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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한마디

 ≫ 아인슈타인, 그는 암기식, 주입식 교육을 싫어했다. 아인슈타인에 대한 책은 창의적 교육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예가 아닐까 싶다. 그의 이러한 창의적 재능은 스위스 교육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한국도 함께 본 받았으면 좋겠다. 암기식/주입식 교육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단기적인 효과가 클 뿐 나이가 들어서는 다시 외워야한다는 점일 것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를 회상해보면, 어릴 때 주입식/암기식 교육에 지쳐 공부를 안 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릴 때 그렇게 싫어했던 사회와 역사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 그 때의 교육이 시험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고, 내가 나이가 먹어서도 수학과 영어 정도가 필요할 뿐 사회에서는 필요없다는 어린 지식을 바탕으로 공부했던 듯 싶다. 그 이후로 나이가 점차 들면서 실제 사회에 나와 사회와 정치, 역사에 관련 없는 일을 하고 있지만서도 이렇게 블로그로 포스팅하고 그에 대한 책을 읽고 문학을 감상하는 내 자신을 돌이켜보면, 어릴 때 좀 더 재밌게 공부했다면 나라는 사람이 좀 더 바뀌었을까 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 목차

 1. 지진아 혹은 천재

 2.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우등생이 될 자질이 없다.

 3. 특허국

 4. 기적의 해

 5. 빛은 휘어진다

 6. 망명

 7. 제2차 세계대전


■ 왜 읽었는가?

 ≫ 위대한 과학자로 알려진 아인슈타인, 하지만 정작 스스로 알고 있는 부분이 없기에

 ≫ 핵 개발 및 원자폭탄을 만든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자. 인물에 대한 지식 습득.

 ≫ 1, 2차 세계대전에 대한 필자의 관심으로 인해


■ 내 마음대로 책 내용 3줄 요약

 ≫ 아인슈타인은 철학자가 되고 싶었했고, 어린 나이부터 똑똑했지만 주입식 암기식 공부를 싫어했고 관심있는 분야만 공부했다.

 ≫ 아인슈타인은 혼자서 만들어진 사람이 아니였다. 처음부터 환경이 좋진 않았지만 그의 환경은 토론할 수 있는,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지인이 함께였다.

 ≫ 1905년 아인슈타인에 의해 원자와 분자의 존재가 밝혀지고, 광전기를 발견하여 레이저와 TV의 기초가 되며 상대성 이론을 통해 핵 분열 기술이 개발된다.


■ 아인슈타인의 생애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879년 3월 14일, 독일 남부의 소도시 울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헤르만 아인슈타인과 어머니 파울리네 코흐는 유대인이었지만, 두세 세대를 거치는 동안 독일에 동화되어 유대계적 문화나 관습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 헤르만은 수학에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이었고, 당시 독일의 반유대주의적 정서로 인해 대학 입학 허가를 받지 못하여 상공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유년 시절 학교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놀림을 받았는데, 그때 처음 자신이 이질적 존재임을 느꼈다고 한다. 이런 일에 외톨이적 기질이 더해져 아인슈타인은 평생 이방인으로 살아간다. 

 ≫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 매우 조용한 아이였다. 시끌벅적한 사촌들 틈에서 늘 조용한 자리를 찾아가 혼자 노는 외톨이였다. 또한 두 살이 지나서야 간신히 말을 시작했고, 다섯 살이 되어서야 말을 깨쳤을 만큼 늦된 아이였다. 부모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지진아’로 여겼는데, 하녀들도 마찬가지여서 그를 ‘멍청한 아이’라는 의미의 ‘데페르테(depperte)’라고 부르곤 했다. 어린 아인슈타인은 크게 주눅이 들어서 무슨 말인가를 하기 전에 꼭 여러 번 모든 할 말을 연습하고 입 밖에 내곤 했다. 훗날 위대한 과학자가 된 이후에도 그는 입 속으로 여러 번 말을 반복해보고 말하거나, 중요하거나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는 반드시 두세 번씩 반복해 말했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쉽게 성을 내고 잘 토라지곤 했는데, 화가 날 때면 얼굴이 하얗게 질려 손에 잡히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던졌다. 다섯 살 때는 가정교사에게 의자를 던져서 가정교사가 놀라 달아난 적도 있었다

 ≫ 그가 과학자로서 성장하는 데 첫 번째 토대가 되는 중요한 경험, 처음으로 느낀 자연의 경이로움은 너댓 살 무렵에 찾아왔다. 잔병치레 때문에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아버지가 가지고 놀 ‘특별한 장난감’ 하나를 쥐여 준 것이다. 그 물건은 나침반이었다. 그때까지 아인슈타인은 물건을 만지거나 접촉해야 물건이 움직인다고 믿었는데, 나침반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움직여도 결국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늘 한 방향으로 돌아오는 나침반 바늘은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안겨주었다.

 ≫ 어린 시절 늦되었다는 일화들 때문인지, 아인슈타인에 대해서는 낙제생에서 천재 과학자가 되었다는 신화가 흔하게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여섯 살 때 가톨릭계 학교인 페테르슐레에 입학했다. 학업 성적이 특출하지는 않았지만 과학과 수학만은 매우 우수했다. 성적이 나쁜 과목은 그가 전혀 관심 없는 분야인 데다, 주입식, 암기식 교육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하나하나 문제를 차분히 생각하고, 그에 대해 답을 하기 전에 곱씹는 버릇이 있던 어린 아인슈타인에게 주입식 교육은 곤혹스러웠을 뿐이었다. 반면 수학이나 과학 교과서의 내용을 탐색하고 증명하는 데는 크게 흥미를 느꼈다. 초등교육 시절부터 그는 단순히 교과서적 증명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증명법을 찾으려고 늘 생각했다. 친구들과 놀러 나가지도 않고 온종일 방 안에서 답이 나올 때까지 자신이 만든 증명을 입증하는 데 몰두했다.

 ≫ 독일 남부 지방에서는 목요일에 가난한 유대인 이웃을 초대하여 저녁을 대접하는 전통이 있었다. 탈무트는 그 전통에 따라 목요일마다 아인슈타인의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과학 책을 가져다주고, 당시로서는 현대적인 책에 수록된 여러 과학적 증명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탈무트가 가져다준 책 중 특히 아인슈타인을 사로잡은 책은 기하학 책이었다. 고작 열두 살의 어린 아인슈타인은 유클리드의 평면기하가 소개된 작은 책자를 밤낮으로 읽고 또 읽으며 성경처럼 소중히 여겼다. 탈무트는 아인슈타인이 수학과 과학 문제들을 하나씩 통달해 나가자, 다음으로는 칸트, 흄, 에른스트 마흐 등의 철학 책들을 가져다주었다. 아인슈타인은 그중에서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좋아했는데, 그의 철학적 사고의 기반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아인슈타인은 학업을 마치기 위해 뮌헨에 혼자 남아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권위적인 교사, 구속받는 생활을 싫어하는 그에게 기숙사 생활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무렵에는 주입식 교육에 완전히 진저리를 내서, 학업에 대한 흥미조차 잃었다. 거기에다 열일곱 살이 되면 군대에 가야 했다. 군대라면 끔찍하게 여겼던 그로서는 한 달 한 달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공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들은 하사관 같고 고등학교 교사들은 하급 장교들 같다.”며 싫어했다. 결국 그는 그해 여름에 의사에게 신경쇠약 직전이라는 진단서를 받아내고 가족이 있는 밀라노로 도망쳤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퇴학당했다고 말했지만, 가족은 그가 스스로 학교를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 곳에도 적을 두지 않고 1년여를 빈둥대며 지냈다. 아버지는 고교 중퇴자인 아들의 미래를 걱정했다. 실용적인 직업을 얻으라고 설득했지만 아인슈타인은 철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 아라우 주립학교에서 청년시절 아인슈타인

