '정의봉' 이름을 썼고 근처 문방구에서 장난감 총을 구입한 뒤, 사전답사했던 안두희의 집에 침입해 안두희의 부인을 묶고 자리에 누워있던 안두희를 죽을 때까지 정의봉으로 때려 살해했다. 

≫ 오마이뉴스에서는 그를 여러번 인터뷰했는데 본인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죽일 생각이었으나 막상 대면하고 보니 나이들고 힘없는 노인이어서 주저하는 사이에 안두희 눈을 보았는데 매우 날카롭고 기회를 노리는 눈빛이었다고 한다. 순간, 잘못하면 자기가 당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범행에 이르렀다 범행 직후 본인이 다니던 성당에 가 고해성사를 하였다.


■ 범행 직후의 박기서

≫ 당연히 뉴스에도 보도되었고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일단은 물증, 계획성, 고의성, 자백 등이 모두 완벽하게 있는 확신범이자 살인자였으므로 버스회사에서도 해고되었고 구속 상태에서 재판에 회부되었다. 가족들도 평소 그가 그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면서 매우 당혹스러워 했다.

≫ 초기 8년 구형에 5년이 선고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법정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살인죄의 법정 최저형량이 5년임을 감안하면 징역 3년은 엄청난 선처를 한 것이다. 당시 대법원이 형량을 결정한 취지를 '박기서의 살인행위는 주관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지나 우리나라 법질서 전체 관점으로 볼 때에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라고 밝혔는데, 표현상 원칙을 고수한 것처럼 보이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결국 법조계가 박기서의 행위에 면죄부를 준 게 아니냐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98년 3월 1일 3.1절 대사면 때 대상자에 포함되어 3월 13일 수감 1년 5개월만에 출소하였다. 

≫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사회 각계 단체 및 개인들이 박기서의 처단을 응원하는 취지에서 격려금과 편지들을 보냈다. 초등학생인 아들이 다니던 태권도학원 관장이 수업료를 면제해주고, 백범기념사업회에서 그의 아내에게 취업자리를 알선해 주기도 했다. 본인은 익명의 누군가에게 출소할 때까지 매달 백만 원씩을 받았다고도 한다. 출소 후에도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자리, 집 등을 제공받아서 출소 이후에는 택시 기사가 되었다.



■ 박기서에 대한 개인적으로 떠들기

≫ 그는 살인자다. 법적으로 살인은 용서받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정당하다고 했을 때 나는 옹호하고 싶다. 시민 박기서를 살인자라고 한다면 안중근 의사는 살인마인가? 안중근 의사 또한 사람(이토 히로부미)을 살해했다. 당시 20년 이상의 일제강점기를 맞은 나라에서 임시정부와 독립을 위해 싸운 행위를 일반인들은 일본인들은 20살 아래의 학생/시민들은 그들을 테러리스트라고 할 수도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독립을 위해 싸운 위인들 모두 살인자인가? 대한민국은 왜 그분들께 건국훈장을 주었는가? 내 생각엔 시대적 이념이, 현재의 가치관이 그를 살인자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 다시 한번 우리나라가 식민지가 됬을 때, 그 식민지가 20년 이상 지속되었을 때 박기서 시민과 같이 행동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자를 영웅으로 위인으로 칭송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 및 출처 : 나무위키, 노컷뉴스(http://m.nocutnews.co.kr/news/4055084), 미래한국(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525), 우남 이승만과 건국사(http://cafe.daum.net/syngmanrhee/D9pI/1093)







■ 나의 한마디

≫ 개인적으로 매우 존경하는 분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알고있는 역사책의 한국현대사가 아니라 나의 한국현대사라는 것이다. 보수진형에서 읽어본다면 꽤 반론이 많을 수 있는 내용들이 많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유시민의원께서 이 책을 쓰기 위해 정말 많은 문헌을 참고했고 그 노력이 읽는 내내 보였다. 어느 기사 참고부터 다른 책, 인물사 등을 샅샅이 뒤져보고 쓴 것이 보였다. 읽으면서 다시 한번 역사를 알아야 현재를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학생때는 그렇게 싫어하던 역사를 지금 나이에 다시 읽으면서 왜 선생님들은 이렇게 재미있게 설명해주지 않았을까 또는 내가 그만큼 관심이 없었나? 라는 회의감에 잠시 젖어본다.


