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을 보는 분들에게 말씀

 ≫ 노무현 대통령께서 뇌물을 받았다는 증거 기사가 있다면, 댓글로 출처를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증거는 없었고 모두 거짓이라는 기사와 증언이 쏟아졌습니다. 2015년 이인규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에 의해 밝혀졌지만, 대검찰청에 억대의 피아제 시계 뇌물 논란 또한 국정원의 대국민 망신주기 언론 플레이였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는 적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는 시민만을, 약자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故 노무현 대통령 묘소


■ 노무현 대통령의 퇴임

 ≫ 노무현 대통령은 검찰의 뇌물수수혐의 수사 도중 국정원의 모욕주기 언론플레이에 고통받았다. 사망 이후에도 인터넷 여론공작으로 고인 모독을 당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말로 뇌물을 받았을까? 노무현 대통령은 진짜로 차명계좌를 통해 비리를 저질렀을까? 그 진실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보았다. 


■ 노무현 대통령의 차명계좌

 ≫ 조현오 전 청장은 서울경찰청장으로 재직하던 2010년 3월 일선 기동대장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2009년 노 전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날 10만 원권 수표가 입금된 거액의 차명계좌가 발견돼 자살에 이르렀고, 권양숙 여사가 특검을 막기 위해 민주당에 부탁했다"는 허위 발언을 했다. 조현오 경찰청장 내정자의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과 관련, 검찰이 차명계좌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고 문화일보가 2010년 8월 19일 보도했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이날 “(차명계좌 존재 여부 확인에 대해) 하나하나 들여다보겠다”며 “아직 사건이 접수만 됐고 2010년 8월 19일, 검토해서 배당할 것”이라고 신문에 말했다.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2012년 9월 대법원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 유족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조현오 전 경찰청장에 대해 징역 8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차명계좌 설은 결국 "찌라시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현오 전 경찰청장은 수감 8일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조현오 전 청장은 이후 재판과정에서 발언의 출처나 근거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거나 오락가락하는 발언을 했다.


2010년 3월 31일 당시 조현오 서울지방경찰청장은 기동부대 지휘요원 398명을 대상으로 열린 특별교양 강연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기를 앞둔 시점에 나온 그의 발언에 여론의 시선이 집중됐다. 서울경찰청장은 고급정보를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뭐 때문에 사망했습니까? 뭐 때문에 뛰어내렸습니까? 뛰어버린 바로 전날 계좌가 발견됐지 않습니까, 차명계좌가? 10만 원짜리 수표가 타인으로, 거액의 차명계좌가 발표돼, 발견이 됐는데, 그거 가지고 아무리 변명해도 변명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거 때문에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린 겁니다."


관련기사 : 검찰 "노무현 차명계좌 존재하는지 들여다보겠다 2010년 8월 19일 기사

관련기사 : 대법원 '노무현 명예훼손' 조현오, 실형 확정... 왜? 2014년 3월 13일 기사


■ 동아일보의 노무현 죽이기 결국엔 가설.

 ≫ 검찰이 조 전 청장을 사자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기소하기 직전인 2012년 5월 <동아일보>는 "조현오 前 경찰청장 '어느 은행, 누구 명의인지 다 까겠다'"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 신문은 기사에서 "조현오 전 경찰청장 3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차명계좌가 어느 은행에 누구 명의로 돼 있는지 검찰에 출석해 모두 까겠다'고 말했다"며 "이에 따라 노 전 대통령의 차명계좌를 둘러싸고 커다란 정치적 파장이 일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동아일보>는 또 다음 날인 5일에도 "'조현오 파일 실체' 존재한다면 대선판 전체 흔들 '뇌관'"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12월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 '조현오 파일'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조 전 청장이 검찰에서 '노무현 차명계좌'의 객관적 근거를 제시한다면 야권의 대선 후보 구도는 물론이고 대선판 전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근거로 작성됐다.


