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일문학의 세 개의 시기가 있다.
≫ 1 시기 : 강제병합 이전, 2 시기 : 일본의 찬미와 합병의 정당성, 3시기 : 일본 문화정책에 흡수되어 일본 정책에 대한 홍보
≫ 친일파 이광수는 친일문학 3시기인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필요한 황국식민화 대동학공양론을 예찬하며 전쟁을 미화하고, 징병과 징용과 위안부를 찬미하며 선정 선동하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 친일문학이란
≫ 황국시민으로의 이데올로기 강조, 당시 문학예술인과 현재의 문학인이 다르다고 한다. 현 세대로 치면 연예인급. 전쟁에는 파시즘이 필요하다. 전쟁을 말이나 글로 움직이게 하는 힘들 즉 전쟁에 필요한 지식인들, 문화예술인을 통해 전쟁을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만드는 친일파다.
■ 이광수, 그는 누구인가?
≫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문학가로, 조선,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소설가, 작가, 시인, 문학평론가, 페미니즘 운동가, 언론인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왕가의 방계혈족이다. 사상가, 기자, 번역가, 자유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 평안북도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다. 창씨개명 한 일본 이름은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 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와 독립신문 등을 맡기도 했었다. 유교적 봉건 도덕에서 현대 윤리학으로 이행하고자 하였고, 여성 해방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했다. 언론인 활동으로는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번역가로도 활동하여 영미권의 작품을 한글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 일본 유학 중에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고,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망명, 1919년 도쿄(東京)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독립신문을 발행했다. 1921년 귀국 후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의 언론에 칼럼과 장·단편 소설, 시 등을 발표하였다.
≫ 이광수의 가계는 조선 조선 태조의 고조부인 조선 목조의 후손으로써 목조의 장남 안원대군 진(珍)의 22대손이 된다. 조선 건국 후 안원대군(安原大君)으로 추증된다.
≫ 당시 문학 친일로써 대단위 자발성을 가지고 친일행위를 했다. 조선인들의 황국신민화를 선전/선동, 징병이야 말로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며 우리가 아무리 자발성을 가지고 일본인의 DNA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조선인이라는 외부적 형태가 있기 때문에 조선인이라는 차별성이 존재한다 일본인에게만 적용되었던 징병제가 조선인에게도 행해짐으로써 드디어 우리가 일본인과 하나가 되더라, 우리가 어엿한 국민으로써 대우받게 되었다며 눈물을 흘리고 전쟁을 미화하였다
■ 이광수의 생애
≫ 1892년 평안북도 청주에서 태어났다.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고, 친형제로는 위로 친형 세 명이 요절하였고, 여동생 두 명이 있었다. 부모를 잃은 뒤 이복형제들과는 연락이 끊겼고, 친 여동생 중 3년 연하인 애경은 만주 영구에 사는 사람과 결혼해서 살다가 1936년에 사망했고, 여동생 애란은 부모를 잃은 뒤 어떤 집의 민며느리로 들어갔다가 결혼 이듬해에 죽었다.
≫ 5세에는 천자문을 깨우치고 소학과 명심보감까지 읽어내려갔으며 외할머니에게 《덜걱전》, 《소대성전》, 《장풍운전》 등을 읽어드릴 정도로 명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가정 형편으로 좋은 학교를 보낼수 없어 8세경에는 동리의 글방에서 《사략》, 《대학》, 《중용》, 《맹자》, 《고문진보》 등을 배웠으며 한시와 부(賦)를 지었다. 그 뒤 한시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신동으로 알려졌다.
≫ 그의 집은 지독하게 가난했다. 어머니가 뽕나무 잎을 도둑질해서 키웠다고도 한다. 가난한 집안 환경과 말수 적고 병약한 그는 혼자 사색을 하거나 책을 읽는 것으로 소일하였다. 열 살에 담배장사를 시작했던 이광수는 평생 고아 콤플렉스에 시달리기도 했다. 더구나 그의 어머니가 삼취부인이라는 점을 들먹이면서 그를 무시하며 괴롭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부모는 이광수가 11세가 되던 해(1902년 8월)에 전염병 콜레라로 별세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이후의 그의 성장 과정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 그는 누이동생 둘과 고아가 되어 외가와 재당숙 할아버지 집을 오가며 자랐다. 그의 집안은 태조 이성계의 방계 후손이었지만 스스로 왕족이라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태조의 직계 후손도 아니라서 왕족으로서의 예우도 받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성리학에 대한 상당한 비판적인 의식을 지니게 된다.
