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점

 ≫ 한국 원전이 안전하다. 사고가 난 적이 없다는 것은 믿기 어려움, 과거 역사에서 박정희대통령은 핵 개발을 위해 가압중수로를 들인 적이 있었음. 한국의 구리 원전의 경우 방파제가 취약하여 해일에 대비책이 필요함. 한국 한울 원자력 발전소는 2007년 한국에서 최다 고장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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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자력안전위원회 의원, 동국대학교 교수 김익중

 ≫ "1979년 미국의 스리마일 원전사고, 1986년 구소련 체르노빌 원전사고, 2013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들에서 공통점을 찾다가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확률입니다. 원전 개수가 많은 나라 순으로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김익중 교수가 방송에서 한 발언이다. 미국은 104개, 사고 당시 소련은 66개, 일본은 54개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순서대로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원전 23개를 운영하고 있지만 현재 건설 중인 원전이 5개, 2022년까지 총 42개를 완공할 예정이라고 한다. 미국에 이어 소련, 그리고 일본에서 원전사고가 났다고 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고는 원전대국들에서 발생한 것이다. 원전개수가 많은 순서대로라는 것인데, 이 시점에서 저자 김익중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원전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확률을 계산해 봤다고 한다. 저자의 추정치는 27%, 참고로 저자는 서울대에서 의학과 미생물학을 졸업했다. 일본 보험회사의 계산법대로라면 30~40년 내로 한국에서 핵사고가 날 수 있다고 한다.

 ≫ 김익중 교수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일단, 원전의 개수를 늘리는 것에 문제를 제기한다. 후쿠시마사고 이후 중국도 일년간은 원전공사를 하지 않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독일,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등은 탈핵의 과정을 밟고 있고, 유럽의 최대 원전대국인 프랑스마저도 원전 개수를 줄이는 것이 대통령 공약사항이라고 한다. 정부가 원전을 없애고 지금부터라도 태양열 등의 재생가능에너지 개발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촉구한다.



■ 현재 한국 원전은 몇 대이며, 생산 용량은 얼마일까?
 ≫ 대한민국은 2015년도 기준으로 4곳의 원자력 발전소와 24기의 원자로를 가동중이다. 발전량 기준으로는 세계 6위이며, 회사 단위로는 세계 2위의 원자력발전회사인 한국수력원자력이 있다. 원전은 한국 내 전체 전기 생산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 대한민국 원자력 발전소는 2001년 4월 2일 설립된 한국전력공사 계열 발전회사인 한국수력원자력에서 독점 운영하고 있으며, 2011년 10월 26일 설립된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원자력안전위원회 산하 위탁집행형 준정부기관인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의 감시감독을 받고 있다.
 ≫ 현재 원전은 4곳이 있다. 한울, 월성, 고리, 한빛이다.


■ 상업운전 개시 순서로 보기

구분

상업운전 개시

원자로형

설비용량 (kW)

고리 1호기

1978년 04월 29일

가압경수로 (PWR)

58만 7천

월성 1호기

1983년 04월 22일

가압중수로 (CANDU)

67만 9천

고리 2호기

1983년 07월 25일

가압경수로 (PWR)

65만

고리 3호기

1985년 09월 30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고리 4호기

1986년 04월 29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빛 1호기

1986년 08월 25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빛 2호기

1987년 06월 10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울 1호기

1988년 09월 10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울 2호기

1989년 09월 30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빛 3호기

1995년 03월 31일

가압경수로 (System 80)

100만

한빛 4호기

1996년 01월 01일

가압경수로 (System 80)

100만

월성 2호기

1997년 07월 01일

가압중수로 (CANDU)

70만

월성 3호기

1998년 07월 01일

가압중수로 (CANDU)

70만

한울 3호기

1998년 08월 11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월성 4호기

1999년 10월 01일

가압중수로 (CANDU)

70만

한울 4호기

1999년 12월 31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빛 5호기

2002년 05월 21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빛 6호기

2002년 12월 24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울 5호기

2004년 07월 29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울 6호기

2005년 04월 22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신고리 1호기

2011년 02월 28일

가압경수로 (OPR-1000)

100만

신고리 2호기

2012년 07월 20일

가압경수로 (OPR-1000)

100만

신월성 1호기

2012년 07월 31일

가압경수로 (OPR-1000)

100만

신월성 2호기

2015년 07월 24일

가압경수로 (OPR-1000)

100만

신고리 3호기 (건설중)

2014년 8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고리 4호기 (건설중)

2014년 9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한울 1호기 (건설중)

2017년 4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고리 5호기 (건설중)

2018년 12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한울 2호기 (건설중)

2018년 4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고리 6호기 (건설중)

2019년 12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한울 3호기 (건설예정)

2020년 6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한울 4호기 (건설예정)

2021년 6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 설비용량 순차로 보기

구분

상업운전 개시

원자로형

설비용량 (kW)

고리 1호기

1978년 04월 29일

가압경수로 (PWR)

58만 7천

고리 2호기

1983년 07월 25일

가압경수로 (PWR)

65만

월성 1호기

1983년 04월 22일

가압중수로 (CANDU)

67만 9천

월성 2호기

1997년 07월 01일

가압중수로 (CANDU)

70만

월성 3호기

1998년 07월 01일

가압중수로 (CANDU)

70만

월성 4호기

1999년 10월 01일

가압중수로 (CANDU)

70만

고리 3호기

1985년 09월 30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고리 4호기

1986년 04월 29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빛 1호기

1986년 08월 25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빛 2호기

1987년 06월 10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울 1호기

1988년 09월 10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한울 2호기

1989년 09월 30일

가압경수로 (PWR)

95만

신고리 1호기

2011년 02월 28일

가압경수로 (OPR-1000)

100만

신고리 2호기

2012년 07월 20일

가압경수로 (OPR-1000)

100만

신월성 1호기

2012년 07월 31일

가압경수로 (OPR-1000)

100만

신월성 2호기[5]

2015년 07월 24일

가압경수로 (OPR-1000)

100만

한빛 3호기

1995년 03월 31일

가압경수로 (System 80)

100만

한빛 4호기

1996년 01월 01일

가압경수로 (System 80)

100만

한빛 5호기

2002년 05월 21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빛 6호기

2002년 12월 24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울 3호기

1998년 08월 11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울 4호기

1999년 12월 31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울 5호기

2004년 07월 29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한울 6호기

2005년 04월 22일

가압경수로 (KSNP)

100만

신고리 3호기 (건설중)

2014년 8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고리 4호기 (건설중)

2014년 9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고리 5호기 (건설중)

2018년 12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고리 6호기 (건설중)

2019년 12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한울 1호기 (건설중)

2017년 4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한울 2호기 (건설중)

2018년 4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한울 3호기 (건설예정)

2020년 6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신한울 4호기 (건설예정)

2021년 6월 예정

가압경수로 (APR-1400)

140만



■ 현재 한국 원전은 몇 대이며, 생산 용량은 얼마일까?

 1. 한국의 고리 원자력 발전소

 ≫ 고리 1호기는 국내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입니다..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지어주었고, 1978년 4월 29일 처음 가동되었으며 원전 4기 주위로 방파제가 있는데요. 사진에서 보듯이 방파제가 매우 허술합니다고리 1호기의 탄생으로 우리나라는 21번째로 원자력 발전을 하는 국가가 되었으며, 2015년 6월 12일 기준, 그동안 고리 1호기는 124건의 크고 작은 사고를 일으켜왔습니다. 이후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이 국제기준에 따라 안전성을 심사한 결과 계속운전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2007년 12월에는 결국 주민들과의 합의도 이뤄집니다. 고리 1호기는 이듬해 1월 정부로부터 2017년 6월까지 10년간 운전을 허가받아 다시 가동에 들어가게 됩니다. 2007년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주기적 안전성 평가’ 기준과 미국의 ‘운영 허가 갱신’ 기준 등을 적용한 결과 고리 원전 1호기의 원자로 용기와 배관, 각종 구조물 등 주요 기기가 10년간 충분히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 이후 고리 1호기는 노후 원전의 대명사로 여론의 불신을 받기 시작했는데요.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전 세계의 이슈였던 2011년 4월, 전기제어장치(인입차단기) 고장으로 원자로 가동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맙니다. 원자력 안전에 특히 민감하던 시기여서 부산지방변호사회가 가동중지 가처분 신청을 내고 지방의회까지 결의안을 내는 등 지역 사회의 반발과 우려가 거셌는데요. 결국 정부는 정밀 점검 결과 문제가 없다고 결론 내리고, 5월 재가동을 허가했습니다.

