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덕술 1899년 ~ 1968년 4월 1일


■ 노덕술 그는 누구인가?

 ≫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경찰 간부. 경상남도 울산 출신으로 창씨개명 한 일본 이름은 마쓰우라 히로(松浦鴻). 

진보든 보수든 양쪽에서 친일파로 공인된 인물이며,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 그의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고등계 형사 겸 친일 경찰이었으며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친일파 경찰에서 수도경찰청 간부로 활약하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반공 투사"라고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 고등계 형사로 악질 친일경찰로 유명했는데, 불령선인으로 찍힌 항일 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 취조하는 데에 앞장섰으며 고문치사한 사람까지 나왔고, 고문 취조를 통한 건수 올리기로 일사천리로 승진가도에 올랐다. 어찌나 악랄했던지 민중들 사이에도 친일 고문 경찰=노덕술이라고 인식될 정도. 장택상은 차라리 이 사람보단 양반이라고 인식될 정도다
 ≫ 해방 이후 잠시 평양 경찰서장을 맡고 있던 중 공산주의 세력에게 체포되어 몇 달간 구금되었다가 1945년 말에 월남하였고, 다음해에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의 반이승만 세력 숙청, 좌익분자 검거를 주도하였다. 장택상과 더불어 여운형 암살 배후로 거론되기도 한다.
 ≫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바가 있었으나 반민특위 해체로 풀려나 경찰직 복귀 이후에도 대한민국 경찰직에서 고위간부로 지내는 등의 호사를 누렸다.

■ 노덕술의 생애
 ≫ 1899년 6월 1일 경상남도 울산군 장생포에서 태어났다. 일설에는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울산으로 이주했다고도 한다. 경상남도 울산 보통학교 2년을 다니다 중퇴하고, 그 후 일본인이 경영하던 잡화상의 고용인으로 근무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홋카이도에서 취직을 위해 머물렀다.
 ≫ 귀국 후 경찰관에 지원하여 1920년에 경남에 있는 순사교습소에 지원하여 6월 경상남도 순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순사교습소를 수료한 후, 같은 달 경찰부 보안과 순사로 근무하다가 1922년경 경상남도 울산경찰서 사법계 순사부장으로 재직했다. 1924년 12월 도경부 및 도경부보고시에 합격한 후, 같은 달 경부보로 승진하여 경상남도 의령경찰서 경부보, 1926년 4월 거창경찰서 경부보를 지냈으며, 1927년 12월 동래경찰서 경부보로 전근해 사법주임을 지냈다 
 ≫ 1932년 7월 경부로 승진하여 울산경찰서 경부로 전근했다가 같은 해 8월 다시 경기도 경성부 본정경찰서(오늘날 서울 명동) 경부로 옮겨 사업주임을 지냈다.
 ≫ 1933년 2월 인천경찰서 경부, 1934년 2월 양주경찰서 경부, 1938년 11월 개성경찰서 경부로 전근해 사법주임을 지냈다.

■ 노덕술의 만행
 ≫ 동래경찰서 경부보로 재직 중이던 1928년 10월 동래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및 신간회 동래지회 간부로 활동하던 박일형을 체포하여 고문했다. 같은 해 겨울에는 부산제이상업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동맹휴교사건을 수사하다가 동맹휴교의 배후에 '혁조회'라는 반일단체가 있음을 알고 혁조회 관련자인 김규직, 유진흥 등을 체포하여 고문했다. 김규직은 고문 후유증으로 1929년 12월 옥사했다. 같은 해 12월 조선공산당사건과 관련하여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의 제보를 받고 보통학교 교원을 체포하여 심문했다.
 ≫ 1929년 8월 동래유학생학우회 주최로 조선인 일본유학생들이 동래유치원에서 개최한 강연회의 강연 내용이 일본정치를 비난하는 등 내용이 불순하다고 강연자들을 체포하여 심문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문재순, 추학, 차일명등이 주도하여 광주학생운동 관련자 석방 등을 주장하며 동맹휴학을 일으키자 부하들을 지휘하여 관련자들을 체포하는 한편, 체포된 학생들에게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 1931년 경상남도 통영 경찰서 경부보로 전근해 사법주임을 지냈다. 통영경찰서 경부보로 재직 중이던 1932년 5월 노동운동가 김재학을 '메이데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체포하여 고문했다.


