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한마디

≫ 이 글만 읽어본다면 미국은 나라의 경제를 위해서 전쟁 도발하는 나라로만 보인다.

과연 진실일까, 몇 가지 정론이 보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책을 읽고 그것이 100% 진실인양 맹신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지식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근래엔 주한미군에 대해서 100% 돈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하는 트럼프의 주장을 보면 확실히 미국은 한국의 편보다는 경제적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에서 존재하는 역사, 추측, 분석이 나의 생각을 한쪽으로 편향하도록 만들었으나, 미국 군수산업에 대한 나의 흥미 또한 자극시켰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알면 앞으로의 미국이 보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목차

1. 아이젠하워, 퇴임식에서 군산 복합체의 부당한 압력을 경고하다

2. 군산 복합체의 원조, 존 피어폰트 모건과 듀퐁

3. 미국의 군수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1,2차 세계 대전

4. 미국을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게 한 6.25 전쟁

5. 미국, 베트남전에 참전하다

6. 군산 복합체, 중동 전쟁의 덕을 보다

7. 북한의 활약

8. 미국,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참전하다

9. 미국 군사비 지출, 세계 군사비 지출의 43퍼센트

10. 부시 일가와 관련이 있는 군산 복합체 칼라일 그룹

11. 아버지 부시를 앞세운 칼라일의 한국 공략

12. 한국, 무기 수입 세계 2위

13. 신보수주의 네오콘의 득세


■ 왜 읽었는가?

≫ 제목부터가 흥미로웠다.

≫ 대한민국이 북한과의 대치상황 때문에 미국에 무기 수입을 의존하고 있기 때문

≫ 트럼프의 주한미군 100% 발언. 모든 미국시민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누군가는 그것에 동조할 수 있다는 것에 우리는 방위조약의 친미여야하는가? 경제의 편의 친중이여야 하는가? 미국의 진실과 역사가 궁금하여..

 

■ 내 마음대로 책 내용 3줄 요약

≫ 역사적으로 세계적인 경제 공황이 찾아오면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그것을 세계가 원치 않더라도 어떤 국가는 그것을 원해왔다. 군수산업 국가인 미국처럼

≫ 전쟁이란 돈을 끌어모으는 수단이며, 경제 공황의 탈출구다. 미국은 여러 전쟁에 참전하며 돈을 끌어모았고, 한국과 일본 또한 그 수순을 밟아왔다. (베트남참전/이라크파병 등)

≫ 미국은 이란과 북한의 핵 무기는 악의 축으로, 이스라엘 핵무기는 일절 발설도 못하게 한다. 미국의 이스라엘 사랑은 핵심부에 유대인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바마 내각 또한 마찬가지라는 점이며 현재진행형이다.


■ 군수산업의 배경

◀ JP모건 설립자 존 피어폰트 모건

≫ 1861년 존 피어폰트 모건은 스물 네살, 미국 남북 전쟁 때 북군이 폐기 처분하는 낡은 카빈 소총을 사재기하여 동일한 방법으로 북군/남군에 번갈아 되팔아 뒷돈을 챙겼다. 전쟁이 계속되며 군사 물자의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이를 통한 부를 밑천으로 제이피모건을 설립했다.

≫ 군수 산업은 "모건/록펠러/듀퐁" 3 군수 재벌로 이어진다. 그들은 화약생산 등 군수산업에 관련이 있었고, 세계대전을 통해 막대한 부를 쟁취한다.

≫ 1차 세계 대전은 1914년~1918년까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연합국과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동맹국 양 진영 사이에 벌어진 세계 규모의 전쟁이었다. 1차 대전 초기에 전선은 유럽 지역에 국한되었지만 1917년 4월 6일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선이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 미국의 참전은 독일 패전에 결정적 작용을 했는데, 참전의 표면상 이유는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인한 민간 상성 피해였다. 그러나 미국 참전의 실질적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분석된다. 당시의 중동 석유와 제이피모건 등의 참전종용이다.

≫ 미국은 석유를 놓고 다투는 열강들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바빠졌다. 중동을 유럽 열강들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다. 전쟁으로 형성된 황금 시장을 미국 산업 진흥에 연계시킬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연합국의 물품 구매력은 예상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미국은 전쟁참전 명분을 찾아야했고, 서섹스호 피격 사건을 조작해낸다. 서섹스호가 독일에 피격, 침몰되었다는 것이다. 종전 후 서섹스호는 총알 한 발도 맞은 적이 없었음이 밝혀진다.