 ≫ 참고로 후쿠시마 원전 1호기는 1971년 2월에 가동을 시작했고, 일본 정부가 수명을 10년 연장했습니다. 우리나라 또한 2008년에 설계수명 30년이 지나자 수명을 10년 연장한것과 닮은 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후쿠시마 원전보다 고리 원전이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고리 원전이 좀 더 안전합니다. 후쿠시마의 경우 전원이 차단되면 수소가 농축되어 폭발할 수 있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폭발했습니다. 하지만 고리 원전은 전원이 차단되어도 수소를 제어할 수 있는 안전 장치가 추가로 설치되어있습니다.


[구글 지도에서 보기]


관련기사 : <고리원전 1호기 10년 더 가동한다>, 동아사이언스 2007년 12월 07일자

관련기사 : 고리원전 1호기 고장… 재가동 논란

관련기사 : [르포]고리 원전 1호기 가보니…



 2. 한국의 월성 원자력 발전소

 ≫ 고리 1호기가 1978년 가동 시작 후, 1983년 월성 1호기가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2,3,4호기는 97년~99년 사이에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고리에 비해 방파제도 길게 잘 만들어진 편(붉은색 다각형), 월성 1,2,3,4호기는 가압 경수로인 고리 원전과 달리 캐내다의 CANDU형 가압중수로로 만들어졌습니다. 가압중수로로 개발된 이유는 발전소 건설이 진행되던 박정희 정권 때 핵개발을 진행했고 70년대 중반에 이미 핵무기 설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경수로에서는 핵물질을 추출할 때 사용할 연료봉 생산이 힘들기 때문에, 캐나다에서 중수로를 사오게 됩니다. 번외로 인도 역시 CANDU형 중수로로 핵개발에 성공했고 캐나다가 이후 한국에 CANDU를 팔지 않게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외부로 기술을 유출했다는 설)

 ≫ 핵무기 개발을 염두하고 중수로를 사들여왔으나, 중간에 미국 포드 행정부의 방해로 인해 한국은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1979년에 핵연료 재처리 시설의 설계가 끝났고 계획대로라면 1985년쯤에는 플루토늄 핵폭탄을 만들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 만약 인도나 파키스탄처럼 주변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발을 했다면, 아마 경제 제제로 인해 현재 경제만큼 부상하지 못했을 것 입니다. 박정희 암살 이후 전두환 정권에서는 한반도 비핵화 선언과 함께 연구 자료와 프로젝트를 전량 폐기했다고 합니다. 한국에 가압중수로 발전소가 있는 이유는 박정희 정권의 70년대 핵개발 열망때문이라는 것.

 ≫ 만들어진지 1년도 안된 1984년에 23톤의 중수가 유출되었고, 1988년에도 누출 사고로 인해 3일간 원자로를 멈춤, 2014년엔 월성 원전이 해킹당했고, 2015년 5월 15일 월성 4호기 사용 후 핵연료봉 낙하사고, 2016년 5월 12일 월성원전 1호기 고장으로 발전이 정지되었습니다.


관련기사 : 원전 해킹..불안감은 여전

관련기사 : 월성 4호기 사용후 핵연료봉 낙하 사고

관련기사 : 월성원전 1호기 고장으로 발전 정지


[구글 지도에서 보기]



3. 한국의 영광 원자력 발전소

 ≫ 다른 발전소들은 다들 동해안에 건설되었는데, 영광만 서해안에 건설된게 이색적입니다. 영광 1호기는 1986년 8월 25일에 운전을 시작했고, 형태는 고리 원전에 사용된 원자로와 유사한 가압 경수로입니다. 1995년에 운전을 시작한 영광 3호기부터는 OPR1000(Optimized Power Reactor 1000=KNSP)이라는 한국형 원자로를 사용하기 시작, 참고로 OPR1000은 북한 영변에 지어주던 경수로와 동일한 형태입니다. 95년부터는 국내 기술 95%의 OPR1000 설계의 원자로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설계 수명은 40년. 기존 고리 1호기의 30년과 비교하여 10년이 더 늘어났습니다.

 ≫ 그림의 왼쪽부터 1호기 마지막 오른쪽이 6호기입니다. 2002년 12월 24일 영광 6호기를 끝으로 이 지역 원전 건설을 끝이난 듯 합니다.

 ≫ 2005년, 김봉열 영광군수는 '영광원전이 가동된 이후 20여 년 동안 124건의 크고 작은 고장이 발생했고 2003년 5·6호기 열전달 완충판 이탈, 동년 12월 5호기 방사성 오염폐수 3500t 바다 유출, 3·4호기 증기발생기 세관 결함이 발생'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관련기사 : 우리나라에 원전 사고가 단 한건도 없었다고?


[구글 지도에서 보기]



4. 한국의 한울(울진) 원자력 발전소

 ≫ 한울(울진) 1호기는 1988년에 프랑스 프라마톰사가 가압 경수로 형태로 지어주었고, 1998년부터 가동을 시작한 한울 3호기부터는 우리나라 독자 규격인 OPR1000 형태로 지어졌습니다. 앞에 길게 늘어선 방파제가 있습니다. 2001년에 뜨끈한 배출수에 유혹되어 밀려들어온 새우떼와 해파리떼 때문에 냉각용 해수 흡입구가 막혀서 원자로를 잠시 멈추는 사고가 발생했고, 그 외에도 몇번 냉각수 유출 사고가 있었습니다. 2003년에는 5년동안 증기 발생기와 안전 시설을 보강하는 작업을 한 바 있습니다. 2016년 기준 6기의 상업용 원자로가 가동중이며, 발전소 인접 부지에 신한울 1,2호기의 공사가 진행중입니다. 2013년 5월에 울진원자력발전소에서 한울원자력발전소로 이름을 변경했습니다. 

 ≫ 2004년 이후 고장 사고로 인한 가동 중지건수가 21건으로, 전체 원자력 발전소 41건의 절반을 차지하여 2007년에 대한민국에서 최다 가동 중지 원자력 발전소로 기록되었으며, 직원의 조작 실수로 인한 고장, 정지건도 총 8건 가운데 이곳이 5건을 차지하였습니다.


관련기사 : 왜 울진原電만 이런일이?…가동중단 사고 최다


원전사고 문자알림 신청하기



출처 및 참고 : 오마이뉴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3yMF&articleno=15601245

http://www.dongascience.com/news/view/7283 그 외 글마다의 아래 관련기사들 참조.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 원자력발전소 이해전에 숙지하기

(제어봉)

 ≫ 원자로는 연쇄핵분열 반응을 통해 열을 생산하는데, 제어봉은 연쇄핵분열의 매개체인 중성자를 흡수해 연쇄핵분열 속도를 조절하는 도구이다. 제어봉을 만드는데 이용되는 물질들은 중성자의 에너지 변화에 따라 중성자 포획 능력이 달라지므로, 제어봉 집합체는 원자로의 다양한 중성자 에너지 영역에 맞추어 설계해야 하며, 보통 은, 카드뮴, 붕소, 인듐이 재료가 된다.

(노심)

 ≫ 원자로의 핵연료를 담고 있는 원자로의 부품으로, 핵반응이 일어나는 곳이다. 노심 안에는 핵연료와 제어봉 있고, 냉각재가 상실되면 중대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체르노빌 사고와 관련 있음), 노심에 핵분열로 생긴 열이 쌓이면 노심의 구조물이 녹거나 파손되는데 그 자체가 파손되어 방사성 물질이 주위에 확산될 수 있다.


■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의 구조와 개략도로 설명하는 원전사고

 ≫ 원자력 발전에서는 핵연료(일반적으로 우라늄)를 핵분열 반응을 통해 태워 물을 끓이고 그 증기로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만들어낸다. 핵분열 반응은 우라늄에 외부 중성자가 흡수되면 우라늄이 더 안정한 다른 원소로 분열되면서 큰 에너지를 방출하고 그 과정에서 여분의 중성자가 생성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중성자들은 다시 근처의 우라늄에 흡수되면서 연쇄적으로 핵분열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큰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다. 원자력 발전에서 핵분열 반응을 조절하기 위해 감속재와 제어봉이 주로 사용되는데, 감속재는 핵분열 반응에서 생성된 중성자의 속도를 느리게 하여 핵분열 반응을 증가시키고(중성자가 너무 빠르면 우라늄에 흡수되지 않고 그냥 통과해 버려 핵분열 반응이 연쇄적으로 발생하지 않게 된다), 제어봉은 중성자를 흡수하여 핵분열 반응을 멈추게 한다. 스리마일 섬 원전인 가압경수로는 일반 물을 감속재로 사용한다. 여기서 ‘가압’이라는 말은 원자로 내부의 냉각수를 고압으로 유지해 물이 끓지 않도록 한다는 뜻이다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의 가압경수로 개략적 구조)


(확대를 위한 원전 구조 -1)

(확대를 위한 원전 구조 -2)

 ≫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 당시 가압기의 증기 배출 밸브(PORV, 7)가 열려 있어 사고 발생 2시간이 지나서야 블록 밸브(Block valve, 9)를 이용하여 증기 배출이 차단되었다. 또한 증기발생기(3)에 연결된 비상 냉각수 공급관의 블록 밸브(24)가 닫혀 있었으며, 방사능에 오염된 1차 계통 냉각수가 보조건물(Auxiliary Building)로 유출되어 냉각수에 녹아 있던 방사능 물질이 환기구(22)를 통해 대기로 방출되었다.