 ≫ 아인슈타인은 아버지와의 타협 끝에 1년간 아라우 주립학교에서 고교 과정을 마쳤다. 스위스 학교의 수업은 독일 학교와 여러 모로 달랐다. 그는 아라우 주립학교의 자유로운 정신, 권위에 기대지 않는 교사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잃어버린 학문에 대한 호기심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느긋한 스위스식 방식을 사랑하게 되었다. 과학자로서 그에게 큰 업적을 달성하게 할 사고실험도 이 시기에 체득했다. 최초의 논문 <자기장에서 에테르의 상태에 관한 연구에 대하여>도 이 무렵에 썼다. 그러나 여전히 관심 없던 화학, 프랑스어, 생물학 등의 성적은 매우 나빴다. 그럼에도 그는 2등으로 아라우 주립학교를 졸업하고, 1896년 10월 취리히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또한 1896년 1월, 독일 국적을 포기했고, 5년간 무국적자로 지낸 후에 스위스 국적을 취득한다. 취리히 공과대학에서 아인슈타인은 수학과 물리학 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했다. 취리히 공과대학은 당시 세계적으로 명망 높은 기술대학이었다. 학교와 교사의 권위에 대항하는 아인슈타인의 성격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나타났다. 그는 정규 교육 과정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수업에도 자주 불참했다. 이론적인 수업을 중심으로 하는 수학은 입학 초기에 거의 포기했다.
 ≫ 아인슈타인이 처음 얻은 자리는 말단 사무직인 기술심사원이었다. 특허국은 오히려 그가 연구하기에 충분한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일단 초봉이 3,500프랑이었는데, 이것은 당시 취리히 공과대학에 조교로 취직했을 때의 연봉보다 많았다. 또한 이 자리는 각종 기계 장치의 특허들을 심사하는 자리였다. 당시 기술 발전의 흐름을 가장 빨리 대면하기에 적합한 자리였던 것이다. 그는 각종 기계장치들을 사고실험을 통해 구동해보면서 사고실험 능력을 발달시켰다. 상사인 할러로부터 ‘지극히 신중한 태도’로 연구자들이 제출한 서류 하나하나를 꼼꼼히, 회의적인 태도로 바라보는 태도를 배우기도 했다. 업무가 과중하지 않아서 정시에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물리학과 자신의 논문에 대해 숙고할 시간도 충분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시절에 자신의 자리에 만족했으며, 후일 이 자리를 “내가 가장 아름다운 아이디어를 깨치게 된 세계적인 수도원”이라고 일컬었다. 특허국 직원이던 베소와의 우정 역시 그의 사고를 풍부하게 해주었다. 아인슈타인은 당시 그가 쓰던 논문에 대해 공학도 출신인 베소와 수많은 토론을 했다. 베소는 아인슈타인의 논리적 오류를 되짚어주기도 하고 다른 관점을 제시해주기도 했다. 그는 훌륭한 과학 토론 상대이기도 했으며, 음악을 좋아하던 아인슈타인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 아인슈타인의 논문, 뉴턴 논리를 깨다.

 ≫ 1905년은 과학사에서 ‘기적의 해’라고 일컬어진다. 이 해에 아인슈타인은 과학계를 뒤흔들 세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17세기 중반 이후 과학은 뉴턴의 세계관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19세기 들어 과학자들은 뉴턴의 운동 이론만으로 설명하기 힘든 현상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의 세 논문은 기존 고전 물리학의 토대, 즉 뉴턴의 세계관을 부정하고 새로운 물리학적 토대를 세움으로써 이런 의문점들을 해소했다. 아인슈타인의 이 논문들은 고전 물리학의 시대를 벗어나 현대 물리학의 시대를 여는 토대가 된다.


 ≫ 첫 번째 논문 <정지 액체 속에 떠 있는 소립자의 운동에 대하여>는 브라운 운동의 원인에 관한 것이다. 브라운 운동이란 물 위에 떠 있는 꽃가루나 공기 속의 연기 티끌 같은 작은 입자들이 끊임없이 진동하고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일컫는다. 지금이야 원자와 분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일반인들도 알고 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원자의 존재는 논란거리였다. 아인슈타인은 액체나 기체 주위에 있는 보이지 않는 분자들에 의해 이런 소립자들이 움직인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또한 입자들의 움직임을 측정하여 분자의 질량과 수를 계산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 논문을 발표하고 몇 달 후, 독일의 실험물리학자 헨리 자이덴토프가 현미경을 통해 원자와 분자의 존재를 증명했다.


 ≫ 두 번째 논문 <빛의 발생과 변화에 관련된 발견에 도움이 되는 견해에 대하여>는 당대 또 다른 난제인 광전기에 관한 것이다. 뉴턴은 빛이 미립자라는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으며, 이를 통해 빛의 굴절 현상, 광선의 반사 법칙 등을 설명했다. 하지만 뉴턴 역시 이 이론만으로 빛과 관계된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것은 19세기의 과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빛이 파동이냐, 입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과학자들은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빛이 파동의 성질을 지닌 동시에 작은 알갱이, 즉 양자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이 개별 양자(광양자) 이론을 통해 물질이 빛을 흡수했을 때 광전자(光電子)가 생기는 현상, 즉 빛을 비추었을 때 몇몇 고체가 전자를 방출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졌다. 이 이론은 오늘날 TV와 레이저, 태양전지 등 다양한 전기 장치가 개발되는 토대가 된다. 또한 이 논문은 1921년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다.


 ≫ 세 번째 논문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 역학에 대하여>가 바로 그 유명한 상대성 이론이 담긴 논문이다. 이때의 논문은 상대성 이론의 초안 격으로, 그해 발표된 질량과 에너지에 관한 짧은 논문과 함께 ‘특수 상대성 이론’이라고 불린다. 그 전까지 물리학 세계는 뉴턴의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의 법칙으로 설명되었다. 즉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고 본래적이며, 외부의 어떤 것에도 영향 받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이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을 부정했다. 그는 시간과 물체의 운동은 관찰자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가정했다. 즉, 관측하는 사람이 움직이는 속도에 따라 빛이 전달되는 시간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질량과 에너지에 관한 논문 <물체의 관성은 에너지 함량에 따라 달라지는가>는 3쪽짜리 논문이다. 뉴턴의 세계관에서 에너지와 질량은 서로 무관한 것이었다. 즉, 에너지 보존 법칙과 질량 보존의 법칙은 별개의 것이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질량과 에너지가 등가이며, 서로 교환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물체의 질량이 에너지로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논문에서 특수상대성 이론을 바탕으로 변환인자(C²)를 사용하여 에너지와 질량이라는 서로 다른 단위의 물리량이 등가임을 보여주었다. 즉 에너지의 양은 물체의 질량에 빛의 속도를 곱한 값(이것이 그 유명한 공식 E=MC²다)이라는 것이다. 이 개념은 물질 자체에서 큰 힘을 얻어내는 원자폭탄 개발의 기초가 된다. 26살의 청년이 쓴 논문들, 특히 상대성 이론에 관한 논문들은 이때까지의 세계관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았다. 때문에 이 논문들은 처음에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취리히 공과대학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논문을 반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막스 플랑크 등의 몇몇 저명 물리학자들이 그의 이론을 알아보고 지지했다. 그리고 실험 물리학자들에 의해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점차 입증되기 시작하면서, 몇 년 후 아인슈타인은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과학자가 된다.