■ 노덕술의 광복이후
 ≫ 1945년 8월부터 평안남도 평양경찰서 서장을 맡고 있다가 소련군이 진주하자, 이내 곧 공산주의 세력에게 체포되어 몇 달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1945년 말에 월남을 하게 된다. 다음해 1946년에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부의 '반이승만 세력' 숙청, '좌익분자' 검거 등을 주도하였다.
 ≫ 1946년 1월 경기도 경찰부 수사과장에, 9월 제1경무총감부 관방장 겸 수도관구 경찰청 수사과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4월, 당시의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를 암살한 한현우 등을 검거함으로써 장택상을 비롯한 경찰 수뇌부들의 인정을 받았다.
 ≫ 1948년 7월,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저격 혐의로 체포된 박성근을 고문치사 시킨 후 시신을 한강에 투기한 혐의로 경무국 수사국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다가 석방되었다
 ≫ 1949년 1월 24일,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백민태라는 청부업자를 고용하여 '반민특위 간부들을 암살하라.'고 지시한 음모가 알려지면서 사실이 밝혀졌다.
 ≫ 이틀 뒤,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노덕술은 반공투사다. 그를 풀어줘라.'라고 그의 석방을 요구했고, 반민특위는 석방을 거절했으나 얼마 안가 대통령 이승만과 내무차관 장경근의 주도하에 조작된 국회프락치 사건, '6.6 반민특위 습격사건' 등으로 반민특위는 와해되었고, 노덕술은 풀려나게 되어 경기도 경찰부 보안주임으로 영전한다.
 ≫ 헌병 중령으로 변신하여 1950년에는 육군 본부에서 범죄수사단장으로 근무하는 등 대공업무를 담당하였으며, 1955년 서울 15범죄수사대 대장을 지냈다. 1955년, 부산 제2육군범죄수사단 대장으로 재임 시의 뇌물수뢰 혐의로 그 해 11월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징역 6개월을 언도받으면서 파면되었다.
 ≫ 1956년 이후 고향 울산으로 내려가 칩거 생활하면서 지내다가 1960년 7월 제5대 국회의원(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1968년 4월,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병사했다.

■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53년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
 ≫ 2002년 2월 28일, 국회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에서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 명단'을 발표했다. 이로써 1949년 반민특위 해체 이후 53년만에 친일파 문제를 공론화시킨 것이다. 미군정 하에서 친일파 청산의 기회를 놓쳤지만, 1948년 온 국민의 열망과 관심 속에서 '만민특위(반민족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가 만들어졌을 때만 해도 친일파를 척결하고 민족정기를 수립할 수 있다는 기대가 가득했다. 그러나 1949년 6월 6일, '특위 습격 사건'으로 인해, '반민특위'는 사실상 와해되었고 일제 청산의 과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말았다.
 ≫ 반민특위에 의해 전격 체포되었던 친일경찰 노덕술, 그는 '일경의 호랑이'로 악명이 높았으나 해방 이후 수도경찰청 수사국장으로 중용되었으며, 이후 1948년 10월 '반민특위 위원 암살 사건' 모의를 주도하는 등의 악행을 계속했다. 이렇게 일제 시대 고문경찰이었던 그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으면서 전봉덕, 이익흥 등의 친일 경찰 세력들과 함께 독재정권의 핵심 역할을 했다.
 ≫ 2002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53년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에서는 대표적인 친일경찰 노덕술을 통해 이 시대 친일파 청산의 문제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이유를 찾아본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영상을 참고하면 되겠다.