 ≫ 증기발생기에서 냉각된 1차 계통의 냉각수는 냉각수 펌프(Reactor Coolant Pump, 5)에 의해 원자로 노심으로 다시 순환된다. 터빈을 돌리는 데 사용된 2차 계통의 증기는 냉각탑(Cooling Tower, 13)에서 공급되는 외부 냉각수에 의해 응축기(Condenser, 12)에서 다시 물로 변환되고 이온변환기(Demineralizer, 14)에서 불순물이 제거된 뒤에 펌프(Main Feedwater Pump, 23)에 의해 다시 증기발생기로 순환된다. 원자로와 1차 냉각 계통은 격납건물(Reactor Building, Containment)에 설치되고, 증기발생기를 제외한 2차 계통은 터빈 빌딩에 설치된다. 따라서 방사선에 노출되는 1차 계통 냉각수와 발전기를 돌리는 데 사용되는 2차 계통 냉각수가 서로 분리된다.

 ≫ 원자로 내부를 순환하는 1차 계통 냉각수가 증기로 변환되면 냉각수 흐름을 방해하고 원자로가 가열되거나, 중성자 흡수가 낮아져 핵분열 반응이 가속될 수 있다. 따라서 높은 온도에서도 물을 액체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가압기(Pressurizer, 6)가 사용된다. 물의 압력이 높아지면 압력 밥솥에서 그런 것처럼, 끓는 점이 올라가기 때문에 높은 온도에서도 물을 액체 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 가압기의 구조도 압력 밥솥과 비슷한데, 내부에는 물과 증기가 함께 섞여 있고 하단에는 가열기, 상단에는 살수 노즐이 있다. 압력을 높힐 때는 가열기를 이용하여 증기를 더 만들어 압력을 높히고, 압력을 낮출 때는 살수 노즐에서 냉각수를 뿌려 증기 일부를 물로 변환(응축)해 압력을 낮춘다.

 ≫ 압력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상단의 배출 밸브(Pilot Operated Relief Valve, 7)가 열리면서 증기가 배출되고 압력이 낮아진다. 가압기에서 배출된 증기는 격납건물 내의 증기 배출 탱크(Drain Tank)에 저장된다. 원자로 격납 건물 바닥에는 배수조(sump)가 있으며, 이 배수조가 일정 수위 이상으로 차게 되면 보조건물에 마련된 방사능폐기물 저장탱크(Radiation waste storage tank)로 옮겨진다. 보조건물에는 1차 계통 냉각수 양을 조절하기 위한 냉각수 보충 탱크(Makeup tank, 18)가 있고, 비상시에 고압 주입 펌프(High Pressure Injection Pump, 15)에 의해 냉각수가 원자로에 직접 주입될  있다. 냉각수가 너무 많을 경우에는 배출 라인(Let-down)을 통해 붕산염 물 저장 탱크(Borated Water Storage Tank, 붕산염은 중성자를 흡수하여 핵분열 반응을 느리게 함)에 저장된다. 1차 냉각수에 녹아 있는 방사성 물질(주로 제논[Xe]과 같은 비활성 기체)은 배출가스 압축기(Waste Gas Compressor)에 의해 배출가스 감쇠탱크(Waste gas decay tank, 20)에 저장된다.

 ≫ 원자로가 급격히 과열되는 경우 크게 두 가지 긴급 조치가 취해지는데, 첫번째는 원자로 비상정지(SCRAM)라 불리는 방법으로 모든 제어봉을 원자로에 긴급히 삽입하는 것이다. 제어봉은 중성자를 흡수하기 때문에 핵분열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차단한다. 두번째 방법은 노심긴급냉각장치(ECCS; Emergency Core Cooling System)라 불리는데, 여러 장치가 복합적으로 사용되지만 스리마일 섬 원전에서 사용된 방법은 저장되어 있는 냉각수를 고압 펌프(위 그림 2에서 15)를 이용하여 원자로 내부에 직접 주입하는 것이다. 스리마일 사고에서는 이 두가지 방법이 모두 사용되었지만 (ECCS는 부분적으로 사용됨) 핵연료봉이 녹으면서 방사능 물질이 누출되는 노심 용융이 발생했다. 출처/IEEE Spectrum 1979


■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 사고 원인과 당시 상황

(부주시사 윌리엄 스크랜튼(좌) 비상 관리국 국장 오란 핸더슨(우))

 ≫ 1979년 3월 2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미들타운에서 일어난 멜트다운 사고[각주:1]. 국제 원자력 사고 척도로는 시설외까지 위험을 수반한 사고(레벨 5)다. 한국에서도 같은 종류가 가동 중인 가압수형 원자로가 일으킨 역대 최악의 사고당시 스리마일 섬에는 총 2개의 원자로가 건설되어 있었고 원자로의 유형은 가압수형 원자로였다. 가압수형 원자로의 경우 압력을 가한 물을 원자로 냉각재 및 중성자 감속재로 사용하기 때문에 이 물이 끊임없이 순환되도록 유지하여 끓지 않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스리마일 섬 사고의 경우 가장 중요한 급수 시스템에서 문제가 생겼던 것이 원인이다.

 ≫ 사고를 발생시킨 최초원인은 뚜렷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자정 무렵 발전소 1호기의 핵연료 재충전을 위해 차단조치를 내렸고 여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조치로 발전소는 2호기만 가동 중이었고 가동 내내 큰 문제가 없었는데 새벽 4시 무렵 주 급수 펌프가 뻗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조치로 발전소는 2호기만 가동 중이었고 가동 내내 큰 문제가 없었는데 새벽 4시 무렵 주 급수 펌프가 뻗는 사고가 발생했다. 가압수형 원자로는 물 공급이 중요하기 때문에 주 급수 시스템이 뻗으면 보조장치가 바로 작동하여 위험한 사태를 피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는데, 최초 보조급수 계통 밸브가 닫혀있었다. 정상시 보조급수 계통이 개방된 채로 가동되어야 하지만 당시 운전원이 개방이 되었는지 닫혀있었는지 알지 못했었다. MCR 내부 보조급수기가 닫혀있는지 열려있는지를 표시해주는 표시등이 표지판 같은 Tag에 가려져 운전원이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열려야 할 보조급수계통 밸브가 몇 개는 닫혀있었고, 열리지 말아야할 가압기 압력 방출 밸브가 개방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미세한 누출이 있었는데 통제실 콘솔 표시등에는 수치가 정상수치 범위내로 표시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비상 노심 냉각 시스템이 가동되어 원자로를 식히고 있었는데 이걸 정상이라고 판단한 운전원은 비상 노심 냉각 시스템을 꺼버리게 된다.

 ≫ 당시 원자로 내 냉각수는 실제로는 줄어들고 있었지만, 계측기에는 냉각수 수위가 올라가는 것으로 표기되고 있었다. 정상상태에서 고압인 원자로 내 압력이 가압기 압력방출밸브의 미세한 누설로 압력이 빠지고 있었고, 압력이 떨어진 액체 상태의 물은 기체상태로 변하는 현상이 발생하므로 냉각수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당시에 설치되어 있던 노심 수위 계측기는 이 끓어오르는 거품을 판단할 방법이 없었다. 그 결과 압력이 떨어지는데도 수위는 올라간 것으로 계측되었고, 운전원의 관점에서는 냉각수의 수위가 상승하고 있는 상황에서 비상 냉각수를 공급하면 안되므로 당연히 비상노심냉각시스템을 끌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운전원 교육에서는 가압내 내의 냉각수 수위는 절반을 유지하도록 메뉴얼에 지정되어있으며 해당 수위가 가득차게 운전하지 않도록 교육했다. 