관련기사 : 조현오 前 경찰청장 '어느 은행, 누구 명의인지 다 까겠다 2012년 5월 4일 기사


■ 노무현 대통령의 퇴임 후, 그리고 뇌물 수수

 ≫ 노무현 대통령은 2008년 퇴임 후 전임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고향 김해시 봉하마을로 귀향하였다. 이후 사람사는세상 사이트를 운영하며, 봉하마을 촌장으로 재임하는 등, 민중들과 교류를 추구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역차별 논란에도 불구하고 재임시절 친인척 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할 정도로 친인척 비리를 경계했으나 2009년 '박연차 게이트'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되었다. 박연차 게이트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 세종캐피탈 사장 사이의 세종증권 매각 사건을 조사하던 중 박연차가 수 많은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제공해온 것이 밝혀진 비리 사건이다. 검찰은 박연차가 노 전 대통령에게 15억 원에 대한 수사를 벌였으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차용증을 제시하였고, 사저신축비 용도로 빌린 개인 간의 금전 거래로 판단하여 무혐의 종결 되는 등 비리를 매우 경계했다. 이후 박연차가 권양숙 여사에게 건낸 100만 달러(약 10억-13억원 정도), 정상문에게 건낸 3억 원, 연철호에게 건낸 500만 달러에 대해 수사가 이루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은 임기중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에게 100만 달러와 3억 원을 요구하여 돈을 받은 것을 시인하였는데, 이 돈은 권양숙 여사가 개인 빚 청산과 자녀 유학비로 사용하였다고 밝혔다. 박연차-권양숙 간 돈이 오간 것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 본인은 인지하지 못했다고 주장하였으며, 차용증 등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검찰은 이 또한 개인 간의 금전 거래임을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입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처음 1기 검찰 수사진은 당시에 검찰 내부에서 명망있는 검찰들이었다. 몇 개월에 걸쳐 장기간 수사가 진행되었으나, 1기 검찰 수사진은 퇴임 이후 박연차와의 거래는 사적 거래라 수사할 내용이 없다고 보고 종결지었다.


노무현 재단, 사람사는 세상 사이트 : (클릭)

※ 노무현 재단의 슬로건은 "노무현은 지키지 못했지만, 노무현 정신만은 지키고 싶습니다"의 슬로건으로 기념관이나 교육,연구사업 나눔사업 및 회원참여 프로그램으로 봉사, 참여정부 정책총서 등을 발간하고 있다.



■ 대국민 망신 주기 언론플레이

 ≫ 1기 검찰 수사진의 수사가 종료되고, 수개월 후 2기 검찰 수사진이 꾸려졌다. 이인규, 홍만표 등이 합류하였고 이인규는 이전 수사진의 수사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주변 인물들이 차례차례 소환당했고 일가족 역시 소환당했다. 소환은 한 번이 아니라 수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면서 노무현 대통령을 조여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상황이 방송과 언론을 통해서 매일 매일 브리핑되는 가운데, 어쩐 일인지 검찰은 어떠한 액션도 하지 못한 채 3주 이상이나 지속되었다. 국내 모든 매체는 카메라를 봉하마을에 경쟁적으로 설치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심지어 방송사는 헬리콥터까지 동원하여 봉하마을을 촬영하기까지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홈페이지에 "저의 집은 감옥입니다."는 글을 남겼다. 모든 언론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공격하였고 흡사 온 세상이 압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여론은 노 전 대통령에게 매우 불리하게 형성되었다. 2015년, 이인규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은 “국정원이 노무현 대통령 수사 내용을 과장해 흘렸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인규 전 중앙수사부장은 <경향신문>에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받은 명품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언론보도 등은 국정원 주도로 이뤄진 것”이라며 “검찰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수사내용으로 언론플레이를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당시 원세훈 국정원장이 보낸 국가정보원은 대검찰청에 억대의 피아제 시계 뇌물 논란을 활용한 대국민 망신주기 언론 플레이를 제안하였고, 국정원 측이 자신들의 뜻을 일방적으로 관철하려 하자 검찰은 "수사권 침해"라고 반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검찰은 국정원 직원의 멱살을 잡으며 몸싸움까지 벌였다고 2015년에 2009년에 있던 일이 알려졌다. 이명박 정부가 ‘촛불집회’ 등으로 궁지에 몰리자 검찰이 이를 돌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는 게 정치권과 법조계의 분석이다. 결국 검찰도 국정원과 똑같은 충성 경쟁을 벌였다는 지적이다.


관련기사 : 盧 대통령 수사 두고 검찰과 국정원, ‘멱살잡이’까지 2015년 2월 27일 기사

관련기사 : [SNS] 이인규, 盧수사 폭로.. “공작정치의 끝” 2015년 2월 25일 기사 



■ 국정원의 여론 공작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한 직후, 국민장을 치루며 온 국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국정원은 노무현 대통령을 비하하는 인터넷 게시물 수천 개를 유포시키며 추모 분위기를 방해했다. 이후에도 국정원은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 노무현 대통령을 모욕하는 게시물을 지속적으로 생산, 유포했다. 국정원 직원이며 디씨인사이드에서 활동했던 닉네임 좌익효수(아이디 : chiwoo9300)는 인터넷에 지역감정 조장, 여성혐오, 차별주의적 정치관을 디시인사이드 정치사회 갤러리 위주로 피력[각주:1]했다. 그 중 하나를 가져오면, "홍어 종자 절라디언들은 죽여버려야 한다" 등이다. 닉네임의 뜻은 좌파를 효수(능치처참)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부적격자가 국정원 직원이었단 점에서 국격은 물론 국가기관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다.


