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4년 신의주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대학에 다니면서 기생과 결혼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했다. 해방 후 남조선국방경비대 장교로 임관하여 포병사령부 소속 포병소위가 되었고 1947년에 서북청년회에 가입했다.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 서재에서 백범 김구를 권총으로 암살하였다
■ 당시 백범김구선생의 비서였던 선우진
백범 김구 비서 선우진 1992년 ~ 2009년 5.17일
≫ 1949년 6월 26일, 시간 12시 45분경 안두희는 백범김구선생을 살해했다. 당시 김구선생의 비서였던 선우진은 당시 정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 당시 기록
“안두희(安斗熙) 소위가 왔습니다.”
“그래. 들어오라 해.”
그 즉석에서 허락하시므로 그를 선생님 거실로 들여보낸 때가 12시 30분께였다. 아래층으로 내려올 때 응접실에서는 라디오 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곧 지하실로 가서 선생님의 오찬 준비 상황을 알아보았다. 식모는 “네, 만둣국을 다 끓여가요”라고 했다.
주방에서 아줌마의 말을 듣는 순간 윗 층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동이 났다. 1층으로 뛰어올라가 다시 2층 백범 선생 방으로 뛰어오르던 나는 층계에서 한 손에 들었던 권총을 떨어뜨리며 “내가 선생님을 쏘았소” 하는 흉측한 모습의 안두희를 만났다.
허둥지둥 방으로 뛰어올라간 나는 “선생님, 이게 어인 일입니까” 하며 울부짖었으나 유혈이 낭자한 채 책상에 엎드린 선생은 말씀이 없으셨다. 순식간의 참변이었다. 아직 체온이 식지 않은 선생을 다다미방으로 모시고 이웃해 있는 적십자 병원에 의사를 부르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1층으로 다시 내려오니 비서진들에게 얻어맞은 범인 안은 쓰러져 있고 경비실에서 연락을 받은 경찰이 달려와서 그를 데려 가려는데 그 시간을 기다렸다는 듯 정체 모를 군인들이 떼 지어 몰려와 범인이 군인이란 이유로 저격범 안두희를 바람같이 쓰리쿼터로 끌고 갔다. 불과 2,3분 사이의 암살 음모공작 현장이었다.
▲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한 김구
■ 안두희는 왜 백범을 암살하였는가?
≫ 지금까지 백범 암살을 보는 시각은 네 가지다. 1. 첫째 반민특위 활동에 위협을 느끼는 친일파들이 생존의 돌파구로 친일파 숙청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백범을 암살했다는 설.2. 둘째 이승만 대통령에게 아부하는 과잉충성분자들이 이 대통령의 뜻과는 관계없이 정적이라고 생각되는 백범을 암살하고 권력을 농단하기 위해 암살했다는 설.3. 동, 서의 냉전질서가 구축되면서 미국이 한반도에서 배타적 지배권을 구축하고 이승만 체제의 통치 질서의 안정을 위해 남, 북협상을 주창한 백범을 암살했다는 설.4. 배후에서 리모트 컨트롤 하는 세력과는 별개로 북에서 월남한 극단주의자를 대표한 안두희의 소영웅주의적 망상에서 비롯된 단독범행설이다.
■ 백범 암살 그 이후의 안두희
≫ 암살 이후 특무대에 연행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석 달 뒤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1950년 7월 10일 육군 포병소위로 복직하고 9월 15일 중위로 진급하였다. 1951년 2월 15일 잔형 면제를 받고 12월 15일 대위로 진급, 그뒤 1953년 2월 15일에 완전 복권되었으며 1953년 12월 15일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1953년 완전 복권되었으나, 여러 차례 신변의 위협을 당했다.