 ≫ 결국 최후의 보루인 비상 노심 냉각 시스템마저 꺼져버리자 증기압력이 증가하여 파이프가 파손되고 원자로의 냉각수가 유출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원자로 온도가 치솟아 원자로 노심이 녹기 시작하면서 방사능 수치가 급상승하였다. 관계자들이 원인 파악을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원자로 방호장비가 녹아 최악의 상황 직전까지 갔으나 16시간 만에 간신히 사고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다행으로 교대하는 운전원이 가압기 압력방출 밸브의 미세누설을 발견하고 보조 급수 펌프의 자동기동으로 변경하면서 최악의 사태는 모면할 수 있었다. 결국 수동으로 조작하여 밸브를 닫고 냉각 펌프를 작동시킨 후에야 간신히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원인 파악이 늦어지는 바람에 노심의 절반 이상이 녹았다. 하지만 원자로가 파괴되거나 붕괴되는 사태는 모면하여 인명피해도 없었고 미국 본토에 방사능 낙진이 떨어지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지만 발전소 하나를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더불어 당시 1호기는 고장이 없었는데 2호기에서 사고가 나는 바람에 나란히 가동중지 조치가 내려졌으며 2호기는 1980년대 말까지 정화작업을 해야만 했다.


■ 비상사태 선포, 혼란스러운 대피 행렬

 ≫ 아침 7시경 발전소에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7시 15분에는 보조빌딩에 있던 직원들이 대피했다. 이와 함께 상급 감독기관에 사고 현황이 보고되었다. 7시 20분 격납건물에서 측정된 방사선량은 시간당 800 렘에 달했다. 8시 26분 고압 펌프를 재가동하여 냉각수 보충을 시작했고, 오전 10시 30분이 되어서야 연료봉이 다시 냉각수에 잠겼다. 오전 11시에는 스리마일섬에서 필수 인원을 제외한 모든 직원에게 대피 명령이 내려졌다. 사고 수습에는 원전 제어실, 전력회사(Met Ed), 스리마일섬 인근 지자체, 펜실베니아 주정부,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 에너지성, 백악관을 비롯한 여러 기관들이 개입했는데, 단일 지휘 체계가 확립되지 않고 서로 엇갈리는 정보들이 쏟아지면서 의사소통에 큰 혼돈이 있었다. 또한 언론 매체가 시시 각각 보도를 하면서, 미끄럽지 못한 언론에 대한 대응으로 더 큰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언론에 발표를 할 때는 “예상보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보다는 “생각했던 것 만큼 상황이 나쁘지는 않습니다”가 될 수 있도록 보수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필요가 있는데도, 전력회사 쪽이 사고 초기에 모든 상황이 통제되고 있다는 낙관적 전망을 발표한 이후에 상황이 더 나빠지자 원래 발표를 번복하게 되었다. 

 ≫ 이후 원자로를 정상 상태로 복구하려는 노력이 계속 되었고,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원자로의 정확한 상태 및 피해 상황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 졌다. 여러 지점에서 주기적으로 방사선 측정이 진행되면서 방사능 물질 누출을 감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 잘못된 측정값들이 보도 되면서 혼란을 가중시켰다. 또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주민 대피 계획이 수립되었는데, 주민을 대피 시킬 것인지 말 것인지, 대피시킨다면 언제 대피시킬 것인지, 대피 반경을 얼마로 할 것인지에 대해 각 기관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 결국 사고 발생 이틀 후에 원자로 내부의 피해가 예상보다 크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펜실베니아 주지사였던 리차드 손버그(Richard Thornburgh)는 원전 반경 5마일(8km) 내의 임산부와 아동을 대상으로 대피 권고를 내리자, 뒤이어 약 20만 명의 주민이 자발적으로 대피 행렬에 나섰다. 후에 손버그는 주민 대피 권고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주민 대피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노약자나 중환자실 환자, 인큐베이터 속 신생아들을 대피시킬 때 발생할 수 있는 인명 피해부터, 질서 있게 대피하더라도 발생할 수 있는 교통 사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인명 피해가 예상됩니다. 이런 종류의 주민 대피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고, 홍수나 태풍으로 인한 주민 대피와는 그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반경 5마일 내 주민 대피를 준비할 때, 그것이 반경 10마일, 20마일, 나아가 100마일까지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합니다.”

 ≫ 사고 후 거의 한달이 지난 4월 27일에야 원자로 내부 냉각수가 펌프를 이용하지 않은 자연 순환상태에 이르렀고 냉각수의 온도도 끓는 점 밑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제서야 향후 14년에 걸친 방사능 오염 제거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원전에서 방사능 오염이 얼마나 심했는지 1980년 7월에 원자로 격납건물에 처음 사람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1982년이 되어서야 사진을 통해 연료봉의 피해 상황을 확인하게 되었다. 손상된 원자로와 방사능 물질, 오염된 건물을 처리하는데 총 100억 달러 (1달러를 1000원으로 환산한다면 한화로 약 10조원)가 소요되었다.


■ 스리마일 섬 원전사고 시민들의 불안과 그 이후

 ≫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는 여러 안전장치가 겹겹히 설치되었는데도 예상치 않은 시나리오에 의해 사고가 발생할 수 있고 방사능이 원전 외부로 유출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미국에서 발생한 최악의 원전 사고로서 원자력 발전의 안전성에 대해 큰 경각심을 불러왔다. 원자력 발전을 이용하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원전은 에너지 정책이나 핵무기 개발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각국 정부는 국민에게 원자력 발전이 굉장히 안전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줄 필요가 있었고, 많은 경우에 사고가 축소·은폐되어 왔다. 특히 옛소련에서는 정부가 언론을 장악하면서 대부분의 사고가 국민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사고 처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전 사고는 여러 안전장치가 겹겹히 설치되었는데도 예상치 않은 시나리오에 의해 사고가 발생할 수 있고 방사능이 원전 외부로 유출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 2010년 1월에 1호기는 재운전을 시작했으며, 같은 달에 2호기의 발전기는 해체되어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시런 해리스(Shearon Harris) 원자력 발전소로 옮겨 설치되었다. 발전소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직후 주 정부에서는 인근 지역에 대피령을 내렸고 주민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미친듯이 탈출하였다. 다행히 누출된 방사능 수준이 자연 방사선량에 못 미쳐 민간인들의 피폭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 원자력 발전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하여 반 원자력 발전소 운동이 발생하였고 이에 오일 쇼크로 국면전환을 꾀하던 지미 카터 대통령은 더 이상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여 70여 개에 달하던 원자력 발전소 건설계획이 싸그리 휴지통으로 직행했다

 ≫ 원자력 발전소 건설은 정치권의 금기처럼 치부되다가 버락 후세인 오바마 대통령이 30년~40년 만에 원자력 발전소 건설 재개를 선언하였는데, 하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나면서 반대가 격심해졌다. 일단 오바마 대통령은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었다.

 ≫ 원자로 겉에 붕소-10을 가득넣은 냉각수를 채우는 형태의 극히 안전한 원자로 설계가 나왔으나 도입비가 너무 비싸서 아무도 안 쓰고 있다. 더불어 이 사건을 악화시킨 수위 계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압수형 원자로에는 냉각수의 실제 수위를 표시하는 계측장비 설치가 의무화됐다. 또한 MCR룸을 인체공학적으로 설계 하여 운전수가 MCR의 계측 표시기를 모두 확인할 수 있도록 설계를 변경하였다.

 ≫ 이 사고로 인해서 운전원 교육을 철저하게 시키는 등의 발전이 있었다. 사실 격납용기라도 있어서 다행이었지, 격납용기가 없었다면 체르노빌 원전 사고 꼴이 날 뻔 했다.



출처 : 나무위키, http://scienceon.hani.co.kr/?document_srl=34785

  1. 멜트다운 : 원자로의 냉각장치가 정지되어 내부의 열이 이상 상승하여 연료인 우라늄을 용해함으로써 원자로의 노심부가 녹아버리는 일 [본문으로]

※ 1과 2에서 원자력 발전소의 사고원인과 이유 그리고 노심과 제어봉에 대한 설명을 접할 수 있습니다.

■ 1986년 4월 26일 사건 그 이후, 체르노빌 원전사고에 대한 처리 : 화재 진압과 방사능의 긴급 누출 방지

 
(폭발직후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당시 수석 엔지니어 알렉산드로 아키모프)

 ≫ 체르노빌 발전소의 발전기는 4기가 있었고, 그 중 2기는 추가로 짓고 있던 중이었다. 폭발의 여파로 4호기의 잔해와 3호기에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기 위하여 1986년 4월 26일 사고 직후 소방대원들이 파견되었다. 사고 직후인 1시 28분에 우선 알렉산드르 아키모프가 지휘하는 14명의 소방대원이 파견되어 화재를 진압하기 시작하였고, 오전 4시 경에는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가 지휘하는 250명의 대원이 추가로 파견되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오전 2시 10분에는 기계동 천장의 가장 큰 불이 진압되었고, 2시 30분에는 폭발한 반응로 건물 천장의 화재 또한 진압되었다. 오전 5시에는 반응로 주변에 일어난 대부분의 화재가 모두 진압되었다. 이 기간 동안 아무도 폭발이 일어난 반응로 근처로 가지 못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반응로의 잔해가 계속 불타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사고 후 처음 20시간 동안 소방대원과 발전소 직원들의 화재 진압 시도로 인해 뿌려진 물이 기화하여, 반응로 주변은 증기로 가득한 상태였다. 이 증기는 가열된 흑연이나 반응로 내부의 지르코늄과 같은 다른 물질과 반응하여 수소 가스를 비롯한 많은 가연성 물질들을 만들어냈다. 이 가연성 물질들은 사고 발생 후 약 20시간이 지난 4월 26일 오후 9시 41분에 반응로의 잔해를 폭발시켰다. 폭발의 여파로 만들어진 불기둥은 거의 50m에 달할 정도의 규모였다. 