■ 2차 세계 대전을 원한 미국

≫ 기업은 항상 평시보다 전시와 같은 비상시에 돈을 더 많이 번다. 미국에 있는 유대인들은 나치 독일의 박해를 받던 유럽의 유대인들을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직간접적 참전을 종용했다.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은 전쟁에 참여할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일본을 상대로 다양한 도발적 조치를 취했다. 루스벨트 정부는 미국에 존재하는 일본 자산을 동결했고, 파나마 운하 사용을 불허하였으며 영국과 공조해 일본에 대한 무제한적 무역 봉쇄 조치도 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을 지속하기 위한 석유 등 전략 자원의 수입이 불가능해졌다.

 1941년 11월 26일 미국은 일본에 통첩을 보낸다. 미국은 무역 봉쇄 해제에 대한 조건으로 중국과 인도차이나로부터 완전 철수와 독일, 이탈리아와의 동맹에서 탈퇴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미국도 잘 알고 있었다.
 1941년 12월 일본은 미국의 함정에 빠지듯 미국 진주만 기습을 감행했다 진주만 폭격은 미국을 2차 대전속으로 넣었다. 일본은 인도네시아와 보르네오에 있는 유전지대[각주:1]를 노렸다. 유전지대 점령은 간단했지만 배후에 미국 태평양 함대가 존재하여 안정적인 석유 수송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일본은 진주만을 폭격하고 유전지대를 얻었지만 미국의 잠수함 공격으로 석유 반입은 실패했다.

 일본의 가미가제 자살 폭격도 항공유 부족에서 나온 고육지책이었다.


■ 미군의 작전사령관실은 모두 군수업자

 2차 대전 당시 지휘관들은 록펠러와 모건 재벌의 고문 변호사 회장, 사장 등 재벌 중역 출신들이 많았다. 작전 본부는 증권 거래소 중역 회의와 다름없었다.


■ 전쟁의 효율성

 미국은 1600만 명의 군인들을 무장시키기 위해 방위 산업과 군비를 확대했다. 1939년에 미국 국민 총생산의 1.5 퍼센트에 불과하던 국방비 지출은 1944년 국민총생산의 45퍼센트까지 상승했다. 덕분에 1939년 17퍼센트의 실업률은 1944년엔 1.2퍼센트로 떨어지는 완전 고용 상태에 이르렀다. 이는 전쟁이 미국의 경기 부양에 얼마나 효율적으로 기여했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 미국을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게 한 6.25 전쟁과 애치슨 라인

 1950년 1월 10일 애치슨 국무장관은 "미국의 방위선은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이 방위선에 대해서는 미국이 책임을 지지만, 그 외의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우선 공격을 받은 국민의 저항으로 대비한 후 다음 국제 연합 헌장 아래 전 문명 세계의 원조에 의존한다"는 애치슨 라인을 발표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한국과 대만은 제외한 것이다. 김일성은 미국이 남한에 대한 방어의지를 포기한 것으로 판단하여 소련에 전쟁서약을 받아내었고 5개월 뒤 6.25 전쟁이 일어난다.

 2차 세계 대전 직후 미국의 군수산업은 판매 시장이 없어 불황에 빠졌었고 미국 경제도 침체를 겪고있었다. 미국의 경기침체를 해결해 준 것이 한국의 6.25 전쟁이었다. 1950~1953년까지 벌어진 6.25 전쟁은 미국경제의 회복과 재건에 크게 기여했고 이후 월스트리트 주가가 급속도로 상승세를 보였다.


■ 한국, 2014년 세계 최대 무기 수입국으로 부상

 우리나라가 2014년 세계 최대 무기 수입국이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뉴욕 타임스는 미국 의회조사국이 발간한 연례 보고서를 인용해 우리나라가 2014년에 78억 달러(9조 1300억원) 규모의 무기 구매 계약을 체결해 세계에서 무기 구입에 가장 많은 돈을 쓴 나라가 됐다고 보도했다. 78억 중 70억 달러 이상이 미국산 무기 구입에 사용됐다고 보도했다.