≫ 그 후, 안두희의 동향 친구인 양구 주둔 26사단 사단장 이기건의 배려로 콩나물과 두부 납품을 시작했다 (반공포로로 6․25때 월남한 26사단장 전속부관 S씨 증언)
≫ 1959년 일본에서 벌어진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을 보면 이때에도 국군 소속의 특무 기관원으로 활동하고 있던것으로 보아, 서류상으로는 전역했지만 실제로는 계속 육군 정보요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김구 선생 살해 진상조사위원회가 발족되자 잠적하였다가 1961년 해당 단체의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게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풀려났다. 1965년 김구를 추종하던 곽태영에게 목을 찔린 다음에 가까스로 살아나서 이후 약 10년 동안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은거했다1992년 2월 28일에 김구 선생의 묘소를 강제(로 끌려가서) 참배하기도 하였다. 이 참배에서 그는 자신의 범행이 어디까지나 우발적인 단독 범행이었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 안두희를 살해한 시민 박기서
≫ 범행 시점인 1996년 당시 박기서는 47세로 부천 소신여객 버스 기사였다. 그는 1995년 권중희의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를 읽은 뒤 범행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살인의 동기는 민족정기를 해친 사람이 천수를 누리면 안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길이 40cm 정도의 홍두깨에 매직으로 '정의봉' 이름을 썼고 근처 문방구에서 장난감 총을 구입한 뒤, 사전답사했던 안두희의 집에 침입해 안두희의 부인을 묶고 자리에 누워있던 안두희를 죽을 때까지 정의봉으로 때려 살해했다. ≫ 오마이뉴스에서는 그를 여러번 인터뷰했는데 본인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죽일 생각이었으나 막상 대면하고 보니 나이들고 힘없는 노인이어서 주저하는 사이에 안두희 눈을 보았는데 매우 날카롭고 기회를 노리는 눈빛이었다고 한다. 순간, 잘못하면 자기가 당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범행에 이르렀다 범행 직후 본인이 다니던 성당에 가 고해성사를 하였다.
■ 범행 직후의 박기서
≫ 당연히 뉴스에도 보도되었고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일단은 물증, 계획성, 고의성, 자백 등이 모두 완벽하게 있는 확신범이자 살인자였으므로 버스회사에서도 해고되었고 구속 상태에서 재판에 회부되었다. 가족들도 평소 그가 그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면서 매우 당혹스러워 했다.
≫ 초기 8년 구형에 5년이 선고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법정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살인죄의 법정 최저형량이 5년임을 감안하면 징역 3년은 엄청난 선처를 한 것이다. 당시 대법원이 형량을 결정한 취지를 '박기서의 살인행위는 주관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지나 우리나라 법질서 전체 관점으로 볼 때에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라고 밝혔는데, 표현상 원칙을 고수한 것처럼 보이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결국 법조계가 박기서의 행위에 면죄부를 준 게 아니냐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98년 3월 1일 3.1절 대사면 때 대상자에 포함되어 3월 13일 수감 1년 5개월만에 출소하였다. ≫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사회 각계 단체 및 개인들이 박기서의 처단을 응원하는 취지에서 격려금과 편지들을 보냈다. 초등학생인 아들이 다니던 태권도학원 관장이 수업료를 면제해주고, 백범기념사업회에서 그의 아내에게 취업자리를 알선해 주기도 했다. 본인은 익명의 누군가에게 출소할 때까지 매달 백만 원씩을 받았다고도 한다. 출소 후에도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자리, 집 등을 제공받아서 출소 이후에는 택시 기사가 되었다.
■ 박기서에 대한 개인적으로 떠들기
≫ 그는 살인자다. 법적으로 살인은 용서받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정당하다고 했을 때 나는 옹호하고 싶다. 시민 박기서를 살인자라고 한다면 안중근 의사는 살인마인가? 안중근 의사 또한 사람(이토 히로부미)을 살해했다. 당시 20년 이상의 일제강점기를 맞은 나라에서 임시정부와 독립을 위해 싸운 행위를 일반인들은 일본인들은 20살 아래의 학생/시민들은 그들을 테러리스트라고 할 수도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독립을 위해 싸운 위인들 모두 살인자인가? 대한민국은 왜 그분들께 건국훈장을 주었는가? 내 생각엔 시대적 이념이, 현재의 가치관이 그를 살인자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 다시 한번 우리나라가 식민지가 됬을 때, 그 식민지가 20년 이상 지속되었을 때 박기서 시민과 같이 행동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자를 영웅으로 위인으로 칭송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개인적으로 매우 존경하는 분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알고있는 역사책의 한국현대사가 아니라 나의 한국현대사라는 것이다. 보수진형에서 읽어본다면 꽤 반론이 많을 수 있는 내용들이 많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유시민의원께서 이 책을 쓰기 위해 정말 많은 문헌을 참고했고 그 노력이 읽는 내내 보였다. 어느 기사 참고부터 다른 책, 인물사 등을 샅샅이 뒤져보고 쓴 것이 보였다. 읽으면서 다시 한번 역사를 알아야 현재를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학생때는 그렇게 싫어하던 역사를 지금 나이에 다시 읽으면서 왜 선생님들은 이렇게 재미있게 설명해주지 않았을까 또는 내가 그만큼 관심이 없었나? 라는 회의감에 잠시 젖어본다.
