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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한마디
≫ 아인슈타인, 그는 암기식, 주입식 교육을 싫어했다. 아인슈타인에 대한 책은 창의적 교육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예가 아닐까 싶다. 그의 이러한 창의적 재능은 스위스 교육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한국도 함께 본 받았으면 좋겠다. 암기식/주입식 교육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단기적인 효과가 클 뿐 나이가 들어서는 다시 외워야한다는 점일 것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를 회상해보면, 어릴 때 주입식/암기식 교육에 지쳐 공부를 안 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릴 때 그렇게 싫어했던 사회와 역사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 그 때의 교육이 시험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고, 내가 나이가 먹어서도 수학과 영어 정도가 필요할 뿐 사회에서는 필요없다는 어린 지식을 바탕으로 공부했던 듯 싶다. 그 이후로 나이가 점차 들면서 실제 사회에 나와 사회와 정치, 역사에 관련 없는 일을 하고 있지만서도 이렇게 블로그로 포스팅하고 그에 대한 책을 읽고 문학을 감상하는 내 자신을 돌이켜보면, 어릴 때 좀 더 재밌게 공부했다면 나라는 사람이 좀 더 바뀌었을까 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 목차
1. 지진아 혹은 천재
2.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우등생이 될 자질이 없다.
3. 특허국
4. 기적의 해
5. 빛은 휘어진다
6. 망명
7. 제2차 세계대전
■ 왜 읽었는가?
≫ 위대한 과학자로 알려진 아인슈타인, 하지만 정작 스스로 알고 있는 부분이 없기에
≫ 핵 개발 및 원자폭탄을 만든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자. 인물에 대한 지식 습득.
≫ 1, 2차 세계대전에 대한 필자의 관심으로 인해
■ 내 마음대로 책 내용 3줄 요약
≫ 아인슈타인은 철학자가 되고 싶었했고, 어린 나이부터 똑똑했지만 주입식 암기식 공부를 싫어했고 관심있는 분야만 공부했다.
≫ 아인슈타인은 혼자서 만들어진 사람이 아니였다. 처음부터 환경이 좋진 않았지만 그의 환경은 토론할 수 있는,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지인이 함께였다.
≫ 1905년 아인슈타인에 의해 원자와 분자의 존재가 밝혀지고, 광전기를 발견하여 레이저와 TV의 기초가 되며 상대성 이론을 통해 핵 분열 기술이 개발된다.
■ 아인슈타인의 생애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879년 3월 14일, 독일 남부의 소도시 울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헤르만 아인슈타인과 어머니 파울리네 코흐는 유대인이었지만, 두세 세대를 거치는 동안 독일에 동화되어 유대계적 문화나 관습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 헤르만은 수학에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이었고, 당시 독일의 반유대주의적 정서로 인해 대학 입학 허가를 받지 못하여 상공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유년 시절 학교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놀림을 받았는데, 그때 처음 자신이 이질적 존재임을 느꼈다고 한다. 이런 일에 외톨이적 기질이 더해져 아인슈타인은 평생 이방인으로 살아간다.
≫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 매우 조용한 아이였다. 시끌벅적한 사촌들 틈에서 늘 조용한 자리를 찾아가 혼자 노는 외톨이였다. 또한 두 살이 지나서야 간신히 말을 시작했고, 다섯 살이 되어서야 말을 깨쳤을 만큼 늦된 아이였다. 부모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지진아’로 여겼는데, 하녀들도 마찬가지여서 그를 ‘멍청한 아이’라는 의미의 ‘데페르테(depperte)’라고 부르곤 했다. 어린 아인슈타인은 크게 주눅이 들어서 무슨 말인가를 하기 전에 꼭 여러 번 모든 할 말을 연습하고 입 밖에 내곤 했다. 훗날 위대한 과학자가 된 이후에도 그는 입 속으로 여러 번 말을 반복해보고 말하거나, 중요하거나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는 반드시 두세 번씩 반복해 말했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쉽게 성을 내고 잘 토라지곤 했는데, 화가 날 때면 얼굴이 하얗게 질려 손에 잡히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던졌다. 다섯 살 때는 가정교사에게 의자를 던져서 가정교사가 놀라 달아난 적도 있었다
≫ 그가 과학자로서 성장하는 데 첫 번째 토대가 되는 중요한 경험, 처음으로 느낀 자연의 경이로움은 너댓 살 무렵에 찾아왔다. 잔병치레 때문에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아버지가 가지고 놀 ‘특별한 장난감’ 하나를 쥐여 준 것이다. 그 물건은 나침반이었다. 그때까지 아인슈타인은 물건을 만지거나 접촉해야 물건이 움직인다고 믿었는데, 나침반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움직여도 결국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늘 한 방향으로 돌아오는 나침반 바늘은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안겨주었다.