■ 특수상대성 이론을 넘어선 일반상대성 이론. 빛은 휘어진다

 ≫ 1916년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다. 1905년의 상대성 이론은 우주 공간에서의 현상 및 등속운동에 대한 것으로, 제한적인 설명이라 ‘특수’상대성 이론이라고 불렸다. 1916년의 논문은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이라는 이전의 개념을 보강하고 확장시킨 것으로, 시공간과 물질 간의 관계 및 이 둘을 연결하는 중력의 상호작용에 관한 것이다. 블랙홀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독창적인 다우주론을 제기한 물리학자 존 휠러는 상대성 이론에 대해 “물질은 시공간이 어떻게 휠지를 말해주고, 시공간은 물질이 어떻게 움직일지 말해준다.”고 한마디로 요약했다. 일반상대성 이론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중력에 의해 시공간이 휘어진다는 것이다. 즉 물질의 존재가 주변 공간을 변형시켜 중력장을 만든다는 이론으로, 아인슈타인은 태양을 지나는 별빛이 일정한 각도로 휘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때까지는 뉴턴식 설명에 따라 빛이 직선으로만 나아간다고 여겨졌다. 이 논문은 아인슈타인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이 논문을 구상하고 나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중력 이론을 설명할 수학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친구 그로스만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로스만은 자기보다 기하학에 전문적 지식을 갖춘 수학자 리만을 소개해주었다. 리만의 곡률 방정식을 토대로 아인슈타인은 집요할 정도로 상세하게 자신의 이론을 구축했다. 


■ 특수상대성 이론을 넘어선 일반상대성 이론. 현대 우주 이론의 시발점

 ≫ 일반상대성 이론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세계가 전쟁의 포화 속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 전역에서 군국주의적 가치가 솟아올랐고, 과학자들 역시 불타는 애국심으로 전쟁 무기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는 동료 과학자들이 국수주의자가 되어 전쟁에 뛰어드는 상황에 크게 놀라고 실망했다. 독일 내 지식인들은 심지어 독일이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하고, 평범한 시민을 공격한 사실 관계를 부정하고, 독일의 군국주의가 독일 민족 문화를 유지하게 했다는 선언을 하기까지에 이른다. 이 선언은 독일 정치 지도부의 주도 아래 93명의 독일 지식인들이 서명했다고 하여 ‘93 선언문’이라고 불린다. 아인슈타인은 여기에 반대하여, 과학자들은 세계주의자가 되어야 하며 유럽 학자들은 빨리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호소문을 작성했다. 또한 괴테 연맹을 통해 ‘전쟁에 대한 의견’을 발표했다. 그는 애국주의란 “야만적인 증오와 대량 학살”을 정당화하는 도덕적 요소이며, 이런 야만성은 남성들이 지닌 성적 본성에 따른 것이라고 썼다. 그리고 이런 공격성을 통제하기 위해 세계기구를 창설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당대 수많은 유럽 지식인들이 그랬듯 전쟁은 아인슈타인에게 인간성에 대한 회의를 품게 했다.

 ≫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다. 1919년 5월 29일에는 영국의 아서 에딩턴이 개기일식 관찰을 통해 빛이 휘어지는 현상을 입증했다. 일반상대성 이론이 입증된 것이었다. 영국과 독일은 전쟁 중이었지만, 영국 과학자들 및 언론들은 이 일을 “인간 사고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과”로 인정했다. 이런 극적인 상황은 평소 아인슈타인이 주장하던 세계주의와도 부합했다. 물리학자 레오폴트 인펠트는 “서로 싸우던 나라의 과학자들이 협력하다.”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높아졌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과학의 혁명: 새로운 우주 이론. 뉴턴 이론이 뒤집어지다”라는 기사를 내보냈고, <뉴욕 타임스>는 “하늘에서 빛이 휘어지다: 아인슈타인 이론의 승리”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후 일반상대성 이론에 기초하여 현대 우주 이론이 발전하게 된다.
 ≫ 1920년대에 상대성 이론의 혁명성으로 인해 아인슈타인은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아인슈타인은 영국, 미국 등지에서 수많은 초청 강연을 치르면서 인기를 실감했다. 어느 나라에서나 그를 국빈 대우했으며, 그가 저버렸던 독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독일 시민권을 포기했음에도 독일은 그를 자국민으로 여겼고, 베를린 아카데미 활동을 그의 가장 중심적인 활동이 되게 하려고 했다.

■ 아인슈타인의 강의 일화

 ≫ 1908년에야 아인슈타인은 베른 대학의 객원 강사 자리를 얻었으며, 이듬해에는 취리히 공과대학 부교수 자리를 얻었다. 취리히 공과대학의 부교수 자리는 당초 친구인 프리드리히 아들러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논문이 지닌 가치를 알아본 아들러는 자신 대신 그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그럼에도 아인슈타인이 교수가 되는 데는 두 가지 장애물이 있었다. 그 자신도 인정했듯 그가 강의를 썩 잘하는 편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상사인 정교수 클라이너는 그를 교수로 채용하기 전에 베른 대학 강의를 청강했다. 아인슈타인은 강의 내용을 미리 준비하는 유형이 아니었다. 그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대로, 논리적 흐름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기 머릿속 사고에 따라서 강의했다. 여기에다 웅얼거리는 말투까지 더해진 아인슈타인의 강의는 마치 독백 연극 같았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자치고는 수학을 잘하지 못했다. 수학적 설명을 하다가 증명을 잘못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복잡한 문제를 풀다가 잠시 멍하니 다른 이야기를 주절거리면서 생각을 마친 끝에 다시 원래의 문제로 돌아오기도 했다. 학생들은 아인슈타인의 강의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재미있게도, 훗날 그가 명성을 얻게 되자 이런 강의 태도까지 매력적 요소로 탈바꿈했다. 학생들은 아인슈타인의 말을 따라잡기 위해 더욱 열심히 귀를 기울였고, 그전까지 비난 요소가 되었던 수학적 실수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 유대인 혐오로 인한 아인슈타인, 미국으로의 망명

 ≫ 아인슈타인의 이름은 과학 분야에서 하나의 권위가 되었다. 하지만 1920년대만 해도 이런 명성에 비례하여 상대성 이론이 허무맹랑하고 공허한 이론이라는 반격들도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특히 독일의 경우 아인슈타인을 전적으로 환영하는 것만도 아니었다. 전쟁 패배와 그 이후에 이어진 정치적, 경제적 혼란들로 인해 독일에서는 국수주의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반유대주의가 다시 기승을 부렸고, 아인슈타인은 매우 좋은 표적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전쟁 기간 동안 독일의 군국주의를 비판한 데다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상대성 이론이 적국인 영국에서 먼저 입증되었다는 것 때문에 배타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과학자들 중에서도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유대인 물리학이라면서 수용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반 아인슈타인 운동에 대해 비이성적이라고 하는 과학자들도 물론 존재했다. 1920년 8월 25일에는 베를린 홀에서 상대성이론과 아인슈타인에 대해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가 일어나기도 했다.