  1. 유전지대 : 석유를 함유한 하나 또는 몇 개의 지층이 단일 지질구조에 지배되어 존재하는 지역. [본문으로]

■ 안두희의 백범김구 암살

안두희 1917년 ~ 1996년 10.23일

 : 1934년 신의주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대학에 다니면서 기생과 결혼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했다. 해방 후 남조선국방경비대 장교로 임관하여 포병사령부 소속 포병소위가 되었고 1947년에 서북청년회에 가입했다.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 서재에서 백범 김구를 권총으로 암살하였다


■ 당시 백범김구선생의 비서였던 선우진

백범 김구 비서 선우진 1992년 ~ 2009년 5.17일

 ≫ 1949년 6월 26일, 시간 12시 45분경 안두희는 백범김구선생을 살해했다. 당시 김구선생의 비서였던 선우진은 당시 정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 당시 기록

“안두희(安斗熙) 소위가 왔습니다.”

“그래. 들어오라 해.”


그 즉석에서 허락하시므로 그를 선생님 거실로 들여보낸 때가 12시 30분께였다. 아래층으로 내려올 때 응접실에서는 라디오 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곧 지하실로 가서 선생님의 오찬 준비 상황을 알아보았다. 식모는 “네, 만둣국을 다 끓여가요”라고 했다.


주방에서 아줌마의 말을 듣는 순간 윗 층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동이 났다. 1층으로 뛰어올라가 다시 2층 백범 선생 방으로 뛰어오르던 나는 층계에서 한 손에 들었던 권총을 떨어뜨리며 “내가 선생님을 쏘았소” 하는 흉측한 모습의 안두희를 만났다.


허둥지둥 방으로 뛰어올라간 나는 “선생님, 이게 어인 일입니까” 하며 울부짖었으나 유혈이 낭자한 채 책상에 엎드린 선생은 말씀이 없으셨다. 순식간의 참변이었다. 아직 체온이 식지 않은 선생을 다다미방으로 모시고 이웃해 있는 적십자 병원에 의사를 부르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1층으로 다시 내려오니 비서진들에게 얻어맞은 범인 안은 쓰러져 있고 경비실에서 연락을 받은 경찰이 달려와서 그를 데려 가려는데 그 시간을 기다렸다는 듯 정체 모를 군인들이 떼 지어 몰려와 범인이 군인이란 이유로 저격범 안두희를 바람같이 쓰리쿼터로 끌고 갔다. 불과 2,3분 사이의 암살 음모공작 현장이었다.



▲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한 김구



■ 안두희는 왜 백범을 암살하였는가?

≫ 지금까지 백범 암살을 보는 시각은 네 가지다. 

1. 첫째 반민특위 활동에 위협을 느끼는 친일파들이 생존의 돌파구로 친일파 숙청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백범을 암살했다는 설.

2. 둘째 이승만 대통령에게 아부하는 과잉충성분자들이 이 대통령의 뜻과는 관계없이 정적이라고 생각되는 백범을 암살하고 권력을 농단하기 위해 암살했다는 설.

3. 동, 서의 냉전질서가 구축되면서 미국이 한반도에서 배타적 지배권을 구축하고 이승만 체제의 통치 질서의 안정을 위해 남, 북협상을 주창한 백범을 암살했다는 설.

4. 배후에서 리모트 컨트롤 하는 세력과는 별개로 북에서 월남한 극단주의자를 대표한 안두희의 소영웅주의적 망상에서 비롯된 단독범행설이다.


■ 백범 암살 그 이후의 안두희

 ≫ 암살 이후 특무대에 연행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석 달 뒤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1950년 7월 10일 육군 포병소위로 복직하고 9월 15일 중위로 진급하였다. 1951년 2월 15일 잔형 면제를 받고 12월 15일 대위로 진급, 그뒤 1953년 2월 15일에 완전 복권되었으며 1953년 12월 15일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1953년 완전 복권되었으나, 여러 차례 신변의 위협을 당했다.