≫ 어린 시절 늦되었다는 일화들 때문인지, 아인슈타인에 대해서는 낙제생에서 천재 과학자가 되었다는 신화가 흔하게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여섯 살 때 가톨릭계 학교인 페테르슐레에 입학했다. 학업 성적이 특출하지는 않았지만 과학과 수학만은 매우 우수했다. 성적이 나쁜 과목은 그가 전혀 관심 없는 분야인 데다, 주입식, 암기식 교육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하나하나 문제를 차분히 생각하고, 그에 대해 답을 하기 전에 곱씹는 버릇이 있던 어린 아인슈타인에게 주입식 교육은 곤혹스러웠을 뿐이었다. 반면 수학이나 과학 교과서의 내용을 탐색하고 증명하는 데는 크게 흥미를 느꼈다. 초등교육 시절부터 그는 단순히 교과서적 증명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증명법을 찾으려고 늘 생각했다. 친구들과 놀러 나가지도 않고 온종일 방 안에서 답이 나올 때까지 자신이 만든 증명을 입증하는 데 몰두했다.
≫ 독일 남부 지방에서는 목요일에 가난한 유대인 이웃을 초대하여 저녁을 대접하는 전통이 있었다. 탈무트는 그 전통에 따라 목요일마다 아인슈타인의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과학 책을 가져다주고, 당시로서는 현대적인 책에 수록된 여러 과학적 증명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탈무트가 가져다준 책 중 특히 아인슈타인을 사로잡은 책은 기하학 책이었다. 고작 열두 살의 어린 아인슈타인은 유클리드의 평면기하가 소개된 작은 책자를 밤낮으로 읽고 또 읽으며 성경처럼 소중히 여겼다. 탈무트는 아인슈타인이 수학과 과학 문제들을 하나씩 통달해 나가자, 다음으로는 칸트, 흄, 에른스트 마흐 등의 철학 책들을 가져다주었다. 아인슈타인은 그중에서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좋아했는데, 그의 철학적 사고의 기반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아인슈타인은 학업을 마치기 위해 뮌헨에 혼자 남아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권위적인 교사, 구속받는 생활을 싫어하는 그에게 기숙사 생활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무렵에는 주입식 교육에 완전히 진저리를 내서, 학업에 대한 흥미조차 잃었다. 거기에다 열일곱 살이 되면 군대에 가야 했다. 군대라면 끔찍하게 여겼던 그로서는 한 달 한 달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공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들은 하사관 같고 고등학교 교사들은 하급 장교들 같다.”며 싫어했다. 결국 그는 그해 여름에 의사에게 신경쇠약 직전이라는 진단서를 받아내고 가족이 있는 밀라노로 도망쳤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퇴학당했다고 말했지만, 가족은 그가 스스로 학교를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 곳에도 적을 두지 않고 1년여를 빈둥대며 지냈다. 아버지는 고교 중퇴자인 아들의 미래를 걱정했다. 실용적인 직업을 얻으라고 설득했지만 아인슈타인은 철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 아라우 주립학교에서 청년시절 아인슈타인
■ 아인슈타인의 논문, 뉴턴 논리를 깨다.