 ≫ 그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베를린의 분위기와 자신을 환영하는 미국의 분위기에 크게 이질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세계주의 및 시오니즘을 더욱 지지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아인슈타인이 대면한 유대인들은 대개 유럽의 중산층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그는 가난한 유대인들을 처음 목격했다. 이 일로 그는 전 세계에 퍼진 가난하고 고통받는 유대인들에 대해 인지하게 되었다.

 ≫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반유대주의는 아인슈타인의 목숨을 위협할 수준으로 발전한다. 독일에서는 나치당이 급격히 세력을 확장해나갔고, 세계는 2차 세계대전으로 치달았다. 독일 내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민족주의,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1933년에는 아인슈타인이 50세 생일을 기념하여 지었던 카푸스의 여름 별장이 무장 폭도들의 습격을 받았다.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 앞에서는 상대성 이론에 관한 책을 불태워버린 일도 있었다. 나치가 의회 다수당이 되고, 히틀러가 총통으로 등극하면서 상황은 더욱 좋지 않게 흘러갔다. 나치는 아인슈타인의 재산을 압류하고 은행계좌를 폐쇄했으며, 아인슈타인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베를린 아카데미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반정부 선전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그를 제명했다. 아인슈타인이 망명지로 선택한 곳은 그를 받아준 프린스턴 대학원이 있는 곳, 미국이었다. 당시만 해도 과학의 변방이었던 미국으로, 아인슈타인처럼 많은 망명 과학자들이 몰려들었다. 미국 과학계와 정부, 언론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물론 그중에서 언론 노출이 가장 많은 인물은 아인슈타인이었다


■ 제 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핵 전쟁 우려

 ≫ 1930년 말, 세계는 제 2차 세계대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군국주의와 군대를 극히 싫어했으며,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자였다. 그런 그 역시도 전쟁으로 인한 참상들을 목격하면서 군대의 필요성을 수긍하게 되었다. 그는 전쟁 시에 자국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막강한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무렵, 자신의 이론이 소량의 라듐에서 많은 양의 에너지가 방출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이것은 원자핵에 갇힌 에너지를 인위적으로 방출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겠다는 생각, 즉 원자폭탄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는 당초 화력 발전을 대체할 원자력 발전 시대를 그리면서 이 아이디어를 떠올렸는데, 그러면서도 이것이 원자폭탄이라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또한 원자폭탄이 엄청난 살상 무기를 넘어서서 핵전쟁을 유발할 가능성도 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그는 원자폭탄이 자기 생애 동안 개발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이런 아인슈타인의 태도와 상관없이 세계는 원폭 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다. 1938년 독일이 우라늄 연쇄반응에 성공하면서 원자폭탄 개발 가능성은 유럽 각국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었다. 그럼에도 아인슈타인은 1939년까지 “지금까지의 결과가 원자력 에너지의 실용적인 이용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뉴욕 타임스>에 기고했을 정도로 이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핵에너지 이용과 관련된 연구는 착착 성공을 거두었고, 유럽 각국은 원자폭탄 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다. 영국은 아인슈타인이 구상한 핵에너지 개발안을 실제로 세부사항까지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고 관망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전쟁터가 아닌 미국에서조차 과학자들은 독일이 원자폭탄을 최초로 개발하여 침공할 것을 우려했다 .
 ≫ 미국 정부는 처음에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다가,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원폭 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다. 미 정부는 영국이 독일의 침공 위협 속에 포기했던 원자폭탄 개발 구상과 관련된 정보를 모두 받아냈다. 그리고 1942년 9월 오펜하이머를 필두로 하여 3천여 명의 과학자들을 규합해 맨해튼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원자폭탄 개발 계획을 비밀리에 착수했다. 그 결과 1945년 8월 두 개의 원자폭탄이 일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종전을 맞았다. 아인슈타인이 경고했던 원자폭탄의 무시무시한 기능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뉴욕 사라낙 호수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비서 헬렌 두카스는 라디오를 통해 이 소식을 듣고 아인슈타인에게 알렸다. 일본은 노벨상 수상 당시 아인슈타인을 매우 따뜻하게 환영함으로써 그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긴 나라였다. 그는 매우 비통해했다. 그는 원자폭탄 제조 계획에 실질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으며, 그 계획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계속 회의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원자폭탄 구상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론에서 탄생한 것이었기에, 그는 큰 책임감을 느꼈다. “그날은 내게도 슬픈 날이었다. 내게도 책임이 있다.” 아인슈타인은 원자폭탄의 위력을 목도하고, 핵전쟁 가능성을 다시 떠올렸다. 그는 핵이 전 세계를 파괴하리라고 여겼다.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전쟁이 어떤 모습이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제4차 세계대전에서 인류는 막대기와 돌을 들고 싸우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 평화주의 아인슈타인 그리고 그 죽음까지..

 ≫ 1946년 아인슈타인은 원자 위기관리 과학위원회(Emergency committee of Atomic Scientists)의 의장을 맡았다. 이후로도 그는 다양한 반핵 단체에 이름을 올리고 핵무기 생산 및 유포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쳐나갔다. 또한 전후에 독일이 베를린 아카데미와 플랑크 연구소 명예연구원으로 위촉하는 제안을 보냈을 때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독일인이 저지른 범죄는 문명이 시작된 이래 가장 끔찍한 것이며, 후회나 반성할 줄 모르는 독일 사회를 위해 공헌하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1951년 서독 정부가 수여한 평화 훈장도 거절했다. 말년에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로서의 책임을 촉구하는 평화 운동에 헌신하는 것 외에 외부 활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 1950년경부터 아인슈타인은 동맥류를 앓았는데, 의사의 수술 권유에 인공적으로 수명을 연장하고 싶지 않다면서 거절했다. 결국 1955년 4월 18일, 아인슈타인은 동맥류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날까지도 통일장 이론과 관련된 계산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가족과 지인들 몇 사람만 참석한 자리에서 화장되어 델라웨어 강에 뿌려졌다. 그러나 그의 ‘뇌’만은 조각조각 잘라져 오늘날까지 6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프린스턴 병원의 병리학자 토머스 하비가 부검을 하면서 뇌를 꺼내어 따로 보관한 것이다. 그는 20세기 최고의 천재인 아인슈타인의 뇌를 연구하는 것이 과학적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그 생각에 따라 아인슈타인의 뇌는 그 이후 수많은 연구자들에게 나누어졌다. 이 뇌를 통해 천재와 평범한 사람의 뇌의 차이를 밝히는 연구들이 이루어졌지만, 아직까지 그 어느 연구도 명확하게 입증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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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한마디