 ≫ 이 화재를 진압하고 화재로 인한 방사능의 누출을 막기 위해 5월 5일까지 군용 헬리콥터 30대가 동원되어 여러 물질들이 투하되었는데, 이 물질들은 중성자를 흡수하여 연쇄 반응을 막기 위한 40톤의 붕소 화합물, 열을 흡수하고 이산화 탄소를 발생시켜 화재를 진압하기 위한 돌로마이트 600톤, 방사능 차폐를 위한 2400톤의 납과 1800톤의 모래와 진흙 등이다. 동원된 헬리콥터와 그 조종사의 방사능 피폭을 줄이기 위해, 헬리콥터들은 폭심의 바로 위에 멈춰서지 않고 반응로를 날아서 통과하면서 투하물들을 떨어뜨렸다. 이 때문에, 투하물 중 일부는 목표인 노심을 빗나가 그 주변에 떨어졌으며, 이렇게 주변에 떨어진 투하물들은 반응로 내부의 열을 흡수하지 못하고 잡아두는 역할을 해 반응로의 온도를 높이고 방사능의 추가 누출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추측된다. 헬리콥터에 의한 화재 진압 시도는 5월 7일까지 지속되었으나, 폭발로 인해 건물의 구조가 약화되어 추가 폭발 또는 노심 용해 사고가 발생할 우려가 있어 5월 10일까지 중단되었다. 헬리콥터에 의한 시도가 중단된 이후에는 원자로 3호기에 있던 액체 질소를 노심에 주입해 5월 9일 반응로의 화재가 마침내 진압되었다.


■ 소련정부의 사고 공표
 ≫ 소련 정부는 사고가 일어난 사실을 즉시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했던 1986년 4월 26일 아침에, 사고 지점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1,200 km 떨어진 스웨덴의 포스막 원자력 발전소에 출근한 과학자의 의복에서 포스막 발전소에서는 발견된 전례가 없는 방사능이 검출되었다. 4월 27일과 28일에는 정상 수준보다 6배 이상 높은 방사능이 스웨덴뿐만 아니라 핀란드를 포함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여러 지역과 덴마크에서 검출되었고, 스웨덴 정부는 대기 상황을 고려하여 이 물질이 소련에서 날아온 것으로 추측하고 소련 정부에 해명을 요구하였다. 소련 정부는 관영 통신사인 타스를 통하여, 정확한 사고 발생 시각과 피해자의 수 등은 언급하지 않은 채 4월 28일에 사고 발생 사실을 인정하였다.


(원전 4호기를 상공에서 찍은 당시 사진)

 ≫ 소련 정부가 사고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방에서는 사고 규모와 사망자 수에 대한 소문이 진위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채로 퍼졌다. 사고가 처음 공표된 4월 30일경에는 사망자수가 2천 명에서 3천 명에 이른다는 추측성 기사가 보도되었고, 사고 원인도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비슷한 노심용융으로 추측되고 있었다. 소련 정부는 타스 통신을 통해 4월 30일에 이 같은 추측을 부인하고, 방사능 누출로 인해 입원한 환자 수를 밝혔다. 서구 기자들의 취재 요청이 있었지만, 소련 정부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이후 스웨덴 정부 등에 공식적으로 화재 진화를 위한 소방관 파견과 방사능 오염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의료 지원 등을 요청하였고, 같은 시기에 미국의 첩보 위성 등이 심각하게 손상된 원자로를 확인하면서 사고가 매우 심각한 규모라는 사실이 간접적으로 알려졌다. 소련이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보도하기 시작한 것은 5월 6일에 이르러서였다.

■ 소련의 방사능 제거를 위한 노력
 ≫ 방사능의 누출을 막기 위한 최초의 조치로 냉각 장치를 내장한 콘크리트 판을 4호기의 지하에 설치하는 작업이 수행되었다. 이 판들은 고온의 노심을 냉각시키려는 목적과 함께, 노심의 열에 의해 용융된 액체 상태의 방사성 물질이 지하수로 흘러드는 것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이 작업은 약 400명의 작업자에 의해 15일간 진행되었다 콘크리트 판 설치가 완료된 후, 지상에 노출된 노심에 남아있는 핵연료와 방사성 물질에 의한 방사능 누출을 막기 위하여, "석관"(sarcophagus)이라 불리는 콘크리트제 봉인 시설을 건설하는 작업과, 사고 지점 근처에 있는 댐과 호수의 방사능 오염 제거 등의 작업이 먼저 시작되었다. 이 작업에는 약 22만 6천명 정도의 인원이 참여하였다. 호수의 방사능 오염 제거 작업은 1986년 9월경에 완료되었으며, 봉인 시설은 11월에 완공되었다. 이 작업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남아있는 원자로 시설과 발전소 진입로, 그리고 그 주변 지역의 방사능 오염 제거 또한 이루어졌다. 이 작업은 1987년까지 계속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방식이 사용되었다.
1. 오염된 시설의 표면과 장비에 액체와 모래, 증기 등을 분사하여 오염 물질을 청소
2. 오염 지역의 표토를 제거하고 매립
3. 오염된 시설의 표면을 고분자로 코팅한 후 제거함으로써 고분자에 붙은 먼지 입자 등의 방사능 오염 물질을 제거
4. 도로와 기타 아스팔트 포장된 구역의 재포장

■ 폭발현장에서의 시민 희생 : 키예프 시가지지역의 방사능 노동절 축제

(키예프 시가지의 방사능오염수치를 나타낸 표시 : 붉은색은 심각하게 오염된 지역)

 ≫ 폭발현장의 화재를 진압하기위해 소방관들이 보호장구도 없이 급파되어 화재를 진압하려고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원자로의 화재는 쉽게 진화되지 않았고 투입된 소방관들 2명은 그날 저녁에 사망했다. 나머지 28명도 모두 몇개월 안에 치사량의 피폭때문에 사망한다. 가공할 방사능오염물질들이 바람을 타고 온 유럽을 뒤덮었다. 체르노빌의 당사자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도 오염되었다. 


 ≫ 5월은 공산국가의 가장 큰 기념일중 하나인 메이데이(노동절) 축제가 있고 소련은 심각하게 오염된 키예프에서 노동절축제를 강행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사태가 심각하지 않다는 믿음을 주어 사람들의 패닉을 잠재우기 위한 대국민 사기극이었다. 정상치의 수천배가 넘는 방사선수치 속에서 강행된 노동절 축제기간중 수많은 사람들이 피폭되었고 관련통계는 거의 집계발표되지도 않았다. 또한 1986년의 노동절 축제 관련 기록사진 및 필름은 우크라이나 국립 기록 보관원에서 모조리 삭제되었다.


 ≫ 사태 발생 초기에 붕산 모래 혼합물 투하작전에 투입된 소련병사. 평균연령 20대였던 소련군인들은 대부분 작업후에 피폭후유증으로 며칠 못넘기고 모스크바 6호병원에서 사망했다. 그중 27명은 빠르게 죽었다.

 ≫ 2차 폭발의 위험이 제거된 후 소련군이 복구작업에 투입된다. 엔지니어인 레프 볼차코프가 설계한 거대한 콘크리트와 철의 석관을 4호기 위에 덧씌우는 작업에 대량의 공병차량과 크레인, 불도저가 투입된다. 작업원들은 피폭을 최대한 줄이려고 운전석에 납으로 된 판을 부착해 급조하고 작업시간을 최대한 줄여 피폭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작업중 난관에 부딪치는데, 폭발한 원자로의 흑연이 4호기 지붕위를 완전히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각각의 파편들은 제각각 시간당 500~1500 뢴트겐을 뿜어대고 있었고 이런 극한의 상황에 사람은 들어갈 수 없었다. 그들은 로봇을 투입해서 제거작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강렬한 방사선속에서 작업하던 로봇들의 회로가 망가져버려서 결국 사람을 투입하기에 이른다. 이런 환경에 인간을 보낸다는것 자체가 용납될 수 없는 미친짓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투입된 병사들을 바이오 로봇이라고 불렀다.