관련기사 : 국정원 “놈현 큰 죄가 많았군요~”...서거 후 비하 댓글 수천개 추가 공개 2013년 6월 26일 기사



■ 노무현이 이명박 대통령께 보낸 편지

 ≫ 2008년 7, 8월 이명박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기밀을 빼돌렸다며 봉하마을을 압수수색하라고 지시했다. 압수수색을 지시했던 추측되는 이유는 당시 한/미 FTA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를 중점으로 진행중인 촛불시위 때문으로 추측된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 당시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대응 때 한마디로 "미국산은 위험하니 안된다" 였으나 이명박 대통령은 바로 통과시켰던 문제다. 당시 노무현 지지자들이 이명박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비교하였고 이명박 대통령이 그로 인해 노무현 대통령을 압수수색한 것으로 전해진다. (여론돌리기 및 노무현 잠재우기 등으로 추정)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통치기록을 봉하마을로 가지고 내려갔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와 청와대에서 합의를 본 사항이었다. 그러나,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이 일을 국가 기밀을 빼돌렸다로 지시했다. 노무현은 왜 통치기록을 가져갔을까? 그것은 "민주주의 2.0" 이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개설한 토론 웹사이트였다. 이 사이트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들어와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모든 토론의 형식이나 진행, 시스템 등은 회원 참여에 의해 결정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정책 등을 실시간으로 국민들과 토론하길 원했다. "민주주의 2.0" 을 만들기 위한 서버 컴퓨터 5대를 봉하마을에 가져간 것이다. 이 서버 5대를 이명박 정부는 국가 기밀이라며 일침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썼다고 한다.


(노무현이 정권 퇴임 후, 시민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하기 위해 만든 민주주의 2.0, 노대통령께서 서거하신 현재는 없다)


관련기사 : '민주주의 2.0' 문 열었다 2008년 9월 18일 기사




■ 그 외 노무현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부치지 않은 편지

 ≫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전에 이명박 대통령에게 썼지만 부치지 않았던 편지 1통과 검찰 수사 때 추가진술을 위해 준비했던 글 1편을 비롯한 미공개 글 2편이 공개됐다. 편지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관련기사 : 노무현이 MB에게 '부치지 않은 편지' 공개 2009년 10월 7일 기사

노 대통령의 서거, 편지에 대한 기록은 아래의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내 마음속 대통령
10점


출처 : 분노에 찬 기사 검색 / 구글 검색 및 나무위키 조사, 노무현 관련 책, 팟빵 라디오 등 여러가지


 

관련글 : [날짜확보] 노무현이 서거하신 이유 중 하나, 친일파와 전쟁한 노무현, 친일파 나라를 속이다

[시사 및 리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해외반응

  1. 피력하다 : 생각하는 것을 털어놓고 말함. [본문으로]

■ 해당 이야기에 대해 떠들어보기

 ≫ 친일파 청산이 아직도 이어지는 것과 당시 노무현 대통령께서 일궈낸 밭을 망치는 후대 대통령과 그 행위들을 보면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다. 노무현은 서민들을 위해 싸웠다. 부패한 정권과 싸웠고, 당내에서도 자기편은 소수였다. 모두가 그를 싫어했지만, 국민들만이 그의 편이였다. 마지막엔 국민들마저 실망감에 야유를 퍼부었다. 언론사들도 공격했다. 언론사들도 그의 적이었다. 내용을 정리하면서 이 아픈 마음을 어느 누구에게도 풀 수 없었다. 그냥 이 포스트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아주길 바랄 뿐이다. 친일파 청산 관련 내용의 뼈대는 아고라(출처는 맨 아래)에서 가져왔다. 관련 내용에 대해서 처음부터 신뢰하지 않았다. 아고라에서는 그 증거와 출처가 명확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쓴 글만 보고 그대로 믿고 내가 포스팅하게 된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다시 읽고 다시 포스팅하여 왜곡된 역사를 쓰고 써, 진실도 아닌 역사를 쓰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흔하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인터넷이기에 스크랩은 하되, 최대한 그 출처와 증거를 가져오려고 노력했다.



■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사태

 ≫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절 탄핵 가결일은 2004년 3월 12일이다. 왜 이 날 국회의원들은 탄핵을 결정한 것인가? 그 이유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은 국회에서 2004년 3월 2일이였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이 나온지 불과 10일만에 국회의원들은 들고 일어나 탄핵을 하려고 했다. 

[관련URL]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관련(뉴스 승인 날짜 참고) :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2088

[관련URL] 노무현대통령탄핵사태 날짜 두산백과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25242&cid=40942&categoryId=31778



▼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 후, 매우 좋아하는 국회의원. 친일파 또는 그로 이득을 얻은 분이 아닐까 의심해본다..



■ 노무현 대통령은 유일하게 친일파와 싸웠고 서민들을 위해 힘 쓴 대통령이였다.