 ≫ 히틀러는 화가 지망생이였다. 그의 환경이 황제를 꿈꾸는 자리에 이르렀다. 어느 누가 태어날 때부터 점령하고 누군가를 지배하고 싶어하겠는가? 내 생각엔 그것은 환경이 만들어준다고 생각하고 있다. 국가가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가? 편파적인 사회가 만들어지진 않았는가? 반대의 목소리를 내면 그 의견은 매몰당하는가? 국가가 가난한가? 국가가 이기적인 이념을 갖고있지 않은가? 우리도 물론 비슷한 이기주의적인 욕망을 갖고 있다. 아직 그 지식은 얕지만 필리핀전쟁 때의 한국군인들이 했던 짓이라던지, 북한인들 같이 사상이 꽉 막혀있고 사회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시민들은 구제할 방법이 없다며 같은 사람과 시민으로써 보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로 그 이념을 나누는 것 또한 국가적 이기주의라고도 생각된다. 옹호는 하지만 어쩌면 그들이 맞는 말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은 당시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우리 한국도 언뜻 아닌 듯 보이지만 외국인들에 대한 차별대우는 극심하다. 인종과 색상에 극심한 차별적 대우를 한다. 예를 들면 백인은 좋은데 흑인은 싫거나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차별적 대우이다. 극단적인 예지만 이런 사례를 생각한다면 한국 또한 인종주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겉으로 심하게 드러나거나 극단적으로 나아갈 일이 아니기 때문에 방관하는 일도 있다. 아돌프 히틀러라는 책을 읽고 이러한 사회/국가가 개인 한 명, 한 명에게 미치는 영향을 곰곰히 생각해본다. 극단주의 성향 한 사람이 토론도 잘하고 논리적 사고회로도 뛰어나고 출중하며 사회적 이념이 편파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히틀러의 예는 편파적인 정치인이나 엘리트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주는데에도 좋다고 생각한다. 대파를 수용할 줄 알아야 하고 그것의 옳고 그름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참고로 히틀러에 대해 알아가기엔 책의 분량은 매우 짧아 다른 책을 찾아 더 알아볼 예정이다. 독일에서 그가 어떻게 총통이 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있는 책이다.


■ 목차

 1. 화가를 꿈꾸던 소년 히틀러

 2. 1차 세계대전 발발과 참전

 3. 1차 대전 패전과 유대인

 4. 1차 세계대전 패전과 베르사유 조약

 5. 히틀러의 정치 입문

 6. 히틀러의 실패한 쿠데타

 7. 수감 생활과 <나의 투쟁>

 8. 다시 정치에 복귀하다.

 9. 나치의 집권

 10. 구세주 히틀러에 대한 독일의 열망

 11. 2차 세계대전 발발

 12. 두 개의 전선, 히틀러의 패작

 13. 독일 패전과 히틀러의 자결


■ 왜 읽었는가?

 ≫ 2차 세계대전 발발 배경 이전 당시의 독일의 생각과 가치관에 대한 궁금증 (당시 나치 정권의 주장과 독일인들이 지지했던 이유 그리고 유대인을 싫어하는 인종주의는 왜 생겨났는가에 대한 의문)

 ≫ 독일 주변국(영국과 프랑스)이 어떠한 유화정책을 펼쳤고 그 유화정책이 어떻게 세계대전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궁금증, 현대사와 이어본다면 남한이 펼치는 북한에 대한 유화정책이 과거와 비슷한 점이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

 ≫ 2차 세계대전을 만든 히틀러, 과연 히틀러만 없었다면 이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무엇이 히틀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 내 마음대로 책 내용 3줄 요약

 ≫ 그는 7,000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내며 전 세계를 피바다로 만든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 유대인 600여만 명을 학살한 홀로코스트[각주:1]를 저지른 극단적인 인종주의자다.

 ≫ 2차 세계대전 발발엔 주변국들의 유화정책이 있었다. 준비되지 않은 주변국들은 초기 전시상황에서 질 수 밖에 없었지만, 히틀러는 주변국을 넘어 소련 등 다른 나라까지 건드리며 패배하게 된다.


■ 히틀러의 생애

 ≫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던 작은 국경마을 브라우나우암인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알로이스 히틀러는 세관 공무원이였는데 직장을 따라 자주 이사를 다녔고 이사를 자주 다닌 탓에 아돌프 히틀러는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 알로이스는 술을 자주 마셨고 엄격했다고 한다. 히틀러 연구가인 로버트 와이트가 말하길 '알로이스는 아내인 클라라 히틀러에게도 굉장히 거칠게 대했고, 집에서 항상 폭언을 일삼았다'고 한다. 알로이스는 클라라뿐만 아니라 아돌프와 그의 여동생 파울라 히틀러에게도 폭언과 폭력을 행사했다는 주장들이 많다.

 ≫ 알로이스는 아돌프가 15세 때 세상을 떠났고 클라라는 19세 때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클라라가 죽은 뒤 1908년 아돌프는 미술학도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오스티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으로 떠났다. 아돌프는 제국의 수도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충격을 받는다. 빈 거리에는 체코인, 폴란드인, 이탈리아인,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유대인들이 뒤섞여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아돌프는 이 기억을 떠올리며 "인종적인 신성모독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 1차 세계대전 발발

 ≫ 1914년 8월 2일, 아돌프 히틀러가 25살이 되던 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청년들을 징집한다. 빈에 기거하던 히틀러는 징집을 피해 독일의 뮌헨으로 도피했다. 당시 뮌헨은 극우적 국가주의 정서가 강하게 들끓고 있었다.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히틀러는 결국 참전을 결정하고 4년간을 전쟁터에서 보낸다. 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소모적인 전투를 했다. 자기 영역에 참호를 파고 철조망을 친 뒤 기관총 등으로 무장하여 자기 진지만을 지키는 싸움이였다. 맨몸으로 돌격하고 방어사력과 육탄적으로만 참호를 지키는 것이 임무였다. 이런 양상이 4년간 '무한 반복' 됐다. 전사자들의 시신은 쌓였지만 적과 대치하고 있어 제대로 된 처리를 못하였다. 온갖 질병이 퍼졌고 이와 벼룩은 온몸에 득실거렸으며 비라도 쏟아지면 참호는 물 웅덩이가 되었다. 당시 히틀러는 바이에른 제 16보병연대 연락병으로 4년간 복무했다. 연락병은 참호와 참호 사이를 오가며 명령을 전달하는 위험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히틀러는 그 임무를 해냈고, 그 임무로 히틀러는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훗날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을 '잊을 수 없는 가장 숭고한 경험'이라고 회고했다. 그만큼 그 전쟁이 히틀러의 인생을 뒤바꾼 계기가 되었다.


■ 1차 세계대전 패인과 유대인과의 관계

 ≫ 1차 세계대전 패전에 대한 독일 사람들의 생각은 대체로 '억울하게 전쟁에서 졌다'는 것이다. 극우 선동가들은 하나같이 연합국 측과 협상에 나섰던 사람들을 비애국자로 몰아붙였다.

 ≫ 또 하나의 패인은 유대인이라고 여겼다. 당시 독일 신무기 프로젝트에 유대인 과학자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는데 연합군의 중심이었던 영국이 유대인 핵심 세력과 손을 잡고 독일군의 기밀 정보를 빼내 정보망을 교란시켰고 독일의 지하 정보 네트워크 요소요소에도 유대인들 상당수가 가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적국이었던 영국의 외무 장관 발포어가 여왕의 지시를 받고 영국 내 유대인 지도자 중 하나인 금융가 로스차일드를 만나서 중요한 제안을 하나 한다. 만약에 유대인들이 영국을 위해 싸워준다면, 전쟁이 끝난 후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국가를 창설해줄 용의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1917년 11월 2일에 비밀문서로 작성된 ‘발포어 선언’이 그것이다. 그로부터 1주일도 안 돼 독일 정부가 개발하고 있던 비밀 무기 프로젝트 원본이 영국 사령부로 넘어간다. 동시에 독일의 전쟁 네트워크가 군데군데 마비되면서 영국군이 밀고 들어갈 틈이 벌어진다. 전세가 역전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다. 당시 독일군은 유대인에게 증오를 품었다.