■ 목차

1. 역사의 지충을 가로지르다 : 1959년과 2014년의 대한민국

2. 4.19와 5.16 난민촌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

3. 경제발전의 빛과 그늘 : 절대빈곤, 고도성장, 양극화

4. 한국형 민주화 :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한 민주주의 정치혁명

5. 사회문화의 급진적 변화 : 단색의 병영에서 다양성의 광장으로

6. 남북관계 70년 : 거짓 혁명과 거짓 공포의 적대적 공존


■ 왜 읽었는가?

≫ 개인적으로 매우 존경하는 분, 글도 잘 쓰시고 말쏨씨도 뛰어나며 서민의 편에서 나라를 생각하는 몇 안되는 분이기 때문에

≫ 필자는 한국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높다. 특히 과거 한국대통령들의 일대기가 궁금했다. 50년이 길다면 길고 멀다면 멀겠지만 가까운 역사인 만큼 현재가 보일 것이라 생각한다.

 

■ 내 마음대로 책 내용 3줄 요약

≫ 유시민이 말하는 한국근현대사이다. 그의 정치적 성향이 들어가있으며 개인적으로는 진보성향에 가깝고 그렇게 받아들이며 읽혀진다.

≫ 북한과 대한민국의 흐름, 당시 대통령들의 상황과 유시민의 추론이 들어가며 이승만부터 현재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유시민의원님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 대한민국 현대사를 만든 힘은 욕망이였다. 생리적, 안전, 소속감과 사랑, 자기 존중, 자아실현의 5가지 욕망이다.


■ 유시민이 말하는 북한과의 이야기

 (죽산 조봉암 나무위키 : https://namu.wiki/w/%EC%A1%B0%EB%B4%89%EC%95%94)

≫ 1959년 이승만 대통령은 조봉암을 법살했다. 청년 시절 열혈 공산주의자로서 투옥과 고문을 당하고 반일투쟁과 노동운동을 벌였던 죽산 조봉암은 해방 후 공산당과 결별했다. 정치에 투신해 국회의 헌법기초위원으로 제헌헌법을 만드는 데 기여, 대한민국 첫 농림부장관이 되었다. 그는 '북진통일론'을 비판하고 '평화통일론'을 주장한 죄로 교수형을 당했으며, 사형집행 임석검사에게 말했다. "나는 공산당도 간첩도 아니오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 져서 정치적 이유로 죽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할 것이오" 1959년 대한민국은 목숨을 걸지 않고는 권력의 불의에 대항하거나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행사할 수 없는 나라였다.

≫ 북한은 '미제 식민지 남조선의 해방'을 공공연히 주장하고 전쟁까지 일으켰지만 대한민국은 오로지 자기를 지키는 데 급급했다. 이승만 정부는 '북진통일', '멸공통일'을 외쳤지만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일재 잔재를 청산하지 않았으며 헌법이 명시한 민주주의를 실현하지도 않았다.

≫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북위 38도선 남북을 각자 점령한 미국과 소련에 있다. 애초에 자기 힘으로 광복을 이루지 못한 것은 우리의 부족함 탓이었다. 그렇다고 분단의 책임을 우리민족에게 묻는 것은 강도 피해자에게 범죄의 책임을 지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 유시민이 말하는 한국을 만든 힘

≫ 대한민국 현대사를 만든 힘은 5가지 욕망이였다. 안보국가 > 발전국가 > 민주국가 >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것은 인류의 문명사에서 보편적인 국가의 '계통 발생'이다. 국가의 진화는 '욕망의 위계'를 반영한다.


■ 유시민이 말하는 이승만

 (제1대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 이승만 박사는 1919~1925년까지 임시정부 대통령을 할 정도로 널리 인정받는 독립운동가였다. 투쟁보다는 외교에 치중한 나머지 힘도 없는 국제연맹에 조선을 위임통치해달라고 청원했다가 탄핵을 당해 임시정부를 떠났다. 그는 강대국 정부에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 일에 주력, 특히 미국 정부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했으며 1940년엔 일본이 미국을 침략할 것임을 경고하는 책을 출간해 미국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미리 승인해두지 않으면 독립하면서 소련의 손아귀에 들어가 동아시아 전체가 공산화될 것이라고 미국 정부와 국민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태평양에서 일본과 싸우는 데 소련의 협력이 필요했던 미국은 임시정부를 승인하면 소련 공산당을 자극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여 청원을 거절했다.

≫ 해방 후, 공산화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통일국가로 가는 길, 북한을 공산주의자들에게 주고 남한은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있었다. 후자의 대표자가 이승만 박사였다. 독재, 부패, 부정 선거를 저지르고 수많은 시민을 살상했지만 그는 분단국가를 세움으로써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확실하게 막았다. 하지만 아무리 빛나는 이념을 내세운다고 해도 사회 구성원 다수가 인정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나라의 국민이 기꺼이 받아들일 때, 국가의 결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복종할 때, 공동체를 지키려고 헌신하려는 태도를 보일 때, 그 국가는 정통성 있는 국가가 되며 자연스럽게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다.