 ≫ 그 후, 안두희의 동향 친구인 양구 주둔 26사단 사단장 이기건의 배려로 콩나물과 두부 납품을 시작했다 (반공포로로 625때 월남한 26사단장 전속부관 S씨 증언)

 ≫ 1959년 일본에서 벌어진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을 보면 이때에도 국군 소속의 특무 기관원으로 활동하고 있던것으로 보아, 서류상으로는 전역했지만 실제로는 계속 육군 정보요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김구 선생 살해 진상조사위원회가 발족되자 잠적하였다가 1961년 해당 단체의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게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풀려났다. 1965년 김구를 추종하던 곽태영에게 목을 찔린 다음에 가까스로 살아나서 이후 약 10년 동안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은거했다

1992년 2월 28일에 김구 선생의 묘소를 강제(로 끌려가서) 참배하기도 하였다. 이 참배에서 그는 자신의 범행이 어디까지나 우발적인 단독 범행이었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 안두희를 살해한 시민 박기서

 ≫ 범행 시점인 1996년 당시 박기서는 47세로 부천 소신여객 버스 기사였다. 그는 1995년 권중희의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를 읽은 뒤 범행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살인의 동기는 민족정기를 해친 사람이 천수를 누리면 안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길이 40cm 정도의 홍두깨에 매직으로 '정의봉' 이름을 썼고 근처 문방구에서 장난감 총을 구입한 뒤, 사전답사했던 안두희의 집에 침입해 안두희의 부인을 묶고 자리에 누워있던 안두희를 죽을 때까지 정의봉으로 때려 살해했다. 

≫ 오마이뉴스에서는 그를 여러번 인터뷰했는데 본인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죽일 생각이었으나 막상 대면하고 보니 나이들고 힘없는 노인이어서 주저하는 사이에 안두희 눈을 보았는데 매우 날카롭고 기회를 노리는 눈빛이었다고 한다. 순간, 잘못하면 자기가 당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범행에 이르렀다 범행 직후 본인이 다니던 성당에 가 고해성사를 하였다.


■ 범행 직후의 박기서

≫ 당연히 뉴스에도 보도되었고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일단은 물증, 계획성, 고의성, 자백 등이 모두 완벽하게 있는 확신범이자 살인자였으므로 버스회사에서도 해고되었고 구속 상태에서 재판에 회부되었다. 가족들도 평소 그가 그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면서 매우 당혹스러워 했다.

≫ 초기 8년 구형에 5년이 선고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법정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살인죄의 법정 최저형량이 5년임을 감안하면 징역 3년은 엄청난 선처를 한 것이다. 당시 대법원이 형량을 결정한 취지를 '박기서의 살인행위는 주관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지나 우리나라 법질서 전체 관점으로 볼 때에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라고 밝혔는데, 표현상 원칙을 고수한 것처럼 보이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결국 법조계가 박기서의 행위에 면죄부를 준 게 아니냐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98년 3월 1일 3.1절 대사면 때 대상자에 포함되어 3월 13일 수감 1년 5개월만에 출소하였다. 

≫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사회 각계 단체 및 개인들이 박기서의 처단을 응원하는 취지에서 격려금과 편지들을 보냈다. 초등학생인 아들이 다니던 태권도학원 관장이 수업료를 면제해주고, 백범기념사업회에서 그의 아내에게 취업자리를 알선해 주기도 했다. 본인은 익명의 누군가에게 출소할 때까지 매달 백만 원씩을 받았다고도 한다. 출소 후에도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자리, 집 등을 제공받아서 출소 이후에는 택시 기사가 되었다.



■ 박기서에 대한 개인적으로 떠들기

≫ 그는 살인자다. 법적으로 살인은 용서받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정당하다고 했을 때 나는 옹호하고 싶다. 시민 박기서를 살인자라고 한다면 안중근 의사는 살인마인가? 안중근 의사 또한 사람(이토 히로부미)을 살해했다. 당시 20년 이상의 일제강점기를 맞은 나라에서 임시정부와 독립을 위해 싸운 행위를 일반인들은 일본인들은 20살 아래의 학생/시민들은 그들을 테러리스트라고 할 수도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독립을 위해 싸운 위인들 모두 살인자인가? 대한민국은 왜 그분들께 건국훈장을 주었는가? 내 생각엔 시대적 이념이, 현재의 가치관이 그를 살인자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 다시 한번 우리나라가 식민지가 됬을 때, 그 식민지가 20년 이상 지속되었을 때 박기서 시민과 같이 행동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자를 영웅으로 위인으로 칭송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 및 출처 : 나무위키, 노컷뉴스(http://m.nocutnews.co.kr/news/4055084), 미래한국(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525), 우남 이승만과 건국사(http://cafe.daum.net/syngmanrhee/D9pI/1093)



니콜라 테슬라 (1856. 7. 10. ~ 1943. .1 7.)


