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 테슬라 (1856. 7. 10. ~ 1943. .1 7.)
관련글 : [인물, 아인슈타인] 핵 발전과 우주과학의 창시자, 아인슈타인.
■ 나의 한마디
≫ 테슬라는 내용을 정리하지 않는 천재다. 그가 생각한 기발한 생각 중, 바닷물에서 전기를 뽑아내는 계획과 땅 속 깊은 곳의 열을 끌어내는 지열 발전소에 대한 밑그림이 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기술들을 이미 테슬라는 100년전에 계획하고 실현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가 시대를 잘 타고났다면 그는 우리의 영웅일테고, 스마트폰처럼 작은 것이 아닌 더 큰 시장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느낀 또 다른 것은 에디슨의 독재다. 현재 인물사에서의 에디슨은 계란을 품은 창의성 높은 천재 과학자이지만, 비효율적인 직류시스템과 돈에 집착한 과학독재자다.
■ 목차
1. 될성부른 나무
2. 전기의 시대, 두 사람의 천재
3. 전류 전쟁
4. 무선 통신
5. 번개를 만드는 남자
6. 워든클리프 프로젝트
7. 테슬라 터빈과 하늘을 나는 스토브
8. 잊혀가는 천재
9. 꺼지지 않는 불꽃
- 콜로라도스프링스 연구소의 테슬라
■ 왜 읽었는가?
≫ 현대 전기의 직류를 발명한 에디슨과 교류를 발명한 테슬라와의 전류 전쟁에 관심이 생겨서
≫ 100년을 앞선 천재 과학자 테슬라, 그가 미래에서 온 것이 아니냐는 소문에 관심. 우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외계문명을 받아들인 사람은 아닐까
■ 내 마음대로 책 내용 3줄 요약
≫ 니콜라테슬라는 28살, 에디슨은 37살로 테슬라가 꿈을 안을 때 에디슨은 천재 발명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에디슨이 채택한 방식은 '직류' 고 테슬라는 '교류' 다.
≫ 직류(에디슨) VS 교류(테슬라)와의 싸움 중, 승리는 교류가 차지했다.
≫ 테슬라는 기득권층(에디슨, 마르코니, JP모건)의 방해와 투자 비협조에 잊혀진 비운의 천재연구가다.
■ 발명왕 에디슨, 교류는 니콜라 테슬라
≫ 전구와 축음기등을 발명한 발명왕 ‘에디슨’ 하지만 애석하게도 에디슨이 ‘아니다’. 에디슨의 이름에 가려진 또 한 사람의 천재, 오늘날 전력 시스템의 기초가 된 교류 전기 시스템을 만든 니콜라 테슬라이다.
≫ 한 수업 시간에 선생은 학생들에게 전력이 전달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그람 다이너모’라는 직류 발전기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 기계가 구동되는 동안 정류자 1와 브러시 2로 인해 전기 스파크가 발생하는 것을 보고, 테슬라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교류 방식의 기계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테슬라는 전기 스파크가 튀지 않는 모터를 연구하기 위해 이듬해 전과를 했고, 결국 수년 후 이때의 생각을 기초로 교류 전기 장치들을 만들어 낸다.
≫ 직류 방식은 전류 방향과 전압을 변화시킬 수 없었지만, 교류 전류는 전류 방향과 전압을 자유롭게 변화시킬 수 있었다. 직류는 전압이 일정하여 안정적인 전기를 발생시키지만 전압 변환의 문제로 인해 많은 곳에 발전소를 필요로 했다. 교류 시스템은 고전압으로 전기를 발생시킨 다음 변전소를 거쳐 순차적으로 전압을 낮추고, 각 사용처에 변압기를 통해 저전압의 전기를 공급하는 방식이었다. 때문에 직류보다 원거리에 전기를 공급하는 것이 유용했고, 발전소를 많이 건설하지 않아도 되었다.