≫ 경성부 근처에서 육체노동과 상점의 종업원 등을 전전하였다. 어려서 폐렴과 결핵을 얻었는데 병원에 가서 고칠 비용도 없고 치료시기를 놓치면서 평생 병약했다. 가난의 설움을 속 깊이 느꼈으며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이광수에 대한 주변의 멸시와 무시, 무심한 어른들의 막말과 욕설은 그에게 심한 상처와 좌절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육체노동과 상점 종업원 등을 전전하던 그를 딱하게 여긴 어느 천도교인이 그를 위로하였고, 그 호의에 깊이 감명받은 그는 천도교에 입교를 결심한다. 이광수는 배편으로 일본에 건너간 뒤 개신교 목사댁에서 지냈다. 일본인 목사의 집에서 하숙하는 동안 일본인 목사는 매일 새벽과 저녁때 '하나님, 대일본제국을 위해 도와주소서'하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이후 그는 하나님과 정의, 도덕이란 존재하는가에 대해 깊이 회의하게 되었다. 또한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고,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제국주의를 하나님이 구제하지 않는가, 과연 정의란 존재하는가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
≫ 1919년 1월 상하이로 가 여운형을 당수로 삼아 조직된 신한청년당 조직에 가담했다. 안창호의 민족운동에 크게 공감해 7월 상해 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회 주임을, 8월에는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을 맡았다. 이광수는 안창호의 사상적 계승자이기도 했다.
■ 이광수의 변절의 계기
≫ 이광수의 사상, 세계관은 작품으로도 투영되었는데 1910년 데뷔 이후 초기에는 기독교적 경건함과 애국 계몽주의적인 경향을 띄었다. 이광수의 초기작품들은 인간의 개성과 자유를 계몽하기 위하여 자유 연애를 고취하고, 성인이 된 자녀의 결혼에 부모가 개입하는 것의 부당함을 주장하였으며, 조혼의 폐습을 거부하였는가 하면, 족보를 없애고 위선적인 문벌 사회와, 유교의 학통과 학풍 등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으로 그는 인륜을 어지럽히고 금수화를 획책하는 인간이라는 비방에 시달려야 했다. 무정에서는 서양의 교육을 불신하는 국내 사람들을 조롱하며 신 교육을 받아야 된다는 점을 지적하였고, 개척자에서는 과학사상에 대한 불신을 버릴 것을 역설하였으며, 흙에서는 농민계몽 사상을 고취하면서 민족주의사상을 계몽하였다. 처음에는 기독교적 시민윤리와 사회 계몽을 역설하였지만 인간의 이중적인 본질에 갈등, 번뇌, 환멸감을 느끼면서 점차 현실지향적으로 변해갔다. 1930년대의 한 작품을 발표할 때 "동시대 최선의 세계관을 선택하고 동시대와 인물의 중심계급을 전형화하였다."고 하기도 하였는데, 1930년대에 갈 수록 퇴폐적인 문학이나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지는 극단적 문학관을 지양하였다.
≫ 그는 처음 사회 계몽과 개혁을 설파하였으나 사람들은 호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낭만주의자나 공상주의자라고 비판하거나, 단지 소설과 역사 소설에만 관심을 갖는 민중들을 보고 점차 실망하게 되었다.
≫ 1920년, 이광수가 기대한 것처럼 조선독립은 쉽사리 실현되지 않아고, 앞으로도 독립의 기회는 찾아올 것 같지가 않았다. 일본은 패전국이 아니라 연합국의 한 나라요, 승전국 측에 속해 있었으며, 국력도 나날이 강해지고 국제적 지위도 날로 높아져갔다.[24] 그러한 일본으로부터 조선이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거의 희망이 없는 일로 보였다. 이광수는 조선 사회에 만연한 요령과 술수, 위선, 속임수 등에 좌절, 절망하였다. 요령과 술수, 속임수를 걷어내지 않고는 독립을 할 수가 없으며, 독립한다손 치더라도 그러한 독립은 오래 갈 수 없다며 절규했다.
≫ 같은해 1920년, 그의 생활이 어려워진 것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정형편도 점차 어려워졌다. 1920년 말 재정난으로 사료편찬위원회가 해산되고 독립신문도 속간이 어렵게 되었다. 이광수는 임정으로부터 제네바 주재 대표로 선임되었으나 여비 사정으로 떠나지 못했다. 건강이 악화되어 안창호의 적극 주선으로 병원에 입원한 일도 있었다. 이 무렵부터 이광수는 점점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희망 없는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인지 어떤지에 관해 그는 점차 깊은 회의에 빠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부의 파벌 다툼과 독립운동 단체와 파벌 간의 이권다툼 등도 점차 그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감과 환멸감을 강화시켰다.