관련글 : [인물, 아인슈타인] 핵 발전과 우주과학의 창시자, 아인슈타인.


■ 나의 한마디

≫ 테슬라는 내용을 정리하지 않는 천재다. 그가 생각한 기발한 생각 중, 바닷물에서 전기를 뽑아내는 계획과 땅 속 깊은 곳의 열을 끌어내는 지열 발전소에 대한 밑그림이 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기술들을 이미 테슬라는 100년전에 계획하고 실현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가 시대를 잘 타고났다면 그는 우리의 영웅일테고, 스마트폰처럼 작은 것이 아닌 더 큰 시장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느낀 또 다른 것은 에디슨의 독재다. 현재 인물사에서의 에디슨은 계란을 품은 창의성 높은 천재 과학자이지만, 비효율적인 직류시스템과 돈에 집착한 과학독재자다.


■ 목차

1. 될성부른 나무

2. 전기의 시대, 두 사람의 천재

3. 전류 전쟁

4. 무선 통신

5. 번개를 만드는 남자

6. 워든클리프 프로젝트

7. 테슬라 터빈과 하늘을 나는 스토브

8. 잊혀가는 천재

9. 꺼지지 않는 불꽃


- 콜로라도스프링스 연구소의 테슬라


■ 왜 읽었는가?

≫ 현대 전기의 직류를 발명한 에디슨과 교류를 발명한 테슬라와의 전류 전쟁에 관심이 생겨서

≫ 100년을 앞선 천재 과학자 테슬라, 그가 미래에서 온 것이 아니냐는 소문에 관심. 우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외계문명을 받아들인 사람은 아닐까

 

■ 내 마음대로 책 내용 3줄 요약

≫ 니콜라테슬라는 28살, 에디슨은 37살로 테슬라가 꿈을 안을 때 에디슨은 천재 발명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에디슨이 채택한 방식은 '직류' 고 테슬라는 '교류' 다.

≫ 직류(에디슨) VS 교류(테슬라)와의 싸움 중, 승리는 교류가 차지했다.

≫ 테슬라는 기득권층(에디슨, 마르코니, JP모건)의 방해와 투자 비협조에 잊혀진 비운의 천재연구가다.


■ 발명왕 에디슨, 교류는 니콜라 테슬라

≫ 전구와 축음기등을 발명한 발명왕 ‘에디슨’ 하지만 애석하게도 에디슨이 ‘아니다’에디슨의 이름에 가려진 또 한 사람의 천재, 오늘날 전력 시스템의 기초가 된 교류 전기 시스템을 만든 니콜라 테슬라이다.

≫ 한 수업 시간에 선생은 학생들에게 전력이 전달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그람 다이너모’라는 직류 발전기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 기계가 구동되는 동안 정류자[각주:1]와 브러시[각주:2]로 인해 전기 스파크가 발생하는 것을 보고, 테슬라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교류 방식의 기계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테슬라는 전기 스파크가 튀지 않는 모터를 연구하기 위해 이듬해 전과를 했고, 결국 수년 후 이때의 생각을 기초로 교류 전기 장치들을 만들어 낸다.

≫ 직류 방식은 전류 방향과 전압을 변화시킬 수 없었지만, 교류 전류는 전류 방향과 전압을 자유롭게 변화시킬 수 있었다. 직류는 전압이 일정하여 안정적인 전기를 발생시키지만 전압 변환의 문제로 인해 많은 곳에 발전소를 필요로 했다. 교류 시스템은 고전압으로 전기를 발생시킨 다음 변전소를 거쳐 순차적으로 전압을 낮추고, 각 사용처에 변압기를 통해 저전압의 전기를 공급하는 방식이었다. 때문에 직류보다 원거리에 전기를 공급하는 것이 유용했고, 발전소를 많이 건설하지 않아도 되었다.