■ [테슬라VS에디슨] 과학 독재자 에디슨,교류시스템은 불안정해~ 대세는 직류란다
≫ 테슬라는 에디슨과 인사를 하자마자 교류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이미 교류 유도 모터를 두 차례 제작한 끝에 직류보다 교류 시스템이 월등하다는 것을 입증한 후여서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에디슨은 단칼에 그의 말을 잘랐다. “교류 시스템은 불안정하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미국 땅에 직류를 공급하고 있어.” 에디슨으로서는 이 청년이 달가울 리 없었다. 발명과 연구에는 큰 돈이 들었기 때문에, 에디슨은 늘 투자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 “천재는 99퍼센트의 노력과 1퍼센트의 영감으로 만들어진다.”라는 말을 남겼을 만큼 에디슨은 실험에 실험을 거듭하여 하나의 완성품을 만들어내는 유형이었다. 반면 테슬라는 머릿속 사고를 통해 기계를 작동시키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를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그가 한 일이라고는, 그리 좋지 않은 그림 실력으로 기초적인 도안을 그려낸 것뿐이었다. 반면 타고난 스토리텔러였던 에디슨은 자신의 발명품을 홍보하는 데 매우 탁월했는데, 테슬라는 전형적인 공학도로 자신의 연구에만 관심이 있었다.
≫ 에디슨은 교류 시스템이 안전하지 않다고 주장 3했다. 테슬라와 웨스팅하우스 사의 교류 시스템이 사용된다면 6개월 안에 죽는 사람이 나올 것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는 대대적으로 교류를 비난했다. 다음은 한 기고문이 실린 내용이다. “치명적인 교류 사용에 대한 유일한 변명은 교류 회사들이 구리 전선에 드는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회사들이 이익을 ‘조금 더 챙기려고’ 사람들을 계속 ‘갑작스러운 죽음의 위협’ 속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 1891년 5월 20일, 테슬라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열린 미 전자기협회 모임에서 교류 전류의 안전성을 보여주는 실험을 했다. 테슬라는 먼저 전기 공작실에 고주파 교류 발전기를 설치하고 이를 전기 모터로 가동시켰다. 그리고 관중들 앞에서 스위치를 이용해 교류 발전기를 작동시켜 손에 들고 있던 유리관에 불을 밝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유리관이 백열등만큼 밝게 빛났지만 필라멘트도 없고, 선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즉 필라멘트가 없는 새로운 전구와 무선 장치를 소개한 실험이었다. 테슬라는 무선으로 교류 발전기에서 만들어지는 주파수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마술을 선보였다.
≫ 테슬라는 놋쇠 공 두 개를 진동 변압기 양 끝에 하나씩 갖다 댔다. 그리고 전류가 자신의 몸을 통과해 반대쪽 놋쇠 공으로 흐르게 했다. 두 단자 사이의 전류는 25만 볼트였다. 전류가 표피 효과로 인해 신체 표면에만 머무른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4
≫ 테슬라관에서 테슬라는 다양한 시연을 선보였다. 20만 볼트가 넘고 1초당 100만 번 진동하는 전기를 손을 통과해 받아 보였으며, 전선이 연결되지 않은 진공구들과 유리관들로 불을 밝혀 보였다. 그 결과 1893년 10월, 나이아가라위원회는 나이아가라 폭포에 건설될 수력 발전소에 사용할 시스템으로 웨스팅하우스 사와 계약을 맺었다. 전기 산업을 두고 펼쳐진 전류 전쟁은 테슬라와 웨스팅하우스의 승리로 끝났다. 바야흐로 교류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 테슬라의 특허권 포기, 그는 전형적인 연구자였다
≫ 웨스팅하우스는 자금난을 겪고 있었는데, 투자자들은 테슬라에게 지급될 천문학적인 특허료가 사업에 위험이 된다면서 추가 투자를 하지 않겠다고 선고했다. 테슬라는 이에 특허료 권리를 모두 포기해 주었다. 하지만 이 일은 결과적으로 고주파 고전압 변압기인 테슬라 코일 외에 각종 교류 장치에 테슬라의 이름이 붙지 않게 된 원인이 되었다. 1905년 테슬라의 교류 모터 특허 기한이 만료되면서 수많은 업체가 교류 모터를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 1898년 테슬라는 무선 어뢰정도 구상했다. 테슬라는 군인을 태우지 않고 적의 눈에 띄지 않게 공격할 수 있는 이 장치야말로 혁신적인 전쟁 무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간 장치들이었던 탓인지, 해군에서는 이 무기들은 연구소의 작품일 뿐 활용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 테슬라가 무선 통신을 제어하기 위해 개발한 회로 중에는 오늘날의 거의 모든 컴퓨터 제어 기술의 바탕이 되는 것들도 많다. 그 중 1903년의 특허 하나는 AND 논리 회로 소자의 기본 원리가 포함된 것으로, 입력단자가 2개 이상의 신호를 받아서 하나의 출력신호를 만들어내는 장치이다. 이 장치는 1956년 트렌지스터 개발 5보다 앞선 기술이었다.
