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5월 24일, 삼성그룹의 계열사 한국비료(현재 삼성정밀화학)가 사카린 2259포대(약 55톤)을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가 들통이 난 밀수 사건. 뒤늦게 경향신문의 폭로로 이 사실이 드러나자 부산 세관은 1059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천만원을 부과하였다.
사실상 중앙정보부의 비호아래 독재정권의 비자금 조달용 사업이었다는 설이 있다. 삼성은 밀수사카린을 팔아서 비자금을 조성하고, 이중에 일부 밀수를 눈감아준 정권에 상납한다는 시나리오. 이 시절 일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지금도 명확한 진실이 밝혀진건 없다. 다만 이병철 회장의 장남인 이맹희는 훗날 정권의 묵인아래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한 일이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가 삼성그룹 및 이병철 회장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진술이 크게 신빙성을 갖지는 못한다. 그외에 관계자들은 일절 침묵하고 있다.
- 이맹희의 삼성그룹 회장 승계
(이맹희 1931 ~ 2015년)
1993 제일비료 회장
1968 제일제당 대표이사 부사장
1968 삼성전자 부사장
1968 삼성물산 부사장
이 사건의 여파로 이병철 삼성 회장은 한국비료(현재 삼성정밀화학)와 대구대(현재 영남대학교)를 국가에 헌납하고 은퇴를 선언하면서 삼성그룹 회장을 포함한 모든 지위에서 물러났다. 삼성그룹 회장은 이병철의 장남인 이맹희가 승계하였다.
- 이건희의 삼성그룹 회장 승계
(이건희 1942 ~)
2010 삼성전자 회장
.... 삼성복지재단, 대표이사 외 (참고 : http://goo.gl/cn03YA)
1987 삼성그룹 회장
1979 삼성그룹 부회장
1979 삼성물산 부회장
하지만, 이병철이 은퇴를 선언한지 2년만에 컴백하고 이뱅희는 아버지로부터 팽당하고 후계자 자리는 셋째인 이건희 에게 양도하였다. 이 과정에서서 둘째 이창희도 같이 숙청, 이맹희는 그 이후 삼성의 경영에 일절 관여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병철 사후 CJ그룹에서의 유산상속 과정에서도 이맹희를 건너뛰고 이맹희의 장남인 이재현 그 다음에 이맹희의 처제이던 손경식에게 제일제당(현재 CJ) 이 할당되었다. 지금도 불거지는 삼성그룹과 CJ그룹간의 갈등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 인분투척 사건
1965 국회부의장
1960 제 5대 민의원
1957 민주장 중앙위원회부위원장
1950 제 2대 민의원
1965 제6대 한국독립당 용산구 국회의원
1954 제3대 민의원,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최고위원, 대한 민주청년연맹 부위원장, 한국독립장 재정위원, 대한학도의용군 참모장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이때까지만 해도 막무가내인 김두한의 행동을 보며 다른 의원들은 재밌어하는 분위기 였다고 한다.
시간이 없어서 나는 대통령이 나왔으면 호되게 한 번 따지고 싶지만 국무총리가 여기 대통령을 대리하고 여기 장관이 나와 있으니까 나는 이 사람을 내각으로 보지 않고 오늘날 삼 년 몇 개월 동안 부정과 불의를 하는 것을 합리화를 시켜버린 하나의 피고로서 오늘 이 시각서부터 다루겠습니다. (의원들이 웃었다고 기록되었다) 이것이 도적질해 먹는…국민의 모든 재산을 도적질해서 합리화하고…합리화시키는 이 내각을 규탄하는 국민의…(이때쯤 똥보따리를 꺼내 단상에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국민의 사카린이올시다. 그러니까 이 내각은 고루 고루 맛을 보여야 알지…(이 시점에 똥보따리를 풀어 헤친 것으로 추정된다) 똥이나 처먹어 이 새끼들아!!!
순식간에 인분을 뒤집어쓴 국무위원들의 비명과 진동하는 인분 냄새로 국회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회의는 바로 중단. 이날 김두한의 정면에 앉아있던 국무총리 정일권이 인분 세례에 직격당하며 양복은 물론 시계까지 냄새가 배어 결국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정일권 총리를 위시한 내각이 총사퇴를 선언했고, 김두한은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구속 수감되었다.
(박정희 1917 ~ 1979)
1963~1979 대한민국 대통령
1963 민주공화당 총재
1962 대통령 직무대행
1961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1950 ~ 1960 대한민국 육군
박정희 정권은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여론이 몹시 안 좋았던 상태였기 때문에, 김두한 여론을 반전시키려 노력했으나 대부분은 김두한이 깡패는 깡패지만 이번 일은 잘했다 정도였으므로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당연히 신민당은 쾌재를 부르며 김두한을 옹호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으며, 김두한을 자기네 당으로 영입하였다. 덕분에 김두한은 정치 인생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정당에서 당적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아주 잠깐 자유당에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김두한은 늘 군소정당이나 무소속을 떠돌아 다녔다.
김두한은 7대 국회의원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 이후 얼마지나지 않은 1972년 고혈압으로 생을 마감했다.
참고로 현재 사카린은 발암물질도 아니고, 인체에 암을 유발하는 물질이 아니라는 조사결과가 나왔다죠.
참고 URL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38833&cid=48180&categoryId=48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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