≫ 1905년은 과학사에서 ‘기적의 해’라고 일컬어진다. 이 해에 아인슈타인은 과학계를 뒤흔들 세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17세기 중반 이후 과학은 뉴턴의 세계관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19세기 들어 과학자들은 뉴턴의 운동 이론만으로 설명하기 힘든 현상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의 세 논문은 기존 고전 물리학의 토대, 즉 뉴턴의 세계관을 부정하고 새로운 물리학적 토대를 세움으로써 이런 의문점들을 해소했다. 아인슈타인의 이 논문들은 고전 물리학의 시대를 벗어나 현대 물리학의 시대를 여는 토대가 된다.
≫ 첫 번째 논문 <정지 액체 속에 떠 있는 소립자의 운동에 대하여>는 브라운 운동의 원인에 관한 것이다. 브라운 운동이란 물 위에 떠 있는 꽃가루나 공기 속의 연기 티끌 같은 작은 입자들이 끊임없이 진동하고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일컫는다. 지금이야 원자와 분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일반인들도 알고 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원자의 존재는 논란거리였다. 아인슈타인은 액체나 기체 주위에 있는 보이지 않는 분자들에 의해 이런 소립자들이 움직인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또한 입자들의 움직임을 측정하여 분자의 질량과 수를 계산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 논문을 발표하고 몇 달 후, 독일의 실험물리학자 헨리 자이덴토프가 현미경을 통해 원자와 분자의 존재를 증명했다.
≫ 두 번째 논문 <빛의 발생과 변화에 관련된 발견에 도움이 되는 견해에 대하여>는 당대 또 다른 난제인 광전기에 관한 것이다. 뉴턴은 빛이 미립자라는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으며, 이를 통해 빛의 굴절 현상, 광선의 반사 법칙 등을 설명했다. 하지만 뉴턴 역시 이 이론만으로 빛과 관계된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것은 19세기의 과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빛이 파동이냐, 입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과학자들은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빛이 파동의 성질을 지닌 동시에 작은 알갱이, 즉 양자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이 개별 양자(광양자) 이론을 통해 물질이 빛을 흡수했을 때 광전자(光電子)가 생기는 현상, 즉 빛을 비추었을 때 몇몇 고체가 전자를 방출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졌다. 이 이론은 오늘날 TV와 레이저, 태양전지 등 다양한 전기 장치가 개발되는 토대가 된다. 또한 이 논문은 1921년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다.
≫ 세 번째 논문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 역학에 대하여>가 바로 그 유명한 상대성 이론이 담긴 논문이다. 이때의 논문은 상대성 이론의 초안 격으로, 그해 발표된 질량과 에너지에 관한 짧은 논문과 함께 ‘특수 상대성 이론’이라고 불린다. 그 전까지 물리학 세계는 뉴턴의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의 법칙으로 설명되었다. 즉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고 본래적이며, 외부의 어떤 것에도 영향 받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이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을 부정했다. 그는 시간과 물체의 운동은 관찰자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가정했다. 즉, 관측하는 사람이 움직이는 속도에 따라 빛이 전달되는 시간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질량과 에너지에 관한 논문 <물체의 관성은 에너지 함량에 따라 달라지는가>는 3쪽짜리 논문이다. 뉴턴의 세계관에서 에너지와 질량은 서로 무관한 것이었다. 즉, 에너지 보존 법칙과 질량 보존의 법칙은 별개의 것이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질량과 에너지가 등가이며, 서로 교환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물체의 질량이 에너지로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논문에서 특수상대성 이론을 바탕으로 변환인자(C²)를 사용하여 에너지와 질량이라는 서로 다른 단위의 물리량이 등가임을 보여주었다. 즉 에너지의 양은 물체의 질량에 빛의 속도를 곱한 값(이것이 그 유명한 공식 E=MC²다)이라는 것이다. 이 개념은 물질 자체에서 큰 힘을 얻어내는 원자폭탄 개발의 기초가 된다. 26살의 청년이 쓴 논문들, 특히 상대성 이론에 관한 논문들은 이때까지의 세계관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았다. 때문에 이 논문들은 처음에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취리히 공과대학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논문을 반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막스 플랑크 등의 몇몇 저명 물리학자들이 그의 이론을 알아보고 지지했다. 그리고 실험 물리학자들에 의해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점차 입증되기 시작하면서, 몇 년 후 아인슈타인은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과학자가 된다.