■ [테슬라VS에디슨] 과학 독재자 에디슨,교류시스템은 불안정해~ 대세는 직류란다

≫ 테슬라는 에디슨과 인사를 하자마자 교류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이미 교류 유도 모터를 두 차례 제작한 끝에 직류보다 교류 시스템이 월등하다는 것을 입증한 후여서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에디슨은 단칼에 그의 말을 잘랐다. “교류 시스템은 불안정하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미국 땅에 직류를 공급하고 있어.” 에디슨으로서는 이 청년이 달가울 리 없었다. 발명과 연구에는 큰 돈이 들었기 때문에, 에디슨은 늘 투자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 “천재는 99퍼센트의 노력과 1퍼센트의 영감으로 만들어진다.”라는 말을 남겼을 만큼 에디슨은 실험에 실험을 거듭하여 하나의 완성품을 만들어내는 유형이었다. 반면 테슬라는 머릿속 사고를 통해 기계를 작동시키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를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그가 한 일이라고는, 그리 좋지 않은 그림 실력으로 기초적인 도안을 그려낸 것뿐이었다. 반면 타고난 스토리텔러였던 에디슨은 자신의 발명품을 홍보하는 데 매우 탁월했는데, 테슬라는 전형적인 공학도로 자신의 연구에만 관심이 있었다.

≫ 에디슨은 교류 시스템이 안전하지 않다고 주장[각주:3]했다. 테슬라와 웨스팅하우스 사의 교류 시스템이 사용된다면 6개월 안에 죽는 사람이 나올 것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는 대대적으로 교류를 비난했다. 다음은 한 기고문이 실린 내용이다. “치명적인 교류 사용에 대한 유일한 변명은 교류 회사들이 구리 전선에 드는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회사들이 이익을 ‘조금 더 챙기려고’ 사람들을 계속 ‘갑작스러운 죽음의 위협’ 속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 1891년 5월 20일, 테슬라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열린 미 전자기협회 모임에서 교류 전류의 안전성을 보여주는 실험을 했다. 테슬라는 먼저 전기 공작실에 고주파 교류 발전기를 설치하고 이를 전기 모터로 가동시켰다. 그리고 관중들 앞에서 스위치를 이용해 교류 발전기를 작동시켜 손에 들고 있던 유리관에 불을 밝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유리관이 백열등만큼 밝게 빛났지만 필라멘트도 없고, 선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즉 필라멘트가 없는 새로운 전구와 무선 장치를 소개한 실험이었다. 테슬라는 무선으로 교류 발전기에서 만들어지는 주파수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마술을 선보였다.

≫ 테슬라는 놋쇠 공 두 개를 진동 변압기 양 끝에 하나씩 갖다 댔다. 그리고 전류가 자신의 몸을 통과해 반대쪽 놋쇠 공으로 흐르게 했다. 두 단자 사이의 전류는 25만 볼트였다. 전류가 표피 효과[각주:4]로 인해 신체 표면에만 머무른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 테슬라관에서 테슬라는 다양한 시연을 선보였다. 20만 볼트가 넘고 1초당 100만 번 진동하는 전기를 손을 통과해 받아 보였으며, 전선이 연결되지 않은 진공구들과 유리관들로 불을 밝혀 보였다. 그 결과 1893년 10월, 나이아가라위원회는 나이아가라 폭포에 건설될 수력 발전소에 사용할 시스템으로 웨스팅하우스 사와 계약을 맺었다. 전기 산업을 두고 펼쳐진 전류 전쟁은 테슬라와 웨스팅하우스의 승리로 끝났다. 바야흐로 교류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 테슬라의 특허권 포기, 그는 전형적인 연구자였다

≫ 웨스팅하우스는 자금난을 겪고 있었는데, 투자자들은 테슬라에게 지급될 천문학적인 특허료가 사업에 위험이 된다면서 추가 투자를 하지 않겠다고 선고했다. 테슬라는 이에 특허료 권리를 모두 포기해 주었다. 하지만 이 일은 결과적으로 고주파 고전압 변압기인 테슬라 코일 외에 각종 교류 장치에 테슬라의 이름이 붙지 않게 된 원인이 되었다. 1905년 테슬라의 교류 모터 특허 기한이 만료되면서 수많은 업체가 교류 모터를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 1898년 테슬라는 무선 어뢰정도 구상했다. 테슬라는 군인을 태우지 않고 적의 눈에 띄지 않게 공격할 수 있는 이 장치야말로 혁신적인 전쟁 무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간 장치들이었던 탓인지, 해군에서는 이 무기들은 연구소의 작품일 뿐 활용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 테슬라가 무선 통신을 제어하기 위해 개발한 회로 중에는 오늘날의 거의 모든 컴퓨터 제어 기술의 바탕이 되는 것들도 많다. 그 중 1903년의 특허 하나는 AND 논리 회로 소자의 기본 원리가 포함된 것으로, 입력단자가 2개 이상의 신호를 받아서 하나의 출력신호를 만들어내는 장치이다. 이 장치는 1956년 트렌지스터 개발[각주:5]보다 앞선 기술이었다.