■ 목차
1. 역사의 지충을 가로지르다 : 1959년과 2014년의 대한민국
2. 4.19와 5.16 난민촌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
3. 경제발전의 빛과 그늘 : 절대빈곤, 고도성장, 양극화
4. 한국형 민주화 :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한 민주주의 정치혁명
5. 사회문화의 급진적 변화 : 단색의 병영에서 다양성의 광장으로
6. 남북관계 70년 : 거짓 혁명과 거짓 공포의 적대적 공존
■ 왜 읽었는가?
≫ 개인적으로 매우 존경하는 분, 글도 잘 쓰시고 말쏨씨도 뛰어나며 서민의 편에서 나라를 생각하는 몇 안되는 분이기 때문에
≫ 필자는 한국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높다. 특히 과거 한국대통령들의 일대기가 궁금했다. 50년이 길다면 길고 멀다면 멀겠지만 가까운 역사인 만큼 현재가 보일 것이라 생각한다.
■ 내 마음대로 책 내용 3줄 요약
≫ 유시민이 말하는 한국근현대사이다. 그의 정치적 성향이 들어가있으며 개인적으로는 진보성향에 가깝고 그렇게 받아들이며 읽혀진다.
≫ 북한과 대한민국의 흐름, 당시 대통령들의 상황과 유시민의 추론이 들어가며 이승만부터 현재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유시민의원님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 대한민국 현대사를 만든 힘은 욕망이였다. 생리적, 안전, 소속감과 사랑, 자기 존중, 자아실현의 5가지 욕망이다.
≫ 1959년 이승만 대통령은 조봉암을 법살했다. 청년 시절 열혈 공산주의자로서 투옥과 고문을 당하고 반일투쟁과 노동운동을 벌였던 죽산 조봉암은 해방 후 공산당과 결별했다. 정치에 투신해 국회의 헌법기초위원으로 제헌헌법을 만드는 데 기여, 대한민국 첫 농림부장관이 되었다. 그는 '북진통일론'을 비판하고 '평화통일론'을 주장한 죄로 교수형을 당했으며, 사형집행 임석검사에게 말했다. "나는 공산당도 간첩도 아니오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 져서 정치적 이유로 죽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할 것이오" 1959년 대한민국은 목숨을 걸지 않고는 권력의 불의에 대항하거나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행사할 수 없는 나라였다.
≫ 북한은 '미제 식민지 남조선의 해방'을 공공연히 주장하고 전쟁까지 일으켰지만 대한민국은 오로지 자기를 지키는 데 급급했다. 이승만 정부는 '북진통일', '멸공통일'을 외쳤지만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일재 잔재를 청산하지 않았으며 헌법이 명시한 민주주의를 실현하지도 않았다.
≫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북위 38도선 남북을 각자 점령한 미국과 소련에 있다. 애초에 자기 힘으로 광복을 이루지 못한 것은 우리의 부족함 탓이었다. 그렇다고 분단의 책임을 우리민족에게 묻는 것은 강도 피해자에게 범죄의 책임을 지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 유시민이 말하는 한국을 만든 힘
≫ 대한민국 현대사를 만든 힘은 5가지 욕망이였다. 안보국가 > 발전국가 > 민주국가 >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것은 인류의 문명사에서 보편적인 국가의 '계통 발생'이다. 국가의 진화는 '욕망의 위계'를 반영한다.