■ 폭발현장에서의 시민 희생 : 니콜라이 타라카노프장군의 기록필름


(니콜라이 타라카노프 장군)

 ≫ 수습작전을 지휘한 니콜라이 타라카노프 장군. 그가 부하들을 방사능지옥에 투입하면서 한 말이 기록필름으로 남아있다.


 : 동무들, 자네들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해


 : 이틀 전에 내가 한 장교와 함께 저 지붕위로 올라가봤는데,


 : 한 가지 확실하게 알게된 것은


 : 저 위쪽에 올라가봐도 별로 두려워 할 것은 없다는거야.


 ≫ 그들은 시간당 10000 릔트겐의 방사선에 피폭되었고, 병사들은 방사능덩어리들을 삽으로 떠내거나 맨손으로 집어서 옮겨야 했다. 각각의 파편들은 시간당 1500뢴트겐을 뿜어댔고, 이렇게 폐기물들을 쥐고 있던 병사들은 곧 손에서 대단한 통증을 느꼈으며 나중에는 주먹을 쥘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체르노빌 추가 피해는 많은 시민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막을 수 있었다.


출처 : 체르노빌의 진실(http://m.jjang0u.com/chalkadak/view?db=160&no=177100)

,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사고 위키 : https://ko.wikipedia.org/wiki/%EC%B2%B4%EB%A5%B4%EB%85%B8%EB%B9%8C_%EC%9B%90%EC%9E%90%EB%A0%A5_%EB%B0%9C%EC%A0%84%EC%86%8C_%EC%82%AC%EA%B3%A0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이유 그리고 그 과정 #1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체르노빌 사고 그 사건,사고의 진실 그리고 시민들의 희생 #3


■ RBMK 이해전에 숙지

: (제어봉)

 ≫ 원자로는 연쇄핵분열 반응을 통해 열을 생산하는데, 제어봉은 연쇄핵분열의 매개체인 중성자를 흡수해 연쇄핵분열 속도를 조절하는 도구이다. 제어봉을 만드는데 이용되는 물질들은 중성자의 에너지 변화에 따라 중성자 포획 능력이 달라지므로, 제어봉 집합체는 원자로의 다양한 중성자 에너지 영역에 맞추어 설계해야 하며, 보통 은, 카드뮴, 붕소, 인듐이 재료가 된다.

 : (노심)

 ≫ 원자로의 핵연료를 담고 있는 원자로의 부품으로, 핵반응이 일어나는 곳이다. 노심 안에는 핵 연료와 제어봉 있고, 냉각재가 상실되면 중대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체르노빌 사고와 관련 있음), 노심에 핵분열로 생긴 열이 쌓이면 노심의 구조물이 녹거나 파손되는데 그 자체가 파손되어 방사성 물질이 주위에 확산될 수 있다.



■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원자로 (RBMK)

 ≫ RBMK 또는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黑鉛減速沸騰輕水壓力管型原子爐)는 소비에트 연방이 개발한 원자로 형식으로, 러시아어 Реактор Большой Мощности Канальный(영어: Reaktor Bolshoy Moshchnosti Kanalniy, 채널형 고출력 원자로)의 첫글자를 따서 RBMK라고 부르며, 현재는 소비에트 연방[각주:1]이 만든 흑연감속 원자로의 뜻으로만 사용된다. RBMK는 체르노빌 사고를 일으킨 원자로 유형이며, 2004년 현재 더 이상의 건설계획은 없으며 체르노빌의 마지막 RBMK는 2000년까지 폐로되지 않았고, 2012년까지 적어도 11개의 RBMK 반응로가 러시아에서 운영되고 있다

 ≫ RBMK는 소련의 플루토늄 생산용 원자로를 기반으로 한 원자로를 만드는 소련의 프로젝트 중 최고의 작품이었다. 세계 최초 원자력 발전소(최초로 원자로에서 전력생산)에 쓰인 첫 번째 RBMK인 AM-1은 5MW의 전력(열효율 30MW)을 오브닌스크[각주:2]에 1954년부터 59년까지 공급했다.

 ≫ RBMK는 경수[각주:3]를 냉각재로 감속재[각주:4]로 흑연[각주:5]을 사용하며, 연료로는 천연우라늄을 사용할 수 있으며(일반적으로 2.4%의 농축우라늄을 사용한다), 압력관 갯수만 늘리면 원자로를 크게 만들수 있고, 또한 운전중 연료교체가 가능하기 때문에 운전성이 높다는 장점이 있다. 그 대신, 다른 원자로 유형에 비해 불안정하다는 단점이 있다.


■ RBMK의 설계

 ≫ RBMK는 흑연 감속재를 통과하는 7m 가량의 압력튜브로 되어있으며, 냉각재로 물을 사용하는데 비등수형 원자로와 비슷한 온도인 290°C 정도로 비등한다. RBMK의 연료는 저농축 우라늄을 사용하며, 3.5 미터 길이의 연료집합체에 장착한다. RBMK는 감속재로 흑연을 사용하기 때문에 엇나갈경우 체르노빌 사고와 같은 재앙이 일어날수 있다.

 ≫ 일반적인 RBMK의 노심에는 3000개의 연료 집합체를 넣을 수 있다. 연료집합체는 우라늄 산화물 펠릿[각주:6]으로 가득찬 연료봉의 집합으로 되어 있으며, 밑부분에는 연료봉의 버팀목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시켜 주는 금속 받침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노심은 연료집합체에서 끌어낸 열 에너지를 잠시 저장해두는 역할을 하고 있다. 원자로가 가동하면, 연료속의 235U가 연쇄반응을 내면서 줄어들게 된다. 몇몇 238U원자들은 여분의 중성자를 얻어 분열가능한 플루토늄으로 변화하여 에너지를 낸다. 이 반응으로 세슘이 생성되며, 이런 세슘은 연쇄반응과 열생산을 저해시킨다. RBMK는 운전중 연료교환이 가능하여, 다른 원자로에 비해 가동률을 높일 수 있다.


■ RBMK의 안정성

 ≫ RBMK의 디자인은 정상 운전, 그리고 비상시 상황에 필요한 몇몇 안전 시스템이 있다. 그중 하나는 노심 출력을 감시하는 피드백 센서로, 출력이 증가할시 자동적으로 제어봉을 노심에 삽입하여 출력을 낮추고, 반대로 출력이 낮아질시엔 제어봉을 인출하여 출력을 높인다. 만약 이 센서가 갑자기, 과격하게 출력이 오르는걸 감지하면, 211개의 붕소 제어봉이 노심으로 들어가 반응을 중단하는 원자로 보호 시스템이 있다. 이 시스템은 필요로 하거나, 혹은 운전원에 의해 자동적으로 실행된다.

 ≫ RBMK 원자로는 발전소와 주변환경의 방사선을 감시하는 방사선 모니터링 관측소가 있으며, 매우많은 차폐벽이 방사선을 흡수하고, 일반 운전과 비상 상황 모두를 포괄한다. 그리고 또한 RBMK은 사고 국부화 시스템이 있는데, 이 시스템은 격리에 도움이 되나, 이 시스템은 오직 약간의 국소 파이프 고장에만 도움이 되었고, 체르노빌 사고에선 무용지물이란걸 보여줬다.


■ 체르노빌 사고 이후 개선

 ≫ 체르노빌 사고이후, 모든 운영중인 RBMK는 여러 안전조치를 추가하였다. 제일 크게 바뀐곳은 RBMK의 제어봉 설계였다. 예전 제어봉 설계는 흑연 감속재의 위에 있어서, 연쇄반응을 조절하기 위해 제어봉을 삽입하면 제어봉은 흑연에 걸려 느리게 내려가거나 혹은 멈춰있는 경우가 있었다. 체르노빌 사고에서는 이 하자로 인해서 체르노빌 원자로의 첫 번째 폭발을 도왔다. 새로 바뀐 개선점은 다음과 같다.

  1. 연료 농축률을 2%에서 2.4%로 높였다. 이로 인해 중성자 흡수율이 높아져 원자로 제어의 신뢰성을 높였다.
  2. 수동 제어봉 갯수가 30에서 45개로 늘어났다.
    (수동 제어봉 개수에 대한 문제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이유 그리고 그 과정 #1에서 다룬다)
  3. RBMK 설계가 위험하기 때문에, 80개의 추가 중성자 흡수재가 저출력을 억제한다.
    (저출력 관련 문제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이유 그리고 그 과정 #1에서 다룬다)
  4. SCRAM (원자로 긴급 정지) 시간을 18초에서 12초로 단축시켰다.
  5. 예방책으로 긴급 안전시스템에 승인되지 않은 접근을 대비하였다.