≫ 테슬라가 한 실험들은 인류의 기술 발전에 중대한 기여를 할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론과 실험들을 증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방식으로 확실히 정리하고 발표하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가 잊힌 천재가 된 데는, 또 수많은 특허권 소송에 시달린 데는 이런 요인도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테슬라는 전형적인 연구자였다. 연구를 즐기고 그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을 즐겼던 사람으로, 그는 자신의 발명품으로 인류를 발전시킬 것을 꿈꿨고, 그 공로를 인정받는 데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웨스팅하우스 사의 교류 특허를 포기한 것도 그렇고, 마르코니가 무선 통신 분야에서 먼저 인정을 받을 때도 그 사실보다 워든클리프 탑 완공에 더 관심을 두었다. 라이트 형제보다 먼저 비행기 고속 엔진을 개발했음에도 처음에는 특허조차 출원하지 않았다.

≫ 테슬라는 연구 끝에 200만 마력을 내는 터빈을 만드는 데까지 성공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기존의 산업 구조가 새로운 터빈으로 교체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이 들기 때문에 투자자들은 쉽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터빈은 오늘날에 와서야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비행기에 프로펠러를 달아 수직으로 이착륙하고, 테슬라 터빈이 설치되어 추진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비행기는 활주로 없이 어디서든 이착륙이 가능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수직 이착륙 개념조차 알지 못했다.

≫ 테슬라가 제안한 레이더 개발 계획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나 이루어졌다. 테슬라가 레이더의 원리를 공표한 지 15년이나 지나서였다. 공식적으로 1935년 영국의 로버트 왓슨와트에 의해 개발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테슬라가 레이더에 대한 개념을 떠올린 것은 30년도 더 이전이다. 테슬라가 레이더 원리를 개발하고 이를 활용한 무기 개발을 촉구했던 것도 이로부터 20여 년 전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레이더는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전 세계적으로 전시의 기초 방어 수단이 되었고, 전쟁 후에는 민간 항공 및 해운업계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수십 년 후에는 우주 탐사의 필수 요소가 된다.

≫ 오늘날 기술들은 테슬라의 연구들을 바탕으로 무선 통신 기술과 자동화 시스템이 개발된 것을 비롯해, 많은 실험 성과들이 테슬라가 제안했던 아이디어들에 자극을 받아 이루어졌다.



  1. 정류자 : 전류의 방향을 바꾸어주는 장치 [본문으로]
  2. 브러시 : 일종의 연결 장치 [본문으로]
  3. 에디슨의 주장을 위한 실험 : 에디슨은, 개나 고양이를 1천 볼트짜리 전압이 흐르는 금속판 위에 밀어 넣어 감전사시키는 실험을 시연하곤 했다. 1890년에는 고전압을 발생시키는 교류의 위험성을 보여주기 위해 사형수를 전기의자에 앉히는 실험까지 시도했다. 하지만 전기기술자의 실수로 인해 전기가 너무 약해 사형수가 한 번에 죽지 않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사형수는 여러 차례 전기 충격을 받아 산 채로 구워졌다. 에디슨은 이것이 자신의 승리라고 주장했다. [본문으로]
  4. 전류 표피 효과 : 도선에 흐르는 전류 주파수가 높아짐에 따라 단면 전체를 균일하게 흐르지 않고 표면 가까이에 모여 흐르는 현상 [본문으로]
  5. 1956년 트랜지스터 개발로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들 : 존 바딘(John Bardeen), 월터 브래튼(Walter Houser Brattain), 윌리엄 쇼클리(William Bradford Shockley Jr.) 허나, 1903년 AND 논리회로 개발한 테슬라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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