출처 및 참고 : 나무위키, 위키백과, 노덕술-노재봉(http://blog.daum.net/kim0909/18288291)


■ 안두희의 백범김구 암살

안두희 1917년 ~ 1996년 10.23일

 : 1934년 신의주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대학에 다니면서 기생과 결혼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했다. 해방 후 남조선국방경비대 장교로 임관하여 포병사령부 소속 포병소위가 되었고 1947년에 서북청년회에 가입했다.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 서재에서 백범 김구를 권총으로 암살하였다


■ 당시 백범김구선생의 비서였던 선우진

백범 김구 비서 선우진 1992년 ~ 2009년 5.17일

 ≫ 1949년 6월 26일, 시간 12시 45분경 안두희는 백범김구선생을 살해했다. 당시 김구선생의 비서였던 선우진은 당시 정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 당시 기록

“안두희(安斗熙) 소위가 왔습니다.”

“그래. 들어오라 해.”


그 즉석에서 허락하시므로 그를 선생님 거실로 들여보낸 때가 12시 30분께였다. 아래층으로 내려올 때 응접실에서는 라디오 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곧 지하실로 가서 선생님의 오찬 준비 상황을 알아보았다. 식모는 “네, 만둣국을 다 끓여가요”라고 했다.


주방에서 아줌마의 말을 듣는 순간 윗 층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동이 났다. 1층으로 뛰어올라가 다시 2층 백범 선생 방으로 뛰어오르던 나는 층계에서 한 손에 들었던 권총을 떨어뜨리며 “내가 선생님을 쏘았소” 하는 흉측한 모습의 안두희를 만났다.


허둥지둥 방으로 뛰어올라간 나는 “선생님, 이게 어인 일입니까” 하며 울부짖었으나 유혈이 낭자한 채 책상에 엎드린 선생은 말씀이 없으셨다. 순식간의 참변이었다. 아직 체온이 식지 않은 선생을 다다미방으로 모시고 이웃해 있는 적십자 병원에 의사를 부르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1층으로 다시 내려오니 비서진들에게 얻어맞은 범인 안은 쓰러져 있고 경비실에서 연락을 받은 경찰이 달려와서 그를 데려 가려는데 그 시간을 기다렸다는 듯 정체 모를 군인들이 떼 지어 몰려와 범인이 군인이란 이유로 저격범 안두희를 바람같이 쓰리쿼터로 끌고 갔다. 불과 2,3분 사이의 암살 음모공작 현장이었다.



▲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한 김구



■ 안두희는 왜 백범을 암살하였는가?

≫ 지금까지 백범 암살을 보는 시각은 네 가지다. 

1. 첫째 반민특위 활동에 위협을 느끼는 친일파들이 생존의 돌파구로 친일파 숙청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백범을 암살했다는 설.

2. 둘째 이승만 대통령에게 아부하는 과잉충성분자들이 이 대통령의 뜻과는 관계없이 정적이라고 생각되는 백범을 암살하고 권력을 농단하기 위해 암살했다는 설.

3. 동, 서의 냉전질서가 구축되면서 미국이 한반도에서 배타적 지배권을 구축하고 이승만 체제의 통치 질서의 안정을 위해 남, 북협상을 주창한 백범을 암살했다는 설.

4. 배후에서 리모트 컨트롤 하는 세력과는 별개로 북에서 월남한 극단주의자를 대표한 안두희의 소영웅주의적 망상에서 비롯된 단독범행설이다.


■ 백범 암살 그 이후의 안두희

 ≫ 암살 이후 특무대에 연행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석 달 뒤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1950년 7월 10일 육군 포병소위로 복직하고 9월 15일 중위로 진급하였다. 1951년 2월 15일 잔형 면제를 받고 12월 15일 대위로 진급, 그뒤 1953년 2월 15일에 완전 복권되었으며 1953년 12월 15일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1953년 완전 복권되었으나, 여러 차례 신변의 위협을 당했다.

 ≫ 그 후, 안두희의 동향 친구인 양구 주둔 26사단 사단장 이기건의 배려로 콩나물과 두부 납품을 시작했다 (반공포로로 625때 월남한 26사단장 전속부관 S씨 증언)

 ≫ 1959년 일본에서 벌어진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을 보면 이때에도 국군 소속의 특무 기관원으로 활동하고 있던것으로 보아, 서류상으로는 전역했지만 실제로는 계속 육군 정보요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김구 선생 살해 진상조사위원회가 발족되자 잠적하였다가 1961년 해당 단체의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게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풀려났다. 1965년 김구를 추종하던 곽태영에게 목을 찔린 다음에 가까스로 살아나서 이후 약 10년 동안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은거했다