■ 노무현 정권 때 만들어지고, 이명박 정권 때 폐지된 것들

 ≫ 이명박 대통령이 법을 직접적으로 없앴다는게 아니라, 간접적으로 없앴다. 그는 이러한 관련된 법을 유지시키지 않고 지키지도 않았다. 혹은 정말로 끝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학생 때 시민운동에 참여했던 그가 이제는 다른 방향으로 혁명을 돌린 것일까

 제 17대 이명박 대통령 재임기간 : 2008 ~ 2013

1.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4년간의 임무를 완수하고 2009년 11월 30일 위원회 활동이 종료되었다" 라는 글이 쓰여져 있다. 해당 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관련URL, 나무위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 https://goo.gl/xEzyb8


2.일제 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 아래 증거 뉴스의 등록 날짜는 2012-09-26일, 해당 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관련URL, 한겨레신문] "일제 강제동원 피해조사위 청와대, 연내 활동종료 주문"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3421.html


3.친일재산조사환수위원회 

 : 아래 증거 뉴스의 등록 날짜는 2010-07-12일 해당 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관련URL, 뉴스데스크] "친일 재산 조사위원회, 4년간의 활동 종료"  : http://imnews.imbc.com/replay/2010/nwdesk/article/2658824_18903.html


4.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모든) 정리조사위원회 

 : 아래는 증거의 위키백과이다. 연혁에서 2010년 12월 31일 해산되었다. 또한 아래 증거, 오마이뉴스에서도 설명한다. 해당 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관련URL, 위키백과] "대한민국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 https://goo.gl/R0ZlJE

[관련URL, 오마이뉴스] "우리는 왜 진실위 조사관 백서를 내는가" : https://goo.gl/tUlqkp


5.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 아래 증거 뉴스의 등록 날짜는 2009년 12월 6일이다. 해당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관련URL, 국민일보] "4년 활동 마치고 해체되는 군의문사진상규명위 윤원중 위원장" : https://goo.gl/CaKjP9


■ 노무현 정권 때 만들어지진 않았으나, 이명박 정권 때 폐지된 것들


1.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

 : 아래 증거 뉴스의 등록 날짜는 2013년 3월 7일이다. 해당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관련URL, 서울의소리] "이명박 국민들몰래...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폐지" : http://www.amn.kr/sub_read.html?uid=8389


2. 투표용지 보존 기간 축소

 : 아래 증거 글은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의 팀장 박대용 방송기자께서 쓰신 글이니 신뢰하여도 된다. 시행 날짜는 2012년 10월 2일이다. 해당년도는 이명박대통령 재임기간이다. 그리고 2012년 12월 19일은 대통령 19대 대선 선거일이다.

[관련URL, 박대용기자 블로그] "투표지 보존기간은 얼마까지 가능할까" : http://biguse.net/686


■ 노무현 정권 임기말 화폐 고액권 발표, 10만원권 김구 주석 확정 그러나..

 ≫ 노무현 정부 임기말 , "대한민국 화폐에는 독립유공자 애국지사분들이 단 한 분도 없다. 한국인이 없다." 라며 확정했지만, 이명박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12월초 10만원권 발행을 무기한 연기 직후 같은 달 발행결정을 취소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5만원권과 10만원권 등의 고액권 발행은 지난 정부에서 정식으로 발표하여 추진하던 사안이었다. 


 ≫ 당시 시점으로 1만원권이 나오고 나서 물가가 12배 이상 올랐으므로 고액권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7대 국회에서 먼저 여야 합의로 고액권 발행 촉구 결의안을 냈고(이것은 법률적 효력을 갖는다) 이를 수용한 정부에서 국민 여론을 조사한 후 5만원에는 신사임당, 10만원권에는 김구의 초상을 넣기로 결정한 바 있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14일 보수우익단체들이 한국은행 앞에서, '10만원권은 이승만, 5만원권은 박정희'라는 주장을 펼치며 시위를 한 후 한국은행의 태도가 돌변해 버린 것이다. 한국은행은 "정부의 요청으로 10만원권의 발행을 유보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관련URL, 오마이뉴스 발췌] "뉴라이트와 현 정부에 조롱당하는 김구 주석"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51135



■ 박근혜 정부 "항일 흔적 지우기"

 : 2014년 1월 1일부터 도로명 주소 전면 시행, 친일파 동아일보 창립자 김성수의 호를 딴 도로는 존치[각주:1]하고, 반면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의 호를 딴 서울 "명동우당로"는 명동 11길로 변경.