안전에 대한 욕망 : 사람은 두려움, 불안, 혼돈을 싫어한다. 사회성 동물인 인간은 법과 사회제도를 만들어 이 욕망을 충족하려 한다.
소속감과 사랑에 대한 욕망 : 사람은 고립과 소외를 싫어한다. 혼자서는 행복해질 수 없기에 계모임, 동창회, 향우회, 동호회를 만들고 강력한 귀속감을 부여하는 공동체는 국가다.
자기 존중의 욕망 : 우린 남에게 존경받고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인식할 때 기쁨과 만족을 얻는다. 남에게 인정받으려면 눈에 보이는 업적을 내야한다. 재산, 지위, 헌신, 학식과 같은 것이다.
자아실현의 욕망 : 자기 본성에 충실하고 잠재성을 실현함으로써 최고 정점에 도달하려는 욕망이다. 이 욕망을 충족하려면 원하는 인생을 설계하고, 그 인생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고대 그리스와 중국에서 훌륭한 삶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남긴 사람은 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귀족과 지식인 계급이었다.
민주주의는 경제가 발전해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된 곳일수록 성공적으로 자리잡았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나라일수록 삶의 의미를 찾고 자아를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철학서가 많이 출간되고 읽힌다.
■ 유시민이 말하는 이승만
(제1대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 이승만 박사는 1919~1925년까지 임시정부 대통령을 할 정도로 널리 인정받는 독립운동가였다. 투쟁보다는 외교에 치중한 나머지 힘도 없는 국제연맹에 조선을 위임통치해달라고 청원했다가 탄핵을 당해 임시정부를 떠났다. 그는 강대국 정부에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 일에 주력, 특히 미국 정부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했으며 1940년엔 일본이 미국을 침략할 것임을 경고하는 책을 출간해 미국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미리 승인해두지 않으면 독립하면서 소련의 손아귀에 들어가 동아시아 전체가 공산화될 것이라고 미국 정부와 국민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태평양에서 일본과 싸우는 데 소련의 협력이 필요했던 미국은 임시정부를 승인하면 소련 공산당을 자극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여 청원을 거절했다.
≫ 해방 후, 공산화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통일국가로 가는 길, 북한을 공산주의자들에게 주고 남한은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있었다. 후자의 대표자가 이승만 박사였다. 독재, 부패, 부정 선거를 저지르고 수많은 시민을 살상했지만 그는 분단국가를 세움으로써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확실하게 막았다. 하지만 아무리 빛나는 이념을 내세운다고 해도 사회 구성원 다수가 인정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나라의 국민이 기꺼이 받아들일 때, 국가의 결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복종할 때, 공동체를 지키려고 헌신하려는 태도를 보일 때, 그 국가는 정통성 있는 국가가 되며 자연스럽게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다.
≫ 이승만 정부는 절대빈곤에 빠진 국민의 경제생활을 개선하지 못했다.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제조업, 광업, 전력 등 일제강점기 산업의 중심지는 북한이었기 떄문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이며 정치인, 이승만을 비롯해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 김일성과의 라이벌 구도도 있었다고 함)
≫ 김구 선생을 비롯한 중도파들이 분단을 막으려고 38선을 넘나들며 협상을 벌이는 동안 이승만 박사는 분단국가의 권력을 장악할 준비를 했다. 이승만은 통일정부를 만드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면 분단을 막겠지만 통일국가의 권력을 공산주의자에게 뺏길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손을 잡았다. 자발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했다가 광복 후 '친미', '반공'의 깃발을 들고 살아남은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당시 반민특위[각주:1]는 682명을 조사해 559명을 특별검찰에 송치했다. 1949년 1월 반민특위가 노덕술을 체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을 즉각 석방하고 반민특위 관계자를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노덕술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해 고문했던 일제 특고형사가 아니라 반공정신으로 공산당을 때려잡는 대한민국의 경찰관이라는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반민특위 해체와 정부요인 암살 음모를 꾸몄다가 실패하자 특위활동에 앞장선 젊은 국회의원들을 간첩으로 몰아 구속했다. 이 사건으로 반민특위가 해체되는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국회는 1951년 반민법을 폐지한다. 처벌받은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 정부, 국회, 권력기관, 경제, 문화계에도 친일행위를 한 장본인이 권력을 쥐는 경우는 이제 거의 없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이 민족사적 정통성을 결여한 채 출발한 이유와 과정을 엄정하게 평가하고 철학적으로 소화하는 것뿐이다.