≫ 테슬라가 한 실험들은 인류의 기술 발전에 중대한 기여를 할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론과 실험들을 증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방식으로 확실히 정리하고 발표하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가 잊힌 천재가 된 데는, 또 수많은 특허권 소송에 시달린 데는 이런 요인도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테슬라는 전형적인 연구자였다. 연구를 즐기고 그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을 즐겼던 사람으로, 그는 자신의 발명품으로 인류를 발전시킬 것을 꿈꿨고, 그 공로를 인정받는 데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웨스팅하우스 사의 교류 특허를 포기한 것도 그렇고, 마르코니가 무선 통신 분야에서 먼저 인정을 받을 때도 그 사실보다 워든클리프 탑 완공에 더 관심을 두었다. 라이트 형제보다 먼저 비행기 고속 엔진을 개발했음에도 처음에는 특허조차 출원하지 않았다.
≫ 테슬라는 연구 끝에 200만 마력을 내는 터빈을 만드는 데까지 성공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기존의 산업 구조가 새로운 터빈으로 교체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이 들기 때문에 투자자들은 쉽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터빈은 오늘날에 와서야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비행기에 프로펠러를 달아 수직으로 이착륙하고, 테슬라 터빈이 설치되어 추진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비행기는 활주로 없이 어디서든 이착륙이 가능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수직 이착륙 개념조차 알지 못했다.
≫ 테슬라가 제안한 레이더 개발 계획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나 이루어졌다. 테슬라가 레이더의 원리를 공표한 지 15년이나 지나서였다. 공식적으로 1935년 영국의 로버트 왓슨와트에 의해 개발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테슬라가 레이더에 대한 개념을 떠올린 것은 30년도 더 이전이다. 테슬라가 레이더 원리를 개발하고 이를 활용한 무기 개발을 촉구했던 것도 이로부터 20여 년 전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레이더는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전 세계적으로 전시의 기초 방어 수단이 되었고, 전쟁 후에는 민간 항공 및 해운업계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수십 년 후에는 우주 탐사의 필수 요소가 된다.
≫ 오늘날 기술들은 테슬라의 연구들을 바탕으로 무선 통신 기술과 자동화 시스템이 개발된 것을 비롯해, 많은 실험 성과들이 테슬라가 제안했던 아이디어들에 자극을 받아 이루어졌다.
- 정류자 : 전류의 방향을 바꾸어주는 장치 [본문으로]
- 브러시 : 일종의 연결 장치 [본문으로]
- 에디슨의 주장을 위한 실험 : 에디슨은, 개나 고양이를 1천 볼트짜리 전압이 흐르는 금속판 위에 밀어 넣어 감전사시키는 실험을 시연하곤 했다. 1890년에는 고전압을 발생시키는 교류의 위험성을 보여주기 위해 사형수를 전기의자에 앉히는 실험까지 시도했다. 하지만 전기기술자의 실수로 인해 전기가 너무 약해 사형수가 한 번에 죽지 않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사형수는 여러 차례 전기 충격을 받아 산 채로 구워졌다. 에디슨은 이것이 자신의 승리라고 주장했다. [본문으로]
- 전류 표피 효과 : 도선에 흐르는 전류 주파수가 높아짐에 따라 단면 전체를 균일하게 흐르지 않고 표면 가까이에 모여 흐르는 현상 [본문으로]
- 1956년 트랜지스터 개발로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들 : 존 바딘(John Bardeen), 월터 브래튼(Walter Houser Brattain), 윌리엄 쇼클리(William Bradford Shockley Jr.) 허나, 1903년 AND 논리회로 개발한 테슬라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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