■ 클릭한 순간 노무현 대통령께서 서거하신 진짜 이유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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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존치하다 : 제도나 설비 따위를 없애지 아니하고 그대로 두다. [본문으로]





■ 나의 한마디

≫ 개인적으로 매우 존경하는 분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알고있는 역사책의 한국현대사가 아니라 나의 한국현대사라는 것이다. 보수진형에서 읽어본다면 꽤 반론이 많을 수 있는 내용들이 많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유시민의원께서 이 책을 쓰기 위해 정말 많은 문헌을 참고했고 그 노력이 읽는 내내 보였다. 어느 기사 참고부터 다른 책, 인물사 등을 샅샅이 뒤져보고 쓴 것이 보였다. 읽으면서 다시 한번 역사를 알아야 현재를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학생때는 그렇게 싫어하던 역사를 지금 나이에 다시 읽으면서 왜 선생님들은 이렇게 재미있게 설명해주지 않았을까 또는 내가 그만큼 관심이 없었나? 라는 회의감에 잠시 젖어본다.


■ 목차

1. 역사의 지충을 가로지르다 : 1959년과 2014년의 대한민국

2. 4.19와 5.16 난민촌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

3. 경제발전의 빛과 그늘 : 절대빈곤, 고도성장, 양극화

4. 한국형 민주화 :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한 민주주의 정치혁명

5. 사회문화의 급진적 변화 : 단색의 병영에서 다양성의 광장으로

6. 남북관계 70년 : 거짓 혁명과 거짓 공포의 적대적 공존


■ 왜 읽었는가?

≫ 개인적으로 매우 존경하는 분, 글도 잘 쓰시고 말쏨씨도 뛰어나며 서민의 편에서 나라를 생각하는 몇 안되는 분이기 때문에

≫ 필자는 한국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높다. 특히 과거 한국대통령들의 일대기가 궁금했다. 50년이 길다면 길고 멀다면 멀겠지만 가까운 역사인 만큼 현재가 보일 것이라 생각한다.

 

■ 내 마음대로 책 내용 3줄 요약

≫ 유시민이 말하는 한국근현대사이다. 그의 정치적 성향이 들어가있으며 개인적으로는 진보성향에 가깝고 그렇게 받아들이며 읽혀진다.

≫ 북한과 대한민국의 흐름, 당시 대통령들의 상황과 유시민의 추론이 들어가며 이승만부터 현재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유시민의원님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 대한민국 현대사를 만든 힘은 욕망이였다. 생리적, 안전, 소속감과 사랑, 자기 존중, 자아실현의 5가지 욕망이다.


■ 유시민이 말하는 북한과의 이야기

 (죽산 조봉암 나무위키 : https://namu.wiki/w/%EC%A1%B0%EB%B4%89%EC%95%94)

≫ 1959년 이승만 대통령은 조봉암을 법살했다. 청년 시절 열혈 공산주의자로서 투옥과 고문을 당하고 반일투쟁과 노동운동을 벌였던 죽산 조봉암은 해방 후 공산당과 결별했다. 정치에 투신해 국회의 헌법기초위원으로 제헌헌법을 만드는 데 기여, 대한민국 첫 농림부장관이 되었다. 그는 '북진통일론'을 비판하고 '평화통일론'을 주장한 죄로 교수형을 당했으며, 사형집행 임석검사에게 말했다. "나는 공산당도 간첩도 아니오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 져서 정치적 이유로 죽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할 것이오" 1959년 대한민국은 목숨을 걸지 않고는 권력의 불의에 대항하거나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행사할 수 없는 나라였다.

≫ 북한은 '미제 식민지 남조선의 해방'을 공공연히 주장하고 전쟁까지 일으켰지만 대한민국은 오로지 자기를 지키는 데 급급했다. 이승만 정부는 '북진통일', '멸공통일'을 외쳤지만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일재 잔재를 청산하지 않았으며 헌법이 명시한 민주주의를 실현하지도 않았다.

≫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북위 38도선 남북을 각자 점령한 미국과 소련에 있다. 애초에 자기 힘으로 광복을 이루지 못한 것은 우리의 부족함 탓이었다. 그렇다고 분단의 책임을 우리민족에게 묻는 것은 강도 피해자에게 범죄의 책임을 지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 유시민이 말하는 한국을 만든 힘

≫ 대한민국 현대사를 만든 힘은 5가지 욕망이였다. 안보국가 > 발전국가 > 민주국가 >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것은 인류의 문명사에서 보편적인 국가의 '계통 발생'이다. 국가의 진화는 '욕망의 위계'를 반영한다.


■ 유시민이 말하는 이승만

 (제1대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 이승만 박사는 1919~1925년까지 임시정부 대통령을 할 정도로 널리 인정받는 독립운동가였다. 투쟁보다는 외교에 치중한 나머지 힘도 없는 국제연맹에 조선을 위임통치해달라고 청원했다가 탄핵을 당해 임시정부를 떠났다. 그는 강대국 정부에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 일에 주력, 특히 미국 정부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했으며 1940년엔 일본이 미국을 침략할 것임을 경고하는 책을 출간해 미국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미리 승인해두지 않으면 독립하면서 소련의 손아귀에 들어가 동아시아 전체가 공산화될 것이라고 미국 정부와 국민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태평양에서 일본과 싸우는 데 소련의 협력이 필요했던 미국은 임시정부를 승인하면 소련 공산당을 자극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여 청원을 거절했다.