■ 유시민이 말하는 박정희
◀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서울시청 앞에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 소장
≫ 1961년 박정희 소장이 3,500여 명의 무장병력을 이끌고 헌법적 권한과 기능을 폭력으로 정지시키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혁명공약의 핵심은 두가지였다. 국가 자립경제 재건에 총력을 기울여 기아선상에 방황하는 민생고를 해결함으로써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과업을 이루면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는 것이다. '민생고 해결'은 아마도 박정희 소장의 진심이였을 것이지만 '병영복귀' 약속은 의도적인 거짓말이었다.
≫ 혁명과 쿠데타를 구분하는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쿠데타는 혁명과 달리 민중의 동의, 지지와 참여가 없이 폭력으로 국가질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행위이다. 군대를 동원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군사쿠데타다.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운영을 잘해서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고 해도 5.16이 군사쿠데타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 그는 국민의 관심과 지지를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부정선거를 저질렀던 내무부장관 최인규, 정치깡패 이정재, 조폭 두목 신정식, 발포 명령을 내린 대통령 경호실장 곽영주 등을 '혁명재판'에 회부해 사형을 확정한 다음 거리에 끌어내 '조리돌림'을 했다. 북한 인민재판이나 중국 문화대혁명 때 벌어진 것과 비슷한 야만행위였지만, 헌법과 법률의 절차를 지키느라 재판 절차를 지지부진하게 끌어가던 정부와 비교하면 당시 국민의 눈높이에서는 한결 속 시원한 응징이었다.
≫ 폭력으로 권력을 탈취했지만 폭력으로만 통치하지는 않았다. 고속도로와 비행장을 비롯한 사회간접자본을 건설, 전국에 상하수도와 전기를 보급했고 기생충과 전염병을 퇴치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결코 고결한 인간은 아니었으나 독재자로서는 크게 성공한 것이다.
≫ 1975년 5.13일 박정희 대통령은 유언비어 날조 유포, 헌법에 대한 부정,반대,왜곡,비방과 헌법개정 청원 선전/선동 등을 모두 처벌대상으로 규정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지 않으면 누구든 범죄가가 될 수 있었다. 1979년 10월까지 구속된 사람은 1,400명이었고 그중 1,000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정부는 대학생들을 대거 제적하고 감옥과 병영으로 보냈으며 대학교수와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언론자유수호투쟁을 벌인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함으로써 정부에 굴복했다.
≫ 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하는 시민들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대상은 사실 그의 인격과 행위가 아니라 그 시대를 통과하면서 시민들 자신이 쏟았던 열정과 이루었던 성취, 자기자신의 인생일 것이라고 유시민의원은 추측한다
■ 유시민이 말하는 김종필
≫ 박정희 참조들 가운데 가장 중요 인물은 김종필이었다. 1963년 공화당 당의장이 되었으며 2004년까지 9번이나 국회의원을 했다. 박정희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까지 40여 년 동안 정권의 '2인자' 역할을 했다. 1963년 고려대학교에서 강연을 한 데 이어 서울대 문리대에 가서 학생들과 토론회를 했다. 군사쿠데타의 주역이며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사람이 반정부투쟁을 하는 학생 대표들과 공개토론을 한 것을 보면, 그는 낭만적이고 수준 있는 정치인이었던 것 같다. 요즘 보수정당에는 그런 정치인이 보이지 않는다.