■ 특수상대성 이론을 넘어선 일반상대성 이론. 빛은 휘어진다
≫ 1916년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다. 1905년의 상대성 이론은 우주 공간에서의 현상 및 등속운동에 대한 것으로, 제한적인 설명이라 ‘특수’상대성 이론이라고 불렸다. 1916년의 논문은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이라는 이전의 개념을 보강하고 확장시킨 것으로, 시공간과 물질 간의 관계 및 이 둘을 연결하는 중력의 상호작용에 관한 것이다. 블랙홀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독창적인 다우주론을 제기한 물리학자 존 휠러는 상대성 이론에 대해 “물질은 시공간이 어떻게 휠지를 말해주고, 시공간은 물질이 어떻게 움직일지 말해준다.”고 한마디로 요약했다. 일반상대성 이론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중력에 의해 시공간이 휘어진다는 것이다. 즉 물질의 존재가 주변 공간을 변형시켜 중력장을 만든다는 이론으로, 아인슈타인은 태양을 지나는 별빛이 일정한 각도로 휘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때까지는 뉴턴식 설명에 따라 빛이 직선으로만 나아간다고 여겨졌다. 이 논문은 아인슈타인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이 논문을 구상하고 나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중력 이론을 설명할 수학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친구 그로스만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로스만은 자기보다 기하학에 전문적 지식을 갖춘 수학자 리만을 소개해주었다. 리만의 곡률 방정식을 토대로 아인슈타인은 집요할 정도로 상세하게 자신의 이론을 구축했다.
■ 특수상대성 이론을 넘어선 일반상대성 이론. 현대 우주 이론의 시발점
≫ 일반상대성 이론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세계가 전쟁의 포화 속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 전역에서 군국주의적 가치가 솟아올랐고, 과학자들 역시 불타는 애국심으로 전쟁 무기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는 동료 과학자들이 국수주의자가 되어 전쟁에 뛰어드는 상황에 크게 놀라고 실망했다. 독일 내 지식인들은 심지어 독일이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하고, 평범한 시민을 공격한 사실 관계를 부정하고, 독일의 군국주의가 독일 민족 문화를 유지하게 했다는 선언을 하기까지에 이른다. 이 선언은 독일 정치 지도부의 주도 아래 93명의 독일 지식인들이 서명했다고 하여 ‘93 선언문’이라고 불린다. 아인슈타인은 여기에 반대하여, 과학자들은 세계주의자가 되어야 하며 유럽 학자들은 빨리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호소문을 작성했다. 또한 괴테 연맹을 통해 ‘전쟁에 대한 의견’을 발표했다. 그는 애국주의란 “야만적인 증오와 대량 학살”을 정당화하는 도덕적 요소이며, 이런 야만성은 남성들이 지닌 성적 본성에 따른 것이라고 썼다. 그리고 이런 공격성을 통제하기 위해 세계기구를 창설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당대 수많은 유럽 지식인들이 그랬듯 전쟁은 아인슈타인에게 인간성에 대한 회의를 품게 했다.