▲ 마녀사냥

 ≫ 물론 유대인에 대한 혐오 내지 증오는 독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대인 혐오는 적어도 유럽에서 2,000년 가까이 내려오던 뿌리 깊은 정서였다. 증오와 멸시가 집단적으로 표출된 사건 중에 하나가, 14세기 페스트가 온 유럽을 덮쳤을 때 일어났다. 사람들은 그 탓을 유대인에게 돌려 닥치는 대로 잡아다가 학살했다. 바로 이어진 마녀사냥에서도 유대인 여성이 주요 타깃이었다. 상황은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직전인 19세기 말이 돼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881년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로스 2세의 암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러시아 당국은 유대 극단주의자들의 조직적인 범죄라고 단정 짓고 이듬해 비밀리에 인종분류법인 ‘5월법’을 제정해 유대인 청산에 나섰다. 유대인 성분에 따라 ‘살해’, ‘추방’, ‘동화’ 정책을 펼쳤는데, 이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폴란드, 체코, 헝가리 같은 동유럽으로 이주하게 된다. 1894년에는 프랑스에서 드레퓌스 대위 사건이 벌어진다.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프랑스의 기밀 문건이 하나가 발견됐는데, 그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수사당국이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드레퓌스 대위를 지목한 것이었다. 이때 에밀 졸라와 같은 프랑스 지성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재조사를 요구했고, 덕분에 진범이 잡히고 드레퓌스 대위는 석방이 된다. 하지만 러시아에 이어 프랑스에서도 유대인 혐오사건이 벌어지자 유대인들은 큰 충격에 휩싸인다. 그들은 일종의 자구책으로 1897년 8월 스위스 바젤에서 세계에 흩어진 유대 지도자들이 다 모이는 제1차 시온주의자회의를 개최한다. 이때 유대인 공동체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의 조국을 건설한다는 ‘바젤 계획’을 채택한다. 1차 세계대전에서 수세에 몰리던 영국은 유대인들의 이런 계획을 알아내고 독일 내 유대인들을 회유했던 것이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물리치기 어려운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더 이상 당국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자기 나라’를 가질 수만 있다면 큰 도박에 나설 만도 했다. 그러나 패전국 독일 입장에서는 패전의 핑계로 지목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의 베르사유 조약

 ≫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선언으로 끝났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자 전범국이 되었다. 1914년에 시작돼 1918년에 끝난 이 전쟁에서 930여만 명이 죽고 2,250여만 명이 부상당했다. 1919년 6월 28일 프랑스 파리에서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으로 1차 세계대전은 공식 종결됐다. 이 조약은 연합국으로 참전한 31개국이 독일과 맺은 것이었다. 물론 이 협상에 독일은 초대받지 못했고 결과만 통보 받았다. 이 조약의 핵심은 전범국인 독일을 처벌하고 그 세력을 약화시켜 평화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약은 독일 입장에서는 너무 가혹했다. 전쟁의 모든 책임이 독일에게만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점령지 대부분을 빼앗겼다. 독일인 입장에서는 영토의 13퍼센트와 인구의 10퍼센트가 잘려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중 독일인들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했던 것은 동프로이센을 분할해 18세기에 사라졌던 폴란드를 재건해주고 바다로 가는 통로를 열어준 일이었다. 이 통로는 이후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도화선[각주:2] 역할을 한다

 ≫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의 군인은 10만 명을 넘지 못하게 제한됐고, 탱크와 잠수함 같은 현대식 무기 보유도 금지됐으며, 공군은 창설 자체가 금지됐다. 남아 있던 무기들은 독일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파괴됐다. 독일 라인 강 연변의 라인란트 지역은 연합국 관할로 비무장 지역으로 규정됐다. 거액의 배상금도 책정됐다. 전쟁 피해 복구를 이유로 1,320억 독일 제국 마르크가 책정됐는데, 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에서 빌린 부채를 상환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이 징벌적 배상금이 전후 독일 경제에 직격탄을 날렸음은 물론이다. 이 조약은 평화유지를 목적으로 했으나 강대국 중심으로 치우친 경향이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영토 분할 과정에서 연합국 지도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강하게 반발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은 이 같은 배신감을 바탕으로 자기 정치 세력을 키웠고, 이것이 훗날 베니토 무솔리니를 중심으로 파시즘[각주:3]이 발호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 히틀러의 정치 입문

 ≫ 1차 세계대전 동안 4년간의 복무를 마친 히틀러는 극우주의가 들끓던 뮌헨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 살이었다. 그는 사실 군대에 남아 있고 싶어 했다. 당시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바뀌어 사회민주주의자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대통령으로 집권하고 있었다. 특별한 변수가 없었다면 히틀러는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군인으로 평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으로 무너진 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유럽 전역에서 혁명의 꿈을 뜨겁게 키우고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각주:4](독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정부는 뜨겁게 타오르는 마르크스주의 혁명을 잠재워야 할 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세력이 바로 퇴역 군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극우 어용단체 ‘자유군단’이었다. 정부는 이들의 폭력을 활용해 마르크스주의 혁명운동에 철퇴를 가하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자유군단은 세력을 크게 불릴 수 있었고, 훗날 나치당의 모태가 된다. 히틀러는 자유군단에서 상관들의 눈에 띄어 병사들과 포로들을 정치적으로 재교육하는 임무를 받게 된다." 이 임무를 수행하며 히틀러는 자기가 연설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연설의 핵심은 1919년 6월에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국가적인 수치이고 거기에 동조한 독일 당국은 국가적 배신자라는 비난이었다.


 ≫ 군인으로서 더 이상 전망이 없을 때 히틀러는 당원으로 남아 전업 정치인의 길을 가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의 정치적 데뷔는 뮌헨의 어느 큰 맥주홀이었다. 뮌헨의 극우세력의 중추는 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들이었는데 그들은 주로 큰 맥주홀에서 회합을 가졌고, 히틀러의 정치 데뷔도 그곳에서 이뤄졌다. 1920년 8월 13일 뮌헨의 맥주홀 브루거브라우켈러(Bürgerbräukeller)가 바로 그 무대였다. 히틀러는 거기서 “우리는 왜 반유대주의자인가?”를 제목으로 연설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자유군단이라는 이름의 국가주의 민병대를 모집하는 최상의 전략으로 반유대주의를 제시한 것이었다. 히틀러의 연설은 독일노동자당의 당원들을 고무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히틀러에 크게 고무된 노동당원들은 1921년 7월 히틀러를 당 지도자로 삼았다. 히틀러는 당명을 '독일노동자당'에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으로 바꿨고 그 약칭이 나치다.