≫ 해방 후, 공산화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통일국가로 가는 길, 북한을 공산주의자들에게 주고 남한은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있었다. 후자의 대표자가 이승만 박사였다. 독재, 부패, 부정 선거를 저지르고 수많은 시민을 살상했지만 그는 분단국가를 세움으로써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확실하게 막았다. 하지만 아무리 빛나는 이념을 내세운다고 해도 사회 구성원 다수가 인정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나라의 국민이 기꺼이 받아들일 때, 국가의 결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복종할 때, 공동체를 지키려고 헌신하려는 태도를 보일 때, 그 국가는 정통성 있는 국가가 되며 자연스럽게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다.

이승만 정부는 절대빈곤에 빠진 국민의 경제생활을 개선하지 못했다.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제조업, 광업, 전력 등 일제강점기 산업의 중심지는 북한이었기 떄문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이며 정치인, 이승만을 비롯해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 김일성과의 라이벌 구도도 있었다고 함)

≫ 김구 선생을 비롯한 중도파들이 분단을 막으려고 38선을 넘나들며 협상을 벌이는 동안 이승만 박사는 분단국가의 권력을 장악할 준비를 했다. 이승만은 통일정부를 만드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면 분단을 막겠지만 통일국가의 권력을 공산주의자에게 뺏길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손을 잡았다. 자발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했다가 광복 후 '친미', '반공'의 깃발을 들고 살아남은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당시 반민특위[각주:1]는 682명을 조사해 559명을 특별검찰에 송치했다. 1949년 1월 반민특위가 노덕술을 체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을 즉각 석방하고 반민특위 관계자를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노덕술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해 고문했던 일제 특고형사가 아니라 반공정신으로 공산당을 때려잡는 대한민국의 경찰관이라는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반민특위 해체와 정부요인 암살 음모를 꾸몄다가 실패하자 특위활동에 앞장선 젊은 국회의원들을 간첩으로 몰아 구속했다. 이 사건으로 반민특위가 해체되는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국회는 1951년 반민법을 폐지한다. 처벌받은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 정부, 국회, 권력기관, 경제, 문화계에도 친일행위를 한 장본인이 권력을 쥐는 경우는 이제 거의 없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이 민족사적 정통성을 결여한 채 출발한 이유와 과정을 엄정하게 평가하고 철학적으로 소화하는 것뿐이다.


■ 유시민이 말하는 박정희

 ◀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서울시청 앞에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 소장

≫ 1961년 박정희 소장이 3,500여 명의 무장병력을 이끌고 헌법적 권한과 기능을 폭력으로 정지시키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혁명공약의 핵심은 두가지였다. 국가 자립경제 재건에 총력을 기울여 기아선상에 방황하는 민생고를 해결함으로써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과업을 이루면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는 것이다. '민생고 해결'은 아마도 박정희 소장의 진심이였을 것이지만 '병영복귀' 약속은 의도적인 거짓말이었다.

≫ 혁명과 쿠데타를 구분하는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쿠데타는 혁명과 달리 민중의 동의, 지지와 참여가 없이 폭력으로 국가질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행위이다. 군대를 동원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군사쿠데타다.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운영을 잘해서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고 해도 5.16이 군사쿠데타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 그는 국민의 관심과 지지를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부정선거를 저질렀던 내무부장관 최인규, 정치깡패 이정재, 조폭 두목 신정식, 발포 명령을 내린 대통령 경호실장 곽영주 등을 '혁명재판'에 회부해 사형을 확정한 다음 거리에 끌어내 '조리돌림'을 했다. 북한 인민재판이나 중국 문화대혁명 때 벌어진 것과 비슷한 야만행위였지만, 헌법과 법률의 절차를 지키느라 재판 절차를 지지부진하게 끌어가던 정부와 비교하면 당시 국민의 눈높이에서는 한결 속 시원한 응징이었다.

≫ 폭력으로 권력을 탈취했지만 폭력으로만 통치하지는 않았다. 고속도로와 비행장을 비롯한 사회간접자본을 건설, 전국에 상하수도와 전기를 보급했고 기생충과 전염병을 퇴치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결코 고결한 인간은 아니었으나 독재자로서는 크게 성공한 것이다.