출처 :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https://ko.wikipedia.org/wiki/%ED%9D%91%EC%97%B0%EA%B0%90%EC%86%8D_%EB%B9%84%EB%93%B1%EA%B2%BD%EC%88%98_%EC%95%95%EB%A0%A5%EA%B4%80%ED%98%95_%EC%9B%90%EC%9E%90%EB%A1%9C)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이유 그리고 그 과정 #1


  1. 소비에트 연방 : 러시아(구 소련의 명칭) [본문으로]
  2. 오브닌스크 : 러시아 서부, 칼루가 주 북동부의 도시. 모스크바 남서쪽에 위치. 인구 10만 8000명. 1955년 러시아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가 세워진 곳. [본문으로]
  3. 경수 : 보통의 물을 상대하여 이르는 말. [본문으로]
  4. 감속재 : 원자로 안에서 핵분열의 연쇄반응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연료체로부터 방출되는 중성자를 감속시키는 물질. [본문으로]
  5. 흑연 : 수정과 같은 결정구조를 가지는 육방정계에 속하는 광물로 석묵이라고도 한다. 흑색을 띠며 금속광택을 가진다. 전기의 양도체, 연필심·도가니·전기로·아크 등의 전극 등에 사용되며 활마재로도 사용된다. [본문으로]
  6. 펠릿 : 원자로에 쓰는 산화우라늄이나 산화플루토늄 가루를 원기둥 모양으로 만들어 고온에서 구워 굳힌 것. 이것을 헬륨 가스와 함께 피복관(被覆管)에 밀봉한 것을 ‘연료봉’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RBMK) #2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체르노빌 사고 그 사건,사고의 진실 그리고 시민들의 희생 #3


■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 정식 명칭은 V.I. 레닌 공산주의 기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이름답게 입구에는 레닌 흉상까지 있었다고 한다. 1971년에 착공되어 1978년 5월에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상용운전을 개시했던 구 소련의 원자력 발전소로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 방식이다.  이 방식의 원자로는 기술이 많이 필요 없고 가격이 싼 편이지만 안전성이 상당히 낮은 데다 제어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소련이 자기네들이 쓰던 군사용 플루토늄 생산로를 대충 고쳐서 전력용으로 써먹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원자로로는 영국에서 개발한 마그녹스가 있다. 

 ≫ 체르노빌 발전소는 총 4기의 원자로를 운용 중이었고, 2기의 원자로를 추가로 짓고 있었다. 그 중 사고가 일어난 체르노빌 원자로는 현재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국경 근처에, 체르노빌에서 북서쪽으로 약 18 km 떨어진 곳에 있다. 사고로부터 2년 후 죄책감으로 자살한 발레리 레가소프에 의하면 이미 사고 이전부터 소련 정부는 이 흑연감속 비등경수 방식의 발전소의 위험성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를 은폐했다고 한다.


■ 체르노빌 사고

 ≫ 체르노빌 발전소의 원자로 4호기의 비정상적인 핵 반응으로 발생한 열이 냉각수를 열분해시키고, 그에 의해 발생한 수소가 원자로 내부에서 폭발함으로써 생긴 사고이다. 폭발은 원자로 4호기의 천장을 파괴하였으며, 파괴된 천장을 통해 핵 반응으로 생성된 다량의 방사성 물질들이 누출되었다.


■ 불안정한 체르노빌 원전

 ≫ 방송에서 체르노빌 사고는 원전의 기술자와 책임자와의 작은 갈등에서 시작한다. 원자로가 불안정한 상태에서 가동시키는 것은 위험하다며 기술자들은 몇번이고 건의를 했으나 책임자는 "당장 출력을 높이지 않으면 자네는 해고야" 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원자력 출력에 앞서 테스트를 하기 위해 원자로를 제어하는 제어봉을 빼내는 과정이 필요한데, 오전 12시 54분 비상벨이 울리자 당황한 책임자는 안전 수칙을 무시하고 테스트를 중지시킨다. 충분히 발전시킨 후 터빈을 끄려고 했으나 계속해서 출력이 올라가는 문제가 발생한다. 조작원들은 황급하게 원자로 가동을 중지하려 했으나 제어봉이 삽입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직원들은 혼란에 빠지고 원자로를 냉각시키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 체르노빌 사고 발생의 원인

 ≫ 사고 전날인 4월 25일에 원자로 4호기는 정기 점검을 위해 가동이 잠시 중단될 예정이었다. 원자로 4호기에는 이전부터 원자로의 가동 중단에 대비해 원자로의 가동 중단시 냉각 펌프와 다른 제어 장치들을 가동할 수 있는 3기의 비상용 디젤 발전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 발전기들은 충분한 전력을 생산하기까지 약 1분의 시간이 걸렸고, 그 때문에 원자로의 가동 중단 시 즉시 냉각 펌프가 작동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불확실하였다. 그 때문에 발전소에서는 주 전원이 끊어진 상태에서 원자로의 터빈이 관성에 의해 회전할 때, 그 회전 에너지가 원자로의 냉각 펌프 등에 얼마나 오랫동안 충분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실험을 계획하였다. 이 실험은 이전에 작동 정지가 있을 때에도 행해진 적이 있었지만, 터빈으로부터 공급되는 에너지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감소하여 결과가 도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전소에서는 결과 도출을 위해 재실험을 하기로 하였다.


■ 체르노빌 사고 발생의 이유 이해전에 숙지

(제어봉)

 ≫ 발생이유를 따져보기 전에 제어봉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원자로는 연쇄핵분열 반응을 통해 열을 생산하는데, 제어봉은 연쇄핵분열의 매개체인 중성자를 흡수해 연쇄핵분열 속도를 조절하는 도구이다. 제어봉을 만드는데 이용되는 물질들은 중성자의 에너지 변화에 따라 중성자 포획 능력이 달라지므로, 제어봉 집합체는 원자로의 다양한 중성자 에너지 영역에 맞추어 설계해야 하며, 보통 은, 카드뮴, 붕소, 인듐이 재료가 된다.

(노심)

 ≫ 원자로의 핵연료를 담고 있는 원자로의 부품으로, 핵반응이 일어나는 곳이다. 노심 안에는 핵연료와 제어봉 있고, 냉각재가 상실되면 중대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체르노빌 사고와 관련 있음), 노심에 핵분열로 생긴 열이 쌓이면 노심의 구조물이 녹거나 파손되는데 그 자체가 파손되어 방사성 물질이 주위에 확산될 수 있다.


■ 체르노빌 사고 발생의 이유

 ≫ 체르노빌 원전의 실험은 위 언급과 같이 회전 에너지가 얼마나 오랫동안 충분한 전력을 공급하는가이다. 

 ≫ 원인 1 : 원전은 출력강하 실험중이였다. 실험 중 배전담당자는 당일 오후 11시까지 전력을 공급할 것을 발전소 측에 요청하였고, 원전의 출력강하를 정지시켜 실험을 중단했다. 노심이 정상 상태라면 중성자를 흡수해 안정한 상태로 돌아가지만 원자로의 낮은 출력 상태가 지속되면서 노심에 있는 중성자의 수가 줄어들었고 축적되기 시작했다.

 ≫ 원인 2 : 전력 공급을 끝낸 후, 출력강하가 시작되었고 출력을 목표 수준으로 올리기 위해 실험을 진행하던 운전요원들은 수동조작을 통해 제어봉을 제거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조작으로 출력이 상승했으나, 200MW에서 멈추었다. 이는 원인 1의 중성자가 줄어들었던 것이 원인이 된다. 원자로 출력이 정상보다 낮았기 때문에 삽입되어 있는 제어봉을 계속하여 인출하였다. 당시 노심엔 안전 기준인 30개 보다 훨씬 적은 6~8개만이 제어봉이 있었다.

 ≫ 원인 3 : 원인 1의 낮은 출력과 원인 2의 제어봉의 과도한 인출은 모두 안전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 원인 4 : 원자로에서 발생하는 증기의 응축수[각주:1]를 제거하고 증기만을 과열기로 공급하는 기수분리기가 있는데, 이 기수분리기는 노심의 증기량이 감소하면 기수분리기에 의해 비상노심냉각장치[각주:2]가 작동된다. 실험의 일환으로 원자로의 냉각 시스템에 달린 냉각 펌프 중 정상상태에서 가동하지 않는 펌프 2개를 작동시켰다. 이 과정에서 증기가 감소했고 기수분리기를 통과하는 증기량이 감소하여 기수분리기로 인한 비상노심냉각장치를 작동하지 않도록 조작했다.