 ≫ 나치당의 모태가 극우적 폭력 단체, 자유군단이었던 만큼 히틀러는 그 특성을 살려 자신의 호위대인 돌격대부터 창설한다. 나치깃발과 눈에 띄는 제복으로 홍보에 성공했고, 시각적 차별화를 둔 탓에 당원 숫자가 기존 2,000명에서 2만 명으로 급증한다. 히틀러가 당권을 잡은 이듬해 이탈리아에선 베니토 무솔리니의 극우 파시스트당이 정권을 잡았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베르사유 조약이 이탈리아에게 불평등하게 맺어졌다고 정치 캠페인을 벌였고 그 캠페인이 국왕 눈에 들어 집권하는데 성공했다. 이 소식을 히틀러가 알게됬고 극우주의자 무솔리니의 성공은 히틀러를 고무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 히틀러의 쿠데타 실패와 수감생활 그리고 정치복귀

 ≫ 1923년 1월 프랑스군과 벨이게군이 전후 배상금을 제때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루루 지역의 탄광을 점령하는 일이 벌어졌다. 3월에는 프랑스 장교가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프랑스군과 독일 국민들 사이에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때 촬영된 영상이 있었는데 이 동영상은 히틀러의 나치당에게 더할 나위 없는 홍보 도구였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총장을 보좌했던 루덴도르프 장군이 나치의 세력으로 들어왔고 우익 참전 군인들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군 내부자들의 협력을 받아 총기를 확보해 루덴도르프를 지도자로 세워 쿠데타를 일으킨다. 뮌헨에서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베를린으로 진격한다는 것이다.

 ≫ 히틀러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루덴도르프는 1차 세계대전 참전 영웅으로써 사면되었다. 하지만 히틀러에게는 녹록치 않은 재판이었다. 그러나 재판에 섰을 때 히틀러는 생각보다 분위기가 자신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프랑스와 벨기에군에 굴욕을 당한 독일 국민들 마음이 그와 같았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자기 웅변 실력을 총동원했고 그 결과 형량이 가벼워졌다. 수감 생활은 호텔처럼 편안했고 언제든지 나치 지지자를 만날 수 있었다. 책과 잡지도 무엇이든 읽을 수 있었고, 인생관과 정치사상을 정리했다. 히틀러가 원고를 쓰고 나치당의 기자가 손보는 형식이었으며, 이 과정으로 <나의 투쟁>이 출간된다.

 ≫ 나의 투쟁에선 <지배종족>이라는 언급이 있는데, 이 지배종족은 영토를 되찾고, 공산주의를 박멸하며 프랑스와 영국은 물론이고 유대인까지 분쇄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 히틀러는 모범수라는 이유로 1924년 11월 20일에 석방된다. 1925년 2월 27일 쿠데타를 도모했던 뮌헨의 맥주집에 다시 돌아와 나치당 지도자로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 독일(당시 바이마르 공화국) 2대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

 ≫ 바이마르 공화국 2대 대통령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총장을 지낸 힌덴부르크가 당선됐다. 군대와 독일 보수파는 힌덴부르크를 중심으로 결집되었다. 독일 좌파들은 군인 출신이 대통령이 되는 상황이 반가울리 없었다. 정치적 라이벌인 루덴도르프는 제거되었고 보수파가 결집되어 나치당원은 17만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돌격대의 규모도 커져 사설 군대와 다름없는 수준이 됐다.

 ≫ 히틀러는 "대중은 여성적이고 우둔하며 오직 감정과 증오로만 그들을 장악할 수 있다"고 여겼다. 히틀러 친위대는 베를린의 유대인 구역에서 시작해 독일 전역에 '증오'를 심기 시작했다.


■ 나치의 집권

 ≫ 나치당은 1930년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18.3 퍼센트를 득표해 제 2당이 됐다. 히틀러는 1932년 그 힘으로 대통령 선거에 나섰지만 힌덴부르크에 밀려났다. 그러나 36.8 퍼센트라는 지지율을 받았다. 1932년 7월엔 나치당은 제 1당에 올라선다. 1당이 되면서 나치당은 총리직을 요구했지만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두 차례에 걸쳐 거부했다. 그러나 1933년 1월 30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안팎의 압박을 견뎌내지 못하고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했다.

 ≫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잡자, <나의 투쟁>은 날개 돋친 듯 팔렸고, 국민의 필수 교양서가 되었다. 나의 투쟁이 책장에 없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견뎌내야 했다. 덕분에 히틀러는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 히틀러는 총리직에 오르자마자 좌파 공산주의 세력과 반대파를 감금, 납치, 암살, 고문하는 등 온갖 불법적인 재판과 처벌을 동원해 탄압했다. 히틀러는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을 비난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들이 포진해 있는 의회가 늘 발목을 잡아서 국가 발전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이를 극복할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선동했다. 3월 24일 전권위임법[각주:5]을 통과시켰다. 전권위임법의 정식 명칭은 '민족과 국가의 위난을 제거하기 위한 법률'이다. 이를 통해 지방의회는 해산됬고 사회민주당은 불법화가 되었다. 이를 통해 나치의 일당독재체제를 완성한다. 이가 가능했던 이유는 바이마르 공화국(독일) 체제의 불안과 불신, 세계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국가경제의 붕괴 때문이었다.

 ≫ 1934년 8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드디어 히틀러 1인 독재체제가 완성된다. 히틀러는 국민투표를 실시해 총리가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게 했고, 그 지위를 총통이라 칭했다. 반대세력은 죽거나 도망쳤고, 유대인은 비국민이 되어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했다.


■ 독일의 구세주 히틀러

 ≫ 독일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실업이었다. 그런데 히틀러가 총통에 취임한 뒤 실업률은 크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독재 체제를 활용해 징중 정책을 밀어붙인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베르사유 조약이 파기된 이후 독일군이 재무장에 나선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사람들은 히틀러만 바라보았다. 행복에 젖어 히틀러 얘기만 했다. 변화에 대한 희망이 워낙 컸고, 패전국민으로 짓눌려왔던 독일인들은 히틀러에게서 자긍심을 찾았다.


■ 주변국가의 무장해제

 ≫ 히틀러는 1936년 8월 1일 베를린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했다. 올림픽 기간 중 독일 전역에서는 선동적인 표어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신문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호전적인 기사들이 자취를 감췄다. 독일 정부는 올림픽에 참여하러 온 세계인들에게 독일은 평화롭다는 믿음을 심어주고 싶어 했다. 이러한 가증스런 노력은 일정한 결실을 맺었다. 올림픽이 끝난 뒤 3주 후 영국의 로이드 조지 전 총리가 히틀러의 초대를 받고 독일을 전격 방문했다. 히틀러는 고무됐다. 세계적으로 유력한 정치인이 히틀러를 방문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그 자리에서 1차 세계대전 참전담을 늘어놓았다. 그는 전장에서 종종 영국 군인들과 조우했다고 회상했다. 히틀러의 호의는 로이드 조지를 무장해제시켰다. 로이드 전 총리는 히틀러와 만남을 가진 후, 데일리 익스프레스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고문을 보낸다. “독일이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히틀러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그는 우리와 싸울 의사가 전혀 없다.” 러나 로이드 전 총리는 순진했다. 영국 신문에 독일이 안전하다는 기사가 실릴 때 히틀러는 장관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밀지시를 내렸다. “독일군을 세계 최강으로 재건하지 못한다면 독일은 사라질 것이다. 독일군은 4년 안에 전쟁 준비를 마쳐야 한다."

 ≫ 1937년 9월 28일 이탈리아의 극우주의자 무솔리니가 베를린을 방문했다. 새로운 동맹을 구축하자는 것이었는데 “침략을 위한 군사적 조치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방어적 수단”이라고 강변했다.  

 ≫ 1938년 3월 13일에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합병을 선포한다. 독일군은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오스트리아에 진입했고, “신께서 오스트리아를 구원했다.”고 소리쳤다. 오스트리아 거리에 나치 깃발이 나부꼈지만 병합에 반대하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 된 때가 이 때다.