≫ 이광수는 상하이에서 궁핍한 생활을 계속 지내왔는데, 2년 뒤인 1921년 3월 이광수는 도저히 상하이 생활을 못하겠다고 선언하고는 귀국길에 오른다. 폐병의 악화와, 국민대표자대회 등 임정 요인과 독립운동가들간의 파벌다툼과 의욕 상실 등이 원인이었다. 1921년 2월 이광수가 안창호에게 귀국할 뜻을 보이자 안창호는 적극 만류하였다. 그러나 이광수는 그의 만류를 듣지 않고 귀국한다. 1
≫ 1921년 4월말 단신으로 상하이항을 떠나 배편으로 개성으로 귀국, 열차를 타고 가던 중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검문검속을 하던 일본인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나 혐의가 없어 곧 풀려났다. 그가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나자 이때부터 시중에는 그가 변절자라는 의혹이 나타나게 되었다. 귀국 직후 일제나 총독부의 식민 통치에 별반 저항없이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에 그는 환멸감을 느끼게 되었다.
■ 이광수의 귀국 문필활동, 변하기 시작한 이광수
(1922년 5월호, 개벽에 실린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 1922년 5월에 도산 안창호의 사상에 감화받은 그는 민족개조론에서 일찍이 나태하고 게으르며 무기력한 이 민족의 성격을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으르고 무기력하며, 나약하며 공짜를 바라며, 허황되다, 요령과 술수에 능하다, 그리고 속임수와 눈가리기에 능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러한 습성으로는 서로간의 신뢰도 어렵지만,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는 것은 어렵다고 하였다. 일부 국민들의 의지만으로 독립이 달성되는 것은 아니며,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지 않고는 어느 나라도 조선의 독립을 도와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 우리 민족이 추구해야 할 방도는 일제에 대항하는 독립투쟁이 아니고 독립을 쟁취하고 유지할 만한 실력을 먼저 기르는 민족개조운동, 자치운동론'이라고 주장했다. 〈민족개조론〉의 타협적인 내용은 곧 민족진영 인사들의 감정을 자극, 논란을 일으키면서 문필권에서 소외당하였다. 그러나 이광수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그의 〈민족개조론〉은 실력 양성론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식민지통치를 인정하는 범위내에서 자치를 얻자는 자치운동의 이론적인 뒷받침이 되었다.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을 발표했을 때 이광수의 집에 칼을 든 청년들이 난입했으며 기물들이 파괴되었고, 이광수를 강사로 초빙했던 사람까지 습격당했다.
≫ 그는 조선 사회는 요령과 기만, 허위가 판치는 사회이며, 이런 사회, 이런 시민 의식으로는 백년이 지나도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견해에는 공감 보다는 감정적인 반론과 공격이 계속되었다.
≫ 1932년 1월의 이봉창의 투탄 사건을 애석히 실패했다 하고, 그해 4월의 윤봉길의 투탄 사건을 쾌거라고 주장했다가 헌병의 귀에 들어가 총독부 경무국으로 소환당했다. 6월 안창호가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인천항에 도착하자, 자동차로 인천항에 가서 안창호의 호송 차량을 경성까지 따라갔다.안창호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자 크게 낙심, 서대문형무소에 가서 안창호를 자주 면회하였다. 안창호의 재판비용과 석방, 구명운동에 나서는 한편 윤치호, 김성수 등을 찾아가 안창호의 출옥을 도와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는 안창호가 심장과 간장 등이 좋지 않음을 들어 병보석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고, 안창호는 징역 4년의 언도를 받게 되었다.
■ 이광수의 변절 그리고 친일행위
≫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흥사단 사건)으로 안창호와 함께 경성부에서 체포,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조직원을 불라는 고문을 당했지만 그는 조직원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건강했던 그는 독방에 수감되었고, 안창호와 함께 병 보석으로 출감할 때까지 형무소에서 6개월간 수감, 1938년 초 6개월 만에 병으로 보석되었다.
≫ 1938년 3월 정신적 스승인 안창호가 사망하자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졌으며, 이후 조선신궁을 참배하는 등 본격적인 친일행위의 길로 들어섰다. 2
≫ 1939년 친일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에 취임하여 <내선일체와 조선문학>을 쓰는 등 3조선문학을 일제의 선전도구로 만드는 데 앞장섰다.
≫ 1940년 창씨개명이 실시되자 가야마 미쓰오(香山光郞)로 이름을 바꾸면서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라며 기염을 토했다.
≫ 1941년 8월 25일 임전대책협의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4, 9월 7일에는 임전대책협의회가 주관한 채권봉공대 종로대에 참가하여 거리에서 '애국채권'을 팔았다. 9월 11일 조선임전보국단 5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10월 18일 조선임전보국단 대구지부 설치를 위한 위원으로 파견되었다. 이광수는 1941년 8월엔 중일전쟁, 9월엔 태평양전쟁을 위해서 힘 썼다.