≫ 1961~1962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오히라 일본 외상과 협상 끝에 '무상 3억달러, 정부차관 2억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 이상'을 일본이 제공하는 것으로 청구권에 대한 합의를 이루었다. 1963년 9월 25일 중앙정보부는 반공법 위반, 내란음모죄, 내란선동죄를 적용해 서울에 군 병력을 투입했다. 1,000여 명이 체포되고 350명이 뇌란죄와 소요죄로 구속당해 박정희 정부와 2년 넘게 투쟁을 벌였던 청년들은 '63세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학생운동 리더로 명성이 높았던 인물로는 "김중태, 손학규, 이재오, 김덕룡, 현승일, 이명박, 정대칠, 이부영, 서청원, 박관용, 하순봉, 김경재" 등이다. 그 때 거리시위에 참여했던 20대 청년들이 70대 고령층이 되어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청옹성처럼 지키고 있다.
≫ 1979년 10월 26일 서울 궁정동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을 쐈다. 김재규 부장의 군법회의 진술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사태(시민시위)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했으니 총살됐지 내가 발포 명령을 하면 누가 날 총살하겠느냐" 라는 말에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 300만명이나 죽었는데 우리가 100~200만 죽는다고 뭐가 문제냐"며 맞장구 쳤다. 김종필은 이것은 민주혁명이며 5.16이 정당하다면 이것도 정당하다고 주장했지만 1980년 5월 24일 교수대에 올랐다.
■ 유시민이 말하는 한국 경제
≫ 국민경제를 비행기라고 생각하자. 4.19와 5.16이 연이어 일어난 1960년대 초 한국경제는 시동을 걸지 못한 비행기였다. 연료도 활주로도 없다. 1972년 무렵, 비행기는 가속도를 붙이면서 활주로를 달렸다. 10.26 사건이 난 1979년에는 바퀴가 땅을 차고 오른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가파른 상승은 1997년 갑자기 끝이 났다. IMF 경제위기였다. 1999년 반등한 한국 경제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불안정하지만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였다. 2008~2009년의 하락은 부동산대출 전문 금융회사들의 파산으로 시작된 미국발 국제금융위기와 환율관리 실패때문이었다. 현재 고도를 되찾았지만 예전과 같은 상승세는 회복하지 못했다.
≫ 경제성장만큼은 독재, 권위주의, 보수정권이 민주, 자유주의, 진보정권보다 더 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위 그림은 이것이 실증적 근거가 없는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한국 경제는 박정희 정권 때 이륙했다. 그런데 1인당 국민소득의 상승폭은 민주화 이후 10여 년 동안이 그 이전보다 더 컸다. 1979~1980 / 1997년 외환위기, 2008~2009년의 금융위기는 모두 보수정권이 일으켰다. 결국 보수와 진보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잘했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는 것이다.
≫ 국가가 주도하는 계획경제가 러시아공산당의 작품인 것은 박정희대통령에겐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유시민의원은 인간 박정희가 아무 '주의자'도 아니었다고 본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반공주의, 군국주의, 자유주의 그 어떤 이념도 그를 사로잡지 못했다. 박정희는 이승만 박사와 달리 자유주의 이념에 갇히지 않았다. 박정희 시대 한국 경제는 자본주의 선진국과 제국주의의 일본,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을 반씩 닮은 체제였다. 사유재산을 인정하면서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를 결합한 혼합형 경제체제였다. 오늘날 중국의 경제체제도 그와 비슷하다. 중국관료들이 한국 경제 발전과정을 연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 담당자들이 '경제개발 7개년계획'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계획 경제는 공산당이 하는 짓이라고 생각한 탓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념적 편견에 사로잡혀 경제발전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역할을 내팽개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저지른 잘못 중, 가장 어리석다고 할 수 있다. 대중의 물질적 욕망을 외면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 유시민이 말하는 한국 경제의 발전
≫ 전통적 경제이론에 따르면 생산의 필수 요소는 자본과 노동력이다. 영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선진국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이 과제를 해결했다. 첫째는 봉건적 특권을 자본화하는 것이다. 농민들이 가지고 있떤 경작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해 토지의 특권을 소유권으로 전환했다. 양모 값이 오르자 농민들을 영지에서 추방했다. 쫓겨난 농민들은 도시로 이주해 노동자가 되었다. 둘째는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수탈이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등 산업국이 군사력으로 정복해 부와 노동력, 자원을 약탈하여 자본을 축적했다.