이승만 정부는 절대빈곤에 빠진 국민의 경제생활을 개선하지 못했다.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제조업, 광업, 전력 등 일제강점기 산업의 중심지는 북한이었기 떄문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이며 정치인, 이승만을 비롯해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 김일성과의 라이벌 구도도 있었다고 함)

≫ 김구 선생을 비롯한 중도파들이 분단을 막으려고 38선을 넘나들며 협상을 벌이는 동안 이승만 박사는 분단국가의 권력을 장악할 준비를 했다. 이승만은 통일정부를 만드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면 분단을 막겠지만 통일국가의 권력을 공산주의자에게 뺏길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손을 잡았다. 자발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했다가 광복 후 '친미', '반공'의 깃발을 들고 살아남은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당시 반민특위[각주:1]는 682명을 조사해 559명을 특별검찰에 송치했다. 1949년 1월 반민특위가 노덕술을 체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을 즉각 석방하고 반민특위 관계자를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노덕술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해 고문했던 일제 특고형사가 아니라 반공정신으로 공산당을 때려잡는 대한민국의 경찰관이라는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반민특위 해체와 정부요인 암살 음모를 꾸몄다가 실패하자 특위활동에 앞장선 젊은 국회의원들을 간첩으로 몰아 구속했다. 이 사건으로 반민특위가 해체되는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국회는 1951년 반민법을 폐지한다. 처벌받은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 정부, 국회, 권력기관, 경제, 문화계에도 친일행위를 한 장본인이 권력을 쥐는 경우는 이제 거의 없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이 민족사적 정통성을 결여한 채 출발한 이유와 과정을 엄정하게 평가하고 철학적으로 소화하는 것뿐이다.


■ 유시민이 말하는 박정희

 ◀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서울시청 앞에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 소장

≫ 1961년 박정희 소장이 3,500여 명의 무장병력을 이끌고 헌법적 권한과 기능을 폭력으로 정지시키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혁명공약의 핵심은 두가지였다. 국가 자립경제 재건에 총력을 기울여 기아선상에 방황하는 민생고를 해결함으로써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과업을 이루면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는 것이다. '민생고 해결'은 아마도 박정희 소장의 진심이였을 것이지만 '병영복귀' 약속은 의도적인 거짓말이었다.

≫ 혁명과 쿠데타를 구분하는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쿠데타는 혁명과 달리 민중의 동의, 지지와 참여가 없이 폭력으로 국가질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행위이다. 군대를 동원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군사쿠데타다.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운영을 잘해서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고 해도 5.16이 군사쿠데타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 그는 국민의 관심과 지지를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부정선거를 저질렀던 내무부장관 최인규, 정치깡패 이정재, 조폭 두목 신정식, 발포 명령을 내린 대통령 경호실장 곽영주 등을 '혁명재판'에 회부해 사형을 확정한 다음 거리에 끌어내 '조리돌림'을 했다. 북한 인민재판이나 중국 문화대혁명 때 벌어진 것과 비슷한 야만행위였지만, 헌법과 법률의 절차를 지키느라 재판 절차를 지지부진하게 끌어가던 정부와 비교하면 당시 국민의 눈높이에서는 한결 속 시원한 응징이었다.

≫ 폭력으로 권력을 탈취했지만 폭력으로만 통치하지는 않았다. 고속도로와 비행장을 비롯한 사회간접자본을 건설, 전국에 상하수도와 전기를 보급했고 기생충과 전염병을 퇴치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결코 고결한 인간은 아니었으나 독재자로서는 크게 성공한 것이다.

1975년 5.13일 박정희 대통령은 유언비어 날조 유포, 헌법에 대한 부정,반대,왜곡,비방과 헌법개정 청원 선전/선동 등을 모두 처벌대상으로 규정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지 않으면 누구든 범죄가가 될 수 있었다. 1979년 10월까지 구속된 사람은 1,400명이었고 그중 1,000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정부는 대학생들을 대거 제적하고 감옥과 병영으로 보냈으며 대학교수와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언론자유수호투쟁을 벌인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함으로써 정부에 굴복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하는 시민들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대상은 사실 그의 인격과 행위가 아니라 그 시대를 통과하면서 시민들 자신이 쏟았던 열정과 이루었던 성취, 자기자신의 인생일 것이라고 유시민의원은 추측한다