 ≫ 그 다음은 체코슬로바키아였다.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이 내세웠던 민족자결주의를 역이용한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에 거주하는 독일민족의 자결권을 요구하며 독일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주데텐란트를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1938년 9월 30일 뮌헨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참석해 히틀러의 요구를 승인해준다. 당시 강대국들은 당사자인 체코슬로바키아를 협정에서 배제할 정도로 나치 독일에 유화정책을 폈다.


■ 2차 세계대전 발발

 ≫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기 전 소련의 스탈린에게 히틀러는 미리 전보를 보냈다. 스탈린은 독일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답신을 보낸다. 그리고 전선에는 200만 명의 병사가 히틀러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1939년 9월 1일 새벽 5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나치 독일에 관용적이던 영국과 프랑스도 이틀 뒤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준비해온 독일군은 이미 폴란드 깊숙이 파고들어갔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비밀 협정에 따라 소련도 폴란드 동부를 침공했다. 폴란드는 항복을 거부했고 바르샤바는 초토화됐다.

 ≫ 이듬해인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은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된 지 2주 만에 프랑스군 중심의 연합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국경 해안 도시 됭케르크에서는 연합군 40만 명이 진지를 포기하고 후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해변은 연합군이 버리고 간 무기들로 넘쳐났고, 벨기에와 프랑스의 해안이 독일군 손에 들어갔다. 영국군이 철수하자 홀로 남게 된 프랑스는 1940년 6월 22일 독일에 항복을 선언한다. 히틀러는 나흘 뒤인 28일 새벽 6시 파리에 입성하며 “6주에 걸친 영웅적인 투쟁 끝에 우리 병사들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대들의 위업은 영광스러운 승리로 기록될 것이다. 1주일 동안 깃발을 게양하고 종을 울리도록 명하는 바이다.”라고 말했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과 에펠탑에는 독일군인들이 무리지어 다니며 기념 촬영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 프랑스를 점령해 기세가 등등해진 히틀러는 영국에 평화협정을 제안하지만 처칠은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리고 영국과 독일 간의 공중전이 시작된다. 독일은 영국을 9개월간 공습해 4만 여 명의 사망자를 내지만 영국은 끝끝내 항복을 거부했다. 당시 영국 전투기의 성능이 우수했기 때문에 독일군도 공습 과정에 적지 않은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1941년 5월 독일군은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맛본다. 그때까지 너무 쉽게 이겼던 탓인지 히틀러도 적지 않은 충격에 빠졌다. 히틀러는 갑자기 영국 정복을 포기하고 소련을 침공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소련을 제압하면 영국의 희망도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천하의 독일군이라 해도 위험한 도박이었다. 당시 참모들은 히틀러를 막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무도 나서지를 못했다. 1941년 6월 22일 새벽 3시, 300만 명의 독일군이 소련 국경을 넘었다. 히틀러에게 러시아는 영국에게 인도와 같은 존재였다. 영국이 인도를 점령해 자원을 빼먹듯이 독일도 러시아를 점령해 이용해먹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전투도 연전연승이었다. 모스크바 턱밑까지 독일군이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과거 나폴레옹 때처럼 러시아에게는 겨울이 있었다. 그리고 12월에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습격하면서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시작했다. 독일 장군들은 소련 전선에서 후퇴하자고 히틀러에게 조언했지만, 히틀러는 격노로 답했다. 1차 세계대전을 전장에서 보낸 히틀러는 후퇴 운운하는 장군들에게 오히려 정신 무장을 주문했다

 ≫ 소년부터 노인까지 남자라면 모조리 차출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미국까지 가세한 연합군의 공격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1943년 7월 27일, 700여 대의 폭격기가 함부르크를 공습했고, 도시는 불바다가 됐다. 이 공습으로 함부르크 시민 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즈음 전세는 확실히 역전되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건강도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심장 질환을 앓기 시작했고 파킨슨병 증세도 보였다. 등은 휘었고 손은 떨렸다. 1944년 6월 6일 이른바 디데이 새벽 노르망디 해안. 연합군이 마침내 독일이 점령 중인 프랑스 수복에 나섰다.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매우 기뻐했다. 영국이란 섬에 숨어 있다가 대륙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에 쉽게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히틀러의 착각이었고 망상이었다. 파죽지세는 이제 연합군을 수식하는 말이 됐다. 그 시기 독일군 사령부에서 폭탄이 터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독일 내부의 움직임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전세가 역전된 이유를 참모들의 타락에서 찾았다. 반역자들 때문에 원대한 계획이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의 배후를 캐기 위해 히틀러는 5,000명을 체포했고 200명을 처형했다. 이처럼 전세가 기울면서 독일 내부의 히틀러 지지기반도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 히틀러의 패배, 그리고 자결

 ≫ 1945년 1월 소련군이 베를린 외곽 80킬로미터까지 접근했고, 4월 21일에는 마침내 베를린에 입성했다. 이 전쟁으로 소련에서는 무려 2,000여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희생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군 지휘부는 병사들에게 베를린에서 승리를 자축할 것을 허락했다. 소련군들은 베를린에 남아 있던 여자들을 빈집으로 끌어모았고, 밤새도록 욕을 보였다. 이때 소련군에게 강간당한 독일 여성의 숫자만 200만 명을 헤아렸다. 그때 히틀러는 폐허로 변한 총통 관저의 지하 벙커에서 그의 연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은신하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 클라라 히틀러의 사진 앞에서 에바와 결혼식을 올린 뒤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다. 히틀러는 일기를 통해 자기가 일으킨 전쟁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생각을 남겼는데, 자기중심적인 망상과 집착은 전세가 기울어졌을 때에도 결코 약해지지 않았다. “우리가 졌다는 것을 안다. 적들의 힘이 너무 강하다. 배신까지 당했으니 내 머리에 총알을 박아야 한다. 하지만 절대로 항복하지는 않으리라. 우리는 쓰러지겠지만 세상이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독일이 전쟁을 원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이 전쟁은 서구 정치인들이 도발한 것이다. 그들 모두 유대인을 위해 일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죽는다. 우리 군대, 여성과 노동자들이 내 이름을 걸고 이룩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위업을 알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에서만 5,000만 명에 가까운 인명이 세상을 떠나야 했다. 아시아까지 그 범위를 넓히면 7,00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망상과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국가주의와 인종주의 같은 극단적인 이념에 탐닉할 때 그 끝이 어떤 모습일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인류는 그 대가를 치르면서 평등과 조화, 그리고 다양성과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있다.


  1. 홀로코스트 : 일반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을 대량으로 태워 죽이거나 대학살하는 행위를 총칭하지만, 고유명사로 쓸 때는 제2차세계대전 중 나치스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뜻한다. [본문으로]
  2. 도화선 : 사건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 [본문으로]
  3. 파시즘 : 1919년 이탈리아의 B.무솔리니가 주장한 국수주의적·권위주의적·반공적인 정치적 주의 및 운동을 말한다. 원래 묶음[束]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파쇼(fascio)에서 나온 말이었으나, 결속·단결의 뜻으로 전용(轉用)되었다. [본문으로]
  4. 바이마르 공화국 : 과거 독일의 국가명 [본문으로]
  5. 전권위임법 : 비상사태에 입법부가 행정부에 입법권을 위임하는 법률, 나치 정권은 나치에서 제정한 법률은 의회나 참의원 및 대통령의 권한과 관련된 것을 제외하면 헌법에 위반되어도 유효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 골자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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