≫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실정에서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을 채택했다. 우리는 자본화할 특권이 존재하지 않았고 다른 나라를 수탈할 수도 없으며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동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자본을 해외에서 차입하고 기업으로 하여금 폭리를 취하여 자본의 축적을 이룬 것이다. 박정희 정권 때 일재의 착취와 수탈, 학살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3억 달러라는 헐값에 넘겨주었다. 정부는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하는 '기생관광'을 공공연하게 허용했다.
≫ 한국 경제는 시장경제체제가 아니었다. 대한민국에는 자본시장과 금융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외국이나 한국은행에서 돈을 빌려 만든 투자재원을 정부가 기업에 직접 나누어주었다. 정부의 실체는 박정희 대통령과 측근 참모였다. 기업은 정부에 줄을 대지 못하면 자금을 받을 수 없었다. 특혜가 있는 곳에는 부패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재벌체제가 탄생했다. 현대그룹 정주영, 선경그룹 최종현, 삼성그룹 이병철은 그런 일에 빼어난 능력을 발휘한 사람들이었다. 재벌 총수들은 대통령과 권력실세들에게 통치자금을 넉넉하게 바쳤다.
≫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IMF의 표준 처방전은 심한 부작용을 야기했다. 민간가계의 소비지출과 기업의 투자지출이 급감해 경기가 곤두박질한 상황에서 정부마저 재정지출을 축소하자 경기는 더 악화되었다. 기업의 차입경영 거품을 뺀다며 이자율을 사채금리 수준으로 올리는 바람에 일시적 유동성 부족에 빠진 기업들이 쓰러졌다. 주식가격이 바닥인 상황에서 강제한 공기업 민영화는 심대한 국가자산 손실을 낳았다.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이름 아래 기업이 노동자를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게 허용하는 정리해고제를 도입했고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연봉제와 성과급 제도를 확산시켰다. 노동조합은 약화되었고 실질임금이 하락했으며 고용불안은 높아졌다.
■ 유시민이 말하는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립
◀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
≫ 김영삼, 이철승과 3파전을 벌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역전승을 거둔 김대중 후보는 미,일,중,소 4대국의 한반도 평화보장론, 3단계 통일론, 자립경제와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대중경제론으로 의제를 선점했으며 향토예비군과 학생 군사교육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정책선거를 보여주었다.김대중 후보는 "이번에도 정권교체를 못하면 박정희씨의 영구집권 총통시대가 오는 것" 이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김대중 후보의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 당시 김대중 후보는 90만 표 차이로 졌다. 공무원을 동원한 관권선거와 금품 살포, 군 부재자 부정투표, 야당 참관인 매수와 부정 투개표 등 만만치 않은 부정선거를 고려하면 사실상 김대중 후보가 이긴 선거라고 할 수도 있었다. 선거에서 이긴 박정희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했으며 헌법 효력을 정지시키고 비상국무회의가 국회 기능을 대신하게 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반쪽 민주주의에서 완전한 독재국가로 전락했다.
≫ 1973년 8월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졌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이 매우 성가신 인물이었다.
■ 유시민이 말하는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 위의 위인들에 대한 내용 정리는 필자는 다른 책에서 정리할 예정이다.
≫ 나의 한국현대사에서는 양김(김영삼,김대중) 그리고 전두환과 노태우 대통령의 정권장악과 독재. 노무현대통령의 스스로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 약칭 반민특위(反民特委)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본제국과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악질적으로 반민족적 행위를 한 자를 조사하기 위하여 제헌국회에서 설치한 특별위원회이다. 제헌국회에서는 1948년 9월 7일 국권강탈에 적극 협력한 자, 일제치하의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박해한 자 등을 처벌하는 목적으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켰다. 반민특위는 그 산하에 배치되어 있는 특별경찰대를 활용, 일제시대의 악질기업가였던 박흥식, 일제를 옹호하여 조국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던 최남선·이광수 등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는 등 민족정기를 흐리게 했던 많은 친일매국분자들을 색출하였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