≫ 1942년 2월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저축강조 전진대강연회 연사로 활약했다. 6월 10일엔 조선문인협회 주최로 부민관에서 열린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에 참석했다.
≫ 1943년 징병제 실시가 공표되자 <지원병장행가> <징병제의 감격과 용의> 등을 기고하여 조선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 1943년 2월 25일부터 8월 3일까지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국민개병가' 현상모집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 1943년 11월부터 1944년 1월까지 조선문인보국회가 주관한 “결전소설과 희곡 현상모집”에서 심사위원을 맡았다. 11월 4일부터 7일까지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했다.
≫ 1943년 11월 8일부터 14일경까지 작가 최남선, 기업인 김연수, 친일파 정치인 이성근(李聖根) 등과 함께 부산항을 출발, 일본에서 학생들에게 전쟁 지원병을 권유하는 '선배격려대원'으로 연설했다.
≫ 1943년 11월 24일 일본 도쿄 메이지 대학에서 조선인 전문·대학생들에게 학병에 지원하라는 강연을 했다.
≫ 1945년 1월 4일, <모든 것을 바치리>를 낭독했다. 그 내용을 발췌한다.
자, 조선의 동포들아 우리들이 있음으로써 이 큰 싸움을 이기게 하자 우리들이 있음으로써 대아세아 건설을 완수시키자 이럼으로써 비로소 큰 은혜에 보답하여 받듦이 되리라 아아 조선의 동포들아 우리 모든 물건을 바치자 우리 모든 땀을 바치자 우리 모든 피를 바치자 동포야 우리들, 무엇을 아끼랴 내 생명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지 말지어다 내 생명 그것조차 바쳐 올리자 우리 임금님께, 임금님께 |
■ 이광수의 반민특위부터 사망까지
(이광수 반민특위 수형 시절 1949년 2월 초)
≫ 1949년 1월부터 이광수는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게 되었고[37] 반민특위의 2차 검거(문화계)가 시작된 첫날인 1949년 2월 7일에 전격 구속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수감되었다.
≫ 이광수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한 경위와 친일의 역사철학적 맥락을 전면적으로 밝힌 《나의 고백》(춘추사)을 간행했다. 이 책에서 민족의식이 싹트던 때부터 일제 말기까지 자기의 행위를 '민족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서술한 후, 일제 말기의 친일 행위 역시 "애국자로서의 명예를 희생하더라도 민족보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고 강변했다.
≫ 자신이 태평양 전쟁 무렵 협력을 주장한 것에 대해 이광수는 "일제에 협력하면서 참정권과 평등권을 얻어 민족을 보존하면 독립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조선 사람들은 황국신민의 대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창씨개명 안한 사람, 신사참배 안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우리 국민은 문맹자도 많고, 경제자립도 어려워 일본과 싸워 이길 힘이 없습니다.",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 내가 걸은 길이 정경대로(正經大路)는 아니오마는 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오."라고 변명하기도 하였다
≫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사흘 전인 6월 22일, 자택에서 고혈압과 폐렴으로 쓰러졌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게 7월 5일에 효자동 집이 차압당하고, 6일에 내무서로 연행되었다. 7월 12일, 이광수는 김규식, 김동원, 안재홍, 방응모, 정인보 등과 함께 납북되었다. 평양에서 강계로 이동되던 도중 지병인 폐결핵에 동상까지 겹쳐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친구 홍명희가 김일성의 허락을 얻어 강계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자신의 숙소로 데려갔다가 인민군 병원으로, 다시 강계군 만포면 고개동의 큰 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이광수는 1950년 10월 25일 지병인 폐결핵의 악화로 승용차 안에서 향년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출처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키워드 : 친일, 친일파, 이광수, 안창호, 한국전쟁, 한국, 역사, 사회, 반민특위, 반민족, 특별행위, 일본, 사기극, 문학, 민족, 개조, 변절, 변절자
- 만류 : 붙들고 못 하게 말림. [본문으로]
- 조선신궁 : 조선신궁(朝鮮神宮)은 일제 강점기에 경성부의 남산에 세워졌던 신토의 신사이다. [본문으로]
- 내선일체 : 일본이 세계대전 중, 해외식민지를 외지라고 불러 일본 본토를 내지라고 하고, 선이란 조선을 가리키는 말로, 일본과 조선이 일체라는 뜻이다. [본문으로]
- 임전대책협의회 : 1941년 8월 중일 전쟁에 대한 협조를 위해 자발적으로 황국신민화 운동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논의, 실천 활동을 위한 상설 조직 [본문으로]
- 조선임전보국단 :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1년 9월에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해 여러 단체들이 통합되어 조직된 연합 단체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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