■ 아인슈타인의 강의 일화
≫ 1908년에야 아인슈타인은 베른 대학의 객원 강사 자리를 얻었으며, 이듬해에는 취리히 공과대학 부교수 자리를 얻었다. 취리히 공과대학의 부교수 자리는 당초 친구인 프리드리히 아들러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논문이 지닌 가치를 알아본 아들러는 자신 대신 그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그럼에도 아인슈타인이 교수가 되는 데는 두 가지 장애물이 있었다. 그 자신도 인정했듯 그가 강의를 썩 잘하는 편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상사인 정교수 클라이너는 그를 교수로 채용하기 전에 베른 대학 강의를 청강했다. 아인슈타인은 강의 내용을 미리 준비하는 유형이 아니었다. 그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대로, 논리적 흐름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기 머릿속 사고에 따라서 강의했다. 여기에다 웅얼거리는 말투까지 더해진 아인슈타인의 강의는 마치 독백 연극 같았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자치고는 수학을 잘하지 못했다. 수학적 설명을 하다가 증명을 잘못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복잡한 문제를 풀다가 잠시 멍하니 다른 이야기를 주절거리면서 생각을 마친 끝에 다시 원래의 문제로 돌아오기도 했다. 학생들은 아인슈타인의 강의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재미있게도, 훗날 그가 명성을 얻게 되자 이런 강의 태도까지 매력적 요소로 탈바꿈했다. 학생들은 아인슈타인의 말을 따라잡기 위해 더욱 열심히 귀를 기울였고, 그전까지 비난 요소가 되었던 수학적 실수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 유대인 혐오로 인한 아인슈타인, 미국으로의 망명
≫ 아인슈타인의 이름은 과학 분야에서 하나의 권위가 되었다. 하지만 1920년대만 해도 이런 명성에 비례하여 상대성 이론이 허무맹랑하고 공허한 이론이라는 반격들도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특히 독일의 경우 아인슈타인을 전적으로 환영하는 것만도 아니었다. 전쟁 패배와 그 이후에 이어진 정치적, 경제적 혼란들로 인해 독일에서는 국수주의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반유대주의가 다시 기승을 부렸고, 아인슈타인은 매우 좋은 표적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전쟁 기간 동안 독일의 군국주의를 비판한 데다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상대성 이론이 적국인 영국에서 먼저 입증되었다는 것 때문에 배타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과학자들 중에서도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유대인 물리학이라면서 수용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반 아인슈타인 운동에 대해 비이성적이라고 하는 과학자들도 물론 존재했다. 1920년 8월 25일에는 베를린 홀에서 상대성이론과 아인슈타인에 대해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가 일어나기도 했다.
≫ 그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베를린의 분위기와 자신을 환영하는 미국의 분위기에 크게 이질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세계주의 및 시오니즘을 더욱 지지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아인슈타인이 대면한 유대인들은 대개 유럽의 중산층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그는 가난한 유대인들을 처음 목격했다. 이 일로 그는 전 세계에 퍼진 가난하고 고통받는 유대인들에 대해 인지하게 되었다.
≫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반유대주의는 아인슈타인의 목숨을 위협할 수준으로 발전한다. 독일에서는 나치당이 급격히 세력을 확장해나갔고, 세계는 2차 세계대전으로 치달았다. 독일 내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민족주의,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1933년에는 아인슈타인이 50세 생일을 기념하여 지었던 카푸스의 여름 별장이 무장 폭도들의 습격을 받았다.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 앞에서는 상대성 이론에 관한 책을 불태워버린 일도 있었다. 나치가 의회 다수당이 되고, 히틀러가 총통으로 등극하면서 상황은 더욱 좋지 않게 흘러갔다. 나치는 아인슈타인의 재산을 압류하고 은행계좌를 폐쇄했으며, 아인슈타인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베를린 아카데미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반정부 선전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그를 제명했다. 아인슈타인이 망명지로 선택한 곳은 그를 받아준 프린스턴 대학원이 있는 곳, 미국이었다. 당시만 해도 과학의 변방이었던 미국으로, 아인슈타인처럼 많은 망명 과학자들이 몰려들었다. 미국 과학계와 정부, 언론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물론 그중에서 언론 노출이 가장 많은 인물은 아인슈타인이었다
■ 제 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핵 전쟁 우려
≫ 1930년 말, 세계는 제 2차 세계대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군국주의와 군대를 극히 싫어했으며,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자였다. 그런 그 역시도 전쟁으로 인한 참상들을 목격하면서 군대의 필요성을 수긍하게 되었다. 그는 전쟁 시에 자국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막강한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무렵, 자신의 이론이 소량의 라듐에서 많은 양의 에너지가 방출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이것은 원자핵에 갇힌 에너지를 인위적으로 방출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겠다는 생각, 즉 원자폭탄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는 당초 화력 발전을 대체할 원자력 발전 시대를 그리면서 이 아이디어를 떠올렸는데, 그러면서도 이것이 원자폭탄이라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또한 원자폭탄이 엄청난 살상 무기를 넘어서서 핵전쟁을 유발할 가능성도 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그는 원자폭탄이 자기 생애 동안 개발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이런 아인슈타인의 태도와 상관없이 세계는 원폭 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다. 1938년 독일이 우라늄 연쇄반응에 성공하면서 원자폭탄 개발 가능성은 유럽 각국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었다. 그럼에도 아인슈타인은 1939년까지 “지금까지의 결과가 원자력 에너지의 실용적인 이용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뉴욕 타임스>에 기고했을 정도로 이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핵에너지 이용과 관련된 연구는 착착 성공을 거두었고, 유럽 각국은 원자폭탄 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다. 영국은 아인슈타인이 구상한 핵에너지 개발안을 실제로 세부사항까지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고 관망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전쟁터가 아닌 미국에서조차 과학자들은 독일이 원자폭탄을 최초로 개발하여 침공할 것을 우려했다 .