■ 유시민이 말하는 김종필


≫ 박정희 참조들 가운데 가장 중요 인물은 김종필이었다. 1963년 공화당 당의장이 되었으며 2004년까지 9번이나 국회의원을 했다. 박정희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까지 40여 년 동안 정권의 '2인자' 역할을 했다. 1963년 고려대학교에서 강연을 한 데 이어 서울대 문리대에 가서 학생들과 토론회를 했다. 군사쿠데타의 주역이며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사람이 반정부투쟁을 하는 학생 대표들과 공개토론을 한 것을 보면, 그는 낭만적이고 수준 있는 정치인이었던 것 같다. 요즘 보수정당에는 그런 정치인이 보이지 않는다.

≫ 1961~1962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오히라 일본 외상과 협상 끝에 '무상 3억달러, 정부차관 2억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 이상'을 일본이 제공하는 것으로 청구권에 대한 합의를 이루었다. 1963년 9월 25일 중앙정보부는 반공법 위반, 내란음모죄, 내란선동죄를 적용해 서울에 군 병력을 투입했다. 1,000여 명이 체포되고 350명이 뇌란죄와 소요죄로 구속당해 박정희 정부와 2년 넘게 투쟁을 벌였던 청년들은 '63세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학생운동 리더로 명성이 높았던 인물로는 "김중태, 손학규, 이재오, 김덕룡, 현승일, 이명박, 정대칠, 이부영, 서청원, 박관용, 하순봉, 김경재" 등이다. 그 때 거리시위에 참여했던 20대 청년들이 70대 고령층이 되어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청옹성처럼 지키고 있다.

≫ 1979년 10월 26일 서울 궁정동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을 쐈다. 김재규 부장의 군법회의 진술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사태(시민시위)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했으니 총살됐지 내가 발포 명령을 하면 누가 날 총살하겠느냐" 라는 말에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 300만명이나 죽었는데 우리가 100~200만 죽는다고 뭐가 문제냐"며 맞장구 쳤다. 김종필은 이것은 민주혁명이며 5.16이 정당하다면 이것도 정당하다고 주장했지만 1980년 5월 24일 교수대에 올랐다.


■ 유시민이 말하는 한국 경제


≫ 국민경제를 비행기라고 생각하자. 4.19와 5.16이 연이어 일어난 1960년대 초 한국경제는 시동을 걸지 못한 비행기였다. 연료도 활주로도 없다. 1972년 무렵, 비행기는 가속도를 붙이면서 활주로를 달렸다. 10.26 사건이 난 1979년에는 바퀴가 땅을 차고 오른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가파른 상승은 1997년 갑자기 끝이 났다. IMF 경제위기였다. 1999년 반등한 한국 경제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불안정하지만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였다. 2008~2009년의 하락은 부동산대출 전문 금융회사들의 파산으로 시작된 미국발 국제금융위기와 환율관리 실패때문이었다. 현재 고도를 되찾았지만 예전과 같은 상승세는 회복하지 못했다.

≫ 경제성장만큼은 독재, 권위주의, 보수정권이 민주, 자유주의, 진보정권보다 더 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위 그림은 이것이 실증적 근거가 없는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한국 경제는 박정희 정권 때 이륙했다. 그런데 1인당 국민소득의 상승폭은 민주화 이후 10여 년 동안이 그 이전보다 더 컸다. 1979~1980 / 1997년 외환위기, 2008~2009년의 금융위기는 모두 보수정권이 일으켰다. 결국 보수와 진보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잘했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는 것이다.

≫ 국가가 주도하는 계획경제가 러시아공산당의 작품인 것은 박정희대통령에겐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유시민의원은 인간 박정희가 아무 '주의자'도 아니었다고 본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반공주의, 군국주의, 자유주의 그 어떤 이념도 그를 사로잡지 못했다. 박정희는 이승만 박사와 달리 자유주의 이념에 갇히지 않았다. 박정희 시대 한국 경제는 자본주의 선진국과 제국주의의 일본,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을 반씩 닮은 체제였다. 사유재산을 인정하면서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를 결합한 혼합형 경제체제였다. 오늘날 중국의 경제체제도 그와 비슷하다. 중국관료들이 한국 경제 발전과정을 연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담당자들이 '경제개발 7개년계획'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계획 경제는 공산당이 하는 짓이라고 생각한 탓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념적 편견에 사로잡혀 경제발전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역할을 내팽개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저지른 잘못 중, 가장 어리석다고 할 수 있다. 대중의 물질적 욕망을 외면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 유시민이 말하는 한국 경제의 발전

≫ 전통적 경제이론에 따르면 생산의 필수 요소는 자본과 노동력이다. 영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선진국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이 과제를 해결했다. 첫째는 봉건적 특권을 자본화하는 것이다. 농민들이 가지고 있떤 경작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해 토지의 특권을 소유권으로 전환했다. 양모 값이 오르자 농민들을 영지에서 추방했다. 쫓겨난 농민들은 도시로 이주해 노동자가 되었다. 둘째는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수탈이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등 산업국이 군사력으로 정복해 부와 노동력, 자원을 약탈하여 자본을 축적했다.