1992년 2월 28일에 김구 선생의 묘소를 강제(로 끌려가서) 참배하기도 하였다. 이 참배에서 그는 자신의 범행이 어디까지나 우발적인 단독 범행이었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 안두희를 살해한 시민 박기서

 ≫ 범행 시점인 1996년 당시 박기서는 47세로 부천 소신여객 버스 기사였다. 그는 1995년 권중희의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를 읽은 뒤 범행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살인의 동기는 민족정기를 해친 사람이 천수를 누리면 안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길이 40cm 정도의 홍두깨에 매직으로 '정의봉' 이름을 썼고 근처 문방구에서 장난감 총을 구입한 뒤, 사전답사했던 안두희의 집에 침입해 안두희의 부인을 묶고 자리에 누워있던 안두희를 죽을 때까지 정의봉으로 때려 살해했다. 

≫ 오마이뉴스에서는 그를 여러번 인터뷰했는데 본인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죽일 생각이었으나 막상 대면하고 보니 나이들고 힘없는 노인이어서 주저하는 사이에 안두희 눈을 보았는데 매우 날카롭고 기회를 노리는 눈빛이었다고 한다. 순간, 잘못하면 자기가 당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범행에 이르렀다 범행 직후 본인이 다니던 성당에 가 고해성사를 하였다.


■ 범행 직후의 박기서

≫ 당연히 뉴스에도 보도되었고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일단은 물증, 계획성, 고의성, 자백 등이 모두 완벽하게 있는 확신범이자 살인자였으므로 버스회사에서도 해고되었고 구속 상태에서 재판에 회부되었다. 가족들도 평소 그가 그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면서 매우 당혹스러워 했다.

≫ 초기 8년 구형에 5년이 선고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법정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살인죄의 법정 최저형량이 5년임을 감안하면 징역 3년은 엄청난 선처를 한 것이다. 당시 대법원이 형량을 결정한 취지를 '박기서의 살인행위는 주관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지나 우리나라 법질서 전체 관점으로 볼 때에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라고 밝혔는데, 표현상 원칙을 고수한 것처럼 보이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결국 법조계가 박기서의 행위에 면죄부를 준 게 아니냐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98년 3월 1일 3.1절 대사면 때 대상자에 포함되어 3월 13일 수감 1년 5개월만에 출소하였다. 

≫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사회 각계 단체 및 개인들이 박기서의 처단을 응원하는 취지에서 격려금과 편지들을 보냈다. 초등학생인 아들이 다니던 태권도학원 관장이 수업료를 면제해주고, 백범기념사업회에서 그의 아내에게 취업자리를 알선해 주기도 했다. 본인은 익명의 누군가에게 출소할 때까지 매달 백만 원씩을 받았다고도 한다. 출소 후에도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자리, 집 등을 제공받아서 출소 이후에는 택시 기사가 되었다.



■ 박기서에 대한 개인적으로 떠들기

≫ 그는 살인자다. 법적으로 살인은 용서받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정당하다고 했을 때 나는 옹호하고 싶다. 시민 박기서를 살인자라고 한다면 안중근 의사는 살인마인가? 안중근 의사 또한 사람(이토 히로부미)을 살해했다. 당시 20년 이상의 일제강점기를 맞은 나라에서 임시정부와 독립을 위해 싸운 행위를 일반인들은 일본인들은 20살 아래의 학생/시민들은 그들을 테러리스트라고 할 수도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독립을 위해 싸운 위인들 모두 살인자인가? 대한민국은 왜 그분들께 건국훈장을 주었는가? 내 생각엔 시대적 이념이, 현재의 가치관이 그를 살인자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 다시 한번 우리나라가 식민지가 됬을 때, 그 식민지가 20년 이상 지속되었을 때 박기서 시민과 같이 행동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자를 영웅으로 위인으로 칭송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 및 출처 : 나무위키, 노컷뉴스(http://m.nocutnews.co.kr/news/4055084), 미래한국(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525), 우남 이승만과 건국사(http://cafe.daum.net/syngmanrhee/D9pI/109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