1975년 5.13일 박정희 대통령은 유언비어 날조 유포, 헌법에 대한 부정,반대,왜곡,비방과 헌법개정 청원 선전/선동 등을 모두 처벌대상으로 규정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지 않으면 누구든 범죄가가 될 수 있었다. 1979년 10월까지 구속된 사람은 1,400명이었고 그중 1,000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정부는 대학생들을 대거 제적하고 감옥과 병영으로 보냈으며 대학교수와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언론자유수호투쟁을 벌인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함으로써 정부에 굴복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하는 시민들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대상은 사실 그의 인격과 행위가 아니라 그 시대를 통과하면서 시민들 자신이 쏟았던 열정과 이루었던 성취, 자기자신의 인생일 것이라고 유시민의원은 추측한다


■ 유시민이 말하는 김종필


≫ 박정희 참조들 가운데 가장 중요 인물은 김종필이었다. 1963년 공화당 당의장이 되었으며 2004년까지 9번이나 국회의원을 했다. 박정희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까지 40여 년 동안 정권의 '2인자' 역할을 했다. 1963년 고려대학교에서 강연을 한 데 이어 서울대 문리대에 가서 학생들과 토론회를 했다. 군사쿠데타의 주역이며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사람이 반정부투쟁을 하는 학생 대표들과 공개토론을 한 것을 보면, 그는 낭만적이고 수준 있는 정치인이었던 것 같다. 요즘 보수정당에는 그런 정치인이 보이지 않는다.

≫ 1961~1962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오히라 일본 외상과 협상 끝에 '무상 3억달러, 정부차관 2억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 이상'을 일본이 제공하는 것으로 청구권에 대한 합의를 이루었다. 1963년 9월 25일 중앙정보부는 반공법 위반, 내란음모죄, 내란선동죄를 적용해 서울에 군 병력을 투입했다. 1,000여 명이 체포되고 350명이 뇌란죄와 소요죄로 구속당해 박정희 정부와 2년 넘게 투쟁을 벌였던 청년들은 '63세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학생운동 리더로 명성이 높았던 인물로는 "김중태, 손학규, 이재오, 김덕룡, 현승일, 이명박, 정대칠, 이부영, 서청원, 박관용, 하순봉, 김경재" 등이다. 그 때 거리시위에 참여했던 20대 청년들이 70대 고령층이 되어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청옹성처럼 지키고 있다.

≫ 1979년 10월 26일 서울 궁정동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을 쐈다. 김재규 부장의 군법회의 진술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사태(시민시위)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했으니 총살됐지 내가 발포 명령을 하면 누가 날 총살하겠느냐" 라는 말에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 300만명이나 죽었는데 우리가 100~200만 죽는다고 뭐가 문제냐"며 맞장구 쳤다. 김종필은 이것은 민주혁명이며 5.16이 정당하다면 이것도 정당하다고 주장했지만 1980년 5월 24일 교수대에 올랐다.


■ 유시민이 말하는 한국 경제


≫ 국민경제를 비행기라고 생각하자. 4.19와 5.16이 연이어 일어난 1960년대 초 한국경제는 시동을 걸지 못한 비행기였다. 연료도 활주로도 없다. 1972년 무렵, 비행기는 가속도를 붙이면서 활주로를 달렸다. 10.26 사건이 난 1979년에는 바퀴가 땅을 차고 오른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가파른 상승은 1997년 갑자기 끝이 났다. IMF 경제위기였다. 1999년 반등한 한국 경제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불안정하지만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였다. 2008~2009년의 하락은 부동산대출 전문 금융회사들의 파산으로 시작된 미국발 국제금융위기와 환율관리 실패때문이었다. 현재 고도를 되찾았지만 예전과 같은 상승세는 회복하지 못했다.

≫ 경제성장만큼은 독재, 권위주의, 보수정권이 민주, 자유주의, 진보정권보다 더 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위 그림은 이것이 실증적 근거가 없는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한국 경제는 박정희 정권 때 이륙했다. 그런데 1인당 국민소득의 상승폭은 민주화 이후 10여 년 동안이 그 이전보다 더 컸다. 1979~1980 / 1997년 외환위기, 2008~2009년의 금융위기는 모두 보수정권이 일으켰다. 결국 보수와 진보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잘했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는 것이다.

≫ 국가가 주도하는 계획경제가 러시아공산당의 작품인 것은 박정희대통령에겐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유시민의원은 인간 박정희가 아무 '주의자'도 아니었다고 본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반공주의, 군국주의, 자유주의 그 어떤 이념도 그를 사로잡지 못했다. 박정희는 이승만 박사와 달리 자유주의 이념에 갇히지 않았다. 박정희 시대 한국 경제는 자본주의 선진국과 제국주의의 일본,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을 반씩 닮은 체제였다. 사유재산을 인정하면서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를 결합한 혼합형 경제체제였다. 오늘날 중국의 경제체제도 그와 비슷하다. 중국관료들이 한국 경제 발전과정을 연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담당자들이 '경제개발 7개년계획'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계획 경제는 공산당이 하는 짓이라고 생각한 탓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념적 편견에 사로잡혀 경제발전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역할을 내팽개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저지른 잘못 중, 가장 어리석다고 할 수 있다. 대중의 물질적 욕망을 외면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 유시민이 말하는 한국 경제의 발전