 ≫ 원인 5 : 원인 4 조작으로 증기량이 감소했고 증기량 감소로 인해 발전용 터빈에 도달하는 증기가 차단되었다. 냉각 펌프에 전달되는 전력은 감소하였고 그에 따라 냉각 시스템에 흐르는 냉각수의 양이 부족하기 시작하였다. 냉각수 부족으로 내부에서 발생한 열이 충분히 냉각되지 않게 되었고, 이 열은 냉각수를 끓여 노심에 증기의 양을 늘리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핵반응 속도가 증가하여 핵연료가 급격하게 분열하기 시작한다.

 ≫ 결과 : 기술자들은 긴급 정지 시스템을 작동시켰고 제어봉을 다시 삽입했지만 제어봉이 이전의 조치로 완전히 빠져있었고 이것들이 완전히 삽입되어 출력을 제어하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이로 인해 출력은 정상 출력의 100배로 치솟았고 냉각수를 끓어오르게 하여 반응로가 감당할 수 있는 한도 이상으로 증가되었고, 폭발했다.


(발레리 레가소프)

■ 발레리 레가소프 박사

 ≫ 발레리 레가소프는 소련의 저명한 과학자 였고 모스크바 주립 대학 화학기술과 학장이였다. 체르노빌 사건 발생후 그는 사건의 원인과 사고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며 지역 상황을 정부가 빨리 알 수 있도록 하는 조사 위원회 소속, 당시 모든 사건의 발생 원인과 그 과정들을 상세히 조사하였고 동료와 과학자들에게 얘기하는걸 주저하지 않고 당장 프리피야트 주민들의 철수를 주장했지만, 사건은 벌어집니다. 당시 원자력 발전소의 원인은 사실 원자로 자체에 결함으로 인해 일어난 사고였지만, 당시 소련 정부의 압력으로 인해 비엔나에서 열린 국제 원자력 기구 특별 회의에서 원자로의결함이 아닌 원자로를 당시 운영했던 연구원들의 과실이라고 말하며 그 연구원들을 비난하고 맙니다. 그는 체르노빌 사고 조사 과정에서 방사선에 너무 많이 노출되면서 건강조차도 급격하게 악화됐으며 그 이후 1988년 결국 그는 체르노빌 원전사고 2년이 되는 해에 자신의 집 아파트에서 목을 매고 자살로 자신의 거짓 증언을 속죄하게됩니다


■ 발레리 레가소프 박사 (자살전 마지막 녹취)

 ≫ 당시 그는 죽기 전에 테이프와 자신의 조사 보고서를 남긴채 죽었다. "장관님 죄송합니다만, 지금 이해를 못하시나 본데, 지금 원자로가 불타고 있어요. 흑연 감속재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양의 방사능 물질인데다가 지금 노심이, 불타고 있어요. 2만 5천 톤에 달하는 탄소가 시간당 1톤씩만 탄다고 가정해도 석 달입니다. 지금까지 전 세계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에서 방출된 방사능보다도 훨씬 많은 양의 방사능이 매일 방출될 겁니다. 매일! 석 달 동안요! 오늘 밤 이 도시에서 잠자리에 드는 많은 사람들이 내일 시체로 발견될 거예요. 이 방에 있는 모든 분들의 몸 속에도 방사능이 들어갈 것이고,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집니다. 더 이상 속일 수 없어요! 이건 범죄 행위예요! 이건 막아야 합니다! 그냥 내버려 둔다면, 절대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없어요!"

.......

"솔직히 처음 전 자랑스러웠습니다.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했고 역사상 가장 큰 규모였지만, 우리 소련의 기술과, 우리의 인력이 위기를 잘 극복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으니까요. 만사가 다 순조로워 보였죠.


방사능에 노출되면 몸이 쇠약해지고, 치료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처음엔 어지럽고 구토 증세를 보이다가 혀처럼 민감한 곳이 부풀어오르고, 피부가 검어지면서 떨어져 나가고 온 몸의 세포들이 삭아버립니다. DNA까지 완전히 변해서, 방사능에 노출된 이후 서서히 죽어가게 되는데, 더 이상 인간의 몰골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너무 끔찍해서.. 그 날 밤부터 예상치 못한 시체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쓰러진 직원을 옮기던 소방관들도 쓰러지기 시작했지요. 온 몸의 피부가 방사능을 그대로 흡수하듯, 가슴 속 깊은 곳까지 극한의 공포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내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상상을 초월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 결론지어버리게 됩니다.

 

4월 26일 아침은 아주 따뜻하고 아름다운 날씨였습니다. 하지만 해가 뜨기도 전에 맑은 하늘은 이미 변해 있었고, 모든 것이 오염되어 있었어요. 먼지와 머리카락, 옷, 수돗물, 농작물, 가축까지. 만들던 음식과 우유도 모두, 독극물이었습니다.

 

이미 소문이 퍼졌지만 일부만 피난을 떠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문을 믿지 않았습니다. 평균치보다 400배나 많은 방사능이 공기 중을 떠다녔지만, 3만 5천여명의 주민들은 위험하지 않다는 말만 믿고 토요일 오후를 보냈습니다. 여전히 경고 방송조차 없었지요.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아이들의 갑상선이 방사능을 흡수했지만, 요오드조차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죄책감을 부정할 수 없었고, 물집 생긴 피부를 보며 더 이상 거짓을 말할 수도 없었죠. 하지만 윗사람들은 알면서도 아예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진실이란 살인마보다도 더 위협적인 것이었습니다.

 

소란이나 소동도 없었습니다. 결국 11만 6천여명의 사람들이 소개됐고, 몇 분이면 될 결정을 내리는 데에 몇 달이 걸렸습니다. 몇 년 동안의 경기 침체와 이기적인 관료주의를 겪으며, 이제 남은 건 고통과 잔인한 결단력 뿐이었습니다. 위원회에서 회의를 할 때도, 우리는 조심스럽게 이 일의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서 몇 사람의 희생이 따라야 일을 처리할 수 있을지를 따졌습니다. 그 동안 방사능의 수치는 하룻밤 새 200만에서 400만 뢴트겐으로 상승했습니다.

 

열폭발을 막기 위해 저장고의 물을 빼내야 했고, 소방관들이 펌프를 작동하고 있었지만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방사능에 오염된 물 속으로 잠수부들이 들어가 밸브를 수동으로 열어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우리가 그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랬지요. 우린 군인들에게 진실을 말했고, 그들은 우리를 믿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이게 꼭 필요한 일이냐고 물었고, 우린 할 말이 없었습니다.

 

우린 해 냈고, 결국 100만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죠.

 

곧 제어실의 연구원들이 죽어가자 사람들은 정의의 심판이라 말했지만, 진실은 그보다 훨씬 더 끔찍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구한 용감한 자들과 다르지 않았어요. 우리는 그들에게 위험성을 설명해 주지도 않았고, 제어봉과 원자로에 대한 진실을 감추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믿었죠. 진실을 감춘 이상, 참사는 불가피했습니다.

 

저는 솔직하지 못했지요. 비엔나 국제 회의에 온 전 세계의 사람들 앞에서 제어실의 연구원들을 비난했고, 그들의 무지 속에서 제가 한 일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솔직히 밝히고 허상을 폭로하려 했지만 제가 쓴 보고서나 인터뷰 기사들은 발표되지 않았고, 전 그저 경력에 오점을 남겼을 뿐이었지요.

 

비밀주의는 재앙을 가져올 뿐입니다.

 

이제 2년이 흘렀습니다. 그 날 이후, 사고가 난 날부터 난 너무 힘들었어요. 전 그냥.. 그저.. 단지..."


■ 참고, EBS 다큐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후쿠시마원자력발전소 [福島原子力発電所(복도발전소)] (두산백과)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mystery&no=444207&page=1)
, (http://instiz.net/pt/154606)

, 체르노빌 실험 출처 : (http://www.world-nuclear.org/information-library/safety-and-security/safety-of-plants/chernobyl-accident.aspx)

,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사고 위키 : https://ko.wikipedia.org/wiki/%EC%B2%B4%EB%A5%B4%EB%85%B8%EB%B9%8C_%EC%9B%90%EC%9E%90%EB%A0%A5_%EB%B0%9C%EC%A0%84%EC%86%8C_%EC%82%AC%EA%B3%A0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RBMK) #2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체르노빌 사고 그 사건,사고의 진실 그리고 시민들의 희생 #3



키워드 : 사고, 역사, 우라늄, 방사능, 원자력, 발전소, 원자, 체르노빌, 후쿠시마, 지진, 실험, 위해, 악재, 누출, 사고, 사태


  1. 응축수 : 열교환기에서 생기는 수증기의 응축물, 온도가 하강함으로써 생성된 물과 같은 액체. [본문으로]
  2. 비상노심냉각장치 : 대량의 냉각재를 노심에 공급해주어 노심을 안전하게 정지시키는 장치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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