≫ 미국 정부는 처음에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다가,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원폭 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다. 미 정부는 영국이 독일의 침공 위협 속에 포기했던 원자폭탄 개발 구상과 관련된 정보를 모두 받아냈다. 그리고 1942년 9월 오펜하이머를 필두로 하여 3천여 명의 과학자들을 규합해 맨해튼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원자폭탄 개발 계획을 비밀리에 착수했다. 그 결과 1945년 8월 두 개의 원자폭탄이 일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종전을 맞았다. 아인슈타인이 경고했던 원자폭탄의 무시무시한 기능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뉴욕 사라낙 호수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비서 헬렌 두카스는 라디오를 통해 이 소식을 듣고 아인슈타인에게 알렸다. 일본은 노벨상 수상 당시 아인슈타인을 매우 따뜻하게 환영함으로써 그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긴 나라였다. 그는 매우 비통해했다. 그는 원자폭탄 제조 계획에 실질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으며, 그 계획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계속 회의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원자폭탄 구상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론에서 탄생한 것이었기에, 그는 큰 책임감을 느꼈다. “그날은 내게도 슬픈 날이었다. 내게도 책임이 있다.” 아인슈타인은 원자폭탄의 위력을 목도하고, 핵전쟁 가능성을 다시 떠올렸다. 그는 핵이 전 세계를 파괴하리라고 여겼다.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전쟁이 어떤 모습이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제4차 세계대전에서 인류는 막대기와 돌을 들고 싸우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 평화주의 아인슈타인 그리고 그 죽음까지..
≫ 1946년 아인슈타인은 원자 위기관리 과학위원회(Emergency committee of Atomic Scientists)의 의장을 맡았다. 이후로도 그는 다양한 반핵 단체에 이름을 올리고 핵무기 생산 및 유포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쳐나갔다. 또한 전후에 독일이 베를린 아카데미와 플랑크 연구소 명예연구원으로 위촉하는 제안을 보냈을 때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독일인이 저지른 범죄는 문명이 시작된 이래 가장 끔찍한 것이며, 후회나 반성할 줄 모르는 독일 사회를 위해 공헌하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1951년 서독 정부가 수여한 평화 훈장도 거절했다. 말년에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로서의 책임을 촉구하는 평화 운동에 헌신하는 것 외에 외부 활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 1950년경부터 아인슈타인은 동맥류를 앓았는데, 의사의 수술 권유에 인공적으로 수명을 연장하고 싶지 않다면서 거절했다. 결국 1955년 4월 18일, 아인슈타인은 동맥류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날까지도 통일장 이론과 관련된 계산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가족과 지인들 몇 사람만 참석한 자리에서 화장되어 델라웨어 강에 뿌려졌다. 그러나 그의 ‘뇌’만은 조각조각 잘라져 오늘날까지 6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프린스턴 병원의 병리학자 토머스 하비가 부검을 하면서 뇌를 꺼내어 따로 보관한 것이다. 그는 20세기 최고의 천재인 아인슈타인의 뇌를 연구하는 것이 과학적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그 생각에 따라 아인슈타인의 뇌는 그 이후 수많은 연구자들에게 나누어졌다. 이 뇌를 통해 천재와 평범한 사람의 뇌의 차이를 밝히는 연구들이 이루어졌지만, 아직까지 그 어느 연구도 명확하게 입증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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