≫ 전통적 경제이론에 따르면 생산의 필수 요소는 자본과 노동력이다. 영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선진국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이 과제를 해결했다. 첫째는 봉건적 특권을 자본화하는 것이다. 농민들이 가지고 있떤 경작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해 토지의 특권을 소유권으로 전환했다. 양모 값이 오르자 농민들을 영지에서 추방했다. 쫓겨난 농민들은 도시로 이주해 노동자가 되었다. 둘째는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수탈이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등 산업국이 군사력으로 정복해 부와 노동력, 자원을 약탈하여 자본을 축적했다.

≫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실정에서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을 채택했다. 우리는 자본화할 특권이 존재하지 않았고 다른 나라를 수탈할 수도 없으며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동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자본을 해외에서 차입하고 기업으로 하여금 폭리를 취하여 자본의 축적을 이룬 것이다. 박정희 정권 때 일재의 착취와 수탈, 학살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3억 달러라는 헐값에 넘겨주었다. 정부는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하는 '기생관광'을 공공연하게 허용했다.

 한국 경제는 시장경제체제가 아니었다. 대한민국에는 자본시장과 금융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외국이나 한국은행에서 돈을 빌려 만든 투자재원을 정부가 기업에 직접 나누어주었다. 정부의 실체는 박정희 대통령과 측근 참모였다. 기업은 정부에 줄을 대지 못하면 자금을 받을 수 없었다. 특혜가 있는 곳에는 부패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재벌체제가 탄생했다. 현대그룹 정주영, 선경그룹 최종현, 삼성그룹 이병철은 그런 일에 빼어난 능력을 발휘한 사람들이었다. 재벌 총수들은 대통령과 권력실세들에게 통치자금을 넉넉하게 바쳤다.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IMF의 표준 처방전은 심한 부작용을 야기했다. 민간가계의 소비지출과 기업의 투자지출이 급감해 경기가 곤두박질한 상황에서 정부마저 재정지출을 축소하자 경기는 더 악화되었다. 기업의 차입경영 거품을 뺀다며 이자율을 사채금리 수준으로 올리는 바람에 일시적 유동성 부족에 빠진 기업들이 쓰러졌다. 주식가격이 바닥인 상황에서 강제한 공기업 민영화는 심대한 국가자산 손실을 낳았다.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이름 아래 기업이 노동자를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게 허용하는 정리해고제를 도입했고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연봉제와 성과급 제도를 확산시켰다. 노동조합은 약화되었고 실질임금이 하락했으며 고용불안은 높아졌다.


■ 유시민이 말하는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립

◀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

≫ 김영삼, 이철승과 3파전을 벌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역전승을 거둔 김대중 후보는 미,일,중,소 4대국의 한반도 평화보장론, 3단계 통일론, 자립경제와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대중경제론으로 의제를 선점했으며 향토예비군과 학생 군사교육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정책선거를 보여주었다. 김대중 후보는 "이번에도 정권교체를 못하면 박정희씨의 영구집권 총통시대가 오는 것" 이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김대중 후보의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 당시 김대중 후보는 90만 표 차이로 졌다. 공무원을 동원한 관권선거와 금품 살포, 군 부재자 부정투표, 야당 참관인 매수와 부정 투개표 등 만만치 않은 부정선거를 고려하면 사실상 김대중 후보가 이긴 선거라고 할 수도 있었다. 선거에서 이긴 박정희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했으며 헌법 효력을 정지시키고 비상국무회의가 국회 기능을 대신하게 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반쪽 민주주의에서 완전한 독재국가로 전락했다.

≫ 1973년 8월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졌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이 매우 성가신 인물이었다.


■ 유시민이 말하는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 위의 위인들에 대한 내용 정리는 필자는 다른 책에서 정리할 예정이다. 

 나의 한국현대사에서는 양김(김영삼,김대중) 그리고 전두환과 노태우 대통령의 정권장악과 독재. 노무현대통령의 스스로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1.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 약칭 반민특위(反民特委)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본제국과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악질적으로 반민족적 행위를 한 자를 조사하기 위하여 제헌국회에서 설치한 특별위원회이다. 제헌국회에서는 1948년 9월 7일 국권강탈에 적극 협력한 자, 일제치하의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박해한 자 등을 처벌하는 목적으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켰다. 반민특위는 그 산하에 배치되어 있는 특별경찰대를 활용, 일제시대의 악질기업가였던 박흥식, 일제를 옹호하여 조국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던 최남선·이광수 등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는 등 민족정기를 흐리게 했던 많은 친일매국분자들을 색출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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