≫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실정에서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을 채택했다. 우리는 자본화할 특권이 존재하지 않았고 다른 나라를 수탈할 수도 없으며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동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자본을 해외에서 차입하고 기업으로 하여금 폭리를 취하여 자본의 축적을 이룬 것이다. 박정희 정권 때 일재의 착취와 수탈, 학살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3억 달러라는 헐값에 넘겨주었다. 정부는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하는 '기생관광'을 공공연하게 허용했다.

 한국 경제는 시장경제체제가 아니었다. 대한민국에는 자본시장과 금융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외국이나 한국은행에서 돈을 빌려 만든 투자재원을 정부가 기업에 직접 나누어주었다. 정부의 실체는 박정희 대통령과 측근 참모였다. 기업은 정부에 줄을 대지 못하면 자금을 받을 수 없었다. 특혜가 있는 곳에는 부패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재벌체제가 탄생했다. 현대그룹 정주영, 선경그룹 최종현, 삼성그룹 이병철은 그런 일에 빼어난 능력을 발휘한 사람들이었다. 재벌 총수들은 대통령과 권력실세들에게 통치자금을 넉넉하게 바쳤다.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IMF의 표준 처방전은 심한 부작용을 야기했다. 민간가계의 소비지출과 기업의 투자지출이 급감해 경기가 곤두박질한 상황에서 정부마저 재정지출을 축소하자 경기는 더 악화되었다. 기업의 차입경영 거품을 뺀다며 이자율을 사채금리 수준으로 올리는 바람에 일시적 유동성 부족에 빠진 기업들이 쓰러졌다. 주식가격이 바닥인 상황에서 강제한 공기업 민영화는 심대한 국가자산 손실을 낳았다.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이름 아래 기업이 노동자를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게 허용하는 정리해고제를 도입했고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연봉제와 성과급 제도를 확산시켰다. 노동조합은 약화되었고 실질임금이 하락했으며 고용불안은 높아졌다.


■ 유시민이 말하는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립

◀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

≫ 김영삼, 이철승과 3파전을 벌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역전승을 거둔 김대중 후보는 미,일,중,소 4대국의 한반도 평화보장론, 3단계 통일론, 자립경제와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대중경제론으로 의제를 선점했으며 향토예비군과 학생 군사교육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정책선거를 보여주었다. 김대중 후보는 "이번에도 정권교체를 못하면 박정희씨의 영구집권 총통시대가 오는 것" 이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김대중 후보의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 당시 김대중 후보는 90만 표 차이로 졌다. 공무원을 동원한 관권선거와 금품 살포, 군 부재자 부정투표, 야당 참관인 매수와 부정 투개표 등 만만치 않은 부정선거를 고려하면 사실상 김대중 후보가 이긴 선거라고 할 수도 있었다. 선거에서 이긴 박정희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했으며 헌법 효력을 정지시키고 비상국무회의가 국회 기능을 대신하게 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반쪽 민주주의에서 완전한 독재국가로 전락했다.

≫ 1973년 8월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졌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이 매우 성가신 인물이었다.


■ 유시민이 말하는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 위의 위인들에 대한 내용 정리는 필자는 다른 책에서 정리할 예정이다. 

 나의 한국현대사에서는 양김(김영삼,김대중) 그리고 전두환과 노태우 대통령의 정권장악과 독재. 노무현대통령의 스스로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1.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 약칭 반민특위(反民特委)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본제국과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악질적으로 반민족적 행위를 한 자를 조사하기 위하여 제헌국회에서 설치한 특별위원회이다. 제헌국회에서는 1948년 9월 7일 국권강탈에 적극 협력한 자, 일제치하의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박해한 자 등을 처벌하는 목적으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켰다. 반민특위는 그 산하에 배치되어 있는 특별경찰대를 활용, 일제시대의 악질기업가였던 박흥식, 일제를 옹호하여 조국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던 최남선·이광수 등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는 등 민족정기를 흐리게 했던 많은 친일매국분자들을 색출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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